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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선비들에게는 고기 먹는 날이 있었다. 화롯불에 모여 고기를 먹으며 시를 짓고 즐기는 이 낭만적인 풍습은 난로회(煖爐會)다. 정조의 시문·윤음·교지 등을 모아 정리한 '홍재전서(弘齋全書)'에는 1785년 겨울, 정조가 난로회를 베풀고 매(梅)자를 뽑아서 각각 칠언절구(七言絶句) 한 수씩을 짓고, 꽃이 핀 뒤에 다시 모이기로 약속했다고 전한다. 오늘날로 얘기하면 고기 회식 내지는 고기 파티를 연 셈인데, 고기를 먹으며 매화를 주제로 시를 읊었으니 이렇게 근사하고 서정적인 고기문화가 또 어디에 있을까?
난로회에 등장한 불고기에 대한 보다 자세한 기록은 '동국세시기'에서 찾을 수 있다. “서울 풍속에 음력 10월 초 하룻날, 화로 안에 숯을 시뻘겋게 피워 석쇠를 올려놓고 쇠고기를 기름장·달걀·파·마늘·산초가루로 양념한 후 구우면서 둘러앉아 먹는 것을 난로회라고 한다.” 역시 우리 민족은 고기를 제대로 즐길 줄 알았다. 쇠고기 양념에 산초가루를 넣은 점도 독특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불고기라고 부르는 국물이 흥건한 전골식 불고기와 사뭇 다른 점을 주목할 만하다.
고기 좀 먹는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모름지기 고기를 맛본다 함은 씹었을 때 두툼한 고기에서 육즙이 가득 배어나와야 한다. 여기에는 특별한 양념도 필요 없다. 이에 비하면 불고기는 고기를 얇게 저미거나 잘게 다지고 달콤한 양념까지 가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쇠에 굽는 불고기가 여전히 건재하는 이유는 분명 있다.
경남 창원 석쇠불고기는 창원 북동시장에서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1970년대 초반 창원 남해고속도로 건설이 한창일 때, 일과를 마친 노동자들이 체력 보충을 위해 창원 시내의 고깃집에 들르곤 했는데, 만만치 않은 가격 때문에 고기구이 대신 양념불고기를 많이 먹었다. 더 담백한 고기 요리가 먹고 싶던 손님이 주인에게 불고기를 석쇠에 구워 기름기를 빼달라고 제안하자, 식당 주인이 석쇠에 익힌 불고기를 상에 올리면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당시 이름도 없던 작은 식당을 손님들은 ‘판문뎐’이라고 불렀다. ‘판문뎐’에서 일을 하다 독립한 사람들이 ‘임진각’ ‘통일각’같은 이름으로 영업을 시작하면서 창원식 석쇠불고기가 발전했다.
임진각식당
경남 창원시 팔용동에 자리한 임진각은 1980년대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불고깃집 메뉴에 불고기 말고 눈에 띄는 것이 수육과 내포를 넣어 끓인 쇠고기 국밥이다. 창원 사람들은 이 집에서 불고기와 쇠고기국밥을 함께 곁들인다. 주메뉴인 불고기는 기름기가 적당히 있는 국내산 육우를 잘게 다진 후 양념해 석쇠에 구워 접시에 옮겨 담는다. 보통 불고기하면 기름기 없는 부위를 사용하는데 임진각 불고기는 기름기도 적당하고 육즙을 잘 살렸다. 마지막 남은 고기를 먹을 때까지 육즙을 간직한다. 굳이 쌈을 싸먹지 않아도 될 만큼 불맛과 양념맛이 잘 느껴지지만 창원불고기는 꼭 백김치와 곁들여 먹어보시라. 잘 숙성된 백김치 맛이 고기의 기름진 맛을 개운하게 잡아준다. 또한 콩나물을 넣고 맑게 끓인 경상도식 쇠고기국밥도 수준급이니 꼭 불고기와 함께 맛보길 추천한다.
11:00~21:30|경남 창원시 의창구 팔용로 515|055-256-3535|SRT 동대구역에서 차로 1시간 10분 거리
전남 광양에서는 얇게 저민 고기를 즉석에서 양념해 참숯에 달군 구리 석쇠 위에 올려놓고 굽는다. 부드럽고 달콤한 이 불고기는 광양제철소가 들어선 1980년대부터 전국에 알려졌고, 2010년에는 전국의 불고기 중 유일하게 지리적 표시 단체표장으로 등록허가를 받았다. 광양시는 광양불고기의 유래를 이렇게 전한다. 조선시대 마로(馬老·광양의 옛 지명)에 유배를 온 선비가 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쳤고, 가르침에 대한 보은으로 한 부부가 참숯을 피우고 석쇠에 고기를 구워 대접했다. 세월이 흘러 귀양에서 풀려 한양으로 돌아간 선비는 광양불고기 맛을 잊지 못하고 ‘천하일미 마로화적(天下一味 馬老火炙)’이라 하며 그리워했다.
