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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국민회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북간도국민회는 지방조직이 북간도 전역에 걸쳐 잘 정비된 한인의 민정기관이다. 그 기반위에서 ‘대한국민군’을 편성하여 지휘 항일전을 수행하던 독립군단이었다. 註6) 대한국민회가 회장 구춘선具春先의 명의로 1919년 11월에 발표한 「국민회장고유國民會長告諭」에서 설명한 대한국민회의 성립과정은 다음과 같다. 註7) 즉 북간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은 의사부議事部 註8)가 주도하였는데, 의사부는 독립축하식 직후 조선독립기성회朝鮮獨立期成會로 명칭을 바꿨다. 이후 조선독립기성회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되고 임시헌법이 발포되자 국호에 저촉된다하여 각지방각단체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고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로 개칭하였던 것이다. 성립후 대한국민회는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어 군사와 재정 등 제반 독립사무를 집행하여 ‘북간도에 대한 통일기관’임을 자임하였다. 1920년 1월 5일에 개최된 국민회 지회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에 건의하기로 하고 채택된 다음의 결의사항은 ‘북간도에 대한 통일기관’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국민회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① 북만에 산재하는 각군단을 통일할 기관을 설치할 것.
② 군정부 및 의용단 허공리許公理[허근?], 최우익崔于翼, 지장회池章會를 임시정부로 유촉誘屬케 하는 것이 긴요하다.
③ 정부에서 국민회를 승인하여야 한다.
국민회는 기독교계통에 속하였고 성립초기부터 임시정부의 직속계통으로 하였다. 대한국민회장 구춘선이 1919년 8월 9일자로 보고한 바에 따르면, 국민회의 간부는 회장 구춘선, 부회장 강구우, 비서겸 재무 고동환, 의사원 방우룡·유례균·조권식·장석함·김준근이었고, 연길·화룡·왕청 3개현을 5개 구역으로 나누어 52개 지회를 두고 있었다. 1920 년 1월경에는 80여 지회로 국민회의 조직이 확대되었다. 지방지회에는 북간도지역의 주요한 민족운동 지도자들이 지방지회의 간부로 활동하게 되었다. 회장은 구춘선으로 회원의 대부분은 기독교도들이었다. 국민회는 간민회墾民會의 후신이라 할 수 있고 북간도 도처에 회원을 갖고 있으며 상해의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유지하고 각지에 지부를 두었다. 일본관헌들은 국민회가 처음에는 북간도 각지에 지방회와 지회를 설치하고 회원을 확대하였고, 행정방면을 담당했던 “비교적 온건파”였으나, 1920년 여름에 이르러 “회원 통솔상의 필요”가 대두되어 군대원들을 준비하게 되면서 “순연한 무력단체”로 변하기에 이르렀다고 파악했다. 이는 국민회가 충실히 따랐던 바 이동휘가 이끄는 임시정부의 독립전쟁노선을 추진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1920년 8월 현재 간부진은 회장 구춘선, 부회장 강구우姜九禹, 고문 김규찬, 총무 한상우韓相愚이며, 대원은 약450명, 군총 약400정, 권총 약160을 보유하고 있다. 국민회는 점차 세력을 확대하여 북간도의 통일기관임을 기대하고 당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제휴하여,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와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와 경쟁하였다. 註15) 1920년 8월 중순 대한국민회의 병력을 보면, 대원 450명, 군총 600정, 탄약 7만발, 권총 160정, 수류탄 120개였다. 1921년 4월에 작성되어 1920년 말과 1921년 초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는 또 다른 일본관헌자료에는 대한국민회의 총부摠部는 춘양향春陽鄕 합마당哈蟆塘, 총부 회장 구춘선의 집과 지인향志仁鄕 의란구依蘭溝 등에 두었다. 총부에는 참사·비서·서무부·재무부·통신부·재정검사위원·경호대·군사회·대한국민군사령부를 두었다. 총부밑에는 민정기관으로 8개의 지방회인 제1중부·제2중부·동부·서부·제1남부·제2남부·제1북부·제2북부와 지방회 밑에 130여 개 지회를 두었다. 국민회 창립 이래 동회 모의집소로 사용하였는데 1920년 가을 경신참변 때 일본군이 소각·파괴하였다.
