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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고서 11회차에 만난 사람과 마을.
진안고원길 이어걷기 일곱 번째부터는 옛 용담현 지역을 걷고 있다.
용담현은 현재 진안군의 북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쉽게 말하면 정천면·주천면·용담면·안천면·동향면과 상전면 일부지역을 포함한다.
금강의 본류가 북으로 흘러가는 상전과 안천 용담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금강을 향해 흘러드는 주자천·안자천·정자천·양악천 등 큰 하천과 수많은 작은 개울들이 모여 드는, 진안고원에서는 비교적 저지대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농경지도 넓고 일찍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기 좋았던 곳이다.
‘일찍부터’라 함은 청동기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문명의 증거는 단연 고인돌이다.
고인돌 외에도 수많은 고분과 주거지 흔적 등이 있는데, 용담댐을 건설하기 직전에 곧 수몰될 유적들을 모두 발굴조사하여 사진으로라도 남겨두려는 활동을 몇 년에 걸쳐 실시했다.
이를 ‘구제(救濟)발굴’이라 하는데 너무나 큰 비용이 드는 탓에 ‘구제’된 유물은 얼마 없는 것이 아쉽다.
그 중 아주 적은 일부인 정천면 모정리 여의곡(여시골, 여우골)에 있던 최대의 지석묘 집단 중 몇 기가 용담호생태공원에 옮겨져 있고, 또 다른 일부는 태고정 건물과 함께 언덕 위로 옮겨져 있을 뿐, 대부분의 유적현장은 수몰되었다.
저수지의 수위가 낮아지는 시기에만 기슭에 가까운 구역의 것들이 조금 육안으로 보일 뿐이다.
(아래 : 노온마을을 지나면서.)
(위 : 용담댐 공도교로 올라오기 직전. 계단의 왼쪽 아래에 고인돌 옮겨 놓은 곳이 있다. 우리는 보지 않고 지나쳐 왔지만.)
이렇게 일찍부터 풍요로움을 구가하던 지역이었으니 용담현은 남쪽으로 인접한 진안현이나 섬진강 상류역인 마령현보다 컸고, 북쪽으로 이웃한 무주부에서마저도 ‘용담으로 장보러 다니던 길’이라는 의미의 ‘용담거리’가 있을 정도였다.
사회문화적 수준에서도 월등하여 많은 문인과 양반들이 벼슬을 그만 두면 용담으로 내려와 살았다.
주천면의 김중정은 조청전쟁(병자호란) 당시 친명(親明)을 주장하다가 실각하여 내려와 살면서 주자천·명도봉·명덕봉 등 산천의 이름을 명국(明國)을 따서 지었다. 이는 물론 ‘모화(慕華)’사상의 발로로서 현대의 역사관으로는 반드시 훌륭한 행동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훨씬 후대의 이덕응도 대한제국 황실과 주권이 왜에 농락 당하기 시작하던 시절 주천면으로 낙향, 화양도원을 짓고 주민들에게 전통사상으로 무장된 항일정신을 교육했다.
이덕응과 같은 시기 김용배 등은 금강불교(또는 칠성교)라는 민족종교를 창시하여 천도교의 최제우 등과 함께 항일운동에 투신했다.
용담면의 현령 홍석(17세기)은 삼천서원을, 조정(15세기)은 태고정 등을 지어 빼어난 경관을 활용하면서 인성을 함양하는 교육에 힘썼다. 삼천서원은 거유(巨儒) 송시열마저 후원했던, 근동에서 가장 큰 서원이었다고 전한다.
그러한 고장답게 용담현 지역은 비록 수몰로 많은 면적이 사라졌으나 아직도 반촌(班村)의 기상과 흐름은 남아있어 곳곳에 고색창연한 유물과 풍습을 보존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걸었던 안천면 지역의 구실[九谷, 굴고개, 구실재], 진등[長登], 중배실[中梨], 아랫배실[下梨], 보안[輔韓], 안터[安基] 들도 그 중의 하나다.
진등마을의 75세 된 이장(이름?)의 어릴 때 들은 이야기들이 재미있다.
말잔등처럼 생긴 ‘진등재’ 아래에 있다 하여 마을 이름이 진등[長登].
쇠말봉은 “쇠로 된 말(‘말’은 ‘말뚝’의 전북 방언)이 배를 묶는 곳인데 이 산(쇠말봉)에서 저쪽 산으로 배를 타고 건너다닐 일이 곧 생길 거라는 이야기를 어릴 때 어른들에게서 들었다”며,
그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용담댐 건설)이 현실로 생기지 않았느냐고.
“쇠로 된 말을 묻었기에 쇠말봉이라 한다”느니 하는 것은 ‘지어낸 이야기’라 한다.
현재 마을의 뒤쪽에 삼각형으로 오똑 솟은 봉우리는 ‘돌갓[石갓]’이라 불렀단다. ‘석갓’이 한자화하여 ‘석가봉’이 되었다고.
(장등마을 회관 앞에서 남쪽으로 바라보며. 이 작은 언덕이 진등재. 이 언덕 너머에 원래 진등마을이 있었다.)