삼대광양불고기집
광양불고기는 현재 광양읍 서천변에 있는 삼대광양불고기집이 원조로 알려져 있다. 이 집의 역사는 1930년 창업자인 이소은 할머니가 당시 ‘일흥식당’이라는 이름으로 열었고 백운산 참숯을 피워 청동 화로와 구리 석쇠에 구워 선보였다. 그 뒤 2대는 상호를 ‘광양 불고기 식당’으로 바꾸고 본격 대중화에 나섰다. 이후 이형중 대표가 3 대 가업을 물려받아 지금의 ‘삼대광양불고기집’으로 상호를 쓰고 있다. 삼대광양불고기집은 등심을 아주 얇게 저며 나온다. 숯불에 얇은 살점이 타기 쉬우니 잠시도 한눈팔 겨를이 없다. 한두 점씩 올려 굽는 즉시 먹으면 달콤하고 야들야들한 고기에서 육즙이 가득 배어나온다.
11:30~21:00|전남 광양시 광양읍 서천1길 52|061-763-9250|SRT 광주송정역에서 차로 1시간 20분 거리
목초지가 드넓은 울산 언양은 일제강점기부터 소가 모여들었다. 자연스레 도축장과 정육점이 발달했고 우시장도 형성되었다. 덕분에 언양에서는 다른 지역보다 쇠고기를 비교적 쉽고 저렴하게 구할수 있었지만 당시 서민들에게 쇠고기는 귀한 식재료였으니, 저렴한 부위를 잘게 저미거나 다진 후간장·설탕·참기름으로 양념한 뒤 구워서 밥반찬처럼 먹었다. 그러던 언양불고기를 전국적으로 알린 일등공신은 1960년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했던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고향에 돌아가 달콤하고 부드러운 언양불고기맛을 소문냈고 점차 언양불고기가 대중화되었다. 참고로 언양불고기는 생김새가 떡갈비와 비슷하지만 맛은 사뭇 다르다. 언양불고기를 씹어보면 잘게 저민 고기의 결이 느껴지고 고깃점마다 숯불 향기가 스며들었다.
언양진미불고기
언양에서 오래된 불고깃집 중 하나인 진미불고기는 1987년 당시 언양면 어음리에서 개업해 2007년에 지금의 교동리로 자리를 옮기고 현재 2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보통 불고깃감으로 앞다리 살이나 목심 등 저지방 부위를 사용하는데 이 집은 1+ 이상 등급의 등심 부위도 골고루 섞는다. 또 잘게 썬 고기에 들어가는 양념은 소금·설탕·참기름·마늘이 전부다. 다른 불고기와 달리 간장이 들어가지 않고 단맛도 강하지 않은 점이 독특하다. 한우 암소 본연의 고소하고 쫄깃한 맛을 느끼도록 양념을 최소화한다는 것이 박장호 대표의 설명이다. 진미불고기에는 두 가지 불고기가 있다. 고기를 다져 양념한 전통식 언양불고기가 있는가 하면, 매일 들여오는 한우 암소 특수부위 중 등심·갈빗살·제비추리 등 두툼한 생고기를 즉석에서 양념해 구워 먹는 진미불고기다. 언양불고기를 처음 맛본다면 전통식 언양불고기를, 두툼한 양념고기로 즐기고 싶다면 진미불고기를 추천한다.
11:00~21:30|울산 울주군 삼남면 중평로 33|052-262-4422|SRT 울산역에서 차로 10분 거리
기름진 초원이 펼쳐진 곳에 축산업이 발달하고, 축산업이 발달한 곳에 불고기가 발달했다. 울산 울주군 언양읍도 그렇지만 울주군 봉계리도 그렇다. 지리적으로 영남알프스 인근 1000m 이상 고봉 들과 평야가 펼쳐진 특성 덕분에 이곳 한우는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울주군은 언양과 봉계를 ‘한우불고기특구’로 지정하고 매년 10월에 불고기 축제를 열어 불고기를 향토음식으로 특성화하고 있다. 한우불고기특구에 지정된 식당은 언양지구가 30개, 봉계지구가 46개로 봉계에 불고깃집이 더많다. 언양과 봉계 두 지역의 불고깃집 모두 부드러운 육질을 유지하는 3~4년생 한우 암소 1등급 이상 부위만을 사용하며 숯불에 석쇠를 올려 굽는다. 다만 봉계불고기는 간장을 기본으로 한 양념 불고기보다 소금만 뿌려 굽는 소금구이가 좀 더 인기 있다.
만복래숯불구이
1983년부터 개업해 봉계 숯불고기의 터줏대감 역할을 해온 만복래숯불구이는 봉계에서 가장 먼저 숯불에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원래 봉계에서는 양념한 불고기보다 소금을 뿌려 굽는 담백한 소금구이가 먼저 시작되었고 더 인기 있다. 이 주역 또한 만복래숯불구이다. 식당 주인도 2대째 가업을 잇고 있지만, 이곳을 찾는 단골손님들도 2대를 넘어 3대를 잇고 있다. 부모 손을 잡고 따라오던 어린 손님들이 이제는 장성해 자식을 데리고 온다. 양념 불고기를 내놓기 시작한 것은 어른부터 아이까지 다양한 연령의 가족 단위 손님들의 입맛을 아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육점을 함께 운영하는 만복래숯불구이는 품질 좋은 봉계한우를 통째로 들여와 손질해 부위별로 판매한다. 불고깃감은 도톰하고 넓적하게 자른 앞다리 부위를 사용하며, 미리 양념에 재워놓지 않고 손님상에 내기 전 간장·설탕·마늘 등을 배합해 만든 양념장을 붓는다. 불고깃감의 두께를 비교하자면 광양·창원·언양 불고기를 제치고 가장 두툼해 씹는 맛을 즐길 수 있다. 불고기와 더불어 봉계한우를 담백하게 맛보기엔 소금구이가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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