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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극작가 셰익스피어는, “불 테면 불어라 겨울바람아, 눈보라와 섞여 치니 사정도 없다마는, 인생의 감사하지 않는 마음보다 모질지는 않구나”라고 했습니다. 감사는 사람의 도리입니다. 없는 것으로 불평하기보다는 주어진 것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지혜서인 탈무드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칭찬하는 사람이요,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롬 1: 21을 보시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고 합니다. 세상의 종말이 가까울수록 감사를 잃어버린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도리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감사를 잃어버린 예배는, 참되고 진정한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자성어 가운데, “배은망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살면서, 타인에게 입은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상황을 지날 때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에 대해,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응답하심에 대해 감사를 하지만, 은혜를 잊어버린 사람은, 하나님의 응답하심에 대해 감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기억하는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든 어려움이 닥칠 때는 서슴없이, 하나님께 먼저 기도합니다. 그것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심과 같이,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성도는, 앞으로도 계속하여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자 합니다. 본문 시편 50편은, 다윗 시대의 찬양 대장이었던 “아삽”이 쓴 시로, 핵심 주제는 “예배”입니다. 아삽은 “헤만, 여두둔”과 더불어, 다윗 시대 3대 악장 중의 한 사람입니다. 본문의 대상은, 하나님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본문 22절과 같이,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들로서, 하나님에 대한 단편적 지식은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으로 살아가지만,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방인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그들에게 “생각하라”고 합니다. 생각하고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 회개의 선행 단계이며, 이것을 바탕으로 회개해야 바른 믿음의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형식적인 제물의 무가치함을 지적하며, 진정한 감사의 제사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입술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말하면서, 실생활에서는 각종 죄악을 일삼는 자들의 위선적인 행위를 책망하며 심판할 것을 경고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삶의 슬픔이 어디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재물? 건강? 행복? 아닙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직장에서나 운동할 때나 여행을 할 때나 언제 어디서나 항시,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1절을 보시면,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라고 합니다. 악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이, 악을 묵인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없다”라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이 있을까요? 시 14: 1을 보시면,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시면, 이들보다 더 어리석은 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누굽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의 삶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성경에서 전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하나님께 드리면 된다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모든 것을 자신이 주관하고, 자신이 결정하는 자기중심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결코, 하나님 중심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언제나 자신을 변호하며, 자신에 대하여는 매우 관대합니다. 이러한 그들을 성경에서 찾으면, 일부 제사장들이나 종교 지도자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선지자들과는 다릅니다. 선지자 가운데 이사야 선지자는 사 6: 5에서,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고 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두려움 속에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삶 속에서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다면, 속죄의 절대적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방법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에 대해 관대하기에, 속죄의 절대적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그들 뿐만 아니라, 어떤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누구신지, 어떤 분인지를 안다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겁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요즘에 “저작권”법이 있기에, 함부로 “표절”을 못합니다. 이러한 법이 있기 전에는, 작가가 선한 목적으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렸을 때,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용함으로, 원 작가에게 많은 피해를 주기도 했습니다. 이때, 원 작가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들의 마음에는, 매우 극심한 분노가 있었을 겁니다. 이와 같이, 이사야 당시의 제사장이나 종교 지도자들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일부 사람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본래 의지와는 다르게 인용하거나 사용합니다. 마치, 하나님을 조롱하듯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생각에 동의하기에 침묵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악의 조성자”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악행에 대해,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은, 그들의 악을 묵인하시거나 조장, 추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침묵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롬 3: 25을 보면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길이 참으신다”는 것에서, 악인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은, 악에 대한 묵인이나 추인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죄가 크든 작든, 하나님은 그 죄에 대해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본문 하반절을 보시면,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고 합니다. 죄를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낸다는 것은, 그 죄의 실상을 낱낱이 드러내어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겁니다.