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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의 규례 (2)
- 설교 : 김강호 목사
오늘은 제물의 규례의 두 번째다.
1장부터 7장까지 제사법의 기록이 있다. 처음과 끝은 시내 산에서 내게 예물을 드려라 그렇게 1장2절에도 말씀하고 7장 제일 끝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시내 산에서 예물을 드리라 날에 명하신 것이다. 그래서 제사법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레위기 제일 끝에 시내 산에서 하신 말씀이 마치시니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언약을 체결하시고 함께 거할 집을 짓게 하시고 그리고 제사장을 세워서 자기 상에 나오게 하시고 친교를 나누는 법 이것이 언약 체결의 본질이다.
그런데 이 제사법도 두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다. 하나님 앞에 예물 드리는 법이 1-5장까지 있으면 그 다음에 6:8절부터 제물에 대한 규례는 이러하니라 하면서 제물을 나누는 몫에 대한 이야기가 후반부에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런데 제물을 나누는 몫에 보면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문제가 또 나와 있다. 그냥 이것은 누구의 것 이렇게 나누면 좋은데 제사 지내는 이야기가 또 나와 있다. 그러면 1-5장까지의 제사 드리는 법하고 6장 이하에 제사 드리는 것하고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 했을 때 1-5장까지는 그 제사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제사법이 기록이 되어 있다. 하나님 앞에 이렇게 드려라 제사의 성격이다. 어떤 경우에 드리는가? 그리고 6장 이하에 제물에 대한 규례에서 제사 법이 나온 것은 그 제사법 자체가 여호와의 몫으로서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니까 그것은 함께 짜 맞추어서 제사법 해 가지고 한꺼번에 기록을 해 버리면 그 문맥의 흐름을 잘 못 잡는 것이다.
속건제의 규례를 봅시다. 7장1절을 보면 속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지극히 거룩하니 그렇게 되어 있다. 강조점은 속건제의 제물로 속죄 제물처럼 지극히 거룩하다는 것이다. 항상 앞에 나오는 것이 서론이고 주제 격이다. 그것을 잘 봐야 된다.
그리고 뒤에를 보면 여호와의 몫으로서 또 자기 백성의 소유로서 그 거룩한 성격을 드러내는 기록들로 되어 있다.
여기 본문을 보면 어떤 의미로 거룩하냐? 2절을 보면 번제 희생을 잡는 대세 잡아라. 그리고 3절 모든 기름은 드려라. 그리고 5절 보면 화제로 불살라라. 속건제요 그 다음 6절을 보면 지극히 거룩하니 이것을 제사장의 남자마다 먹어라. 그러니까 7장 1절의 지극히 거룩하니 하는 것은 2-5절까지의 내용을 포함하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다. 전체로 품고 있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고 2-5절까지를 품고 있는 서론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또 6절에 반복하고 있다. 지극히 거룩하니 이것을 제사장의 남자마다 먹되 속죄제와 똑 같은 방식으로 먹어라. 그리고 번제의 가죽은 제사장이 갖고 그리고 소제를 드리고 남은 것은 제사장의 것이다. 여기는 속건제 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번제나 소제까지 기록이 되어 있다.
이 거룩함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실은 속죄제에서 강조되어 있었다. 여기 7절에서는 속죄제와 일반이니 그렇게 말함으로 그 간략하게는 되어 있고 속죄제물의 거룩함은 6장 후반부의 속죄제의 규례에서 어떻게 거룩한가 잘 나와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거룩하다는 말이 여전히 속건제에서 강조되어 있으면서 여호와의 몫으로서 거룩한 것이 앞에 있고 자기 백성에게 주신 지극히 거룩한 소유물로서가 뒷부분에 따라 있다. 그런 구조다.
주보를 읽으면서 설명하겠다. 강조점은 속죄 제물도 속죄제처럼 지극히 거룩하다는 말이다. 지극히 거룩함은 성소에 속한 것이다. 하나님의 몫은 화목제의 기름과 같으며 고기는 제사장의 지극히 거룩한 양식이다.
7장2-5절까지 보면 화목제를 드리는 것과 같다. 강조점은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잡아라 속죄 제물인데도 그리고 이렇게 이렇게 기름과 콩팥을 드려라 그리고 불살라라 이것은 화목제 드리는데 강조점이다. 기름 드리는 태우는 것은 화목제가 강조점이다.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다른 데서는 이 제사법이 속건제처럼 안 나와 있다. 드디어 속건제에서만 제사 규례에서만 제사법이 쭉 나와 있고 이 제사법은 실은 앞부분에 해당된다. 다른 제사들은 그런데 속건제의 제사를 지낼 때는 이 제사 지내는 법이 5장에 안 나왔다. 대신 오분의 일을 갚아라 갚는 이야기만 나와 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법에 실은 이 제사가 나와야 하는데 이것이 안 나오고 성물에는 오분의 일을 더하고 성소에 지정 한데로 은세겔대로 갚으라 그랬고 배상 문제만 5장에 집중적으로 나와 있고 제사 법인데도 하나님 앞에 어떻게 드리는가 하는 문제는 안 나와 있었다.
다른 제사는 그러지 안했는데 속건제의 제물은 그것이 안 나와 있고 배상 법만 강조돼 있었다. 그러니까 배열을 보니까 우리 생각대로 안되어 있다.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니까 이 제사법이 5장에 쭉 나왔어야 맞을 것같은데 거기는 이 제사법은 언급이 없고 어떻게 갚을 것인가 그 이야기만 나와 있다.
