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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 낙천주의 사상의 행복론
반경환의 {행복의 깊이} 1, 2, 3, 4권
{행복의 깊이} 제1권: 우리 인간들의 삶의 양식에 대하여
{행복의 깊이} 제2권: 우리 인간들의 삶의 의지에 대하여
{행복의 깊이} 제3권: 우리 인간들의 행복한 삶의 세목에 대하여
{행복의 깊이} 제4권: 사색인의 십계명
이제는 주체의 자율성조차도, 아니, 그 흔적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저마다 독특하고 개성적인 목소리마저도 획일적인 코드 속에 묶이게 되고, 소비자의 자유마저도 현란한 광고의 유혹 속에 그 구매의사 결정능력을 상실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 결과, 현대인들은 컴퓨터나 영상 매체 앞에서 사고하지 않고 반응하게 된다. 아는 것은 보는 것이며, 더 빨리, 더 많이 반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자 매체나 영상 매체가 인쇄 매체를 몰아내고 그 주도권을 장악한 시대는 더 이상 시인이 필요 없는 시대일는지도 모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예술가, 철학자, 사유인들을 몰아내고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인간, 로버트나 인조 인간만을 필요로 하는 시대일는지도 모른다. 과연 로버트나 유전자 공학에 의한 복제 인간이 우리 인간들의 최고의 이상적인 모델이 될 수가 있는 것일까? 역사의 종말이란 이처럼 무서운 자승자박의 함정을 지니고 있는 말인 것이다.
행복의 깊이 제1권 제1장 {행복의 깊이}에서
사상은 새로운 세계의 개진이며, 행복에의 약속이다. 사상은 그 어떤 것보다도 고귀한 명예이며, 삶의 완성이며, 보다 완전한 인간의 표지이다. 우리는 그 사상가의 신전 앞에서 언제, 어느 때나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며, 찬양과 찬송을 하게 된다. 또한 우리는 그 신전 앞에서, 우리 인간들의 존엄성을 바치고, 가장 좋은 예물을 바치고, 하늘을 우러러 보며, 항상 자기 자신을 갈고 닦으면서, 그 사상의 위업을 이어나갈 것을 맹세를 하게 된다.
----{행복의 깊이} 제1권, 제1장 [행복의 깊이]에서
철학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며,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죽음이란 삶의 완성이며, 삶이란 죽음의 완성이다. 지혜의 오른 쪽에는 장수가 있고, 지혜의 왼쪽에는 부귀영화가 있다. 따라서 모든 학문, 예술, 정치, 경제, 사회, 역사, 문화의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그 분야의 행복을 연출해낼 수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정평이란 그에 대한 믿음과 신뢰의 표지이며, 우리는 전문가들에게 그 믿음과 신뢰를 토대로 하여, 얼마 간의 존경과 경의를 표하게 된다. 과연 어떻게 하면 좀 더 잘 살 수가 있고, 행복하게 살 수가 있는 것일까? 이 명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리 인간들의 근본적인 명제이고, 그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이 명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행복의 깊이} 제1권, 제1장 [행복의 깊이]에서
나는 감히, ‘비상콤플렉스’는 ‘외디프스콤플렉스’보다도 그 울림이 더 큰 콤플렉스라고 선언할 수가 있다. 프로이트의 말대로 ‘아버지 살해’가 문화를 움직여 가는 근본적인 힘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보다 나은 인간, 보다 완전한 인간에 대한 상승 욕망 때문이지, 성적 욕망 때문이 아닌 것이다. 라마르크의 ‘획득형질’이 유전된다는 말이나 다윈의 ‘적자 생존’이라는 말도 우리 인간들의 비상콤플렉스와 상승 욕망을 증명해 주고 있는 데, 왜냐하면 그 말들은 한 치의 빈 틈도 없이 우생학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상승 욕망은 권력 욕망이나 성적 욕망보다도 그 울림이 더 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인간의 욕망에 맞닿아 있다. 우리는 타인들을 지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지도 않고, 아버지를 살해함으로써 종을 보존하려는 성적 욕망에 종속되어 있지도 않다. 보다 나은 인간, 보다 완전한 인간, 즉 신적인 인간에 대한 상승 욕망이 권력 욕망이나 성적 욕망을 자라나게 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외디프스콤플렉스는 조건없이 비상콤플렉스의 하위개념으로 편입되어야 하며, ‘아버지 살해’는 ‘비상콤플렉스’의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설명되고 실천되지 않으면 안 된다.
