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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66:1-4 온 땅이여 하나님께 : 칼빈
시인은 전에 특별히 받았던 한 가지 구원 사실을 교회의 이름으로 찬양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 택한 백성 위에 내려주신 많은 은총을 함께 노래합니다.
크신 은총과 고난의 갈림길에서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위해 개입하신 사실을 시인은 시련 중의 위안으로 그려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원수의 횡포에 붙이신 것은 그들이 용광로 속에서 단련된 은(銀)같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끝부분에서 시인은 개인적인 자신의 이야기를 한 듯합니다.
이 부분은 자신의 결백을 증거 하기 위해 끌어온 것입니다.
그 내용은 악한 자의 기도를 거절하신 주님이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이셨다 입니다.
시, 영장으로 한 노래
1. 본문 1-2절은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할지어다 2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입니다.
이 시는 일반적인 선포로 시작합니다. 후에 이 시는 개별적인 이야기로 바뀝니다.
시인은 세상 전체를 향해 말을 시작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주의 왕국이 미칠 범위를 예언한 사실이 분명합니다.
2절에서는 부르짖음이 더 열정적으로 되풀이 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그의 마음이 태만하다고 생각될 만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격정으로 부풀어 있습니다.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는 매우 명백한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위해 정당하고도 당연한 찬미를 받으실 수 있도록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자신의 존귀에 합당하게 칭송해야 함을 뜻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진 구절은 상당히 모호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이 다른 부분에서 포함된 똑같은 생각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영광을 드러내 보이다’라는 해석을 내립니다.
우리는 “찬양”을 뜻하는 히브리어 문법 기능을 대격(對格)으로 놓고 문자 그대로 ‘그의 찬양에 영광을 드리다’ 라는 뜻으로 옮기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시편 66 편
이 견해에 따르면 다른 이들처럼 기자가 하나님의 찬송 안에서만 전적으로 영광을 표현하라는 뜻을 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시인이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영화로울 수 있도록 지극히 높은 찬송을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것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시인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온건하게 선포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 절대적인 존귀성에 합당한 어떤 양식으로 찬미해야 함을 말합니다.
2. 본문 3절은 “하나님께 고하기를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큰 권능으로 인하여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입니다.
시인은 자기가 왜 우리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려는가에 대한 근거를 진술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냉담한 마음으로 그저 다른 이들이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을 따라 함으로 만족해 버립니다.
그러나 시인은 우리들의 마음을 일깨우고 더욱 깊은 감명을 새겨줄 수 있도록 우리에게 하나님과 시적인 대화를 하라고 지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할 때는 위선의 공허함이 아니라 신실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또 우리는 오직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 심중하고도 깊이 상고한 것만을 말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사실상 개별적으로 대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아무도 우리를 지켜보는 인간적인 안목을 곁에 두지 않고 하나님과 대화를 가질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면전에 스스로 다가앉는 것보다 더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경외심을 심령에 심어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시인이 덧붙인 것은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키도록 적합하게 안출(案出)된 말입니다.
“주의 큰 권능으로 인하여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라는 말씀은 주의 원수들 즉 비뚤어지고 제 고집대로 자신의 직분을 지키려 하지 않는 자들이 자신들이 뜻하든 뜻하지 않든간에 하나님 앞에서는 겸허하지 않을 수 없다면 공포와 두려움으로 복종당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자비로움으로서 하나님 자신의 얼굴 앞으로 불림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야말로 그 얼마나 더 하나님을 위해 봉사해야 할 것인가? 입니다.
하나님의 달콤한 은혜의 자비에 이끌려 스스로 꿇고 따르는 자발적인 충성과 믿지않는 자들이 마지못해 비비적거리며 나오는 노예같은 복종과는 함축적인 대조가 있습니다.
‘거짓말하다’는 뜻인 히브리어는 시편 18편 45절에서처럼 자유롭거나 충심으로 우러나온 것이 아니고 억제되고 속박된 마지못한 굴종을 의미합니다.