속죄제는 지극히 가난한 자는 양식으로 해야 되는데 속건제는 성소에 지정한 가치의 은 세겔대로 하니까 깍아 주는 법이 없다. 거기에다가 오분이 일을 가산해야 한다. 배상을 해야 한다. 그것이 속건제가 하나님 앞에 어떤 성격으로 드려지는가 하는 것이 5장에 나와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 여기 7장에서 속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하면서 다른 제물을 전부 나누는 몫인데 여기는 느닷없는 제사법이 쭉 기록이 되어 있다. 그랬을 때 이 제사법은 앞에다 기록할 것은 단순히 뒤에다가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이 제사법 자체가 하나님의 몫으로서 의미를 갖는 제사법이다. 그런 말이다. 그러면 제일 죄 문제가 참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먼 것이다.
향내를 위해서 드린 것은 속죄를 위해서 드린 것보다는 훨씬 죄에 대한 문제가 심각하지를 안는다. 그런데 속죄제 나 속건제는 향내를 위해서 드린 것이 아니라 죄를 속함 받기 위해서 드린 것이다. 그래서 속죄 제물에서는 사람 앞에 어떻게 거룩한 양식을 주는가가 집중적으로 강조되어 있었다.
6장 24절부터 보면 속죄제 희생은 지극히 거룩하다. 벤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잡고 그 속죄제의 희생을 잡을 것이다. 또 제사장이 거룩한 뜰에서 먹는데 고기에 접촉하는 모든 것은 거룩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 피가 어디에 묻었으면 옷이든지 그릇이든지 다 깨뜨리고 빨아라. 그리고 이것은 지극히 거룩하니 모든 제사장의 남자마다 먹어라. 그러나 성소에 가지고 들어간 것은 먹지 말아라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속죄 제물의 먹는 것이 어떻게 지극히 거룩한가가 굉장히 강조되어 있다. 다른 것은 소제물도 이만큼 거룩한데 잡는 것도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잡아라. 속죄 제물이라고 해서 진 밖에서 잡는 것이 아니라 번제 잡는 곳에서 잡고 지극히 거룩하니까 피를 내 앞에 뿌려라.
그리고 이것은 지극히 거룩하니까 제사장의 모든 남자마다 먹어라. 이것은 지극히 거룩하니 접촉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해 버릴 것이다. 그렇게 강조되어 있다. 그래도 아직은 옷이나 그릇에는 그 거룩이 옮겨가지 않도록 빨아 버리고 깨드려버려라. 그리고 제사장이 드린 속죄 제물은 성소에 피를 뿌린 것이니까 먹지를 말아라. 아직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먹는 것이 어떻게 거룩한가 하는 것은 속죄 제물에서 강조되어 있다.
왜냐하면 속죄 제물은 거룩한 생명의 교제를 확인해 줘야 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향내나는 제사를 드린다는 의미가 드린다는 의미가 확증되겠지요? 그러니까 속죄 제물에서는 제사장의 몫이 굉장히 강조되어 있다. 그런데 속건 제물은 제사장의 몫이 무엇인가가 그렇게 강조되어 있는 것은 아닌데 오히려 여기서는 하나님의 몫이 강조된 식이다.
제사법이 쭉 기록이 되어 있다. 그리고 제사장에게 주는 거룩은 어떤 의미로 강조되어 있냐 하면 속죄제처럼 지극히 거룩하다. 그리고 거기다 무엇을 덧붙였다. 번제의 가죽은 제사를 드린 제사장이 갖고 소제는 드리고 남은 것은 제사장이 먹어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리고 평균히 분배해라. 모든 남자마다 먹으라고 6장에서는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평균히 분배하라고 하니까 다 먹어라는 말하고 같다.
그러니까 기록된 그 형식들을 보라 그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보니까 하나님은 제단에서 잡수신다. 화목 제물을 잡수시는 방식으로 잡수신다. 왜냐하면 속죄는 죄를 해결하는 문제다. 죄를 해결했다는 문제는 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화목의 전체를 누리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니까 이제 죄에 대한 문제를 끝내는 속건제에서 하나님은 화목 제물을 단에서 취한 것처럼 지극히 거룩한 양식으로 취하시고 그리고 제사장에게도 지극히 거룩한 양식으로 주셨는데 강조점이 제사장의 남자마다 먹되 거룩한 곳에서 먹을 지니라 6절에 그렇게 되어 있다. 하나도 빠지지 않는다. 제사장의 모든 남자가 거룩한 뜰에서 모두 먹는다. 이렇게 생명의 교제가 얼마큼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이 속죄 제물에서 몫에 대한 강조점이다.
그래서 속죄제처럼 고기는 그것을 드리는 제사장에게 돌아갈 것이요 이것 보면 나누기가 묘하다. 왜냐하면 제사장의 몫이면 모든 남자마다 먹으라는 말은 안 맞겠지요? 6절에 보니까 제사장의 모든 남자마다 다 먹는다. 제사장의 남자마다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라. 그런데 그 고기는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만 먹을 것이요 하는 것을 봐서는 어느 때는 제사장만 먹으라고 하는 것 같고 어느 때는 모든 제사장의 남자마다 먹으라고 그런 것 같고 무엇이 좀 왔다갔다하는 것같다. 우리는 나누는 방법은 모른다. 그 사람이 먼저 받고 자기 모든 친척에게 나누어주는지 우리는 모르고 기록된 문장만 우리는 해석을 하는 것이다.
