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스덴 폭격
전옥경 글무뉘문학사랑회
해마다 칠월이 되면 남편이 생각나면서 기억마저 흐릿한 남자가 등장한다. 수필 동인지에
낼 글 세 편을 미국에 사는 고등학교 동창에게 이 메일에 첨부해 보낸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남편은
암 투병 중이고 시간이 갈수록 나빠지기만 해서 꺼져가는 등잔 불 같았다.
항암 주사를 맞으러 시드니 대학 근처에 있는
RPA 병원 (로얄 프린스 알프래드)에 정기적으로
다닐 때였다. 남편의 손을 잡고 길을 건널 때, 그 차가운 감촉에
놀랐지만 ‘그대의 찬 손’을 잡고 있는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남편이 타계하기 며칠 전, 나는 직접 주소를
보내라는 어느 교수의 이 메일을 받았다. 친구에게 보낸 나의 수필 세
편 중에 장영희 교수가 무조건 좋다는 내용이 들어있는 글이 있었다. 이 파일을 오십 년 전에 유학을
떠난 남자가 전달받고 장영희 교수에게 보낸 것이다. 장영희 교수는 글을 읽고 저서를
보내고 싶다며 주소를 알려달라고 하니 당황해서 내게 연락을 한 듯 했다.
두 교수간에 오간 이 메일의 내용이 그대로 내게도 전달되어, “저도 놀랐습니다 그리고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라는 답신을 보냈다. 장영희 교수는
항암 치료가 끝나고 호전되어 마음을 놓을 때였다.
남편은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해서 힘든 항암치료와 부작용을 견디며 살았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잘 잤는지, 기분이 좋은지를
묻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잔디도 깎고 집안 일로 운전을 하며 평상시와 같이 보냈다.
서울에서 온 손님을 만나고, 막내 딸이 아파트를
계약할 때는 이곳 저곳을 알아 보고 부동산에 연락을 했다. 입주할 때는 가구 배달을 기다리며
마지막 봉사를 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딸의 아파트에 갈 때마다 남편의 마지막 작품을 본다. 장식장이 길어
출입문 쪽 벽에 붙은 경보 장치를 가린다고 끝 부분을 자르고 매끄럽게 다듬어 놓았다.그는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도 해 놓고 갈 것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장식장을 볼 때마다 그의 찬 손을 잡고 길 건너 병원에 갔던
기억을 잊지 않는다.
배에 복수가 차고 밤새 고통을 이기지 못해 아침에 갑자기
입원을 했다. 다음 날 물을 빼준다고 해서 진통제를 맞으며 하루 종일 병원에 있었다.
나는 이틀 간의 휴가를 얻어 남편과 쇼핑을 하며 같이 지낸 후, 병원에 입원하
는 날에는 오후 7시가 되어서야
병원에 갔다. 남편은 눈물을 흘렸다.
갑자기 그 밤에
심장이 멎어 사망했다는 병원의 연락을 받고 간 칠월의 아침.
병원 측의 배려로
아직 침대에 누워 있는 남편의 모습을 본 순간, 내게 드레
스덴 폭격이 시작 했다는 것을 그 때는 몰랐다.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을 북클럽에서
읽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영국이 동부전선 소련군의 진격을 돕기 위해 2월에 개시한 독일 드레스덴(Dresden)폭격 작전에서
살아 남은 사람의 이야기가 친근하게 다가 온다. 작가는 실제로 유럽에서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 드레스덴의 도살장을 개조한 수용소, 제5도살장에 끌려갔다. 영국 공군의
야간 폭격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고, 바로크 양식의 걸작, 작센 왕국의
수도 드레스덴은 불바다가 되었다.
“제5도살장에서 풍자는 전쟁을 고상하고
정당하며 영광스런 것으로 간주한 이념성을 공격하는데 나타나 있다. 그러나 더욱 핵심이 되는 풍자는
고통스런 현실을 회피하는 것을 넘어서 연약한 인간 집단이 인생에 적응하며 생존하는 법을 배우는 현실적 모습이다.” 라는 서평을 읽었다.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현재로, 자유롭게 시간
여행을 하며 시간 여행자로서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고 다시 살아나기도 하는 ‘빌리’라는 주인공.
나는 인생의 아름답고 두근거렸던 시간으로 여행하고 싶어 했지만 그런 시간을
찾아 갈 틈을 발견하지 못했다. 남편도 장영희
교수도 타계한지 십 년이 넘었다.
나는 드레스덴 폭격에서 살아 남은 ‘빌리’가 부럽다. 죽음을 목격할 때 마다 그
가 내뱉은 말, ‘뭐 그런 거지’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