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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아날로그 추억은 이제 없다.
앞서 말한 학교를 수단으로 이용한 도시 개발 계획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양정고와 진명여고는 목동신시가지의 조성을 위해 양천구 목동으로 이전했다. 1978년 2차 석유파동과 정치 불안으로 1980년 경제성장률이 -1.5%로 떨어지자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부는 흉흉해진 민심을 잡고자 주택경기활성화에 집중했다. 특히, 인구의 도시 집중이 심화되면서 대도시의 주택부족문제가 심각해지자, 주택 500만 가구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물론 실제로는 1987년까지 176만 가구가 공급 되었지만, 문재인 정부의 주거복지로드맵에서 제시한 목표가 100만 호임을 생각하면 엄청난 물량이라 할 수 있다.
전두환 식 발상이라고 할까, 특정 지역을 택지 개발 예정 지구로 지정해 도시계획법 등 19개 법률의 효력을 일시 정지시킨 뒤, 정부가 일괄 매수해 택지로 개발하는 방식인 택지개발촉진법이 1980년에 제정되었다. 택지개발촉진법은 도시개발 방법을 공영개발 방식으로 바꿨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이 택지개발촉진법에 따라 개포, 고덕, 목동, 상계, 중계 택지지구가 조성되었고 노태우 정부에서 1기 신도시를 개발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목동신시가지아파트는 바로 전두환 정권의 주택 500만호 건설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다.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1980년대 중반 서울시는 김포공항 주변 정비를 위해 목동 개발을 서둘렀다. 이대 부속병원을 이곳에 유치하였고 목동종합운동장을 건설하는 한편, 바로 그 무렵 양정고와 진명여고를 목동아파트단지 안에 신축한 것이다. 아파트 분양을 위한 극단적인 학교 이전 사례는 또 있다. 서울시는 1988년 6월 준공된 122개동 5539세대의 올림픽선수촌아파트를 분양하기 위해 보성고와 창덕여고를 이곳으로 이전키로 했다.
서울시는 올림픽선수촌아파트를 분양하면서 거주 기간에 상관없이 보성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고 선전하였다. 당시 8학군(강남구, 강동구)은 위장전입이 횡행할 정도로 입주자가 몰려들었다. 서울시 교육위원회는 8학군 소재 고등학교의 입학 자격을 거주 기간 순으로 배정하였다. 8학군 고등학교의 입학 기준인 거주 기간 원칙이 무너질 경우 엄청난 혼란이 예상되었다. 결국 거주 기간에 상관없이 보성고에 입학할 수 있다는 서울시의 약속은 지켜질 수 없었다.
한마디로 최악질임에도 당시 집권 초기 전두환은 운이 좋은 사람이다. 1980년대 서울올림픽 개최와 3저 호황은 강남 개발과 투기를 부채질하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전두환 정부는 서울 도심 정비와 함께 잠실올림픽 경기장을 비롯한 강남 일대의 개발을 일단락 지었다. 당시 한국경제는 국제적으로 형성된 3저(저달러, 저금리, 저유가) 효과를 등에 업고 고도성장을 구가하였다. 호황에 따른 여유자금은 강남 발 부동산 불패 신화의 불쏘시개였다. 이 시기 강남은 한국 사회의 빈부격차를 증폭시키는 진원지인 동시에 대한민국은 천민자본주의를 상징하는 투기와 탐욕의 또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부동산 시장은 금세 과열되었다. 치솟는 부동산 가격을 잠재우기 위해 부랴부랴 불을 꺼야 했다. 1982년 분양가상한제와 전매제한 등이 포함된 12.22 주택 투기 억제 대책을 발표했으며, 1983년에는 채권입찰제, 1984년 토지거래신고제, 1985년 비 업무용 토지 누진과세와 대형주택 중과세 등 규제 대책을 연달아 내놓는다. 그 결과, 1985년 주택경기가 다시 침체되었고 전두환 정부는 공공과 민간 합동 토지개발과 건축규제를 완화하는 9.5 주택건설 활성화 대책과 1986년 1가구2주택자 양도세 면제기간 연장 등이 포함된 2.12 주택건설 활성화 대책 등 경제 및 부동산 경기 활성화 정책을 시행했다. 그 후 다시 과열양상을 보이자 1987년 부동산 투기 억제 대책을 내놓기도 했다. 이렇듯 들쑥날쑥한 일관성 없는 정책의 연속이었다.