시편 66 편
이 구절의 언어구사로 보아 또 그 의도로 보아서도 흔히 제시되기도 했던 다른 의미들, 그러니까 하나님의 원수들이 그들의 소망에서 스스로 속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든가 아니면 하나님께 대해 여하한 적개심이든 품은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것이라는 등의 의미는 별로 지니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위선자들이 거짓을 행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시인이 의도는 하나님의 권능이 원수들을 채찍질하여 어쩔 수 없이 복종하도록 만든다는 것 이 이상의 뜻은 없습니다.
3. 본문 4절은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찬양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할지어다” 입니다.
시인이 이 한 가지 관점을 거듭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비록 모든 인간의 입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돌려지긴 했어도 인간들의 입술로는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합당하게 찬양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인간의 소홀함과 강퍅한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그들의 하나로 뭉쳐진 힘과 능력을 다스릴 한 주제를 찬미함에 있어서 한낱 연약한 자들이라도 눈길을 헛되이 돌리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한 가지 예언, 즉 단지 인류의 한 작은 분파인 유대 백성에게서만 아니라 결국에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될 이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서 하나님께서 경배받으시게 될 어떤 시기가 도래한다는 사실을 살필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시인이 속박에 움츠리지 않는 경배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시인은 진정으로 마음 속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순결한 경배를 의미합니다.
“주를 찬양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는 진정하고 순수한 예배를 가리킵니다.
모든 제사 중에서도 가장 좋은 제사는 곧 찬양을 드림 입니다.
시50:14, 23의 노래처럼 찬양이야말로 경건함의 참된 증거입니다.
시편 66 편
시66:5-9 와서 하나님의 행하신 것을 보라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신 과거의 구원행적을 보고 장래의 구원을 믿습니다(5-7).
매클라렌(Maclaren)은 “하나님의 행적은 낡아지는 법이 없다. 그것은 그의 영원한 행위를 계시(啓示)하는 것이다. 과거의 그분이 지금도 그 분이시다. 그가 과거에 하신 일을 지금도 하신다. 그러므로 신앙은 하나님 말씀의 옛 기록에서 양육받으며 그 기록의 내용대로 앞으로도 일들이 거듭거듭 일어날 것을 확신 한다”고 하였습니다.
1. 본문 5-6절은 “(5)와서 하나님의 행하신 것을 보라 인생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 (6)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 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도보로 강을 통과하고 우리 가 거기서 주로 인하여 기뻐하였도다” 입니다.
이 구절에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소홀히 하도록 이끄는 인간 사회 보편의 미련하고 우매함에 대한 간접적인 문책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왜 인생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손의 행사를 이토록 미련스럽게 간과하는가?
어째서 하나님의 행하심에 전정 어린 주목을 기울이려 들지 않는가?
이 문제에 관하여 우리의 마음을 일깨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46편 8절의 대응귀(對應句)를 참조하여 다소간 설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뜻하는 거대한 의도는 시인이 인생들로 하여금 그들이 빠져 있는 헛되고 깊은 죄악과 독을 뿜는 온갖 추구들로부터 물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또 그들의 생각을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향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의 의도를 위해 시인은 인생들을 권고하고 훈계합니다.
또 시인은 그들이 아직도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있음을 꾸짖습니다.
또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꾸짖습니다.
“와서 하나님의 행하신 것을 보라”는 표현은 인생들이 어두운 눈으로 간과했던 사실들이 그들이 볼 수 있게 활짝 열려 있다는 말도 됩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이 이렇지 않다면 이 말은 참으로 어불성설이 되고 말 것입니다.
다음으로 시인은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이 반드시 우리 인생들의 주의가 이끌어져야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계신 사실을 지적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인류사회를 다스리는 방편을 주의 깊게 들여다 볼 것을 촉구합니다.
이런 류의 실험적 혹 실용적 지식이 가장 깊은 감명을 우리 마음 판에 새겨줍니다.
시편 66 편
우리는 바울이 사도행전 17장 27절에서 보편적인 하나님의 권능에 관한 말을 한 뒤에 곧이어 그의 논지(論旨)를 특정한 문제로 이끌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우리가 만약 살아 계신 하나님의 증거를 발견코자 한다면 우리 자신의 마음 밑바닥 깊숙이 내려갈 것을 촉구합니다.
