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추원(中樞院)이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왕명의 출납과 숙위(宿衛)·군사기무를 담당하던 중앙관청이다. 고려시대에는 중서문하성과 함께 최고 기관으로 불렸다. 고려시대의 중추원은 991년(성종10)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병관시랑 한언공(韓彦恭)의 건의에 따라 송의 추밀원 제도를 본떠 설치됐다. 나중에 추밀원으로 개칭되었으나 직제와 기능은 그대로였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중추원의 기능은 그대로 계승되었으나 점차 그 기능이 분할되었다. 1405년 관제개혁 때 군정은 병조로, 왕명 출납은 승정원으로 이관되었다. 또 1466년에는 명칭을 중추부로 고치고는 문무 당상관 가운데 특별한 소임이 없는 사람들을 이곳에 소속시켜 예우하였다. 말하자면 일종의 원로원(元老院) 같은 곳이랄 수 있다.
중추원은 일제하에서도 존속되었다. 한국병탄 한 달여 뒤인 1910년 10월 1일부터 업무를 본격적으로 개시한 총독부는 조선총독부 관제 및 칙령 제355호(조선총독부 중추원 관제)에 따라 중추원을 개설했다. 이는 구한국 시대의 중추원 제도를 계승한 것으로 권한은 현저히 약화된 것이다. 구한국 시대 중추원의 경우 내각의 자문에 응하거나 법률·칙령에 대한 심사 및 의정(議定)을 담당했었다. 반면 총독부 중추원은 조선총독의 자문에 응하거나 총독의 지시를 받아 조선의 구관(舊慣) 및 제도에 관한 조사업무가 전부였다.
총독부가 중추원을 설립한 데는 나름의 목적이 있었다. 일제는 한일병탄 뒤 구한국 황실과 종친, 그리고 소위 ‘합방 공로자’들에 대해 논공행상을 하였다. 우선 황실에 대해서는 순종을 이왕 전하, 고종을 이태왕 전하로 책봉했으며, 의친(懿親·왕의 가까운 친척)인 이강·이희에 대해서는 공(公)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또 종친과 합방 공로자들에 대해서는 작위와 은사금을 주며 무마했다. 그런데 챙겨야할 집단이 하나 더 있었다. 조선의 기득권 세력이랄 수 있는 구한국 시대의 퇴관(退官) 대신들과 지방의 유력자 집단이었다. 이들의 불만을 무마하고 또 회유하기 위해 설립한 것이 바로 중추원이라고 할 수 있다.
설립 당시 중추원의 구성을 보면, 의장·부의장 각 1명, 고문 15명, 찬의 20명, 부찬의 35명과 서기관장·서기관·통역관·속(屬)·통역생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 가운데 의장은 정무총감이 당연직으로 맡았고, 칙임대우 고문은 회의에 참석해 심의·의결했다. 그러나 찬의(칙임대우) 및 부찬의(주임대우)는 회의에 참여만 할 뿐 의결권은 없었다. (찬의·부찬의는 나중에 ‘참의’로 통일했으며, 참의의 임기는 3년임)
구한국 시절 중추원에 비해 인원은 늘어났지만 실권은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총독의 자문에 응하는 허수아비 기관에 불과했다. 게다가 자문역할마저도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총독부는 1919년 3.1의거가 일어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중추원 회의를 소집하지 않았다. 3.1의거 책임을 지고 물러난 하세가와 총독은 후임 사이토 총독에게 건네준 ‘사무인계의견서’에서 그 실상을 이렇게 밝혔다.
“병합 당시 신정부에 임용 안된 구(舊)정부의 현관(顯官)에게 사회적 지위를 줄 필요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중추원에 임용하였으나 그 선임 잡박(雜駁)으로 해서 참으로 자문부(府)로서는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다. 또 당시의 상황은 이것에 의해 정론(政論)을 야기하는 것을 허(許)할 수 없었으므로 본관(本官) 관제(官制) 제정 이래 이제까지 회의를 연 일이 없고 완연히 양로원 같은 감이 있었다.”
이같은 상황은 1930년대 중반까지도 계속됐다. 오죽했으면 중추원 참의로 있던 현준호가 중추원 회의석상(1935. 4. 27)에서 이런 말을 했겠는가.
“중추원의 제도를 철저히 개혁하여 진실로 권위 있는 기관이게 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항상 당국에서도 연구하실 것으로 사료합니다만, 중추원이라 하면 일반 사회로부터 무능으로 취급을 받으며, 일종의 구제기관에 불과한 것으로 조소를 당하고 있는 감이 불무(不無)하다는 것입니다. 모쪼록 두 분 각하의 영단에 의해서 반도 유일의 자문기관인 이 중추원으로 하여금 진실로 권위 있는 기관이게 해주시기 바라는 바이옵니다.”
권한도 없었지만 생각보다 이들에 대한 금전적 예우도 그리 대단치는 않았다. 중추원 관제 제7조(보수)에 따르면, 부의장 및 고문은 연봉 2500원 이내, 찬의는 1200원 이내, 부찬의는 800원 이내로 직위에 비해서는 볼품없는 수준이었다. 한 예로 1913년 칙령 제134호(고등관 관등봉급령)에 따르면, 당시 조선총독 연봉은 8000원, 정무총감은 6000원, 총독부 각 부 장관은 4500원~3700원, 국장 1급이 3800원, 국장 2급이 3300원이었다. 중추원 2인자 격인 부의장 및 고문의 연봉(2500원)은 당시 판검사 1급봉의 절반, 1급학교 교장의 최고연봉 수준에 불과했다. 그 아래 직위는 더 했다. 참의는 중학교 교사 보통 정도 수준에 불과했다.
실권도 없고, 보수도 변변찮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제 당시 중추원 참의는 대단한 직위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들은 총독부에서 월급 받아서 생활하는 그런 자들이 아니었다. 이미 고관대작을 역임했거나 아니면 총독정치 하에서 실세이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지역에서 행세 깨나하는 그런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중추원 참의는 당시 조선인들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명예직으로 조선시대로 치면 공신들에게 내리는 시호(諡號)나 봉군(封君)과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중추원 참의 벼슬 자체로는 아무런 실권이 없었지만 유력자 행세를 할 수 있는 자리여서 친일파나 지역유지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서 중추원 참의를 당연범으로 취급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참고로 반민특위가 활동기간 내에 다룬 피의자 건수는 모두 688건인데 그 가운데 중추원 참의는 102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