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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상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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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란 무엇인가?
사회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문화가 있다. 서구 사회에는 서구 문화, 한국 사회에는 한국 문화, 대학 사회에는 대학 문화, 청소년 사회에는 청소년 문화가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음주 문화, 놀이 문화, 음식 문화, 성 문화, 주거 문화 등 인간의 삶과 관련된 모든 부분에는 각각의 문화가 있다.
이렇듯 삶의 곳곳에서 매순간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문화와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다. 의복, 주택, 음식 등 인간이 만들고 사용하는 유형(有形)의 사물들은 물론 인간이 자기 자신이나 사회, 자연, 신 등에 대해 가지는 지식이나 신념, 가치, 태도 등의 무형(無形)의 것들과 가족, 결혼, 정치, 교육 등 여러 가지 사회제도까지 포함한 모든 것이 문화의 소산이다.
다만 이러한 문화는 너무나 일상적으로 우리와 관계 맺고 있기 때문에 이를 잘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회에 속해 살아가는 한 그 사회의 문화와 함께 호흡하며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양함 속에서 그 전체를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 문화의 본질은 무엇인가? 타일러(E. B. Tylor)는 “지식, 신앙, 예술, 법률, 도덕, 풍속, 그리고 인간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취득한 그 밖의 모든 능력과 습관 등을 포함하는 복합적 전체”라고 하였다. 이처럼 문화란 어떤 특정한 정신적 산물만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능동적으로 적응해 온 사회 활동의 총체이다.
문화 절대주의
사람들은 흔히 자신에게 익숙한 문화만을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다른 문화권의 사람에게까지 자신들의 생활양식을 강요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역사상 수많은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종교 전쟁을 비롯하여, 문화의 차이로 인한 갈등은 끊이지 않고 있다. 미국의 사회학자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은 앞으로 국제 분쟁은 서로 다른 문화권 사이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문화, 그리고 다른 문화를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는 과연 어떠해야 하는가?
옛날 중국인들이나 유럽인들은 자신들만의 문화가 유일한 문화라고 주장하며, 다른 나라들에 대한 침략과 지배를 ‘문명의 전파’라고 정당화하였다. 과거 중국인들은 일종의 선민사상(選民思想)을 가지고 있어서 우월한 문화와 한(漢) 민족을 연결시켜 생각하였다. 반면 19세기 유럽의 문화는 진화론적 문화관에 기초되어 있었다. 즉 생물체가 하등동물에서 고등동물로 하나의 정해진 과정을 따라 이루어지듯 모든 문화는 같은 과정을 거쳐 발전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유럽 중심의 문화가 마지막 단계에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문화이고, 그 밖의 다른 나라의 문화는 진화가 덜 된 후진문화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히 자기 문화의 우월성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문화 절대론적인 사고 방식을 내포하는 것이다. 세계의 모든 문화는 하나의 동일한 과정으로 발전하는데, 그 각각의 발전 정도에 따라서 문화의 차이와 단계가 규정된다는 것이다.
한 집단이나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기 문화가 옳은 것이며 가장 우수하다고 믿고 다른 문화를 부정적으로 보는 문화 결정론적 태도를 문화 배타주의, 또는 국수주의(chauvinism), 자민족 중심주의(ethnocentrism)라고 한다.
자민족 중심주의의 편견이 인간의 사회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하다. 어떤 사회 어느 집단이든 얼마만큼의 자신의 문화에 대한 자존심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자민족 중심주의는 이와 같은 집단 성원들의 자존심을 자극하여 사회에 대한 충성심과 집단 결속력을 높여 사회 통합의 질서 유지에 기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태도가 지나치게 강조되어 극단으로 흐르게 되면, 그 결과는 국수주의에 빠져 국가 간의 상호 이해와 협조의 장애물로 작용하게 된다. 나치 독일의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내세운 유대인 말살 만행은 그 예라 하겠다.
한편 ‘문화 사대주의(事大主義)’는 자기 문화를 업신여기거나 낮게 평가하며, 다른 사회의 문화만을 동경하거나 숭상하는 태도이다. 문화적 사대주의 역시 문화의 상대성을 부정하고 다른 문화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자민족 중심주의와 일치한다. 그러나 자신의 문화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반대되는 태도이다. 문화 사대주의는 민족 문화의 가치를 과소평가하여 문화적인 주체성을 상실하게 할 우려가 있다.
