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5464]연파처사(烟波處士)박개(朴漑)절명시
박개(朴漑)는 박우(朴祐)의 장남으로 자(字)는 대균(大均),
호는 연파처사(烟波處士)다.
1511년(중종 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신동으로 유명했는데
“자식으로서 배울 것은 효도만한 것이 없다.
곤궁할까 현달(顯達)할까는 하늘에 달려 있고 효도는 나하기 나름인데,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은 내가 알 수 없는 것이고 나하기 달린 것은
내가 힘써야 한다”라는 뛰어난 말을 해 주위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고 전한다.
어린 아이가 사자소학(四字小學) 효행편에서 배운 대로 행동하는 걸로
유명해서 아비인 박우가 걸핏하면 아들 자랑을 하여도 주위 누구도
별로 흉보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에서 계속 학업을 닦던 그는
18세 때 처음 과거를 봤는데, 시험 보러 온 선비 하나가
인파에 밟혀 죽는 걸 보고 “선비가 첫째를 다투느라
사람을 죽여도 돌보지 않게 되니, 이것이 어찌 인인(仁人),
열사(烈士)가 뭇사람과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일이겠는가”라며
과거를 때려치웠다. 그 길로 아버지 고향인 광주 송정리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평생에 베풀기를 좋아해 친족, 처족 중 돈이 없어 굶으면 입고
먹을 것을 줬고, 상을 당해도 돈 없어 장사를 못 지내는 이에게는 돈을 줬으며,
역시 돈 때문에 혼례를 못하는 친척에겐 비용을 댔다고 한다.
하루는 그가 나룻배에서 거문고를 뜯고 유유자적하는데,
불현듯 뱃머리를 손으로 두드리며 읊은 시 하나가 당시 사람들 사이에 유행했다.
소문이 퍼져 선조에게까지 보고됐는데, 임금이 어사를 보내 알아보니
거문고와 책으로 집안이 가득한데 마침 강둑 정자에서 백발 노인이
누워 길게 시조를 읊조리다가,
문득 어린 종을 시켜 배를 저어 안개 끼고 물결치는 사이에서 노닐고
해가 져도 돌아가는 것마저 잊더라고 보고했다.
임금이 “옛날 사안(謝安)이 기녀(技女)를 데리고
동산(東山)에 은거하였으나
백성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았다는데 아마 이런 사람이었겠다”고 했다고 한다.
시가 마음에 들었던 선조는 계속 어사를 보내
벼슬을 주려 했지만 그는 이리저리 피하며 계속 거절을 거듭했다.
선조 임금이 친히 당시 경연관이었던
그의 동생 사암(思菴) 박순(朴淳)을 불러
형을 설득하라고 명했다. 60세가 이미 넘은 처사는 동생 때문에 마지못해
한성부 참군(정7품)에 제수됐다. 곧 고산(高山) 현감(정6품)이 됐고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오른 후
김제군수(종4품)로 1년을 더 지내다 관직을 물리고 자연으로 돌아갔다.
76세가 되던 1586년(선조 19년) 세상을 떠나던 날
연파정(烟波亭)으로
들것에 실려갔다. 가까스로 숨이 붙어서는 스스로 문상객도 만나주고
밤새 옆에서 가야금을 뜯게 하고 노래를 부르게 하면서
아래 적힌 시 한 수를 마지막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支離一疾差無藥
歸濯靈泉玉溜寒
從此便敎毛骨改
碧雲天外駕翔鸞
한 병에 지리하되 나을 약이 없더니
영천에 와 씻으니 옥류가 차갑구나.
여기에서 용모를 새롭게 바꾸어서
벽운 뜬 하늘 밖에 나는 난새 타리라.
원문=芝湖集卷之十二 / 行錄
煙波朴公行錄 庚戌八月
公諱漑。字大均。號煙波姓朴氏。忠州人。六峯祐之冢子。訥齋祥之從子。思菴文忠公之伯兄也。自兒時嘗曰。人非孝。無以爲人。及長。左右服事甚至。六峯公亦每稱其孝焉。初赴鄕試冠兩場。及入會試。見士子躪死。歎曰。夫爭一名。至殺人而不顧。豈仁人事哉。自此
廢擧。惟事耕釣吟嘯。起亭於煙波江上。每以輕舠。乘興游賞。有詩曰。裝舟載素月。擬價輕黃金。不向宦津繫。平生滄浪心。性且好施與。置義廊義倉。以收恤宗族待公擧火者。常五十餘人。宣廟朝。歷漢城參軍,高山縣監。以事陞緋玉。後爲金堤郡守。僅一年投紱而歸。日以琴歌。優遊歿世。其臨卒。出亭舍。亦竟夜琴歌。詰朝吟示一絶。意甚曠然。其詩曰。
支離一疾差無藥。
歸濯靈泉玉溜寒。
從此便敎毛骨改。
碧天雲外駕翔鸞。
書訖便乘化。乃萬曆丙戌仲冬。距其生正德辛未。實七十六歲。
葬于亭西震向原。行狀則奇縣
監孝曾所述云。公無嫡嗣。只有庶出數人。
朴淳筆蹟
조선 전기의 문신 思菴 박순(1523∼1589)의 시문.
초서, 24.2×17.9cm
박순(朴淳) 박우(朴祐)의 차남으로 자(字)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 시호(諡號)는 문충공(文忠公),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다.
