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8편 3절-4절, 9절.
3절-4절: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9절: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더웁게 하기 전에 저가 생것과 불붙는 것을 회리바람으로 제하여 버리시리로다.
3절: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모든 인간은 선악과 따먹은 이후부터 하나님과 멀어졌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하면 계속적으로 선악과 따먹은 차원의 지식을 가지고 살게 된다. 일반적으로는 옳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모두가 선악과 따먹은 차원으로 나가는 거다. 선악과 따먹은 이후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선한 것은, 의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1절에서 ‘인자들아, 너희가 당연히 공의를 말하겠거늘’이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선악과 따먹은 지식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세상사람들, 또는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을 전부 싸잡아서 하는 말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을 가르치는 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이냐? 후자다. 그렇다면 3절의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라는 말씀을 선악과 따먹은 수준을 염두에 두고, 즉 믿지 않는 사람들의 기준에 두고 한 말씀으로 알면 안 된다.
그러면 3절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하겠느냐? 선악과 따먹은 영이 중생되지 않은 불신자적 기준에 두고 해석을 할 게 아니라 생명과를 따먹어야 할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선악과 따먹은 불신자적 기준으로 가르치고 그 기준으로 산다는 교훈적인 측면으로 깨달아야 한다. 그렇다면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다는 이게 무슨 뜻이냐? 모태란 어미 뱃속인데, 아기가 어미 뱃속에서부터 멀어졌다고 하는 이게 무슨 뜻이냐? 악인은 사고방식이나 모든 지식의 개념이, 모든 생각이 아예 처음부터 멀어져 버렸다는 거다.
자기 생각을 누가 키우느냐? 자기가 키운다. 그렇다면 인도자들은 성도들의 생각이 세상적으로 커지는지, 하나님 쪽으로 커지는지 알아야 하겠고, 성도는 자기의 모든 사고방식을 분별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을 가르친다고 하는 인도자들이 성도들에게 분별할 수 있는 진리지식을 넣어주지 않으면 교인들의 생각이나 모든 사고방식이 세상화 돼버린다. 속에서 세상생각으로 커진다. 이렇게 되면 신앙 질적인 면에서 하나님 뜻의 정로가 아닌 곁길로 가게 된다.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하나님과 곁길로 가게 된다. 나면서부터 정로로 걸어가는 게 아니라 곁길로 간다. 패역적으로 간다.
새끼 게가 옆으로 걸어가니까 그걸 보는 어미 게가 하는 말이 ‘너는 왜 바로 걷지 않고 자꾸 옆으로 걸어가느냐?’ 라고 하니까 새끼 게가 하는 말이 ‘어떻게 걷는 게 바로 걷는 건지 엄마가 한 번 걸어보세요’ 라고 하니까 ‘그래, 내가 똑바로 걷는 것을 보여줄께’ 하며 걷는데 어미 게도 앞으로 간다고 하는 게 옆으로 걸어간다. 그러니까 새끼 게가 하는 말이 ‘엄마도 옆으로 걸어가잖아요’ 라고 하니까 엄마 게가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똑바로 걸어간다’ 라고 한다. 말하자면 부모고 자식이고, 교회 인도자고, 교인이고 간이 하나님 앞에 타락한 자들이 이런 상태라는 거다.
믿는 부모의 사고방식이 전부가 하나님의 본질에서 이탈이 된 상태로 되어서 이 사고방식을 가지고 성경을 보고 자식을 가르친다면 그 자식이 하나님 앞에 바로 걸어가겠느냐, 옆으로 걸어가겠느냐? 옆으로 걸어간다. 그렇다면 이런 교인들을 바른 길로 가게 하려면 ‘바로 걸어가라’ 라고 해야 바로 걸어가겠느냐, 곁길로 갈 수밖에 없는 기준적 지식을 바로 잡아줘야 바로 걸어가겠느냐? 후자다.