중국의 문화가 뛰어났다는 것을 우리 조상들이 무비판적으로 인정한 것처럼, 유럽 문화 우월 사상도 상당히 오랫동안 식민지 국가들을 비롯한 세계의 약소국가들이 그대로 받아들였고,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까지 상당히 강하게 남아 있다. 우리나라도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문화 절대주의 관점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환경과 상황에 적응해 가면서 나름대로의 생활양식을 개발해 왔기 때문에 사회마다 각기 다른 형태의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문화의 다양성을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문화 상대주의
20세기 초반 베네딕트를 비롯한 미국의 문화 인류학자들은, 19세기의 사색적이고 유럽 중심적인 문화관을 버리고 경험 과학적 연구를 통한 문화 상대주의를 제창하게 되었다. 소위 원시 문화들을 연구해 본 결과, 그 문화에도 그들 나름대로의 고도의 논리와 치밀한 체계성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고, 서양 문화와는 전혀 다른 척도로 이들 문화를 평가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이다. 모든 문화들을 동일선상에서 선진 문화, 후진 문화로 나누어 볼 것이 아니라, 서로 상이한 표준과 체계를 가진 문화들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탈식민주의 사조로도 불리는 이러한 흐름은 기독 문화권인 서구의 일방적인 기준과 가치평가에서 벗어나 각각의 고유한 전통문화가 지닌 독립성과 개별성을 강조하는 데에 중심을 두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보편’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힘을 앞세워 제국주의를 확장했던 서구에 의해 타의적으로 강요되었다는 점을 뚜렷이 인식하고, 그로부터 벗어나 각각의 전통에 기반한 문화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인 셈이다.
이렇듯 각각의 문화는 어떤 절대적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는 고유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보고, 한 사회의 문화를 그 사회의 입장과 그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려는 태도를 ‘문화상대주의(文化相對主義, cultural relativism)’라고 한다.
서양 문화 우월 사상(오리엔탈리즘) 혹은 일반적인 문화 절대론에 대하여 문화 상대주의는 사실을 훨씬 더 올바르게 반영할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요소가 배제되고 개인의 다양한 문화 창조 능력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게 했다. 그리하여 전통 문화들의 가치를 좀더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 주었다.
문화 상대주의의 오류
문화 상대주의가 자리할 여지는 굉장히 많아졌다. 월드컵 대회 당시의 보신탕 논쟁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처럼 힘을 앞세운 기독교 문화의 배타적이고 일방적인 잣대가 기독교 문화와 이슬람 문화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기도 하다는 점에서, 서구가 지닌 식민주의의 잔재를 뿌리 뽑고 문화적 상대주의를 강조해 나가야 할 당위는 충분하다. 그러나 문화 상대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도리어 위험할 수 있다.
1970년대에 미국의 카터 행정부가 박정희의 유신 독재 체제를 문제로 삼으며 인권 개선을 위한 압력을 한 적이 있었다. 박정희는 이것을 서구 중심적 내정 간섭이라고 단정 짓고, 자신의 체제를 ‘한국식 민주주의’라고 명명하였다. 서구와 우리는 역사와 전통의 맥락이 다르니 서구식 민주주의 모델은 우리에게 맞지 않는다며 타율을 심각하게 강조한 한국식의 민주주의를 취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독재 체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궤변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 궤변이 문화 상대주의의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다. 요즘도 거대 재벌 기업들은 한국의 문화적 상황이나 토대가 서구와 다르기 때문에 재벌 체제를 한국 특유의 경제 시스템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렇듯 문화 상대주의는 내부에 존재하는 기득권 세력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보존하려는 수단과 명목으로 외부의 흐름을 적대적으로 그리면서 형성되어지기도 한다.
이렇듯 극단적 문화 상대주의는 몇 가지의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 극단적 문화 상대주의는 문화 제국주의의 위험을 제어할 수 있는 논리가 될 수 있는 점도 있으나, 문화를 합리적 기준에 의해 평가하기보다 단지 힘의 관계로 해소해 버리는 결과가 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둘째, 모든 문화는 각기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일반적인 평가를 할 수 없다면, 모든 문화는 그것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정당화된다. 셋째, 이와 연관되어 문화의 쇄신과 발전 등을 기대하기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기존 문화에 대한 불만은 문화 창조의 선행 조건인데, 보편적인 이상과 가치를 전제하지 않을 때, 어떤 불만이나 비판도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문화는 각기 그 나름대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우리가 전혀 일반적인 평가를 할 수 없다면 독일의 히틀러의 소행도 눈감아 주어야 하고,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같은 전통적 신분 제도도 비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논리적으로 보아서도 극단적인 문화 상대주의의 입장에서는 문화 절대주의를 비판할 근거마저 상실하는 것이다.
문화 상대주의와 보편적 윤리
여러 인간 집단이나 부족이 달리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다는 것은 문화 인류학자들을 통해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한 집단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거나 열등하다고 간주할 만한 과학적 근거는 없다. 프랑스 인류학의 거장인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eauss)는 문화 상대주의에 대해 이와 같이 표현했다.