----{행복의 깊이} 제1권, 제2장 [상승주의의 미학]에서
죽음은 삶의 완성이며, 삶은 죽음의 완성이다. 우리 인간들의 죽음은 한계가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이며, 삶의 완성으로써 언제나 열려 있다. 따라서 죽음을 삶의 완성, 즉 그 목표로 생각하게 되면, 우리 인간들의 삶이란 좀 더 오래 살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간에, 그 어느 것도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행복의 깊이} 제1권, 제3장 [하강의 깊이]에서
나는 ‘우리 인간들이 살아있는 한 죽음이란 없고 죽음이 찾아오면 우리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적 명제를 나의 철학적 명제, 즉, ‘우리 인간들은 죽어갈 수가 있어서 권태롭지 않고, 또다시 태어날 수가 있어서 허무하지 않다’라고 바꾸어 놓고자 한다. 왜냐하면 에피쿠로스의 철학적 명제는 애써 죽음과의 연관성을 부정한 말에 지나지 않지만, 나의 철학적 명제는 어떤 두려움이나 공포도 없이 자기 자신의 죽음을 죽어갈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행복한 죽음은 이 세상의 삶에 대한 옹호이며, 삶의 완성으로써의 예술적인 죽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은 생물학적으로 신체의 소멸을 뜻하고, 이 세상의 삶의 종말을 뜻한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에게 너희들의 삶을 살고, 너희들의 죽음을 죽으라고 가르쳐 주고 싶다.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아름답고 행복한 죽음, 그 예술적인 죽음을 너희들은 죽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행복의 깊이} 제1권, 제3장 [하강의 깊이]에서
자연의 법칙에 따르자면, 자기 자신의 발로 설 수 없고, 날지 못하는 새와 걷지 못하는 짐승들은 도태되게 되어 있으며, 그 자연스러운 순리의 흐름에 거역하는 어떤 움직임도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의 우리 인간들의 실정은 어떠한가? 두 발로 걸어다닐 수도 없고 더 이상의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지 않은 인간들마저도 ‘휴머니즘’의 이름으로 부양을 하고, 이미, 그 수명을 다하여 더 이상 살아 있는 것이 그처럼 욕되고 부끄러운 식물 인간들마저도 산소호흡기와 알부민과 진통제와 항암제에 의지하여 그 수명만을 연장시켜 나가고 있지 않은가? 더 이상 인간일 수도 없고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닌, 그 식물 인간들과 노인들을 위해서, 그처럼 엄청난 인력과 시간과 자원낭비를 하고 있는 것이 휴머니즘이라면, 그것은 자연에 대한 최악의 테러 행위이며, 파렴치한 범죄 행위가 아닐 수가 없다. 오늘날의 의학과 유전자 공학에 의한 휴머니즘은 반휴머니즘이며,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휴머니즘을 더럽고 추하게 오염시키는 암적인 종양에 지나지 않는다.
----{행복의 깊이} 제1권, 제3장 [하강의 깊이]에서
나는 인간 존재론은 주체성의 확립을 통해서 그 존재의 기반(실존적 토대)을 마련하고, 그리고 그 존재자로부터 타자(세계)로 향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첫 번째 과정은 ‘홀로서기’(존재론적 모험)의 과정이며, 두 번째 과정은 사회적 동물로서의 ‘타자성’(세계화)의 과정이다. 홀로서기는 그 주체자의 인간 관계---부모형제, 친구, 스승, 선배----를 청산한다는 점에서 ‘밖으로부터 안으로의 운동’(내재성의 확립)이기도 하고, 또 인간 관계의 사회적 장을 떠나서 떠돌이와도 같이 주변인으로 밀려난다는 점에서 ‘안으로부터 밖으로의 운동’(외재성의 확립)이기도 하다. 이 안과 밖, 즉 내재성과 외재성이 상호 겹쳐지는 운동이 바로 ‘홀로서기’(주체성의 확립)이며, 우리 인간들의 생사의 운명을 좌우하는 지상 최대의 모험이 된다.