교회를 가르치는 인도자들은 항상 자기의 모든 사고방식 이해타산 평가성이 하나님의 질에 맞는지를 염두에 두고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목사님은 하나님 앞에 바로 가는 상태에서 교회의 일을 하고 있는데 이것을 보는 사람에 따라 그 방편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구원을 놓고 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하나님 앞에 비뚤어졌다고 말할 수 없는 거다. 예를 들면 물이 많이 내려올 때 그 물을 가로질러 가다가는 물에 쓸려서 죽기 때문에 빙 둘러서 목적지에 가는 것과 같다. 방편을 쓸 때 신앙 믿음이 상하지 않게 하려는 것을 첫째 목적으로 두고, 그 다음에 육신적인 면에서 약간 고통이 있을 수 있는데, 이럴 때는 그 고통을 감수하고 나가야 한다.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이 말씀의 뜻이 참말을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짓을 말한다는 거냐, 자기 딴에는 참말을 한다고 하는 건데 결과적으로 거짓이 된다는 거냐? 후자다. 그러면 본 절의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본질을 아는 사람이겠느냐, 모르는 사람이겠느냐? 아는 사람이다. 아니까 이런 말을 하는 거다. 그런데 남의 잘잘못을 말할 때 대부분 보면 하나님의 본질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사람의 행동이나 활동을 기준삼아서 말을 한다. 이런 말을 할 때 다른 사람이 듣고 호응을 할런지 모르겠지만 실수하기 쉽다. 이 사람은 이미 기준이 비뚤어진 거다.
4절: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이게 뭘 하는 거냐? 사람의 이빨에 독이 있다는 거냐? 교훈을 말하는 거다. 독사에게 물리면, 즉 잘못된 교훈에 물렸다 하면 교훈적 독이 그 사람의 정신과 사상에 서서히 퍼진다. 독사의 독이 사람의 몸 안에 퍼지면 정신이 서서히 흐려지듯이 잘못된 교훈을 받으면 사람의 판단력이 흐려진다. 정확하지 못하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근거로 믿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성경에 정확한 기준을 두고 믿어야 한다. 성경은 영원히 가는 것과 임시적인 것, 썩지 않는 것과 썩는 것, 빛과 어두움,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 등등을 분별케 해 준다. 그리고 성경의 모든 말씀은 인간들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성, 하나님의 사고방식으로 되었고, 모든 이해타산이나 평가성 역시 하나님께서 영원한 분이시니 영원한 것에 목적을 둔 말씀이다. 따라서 예수 믿는 자기 속에 이해타산 평가성이 영원히 옳은 것, 영원히 선한 것, 영원히 영광스러운 것으로 가지고 있다면 자기는 하나님의 성질이 들어있는 거다.
자기 속에 하나님의 성질이 들어있느니만큼 이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즉 인인관계 연관관계성에서, 대사관계성에서, 대물관계성에서, 신인관계성에서, 자아관계성에서 모든 결과를 항상 하나님 쪽에, 천국에 두고 해 나가게 된다. 이게 신행(信行)이다. 이런 사람은 대사, 대물, 대인관계성은 크게 비중을 두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조금 잘못했더라도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는 여유도 가지게 된다.
에덴동산에서 마귀가 뱀 속에 들어가서 하와를 유혹해서 선악과를 따먹게 했고, 이로 인해 그 즉시로 영이 죽어버렸다. 그러면 만일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하지 않았는데 선악과를 따먹는다면 이 때 영이 죽느냐?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영생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했는데 이 영생과를 따먹는다면 그 영이 죽느냐, 안 죽느냐?
선악과와 생명과는 표면적으로 보면 물질로 돼 있다. 이 선악과를 누가 따먹지 말라고 한 거냐?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누구의 말씀을 거스른 거냐?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고 들어간 거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렸다고 하는 증표가 선악과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거스림이 된 거고, 그 다음에 행동으로 선악과를 따먹은 거다. 하와가 선악과가 있는 곳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뱀이 하와를 꾀일 때 하와 입장에서는 아무렴 자기의 마음이 가는 쪽으로 몸도 가게 되어서 선악과를 따먹은 거다.
사람의 마음은 항상 행동에 앞서서 작용을 한다. 행동 이전에 마음이 먼저 작용을 한다. 그래서 자기의 방향과 목적에 따라 몸도 그리로 나가는 거다. 그리로 나갔다는 것은 이미 마음이 그렇게 됐다는 증거다. 그러면 행동은 안 나오고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되는 거냐? 다시 말하면 생명과를 안 따먹고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되는 거냐? 하나님께서 생명과를 따먹으라고 했느냐, 쳐다만 보라고 했느냐? 따먹으라고 했는데 안 따먹고 쳐다만 본다면 이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거냐, 불순종을 한 거냐?