5절 마지막 구절은 하나님께서 그 엄위하심이 인생들을 뛰어넘은 것으로서 ‘인간의 아들딸 위에 엄혹하시다’는 뜻을 지닌 문맥으로 해석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시편에서 알게 되었듯이 인생들의 변호와 보존에 상상을 뛰어넘은 신성(神性)의 섭리를 밝히 보여주면서 ‘인간들을 향하여 엄위하시다’는 뜻으로 풀고 싶습니다.
따라서 사실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경건함과 두려움의 가장 좋은 근거를 찾기 위해서는 자신 이외의 어떤 것을 돌아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시인은 개괄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섭리가 인류에 대한 보다 보편적인 모습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친히 선택하신 백성의 속죄를 위해 이루어 놓으신 일로 주의를 전환시키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 위에 내리는 특별한 배려를 다룹니다.
시인의 논술은 그가 다룰 이야기들 중 오직 한 가지 생생한 설명으로 여겨야 합니다.
또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에게 그로 인해 그들의 첫번째이자 엄청난 구원이 뒤따르고 확약되었던 무한한 모습의 은총을 다시 환기시키려는 의도임을 살펴야 됩니다.
이 사실은 그가 덧붙인 “우리가 거기서 주로 인하여 기뻐하였도다”에서 명백합니다.
이러한 구원의 기쁨은 만약 그것이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과 명백히 드러내 보이시는 성품을 띠지 않았더라면 시인 자신에게도 고대 이스라엘 백성의 후손들 어느 누구에게도 미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 위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그의 백성을 위해 영원히 변치 않는 구속자이심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이 사실에 따라 바로 이 분이야말로 모든 의인에게 향한 참된 기쁨의 보편적 근원이신 사실이 성립됩니다.
2. 7절은 “저가 그 능으로 영원히 치리하시며(하나님이 그 권능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 며 - 칼빈) 눈으로 열방을 감찰하시나니 거역하는 자는 자고하지 말지어다” 입니다.
‘세상’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עולם(올람)은 때에 따라 ‘시대’ 또는 ‘영원함’을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옮긴 ‘세상’이라는 뜻이 이 문맥에서 가장 적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따라 이 구절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정부를 지배하시기에 필요한 권능을 보유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곧 이어진 구절 “눈으로 열방을 감찰하시나니”가 바로 이러한 뜻과 일치됩니다.
시편 66 편
율법 아래에서는 유대가 하나님의 왕국이 자리 잡을 적당한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언제나 이 세상 전체에 확대되는 것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언약을 맺은 아브라함의 후손에 비춰 주신 특별한 은혜, 곧 하나님 자신의 신성한 배려의 눈길을 이웃 민족들에게 뻗치지 않으신 것은 결단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배려가 다른 주위의 나라들에게도 미치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로 시인은 하나님께서 온 땅의 사악한 자들과 불경건한 자들에게 내리실 심판을 들고 있습니다.
시인은 행악자들을 벌하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땅위에 하나님께서 간과하시는 인생의 무리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세상 통치에는 우리들이 결론 못 내리도록 계획된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여지는 어떤 표증들은 항상 있습니다.
이 표증들은 예리하게 살펴보는 자들의 눈이 놀라기에 충분할 만큼 분명합니다.
3. 8-9절은 “(8)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 송축 소리로 들리게 할지어다 (9)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입니다
시인은 예외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부르짖음을 모든 것에 앞서 먼저 둡니다.
특히 그의 교회를 위해 하나님의 어떤 신성하신 개입에 관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기자는 장차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 의해서만 전유적(專有的)으로 누려졌던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를 이방인들도 함께 누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구원의 암시와 기념의 성격에 관해 그 이름을 만방에 두루 펼칠 것을 촉구해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시인이 보편적인 어떤 의미를 넘어선 ‘구원’을 뜻하기 위해 쓰여진 표현으로 ‘생명으로 소생함’을 얻은 민족으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실제적으로 그들을 덮쳐왔던 어떤 재난으로부터 구함을 받았다기보다는 앞으로 다가오는 위험으로부터 그들이 보호 받는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리하여 시인은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등의 말을 합니다.