“문화적 상대주의는 한 문화가 다른 문화의 활동에 대해 ‘저속하다’거나 ‘고상하다’고 판단할 절대적인 기준이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각 문화는 자체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고 또 내려야 한다. 왜냐하면 한 문화의 구성원은 그 문화 안에서 관찰자일 뿐만 아니라 행위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문화적 상대주의가 개인이나 그 사회에 대해 ‘무규범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문화적 상대주의는 자기 집단과 다른 집단이나 사회를 다룰 때 판단을 잠시 보류할 것을 요구할 뿐이다. 자신의 규범이나 자기 집단의 규범을 다른 개인이나 집단에 적용하기 전에 한 번 더 숙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 간의 문화 차이, 그 차이의 근원, 그 결과에 대해 알고 나서 어떤 판단을 내리거나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식민지 시대의 예를 보면, 원주민이 아닌 외국인이 오히려 자기 사회가 아닌 다른 사회에서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자신들의 규칙을 그 사회에 강요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인간의 보편적인 윤리는 상대적일 수 없다. 사상의 자유, 생명의 고귀함, 인간의 평등 등은 어느 사회에서든 중요한 것으로,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 가치가 부정될 수 없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차별 받지 않고 평등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윤리는 상황에 따라 바뀌지 않는 것이며, 이러한 개념에 상대적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결코 맞지 않다.
문화의 다양성을 떠나 보편적인 윤리는 인류 전체가 가꾸고 발전시켜야 할 보편적인 가치인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윤리에 문화의 다양성을 적용하며 문화 상대주의를 적용하는 것은 궤변에 지나지 않으며, 문화 상대주의를 수단과 명목으로 사용하는 것일 뿐이다. 결국 어떤 사회의 문화를 이해하는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문화의 상대성에 입각하면서도 극단적 상대주의를 피하고 보편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문화 상대주의는 다른 문화권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일 뿐이다. 문화 상대주의가 가치 판단을 할 수 있는 규범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문제는 가치 판단, 윤리 판단의 문제로 계속 남을 수밖에 없다.
문> 문화 절대주의가 지니는 문제점에 대해서 밝혀 보시오.
문> 문화적 다양성이 인간에게 왜 중요한지, 그 이유를 밝혀 보시오.
문> 다양한 문화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 지향해 가야 할 보편적인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문> 다음 예시문은 문화 상대주의와 관련된 논의이다. 이에 대한, 자신의 찬성 또는 반대의 견해를 논리적으로 진술해 보시오. (2003년 서울교대 정시)
특히 문화가 발달되지 않은 사람들을 원시인이라 하기도 하고 야만인이라 하기도 한다. 원시인은 시간적으로 옛날에 산 사람이란 뜻을 풍기고, 야만인은 시간과 관계없이 문화 생활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행동도 세련되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인류의 모든 문화를 같은 표준에 의하여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을 은연중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문화를 재는 잣대가 문화마다 다르면 어느 문화가 더 선진적이고 어떤 문화가 후진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모든 문화를 다 재어볼 수 있는 공통의 잣대가 있는가? 즉 문화 발달 정도를 가늠하는 보편적인 기준이 있는가?
서양에서는 19세기까지 그런 잣대가 있다고 생각했다. 즉, 과학이 어느 정도 발달되었으며, 자연을 어느 정도 더 정복할 수 있는가에 따라 문화의 발전 정도를 측정하려 했던 것이다. 같은 서양에서라도 옛날에는 자연 과학이 덜 발달되었고 사람들의 삶이 자연에 의하여 더 많이 지배되어 사람들이 행사할 수 있는 힘과 자유가 훨씬 제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과거의 자기들과 비슷한 수준에 있는 문화는 자기들의 문화보다 더 뒤떨어졌다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표준에 의하면 말할 것도 없이 서양 문화가 가장 앞서 있고 아프리카의 문화가 가장 후진적인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문화인류학에서는 그런 서양 우월주의 혹은 문화 절대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여러 문화를 연구해 본 결과 문화의 종류가 워낙 다양하고 풍부해서 한 가지 잣대로 모든 문화를 다 잰다는 것은 무리란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문화인류학은 전반적으로 문화 상대주의(文化相對主義 : Cultural Relativism)를 받아들이고 있고, 최근에 와서는 이런 생각이 다른 많은 분야에도 다원주의(多元主義 : pluralism)란 이름으로 확산되고 있다.
프랑스의 유명한 문화 인류학자인 레비 스트로스(Levi-Strauss)는 아프리카에 연구차 여행하면서 아프리카인의 과학은 서양의 과학과 종류가 다를 뿐 결코 서양 과학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과학에 있어서 뿐 아니라 예술이나 관습, 제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란 것이다. 모두 그 나름대로의 합리성이 있고, 수월성이 있는 것이다. 같은 종류의 문화 안에서 선진, 후진이 있을 수 있으나, 다른 문화와의 비교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오늘날 지배적인 견해이다.
정말 문화는 그렇게 상대적인가? <후략> - 손봉호 <문화와 예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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