선악과를 따먹으니 그 영이 즉시 죽었다고 하는데, 성경이 이 말씀을 하니까 우리가 그 영이 죽은 것을 알지 성경을 안 보면 영이 죽은 건지 산 건지 어떻게 아느냐? 그리고 이성과 몸도 죄로 말미암아 서서히 죽어가다가 결국은 죽는다. 이런 인간을 그대로 방치하면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이 없어져 버린다. 수포로 돌아가 버린다. 이렇게 된 원인이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인데, 만일 선악과를 안 따먹었다면 어떻게 되는 거냐?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이 달성이 되는 거냐? 선악과는 안 따먹을지라도 생명과를 따먹으라는 명령에 순종이 되었느냐?
그리고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게 인간 자기는 안 따먹으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따먹게 해서 따먹은 거냐, 아니면 자기의 자유로 따먹은 거냐? 후자다. 이걸 보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어 놓지 않았다면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지도 않았을 것이고, 타락하지도 않았을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면서 선악과 예찬론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는 방편을 통해서 그 너머에는 하나님의 대국적인 목적이 이뤄지도록 계획을 하신 거다. 어쨌든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 기본구원을 입혀 영원히 죽지 않을 영으로 만드셨으니 이 면만 보면 선악과를 따먹은 게 잘못된 거라고 할 수만은 없기도 하다. 어쨌든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감사하고 신비롭고 오묘한 거다.
모든 성경이 그렇듯이 선악과 사건도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가 있는 것이니, 오늘날 자기가 아담 하와가 살던 그 에덴동산에 살고 있다면 자기는 선악과를 따먹을 것 같으냐, 안 따먹을 것 같으냐? 지금의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보았고, 그로 인한 결과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결과를 아는 오늘날 자기는 당연히 선악과를 따먹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이 그러냐?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를 보고도 따먹고 있구나. 그러니 이것을 생각해 볼 때 지금의 내가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라면 당연히 선악과를 따먹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을 그대로 버려두실 수 없는 거다. 당신의 사랑이 그대로 두실 수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구속의 새생명을 입히셨는데, 이 일이 하나님 당신의 계획에 없던 것인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지어서 부랴부랴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우리를 구원하신 거냐? 영원 전서부터 하나님의 예정과 계획 속에 이 모든 것들이 다 들어있는 거다.
마귀의 종들의 말 속에는 사람을 죽이는 독이 있다. 죽인다는 것은 기본구원으로 살아난 영을 죽인다는 말이 아니라 기본구원으로 살아난 영이 영능의 기능과 지능 면으로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믿는 사람은 몸에 병균이 들어오는 것보다 이걸 더 깜짝 놀라야 한다.
그런데 많은 기독자들이 이걸 자극적으로 생각을 못한다. 그 이유가 뭘까? 한 마디로 배에 기름이 끼었다는 거다. 육신적으로 뭔가에 기댈 게 있고, 육신적으로 뭔가 급하지 않다는 거다. 세상성이 그만큼 들어있는 거다. 이런 상태를 인간 편에서 좋게 보면 ‘믿음이 약하구나’ 이렇게 말이 되겠지만 믿음이 없건 약하건 하나님 앞에서는 그대로 들어가는 거다. 믿는 우리는 깨닫는 면에서 이걸 자극적으로 느껴야 한다.
교회적으로 보면 거짓 종들은 마치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동원시켜서 애굽의 부요성을 건설하듯이 성도들의 영적인 기능과 지능 면을, 즉 영인성장을 완전히 죽여 놓고 육적인 세상성만 커지게 해서 그 소원성으로 종교적 업적을 크게 이뤄놓게 한다. 이게 다 성도들을 죽이는 짓들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했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를 받으며,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를 받으며 약속의 땅으로 가야 하는데 자꾸 뒤를 돌아보며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듯이 진리의 도를 받는 성도가 신앙정신 사상이 약속의 땅인 천국으로 향하지 않고 불타질 세상에서 자꾸 뭘 남기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그 성질이 빠질 때까지 얻어맞는 수밖에 없는 거다. 성도는 어느 환경 처소에 있더라도 자기의 신앙정신 사상이 약속의 땅으로 가야 한다. 성장해야 한다. 소원 목적을 그렇게 두고 그렇게 성장을 해야 한다.
구약성경에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기둥 구름기둥의 인도를 따라 가나안을 향해 가듯이 오늘날 성도들은 교훈적으로 진리와 성령의 영감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세워놓고 이 분의 형상을 닮아가기 위해 부지런히 나아가야 한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더라도 이 일이 아니라면, 이 목적이 아니라면 아무리 종교적인 큰 업적을 이뤄놓더라도 하나님 앞에 폐인이다. 영인 성장적인 면에서, 영적인 기능과 지능 면에서 폐인이다.
