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도 이제 나이 50이 넘었으니 술 그만하시고
마무리를 잘 지으셔야지요. 중노룻도 잘 하지 못하고
부모님도 잘 모시지 않았으니 양가득죄(兩家得罪)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참선정진 하십시요. "
"양가득죄라‥ 불가에도 속가에 대해서도 모두
죄를 지은 꼴이라? 아, 그렇구먼.
자네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러하네. "
그때부터 태허스님은 그토록 좋아하던 술을 끊고
산문밖 출입을 금한 채 열심히 참선수 행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버님이 생남불공(生男佛供)을 위해
마곡사로 찾아갔을때
태허스님은 근근히 불공 축원을 끝내고 내쫓듯이 말씀하셨습니다.
"거사야,"
"예."
"내가 지금 많이 아프다. 기운이 하나도 없다.
불공드리러 왔다가 송장 보면 재수 없다는 말이 있네.
빨리 가게, 빨리 가."
아버지는 태허노스님이 방으로 들어가 눕는것을 보고
절을 떠났습니다
절 일주문을 벗 어나자마자 태허노스님이 돌아가셨음을 알리는 열반
종소리가 '쿠왕 쿠왕' 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열반 종소리가 아버지의
목덜미를 잡아끄는듯 했습니다.
집에까지 80리 길을 오면서 그 종소리는 계속 아버지를
쫓아오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 일이 있은 뒤 어머니는 바로 임신을 하여 누나를 낳았고,
부모님들은 누나를 태허스 님의 후신으로믿고 있었습니다.
그 뒤 누나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수재가 아니면 입학하기 어렵다는
공주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우리 가족 중 가장 먼저 출가하여 금강산으로 갔다가 이듬해인
1941년부터 수덕사 만공(滿空) 대선사 밑에서 수행하였습니다.
태허 노스님은 만공스님의 출가시 스승인 은사였으니
전생의 스승과
제자는 금생의 제자와 스승이 된 것입니다.
응민스님은 수덕사 견성암에서 용맹정진하여 만공스님으로부터
'한 소식한 비구니'라는 인가를 받았고,
그 뒤에도 평생을 참선정진과
후학들의 지도에 몰두하였습니다.
한국 비구니 중 그만한 분이 드물다고 할 정도로 공부를 잘하시다가
1984년 12월 15일에
응민스님은 입적한 것입니다.
응민스님은 불가의 상례에 따라 49재를 지냈습니다.
21일째 되는 날 지내는 3재는 대구에서 지냈는데,
재는 내가 집전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재를 지내면 염불 ·독경에 범패까 지 곁들이기가
일쑤이지만, 그날은 모든 절차를 생략하고 선법(禪法)에 의해
천도를 했습니다.
나는 조용히 죽비를 치고 입정(入靜)에 들어 누님 영가(靈駕)에게
일렀습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萬法歸一 一歸何處)."
그런데 불현듯 한 생각이 떠올라 영가에게 마음속으로 일렀습니다.
"응민스님. 미국 구경 한번 안할라요?
미국 한번 가보시오. 미국 펜실바니아에 가면 소영 이가 있는데
그 집에 태어나면 참 좋을거요.
부자집이니까 공부도 많이 하고 미국 구경도 많이 할 수 있을 거고,
참 좋을 거구먼."
이렇게 잠시 한 생각을 했었는데 영검이 통했던지 그날 밤 내 여동생
쾌성(快性) 스님 꿈에 응민스님이 나타나 묻는 것이었습니다.
"쾌성아. 일타스님이 나보고 미국 가라고 그러는구나. 그렇지만
서울도 혼자 못가는 내가 미국을 어떻게 혼자 갈 수 있겠니."
"언니, 일타스님이 좋으니까 가라는 것 아닙니까. 걱정말고 가세요.
미국은 비행기만 타 면 금방 갈 수 있는데 뭐! 비행기 타고 가면
자동차로 마중 나와서 싣고가니 조금도 걱정 없소. 3살 먹은 어린애도
비행기만 타면 가는데 언니가 못 갈리 있겠어요? 가소, 가소."
"아, 그건 그렇겠네. 그런데 소영이가 누군가? 소영이가 누군데
소영이 집에 가라고 하지?"
"그전에 언니한테 아주 좋은 두루막 장삼을 해준 사람 있잖아요.
언니가 너무 좋은 것이 라 중이 입을 것이 아니라고 한 그 두루막!"
"아, 그 사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응민스님은 그냥 선 채 뒷쪽으로 쭉
물러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에 있는 소영이도 같은 꿈을 꾸고 아기를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지금 여덟 살 된 아이의 눈도 얼굴도 행동거지도 영락없이
응민스님 살아 생전의 모습을 닳았습니다.
이렇듯 누나 응민스님은 과거 ·현재 ·미래 삼생(三生)의 모습를
우리들 가까이에서 보여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