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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 들어서기 전,
나는 오래도록 한 구절을 붙잡고
서 있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영생을 취하라.
그 말은 내게 오래도록 낯설었다.
영생이란 늘 죽음 이후의 어떤 먼 약속처럼 들려왔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것이지,
붙잡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말씀은 분명히 지금,
오늘, 이 자리에서 그것을 취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 뜻을 다 알지 못한 채,
그 질문 하나를 마음에 품고
전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첫 번째 공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긴 침묵만이
바닥 위를 가로질러 놓여 있었다.
거대한 나무 치수자가 길처럼
뻗어 있었고,
그 위로 수없이 많은 발자국이
빛을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발자국들을 바라보았다.
같은 모양은 하나도 없었다.
어떤 발자국은 급히 앞으로
기울어 있었고,
어떤 것은 머뭇거리듯
중간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어떤 것은 방향을 바꾸었고,
어떤 것은 되돌아간 흔적까지
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오래전 경산의 한 골목이
마음속에 다시 열렸다.
낡은 구둣방, 어둡고 비좁던 공간,
문을 열면 먼저 흘러나오던
희미한 찬송가.
그리고 얼굴보다 먼저 사람의 발을
바라보던 구두장이 아저씨.
그는 늘 말없이 발의 굴곡을
오래 들여다보곤 했다.
그때는 그저 치수를 재는 줄 알았으나,
이제 와 생각하면 그는 한 사람의
발이 아니라
그 사람이 걸어온 시간을 읽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발에는 삶이 스며든다.
기쁨으로 달려간 날도,
눈물로 끌려간 날도,
견디며 버텨낸 세월도 발에 남는다.
그러므로 발의 치수를 잰다는 것은
단지 신발의 크기를 재는 일이 아니다.
한 인간의 상처와 리듬과 무게를
조심스레 받아들이는 일이다.
두 번째 공간에는 수백 켤레의
구두가 공중에 떠 있었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처음에는 그것을 설치미술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참을 올려다보고 있자,
그것은 더 이상 구두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출근길이었고,
누군가의 병원길이었고,
누군가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건너가던 저녁의
보폭이었다.
신발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걸어온 생은 침묵 속에서도
들리고 있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적지보다,
어쩌면 우리가 걸어온 길을 더 오래
기억하시는 분인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늘 어디에 도달했는가를
묻지만, 하나님은 어떤 마음으로,
얼마나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며
그 길을 걸어왔는가를 먼저 보실지도
모른다.
성과보다 발걸음,
결과보다 방향,
도착보다 동행.
그 생각 앞에서 나는 내 삶의 여러
날들을 떠올렸다.
너무 빨리 가려다 놓쳐버린 얼굴들,
불평으로 무너뜨린 하루들,
비교 속에서 스스로를 소진시킨
시간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쉽게 무질서의
영토로 미끄러진다.
가만히 두면 저절로 선해지지 않고,
돌보지 않으면 이끼처럼
불만이 피어난다.
세 번째 공간은 어두웠다.
백열등 하나만이 좁은 원을 만들고
있었고, 그 아래에서 주름진
손이 한 땀 한 땀 가죽을 꿰매고
있었다.
나는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한 채
그 손을 바라보았다.
벽에는 짧은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맞춘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모양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나는 그 문장 앞에서 오래 멈추었다.
오래전 구둣방의 기억이 갑자기
현재가 되었다.
가죽 냄새, 접착제 냄새,
희미한 찬송가,
백열등 아래에서 반짝이던 송곳,
그리고 주름진 얼굴 위에 번지던
조용한 웃음.
평생 처음으로 내 발의 굴곡을 재어
만든 구두를 신었던 날의 감촉도
되살아났다.
그것은 이상한 경험이었다.
낯선데도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편안했다.
마치 신발이 내 발에 맞춰진 것이
아니라, 내 발이 비로소 자기 자리를
찾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제야 나는 조금 알 것 같았다.
맞춘다는 것은 단지 정확하게
제작하는 기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함부로 일반화하지 않는
사랑이었다.