이는 곧 그들이 늘 받았던 때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해 실족한 일이 없이 오히려 굳건히 서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시인이 생각할 수 있고 또 전도(顚倒) 될 수 있는 악(惡)을 그 실제 이하로 줄여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선(善)하신 개입으로 안전하게 보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것을 ‘생명으로 건져졌음’ 또는 ‘소생함을 받은 것’ 과 동등한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시편 66 편
시66:10-12 하나님이여 주께서
본문은 이스라엘이 당했던 환난이 그들을 연단시켜 실족치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말씀합니다(9-12).
불신자들은 환난을 무의미하게 보지만 신자들은 그것을 유익하게 봅니다.
환난을 뜻있게 보는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필경 거기서 건져 주실 것을 내다봅니다.
욥기5:18절에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이 시인과 그가 속한 교회는 그와 같은 믿음대로 필경 환난에서 건짐을 받고 감사한 뜻으로 서원을 갚으며 제물을 드리겠다고 합니다(12하반 -20).
본문 10-12절은 “(10)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같이 하셨으며
(11) 우리를 끌어 그물에 들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두셨으며
(12) 사람들로 우리 머리 위로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행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입니다.
(‘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셨도다! 주께서 우리를 ........’ -칼빈)...... 이 구절 히브리어는 ‘비록 주께서 우리를 ......’ 이라고 옮길 수 있습니다.
이렇다면 이 구절은 앞서 있었던 사실에 조건으로 쓰여서 시인은 엄청난 재난에서 그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높이 찬양하려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인이 목적했던 또 다른 대상이 있는 것으로 봅니다.
그것은 뒤따라 나오는 말들에서 시사하는 것처럼 그 백성들 앞에 위안을 제시함으로서 하나님의 택하시고 부르신 백성이 안고 있는 괴로움을 제하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통이 찾아왔을 때 우리가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분명히 우리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시인이 그 백성들을 시험과 단련 받은 것으로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연관 관계입니다
이와 함께 시인은 마치 불로 은의 찌꺼기가 제하여지는 것 같이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을 그들의 죄로부터 순결케 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험을 거치게 하셨다는 사실에 주의를 돌리면서 동시에 시험으로 그들의 인내심이 길러졌다는 사실도 함께 시사합니다.
이런 비유는 그 백성들이 당한 시험이 무척이나 호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은이란 한번이 아니고 거듭거듭 단련의 불 속에 던져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표합니다.
시편 66 편
그들은 비록 괴로움에 시험 당하지만 결코 그 때문에 멸망당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이 무척 여러 가지 였고, 또 매우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이 비유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문맥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물에 던져졌으며 궁핍에 빠졌으며 사람들이 그들의 머리를 타고 지나갔으며 배가 부서짐과 불길에 휩싸이는 재앙을 당했던 이야기를 합니다.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두셨으며”라는 표현은 앞선 표현들보다 더 강렬합니다.
그들 위에 던져진 그물은 실로 짠 그물이 아니라 그들이 혹심하고도 도저히 풀길 없는 속박에 빠졌었던 사실을 뜻합니다.
다음에 따르는 표현은 그 백성들에게 치욕적인 횡포를 가하고 그들을 마치 짐승 떼처럼 짓밟고 지나갔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불과 물은 복합적으로 얽히고 설킨 괴로움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로서 하나님이 모든 형태의 재앙으로 그의 백성을 단련하셨다는 사실이 시사됩니다.
불과 물은 어떤 것보다도 더 인간 생명 유지를 위해 기여하는 두 요소입니다.
반면에 또한 물과 불은 인간의 멸망을 초래하는 힘도 지닙니다.
시인이 하나님이 내리시는 벌의 고통으로 그들 백성이 원수들의 손에서 얼마나 부당한 괴로움을 당했는지 그 모든 잔혹함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눈에 뜁니다.
시인은 주께서 선택하신 백성이 주께서 그들이 참고 이겨낸 것을 모르고 계신다고 생각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또 백성이 다른 일들 때문에 하나님의 배려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흩어진 마음 상태가 되지 않도록 주의 할 것을 촉구합니다.
