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 / 편혜영 / 문학과지성사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고 눈만 껌벅일 수 있을 정도인 한 대학교수가 침상에서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성실하고 열심히 남의 눈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이루어낸 성공을 복기하는 과정을 통해 독자에게 가슴 뜨거운 감동을 전해줄 이야기가 될 것처럼 보였다. 이야기 시작은 자녀가 없는 중년의 부부가 다정하게 길을 떠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아릅답기만 하다. 그 아름다움은 교통사고로 접힌 휴짓조각처럼 구겨지고, 펼쳐본 아름다움에는 구멍과 금이 수없이 있다.
75. 그래도 지도는 실패를 통해서 나아졌다. 그 점에서는 삶보다 훨씬 나았다. 삶은 실패가 쌓일 뿐, 실패를 통해서 나아지지는 않으니까.
위 문장을 읽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보통의 경우와 많이 다르다. 교수가 되기까지 많은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했으며 힘든 결정을 해야만 했던 그의 고뇌를 느낄 수도 있으나 뭔가 느낌이 좋지 않다. 일은 점점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삶은 왜 실패로 점철되어 나아지지 않은 것일까.
오기, 그는 외아들이다. 아버지는 가정을 돌보지 않는 사업에 몰두하는 전형적인 외골수 일벌레(Workaholic)처럼 보인다.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 자살한다.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는 그가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말에 돈도 되지 않는 일을 한다고 못마땅해했다.
훌륭한 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라던 여자는 지갑에 있는 유명한 기자의 사진을 넣고 다닌다. 현장에서 열정을 가지고 뛰어다니는 모습이 아닌, 명품 옷을 입고 명풍 가방을 메고 있는 아름답게만 보이는 기자의 사진이다. 그녀와 결혼을 한 후, 오기는 실패만 거듭하는 그녀가 무슨 일을 할 것인가에는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성공한 누구처럼 되는 것이 그녀의 목표일 것으로 생각한다.
87. 오기가 생각하기에 아내의 불행은 그것이었다. 늘 누군가처럼 되고 싶어 한다는 것. 언제나 그것을 중도에 포기해버린다는 것.
아내 부모님의 사이는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부모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듯하였다. 부모의 일을 알아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아버지는 선생님이었으나 동료 여교사와의 연애 문제로 그만두어야 했다. 그녀의 외할머니는 일본인이었다. 외할머니가 몇십 년 만에 한국에 온 것은 유골함에 담겨서이다. 할머니의 친척이 욘사마를 보러 남이섬에 오면서 가지고 왔다고 한다. 말이 없으신 장모님은 혼혈임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말조심을 한 것이었다. 딸이 그녀의 전부였다. 누군가의 전부인 사람은 세상을 모두 가진 것처럼 부유하게 생각될 때가 있으나 홀로 서지 않았을 경우 반대로 세상에서 제일 외로운 위치이기도 하다.
84. 오기가 지난 시간을 제 영역을 확장하는 데 보냈다면 아내는 시간을 보낼수록 홀로 남겨졌다. 확실히 젊은 시절의 아내를 생각하면 지금의 모습은 안타까울 정도이다.
자기 중심에서만 세상을 보는 오기가 침상에서 지난날을 돌아보며 반성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간혹, 아내에 대해서는 내가 먼저 다가가야,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어야 했다는 식의 생각을 하기도 한다.
처음에도 언급했지만, 이 소설은 감동을 주고자 글을 쓴 것은 아닌 것 같다. 부부관계의 어려움, 세상에 남기는 족적의 형태가 부모님의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라는 것처럼 서두에는 부모가 어떻게 살았는지 선언하듯 작가는 부모의 비행(?)을 적어 놓았다. 그래서 이 남녀가 그렇게 서로를 대하고,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고 틀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틀에 독자를 가둔다.
15. 여자들은 종종 오기의 삶에서 전환점이 되었다.
오기 인생의 전환점은 어머니와 아내였다. 그의 전환점은 특별한 것이 아니며 남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교통사고 후, 한 명의 가족이 없는 그에게 한 여인이 가족으로 자리매김한다. 장모. 단 하나의 가족인 장모는 그를 죽이려고 하는 것일까? 자기에게 전부였던 딸을 죽게 한 사위를 장모는 서서히 아무도 모르게 죽이려고 했을까. 이야기는 오기의 입장에서 쓰였으므로 장모의 생각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
장모는 딸이 남편, 오기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을까? 전반부에 나온 장모와 아내의 관계라면, 딸이 직접 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딸이 전부인 장모는 짐작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후, 딸의 서재에서 딸의 마음을 확인했을 수 있다.