랍비들은 잘 알 것이다. 먼저 누가 먼저 받아서 혼자 먹지 말고 나누어 먹고 그것은 랍비들이 알 일이고 우리는 기록된 형식에서 먹는 문제를 안다. 남자마다 다 먹고 제사장이 다 먹어라. 양쪽에서 강조하고 있다. 제사장은 죄를 속하는 일이니까 죄를 지고 전면에 나오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먹어라. 그리고 모든 제사장의 남자는 먹어라 하니까 아직 화목제처럼 성소 밖으로 확대된 것은 아니어도 모든 제사장이 먹을 수 있는 양식으로 강조되어 있다.
기록된 형식들을 보라 그 말이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느닷없는 번제 가죽 이야기 소제물의 남은 것을 평균히 분배하는 이야기가 10절까지 나와 있다. 묘하지요? 이것은 차라리 소제의 규례에 나오고 번제의 규례에 낄 일이다. 번제 가죽은 누가 가지는가 하는 이야기니까. 번제의 규례이다 끼고 소제물의 남은 것은 이 앞에 또 나와 있다. 그런데 여기서 또한번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면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실은 속건제의 제물을 제사장에게 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다른 데서 제물 나누는 것을 여기서 한꺼번에 언급해서 속죄제물의 몫을 나에게 주는 의미를 여기서 강조해서 표현하려고 그런 것이다. 비슷한 것을 반복해 주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속건제의 제물의 몫을 나누는 것도 번제물의 가죽 나누는 것과 소제물을 온 제사장의 가문이 평균히 나누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의미를 여기서 나타내 주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속죄제물에서 강조되어야 하는가? 죄를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 친밀한 친교가 거듭 강조해 줘야 한다. 이것은 죄를 속하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즐거워하도록 허락한 것이기 때문에 네가 어떻게 풍성히 주고 거룩한 생명의 교제를 주는가가 특별히 강조되어야만 그것의 성격이 합당한 것이다.
가령 아이들을 매 때려 놓고 훌쩍 훌쩍하고 먹으면 어떻겠어요? 매 안 때린 아이가 먹으면 많이 먹든지 작게 먹든지 나 두겠지요? 그러나 가난한 사람이 왔다거나 방금 말을 듣지 않아서 매를 때려 놓고 이제 좋다고 훌쩍훌쩍하면서 먹고 있거든. 그럴 때 어머니들이 많이 먹어라 왜 때려 놨거든. 그러니까 그렇지 않고 똑 같이 안 때린 형제나 때린 형제나 똑 같이 나누어주면 먹으면서도 기분이 별로 그럴 것이여. 그러겠지요? 그러니까 아마 특별히 그런 아이한테는 많이 먹어라 하겠지요?
가난한 사람에게도 그러겠지요? 똑같이 나누어 놓고도 먹고 싶은 사람 먹어 하면 먹으면서도 가난한 사람은 찜찜할 것이다. 그러니까 특별히 그런 사람에게는 싸 주기도 하고 많이 먹으라고 그렇기도 하고 그래야 위로가 되겠지요?
이스라엘 백성 속죄제물을 죄를 속하는 문제로 드린 것이다. 죄에도 불구하고 죄를 속하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다. 향기를 위해서 드린 것은 아니어도 실은 향기를 위해서 드린 것이다. 화제로 드리니까. 그러니까 몫에 대해서 내가 너에게 거룩한 양식을 주노니 여기서 먹어라. 너희 모든 제사장의 남자들이 다 먹어라. 그리고 나서 제물을 가지고 온 네가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렇게 했을 때 하나님께서 죄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친교를 어떻게 강화시키는가 하는 문제가 전면에 드러난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제사지내는 법을 연구하는 식으로 모아서는 해석을 못한다. 오히려 기록된 형식대로 그대로 놓고 읽었을 때만 성경에서 이 제사법의 특징을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하는 문제를 잘 해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하면 여기다 배열할 것이 아니라 번제는 번제 규례에다가 하나님은 전부 태워 드리고 가죽은 누구의 것 거기다 다 했으면 좋을 것인데 느닷없이 속건제를 말할 때 말하고 있다.
속건제의 제물을 나누어주면서 다른 것을 나누어주는 이야기를 한꺼번에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런 의미로 이것도 주는 것이다. 이런 의미다. 번제를 드린 제사장은 전체를 다 드린 자로 가죽을 가진다. 그리고 소제물이 지극히 거룩한 양식이었다. 하나님은 한 움큼 태워 드리고 모든 유향을 태워 드리고 제사장은 거룩한 양식으로 아론의 가문에 주었다.
그것은 성소의 양식이다. 그것을 모든 제사장의 가문이 평균히 나누라고 한 것을 같은 의미로 여기다가 배열해 주고 있다. 그러니까 이런 저런 손해를 하나님께 또는 형제에게 끼치고 부지중에 범죄 했을 때 그런 죄가 자기 백성과 하나님의 교제를 막을 수가 없다. 하나님은 속죄의 길을 허락하셔서 그 제물로 말미암아 죄를 속하고 하나님의 단에 화목제를 드린 것처럼 기름을 사르고 그리고 백성은 거룩한 뜰에서 거룩한 양식으로 먹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소에 속한 생명의 교제다. 그것이 속건제의 제물에서 말하는 것이다.