여기서 묘사된 것처럼 그들이 처한 상황을 읽음으로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들에게 보여지는 교회의 상황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너무나 많은 악한 상황에 사로잡히고 불에서 건져지면 물로 던져지는 식으로 연속적인 시련을 거치는 동안 마침내는 우리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새로운 것이나 이상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마저 들게 할 우려가 있습니다.
우리가 ‘풍성한 곳’으로 옮긴 히브리어 דויה(레바야)는 문자 그대로는 ‘관개가 잘 되는 땅’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래서 은유적인 의미로 번영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주의 백성이 목초가 풍부한 즐겁고 기름진 곳으로 인도된 사실을 묘사합니다.
이로부터 전달되는 진리는 비록 하나님이 일시적으로는 혹독한 시련으로 그 자녀에게 찾아오시지만 결국은 그 자녀에게 기쁨과 풍성함을 안겨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비유를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 정주에 대한 것으로만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또 이 시는 그들이 광야에서 치러야 했던 온갖 시련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시는 자기 백성들의 역사에서 여러 시대에 걸쳐 각각4 당해야만 했던 일련의 갖가지 괴로움들도 포괄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편 66 편
시66:13-16 내가 번제를 가지고
옛시대에 감사와 찬송을 드림에 희생을 불살라 번제드린 일이 수반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감사와 찬송이 그의 죄 때문에 주께 열납(悅納)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Calvin). 구약시대 희생제물은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예표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의의(意義)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제물의 가치나 맛이나 냄새로 열납 된 것은 아닙니다.
이 사실은 희생제물이 그 피와 기름을 요점으로 한 것으로 보아서 알려집니다.
피와 기름은 생명의 핵심(核心)부분입니다.
그것을 바침은 헌납자(獻納者) 가 자기 죄 값으로 자기 생명을 드린 것을 표합니다.
그 때에 희생제물을 드림이 유효하기는 그 자체에 가치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있어서 그 희생제물이 장래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한 약속 수표(約束手票) 와 같기 때문에 유효하였습니다.
이렇게 구약 시대의 제물은 신(神)의 음식을 목적하는 이교(異敎)의 제물과 다릅니다.
그것은 인간의 고안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啓示)로 인하였습니다.
1. 본문 13-14절은 “(13)내가 번제를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니 (14) 이는 내 입술이 발한 것이요 내 환난 때에 내 입이 말한 것이니이다”입니다.
이 구절까지 시인은 주로 백성의 이름으로 이야기를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시인은 자신의 개인적인 느낌을 강조하면서 그의 실예에 따라 백성들이 개별적으로 종교의 실천에 매진할 것을 촉구합니다.
개인 자신이 스스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는 개별적인 입장에서 감사를 드리는 예배에 진지하게 참여하지 않는 한 여하한, 형태로든 충심으로부터 우러나온 대중의 일치된 헌신이라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을 때 만약 우리가 엄숙한 감사의 심령으로 우리를 구제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잊어버린다면 결국 하나님의 이름에 누를 끼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단순한 감사보다 더 많은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시인은 자기가 괴로움을 거치는 동안 그가 맺었던 맹세들이 곧 그의 믿음이 영원불변한 것임을 입증해 주는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사도 야고보의 권고는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각별한 주목을 받습니다.
시편 66 편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약5:13).
행운을 맞이함으로서 하나님께 위선적인 찬양을 마구 쏟아놓았다가 위축되고 곤경에 처하게 되면 그 사랑의 열정은 시들고 때로는 초조와 불안으로 참을성 없는 울분의 회오리에 말려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진정한 경건의 최상의 증거는 우리가 괴로움과 핍박 아래서는 하나님을 향해 한숨짓고 도 우리의 기도에 의해 믿음과 인내의 거룩한 기다림의 마음을 보일 때입니다. 그런 연후에라야 우리가 감사의 표현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는 내 입술이 발한 것이요”라는 말은 아무 뜻도 없이 덧붙인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안위하심을 믿습니다.