이러는 동안, 정부는 신뢰를 잃고 부동산 가격은 계속 올랐다. 1981~1983년 주택 가격이 40.6% 급등하고 1981년 26.5%였던 매매가 대비 전세가율이 1987년 122.2%가 될 정도로 부동산 매매 및 전세가격이 크게 상승했다. 1985년부터 시작된 저금리, 저유가, 저달러의 ‘3저 현상’에 베이비붐 세대의 취직과 결혼으로 인한 주택수요 증가, 1988년 올림픽 특수와 증시호황으로 유동자금까지 넘쳐나면서 부동산 시장이 들끓기 시작했다. 1987년 2.25 부동산 투기억제 대책이 발표되긴 했지만 과열된 부동산 시장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87년 이후 5년도 안되어 강남 아파트 가격이 5배 정도 뛰었으니, 이때에 비하면 요즘 주택 가격 상승은 상승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으로 상황이 심각했다.
1970년대 복부인이 있었다면 1980년대는 ‘빨간 빽바지’가 등장했다. 빨간 빽바지는 전두환 정부시절 군 장교 부인들이 빨간 바지를 즐겨 입고 다니면서 정부의 부동산 정책 관련 고급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뒤 싹쓸이 투자를 하면서 생겨난 별명이었다. 정부의 고급정보를 이용해 부동산 투기를 한 잘못된 고위직의 일탈은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전두환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시장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투기억제 정책과 시장 활성화를 위한 경기부양 정책을 반복하는 임기 대응 적 성격이었다. 그 중에서도 전반적으로는 규제완화 비중이 더 컸고, 개발정책은 주택공급 확대 위주였다. 부동산 개발정책으로는 상계지구 등 주택115만호 건설, 한강정비사업, 1982년 임대주택 육성방안, 1985년 중부고속도로 착공, 서울 개포, 고덕, 목동, 상계, 중계지구 개발계획 등을 꼽을 수 있다.
노태우 정부는 인천국제공항, KTX, 서해안 고속도로 등의 국책사업을 추진하였으며 신도시 건설 추진, 200만 호 주택건설까지 추진하여 부동산 폭등을 억제하고 부동산 시장을 안정화 시키는 등 경제면에서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 부동산 문제도 심각했는데 노태우 정부는 토지 공 개념을 도입해 정부가 재벌과 대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비업무용 부동산을 매각 처분하였는데 토지 공 개념 덕분에 재벌과 대기업은 소유하고 있던 비업무용 토지 4천 만평을 처분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어느 새 강남은 부와 특권을 상징하는 지역으로 굳건한 성채를 쌓았다. 이 시기 강남은 좁게는 강남구를, 넓게는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를 지칭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대한민국은 강남에 뿌리를 둔 소수 특권층이 지배하는 강남공화국이 되고 말았다. 더 이상은 그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난공불락이 되고 만 것이다.
사람들은 이후부터 강남과 강북을 나누어 생각하곤 한다. 다들 이에 열중할 뿐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아날로그 형태로 말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문득 유득공의 한양 진경 산문이 떠오른다. 『경도잡지』를 따로 저술할 만큼 한양의 자연 풍경과 민간의 풍속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유득공이 이덕무와 박지원 등과 어울려 봄이 한창 무르익은 한양도성의 구석구석을 유람하면서 기록한 ‘춘성유기(春城遊記)’ 또한 18세기 당시 한양의 진경(眞景)을 묘사한 걸작 산문이다.
<“경인년(庚寅年) 3월 3일, 연암(박지원)과 청장관(이덕무)과 어울려 삼청동으로 들어가 창문(倉門) 돌다리를 건너 삼청전(三淸殿)의 옛터를 찾아갔다. 그곳에는 오랫동안 내버려두어 황폐해진 밭이 있었는데, 세상 온갖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자리를 잡아 앉았더니 녹색 물이 옷을 물들였다. 청장관은 풀이름을 많이 알고 있다. 내가 이런 저런 풀을 뜯어 물어보았다. 청장관이 대답하지 못하는 풀은 없었다. 이에 수십 종의 풀이름을 기록했다. 청장관은 어떻게 그토록 해박하고 고상할까? 해질녘에 술을 사서 마셨다.