오늘날 세상 속화된 교회와 이종교적 풍습을 따르는 교회들이 이런 신앙사상을 가지고 그것이 신앙이라고 하면서 교회를 완전히 폐인이 되게 만드는 일을 한다. 이런 수준급의 사람들은 영감을 분별을 못한다.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되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신앙을 모른다. 참과 거짓을 분별을 못한다.
사단 마귀는 거짓 종들을 시켜서 교인들에게 육이 잘 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치게 하고, 그걸 자꾸 높이 쳐다보게 하며 그걸 이루는 게 신앙이라고 한다. 이러는 자들은 성도들이 자신의 말처럼 나가게 되면 성도 속에 뭐가 죽는다는 것을 모르는 거다. 성도 역시 이런 면을 보는 눈이 흐리면 거기에 동참하게 되고 그 일을 하게 된다.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독사가 왜 귀를 막은 거냐? 누구 말을 안 듣겠다는 거냐? 남의 말을 안 듣겠다는 거고, 교훈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겠다는 거다. 즉 자기 고집대로 하겠다는 거다. 자기 고집대로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는다. 거짓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는다. 마지막 종말을 고하는 이 시대의 거짓 종들은 하나님 말씀을 안 듣는다. 안 들으려고 하는 고집이 대단한 거다. 그러니까 말씀을 안 들으려고 하는 고집이 있는데다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고집이 또 있는 거다. 그러니까 이건 자기 고집이 먼저 들어있는 거냐,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는 고집이 먼저 들어있는 거냐? 그게 그거 같으냐? 자기 고집이 먼저 들어있는 거다.
우리 모두는 다 고집이 있다. 어린아이도 고집이 있다. 그러면 왜 고집이 나오는 거냐? 자기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는 고집이 처음부터 없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오니까 그 고집이 생긴 거냐,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는 것은 그 안에 고집이 있다는 거냐? 안 들으면 고집이 있는 거다.
안 믿는 사람을 일반적으로 보면 좋은 사람도 많다. 일반적으로 보면 고집이 없고 마음이 부드러운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교회에 갑시다’ 라고 하면 안 가려고 한다. 그러면 이 사람이 교회에 가지 않으려는 고집이 없었는데 교회에 가자고 하니까 안 가려는 고집이 생긴 거냐, 아예 그 고집이 들어있었던 거냐? 들어있었던 거다. 그러면 그 고집이 언제 없어지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서서히 고쳐질 가능성이 많은데 안 들으면 그대로 들어있는 거다.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왜 귀머거리 독사 같다고 하는 거냐? 귀신도 귀머거리 귀신이 있느냐? 귀신이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하니까 의사가 귀가 먹었다고 해서 귀머거리 귀신이 된 거냐? 이게 누구에게 하는 말이냐? 교회 안에 귀머거리 독사와 같은 사람이 많다는 거다. 귀머거리 독사 같은 교인들도 많고 목사도 많다.
9절: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더웁게 하기 전에 저가 생 것과 불붙는 것을 회리바람으로 제하여 버리시리로다.’ 가시나무는 사람을 찔러서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 ‘가시나무 불’이란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자 악한 마음이 불붙듯이 솟아오르는 상태를 말한다. 불을 활활 피워서 가마솥을 달구듯이 악한 마음이 달궈 오르는 것을 말한다.
‘저가 생 것과 불붙는 것을 회리바람으로 제하여 버리시리로다.’ 생 것은 무엇을 말하는 거냐? 익지 않은 게 생 것이다. 아직 달구어지지 않은 상태, 즉 악하게 만들려고 모아둔 사람들을 의미한다. ‘불붙는 것’은 열심이 타오르는 것을 말한다. ‘회오리바람’은 모든 것을 쓸어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말한다. 그러니까 회오리바람은 군대들이 막 몰아닥치는 장면과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본 절은 한 마디로 비진리적, 육적, 세상적, 마귀적인 악한 자들의 운동을 하나님께서 순식간에 심판하신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이걸 볼 줄 알아야 한다. 영의 눈이 아닌 그냥 눈으로는 이걸 못 본다. 영의 눈으로 보면 정신적 상태의 바람이 부는 걸 느낄 수 있다.