또 시인은 자신을 송두리째 하나님의 두 팔에 던졌다는 사실을 공표합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자기가 지닌 소망을 간청의 형식으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깊은 슬픔에 완전히 사로잡히도록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맹세라는 표현은 다른 부분에서 훨씬 길게 묘사된 표현을 간단히 되풀이합니다.
첫째로 거룩한 선조들은 하나님의 찬동으로 재가를 얻을 수 있다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이외에는 하나님께 어떤 것도 결코 맹세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맹세에서 그들의 순전한 목적은 그들의 마음가짐을 명확히 증거하려 했습니다.
교황주의자들의 경우 실제 그들이 행하고 있듯이 경솔하고 경건치 못한 맹세들을 쉬 늘어놓음으로 그들과 같은 기도에서는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입에 오를 기회만 있으면 가리지 않고 하나님에다 걸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제시하는 목적이란 올바르고 정당한 것으로부터는 가장 멀리 떨어져 나간 것일뿐더러 악마와도 같이 사악한 전제들을 내세우고서는 그들에게 결코 허락되지 않은 일들에 탐닉합니다.
2. 본문 15-16절은 “(15) 내가 숫양의 향기와 함께 살진 것으로 주께 번제를 드리며 수소와 염소를 드리리이다
(16)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내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다윗이거나 아니면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보다 더 영향력이 강했던 인물들 중의 하나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들보다 비천한 사람으로는 이 같이 부요로운 제사를 드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의 저자는 다윗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은 제물 바친 행위에서 왕자(王者)다운 자유로움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나타납니다.
시편 66 편
하나님이 왜 감사의 표현으로 희생물이 바쳐지길 명하셨는가 하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인생들의 찬양은 죄악으로 물들어 있기에 죄없는 것으로 거룩하게 바쳐야 할 필요를 깨우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우리의 예배를 성결케 하기 위해 자신을 속죄의 희생물로 드리지 않으셨더면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겠다고 자신에게 타일러도 다만 우리의 불결한 입술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힐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히;10:7).
우리가 사도들에게서 배워서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우리의 찬양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한분을 통해서 일뿐 입니다.
시인은 그의 번제를 스스로 찬미하는 식으로 번제의 향 또 감미로운 향기라 합니다.
비록 번제 자체는 흉하고 보잘것 없지만 양과 다른 희생물들이 그리스도의 그림자로 상징되는 한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달고 단 향기를 품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는 율법의 그림자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기에 참된 영적 예배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 같은 내용이 담긴 것은 그 다음에 따르는 구절 속에서 우리들의 주목을 끕니다.
여기서 시인은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얻었던 은혜의 영광스러움을 활짝 펴보이려 한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이러한 것이 비록 공허한 연극에 불과한 것으로 여김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 치더라도 그와는 별개로 비록 율법 아래의 외적(外的)인 의식 안에서나마 숨겨져 있는 목적입니다.
의식으로 하여금 그 맛을 잃지 않게 보존하면서 그 제사의 절기를 형성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 그 의식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찬양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든 자들을 일깨워 말하면서 우리에게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합당하게 느끼고 있다면 그 선하심을 밖으로 밝히 공표하고자 하는 소망으로 불길에 싸이듯 사로잡히게 된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다른 이들도 그들의 믿음과 소망을 우리의 발표를 들음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이들도 우리와 함께 서로 합한 찬양의 노래를 부르도록 하려는 목적에서입니다.
시인은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제외하곤 누구에게도 말씀을 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만이 시인이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위선에 가득 찬 자들이나 불경건한 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달하려고 함은 헛된 수고로 그칠 뿐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66 편
시66:17-20 내가 내 입으로
구원을 얻은 이 시인은 여기서 받은 은혜를 모든 다른 성도들에게 증거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일은 무엇보다 귀합니다.
그것은 그 받은 은혜 그것을 인해서 라기 보다 그런 은혜 받는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과 가까워진 관계를 인하여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는 침묵할 수 없고 또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침묵하지 않고 받은 은혜를 남들에게 증거하는 자는 남들의 신앙도 일층 감화시킵니다
1. 본문 17-19절은 “(17)내가 내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내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19)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으며 내 기도 소리에 주의하셨도다” 입니다.
