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단오제의 숨은 이야기
장현저수지(長峴池) / 진재(長峴) 고개 / 댕댕이 넝쿨 / 모산봉 / 모산봉 오르는 길
학산에서 강릉장을 보려면 장현(長峴/現 茅山)학교 앞을 지나 모레고개를 넘어오다 보면 오른쪽으로 모산봉(母山峰)을 끼고 작은 골짜기 마을인 뙡(茅田:피밭/띠밭) 마을이 내려다보이는데 살기 좋은 마을로 꼽았다. 뙡마을은 강동면(江東面) 모전리(茅田里)에도 있는데 들판에 피가 많아서 모전(茅田:띠밭)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띠밭=뙡> *모(茅)-논에 나는 잡초<일명 피, 돌피, 물피> ◆茅-띠 모
모레고개에서 도깝재(도깨비 고개) 쪽으로 가지 말고 왼쪽 골짜기 안땔골로 빠지면 골짜기 가운데로 논이 있고 논 가 길섶에 엄청나게 큰 둥그런 바위가 있었는데 시계바위라고 했다. 조금 위험하기는 했지만, 그 바위 위에 올라가 앉아서 골짜기를 내려다보고는 했다. 조금 더 시내 쪽으로 내려가면 기다란 늘레집이 나오고 그 아래 모퉁이를 돌아가면 오른쪽 산부레기(산부리) 끝에 커다란 차돌바위가 있었다. 그 차돌바위 밑에는 우물(샘)도 있었는데...
대학 졸업 후 가보았더니 그 시계바위도, 차돌바위도 다 깨뜨려 없애버렸는데 어디가 그곳이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예전 이곳을 노암동(魯岩洞/안땔)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강남동..
남산 밑 공설운동장(현 단오공원) 옆으로 돌아 나오면 나무로 된 재건교(再建橋)가 있었는데 재건교를 놓기 전에는 6.25 사변 후 놓은 구멍이 숭숭 뚫린 비행기 활주로를 얹은 임시다리를 뒤뚱거리며 건너다녔다. 장마가 져서 그마저 떠내려가면 멀리 돌아 광젱이 다리(현 江陵橋)를 건너거나 얕은 데를 골라 바짓가랑이를 걷고 건너다니곤 했다. (재건교는 현 南山橋)
재건교의 추억으로, 사변 후 일반인들도 군복을 많이 입고 다녔는데 재건교 다리목을 지키던 헌병들이 등짝에다 페인트로 커다랗게 ‘염색’이라고 써서 보냈다. 국방색을 입지 말고 염색을 해서 입으라는...
그때 남대천 자갈밭에는 솥을 걸고 군복에다 검정 물감으로 염색을 하여 자갈밭에다 널어놓은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또 시골 사람들이 하도 몸에 이(蝨)가 많으니까 다리목을 지키다가 목 뒤를 벌리고는 디디티(DDT)를 한주먹씩 등짝(등허리)에다 퍼붓곤 했다.
강릉 단오굿(손님굿) / 남대천 재건교(60년대) / 강릉 남산공원
공설운동장 앞에서 길을 건너 조금 내려간 곳에 ‘새발소’라는 물웅덩이가 있었는데 남대천이 굽이져서 흐르다가 막혀 여울진 곳으로 주변은 온통 자갈밭이었는데 이 부근을 중심으로 단오제가 열렸다.
모레고개를 넘어 안땔골로 빠지지 말고 도깝재 쪽으로 오다가 왼쪽 산등성이를 타면 오른쪽으로 노가니골, 왼쪽으로 안땔골이 되는데 인적도 없는 등성이로 ‘댕댕이꿈(꾸미)’이라고 했다. 여기에는 엄청나게 질긴 댕댕이 넝쿨이 우거져서 걷다가 걸리면 넘어지기 일쑤였다. 이 등성이의 오솔길을 따라 풀밭을 헤치고 내려가면 갑자기 뚝 떨어지는 흙베리(절벽)가 되었는데 그 밑이 새발소다.
누님한테 들은 이야기로, 해방 전이니까 1940년 정도였다고 생각되는데 총독부에서 강릉단오제를 빌미로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이니까 불순한 일이 있을까 하여 단오제를 금지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단오를 못 치게 하니 쌓인 불만이야 이루 말할 수도 없었겠지만, 순사(巡査)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을 터....
그래서 그런지 연 이태 동안이나 심한 가물이 들어서 농작물이 빨갛게 타죽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처럼 수리시설이 없이 하늘만 쳐다보던 시절이라 민심이 흉흉해졌는데 사람들은 단오를 치지 못하게 한 때문이라고 항의를 했던 모양이다.
총독부의 허가가 떨어져 단오를 다시 치게 되었는데 그 새발소 앞에다가 커다란 용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때 우리는 안땔 차돌바위 옆에 살았는데 마을 장정들과 함께 우리 아버지도 사흘간인가 지게를 지고 나가서 흙을 져 날랐다고 하니 그 용인지 이무긴지 엄청 컸던 모양이다. 다 만든 후에 개와 닭을 잡아 피를 뿌리고 크게 단오굿을 쳤더니 비가 왔다고 한다.
◆2021년인가, 내 카페에 실린 이 글을 읽고 강릉문화원(江陵文化院)에서 연구원 두 명이 이무기 앞에서 춤을 추는 무당 사진을 가지고 인천까지 와서 나한테 인터뷰를 해갔다. 그 사진 내용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