다음날에는 남산에 올라갔다. 장흥방(長興坊)을 거쳐서 회현방(會賢坊)을 뚫고 걸어갔다. 남산 부근에는 옛적 재상들이 거처했던 집이 많다. 무너진 담장 안에는 늙은 소나무와 전나무가 당당하게 남아 있었다. 높은 언덕에 올라가 시험 삼아 바라보았다. 백악(白岳 : 북악산)은 둥글고 뾰족하게 서 있는 형세가 마치 모자를 뒤집어 쓴 모양과 같다. 도봉산은 삐죽삐죽 솟은 형세가 마치 투호 병에 꽂혀 있는 화살이나 필통에 붓이 놓여 있는 모양과 같다. 인왕산은 마치 사람이 인사하면서 두 손을 놓았지만 그 어깨는 아직 구부정하게 하고 있는 모습과 같다. 삼각산은 사람의 무리가 공연을 관람하는 자리에 키가 큰 사람 하나가 등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내려다보는데, 여러 사람의 갓이 그 사람의 턱에 닿아있는 모습과 같다.
한양도성 안의 집들은 마치 검푸른 빛의 밭을 새로 갈아서 반짝반짝하는 모양이고, 큰길은 마치 기다란 하천이 들판을 갈라놓고 굽이굽이마다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형세다. 사람과 말은 그 하천 속에서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새우와 같다.
도성의 가구 수는 8만 호이다. 그 속에서 이 순간 함께 노래하고, 함께 울고, 함께 술 마시고 밥 먹고, 함께 장기나 바둑을 두고, 함께 칭찬하고, 함께 헐뜯고, 함께 어떤 일을 하고, 함께 어떤 일을 도모하고 있다. 높다란 곳에 있는 사람에게 그 모습을 관람하게 한다면 한바탕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또한 그 다음날에는 태상시(太常寺)의 동쪽 누대에 올라갔다. 육조(六曹)의 누각, 궁궐의 하천 가 버드나무, 경행방(慶幸坊)의 백탑(白塔), 동대문 밖 아지랑이가 보일 듯 말 듯 은은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기이한 것은 낙산(駱山) 일대였다. 모래는 하얗고 소나무는 푸르다. 그 밝고 고운 모습이 마치 그림과 같다.
여기에 다시 작은 산 하나가 마치 엷은 먹물 색의 까마귀 머리와 같이 낙산 동쪽에 솟아 있다. 그 산이 구름 속으로 보이는 양주(楊州) 지방의 산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문득 들었다. 이날 밤 나는 술에 아주 취해 서여오(徐汝五 : 서상수)의 집의 살구나무 꽃 아래에서 잠이 들었다.>
1770년 나이 23세가 되는 봄날 며칠 동안 삼청동, 남산, 경복궁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노닌 한양의 명승지 풍경을 유득공 특유의 섬세한 감성으로 표현한 진경 산문이다. 특히 남산의 높은 언덕에서 바라본 백악(북악), 도봉산, 인왕산, 삼각산(북한산)에 대한 형상 묘사는 절묘하기 짝이 없다. 본문에서는 생략했지만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아직 복구하지 못한 채 폐허로 남아 있는 경복궁의 여러 유적의 실경(實景)의 묘사는 훗날 역사적 사실로서도 큰 자취의 흔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나는 현 시대의 이런 탐방이 없을지 여러 문장을 쫓았지만 소득을 얻지는 못했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읽은 문학가들이 과거를 회상하며 쓴 서울을 품은 사람들 이야기가 고작이다, 그 애틋한 아날로그는 기억의 저편으로 푸드덕 지고 말았다. 소설가 송원희씨의 고향은 광화문 뒷골목 적선동 내수동 내자동 어름이다. 지금은 거대한 빌딩과 아파트들이 들어선 그 자리는 본래 오밀조밀한 한옥 촌이었다. 아침이면 두부장수의 종소리와 물장수의 물지게 소리가 잠을 깨웠고, 낮에는 채소며 생선 장수가, 밤이면 만두를 파는 고학생들이 지나다녔다. 두 개의 나무토막을 따악따악 치며 밤 골목을 지켜준 방범원 ‘딱딱이’들도 있었다. 당시 광화문 네거리에는 작은 구멍가게들이 즐비해서 아이들의 놀이마당으로 구실했노라고 송씨는 증언한다.
수필가 전숙희씨는 “계동에서부터 안국동을 지나 종로를 건너면 덕수궁 뒷길로 올라가는 좁은 골목”을 걸어서 정동의 이화학교에 다니던 시절을 회고한다. “검정 치마에 자주색 무명 저고리, 자주색 댕기” 차림인 여학생들이 지나가면 이웃 배재 학생들은 “우리 배재학당, 이화학당 연애합시다. 연애하고 연애하고 결혼합시다!” 큰소리로 노래하듯 외쳤다는데. 그런 청춘의 자유로운 분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같은 정동 골목 안에 있던 법원으로는 오랏줄에 묶인 반역자(=독립운동가)들이 들어가고 나왔으며, 그 모습을 보면서 소녀는 “분노와 아픔에 가슴이 떨리곤 했다.”