1) 시인은 자기가 기도했던 환경으로부터 안전한 보호를 받게 된 것을 하나님의 거룩한 개입으로 말미암았다고 증거 합니다.
그 결과 시인은 하나님의 친절하심을 너무나 절실히 체험했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이야말로 하나님의 선량하심을 너무나도 두드러지게 보여줍니다.
또 기도응답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확실히 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시인이 그의 입과 혀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말하는 중에 입과 혀는 우리가 시편 앞부분에서 살폈듯이 그가 얼마나 열정적이고 진정한 심령으로 기도했나를 보여줍니다.
만약 시인이 마음속으로부터 기도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했을 터입니다.
그렇지만 시인은 그의 기원이 지녔던 열정의 징표로 혀까지 언급합니다.
어떤 이들은 ‘혀 아래서’(칼빈) 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것은 곧 ‘마음을 가지고’라는 뜻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이들도 있습니다.
말이란 “그 입술 아래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시140:3)라는 구절에서처럼 혀의 굴곡 작용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기에 ‘혀 아래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찬송”이란 우리가 주의 구원하심을 바라고 주를 향해 우러러보는 것보다 우리가 주를 더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교황주의자들은 기껏 죽은 자들이나 조상(彫像)들에게 그 기도가 향해 있습니다.
시편 66 편
교황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에 너무 소홀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이 지닌 중요한 한 부분을 빼앗아 버립니다.
2) 시인은 그 다음으로 믿음과 회개의 필요성을 간과하는 단순히 전제로서의 기도를 경계하면서 우리가 합당하고 하나님이 들으실 수 있는 기도를 하고자 할 때 반드시 지켜야만 할 원칙을 서술합니다.
우리는 흔히 위선자들과 경건치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뻔뻔스러운 모습으로 그저 기도에 사용하기 위한 용어로 하나님이라는 말을 입술에 붙이면서 자신들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함부로 연결시키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엄청난 조롱의 행위를 막기 위해 시인은 필수불가결한 절대요소로 마음의 진정한 성결(聖潔)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시인 자신의 개인적인 행위의 의로움을 확언하고자 하는 것으로 여겨도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시인이 이 사실을 정당화시킨 데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보여주셨던 분명하고도 실제적인 증거들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주된 목적은 그 자신의 예를 들추어 순결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다고 하는 보편적인 속성을 강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요한복음 9장 31절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라는 대응 구절에서 더욱 분명한 연관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죄인들이 아닌 어떤 사람들의 기도도 들으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심을 위해 주님께 매달려야 하는 커다란 원칙에 반드시 순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죄에 관해 남김없이 모든 것을 고백하기에 바로 이 사실에 의하여 그들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애원에 대한 응답으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딤후2:19)라는 말씀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은 죄악을 의식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모든 주의 사람들은 그들의 죄를 알고 그 죄로 인해 애통함을 입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저주할 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찬미할 일입니다.
마음 속에 죄악을 품는다는 것은 죄악을 실행에 옮기려는 마음의 성향을 가리킵니다.
시편 66 편
시인은 특히 “마음” 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인이 사람들 앞에서 결백하다는 의미에서 그의 두 손이 깨끗함을 뜻합니다.
또 시인의 내적 정결을 증거하는 것으로 주께 간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마음이 외적인 행위에 일치하지 않으면 어떤 것이든 비밀스러운 악을 속에다 품고 있을 때 겉치레의 순결한 모습으로 인간을 속일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는 너무나 역겨운 광경입니다.
시인은 그의 기도가 응답을 얻었다는 사실을 매우 강조하면서 확언합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만약 우리가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면 결코 실망하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유추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
2. 본문 20절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입니다.
시인은 이 시를 처음 시작할 때처럼 감사를 드림으로 끝맺습니다.
여기서는 시인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거부 당하지 않을 수 있었는지를 알게 합니다.
즉 시인이 채용하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바꾼다면 어떤 이유로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셨는지를 말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자하심을 거두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것과 우리들의 기도가 전혀 헛되지 않는 것은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 덕분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