1519년(중종 1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4살 때까지 부친 박우에게서 배우고, 15세에 화담 서경덕에게 배웠다. 화담 학풍에 영향을 받은 그는 평생을 두고 책과 실제를 양립시켜 생각했고 어디에 얽매이거나 구애받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원로가 돼서도 아직 새파랬던 율곡 이이(李珥)나 성혼(成渾)과도 스스럼없이 교우했다. 1549년(명종|명종 4년) 26세가 된 그는 현재 대전광역시 문지동에 있는 시조묘 아래에 '사암'이란 서실을 짓고 독자적 연구를 시작해 주위 성리학자들이 그를 사암선생이라 했다. 그는 화담에만 갇히지 않고 이기이원론(주리론)을 기초로 한 정통 주자학의 교조 퇴계 이황이나 실천 유학자 남명 조식으로부터도 사사받으며 폭을 넓혀갔다. 1553년(명종 8년) 친시문과에 장원급제 후, 왕의 사위가 밀수한 물목을 압수하기도 하고 훈구파 임백령(林百齡)의 공훈을 폄하해 궐문 밖으로 쫓겨나기도 하는 등, 훈구공신들에 맞서 조선 정치의 물줄기를 사림 쪽으로 이끌었다. 1567년(명종 22년)에 예조참판(종2품)에 올랐고, 1570년(선조 3년)에 예조판서(정2품), 그리고 홍문관 대제학에 올랐다. 사실 박순은 명종 때 이미 한 번 홍문관 대제학에 임명됐었는데 얄궂게도 퇴계 이황이 당시 그 아랫자리인 제학이었다. 스승을 제치는 법은 없다며 박순은 퇴계에게 대제학 자리를 양보했다. 당시 퇴계는 66세, 사암은 44세였다. 퇴계 역시 대제학 자리를 사양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미담으로 회자되고 있다. 1572년(선조 5년)에 우의정, 이듬해인 1573년에 좌의정, 1579년(선조 12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사암은 정승 자리에 14년간 장기 재임한 끝에 이이와 성혼을 두둔해 탄핵됐다. 당시 율곡은 자기 스승 휴암 백인걸의 사람됨과 학문을 어찌보느냐는 선조의 물음에 '기고학황(氣高學荒)'이라 당돌하게 말하는 등, 젊은 나이에 말을 꾸밀 줄 모르는 그의 태도는 대다수 선비들을 등 돌리게 만들었다. 박순이 대부분의 선비들은 물론 동문수학했던 친구들조차 적으로 돌릴지도 모르는 데도 이이와 성혼을 두둔한 것은 극단에 치우지는 것을 싫어한 공의 천성과 사림 운동의 미래를 염두에 둔 대국적 판단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동문수학했던 절친 초당 허엽과 공의 애제자 정개청마저 등을 돌리고 동인 편에 섰다. 사암은 서화담의 문인인 동시에 퇴계의 문인이기도 했기 때문에 서인으로 몰려 사방에서 공격받는 것은 부당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이게 단순히 기호학파의 서인과 퇴계, 남명학파, 화담학파의 동인 간의 대립 때문만은 아니었다. 얼마간 정승 자리에서 붕당 대립을 원만히 마무리하고 결속을 다지려 했던 그는 점차 원로 사림과 신진 사림 간의 대립으로 논란이 옮겨 붙자 스스로 하야했다. 조광조의 근본주의 운동에 매료된 후배 신진 사림들은 유교를 단순히 식자들의 이념에서 당시 조선 백성 전체의 실천강령으로 만들기 위해 1세대 사림들과 결을 달리했다. 더욱이 훈구공신들과 임금에 대해 상대적으로 타협적 자세였던 원로 선배 사림들의 자세는 공격의 대상이었다. 애제자 정개청의 변절도 이 때문이었다. 사림을 위해 누구보다 치열히 싸웠던 그가 후배들에게 떠밀려 물러나야 했지만, 그는 젊은 사림들의 뜻과 의지를 꺾지 않고 지켜줄 줄 아는 대국적인 견식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문형(文衡)으로서 왕수인(王守仁)의 양명학을 철저히 배격하고 정통 주자학을 관철해 후세 서인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 등에게도 계속 존경을 받고 사상이나 작품 등이 계속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사암은 노장 사상에도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자세를 취했던 서화담의 문인이었기 때문에 문묘에 배향되지는 못했다. 사암은 조선 정치사상 처음으로 등장하는 붕당 정치의 서막에 경기도 포천 백운산에 배견와(拜鵑窩-초가집)와 이양정(二養亭)을 짓고 오래지 않아 향년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스승 퇴계 이황이 그를 묘사하길 ‘그는 한 덩이의 맑은 얼음과 같아서 그를 대하면 정신이 갑자기 시원해짐을 느낀다’고 하였다. 그의 풍신(風神)이 시원하고 명랑하며 맑고 밝으면서도 항상 몸가짐이 조용하고 경서의 깊은 뜻을 해석하여 응대함이 정민하기로 정평이 있었는데 선조도 이르길 ‘송균절조 수월정신(松筠節操 水月精神)’이라고 평한 바 있다. 명나라 신종(神宗) 연간인 1572년에 사은사(謝恩使)로 북경에 가서 당시까지 쪽문으로 드나들어야 했던 외국의 사신들을 당당히 정문으로 드나들도록 주청해 개선하였던 이야기와 송설체(松雪體-원나라 조맹부의 서체, 왕희지의 글씨가 주종을 이룸)의 대가로도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