화목제의 규례.
강조점은 여호와의 제사장과 임자가 나누는 풍성한 식탁의 교제이다. 7:11-부터 나와 있다. 이 앞에 화목제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방법은 기름 떠내는 이야기였다. 기름을 드리는 이야기가 화목제 제사에서 강조점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특별히 자기 몫을 찾았다. 기름은 내것이라. 그리고 아무도 기름은 먹지 말아라. 피와 기름을 절대 먹지 말아라. 그것이 화목제를 드리는데 하나님 앞에 드리는 방법에서 강조점이다.
다른데서는 이것은 내 것하고 찾으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화목제의 기름은 내 것 아무도 먹지 말 것 그랬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 앞에 예물 드리는 것 하나님의 식탁에 드리는 것이 강조점이다. 그리고 모든 기름과 콩팥을 드리니까 생명의 기름진 것 생명의 힘을 드린다. 콩팥하며 모든 힘이 거기서 나오는 표현법들이다. 그래서 아주 기름진 것을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화목제, 즉 3장에서 나오는 강조 점이었다.
그런데 7:11여기서 화목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한데서는 그런 이야기는 없다. 물론 기름진 이야기가 강조점 보다도 여기서는 거기다 더해서 드린 것이 있다. 12절에 감사함으로 드리려면 어떻게 하는가? 무교병과 구교전병 그러니까 기름 섞은 무교병 기름 바른 무교전병 그러니까 본문 자체를 읽어보는 것이 제일 좋다. 단지 저는 그것을 알기 쉽게 요약한 것뿐이다. 특별히 그런 형식을 가지고 기록한 것을 요약해서 표현하면 읽기 좋은 방법밖에 아니다.
여기 보니까 기름 섞은 무교병 기름 바른 무교전병 기름 섞어 만든 과자를 감사 희생과 함께 드리고 여기서는 풍성한 식탁의 교제가 중심이니까 이것저것 많이 드린다. 그런데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 희생과 함께 드리되 유교병까지 들어 있다. 그러면 우리는 누룩 섞은 것은 죄 하면 도저히 해석이 안되는 것이다. 이것은 죄로 해석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하냐? 신약 교회가 죄는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한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이야기는 안한다. 바라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도 있고 누구도 있었지 않느냐 풀려고 그런다. 그것은 성경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성경은 교회로 그런 질로 표현을 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앞에 문맥을 보면 무교병도 드리는데 여러 요리가 있다. 기름 바른 유교병 기름 섞은 무교병 보니까 고운 가루도 있고 요리가 다양하다. 거기다가 또 유교병도 드린다. 이것은 화평의 안식의 떡, 평안하게 부풀려서 드린 떡이기 때문에 이것은 구약으로서는 드리는 것 중에 완성이다. 구약에는 아직 완성이 안된 것처럼 하나님 앞에 드릴 때도 무교전병만 드리되 유교병은 아직 못 드린다. 마치 하나님께서 광야를 여행한 것처럼 드리고 있다. 그런데 유교병을 드리는 것은 안식의 떡이다. 평안하고 풍성히 부풀려서 드리는 떡이다.
그러니까 여기 보니까 잔칫상이 걸다. 떡 종류가 많다. 3장에서 화목제는 떡 이야기는 안 나오고 기름 이야기만 나왔다. 콩팥까지 드리고 기름만 내 것 피도 내 것 아무도 먹지 말아라 그런 이야기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몫이 무엇이냐? 하나님 앞에 드리는데 떡 종류가 많은데 유교병도 있다.
그리고 14절 보니까 하나님 앞에 올렸다 내렸다 해서 하나님의 몫으로 드리고 그 하나님의 몫으로 드린 것을 피를 제사장에게 돌릴지니라. 그것이 화목제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것을 제사장에게 준다. 그리고 15절 보면 감사함으로 드린 화목제의 희생의 고기 여기는 이제 11-14절은 화목제와 함께 드리는 떡의 종류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고 그리고 그 중에서 거제로 드린 것은 전부 내 것인데 제사장에게 주어라. 이것은 거룩한 생명의 교제로 주는 것이고 15절 이하에는 먹는 방법이다.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까지 두지 말지니라. 16절 그러나 희생의 예물이 서원이나 자원의 예물이면 그 희생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그렇게 되어 있는데 이런 표현법이 강조 표현법이다. 우리는 아주 비능률적으로 기록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날도 먹고를 빼 버리고 이틀까지 먹을 것 하면 간단하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드리는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그 이튿날에도 먹되 이런 표현법은 그대로 읽어야 하다. 우리처럼 제물을 며칠까지 먹냐 그것만 연구할려면 서원이나 자원 예물은 이틀 감사로 드린 것은 하루 이러면 끝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서원이나 자원 예물을 드리면 그 날도 먹고 그 이튿날도 먹고 먹는다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고 있다. 이런 표현법은 본문을 읽어야지 그냥 설명해서는 모른다. 제가 설명하는 것은 이런 강조점을 잡아서 한 것이기 때문에 주보를 읽고 본문을 자꾸 읽어보라 그 말이다.
