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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6-14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지도자 / 박봉수 목사
최근의 북한에서는 3대 권력세습이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김일성에서 아들 김정일로 이어진 권력세습이 이제 김정일에서 셋째 아들 김정운으로 이어가려고 여러 가지 작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해외 공관장들에게 “김정운 후계자 내정” 사실이 전달됐고, 주민들에게는 김정운을 “김 대장”으로 부르며 칭송하는 노래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김일성 일가의 3대 세습은 북한의 불행의 근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훌륭한 지도자가 나타나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근원적으로 차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일성의 시대착오적인 잘못된 통치가 다음 지도자에 의해 개선되고 극복되기 보다는 그 아들에 와서 유훈 통치라 하여 더 심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또 지도자가 손자로 이어진다면 정말 아무런 희망도 가지기 힘들 것입니다.
중국도 모택동 통치 시대에 문화혁명이라는 시행착오를 거쳤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등소평이라는 훌륭한 지도자가 나타나 개혁개방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모택동의 잘못을 바로잡고 또 모택동의 좋은 유산은 이어갔습니다. 그 다음 강택민, 그리고 호금도로 지도자가 철저한 검증과 치열한 경쟁을 거쳐 승계되었습니다. 그 결과 중국은 지금 미국마저 두려워하는 나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의 승계가 참 중요합니다. 지도자의 개인적인 이해타산에 따라 지도자 승계가 이루어지면 곤란합니다. 특히 세습형태로 이어진다면 그 나라나 공동체는 희망이 없습니다.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납득할 만한 절차를 거쳐서 지도가 승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능력있는 인재들이 철저한 경쟁과 검증과정을 거쳐서 지도자가 세워질 때 그 나라나 공동체에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공동체는 상황이 조금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세운 공동체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운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공동체의 지도자는 하나님께서 세우십니다.
안타까운 것은 신앙공동체에서 지도자를 세우는 과정이 세상의 공동체에서 지도자를 세우는 과정과 다르지 않는 모습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현재 지도자들이 자기의 이해타산에 따라 세습형태로 다음 지도자를 세우려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인간적인 조건을 따라 선발을 하려는 현상들이 일반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공동체가 점점 세속화되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지도자를 세우신다고 할 때 그 과정이 무슨 신비한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다든지 어떤 특정인에게 초월적인 현상이 나타나는 식의 현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현재 지도자가 다음 지도자를 지명할 수도 있고, 공동체 구성원들이 투표를 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상적인 과정은 어떻든지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 과정에 개입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세워주셨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도자를 세우시는 지 여부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여러 가지 분별할 수 있는 근거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바로 하나님께서 어떤 지도자들을 세우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도자로 세우시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점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지도자를 세우려는 공동체가 이점을 꼭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지도자로 쓰임을 받으려는 사람들도 이점을 꼭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지도자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이 점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야의 선지자 직이 엘리사로 승계되는 내용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피게 되면 왜 엘리야의 선지자 직이 엘리사로 승계되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지도자로 세우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1. 거룩한 욕망
오늘 본문 9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
이 말씀 속에 엘리사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선 엘리사는 엘리야의 뒤를 이어 선지자 직을 맡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선지자 직을 수행하더라도 그 갑절을 수행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 이스라엘의 율법에서 장자는 갑절의 몫을 취하는 특권이 있었습니다.(신 21:17) 엘리사는 엘리야의 선지자 직이 많은 선지 생도들에게 분배될 때 자신은 그 중에 장자처럼 두 몫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사는 남다른 거룩한 욕망이 있었습니다. 선지자가 되고자 하는 거룩한 욕망입니다. 그것도 다른 선지자와 구별되어 갑절로 쓰임 받는 거룩한 욕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거룩한 욕망을 귀히 보시고 그를 당대의 영적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창 25장을 보면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아넘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서는 장자입니다. 외모나 기질이나 영락없는 장자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이삭이 에서를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여러 가지로 장자가 되기에 결격사유가 있었습니다. 우선 차남입니다. 그리고 장자가 될 만한 기질을 타고나지 못했습니다. 또한 거짓말도 잘합니다. 그래서 아버지 이삭은 당연히 에서를 장자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문제입니다. 창 25:34을 보면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에서에게 영적인 거룩한 욕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에서가 배가 많이 고팠을 때 팥죽으로 미혹해서 장자의 명분을 양도해 받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야곱에게 거룩한 욕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지도자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법적인 정당성, 외적 조건, 그리고 자질 모든 것을 다 갖추었지만 거룩한 욕망을 잃어버린 에서는 버림을 받았던 것입니다. 반대로 자격이 없었지만 거룩한 욕망 하나로 야곱은 지도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거룩한 욕망을 가진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비록 부족해도 자격이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욕망을 가진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 거룩한 욕망 위에 기름을 부으셔서 저들을 지도자로 세우십니다.
