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 꽃돼지
최 화 웅
어느 날부터 산이 좋아 모인 산정회(山政會). 회원은 언론계 출신 같은 대학 정치학과 출신 선후배 넷이다. 우리는 십 수년째 수영 ‘꽃돼지’를 아지트처럼 삼아 드나든다. ‘꽃돼지’는 상호로 널리 쓰일 만큼 귀엽고 깜찍하다. 서너 평 남짓한 식당을 육십 대 초반의 후덕한 주모가 땅거미 지는 초저녁에 문을 열어 자정 가까워 문을 닫기를 이십여 년. 야채와 돼지 뒷고기를 장만해주는 것 외에는 특별한 메뉴가 없다. 그야말로 소박하고 아늑한 실비식당에서 좀체 세상의 허튼소리를 듣기 힘들다. 국어사전에 ‘꽃벼룩은 나와도 ’꽃돼지‘는 등재되어 있지 않았다. ‘꽃바람, 꽃망울, 꽃시계, 꽃구름, 꽃동산, 꽃분이, 꽃동네, 꽃다발, 꽃밭, 꽃길, 꽃신, 꽃비, 꽃방석’해서 보통명사 앞에 꽃이 접두어로 붙으면 아름다움을 비유하는 예쁜 말로 옷을 갈아입는다. 꽃돼지와 꽃미남이 함께 산책하는 작품은 시대에 따른 미적 기준의 변천을 말해 주면서 외모 지상주의(Lookism)를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세태를 희화한다. 꽃돼지는 흔히 뚱뚱한 여자를 귀여운 여자로 돌려 부를 때 쓰기도 한다. 어릴 때 할머니 곁에서 들은 우화(寓話), <돼지들의 소풍>을 떠올리며 혼자 웃는다.
어느 날 12마리의 돼지들이 소풍을 나섰다. 돼지들은 계곡의 개울을 건너게 되었다. 대장은 혹시나 물에 빠진 녀석이 없는지 세어보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열하나. 어! 왜 한명이 없는 거지? 혹시 물에 빠진 거 아냐?” 대장은 물에 빠진 녀석이 없는지 살펴보았지만, 모두들 무사히 냇물을 건너왔다. 대장은 다시 세어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돼지는 열 한 마리였다. 자신을 빼놓고 세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조금 똑똑해 보이는 돼지가 나서서 말을 하는 것이었다. “대장을 안 세었으니 그렇지. 내가 다시 세어볼게.” 그 돼지는 대장부터 다시 세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세어도 돼지는 11마리뿐이다. 그 돼지 역시 자신을 빼놓고 숫자를 센 것이다. 이번에는 다른 돼지가 나서 말했다. “아휴, 멍청이. 너도 너를 빼놓고 세었잖아.” 그러면서 그 돼지도 다시 숫자를 세었지만, 그대로 11마리뿐이었다. 그 돼지 역시 자신을 세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숫자를 세는 동안 하루해는 지고 있었다. <돼지들의 소풍>은 거기에서 끝나고 말았다.
‘뒷고기’는 도살장에서 백정 도우미들이 맛있는 부위를 뒤로 빼돌려 놓았다가 일을 끝내고 소주를 한잔하면서 안주감으로 쓰는 고기다. 뼈에 붙은 살코기가 맛이 있다고 입을 탄 뒤로 도살장 주변에는 뒷고기를 구워 파는 가게가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예로부터 ‘돌’ 또는 ‘도야지’로 불려왔는데 돼지라는 이름도 ‘돌아지’가 변해서 된 말”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아이들은 돼지를 흔히 ‘꿀꿀이’나 ‘꿀꿀돼지’라고 부른다. 돼지고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먹는 육류다. 국민 한사람이 연간 돼지고기 24.6㎏을 먹어 쇠고기(11.3㎏), 닭고기(13.3㎏)의 2배가 넘는다고 한다. 방송에서 음식을 조리하는 프로그램을 흔히 ‘먹방’이라고 한다. 회갑을 넘긴 주모 박 여사가 지키는 수영 ‘꽃돼지’집은 우리들의 먹방이다. 수영 꽃돼지가 알려지지 않아도 인터넷에는 부산 수영구 망미번영로52번길 95로 나온다. 수영 ‘꽃돼지’에서는 돼지고기의 뒷고기를 연탄불에 구워서 소금 기름에 찍어 먹는 게 전부다. 싱싱한 야채와 술이 곁들여진다. 처음 가게를 시작했을 때부터 우리는 길(吉)이형을 따라 드나들었다. 수영에서 자란 길이 형은 수영의 터주대감으로 헌칠한 키에 선하다. 지난여름에도 10kg을 배낭을 메고 홀로 남해안을 답사한 길이 형이 갑자기 몸져눕고 말았다.
드럼통 연탄화덕 네 개가 놓인 홀에 들어서면 희미한 조명이 마치 학생시위 때 숨어들었던 비밀 아지트 같기도 하고 때로는 데이트에 좋은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해주기도 한다. 꽃돼지를 잡으러 오는 포수들은 주로 동네 이웃들이고 어쩌다 뜨내기들도 보인다. ‘꽃돼지’에서 먹을 수 있는 고기는 도살장에서 목살과 다리, 등과 뱃살 등 값나가는 부분은 죄다 푸줏간에 팔려나가고 자투리 고기와 내장, 뼈에서 발려낸 뒷고기를 쓴다. 뒷고기의 맛을 아는 사람들은 소리 소문 없이 꼬리를 문다. 지난여름 갑자기 아프리카 돼지 열병이 돌았다. 야생 멧돼지가 매개인 아프리카 열병이 돌자 돼지를 사육하는 농가와 방역당국에 비상이 걸렸다. 돼지고기값은 급락하고 뒷고기를 파는 가게들마저 시름이 깊었다. 풀꽃 시인 나태주는 시 <한 사람 건너>에서 “한 사람을 건너고, 다시 또 한 사람을 건너 또 한 사람, 너를 본다.”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예부터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라는 말처럼 50년 전 길이 형의 결혼식으로부터 꽃돼지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꽃돼지집 주모 박 여사가 반세기 전 길이형의 주례를 맡았던 은사 박기택 교수의 6촌 여동생이고 나와는 30년 넘는 우정을 지닌 통영 벽방산기슭으로 귀향한 H형의 7촌 고모뻘 되는 사람이다. 알고 보면 세상은 참 넓고도 좁다. 한 다리 건너 다 아는 세상이 바로 우리의 정겨운 이웃공동체다. 길이형의 건강이 회복되는 날 꽃돼지에서 못다한 독일사회민주당과 안토니오 그람시,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의 정신을 이야기하고 싶다.
첫댓글 국장님 연말이라 모임이 많아서 걱정입니다.
우리 집 꽃돼지도 모임이라 나가고 없고 혼자 가계를 지키고 있습니다.
추운 날씨에 건강 조심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