17절에 고기가 제 삼일까지 남았으면 불사르되 화목제의 희생의 고기를 제 삼일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열납되지 않을 것이다. 드리는 자에게도 예물답게 못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요 그것을 먹는 자는 죄를 담당하리라. 전부 무효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먹는 것이 강조가 되어 있다. 먹는 것도 속건제나 속죄제는 먹는 장소가 강조되어 있었다. 거룩한 뜰에서 먹어라 그것이 강조되어 있었다. 화목제에서는 거룩한 뜰 이야기는 없다. 며칠까지 먹는가 하는 이야기다. 이것은 뜰에서만 먹는 것이 아니라 나가서도 먹는 것이다. 19절을 보면 그 고기가 부정한 물건에 접촉되었으면 먹지 말고 불사르라. 고기는 깨끗 한자만 먹으라. 여기서는 깨끗한 자만 먹으라가 19절부터 21절까지 강조되어 있다. 몸이 부정한자가 화목제의 희생을 먹으면 백성 중에서 끊어지고 또 부정한 것에 접촉된 자가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를 먹으면 그 사람도 자기 백성중에서 끊어지리라.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러면 이런 부정은 성소밖에 있는 부정이다. 성소안애는 이런 부정한자가 못 들어온다. 성소는 하나님의 생명의 영역이기 때문에 거기는 부정한자가 없고 오히려 영광스런 옷을 입은 제사장이 있다. 그런데 이런 부정은 성소밖에 있는 부정이다. 그러니까 이 화목제는 풍성한 식탁의 교제이니까 하나님 앞에 거제로 드린 것은 제사장이 먹고 피를 뿌린 제사장이 먹고 그리고 나머지 고기는 임자가 먹는 되 감사로 드린 것은 하루 먹고 서원이나 자원으로 드린 것은 이틀까지 먹고 삼일에는 불살라 버려야 된다.
그런데 이것은 깨끗한 자만 먹어야 되고 성소에 속한 제물을 그 제물이 무엇에 접촉되면 그 접촉된 것이 거룩하게 되어 버린다. 그런데 이것은 성소밖에 있는 것은 아직 그런 식으로 성소 밖에까지 확대가 안된다. 성소 밖으로 나가면 부정한 것이 이 제물에 접촉되면 제물이 부정하게 되어 버린다. 그리고 어떤 부정, 자기 몸에 피가 흘러 부정하든지 그 사람이 다른 부정을 만져서 부정하든지 어떻든 부정한가 먹으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죽일 것이고 만일에 날짜를 넘겨서 먹으면 예물을 무효다. 드린 자신까지 무효가 된다.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풍성한 식탁의 교제가 강조다. 하나님 앞에 드린 것도 종류가 많고 유교병까지 드려지고 있고 그런 거룩한 교제를 피를 뿌린 제사장에게 준다. 긴밀한 친교가 있다. 그리고 나머지는 임자가 먹는데 또 제사장도 먹겠지요? 거제로 드린 것 빼놓고는 먹겠지요? 이 거제로 드린 것은 소제물을 드린 것과 같다. 화목제의 떡은 소제물을 드린 것과 같다. 소제물을 한 움큼을 여호와 앞에 기념물로 태우고 나머지는 전부 제사장의 양식이었다. 그것과 같이 화목제의 떡을 주고 있고 고기는 이제 성소 밖에서 이틀까지는 먹는데 부정한 자가 먹으면 안된다. 부정한 자는 하나님의 생명의 교제로부터 단절된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22절에 보면 그전에는 기름은 전부 하나님의 것이었다. 절대 손대지 말아라 그것이 강조점이다. 그런데 22절 보니까 여전히 그것이 강조되어 있다. 기름은 먹지 말아라. 그런데 어떤 의미로 먹지 말라고 그러냐? 내 것이니까 먹지 말아라 그런 말이 아니고 여기서 강조점은 스스로 죽은 것의 기름이나 짐승의 찍긴 것의 기름은 달리는 쓰려니와 결단코 먹지 말아라. 만일에 희생의 기름을 먹으면 그 사람도 죽으리라. 그리고 모든 곳에서 피와 기름을 먹지 말아라. 그러면 그 사람은 죽으리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화목제의 고기 중에도 아직 못 먹는 것이 있다. 기름은 내것이라 했는데 여기는 그런 정도까지는 강조가 안되어 있다. 달리는 써라 그렇게 되어 있고 먹지는 말아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전에는 달리 써라 그런 말이 없다. 여기서는 달리는 써라는 말을 보니까 아직 먹을 수는 없지만 다양한 용도로 쓰고 있는데 아직은 먹지는 말아라. 먹는 자는 죽으리라. 그렇게 해서 아직 화목제도 제 삼일까지 양식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그리고 모든 부정을 이기는 방식으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은 아니다.
성소의 양식은 그것에 접촉된 것이 깨끗해져 버렸다. 그런 양식으로 준 것은 아니고 하나님의 기름을 취하신 것처럼 백성에게 먹는 양식으로 주시지는 안했다. 그리고 감사제까지라도 등급이 있어서 감사로 드린 것이 화목제하고 서원이나 자원으로 드린 것하고 차이가 있다. 화목제의 성격은 이 본문을 보면 감사제의 성격이다. 그런데도 그 감사가 강조된 것은 맹세고 서원이나 자원하는 예물이다. 여기서는 자원은 서원 예물이다. 서원은 감사를 확정하는 것이고 또 서원에서 모든 감사가 강조된다. 그러니까 그런 것은 이틀까지 먹어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문맥에서 풀어라 그 말이다.