지금의 오장동에서 태어난 시인 강민씨는 서울 변두리 신당동 장충초등학교에 다녔다. 주변에는 배추밭이 많았고 학교 앞에는 냇물이 흘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건너편에 있는 지금의 청구초등학교는 당시 일본 아이들이 다니던 사쿠라오카(櫻丘)초등학교. “냇물에서 물고기, 올챙이를 잡고, 풀밭에서는 메뚜기, 잠자리 따위를 잡으며 놀”던 아이들은 간혹 일본 아이들과 패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배우개’의 청계천 주변, 멀리는 청량리를 거쳐 물고기 잡이를 갔던 중랑천, 신설동 경마장 뒤의 미나리밭, 왕십리의 살곶이다리 주변, 매미, 참새, 토끼몰이에 몰두하던 남산… ”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서울의 관광 명소 인사동의 옛모습은 수필가 고임순씨의 작품에 고즈넉이 남았다.
“50년대 후반, 인사동에서 가끔 긴 담뱃대를 물고 양반걸음으로 활보하는 갓 쓴 할아버지와 만날 때도 있고 쪽찐 아낙네들이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엉덩이를 흔들며 걷는 모습과도 마주쳤다. 길모퉁이에 신문지를 깔고 붓 서너 자루와 <토정비결> <육전 소설> 책을 놓고 파리를 쫓다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노인의 모습도 정겨웠던 길.”
“내 젊은 시절의 생각이나 정서는 서대문 밖에서 키워지고 단련된 것”이라 말하는 소설가 김용성씨는 등단작 <잃은 자와 찾은 자>(1961)를 비롯해 <도둑일기> <슬픈 양복 재단사의 나날> 등의 작품에서 자신의 성장지인 서대문 밖 현저동과 무악재, 영천시장, 독립문, 서대문형무소 등을 배경으로 등장시켰다. 소설가 김녕희씨는 중편소설 <유성의 시>(1972)에서 돌체와 세시봉, 동화음악실 같은 명동의 음악실로 커피를 마시러 다녔던 전후파 여대생들을 등장시킨다. 소설가 이세기씨는 복개 직후 청계천에 들어선 음악카페 ‘템테이션’에 소설가 황순원 선생과 <현대문학> 편집장 김수명씨와 함께 다니던 시절을 아스라이 회고한다. 복개되기 전 3층짜리 판잣집들이 들어서 있던 시절의 남루한 청계천 풍경은 소설가 구인환씨의 <판잣집 그늘>에 잘 그려져 있다.
이가림씨의 시 <우리들의 둥지>는 “명륜동 앞길로 전차가 지나다니고/구멍 뚫린 카키빛 작업복 주머니 속에/등사판 잉크 냄새 풍기는 교재를/세기아(世紀兒)처럼 꽂고 다니던 시절”을 노래한다.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자신들의 삶과 문학에 버무려 더듬은 문인들의 심정은 아마도 소설가 윤후명씨의 단편 <서울 랩소디>에 적절히 요약되어 있을 법하다.
<새로 단장한 청계천을 내리 걷노라면 만감이 교차한다. 나이가 들수록 잊고, 버려야 할 게 늘어나서 그렇겠지. 박태원의 <川邊風景>, 박순녀의 <청계천 맑던 시절>의 구절들이 입가에 맴돈다. 전태일 동상, 두물다리, 황학교, 정조반차도…. 스치는 게 모두 역사의 진애(塵埃)요, 애잔한 아픔이다. 청계천에서는 물고기도 화초도 슬프다. 머리와 가슴에 담긴 게 모두 쓰린데 굳이 새로운 기억거리를 만들려 디카를 들이대는 것은 무슨 수작인가. 윤후명의 2007년 소설집 <새의 말을 듣다>(문학과지성사)에 수록된 단편 <서울, 촛불 랩소디>.
얼마 전 장관이 되려다만 안경환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말이 썩 마음에 든다.