세상이라는 세상은 하나님의 선한 목적인 성도들의 이룰구원을 위해 역사가 되는 곳이다. 세상이 비진리적 악한 자들의 뜻대로 되겠금 되어있는 곳이 아니다. 세상은 성도 자기의 훈련장이지 악한 자의 뜻대로 되어지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성도 자기를 훈련시키는 훈련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고통이 클지라도 이것은 영능이 실력을 쌓으라는 훈련이지 자기를 완전히 죽이고자 하는 역사가 아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하는 성도는 안일하게 살면서 어떤 훈련의 사건을 주면 그 훈련을 받지 않으려고 한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살다가는 사단 마귀의 역사에 죽는다.
세상은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주권과 같은 동등성을 가지고 악한 짓을 하는 곳이 아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면 안 된다. 세상에 그 어떤 회오리바람이 불어도 이 세상은 성도 자기의 이룰구원, 영적인 기능과 지능 면을 성장시키려고 하는 곳임을 알아라. 세상만사는 다 하나님의 손 안이다.
성경에 갈릴리 바다에서 되어진 일이 있는데, 계시적으로 보면 갈릴리 바다는 세상 축소판을 말해주는 거다. 우리 모두는 지금 갈릴리 바다에 있는 거다. 이 갈릴리 바다 가운데 떠있는 배 안에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모시고 있는 성도들 가운데 주님이 계신다. 진리이치로 온전한 성품으로 나가고자 하는 교회에는 주님이 계신다. 그런데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듯이 이 세상에는 풍랑이 있는 거다. 이 세상은 항상 잔잔한 곳이 아니다. 사건의 바람이 있을 수 있다. 이 때 믿는 우리는 사건의 바람에 귀 기울이고 있으면 안 된다. 아무리 사건의 바람이 휘몰아쳐도 진리이치를 딱 붙잡고 있으면 그런 와중에도 평안함을 느낄 수 있다.
교회 안에 분쟁이 일어나면 왁자지껄하고 시끄럽다. 그런데 진리의 성도는 그런 데 귀 기울이지 않고 진리를 붙잡고 하나님 앞에 바로만 나가고자 한다. 이런 성도는 그 바람을 안 탄다. 몸 밖에서는 바람이 막 불고 있지만 자기는 그 가운데 있으면서도 평안하다. 바람을 타지 않는 실력이 있기 때문에 몸 밖에서는 시끄러운데 자기 속에서는 잔잔하다.
세상을 보면 안 믿는 세계는 전부 바람을 타느라고 왁자지껄하다. 그러면 강대국이 힘이 있다고 해서 온 세상을 정복하고 다 속국으로 만들 수 있는 거냐?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말하자면 온 세상이 인간의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알라 그 말이다. 세상을 보면 아무리 시끄러워도 하나님의 주권 섭리 안에서 그것을 보면 자기의 마음은 평안한 거다.
느헤미야서나 에스라서를 보면 인간이 생각을 해서 어떤 일을 하는 게 있는데, 이건 뭐냐? 이건 무슨 일이냐? 겉으로 보면 일인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붙잡고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이룰구원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일인 거다. 똑같은 이치로 교회의 인도자가 어떤 일을 하나 설정해 놓고 교인들과 함께 그 일을 해 나갈 때 일을 이루기 위한 거냐? 아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이룰구원을 위한 일이다. 이 면을 잘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일이 목적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느냐? 그 일을 하라고 하는 목사님의 메시지의 위주와 목적이 어디로 가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아무리 좋은 목적이라고 해도 방편과 위주에 치우치게 되면 목적달성이 안 될 수도 있다. 목적을 이룰구원에 분명히 놓고 위주와 방편이 이 목적에서 빗나가거나 더 집중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시켜서 성전을 짓는 게 있는데, 이걸 영이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종들이 무슨 목적으로 성전을 짓는 거냐? 불에 안 타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성전을 짓는 게 목적이다. 모든 이스라엘이 이 일을 위해 총 집중하게 하는 사역이다.
그러면 우리교회에서는 교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이룰구원에 총 집중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예배당을 건축하는 거냐? 눈에 보이는 일은 방편일 뿐이고 교인들이 그 일을 하면서 마음을 어디에 집중시키느냐가 중요한 거다. 어떤 일이라도 그 일의 방편을 통해서 우리의 속에서 영적인 성전이 지어져 가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