1920년 8월 9~12일에 연길현 지인향 육지동六地洞에서 개최된 국민회대표자회의가 개최되었다. 註19) 회의가 개최되고 있던 8월 10일 오후 5시경에 대한독군부의 3~4개 중대최진동의 군무도독부 계열는 독립을 선언하고 탈퇴하였다. 이로써 1920년 5월 19일이래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部를 조직하여 군사적으로 공동행동을 하여온 국민회와 대한군무도독부의 관계는 사실상 단절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회는 독자적인 군사기관으로 대한국민군사령부大韓國民軍司令部를 조직하고 간부를 선정하였다. 사령장관은 안무安武, 부관 최익룡崔翊龍, 중대장 조권식曹權植·임병극林炳極, 註20) 향관餉官에는 김석두金碩斗·허동규許東奎가 맡았다. 이와 아울러 총부와 사령부간의 협의기관으로서 군사회軍事會를 설치하고 의원議員은 총부 5명과 사령부원 5명으로 구성하였는데, 총부측 의원은 회장·부회장·재정부장·참사 2명으로 하였다. 註21) 군사회는 민정과 군정간의 원활한 상호협조체제를 협의기관이었다. 총부에 경호대 1소대를 두기로 하였다. 이와 아울려 총부의 간부직 개편도 이루어졌다. 즉 총사직한 총부 임원새로 보선한 부회장 서상용, 참사 최광륜·이봉우·한상우·정동호와 통신국장를 제외하고 개선하였다. 임원진은 회장 구춘선, 재무부장 유찬희柳纘熙, 재무부원 최기학崔起鶴·이성교李成敎·최배천崔配天·최륜崔倫, 서무부장 김승국金昇國, 서무부원 박창익·이규석·황일보·박용극, 참사 김병흡·김규찬·진석오 등이었다. 독군부가 국민회와 관계를 단절하기로 선언함에 따라, 이에 불만을 가 진 국민회 총부의 임원과 지방대표자들이 최진동에게 면회하여 의사를 확인하기 위하여 총부임원 2명과 지방대표자 2명을 독군부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국민회대표자회의1920년 8월 9~12일에 선출된 임원을 포함하여 이후 변경보강된 임원을 보면, 회장 구춘선, 부회장 서상용, 참사 최광륜·이봉우·한상우·정동호·김규찬·김병흡·진석오, 서무부장 김승국金昇國, 재무부장 유찬희, 무관학교 설비위원장 이용, 경호부장 박두화朴斗和, 대한국민군사령부 사령장관 안무, 부관 최익룡, 제1중대장 조관식, 제2중대장 임병극, 향관에 김석두·허동규 등이었다. 註25) 북로사령관으로 임명된 임시정부 파견원 이용이 무관학교 설비위원장設備委員長, 설립준비위원장으로 선임되어 있는 것이 주목된다. 대한국민군의 창설이후 국민회 구성원의 성분도 다양화되었다. 이전에는 구성원들이 대부분 기독교도이었으나 국민군의 항일전이 시작된 후부터 불교회·천도교·공교회 계통 인물도 가담하게 되었던 것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중국 연길 도윤道尹 도빈陶彬이 조사원들을 파견하여 7월 18일부터 8월 상순까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 국민회 간부는 총회장 구춘선을 비롯하여 총무 김규찬金奎燦, 통신부장 김병흡, 경호대총사령 이용, 참모장 유찬희, 참모원 주건, 비서 최자익崔子益, 통신부원 정기선·황일보黃日甫였다. 경호대 예비병 총수는 1만명 이상이었다. 일본관헌보고서1920년 12월 9일자에 기록된 바, 「대한국민회의 각기관 및 역원」에서 중앙간부와 군사관련 주요간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총부 회장 구춘선, 부회장 서상용 徐相庸, 참사 최노륜崔老侖·이봉우·한상우·정병호·김규찬·김병흡·진석오, 서무부장 김승국, 재무부장 유찬희, 대한국민국사령부 사령관 안무, 부관 최익룡, 중대장 조권식·임병극, 향관餉官 김석두·허동규이었고, 임병극은 제2중부지방회회장 강구우에 경호부장을 겸임하였다. 註28) 앞에서 살펴본 바, 1920년 8월 당시의 간부진과 별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국민회는 1920년 4월 1일 대표회의를 개최하고 독립군 양성비로 4만원을 획정하였고, 주진일朱鎭逸 등을 러시아로 파견하였다. 註29) 독립군양성비 모금을 위한 활동의 일환으로 보이는 바, 국민회는 북간도지역 한인유력자과 업체총 40명에게 군자금의 납부를 독촉하는 「통첩」1920년 4월 11일자을 발송하였다. 이 「통첩」에서 국민회는 총 40명개인 24, 기업 16에게 총5만3천7백원을 청구하였는데, 당시 북간도지역의 부유한 인물들과 기업들이 망라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국민회의 「통첩」은 상해의 임시정부가 1920년 2월 5일자로 발표한 「국무원포고 제1호」를 인용하여 “독립전쟁에 필요한 군비를 위하여 자기가 가진 재산을 납부할 것”을 촉구하였다. 