<첫 번째는 그렇다 치고, 두 번째에도 맺어지지 못한 사랑이 있었다. 당초 약속한 사이였지만 그냥 그렇게 되어버렸다. 문학보다 학문을 택해 대학에 ‘남겠다’는 그녀의 소망도 시대의 바람 앞에 흩어져 버렸다. 우리는 여전히 헝가리 랩소디에 기대어 우는 사춘기가 긴 머저리. ‘순수라는 이름의 청계귀신’의 검은 보자기 속에서 허우적이는 천변인(川邊人). 그게 어찌 작가만의 모습이랴, 민춤한 우리 세대 사내의 전형이지.
고도성장과 고도상실. 청계천에는 두 귀신이 함께 덮친다. 그래도 새해에는 좀 다르겠지. 새 기분으로 걷는다. 흡사 청계귀신에 씌듯이 촛불 타고 너울거렸던 지난해의 악몽을 털어내야지. 객쩍은 소망에 만연히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운좋게 윤후명 닮은 사내라도 만나지 않을까. 민족·뿌리·말·새·풀…. 수십 년 동안 남의 혼을 유린한 책임을 지라고 떼라도 쓸까보다. 어디, 눅진하게 술 한잔 쪼갤 ‘촛불과 피아노’를 갖춘 카페라도 없을까. 잠시 멍울진 기대에 부푼 나비소녀가 된다.>
윤후명처럼 아마도 지금의 서울은 잊고 지울게 너무 많아졌다. 정감 멀어지고 운치 하나 없는 서울은 고도성장과 고도상실에 지친 몰골들이 귀신 다되어 단지 아파트를 돈으로 헤아리는 지성만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몇 십억에 시멘트에 갇힌 채 허송세월을 건물 높이만큼 부지런히 또 쌓고 있다. 아름답고 깊이 있는 공간에 내 삶을 놓고 모든 일회성 삶에 영원성을 담보하는 도시 공간을 꿈꾸는 것은 그야말로 꿈같은 이야기다.
13. 개포동과 상계 주공 아파트
개도 포기한 동네라는 개포동은 현재 미세먼지 매연 등의 농도가 장난이 아니다. 뒤쪽에 양재대로가 있어서 미세먼지가 빠져나가지를 못 한다. 그래서 대모산 산 냄새가 전혀 안 난다. 전두환이 만든 개포 도서관 뒷산은 음침해서 자살자가 많았다는데 그 말도 옛이야기, 은마 사거리를 중심으로 대각선으로 선릉까지만 짚어도 뽀오얀 살결의 건물로 부터서 고급술집에 판사님 연예인 조폭 사기꾼까지 없는 게 없는 그야말로 휘황찬란한 안개 속 도심이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 토박이 주민들이 동네를 가리켜 부르는 우스갯소리, ‘개도 포기한 동네(1970년대)는 →개도 포니 타는 동네(1980년대)에서→개도 포르쉐 타는 동네(2010년대)로 40년 만에 급변했다. 서울 양재천 하류 개포동은 원래 갯벌이 있었다고 해서 ‘개펄’ ‘개패’ 등으로 불리다 개포(開浦)란 지명을 얻었다. 논밭이 대부분이었던 이곳에 1980년대 강남 개발 붐을 타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형성됐다. 그런 개포동은 최근 재건축 바람을 타고 변신에 한창이다.
서울시는 2017년 도시계획위원회 심의에서 개포 주공 6·7단지 재건축 정비계획수립·정비구역지정안을 통과시켰다. 각각 1983년 완공한 6단지 13~15층 1060가구, 7단지 15층 900가구가 통합 재건축을 통해 최고 35층 2994가구로 재탄생한다. 앞서 2017년 5월엔 개포주공5단지도 13~14층 940가구를 최고 35층 1307가구로 재건축하는 안이 서울시 심의를 통과했다. 이들 단지의 심의 통과로 모든 ‘개포주공’ 아파트가 재건축에 돌입했다.
서울 강남권에 남은 마지막 ‘매머드급’ 재건축 단지로 꼽히는 개포주공아파트. 집 없는 서민의 주거 안정을 위한 ‘주택 500만호 건설계획’의 일환이었다. 1982년 5층 국민주택규모인 1~4단지, 1983년 14~15층 고층아파트인 5~7단지가 건설됐다. 공무원 임대주택인 8단지는 1985년, 9단지는 1983년 각각 준공됐다. 1단지 5040가구, 2단지 1400가구, 3단지 1160가구, 4단지 2841가구, 5단지 940가구, 6단지 1059가구, 7단지 900가구, 8단지 1680가구, 개포시영 1970가구 등 1만7000가구에 이른다.