----{행복의 깊이} 제1권, 제4장 [넓어지는 지평선]에서
내가 낙천주의자로서 우리 인간들의 ‘행복론’을 연출해 내고자 했을 때, 나는 그 무엇보다도 ‘제3세계의 문화적 풍토병’과 ‘비평의 만장일치제도’ 속에 신음하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을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3세계의 문화적 풍토병은 타인의 말과 타인의 사유 앞에서 노예적인 복종 태도를 보이며, 서양인들이 ‘서양인들은 문화인이고, 동양인들은 야만인’이라고 부르면, 바로 그렇게 따라 부르는 병----아무런 명명의 힘도 없는 병----이며, 비평의 만장일치제도는 아버지와 스승의 권위 앞에서 ‘비평하기보다는 기꺼이 찬양’하는 제도를 말한다. (......) 따라서 그 근친상간의 추태를 바로잡기 위해서 ‘나는 신성모독을 범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세계는 나의 범죄의 표상이다, 고로 나는 행복하다’라는 낙천주의자의 제1의 명제를 정립할 수밖에 없었다.
----{행복의 깊이} 제1권, 제4장 [넓어지는 지평선]에서
이제 우리는 어떻게 모험을 시작할 것인가?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삶의 목표를 정하고 자기 자신의 생사를 걸만큼의 무거운 짐을 스스로, 자발적으로 짊어기만 하면 된다. 자, 출발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기 위해서는 또한, 모든 인간 관계를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내도, 형님도, 동생도, 어린 자식들도, 친구들도, 민족도, 국가도, 도덕도, 법도, 질서도,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기독교도, 불교도, 힌두교도, 이슬람교도, 자이나교도, 회의론도, 도덕부정론도, 고전주의도, 낭만주의도, 현실주의도, 초현실주의도, 구조주의도, 탈 구조주의도, 그리고 그 모든 것들도, 모두가 다같이 ‘네 에미 씹’일 뿐이다. 더욱더 무거운 짐을 짊어지기 위해서 모든 인간 관계들을 청산하게 되면, 이제는 삶의 목표보다도 모험만이 더욱더 소중해 지고, 모험 자체가 삶의 목표가 되어주게 될는지도 모른다. 하늘도 넓어지고, 지평선도 넓어지고, 그 주체자의 가슴도 넓어진다. 넓어지는 지평선은 신성모독의 지평선이며, 낙천주의자의 지평선이다.
----{행복의 깊이} 제1권, 제4장 [넓어지는 지평선]에서
모든 싸움의 근본목적은 도덕적으로 선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것이며, 정치 경제적으로는 더 넓은 국토와 더 많은 부를 얻기 위한 싸움이다. 도덕적 선의 고지는 사실 그대로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자의 입장에서 도덕적 선을 규정하고 그 규정에 따라서 타인들과 이웃 국가들을 복종시킬 수 있는 힘에 지나지 않는다. 정복자는 이웃 민족국가의 영토를 빼앗고 그 원주민들을 노예로 거느리게 되고, 피정복자는 자기 영토를 빼앗기고 이민족을 하나님과도 같은 주인으로 섬기지 않으면 안 된다.
----{행복의 깊이} 제1권, 제5장 [포효하는 삶]에서
우리 인간들에게는 ‘공격본능’과 ‘방어본능’이라는 두 가지 본능이 있으며, 공격본능은 자기의 영역과 세계의 영역을 확대하고, 방어본능은 외부의 적을 맞이하여 자기 자신의 생명과 그 영역을 지키는 데 사용하게 된다. 공격본능이 강화되면 그가 속한 민족이나 국가나 개인은 끊임없이 세계의 영역을 확대하고 그 승리의 찬가를 부를 수가 있지만, 그 공격본능이 퇴화되고 방어본능만이 있는 민족이나 국가나 개인은 끊임없이 몰락과 쇠퇴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오늘날 제국주의자들은 대내적으로는 민주주의를 하고, 대외적으로는 식민주의를 선호한다. 민주주의는 그들이 속한 국가의 구성원들에게 만인 평등과 언제나 국가의 주권이 그들에게 있다는 믿음을 상기시켜주고, 그리고 그 국민들의 단결과 민심의 결집을 이끌어 내는 힘으로 작용을 하게 된다. 다른 한편, 그들의 제국주의는 그 일체화된 국력을 기초로 하여, 제3세계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무차별적으로 짓밟아 버리는 힘으로 작용하게 되고, 그들의 제국주의적인 마수를 보지 못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의 장치들----민주주의와 만인 평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바로 그것이다-----을 암암리에 설치하게 된다. 이 이데올로기적인 장치들, 즉 민주주의와 만인 평등사상은 그들의 제국주의적인 마수를 보지 못하게 하는 ‘오인의 메카니즘’으로 작용을 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따라서 제3세계의 국민들은 민주주의와 만인 평등사상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것을 수용하게 되고, 거꾸로 제국주의자들의 입김이나 그들의 하수인에 불과한 독재자들에게 짓밟히게 된다. 제국주의자들은 오늘날의 미국이나 유럽처럼, 대내적으로는 민주주의로 그들의 방어본능을 강화시키고,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로 그들의 공격본능을 강화시켜 나간다. 이 공격본능과 방어본능이 제대로 균형 있게 작용을 하고 있는 국가나 그 국민은 주체성의 확립이 타자성의 완성으로 이어지고, 자기 영역의 확대가 세계영역의 확대로 이어진다. 그들은 어떠한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는 기사도적인 모험정신과 성자의 영웅주의가 육화된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행복의 깊이} 제1권, 제5장 [포효하는 삶]에서