국민회의 군자금 모집은 수월하지 않았는데, 북간도 거주 한인들이 대부분 빈민들이 많았던 때문이었다. 그 사정은 국민회제2북지방회 비서겸 참사 박영춘朴英春이 국민회 제2북지방회에 올리는 상신서에 잘 나타나있다. 박영춘은 “북지방北地方은 거부巨富라고 인정할 자 없고 많아야 수천원 의 자산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 3분의 2는 소작농으로 겨우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금후의 모연은 이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라며, 지회대표자회의에서 이를 보완하기 위한 대책으로 국내북한지역로 모연대를 파견하기로 결의한 사정과 이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국민회 회원으로 보이는 이활사李濶唆, 李闊俊(?)와 문근우文槿宇는 대한군정서에서는 회령·경성·오랑촌 지방에서 의연금 약 10만원을 모연한 것이 확실하여 각시가市街에 우축牛畜을 다수 구입하고 신모집병도 매일 30~40명으로 이미 수백 명에 달했다고 하면서, 국민회 중앙총부에서도 국내 모연에 전력을 다하여 재정곤란을 보충하기를 촉구하였다 3·1운동 이후 국민회가 지방회와 간부들을 통해서 모금한 독립운동자금을 보면 1919년에 비하여 1920년이 훨씬 크다. 이는 국민회가 항일무장활동을 중시하고 이를 크게 지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20년도 국민회의 수입지출내역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국민회가 1920년에 모금한 독립운동자금은 총 80,905원日貨이었는데, 지출총액 79,750원 가운데 군사활동비가 71,595원군무위원회 65,833원, 무관학교 3,750원, 제1사령부 2,012원으로 전체의 89.8%를 차지하였다. 군사활동비 가운데 ‘제1사령부 2,012원’은 홍범도 의 정일제1사령부를 말하여, 당시 국민회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의 군사비를 지원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국민회는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가 추진하고 있던 독립전쟁계획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국무총리 이동휘는 1920년 5월초 국무원비서장 김립·계봉우와 연명으로 비밀서신을 국민회 회장 구춘선에게 보내어 소비에트정부 파견원과 ‘직접적 약속을 바라고 하면서, “이르쿠츠크 이북지방을 근거지로 하여, 사관양성에 착수하는 동시에 비행기 대포 등 무기를 가급적 준비할 것이며 겸하야 과격군을 제휴하야 최후작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편지에서 이동휘는 또한 임시정부가 발행한 10만원 공채를 국민회에서 책임지고 처리하고, 4월 국민회 대표회의에서 결정한 4만원의 독립군양성비를 임정파견원 이용李鏞에게 제공할 것을 요청하였다. 국민회는 그동안 모금한 군자금을 바탕으로 무기구입을 적극 추진하였으며지방회 등도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국민회 중앙총부는 이광李光을 훈춘으로 파견하여 1만 5천원으로 총 3백정, 탄환 총 1정당 1,200발을 매수하기로 계약하였다. 국민회 총회장 구춘선은 동부지방회에 주건정일제1군사령부 부관과 최봉열북로독군부 군무국원을 파견하여, 지방회에서의 무기구입계획을 취소하고 이광이 매득하기로 한 무기들의 구입. 운반문제를 협의하게 하였다. 국민회 제1중부지방회에서는 무기구입의 임무를 부여하여 박호朴浩 등을 노령으로 파견하였는데, 이들 일행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장총 100정을 각 정당 35원총·혁대 및 탄환 1정장당 100발 포함에 구입하여 1920년 7월 21일에 국민회 제1중부지방회에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운반대는 7월 27일에 노령으로 출발할 것이다. 국민회는 1920년 6월이후 무관학교 창립에 착수하였는데, 무관학교 설비위원장인 이용과 홍범도의 정일제1사령부 부관인 주건은 연길현 숭례향崇禮鄕 대명월구大明月溝에 설립할 무관학교 설립을 위해 시찰하였다. 주건은 시찰 후 작성한 1920년 7월 26일자 보고서에서 무관학교부지로 의민단 단장을 지낸 방우룡의 집 소재지로 확정하고, 성교회聖敎會의 성당을 강당으로 사용하고 그 인가를 매수하는 방안을 제안하였다. 