알다시피 이 개포동은 강남 부촌의 대명사인 도곡동·대치동과 맞닿아 있다. 대치동 학군과 가까운 데다 지하철 3호선·분당선, 수서역과 인접한 교통 요지다. 특히 개포동은 한강 조망권을 앞세워 집값을 이끄는 반포동과 달리 양재천과 녹지를 갖췄다. 2~3단지 사이엔 개포공원이 있고 단지 뒤쪽으로 구룡산·대모산이 둘러싼 형새다. 개포동에서 사는 사람들은 “학원은 대치동, 병원은 일원동(삼성병원), 산책은 양재천, 쇼핑은 강남을 말한다. 조용하게, 불편함 없이 산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개포아파트의 최고 장점은 바로 저층 아파트였다는데 있다. 1981년 4월 전두환 정부는 ‘주택 500만 호 건설계획’에 따라 택지개발촉진법을 적용하는 첫 사례로 개포지구를 선정했다. 건설부 장관이 ‘집을 지을 땅(택지개발예정지구)’이라고 결정하면 다른 22개 법률의 효력을 중지시키고 개발을 밀어붙이는 엄청난 위력의 법이었다. 전두환이 고마워 눈물이 날 지경이 왜 아닐까 싶다. 저층이 고층으로 쭉 뻗으면 바로 건폐율에서 실 이익은 엄청난 것이다.
개포동이 사실 강남구에서 주목받는 단지는 아니었다. 오랫동안 대치동 은마·미도 아파트나 2000년대 후반 재건축한 도곡동 대단지 아파트에 가려졌다. 하지만 2010년 이후 지지부진했던 재건축 사업이 최근 탄력을 받으면서 분위기가 반전됐다. 강남 최초로 3.3㎡당 1억 원짜리 재건축 아파트가 개포동에서 나올 거란 전망이 나온다. 30년 전 서울 강남구 개포동엔 나지막한 산자락을 따라 넓은 배나무 밭이 이렇게 둔갑을 할 줄 누가 알았던가. 지금 산에서 가까운 동네는 세월의 무게에 잿빛으로 퇴락해 가는 5층짜리 서민 아파트촌. 하지만 속은 알찬 금빛임에 틀림이 없다. 다시 10년쯤 뒤엔 최고 50층짜리 아파트가 우뚝 솟은 미니 신도시로 변모할 전망이다. 초기 사업을 맡은 주택공사는 2년4개월이란 비교적 짧은 시간에 7개 단지에서 262개 동, 1만3340가구의 아파트를 지었다. 이후 민간 건설업체도 가세하면서 총 32개 단지에 2만8704가구의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런 개포동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파트 값이 비싼 동네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8년 말까지만 해도 압구정동이 개포동보다 비쌌으나 지금은 개포동이다. 당시 기자촌이라 하여 언론인 숙정이다 뭐다하여 말 많은 기자들 입막음으로 싸게 특혜 분양했다는 개포동 아파트가 기어코 기염을 토하고 있다. 전두환이 지은 또 다른 아파트, 상계동 주공아파트. 이 또한 년 수가 같으니 재건축 이야기가 나올 참이다. 그런데 얼마 전 뉴스를 보니 개포동과는 딴판으로 극과 극이다. 태생은 같은 배 밭 출신으로 같은 데 극명한 차이가 보인다. 대하는 주민들도 영 극과 극으로 대조적이다.
<“여기서 한 번 살아 보세요. 수도관에선 녹물이 나오고 위층 기침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예요. 도로도 다 깨져서 유모차를 끌고 다니기 어려워요.” (상계주공 5단지 주민) ><“건물은 튼튼합니다. 수도관만 교체하면 살기에 문제없어요. 재건축하면 여기서 사는 세입자, 노인, 신혼부부는 다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상계주공 2단지 주민)>
두 개의 시선, 엇갈린 목소리. 재건축을 놓고 서울 노원구 상계 주공아파트주민은 둘로 갈라져 있었다. 삶의 터전을 놓고 벌이는 ‘민민(民民) 갈등’의 골은 깊다. 누가 옳고 그른가의 문제가 아니어서 해답을 찾기도 어렵다. 재건축의 딜레마다. 상계주공은 상계동 배 밭과 레미콘 공장, 빈민촌을 허물고 벽돌 3억장과 철근 11만t을 쏟아 부어 대단지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상계동 빈민은 철거민 신세로 전락해 동네를 떠나야 했다. 상계주공에는 현재 1~16단지에 3만여 가구가 산다. 첫 입주가 시작된 건 87년 11월이다. 2·3·5단지 5000여 가구는 이미 재건축 연한 30년을 채웠다. 연한이 다시 늘지 않는다면 오는 5월에 1·4·6단지도 재건축 대상이 된다. 가을이 오기 전까지는 13~14단지를 제외한 모든 단지에서 재건축을 할 수 있다.
