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로 내려가는 길가에 도랑이 하나 있다. 옛날엔 저 도랑도 푸른 산을 끼고 돌아 맑은 물이 흘러가고 수목도 울창했을 것이다. 지금은 폐수만이 흘러 역한 냄새가 주변 환경을 위협하고 있다.
어느 날 도랑 가의 담벼락 사이에 서 있는 오동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 어떻게 저 돌 틈 사이에 끼어 몸을 불리며 살아남아 있을까. 제대로 뿌리내릴 한 치의 땅도 없이 담벼락에 끼어 구정물을 먹고 사니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도 잎을 크게 피우고 보라색 꽃봉오리도 가지가지 맺고 있다. 하루종일 도랑만 바라보는 오동나무는 어떤 생각으로 키를 키우고 꽃을 피우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오동나무는 시골 마을 언덕에 있다. 무성한 잎을 출렁거리며 넉넉한 울타리로 서 있는 나무였다.
오전 우리 집 뒤 대나무밭 사이에도 오동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둥치가 크고 키도 커서 마당 끝에서 바라보면 집은 온통 푸른 빛으로 감싸는 듯했다. 오월이면 보라색 꽃을 달로 푸른 잎을 우산처럼 펼치고 있었다. 비가 오는 날 커다란 잎을 따서 우산으로 받쳐 들고 마당 가운데 서 있으면, 잎사귀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좋았다. 나와 동생은 보랏빛 얼굴을 서로 바라보며 즐거워했다.
전설에 의하면 봉황은 반세기가 넘는 긴 세월을 지나서야 한 번씩 맺는 대나무 열매를 먹고 오동나무에서 잠을 잔다고 한다. 대나무밭에 오동나무를 심는 것은, 길조의 상징인 봉황을 부르기 위해 대나무밭에서 자라는 걸까. 보라색 꽃을 타래타래 길게 달고 있었던 것일까. 수령을 짐작해 보면 100년은 족히 된 듯한데, 사랑하는 임을 두 번은 맞이했을 거란 생각을 해 본다.
어느 해인가 오동나무는 아버지의 지시 아래 베어지고 말았다. 그 후 잘린 오동나무는 몇 해를 집 앞 웅덩이에서 물만 먹고 드러누워 있었다. 해마다 보라색 꽃을 피우고 고운 잎새로 때깔 나게 가다듬으며 찾아오실 임을 손꼽아 기다리던 오동나무 사연을 아버지는 아셨을까.
옛날에는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어 시집갈 때 혼수를 대비하고, 아들은 소나무나 잣나무를 심어 죽을 때 관을 짜는데, 쓴다고 했다. 그것을 두고 ‘내 나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나와 함께 태어나 나와 운명을 함께하다 죽을 때 같이 묻힌다는 나무를 두고 한 말이라 하겠다. 자연과 사람 사이의 이러한 상관관계가 있다니 삶에서 피붙이를 생각하는 마음이야 오죽할까.
어머니는 오래전부터 오동나무를 보고 언니의 ‘내 나무’로 정해 두셨다. 비록 언니가 태어날 때 심은 것은 아니지만 언니가 시집갈 때 농을 만들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언니의 혼수 준비로 오동나무를 벤 것이다. 하지만 오동나무는 언니가 시집갈 때 언니의 혼수 농이 되지 못했다. 언니는 시집을 가고 언니의 ‘내 나무’가 되지 못한 오동나무는 집 앞 웅덩이에서 하릴없이 세월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동나무는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누구의 농도 되지 못하고 닭장으로 옮겨져 닭장의 그늘진 구석에 드러누워 있다. 어쩌면 닭장 속에서 다시 찾아올 봉황의 부름에 귀 기울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차라리 나막신이라도 되어 봉황을 찾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할 것이다.
어머니가 앓아누우신 지 10여 년, 어머니는 방에서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고 하루 종일 누워 계셨다. 지하철을 타러 갈 때마다 도랑 가의 오동나무를 바라본다. 문득 살아생전 어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어머니가 자식을 키울 때 구정물인들 마다 했겠는가. 벼랑으로 떨어져 내릴 듯한 험하고 힘든 생활에도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오로지 자식이란 꽃을 피워 내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 겪은 어머니가 아니시던가. 도랑에서 구정물을 먹고 벼랑 끝에서도 나무의 나이테에 사랑을 키우듯 세상 이야기를 안으로만 삭이시던 어머니, 세월 끝에서 나무의 껍질이 벗겨지듯 어머니의 몸에 핀 검버섯이 돋아나 부스러지고,
어머니는 어두운 방에 누워 하루하루 몸을 건조 시키고 계신 것이다.
당신을 그렇게 삭여 자식의 ‘내 나무’가 되신 어머니, 오늘도 바람이 지나가는 도랑 가의 오동나무에서 어머니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좔좔 모정의 노래가 들린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잎이 무성한 오동나무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발길을 돌린다.
첫댓글 오동나무에 그런 전설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황 작가님의 아름다운 심성이 이 글에서도 많이 느껴집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세요. 건강하셔야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쓰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