나는 천성적으로 호전적이고 전투적이지만, 나는 나의 싸움에 관한 실천 원칙을 갖고 있다. 나의 싸움은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이며, 이제까지의 그 싸움이 만인들의 횡포에 견디지 못한 일인의 싸움에 불과했다면, 나는 그 ‘원한 맺힌 저주 감정’ 없이 만인들의 어리석음을 문제삼고, 그들 모두가 자기 자신들도 모르게, 나의 적이 될 수밖에 없도록 몰아 부쳤던 것이 그 특징적이다. 나의 욕망은 상승 욕망이며, 그 상승 욕망은 니체의 권력 욕망이나 프로이트의 성적 욕망을 하위 개념으로, 혹은 종속 개념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보다 나은 인간, 보다 완전한 인간, 그 신적인 인간이 나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우리 인간들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내가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 즉, 저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우리 학자들은 신문과 대중매체, 넋 잃은 독자와 그 옹호자들에 둘러싸여 매우 보잘 것 없고 아주 작은 승리에 도취되어 있기가 십상이지만, 나의 승리는 가장 처절하고 비참한 패배에 둘러싸여 그 승리의 의미도 퇴색해 버리고, 이내 그 몸 둘 곳을 몰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면적인 양상일 뿐, 그 깊은 곳에서는 언젠가는 새로운 태양처럼 떠오르게 될 에너지로 충만해 있는 것이다. 높이 높이 날아오른 새가 잘 보이지 않듯이, 깊이 깊이 내면으로 스며든 나의 승리가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에게 보일 리가 없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을 수행하고 있으며, 그 궁극적인 목표는 낙천주의자의 신전의 건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상은 그 어떤 것보다 고귀한 명예이며, 삶의 완성이며, 보다 완전한 인간의 표지이다.
----{행복의 깊이} 제1권, 제5장 [포효하는 삶]에서
나는 퀴리 부인의 라듐에 대한 특허권의 포기가, 그녀의 라듐의 발견보다도, 그리고 그 발견으로 인한 수많은 난치병의 치료와, 방사능과 원자력으로 이어진 과학 발전에 대한 기여보다도 더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돈과 명예는 같은 무대에 들어갈 수도 없고, 또 돈으로 명예를 살 수도 없다. 진정한 인간(학자)의 꽃은 사상의 꽃이며, 그 꽃은 더없이 맑고 깨끗한 휴머니즘이라는 옥토가 아니면 피어날 수가 없다. 최초의 라듐의 발견자, 최초의 방사능의 명명자, 여성으로서의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최초로 노벨상을 두 번씩이나 수상한 과학자, 소르본 대학교의 최초의 여성 교수----, 이처럼 퀴리 부인 앞에 ‘최초’라는 헌사가 붙게 된 것은 그녀가 최초의 명명자이자 최초의 입법자이며, 마치 전제군주와도 같은 사상의 신전을 세웠기 때문이다.
----{행복의 깊이} 제1권, 제6장 [신생의 넋]에서
나는 이 세상에서 문화적 영웅의 아름다움이 가장 얻기가 힘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가 딛고 있는 토대는 그 입문의례과정을 통한 사상의 토대일 수밖에 없으며, 그는 그 사상의 신전에서 오늘도 언제나 어린 아이처럼 영원불멸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나는 한국문단과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서 영원히 버림을 받은 이단자에 지나지 않지만, 나는 그 홀로된 자의 고독과 그 행복한 생활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 나의 서재는 나의 왕국이며, 니체, 칸트, 플라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미셸 푸코, 하이데거, 호머, 셰익스피어, 괴테, 보들레르, 랭보 등은 나의 충직한 신하들이다. 나는 오늘도 그들을 데리고 인류 전체의 행복과 그 건강을 토론하고, 그리고 정오에는 ‘愛知의 숲’을 하염없이 거닐었었다.
----{행복의 깊이} 제1권, 제6장 [신생의 넋]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