사람마다 왼발과 오른발이 다르듯,
영혼도 모두 다른 굴곡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이는 빠르게 회복하고,
어떤 이는 오래 아파하며,
어떤 이는 겉으론 평온해 보여도
속에서 깊이 무너진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를 내 기준에 끼워 맞추는
일이 아니라,
그의 모양을 오래 바라보는 일이다.
어쩌면 돌봄이란
바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목회적 위로도,
우정도,
부부의 사랑도,
심지어 하나님의 시선도
모두 거기서 시작되는 것 아닐까.
"맞춘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모양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나는 그 문장을 읽으며, 구두장이가
평생 구두를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존중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네 번째 공간은 눈부시게 화려했다.
대리석 궁전,
천장에서 떨어지는 샹들리에,
차갑도록 정교한 빛.
그러나 그 한가운데에는 의자 하나만
놓여 있었다.
너무 아름다운데, 너무 외로웠다.
그 공간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오래전 들었던 어떤 이야기를
떠올렸다.
궁궐 같은 집에서 살았지만
끝내 행복하지 못했던 사람들,
풍요 속에서 오히려 더 목이
말라가던 부부,
비교와 불만이 삶 전체를 잠식하여
결국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던 얼굴들.
그때 처음으로 분명히 알았다.
평안은 소유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감사에서 태어난다.
구둣방은 좁고 낡았으나 따뜻했다.
궁전은 넓고 찬란했으나 차가웠다.
한 곳에는 찬송가가 있었고,
한 곳에는 침묵이 있었다.
한 곳에는 손의 수고가 있었고,
한 곳에는 눈부신 결핍이 있었다.
우리는 자주 크고 많은 것을 향해
달려가지만, 마음은 거기서 더 자주
길을 잃는다.
풍요는 필요를 덜어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영혼의 허기를 끝내지는
못한다.
감사가 없는 곳은
궁전이어도 폐허가 될 수 있고,
감사가 머무는 곳은 구둣방만 한
공간이어도 숲의 그늘처럼
평안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은 엔트로피를 향해
기울어진 물질처럼 조금만 방심해도
흐트러진다.
비교는 저절로 자라고,
불만은 자동으로 증식한다.
그러므로 감사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내면의 무질서를 거슬러
질서를 세우는 영적 기술이어야
한다.
그것은 저절로 생겨나는 기분이
아니라, 의지로 선택하고
반복으로 훈련하는 생의 태도이다.
다섯 번째 공간에는 수천 장의 작은
메모들이 햇빛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오늘도 걸을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 웃어 주었습니다."
"따뜻한 차 한 잔이 있었습니다."
모두 너무 평범한 문장들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평범함이
오래도록 내 마음을 붙들었다.
나는 조용히 주머니 속
작은 공책을 만졌다.
매일 밤 한 줄씩 적어 오던
감사의 기록.
처음에는 그것이 거의 의무처럼
느껴졌다.
하루를 돌아보며 억지로라도
감사할 것을 찾는 일이 얼마나
서툴고 부자연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것은 습관이 되었고,
더 지나자 습관은 시선이 되었다.
삶을 바라보는 눈 자체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그때 비로소 이해했다.
감사는 행복해서 적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잃지 않기 위해 적는 것이다.
사람은 감사하지 않으면 쉽게 무너진다.
삶이 고통스러워서만이 아니라,
사소한 은혜들을 보는 눈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작은 볕 한 줌,
누군가의 인사 한마디,
오늘도 무사히 걸어온 발,
창가에 드는 저녁빛,
오래 알고 지낸 이의 웃음.
그런 것들은 그 자체로
삶을 바꾸지 않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깊은 곳에서
삶의 결을 바꾼다.
감사는 현실을 부정하는
낙관이 아니다.
현실의 고단함을 다 알면서도
그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기억하게 하는 힘이다.
불평보다 감사를 먼저 선택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내 안의 무질서를 향해
다시 서는 선한 싸움이었다.