이용이 구춘선에게 제출한 「무관학교 설치에 관한 보고서」에 다르면, 이용은 주건 등 동지들과 무관학교 설립 대상지에 도착하여 홍범도·허근 등과 만나 무관학교 경영에 관하여 상론하였고, 이들 두 사람도 크게 찬동하였다. 이들은 의민단장 방우룡과 김창순金昌順과 협의하여 학교 위치를 이청배二靑背로 정하고 가옥은 현재 성교인공사聖敎人公舍 1동과 민가 2동을 사용하는 것으로 하였다. 이용은 해당 민가를 매수하고 새로이 3개동을 신축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했다. 註38) 북간도 명월구에 설립할 무관학교는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이용의 지도하에서 국민회,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방우룡의 의민단, 허근의 의군부 등이 협의하여 추진하였고 비용은 국민회가 모집한 군자금이 활용되었던 것이다. 일제 첩보보고서에서 국민회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공동경영으로 명월구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사관및 대원 양성에 착수하였다고 한 것은 정확한 정보였다. 명월구 무관학교의 교관으로는 김정金精이 임명되었고, 홍범도 정일제1사령부 부관인 주건이 학생모집에 착수하였다. 정은 당시 훈춘 한민회군무부장과 학무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중국 운남雲南사관학교 출신으로 이후 1920년말 노령 추풍지역으로 이동하여 솔밭관 한족공산당군대에서 활동하게 되는 인물이다. 註42) 또한 임시정부에서 북간도와 러시아지역 독립군 사령관으로 각각 임명된 이용과 채영이 무관학교 교관으로 선임되었는데, 두 사람은 모두 중국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무관학교 출신이었다. 1920년 7월경 무관학교 생도 모집에 응모한 학생수는 400명이었다. 일본은 국민회의 무관학교 설립사업을 좌절시키고자 중국관리들을 상대로 공작하였다. 일본인들은 중국관청에 대하여 무관학교 설립이 ‘전부 사기’이라고 무고하여 중국당국으로 하여금 국민회의 무관학교 설립을 탄압하도록 하였다. 일본인들의 교섭을 받은 중국관청에서는 국민회장 구춘선과 설비위원장인 이용을 체포하고 탐색할 계획을 세웠다. 중국의 옹성랍자 순관巡官[張]으로부터 이 정보를 입수한 국민회 제1중부 14지회장인 김내범金乃範은 이를 국민회 총회장인 구춘선에게 통보하였다.
2. 대한군정서
종교단체로서 성격을 극복한 대한군정서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北路軍政署의 조직적 모체는 3·1운동 이후에 조직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이다. 대한국민회의 대한국민회가 회장 구춘선의 명의로 1919년 11월에 발표한 「국민회장고유」에 따르면, 대한정의단은 창립 당시 대종교도와 공교도가 연합하여 조직한 단체였다. 이후 6월말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문제가 상정조차 되지 못한 사실이 분명해지고 항일무장운동이 고조되기 시작하면서 정의단이 군사단체 군정회軍政會를 조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한군정서의 조직적 연원은 1911년 3월 북간도의 대종교 인사들이 조직한 중광단重光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註46) 대한국민회의 회장 구춘선의 명의의 「국민회장고유」에 의하면, 대한정의단은 1919년 3·1운동 이후 5월경 대종교도들과 공교도孔敎徒들이 연합하여 조직되었다. 註47) 1919년 7월음력 독립군정회獨立軍政會의 조직 사실을 내외에 발표한 창의격倡義檄의 발표주체가 ‘대한정의단’인 점에서 정의단의 정식명칭은 대한정의단이었다고 보여진다. 이는 대한국민회가 임시정부 수립이후 국호의 상충을 해소하기 위하여 조선독립기성총회를 대한국민회로 개칭한 것과 같은 맥락임을 알 수 있다. 여하튼 1919년 5월의 대한정의단 창립은 대종교도들의 입장에서 보면 중광단이 개칭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註48) 공교도 입장에서 보면, 중광단과 공교도의 연합조직이었다정의단은 취지서와 4대 강령을 발포하고 단원을 증모하며 세력 확대를 도모하였다. 정의단은 『민보民報』와 『신국보新國報』를 순국문으로 발간하여 동포들의 독립사상을 고취하였고 혈전血戰에 의한 독립쟁취를 강조하였다. 