이 동네 집값은 십 수 년 동안 잠잠했다. 그러다 2014년 중반부터 서서히 오르기 시작했다. 이는 40년이던 재건축 연한이 30년으로 단축된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때와 딱 떨어진다. 박근혜 정부는 2014년 9·1 부동산 대책에서 재건축 연한을 30년으로 줄였다. 지난해 상계주공 집값은 한 주민의 말을 빌리면 ‘무섭게’ 올랐다. 지난해 전국에서 아파트 가격이 가장 많이 오른 상위 10개 단지 중 4곳이 상계주공이었다. 하지만 외지인의 뜨거운 투자(또는 투기) 열기와 달리, 상계주공의 재건축 추진 속도는 더딘 편이다. 16개 단지 중 재건축의 첫 관문이 안전진단을 했거나 신청한 곳은 5·8단지 두 곳뿐이다. 5층짜리 아파트로 지어진 8단지는 재건축 연한과 상관없이 안전에 위험이 있다는 진단에 따라 이미 철거가 시작됐다.
5단지는 2017년 9월 안전진단 신청을 했고, 현재 정밀진단이 진행 중이다. 재건축 연한을 채운 2·3단지를 비롯한 다른 단지들은 속속 재건축 추진 준비위원회를 구성하는 중이다. 강남 사람들은 재건축으로 수억 원씩 이익을 본다는데 여기는 철저히 소외돼 있다고 아우성이다. 정부가 강남 투기 잡는다고 재건축 규제를 강화하면 정작 상계주공처럼 재건축이 꼭 필요한 곳이 피해를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간절함 못지않게 재건축을 반대하는 주민들 역시 적지 않다. 세대 중 60% 이상이 세입자인 현실이다. 집주인들은 여기에 살지 않는 외지인이 대부분, 당연 외지인들은 재건축에 적극적이지만 실제 거주하는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다. 어느 노인의 항변이 실정을 제대로 말하는 듯싶다.
<서울에서 여기 아파트가 제일 싼 편이에요. 재건축하면 세입자들은 물론 집 한 채 있는 노인들은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소득이 없는 노인들은 안전 진단 비용이나 재건축 부담금도 낼 수 없어요. 더욱이 집을 팔아도 가까운 남양주도 비싸서 못 갑니다. 갈 곳은 서울 외곽 다세대 주택밖에 없어요. 재건축해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만, 누구를 위한 재건축인지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며칠 전에는 목동아파트 주민들이 길거리로 나왔다. 2018년도부터 안전진단 결과를 보고 재건축을 결정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에 항의하기 위해서다. 강남은 다 통과시키고 이제 무슨 딴지냐 하는 말이다. 국토교통부는 2018년 2월 20일 재건축 사업이 구조안전성 확보와 주거환경 개선 등 당초 계획에 맞게 진행될 수 있도록 안전진단 기준 정상화 방안을 공개했다. 안전진단 과정에서 구조안전성 비중을 기존 20%에서 50%까지 상향 조정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옳고 그름이 없는 문제다. 과열된 재건축 시장을 연착륙시켜 집값 안정화·국민 주거권 보장을 꾀하겠다는 정부의 의중도, 헌법에 명시된 재산권·행복추구권을 행사해 윤택한 삶과 수익을 누리겠다는 주민들의 입장도 모두 타당하다. 더 이상 갑론을박 해봐야 묘책이 나올 리 없다. 서울 안에서는 지지고 볶고 그 나물에 그 반찬 그 타령이다. 획기적인 방안이 나올 리 만무다. 갈등 가운데 재건축 시장에서 드러난 내로남불의 이중성도 생각을 해봐야 한다. 모두들 턱없이 오른 실정에서 주판알부터 튕기고 덤벼드는 양상, 그 누구를 탓할까.
