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그야말로 다양하다. 소주야말로 우리의 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소주는 값싼 화학주라고 입에 대지도 않는 사람도 있다. 또 소주만 마시면 골치가 아프다는 사람이 있는 반면, 소주는 순수알코올에 가깝기 때문에 가장 깨끗한 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요즈음은 사카린이 없다, 물이 좋다, 첨가물이 없다는 등 저마다 특징을 강조하지만, 우리가 흔히 마시는 소주는 곡주를 증류하여 만든 '증류식 소주'가 아니고, 95% 알코올인 주정(酒精)에 물을 타서 적당량의 감미료와 조미료를 넣은 '희석식 소주'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즐겨 마시는 희석식 소주의 맛은 주원료보다는 부수적으로 들어가는 물이나 첨가물에 의해서 그 맛이 좌우되는 다소 희극적인 모습이 되어 버렸다.
우리나라에 증류기술이 들어온 것은 고려시대 말 몽골군이 지배할 무렵이다. 이들은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하면서 아라비아에서 시작된 증류기술을 이 땅에 가져온 것이다. 증류식 소주는 쌀이나 보리 등 곡류로 술을 만든 다음 이 술을 소주고리라는 장치에서 서서히 가열하여, 발생하는 알코올 증기를 찬물로 냉각시켜 한 방울씩 받아서 모은 것이다.
이러한 원시적 증류장치는 원료 특유의 향이 그대로 전달되지만, 근래 개량된 연속식 증류장치는 불순물을 없애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유의 향도 없어지고 순수 알코올만 나오기 때문에 원료의 특성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서양의 유명한 꼬냑이나 스카치 위스키는 지금도 연속식 증류를 하지 않고 원시적인 방법을 고집하고 있다.
원래 우리의 전통 소주는 원시적인 증류법으로 만든 증류식 소주이지만, 일제시대를 거치고 다시 경제개발을 지상목표로 정하면서 증류식 소주는 완전히 사라지고, 희석식 소주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렇듯 희석식 소주는 우리나라의 양곡정책이 빚어낸 족보가 애매한 사생아인 셈이다. 그렇지만 희석식 소주는 수십 년 간 격동의 세월을 살아온 서민의 애환을 달래 주었고, 지금도 부담 없는 우리의 다정한 벗임에는 틀림없다.
친자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무던하고 부담 없는 성격 덕분에 친자식보다 더 정이 깊어진 셈이다. 이 술은 아무런 특징이 없기 때문에 김치에서 빈대떡, 그리고 삼겹살을 거쳐 갈비, 생선회에 이르는 안주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어떤 안주와도 어울리는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렇지만 뒤집어 놓고 생각하면 어떤 안주와도 어울리지 않는 아무 맛이 없는 술이라고 할 수도 있다.
희석식 소주가 우리의 다정한 벗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부담 없는 가격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사용하는 주정은 고구마나 제당공업의 부산물인 당밀 등 비교적 값싼 원료를 발효시켜 연속식 증류공정을 거쳐 대량생산하기 때문에 값이 쌀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값싼 원료이긴 하지만 녹말이나 당분을 함유한 천연 원료를 사용하고 연속식 증류과정을 거치면서 불순물까지 제거되는 비교적 순수한 술이 희석식 소주이다. 소주를 마시면 골치가 아프다는 사람은 소주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값이 싸다고 너무 많이 마시지 않았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먹고살기가 나아지면서 외국산 술이 들어오고 쌀이 남아돌자 정부는 다시 증류식 소주의 제조와 판매를 허용하지만, 그 허가가 까다롭고 제한이 심하여 전통 기술을 전수 받았다는 몇 사람만 소규모로 생산하고 있다. 거기다 인간 문화재라는 튼튼한 보호망을 씌우고 술도 비싼 도자기로 포장하니 값이 비쌀 수밖에 없다. 애쓰고 발굴한 것이 비싼 값 때문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다.
우리 술이라면 우리 모두 마실 수 있어야지 양주에 길 들여진 돈 많은 사람이나 맛 볼 수 있으니. 이들도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마셔보다가 요즈음은 별로 찾지도 않는 모양이다.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서 친자식인지 아닌지 구분도 안되지만, 그래도 가장 많이 닮았다는 애를 다시 찾았더니 생각보다 까다롭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희석식 소주는 족보가 애매하긴 하지만, 길다면 긴 세월 동안 우리의 다정한 친구로서 희로애락을 함께 해온 술이며, 고난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소주를 우리의 것인지 아닌지 따지지 말자. 이렇게 하기에는 너무 늦은 감이 있다. 한복에 두루마기를 걸치고 서양에서 온 중절모자에 하얀 고무신을 신으셨던 우리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우리의 전통 복장인지 아닌지 따지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 같다.
어떤 것이 우리 고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지, 꼭 소주에만 국한 된 문제는 아닐 것이다.
김준철 (서울와인스쿨 원장)
연우포럼 제공
www.younwooforu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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