마 5:6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예수님께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리고 목이 마르되 의에 주리고 목이 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돈에 주리고 목이 마른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인기와 명예에 주리고 목이 마른 사람들도 넘쳐납니다. 출세와 성공에 주리고 목이 마른 사람들도 넘쳐납니다. 향락과 쾌락에 주리고 목이 마른 사람들도 넘쳐납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사람입니다. 거룩한 욕망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며 나아가는 사람 그들을 하나님께서 세우십니다.
일전에 티벳을 갔었습니다. 라사 근처에서 순례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오체투지를 하며 그야말로 벌레처럼 땅 바닥을 기는 것입니다. 이미 몇 개월 그렇게 길바닥을 기어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또 얼마나 그렇게 길바닥을 기어야 할 지 모릅니다. 온 몸이 먼지투성이이고 옷을 낡을 대로 낡았고 얼굴을 햇볕에 까맣게 탔습니다.
저들은 승려들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오직 저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갈 뿐입니다. 순례를 마친다고 누가 보상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 순례 도중에 죽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것은 저들의 눈망울이 빛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자기들 나름의 거룩한 욕망으로 불타고 있었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저들을 보며 부끄러웠습니다. 과연 내 안에 거룩한 욕망이 있는가? 돌아보게 됐습니다.
2. 끈질김
왕하 2장을 보면 엘리야는 자기가 세상 떠날 때가 가까웠음을 알고 준비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 속에 흥미로운 내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얼마 남지 않은 이 땅에서 주어진 시간을 선지학교들을 돌아보고 선지생도들을 격려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길갈에서 벧엘로 여리고로 그리고 요단으로 분주하게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한사코 엘리사를 두고 혼자 가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너는 여기 머물라”고 말했습니다. 길갈에서(2), 벧엘에서(4), 그리고 여리고에서(6)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맹세했습니다. 역시 길갈에서(2), 벧엘에서(4), 그리고 여리고에서(6) 반복해서 맹세했습니다.
도대체 엘리야는 왜 엘리사를 떼어놓으려 했을까요? 그리고 엘리사는 또 왜 한사코 엘리야를 따라가려 했을까요? 아마도 엘리야는 엘리사를 테스트해 보려 했던 것 같습니다. 얼마나 끈질긴가를 시험해 보려했던 것 같습니다. 엘리사는 세 번이나 반복되는 스승의 명령을 세 번이나 똑 같은 답으로 끈질기게 따랐습니다.
엘리야가 이 때 그 마음에 엘리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함께 요단강을 건너고자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도 지켜보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를 엘리야의 후계자로 삼으셨습니다.
일본 전국시대에 걸출한 세 명의 지도자가 대를 이어 패권을 장악했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도미 히데요시, 그리고 도꾸가와 이에야스입니다. 이 세 사람은 전혀 다른 리더십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그 특징을 두견새 이야기로 재미있게 설명합니다.
우선 오다 노부나가입니다. 이 사람은 군웅할거 시대에 속전속결형 기발한 전술과 용맹성으로 일본통일의 기초를 만들었습니다. 이 사람의 리더십은 “두견새가 울지 않거든 죽여 버려라”는 스타일입니다.