사실 서울 양천구 목동 지역은 2013년 행복주택 시범지구로 지정됐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사업 자체가 무산됐다. 당시 주민들은 유수지 위에 짓는 행복주택은 '위험천만한 수상가옥'이라며 안전성을 문제 삼았다. 인구 과밀, 교통 혼잡 등도 반대 근거로 내세웠다. 당시 업계에서는 주민들이 반발한 진짜 이유는 집값 하락에 대한 염려라는 게 중론이었다. 임대주택이 늘면 단지 이미지가 나빠지고, 주변 집값이 떨어진다는 선입견으로 인해 님비 현상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지진, 화재 등 재난에 취약한 노후 주택에서 거주하는 국민이 안전한 주거지에서 거주할 수 있도록 진정한 의미의 재건축 안전진단 정상화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목동 지역에서 재건축을 추진 중인 대표적인 단지는 목동 신시가지 아파트다. 안전성을 문제로 행복주택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한 유수지 인근에 있다. 주민들은 아파트 재건축은 물론, 유수지 개발까지 원하고 있다.
양천구에 따르면 최고 15층, 2만6629가구 규모의 목동 신시가지 아파트는 재건축이 완료되면 최고 35층, 5만3375만 가구 규모의 대단지로 다시 태어난다. 양천구 인구도 27.4% 증가할 전망이다. 교통 혼잡은 더 극심해지는데 5년 전은 틀리고 지금은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행복추구와 이기주의는 한 끗 차이로 버텨서 있다. 그 필요충분조건이 악용되는 순간, 사회는 필연적으로 병든다. '어느 곳은 되고, 어느 곳은 안 된다'가 아니라,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는 사고방식 때문에 형평성과 공정성이 무너지고 있다는 걸 또한 외면해선 안 된다. 그것을 외면한 행복추구는 이기주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제 어디 사느냐는 단순히 주거로서가 아니라 경제사정의 척도로서 삶의 질로서 파악이 된다. 어디 살아요?란 - 글을 쓴 조성현 작가의 글 첫 부분과 말미가 지금도 여전히 잊혀지지 않는다.
<강남 사는 남자를 선호하는 건 어쩔 수 없어요. 친구들 사이에 청담·반포·대치·서초·압구정 남자가 소개팅 들어오면 ‘꺅!’, 잠실·용산·분당·목동 남자를 만나면 ‘오호~’, 그 밖의 지역은 ‘응?’ 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해요. 대놓고 말은 못해도 동네로 재산 수준은 가늠할 수 있잖아요? 강남구원룸거주회사원 C(29.여) 도곡동 원룸으로 이사 왔어요. 주변 사람들 대우가 180도 달라지더군요. 인천 살 때는 ‘거기서 어떻게 다니냐’ 던 사람들이 도곡동에 산다니까 ‘혹시 타워팰리스냐’ 물어봐요. 뚝 끊겼던 소개팅도 몰려들기 시작했고요. >
<누가 나에게 어디 사는지 물으면 상계동에 산다고 말했나? 아니다. 노원, 또는 롯데백화점 노원점 인근에 산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상계동 산다는 것을 부끄러워했던 것이다. 나야말로 가진 것도 없는 천박한 천민자본주의의 숭배자였다. 사랑과 행복에 대한 딸아이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가, 얼마 전 모임에서 어느 도예가 선생님이 나에게 ‘어디 살아요?’ 물었을 때 자연스레 상계동이라 답했다. 나도 이제 철이 드나보다. >
극심한 빈부의 향배, 당국도 수요자도 모두 투기 또는 재테크의 수단으로만 여긴 것만 같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아파트 재건축을 시장 수요와 공급의 문제로만 따져본 것은 아닐까. 낡은 아파트를 허물고 새 아파트로 변신하는 화려함의 환상 속에서 우리는 행복도 자신도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 개포와 상계주공은 우리나라의 재건축의 깊은 딜레마를 극명하게 대비하며 우리나라가 병들어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한 예일 뿐이다. 앞선 글을 보고 가만 생각을 해보자. 천정부지로 솟은 아파트들이 과연 누구의 소유였는지. 기득권층이라 할 공무원 고위직, 대기업 임원, 기자, 의사, 교수 등 사회지도층이 여의도로부터 해서 반포 압구정 은마 개포동에 지금도 여전히 골고루 포진해있다. 어쩌면 이 계층으로 인해 악순환이 거듭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과거 그러했던 것처럼 서울에 명문대학교와 특목고를 모두 지방에 배치하면 어떨까. 정말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첫댓글 이 많은 자료들을 찾으려면 충분한 수면은 힘들텐데............불쑥 안양으로 외출을 하시지요? 아님 계족산을 가보고 싶은데 산악회가 대전으로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