여섯 번째 공간에는 천장을 향해
자라난 숲이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나무가 아니었다.
수천 가닥의 신발끈이 서로 얽혀
숲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한 사람의 하루,
한 줄의 감사,
한 번의 용서,
한 번의 미소,
한 번의 침묵 속 기도.
너무 작아서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것들이
서로 이어지고 겹쳐지며
마침내 울창한 형체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오늘 심은 감사는
오늘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내일의 습관이 되고,
오랜 날의 성품이 되며,
마침내 다른 사람을 쉬게 하는
그늘이 된다.
그 순간 나는 '영생을 취하라'는
말씀의 뜻을 아주 조금 이해한 듯했다.
영생은 죽은 뒤에 주어지는
먼 시간만이 아니었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방식이기도 했다.
오늘 불평 대신 감사를 택하는 일,
오늘 한 사람의 모양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고 인정하는 일,
오늘 내 안의 무질서를 거슬러
조용히 질서를 세우는 일.
바로 그곳에서 '영원'은
미래에서 현재로 스며들고 있었다.
영생은 기다리는 대상이기 전에,
감사와 순종 속에서 지금 여기
살아내는 존재의 형식인지도 몰랐다.
일곱 번째 공간에는 낡은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곁에는 오래 신었던
구두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비어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마치 금방이라도 그 구두장이가
다시 와 의자에 앉아
웃으며 말할 것만 같았다.
"오늘도 잘 걸어오셨네요."
그 한마디면 충분했을 것이다.
사람은 거창한 말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는
시선 하나를 더 오래 기억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내 삶에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누군가가 내 상처를 고치려 들기보다
먼저 알아봐 주었던 순간,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 주던 눈빛,
더 빨리 가라고 재촉하지 않고
지금의 걸음도 괜찮다고
허락해 주던 목소리.
아마도 하나님의 위로는
때로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도착하는지도 모른다.
거대한 기적보다
한 사람의 모양을 인정해 주는
섬세한 사랑으로.
마지막 공간에는 황금빛 발자국들이
눈부신 빛 속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 마지막 길을 걸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붙잡았던 말씀이
다시 마음속에서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영생을 취하라.
이제야 그 뜻을 조금 알 것 같았다.
영생은 먼 미래의 시간이 아니었다.
오늘을 감사로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오늘 한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었다.
오늘 불평보다 감사를 먼저
선택하는 일이었다.
오늘의 작은 순종으로 영원의 생명을
지금 여기에서 피워 내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감사는 단지 고맙게 여기는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의 엔트로피를 낮추는
질서화이며,
무질서한 마음을 정돈하는
영적 에너지이며,
하루를 영원의 일부로 바꾸는
존재론적 선택이다.
감사는 영적 질서의 기술이다.
인간의 마음을 폐허에서 숲으로
바꾸는 조용한 기술이다.
전시장 문이 조용히 열렸다.
밖에는 늦은 오후의 햇살이 골목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오래전 그 구둣방은 이미 사라졌다.
백열등도, 찬송가도, 가죽 냄새도
더는 그 자리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구둣방은 사라졌어도
그곳에서 심어진 씨앗은
아직 자라고 있다는 것을.
그 씨앗은 내 공책 속
감사 한 줄이 되었고,
감사 한 줄은
하루를 바꾸었으며,
하루는
삶을 바꾸었고,
삶은 어느새 누군가에게
그늘이 되는 숲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조용히 공책을 펼쳤다.
그리고 오늘도 한 줄을 적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창밖으로 저녁 햇살이
천천히 종이 위를 지나갔다.
방 안은 고요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오래전
구둣방에서 들리던 찬송가를
다시 들었다.
그 노래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오늘도 누군가의 마음에
씨앗 하나를 심고 있었다.
숲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 심은 감사 하나가,
언젠가 누군가를 쉬게 하는 숲이 된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만으로도,
오늘 내가 이미 영원의 한 조각을
붙잡고 있음을 알았다.
https://youtu.be/iuga0lFqD2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