말이 없어도 의사는 전달되는 법이다. 오기는 장모가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고 생각한다. 정원에 구멍을 크고 깊게 파고 있다. 장모는 연못을 만들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내는 오기를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182.
“좀 특별한 얘기야. 한 인간에 대한 고발문이거든.”
“지난번에 쓰고 있다던 그 고발문?”
오기가 아내를 힐끗 돌아보며 물었다.
“인간이 어떻게 속물이 되는지, 그 관찰기라고도 할 수 있어.”
위의 대화로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아내는 숙소를 남편이 제이와 바람피울 때 사용했을 곳으로 추정되는 호텔을 정했으며, 여행을 마치고는 이혼하려고 했다. 안에서 깨지는 바가지 밖에서도 깨진다는 속담처럼 아내에게 성실하지 못한 그가 바깥에서는 성실했을까? 오기는 그렇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주변의 말은 그렇지 않다. 어떤 선배는 그를 가르켜, '처자식도 버릴 놈'이라는 말도 했다. 병원에 있을 때 동료들의 방문도 장모가 불러서 온 것이었으며, 집으로 찾아온 것도 장모가 부른 것이었다. 제이는 그의 SOS를 무시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무엇이었을까? 단단하게 엮여야 할 관계는 작은 구멍으로도 쉽게 갈라질 수 있다. 작은 구멍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지만 생긴다면 반드시 이를 메꿔야 한다. 재료는 정직과 이해, 용서와 사랑이 아닐까? 그 재료는 어느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기에게서도 아내, 장모에게서도 발견할 수 없다. 어쩌면 그들 사이에 구멍이 팬 것이 아니라 각자의 구멍을 만들고 그 구멍 안에서 살았을 것이다. 나만의 구멍을 파고 살다가 자신의 구멍이 파괴되자 타인의 구멍을 찾아 옮겨가는 삶은 아닐까?
그래서인가 섬뜩하다. 오래되어서 세부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마치 영화 [미저리]의 한국판을 대하는 기분이다. 분위기가 비슷한 미저리와 더불어 대화의 중요성, 상호 이해의 중요성으로 볼때는 은희경의 [아내의 상자]가 떠오르기도 한다.
오기는 결국 장모가 파놓은 구멍에 빠진다. 구멍에 빠진 오기는 아내가 해 준 이야기를 떠올린다.
206 -208.
“그럼 왜 그래?”
“슬퍼서......”
“응?”
아내가 방금 책에서 읽은 것을 천천히 얘기했다. 한 남 자가 간발의 차로 죽음의 위기를 면한 이야기, 어느 날 바로 제 앞으로 공사 중인 건물에서 건축 자재가 떨어져 내리고, 그 순간 사고를 당하지는 않지만 가까스로 살아남았기 때문에 비로소 뭔가를 생각아게 된 이야기였다.
"그게 왜 슬퍼, 다행인 거지."
"그 사람이 사라져. 은행의돈도 그대로 두고 직장에 사직서도 내지 않고 누군가 만나기로 한 약속도 취소하지 않고, 그냥 사라져. 가족이나 친구, 동료들에게 어떤 암시도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사라져. 어느 날 가자기. 누구도 찾을 수 없게. 아내가 남편을 찾아달라고 탐정에게 부탁해. 어딘가에서 다친 건 아닐까, 의식이 없어서 가족의 기억을 완전히 잃은 게 아닐까 , 그렇게 생각해. 그게 아니면 남편이 사라진 걸 납득할 수 없으니까. 탐정이 얼마 후에 그 남자를 찾아내. 무사히 살고 있어. 다른 도시에서, 이름을 바꾸고 직장을 구해서 살고 있어.새로 생긴 가족과 함께."
"아내가 싫었나 보네."
"뭘?"
아내가 대답 대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오기가 재빨리 되물었다.
"다른 곳에서도 잘 살 수 있다는 걸?"
아내는 이번에도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오기는 초조해졌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어떻게 됐어?"
"그게 끝이야."
"절차를 밟아 이혼했대."
"너무했네. 그래서 행복했나?"
갑자기 아내가 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눈물이 조금 맺히는 정도엿는데 이내 소리를 내어 울었다. 왜였을까. 어느 날 운 좋게 살아남은 남자 때문에, 갑자기 저 너머로 가버린 남자 때문에, 그곳에서도 별다르지 않은 삶을 이어나간 한 남자 때문에 울었을까.
우는 아내를 보며 오기는 웃었다. 이게 슬픈가.
마지막 문장...
209. 오기는 비로소 울었다. 아내의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다.
오기는 그 구멍에서도 잘 살 수 있을까? (2018.7.25 평상심)
* 메모.
76. '지리학의 제 1법칙은 모든 것은 다른 것과 연결되어 있지만, 가까운 것은 먼 것보다 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 윌도 토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