다음으로 도요도미 히데요시입니다. 이 사람은 오다 노부나가를 물리치고 모든 권력을 손에 쥐었습니다. 그는 무가 출신이 아닌 가난한 농민 출신입니다. 그는 싸움보다 권모술수에 능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리더십은 “두견새가 울지 않거든 어떻게든 울게 해 보자”는 스타일입니다.
마지막으로 도꾸가와 이에야스입니다. 이 사람은 원래 자기 수하였던 도요도미 히데요시 밑에서 은인자중하며 때를 기다렸다가 그가 임진왜란 도중 죽자 힘들이지 않고 그 모든 권력을 장악했고 이후 300년 동안 이어지는 도꾸가와 막부 정권을 열었습니다. 결국 이 사람이 최후의 승자인 것입니다. 이 사람의 리더십은 바로 이것입니다. “두견새가 울지 않거든 울 때까지 기다려보자”는 스타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들에게 끈질김이 꼭 필요한 요건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참고 때를 기다리는 끈질김이 필요합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비가 오지 않으면 꼭 기우제를 드린답니다. 그런데 기우제를 드리면 꼭 비가 온답니다. 아니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저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끈질김이 필요합니다. 특히 영적 지도자들에게는 이런 끈질김이 필요합니다. 노아는 120년을 끈질김으로 기다렸습니다. 모세도 40년을 끈질김으로 기다렸습니다. 이제 우리도 끈질김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3. 영안의 열림
오늘 본문 10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고”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있기를 구하자 엘리야가 한 답변입니다. 한 마디로 영안이 열려서 엘리야가 승천하는 것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이 끝날 때 불 수레와 불 말들이 나타나 그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과 함께 하늘로 승천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그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리고에 있던 제자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영안이 열린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로 세움을 받게 됐던 것입니다.
실제로 엘리사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줄 아는 영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사역 가운데 여러 차례 확인될 수 있습니다.
왕하 6장을 보면 아람군대가 이스라엘을 침공해 왔습니다. 먼저 엘리사를 죽이려고 엘리사가 머물던 도단 성을 공격해 왔습니다. 아침에 엘리사의 사환이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도단성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너무 두려워서 엘리사에게 사실을 전했습니다.
그 때 엘리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그 기도가 응답되어 사환이 불말과 불병거 즉 하나님의 군대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에워싼 것을 볼 수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사는 영안이 열려있던 사람입니다. 여느 사람들이 볼 수 없었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영안이 열려있는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십니다.
한 목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부목 시절 담임 자리를 놓고 기도하던 중에 뜻하지 않게 피부암에 걸리게 됐습니다. 머리와 얼굴까지 암이 퍼져서 누구라도 피부암 환자임을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담임목회를 하던 동기 목사님이 유학을 떠나게 돼서 담임 자리가 났습니다. 동기의 권유로 그 교회에서 한 번 설교를 하게 됐습니다.
설교가 끝나자 교인들은 설교는 참 좋은데 언제 돌아가실 분을 담임으로 모실 수 없다고 결론을 모으게 됐습니다. 그 때 평소에 기도 많이하던 한 여집사님이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이 목사님을 담임목사님으로 모셨으면 좋겠습니다.” 모두들 제정신인가 하고 돌아보았습니다. “저 목사님을 모시면 비장한 설교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 돌아가실 지 모르는 목사님이시라서 매번 설교마다 마지막 설교처럼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있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가 목사님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고쳐주실지 말입니다. 그리고 저런 목사님을 모시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결국 교인들의 마음이 모아져서 그 목사님을 모시게 됐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목사님은 너무 감격해서 이제 자기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기 보다는 그 고마운 교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그 교회를 위해 마지막 목숨을 다해 충성하겠다고 목회를 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이 분을 고쳐주셔서 지금 능력있게 사역하고 있고 또 교회는 은혜중에 부흥하고 있답니다.
그렇습니다.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지도자로 세우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