주보를 읽어보자.
강조점은 여호와와 임자가 나누는 풍성한 식탁의 교제이다. 그러므로 화목제의 희생과 함께 무교병과 유교병을 드리며 제물을 먹는 날수를 강조한다.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어서 아무도 먹어서는 안된다. 화목제는 임자가 가져오고 가슴과 뒷자리는 요제로 드리고 그것을 제사장 가문의 대대로 영원한 소득으로 주시고 나머지는 임자의 거룩한 몫이다. 요약해서 그런데 이 본문에서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라는 강조점도 있지만 달리는 써라 하는 것이 앞에가 나와 있다. 항상 문맥을 봐야 한다.
방금 읽은 주보 뒷부분은 28절부터 있는 이야기다. 28절부터 보면 백성에게 이르시기를 화목제의 희생은 여호와께 드리려는 자가 희생 중에서 그 예물을 취하여 여호와께 가져오되 다른 제사는 이렇게 말을 않고 있다.
다른데서 보면 그것은 전부 제사장이 가져온 것으로 느낄 수가 있다. 임자는 잡기만 하고 제사장이 가져다가 드린 것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분위기가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임자가 가져와라 굉장한 친밀한 친교로 되어 있다. 또 30절 보면 여호와의 화제는 그 사람이 자기 손으로 가져올 지리라. 강조 법이 다르다. 29절에는 드리려는 자가 가져와라 30절은 그 사람이 자기 손으로 가져올지니 무엇을 가져오는가 제물의 가슴과 기름을 가져올 것이요 이것이 화목제의 희생을 내게 가져오라 그 말이다. 누가 임자가. 제사장은 그 가슴을 여호와께 흔들어 요제로 삼고 그 기름은 단위에 불사를 것이며 여기는 가령 드리는 법도 14절을 보면 피를 뿌린 제사장에게 돌릴 것이요 하나님 앞에 드리는 방법 문제를 보면 피흘린 방법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도 보면 제사장이 가져오면 제사장이 드리는데 어떻게 드리냐면 가슴은 요제로 삼고 단위에 불사르고 31절을 보면 가슴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릴 것이요 또 화목제의 희생 중에도 우편 뒷다리는 제사장에게 주어 거제로 삼을 지니 임자가 가져와서 주는 것이다.
아론 자손중 화목제의 희생의 피와 기름을 드리는 자가 우편 뒷다리는 자기 소득으로 삼을지니라. 내가 이스라엘의 화목제 중에서 흔든 가슴 든 뒷다리는 제사장과 제사장 아론과 그 자손에게 주었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영원히 받은 소득이니라. 여기는 보면 제사를 드리는 방법도 굉장히 친밀하게 되어 있는데 임자가 가져온다. 기름과 가슴을 그러면 제사장은 가슴을 흔들어 하나님 앞에 요제로 드리고 아론과 그 후손들이 자기 몫으로 취한다. 가 다음에 우편 뒷다리를 가져온다. 항상 오른편이 대표 기관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그 다리는 거제로 올렸다 내렸다. 그렇게 한다. 그것을 아론 자손에게 드리면 아론 자손이 그렇게 드리고 그것은 피를 드린 제사장이 가진다. 이것은 대대로 영원한 분깃이다.
여기서 보면 화목제의 희생을 임자가 가져오는데도 제사장에게 주어서 이렇게 하도록 하라 그렇게 되어 있다. 임자가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도 이것은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로 드리고 있는 것이다. 내용 자체가 그냥 직접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드린다 하는 속죄제물 적인 방식이 아니라 임자가 내게 가져와라 그렇게 해 놓고 제사장에게는 제사장에게 주어서 내게 예물을 삼도록 해라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물로 드리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제사장은 임자를 통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된다. 그러면 드리는 것은 누구의 것이냐? 아론 자손에게 대대로 영원한 소득으로 주었다. 이 앞에는 소제물의 남은 것을 주었다. 거제로 드린 것 그것은 제사장의 것이었는데 여기서 보면 하나님 앞에 직접 가지고 와라. 그리고 가져와서는 제사장에게 준다. 제사장은 이렇게 이렇게 내게 드리고 드린 것은 네가 가져라 그 말이다.
이렇게 해서 친밀하게 드리는 교제가 강조되어 있다. 특별히 드리는 제사장은 백성을 대표해서 드리는 구조다. 그런 형식이다. 그런데 제사장은 가슴과 뒷다리를 가진다. 하나님 앞에 드린 것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다. 하나님 앞에 흔들어 드린 것은 하나님의 몫이다. 그것은 제사장를 지낸 제사장의 몫이다. 그렇게 하고 있다. 이것이 너희의 대대에 영원한 소득이니라. 여기서 백성이 친히 드리고 또 그들을 대표해서 드리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풍성한 몫을 가지는가 하는 문제가 드러나 있다.