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선 악인의 행위에 대해, 인내하심으로 회개의 기회를 주실 뿐, 그들의 악행에 대해 침묵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그들 뿐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은혜의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 긍휼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나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나의 구원을 위해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을 믿고 시인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2절을 보시면,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기에, 세상의 누구도 이견을 제시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능력은 무궁무진하기에, 세상의 어떤 권세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이르기 전에,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지혜이고 믿음이며,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잊어버리는 것은, 우리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잊어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꿈에서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입니다. 행복한 꿈을 꿀 때는 꿈 속에서 조차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악몽을 꿀 때는 꿈 속에서 조차 하나님을 찾고 의지해야 합니다. 저의 모교회인 서울 송정교회의 담임 목사님이셨던 문홍지 목사님께서, 설교하시는 가운데, 병원에서 마취를 한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취를 깰 때 어떤 목사님은 불경을 외우기도 하는 등 다양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는 마취하고 깨어날 때, 실수하지 않도록 기도하셨는데, 마취에서 깨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말은, 문홍지 목사님의 경우 뿐 아니라, 성도된 우리 모두의 말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며, 하나님께 귀히 여김을 받는 사람입니다. 삼상 2: 30절을 보시면,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고 합니다. 본문의 시작을 보시면,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라고 합니다. 본 시편을 기록한 아삽으로부터 가장 먼저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누구겠습니까? 그의 지휘에 따라 찬양을 하던 찬양대였겠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주 충격적인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행위는, 하나님과 자신들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것과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취해야 할 자세를 망각하고,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일을 계속했다는 겁니다. 마치,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나 사무엘의 아들들이 제사장이었지만,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일을 행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에서,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행하신 인내의 한계점이 가까웠다는 겁니다. 그것은, 이 말을 듣는 그 순간, 그들은 계속해서 악의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거기서 돌이켜야 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매 주일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이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당연한 의무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체험하는 최대의 통로가 됩니다. 이러한 예배를 그저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드린다면 또는, 예배 자리에서만 거룩한 척 예배를 드린다면, 과연, 그가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까요? 유대의 격언 중에,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혀에 붙기 전까지는, 아이에게 아무 말도 가르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가 가장 먼저, 예배를 위해 준비해야 할 마음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입니다. 또,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사자가 움킨 것을 찢는 것에 비유한 겁니다. 맹수가 먹이를 갈기갈기 찢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면 아무도 그를 구원할 자가 없음을 말하며, 이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실제 삶이 일치하지 않는 위선적인 행위를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도 않고, 그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귀히 여김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3절을 보시면,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합니다. 감사로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는, “감사로 드리는 예배”임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나 감사해서 가슴 속에서 솟구치는 감사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감사의 반대가 무엇일까요? “당연”입니다. 마땅히 감사해야 할 일인데도 “당연하다”라고 여긴다면, “감사”가 없습니다. 사람들 간에도, 감사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에 대해서는 “뻔뻔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자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원만할 수 없습니다. 곧, 내가 예수 믿기에,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행하셨다라거나, 내가 기도했기에, 내가 봉사했기에, 내가 희생했기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영원토록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자세에는 “당연”이라는 말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감사는, 어떤 조건이나 환경 때문에 드리는 감사가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드리는 감사”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감사 이유가 되신다는 겁니다. 이렇게, 매사에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때,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고,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게 되고, 미처 깨닫지 못 했던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감사할게 있어야 감사를 하죠. 지금의 내 삶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아세요?”라고 생각하는 분 계십니까? 감사는 이유가 있어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때문에” 드리는 겁니다. 여러분, 본문의 시작을 보시면,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감사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감사가 없으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진 자가 믿음있는 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최고의 축복입니다. 믿음은 감사이고 감사는 믿음입니다. 본문 속의 이스라엘은, 풍성한 제물로 제사를 드렸지만, 그들의 행위는 여전히 죄악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고 경배했으나 행위로는 하나님을 멸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과 “외식 하는 자”라며, 격노하셨습니다. 감사는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 주변의 사소한 것에서부터, 구체적인 감사의 조건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감사한 것이고 소중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며, 하나님을 찾고 있는 사람은 괴로운 사람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감사의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