(장등마을회관 뒤로 보이는 뾰족한 산이 석갓 또는 석가봉 또는 굴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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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으로 굴고개[구실재]가 있었고 그 고개 아랫마을이 굴실(‘ㄹ’이 탈락하여 ‘구실’, 즉 구곡),
지금 ‘樂’으로 쓰고 있는 삼락(三樂)리의 이름은 원래 세(3)골의 물이 떨어져 안자천으로 합해지는 곳이라 하여 ‘삼락(三落)리’라 했었다 한다.
지장골의 옛이름은 ‘회친골’.
이 이름도 “용담호에서 잡은 고기를 회친골에서 회를 쳐 먹게 된다는 예언적 이름이 아니냐”고 감탄한다.
‘옹장골’의 이야기도 들었으나 어디를 말하는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혹시 도라실 못 미처에 있는 옹골 즉 ‘옹기장이골’이 아닐까?
장등에서 점심 먹고, 도라실을 지나 중배실마을로 넘어왔다.
도라실 들어가는 계곡을 낀 흙길이 최근에 아스팔트도로로 바뀐 것이 많이 아쉽지만 주민 편의를 위하는 일에 걷는 사람 좋자고 가타부타 할 형편은 못 될 듯.
도라실은 여전히 깊숙이 숨어있는 마을이었다. 사람을 만나는 일도 없었다.
중배실은 백화리 여러 마을 중 가장 크다. 비교적 평지를 차지하고 있어 그런 것일 것이다.
조선초기의 명재상 황희의 초상을 모신 사당이 있고, 오래된 돌담과 축대가 있다.
늙은 느티나무가 마을입구를 지킨다.
한 집의 커다란 널판 문에 ‘箕五福 華三祝(기오복 화삼축)’이라 써붙인 축문 종이가, 비록 바래고 떨어졌으나 지난 날 ‘잘나가던’ 집안의 위엄을 보여주는 듯.
황희의 후손 장수 황씨들이 지켜낸 마을답다.
(아랫배실 동구나무)
아랫배실을 지나 보안마을로 넘어간다.
이 나지막한 고개는 오약고개라 하는데, ‘오얏[李]고개’로 잘못 알아듣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오약쪽(왼쪽의 전북 사투리)’에 있다 하여 오약고개다.
재미있지 않은가, 어디를 중심으로 왼쪽이라는 것인지.
아마도 안천면의 큰 마을이었던 보안·시장·안터 등에서 배실로 넘어갈 때 왼쪽으로 보이는 고개였기에 그렇게 불리지 않았을까. 큰 동네가 주도권을 가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기 때문이다.
보안마을은 원래 ‘보(洑)의 안쪽’에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인데 발음이 비슷한 보한(輔韓)으로 바꾼 것은 청주 한씨.
일족이 많이 살다보니 ‘한씨를 보필하는 터전’ 이라는 뜻으로 바꾼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와 같은 형태의 지명과 변천은 여러 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꼭 같은 ‘보안[洑內]’마을이 무주 구천동 남대천 북쪽에 있는데 역시 같은 뜻에서 붙은 이름이 그 후에 ‘보안(保安)’으로 바뀐 것.
안보를 최상의 국정목표로 내세워 정치권력 유지를 목적으로 했던 군사정부 시절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닌지 입맛이 씁쓸한 변개(變改)다. 평화로운 산골마을 이름이 ‘保安’이라니, 듣기조차 생소하고 거북하다.
‘담안·울안’의 뜻인 ‘장내(또는 장안)리’는 가까운 곳만 해도 무주군 안성면, 전봉준의 생가마을 정읍 이평면 장내리, 보은군 장안면 장안리 등 셀 수 없이 많다.
청주 한씨의 조상은 기자조선의 왕인 기자(箕子).
보안마을에 그의 후손이 기자의 초상을 모신 소박한 사당을 지키고 있었다고 들었다.
여전한지 궁금하다.
단군조선의 존재마저 믿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 때문에 단군조선을 이어받은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등이 설 자리가 없던 지난 수백 년.
가문의 자긍심을 그렇게라도 드러내야 했던 의도는 이해해 주어야 할까.
아니면, 이웃한 곳에 죽산 안씨들의 세거지가 안터[安基]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자 경쟁적으로 그렇게 바꾸었을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구곡마을에서 장등으로 넘어가는 길목 ‘청주한씨 세천비’가 있는 언저리, 용담호의 수면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그들의 묘역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
안천면은 그렇게 안씨, 황씨, 허씨, 한씨들이 명문세가를 이루며 지역의 발전에 힘써 왔던 곳이다.
보한도 안기도 모두 용담호에 수몰된 후, 떠나지 않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면사무소 일대에 신시가지를 이루어 옹기종기 산다.
그러고 보면 조금 더 높은 곳에 있은 덕분으로 노성리의 동남쪽 구역 노채마을과 신괴리의 지사 등 마을들이 그렇게라도 남아있는 것이 다행스럽기만 하다.
다른 한 면으로는 ‘수몰에 따른 이주’의 변혁을 겪지 않아 피동적으로나마 생활양식과 사고혁신의 계기를 얻지 못했다는 시각도 있다.
신(新) 보한마을 옆 높은 곳에 세워진 망향의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던 옛 마을길은 최근의 최대담수로 모두 물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다음 주에는 노채마을 뒤 갈티재를 넘어 용담현의 또 하나의 면, 동향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도라실을 나오면서 남쪽으로 향하는 긴 내리막길. 화살표=갈티재?)
(최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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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용담댐아래 지석묘 사진입니다..ㅋ
안내문 이구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