그리고 35절에서 결론적으로 강조하기를 이는 여호와의 회제중에 아론에게 돌릴 것과 그 자손에게 돌릴 것이니 그들을 세워 여호와의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는 날 곧 그들에게 기름 부은 날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그들에게 돌리게 하신 것이라. 대대로 영원히 받을 소득이니라. 다른 제물은 소득처럼 기록이 안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속건제의 제물을 거룩한 뜰에서 먹으라는 것이 강조인데 그리고 남자마다 다 먹어라. 어느 한 명도 제외되지 않는다가 강조인데 여기서는 내가 너희를 무엇 하려고 제사장으로 세웠냐? 너를 제사장으로 세울 때 영원한 분깃을 준 것이 아니냐? 제사장은 백성을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너를 내 제사장 삼았을 때 영원한 소득으로 이것을 내가 정한 것이라.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강조법들을 잘 봐야 된다. 그러니까 화목제는 풍성한 식탁의 교제가 강조다. 다른 것도 분명히 제사장의 몫으로 준 것이 있는데 이런 말은 안했는데 여기 보니까 내가 너를 제사장으로 세웠을 때에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너에게 취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냐? 대대로 너의 영원한 분깃이니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화목제물을 하나님과 제사장과 임자가 풍성한 식탁의 교제를 나누고 특별히 백성을 대표하는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드려진 가슴과 뒷다리는 먹는다. 그들은 백성의 대표로서 제사장의 취임할 때 즉 기름 부음을 받을 때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선물이다. 그러니까 풍성한 식탁의 교제가 강조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중에서 요제로 드린 가슴과 거제로 드린 뒷다리를 제사장에게 주셨다. 이것은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받을 영원한 소득이다. 이는 여호와의 화제중에서 아론과 그 자손의 몫이다. 여호와의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한 그들에게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돌리게 한 것이다. 대대로 영원히 받을 소득이다. 강조점이 그것이다. 마치 제사장에게 그것을 줄려고 세운 것같이 되어 있다. 이 문장이 그렇게 되어 있다. 이는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위임제와 화목제의 규례이다. 총 결론이다.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예물을 드리라 명하신 날에 시내 산에서 이같이 모세에게 명하셨다. 위임제를 제일 뒤로 돌려놓은 것이 곧 화목제의 성격이기 때문에 그렇다. 왜 제사장을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위임시켰을 때 화목제의 떡을 줄려고 위임시킨 것같다. 이 문장이 그렇게 되어 있다. 화목제의 가슴과 뒷다리를 줄려고 너를 제사장으로 삼았느니라. 그렇게 제일 뒤에 보니까 된것같다. 그러니까 여기서 총 요약할 때는 그런 방식으로 결론되어 있다. 순서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 위임제 화목제 이런 규례로 되어 있다.
그러면 실은 제사장의 위임식을 소제에서 나왔거든요. 그런데 제일 뒤에 화목제 앞에다가 그 말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화목제를 끝으로 해서 결론은 맺는 과정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언약의 중심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동거하시며 식탁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안에서 화목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교회를 자기 상에 앉게 하시고 자기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게 하시는 교제로 복을 주셨으며 아들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산것처럼 자기를 먹는 자가 자기로 말미암아 살도록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화목제물이시다.
이것을 유형론적으로 풀면 안된다. 성취된 내용으로 그렇게 연결을 시켜야 한다. 이 예식을 정한 분이 아들이다. 구약 때는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서 세우셨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자기의 권위로 새 언약을 체결하셨는데 바울은 이분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그렇게 말하고 있다.
물론 화목제에서도 속죄의 의미가 분명히 있다. 피를 뿌리니까. 그런데도 여기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는 화목이 이루어지는데 강조가 있다. 그것이 자기 상에서 먹고 마시게 하는 것이다. 유월절 제사가 모든 제사를 포괄하는 처음 제사였다. 그렇게 했다. 우리가 주의 상에서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
그러면 하나님은 예수님 잡수셨다 치고 예수님은 자기 살과 피를 먹어 그렇게 유형론적으로 연결을 하면 안된다. 이제는 아버지와 아들 차이 없이 아들이 언약의 체결 자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들이 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 친히 체결 자다. 그처럼 계시에 있어서 아버지를 대행하는 자가 여기 있다는 것이 구원의 완성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내가 내 언약을 세우노라.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 우편 뒷다리와 가슴이 아니다. 내 피와 살을 먹고 마셔라.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나를 먹는 자는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런 영원한 화목의 교제로 자기 자신을 주셨다.
그것이 교회가 누리는 힘이다 그분의 지체로 산다. 그리스도는 그런 의미에서 교회 주신 화목제물이다. 그런데 이틀만 먹는 화목제물이 아니다. 또 부정한 곳에 접촉되면 부정케 되는 그런 화목제물도 아니다. 우리들의 죄가 자기를 부정케 하지만 하나님과 누리는 생명의 관계가 죄의 권세에 오염되는 그런 생명의 교제가 아니다. 천주교처럼 이것 먹은 사람은 거룩해지고 그런 식으로 먹으면 안되지만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는 모든 것을 정결케 하는 능력이다. 마치 속죄제물이 무엇과 접촉되면 거룩케 되는 것처럼 예수님은 속죄 제물일 뿐만 아니라 화목 제물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먹고 마시는 생명의 교제는 모든 부정을 이기고 죽음의 세력을 이기는 그런 생명의 양식으로 주신 것이다.
우편 뒷다리 든 가슴 정도가 아니다. 자기 자신을 주셨다. 이제는 성소와 성소 밖의 거룩의 간격이 없다. 왜 하늘에 속한 거룩한 교제로 먹으니까 그렇다. 그것이 교회가 누리는 생명의 교제다.
그런데 이런 본문을 교회가 설교를 안한다. 예수의 속죄의 언어가 전부 레위기 언어인데 이런 본문을 설교를 안한다. 그리고 겨우 하면 십일조 내는 법 나누는 법 돈에는 관심이 지극히 많다. 왜냐하면 요즘 소기른 사람이 별로 없거든. 소 뒷다리 하면 값이 대단한데 그것은 없는데 십일조 내는 법만 연구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주셨다. 이제 우리는 유교병도 그린 것처럼 안식의 떡을 먹는다. 살과 피는 죽음에서 이긴 안식의 떡이다. 죽음의 권세가 손대지 못한다. 그렇게 우리가 전체로 헌신하는 삶을 산다. 우리의 전체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 앞에 향내나는 예물이고 바로 그런 의미로 그것으로 주의 상에서 주의 살과 피로 먹는다. 그것이 우리가 화목제물이신 예수 안에서 화목하는 삶을 사는 방식이다. 거기는 거룩하고 그렇지 않는 영역이 없다.
우리가 성경을 다 알아서 질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대면하기 때문에 질문이 없다. 그것은 우리의 생을 전체로 헌신하는 교제로 드리기 때문에 그것은 질문이 없다. 이 말이 지극히 맞다. 누가 물어 보면 모른 말이 많은데 그래도 모른 것이 없다. 그것이 부부끼리 아는 것하고 비슷하다고 했다.
처음 만난 총각을 다 알겠네 묘하게 그런데 4-5년 살다가 부부 싸움할 때 보니까 모르는 남자네. 무슨 말인가 알겠지요. 하나님과 관계는 그런 관계다. 그것이 성경을 알고 모르는 지식 차이는 있겠지만 살든지 죽든지 주의 것이라는 생명의 완성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를 이런 저런 질문에 대답하는 단체로 만들어 가지고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하고 저런 경우는 어떻게 하고 그런다.
부부의 경우도 좋은 때는 다 좋은데 안 좋을 때는 좋은 것도 다 안 좋은 것이다. 그런데 신약 교회를 그리스도와 생명의 관계로 가르치지 않고 이미 하나님에 대해서 의심하고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좋겠냐? 빠져나갈 방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대해서 이런 경우는 이쯤 하면 가르치는 것이 교회를 가르치는 것인가? 그것은 교회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형식으로는 안 싸우고 있는가 몰라도 마음으로는 싸우고 있는 것이다. 왜 전체를 드리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다. 그렇게 가르쳐서는 안된다.
우리같이 가르치면 안 사람은 다 알고 모른 사람은 다 모를 것이다. 그러면 제가 방법론을 하나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요? 여러분 안에 계신 분이 여러분을 그렇게 가르치고 인도하신다. 여러분이 여러분 전 생명을 드리고 내가 하나님 때문에 이렇게 산다고 확신하게 하신다. 그것은 각자 이해력과 환경의 차이가 있다. 그것을 우리는 판단할 권한이 없다.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신약의 장성한 백성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충만한 기쁨이다. 우리가 주님 때문에 우리의 미래를 염려 없이 전체로 헌신하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자이다. 그가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안다. 그리고 소 뒷다리 정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사실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전혀 질문이 없다. 그렇게 사는 것이다. 그 말이다. 그리고 다른 생각하지 말라. 내가 자식을 길러야 하니까 돈도 필요하고 은혜도 받아야 되고 이원화시키지 말라 그 말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그 자신이 전부 책임지는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가 하는 것은 충성한 봉사뿐 다른 문제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섬기는 것이 화목제로 그리고 속죄제로서 주님을 먹고 마시는 교제로 사는 것이다.
우리에게 어려운 것은 내가 신앙이 없을 때 말이고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지 인간적으로 정신이 총총하다고 생각하고 고생 안했으면 한데 그것이 안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그 자신이 아는 이야기라 형제로서 봉사한다는 이야기는 내가 관심을 가져야 되지만 그 자체를 염려하고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그는 나보다 더 고생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위로하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시라 옆에 있는 사람은 잘 모른다. 이제는 필요 없는 말은 안하고 권하기만 하려고 한다. 우리가 남보다 빨리 죽을 수도 있다. 일 다했으면 가는 것이니까 편하게 생각해야 한다. 바울이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했으니까 그것은 전혀 불안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해서 우리를 해석하니까 일반적인 관념으로는 맞는데 하나님을 섬긴다는 질서로는 관여할 조항이 아닌데 그것이 정신이 총총한 줄 알고 계산을 한다. 왜 장구한 시간을 살로 일을 많이 할 사람들이거든. 하나님이 도중에 부르면 안 갈 사람이다. 할 일이 많은데 그러니까 그래가지고 복잡하다.
그러니까 당위적으로 편히 살아라. 하나님이 원하신 데로 단순하게 그런 사람을 세상이 유혹을 못한다. 어떤 경우에도 유혹을 못한다. 그 때 그 때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살 것이니까. 그는 종말론적인 삶을 사니까 어떤 형태로도 그를 유혹을 못한다. 그렇게 살아라 그 말이다. 이것은 여러분의 큰 자유요 기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