註49) 1919년 8월에 이르러 정의단은 독립군정회獨立軍政會를 조직하였는데, 독립군정회의 조직 사실은 정의단이 1919년 음력 7월에 발표한 「창의격倡義檄」을 통해서 내외에 알려졌다. 이 창의격에서 정의단은 “정리正理와 대의大議로써 동지자를 규합하여 천하만세의 공적公賊 일본에 성죄행토聲罪行討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공적公賊 일본을 토멸하여 천하의 공분公憤을 설雪하고 우리 독립은 공고하여 만세의 광영을 남기라”고 촉구함으로써 대일무장투쟁을 주창하였다. 정의단이 그 때까지 쓰던 기원紀元 연호 대신에 ‘대한민국’ 연호를 쓴 점이 주목된다. 註50) “군사지식의 양성과 무기 구입”을 목적으로 한 독립군정회는 동포들을 상대로 군자금 모집을 시작하였다. 독립군정회를 조직할 당시 정의단은 북간도 각지에 5개 분단分團과 70여개의 지단支團을 설치하였다. 군정회가 조직된 1919년 8월경, 정의단에 참여하였던 이규李珪·김성극金星極·강수희姜受禧 등 공교도들이 정의단에서 대거 탈퇴하였다. 1920년 3월 대한군정서 파견원이 독립신문사에 송부한 「대한군정서약사大韓軍政署略史」에 의하면, 이규와 강수희는 길림으로 가서 “정안립鄭安立을 돕다가 실패하고는 다시 오지 아니하였고”, 김성극은 “정의단에서 보황주의保皇主義를 쓰지 않는다”며 정의단의 “주무자主務者 34인을 왜영사관倭領事館에 밀보密報한 사실이 발각되야 출단黜團 처분을 당하고는 그만 암지暗地로 야행夜行하면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을 조직”하였다고 한다. 진위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이에 앞서 이미 1919년 8월 16일자로 대한정의단장 이상인李尙仁 명의의 「대한정의단선고문大韓正義團宣告文」에서도 이사실이 내외에 공포된 바 있다. 즉, 정의단의 심판원장審判院長이었던 김성극이 정의단의 발기자의 신분이면서 그 부하인 김구윤金九潤, 字 河汝의 명의로써 몰래 일본영사관과 내통하여 정의단의 주모자 34명의 성명을 알려줬다. 그리고는 다시 유언流言을 퍼뜨려 “이제야 중국관헌은 주모자 가택을 엄탐嚴探하려는 가 풍문이 있다”며, 이를 참말인양 각 단원들에게 급보하여 일견 해산을 감행케 하여 자당自黨의 세력을 확장하려 하였다. 그러나 계획에 허점이 있어 마침내 일의 전후사정이 발각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김성극은 구한국시대에 관리를 지낸 자로서 항상 막대한 황은皇恩을 입어 ‘한일합병’과 동시에 간도에 와서 공교회를 조직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그 무리사이에서 일시 은연한 성망이 있었지만 이번의 부정행위로 임금을 기만하고 백성을 속이어 결당작명으로 일시의 허명虛名을 넓혀 자기 이익을 꾀하였으나 사정이 이제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의단은 이 「선고문」에서 단령團令으로 김성극을 파면하고 엄형嚴刑을 선고한다고 선언했다.
어쨌든 이후 김성극 등 정의단에 참여였던 공교도들인 이규·김성극·강수희·김성륜金性倫·홍두극洪斗極 등 12명은 1919년 음력 7월 「화한구국동맹華韓救國同盟檄告文」을 발표하여 화한구국동맹華韓救國同盟의 발기를 선언하였다. 화한구국동맹의 「격고문」에는 화한구국동맹에는 연길사범학교·도립제2중학교 학생단·관사립제각학교가 함께 참여하였다. 이 무렵 화한구국동맹의 발기인인 이규는 대한정의단임시정부大韓正義團 臨時政府를 조직하고 1919년 10월 11일자로 상해의 임시정부에 보고하였다. 이에 따르면, 대한정의단임시정부의 근거지는 봉천성 안도현 내도산內島山이었고, 단원들이 내도산을 비롯하여100여 명 소사하小沙河 140여 명, 화전현樺甸縣, 고상하古相河, 100여 명에 주둔중이고 엽사獵師 수백명이 ‘대기중’이라고 했다. 대한정의단 임시정부는 얼마 후 대한정의단 임시군정부로 개칭한 사실을 임시정부에 보고하였다.1919년 10월 정의단은 군정부라 개칭하며 집행기관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정의단에 참여하였던 김성극 등 공교도들의 대거 탈퇴한 사정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즉 김성극 등은 복벽파인 대한광복단을 조직하고, 이규·강수희는 대한정의군정사를 조직하였다. 정의단으로부터 복벽주의자들인 공교도 지도자들이 이탈하게 되면서 대한군정부는 공화주의적인 독립군단체가 되었다군정부는 조직 당일에 임시정부에 보고하고 승인을 신청하였다.신청서 1호 군정부의 수립되자 가장 적대적으로 대응한 단체가 대한국민회였다. 대한국민회는 회장 구춘선의 명의로 1919년 11월에 발표한 「국민회장고유」에서 정의단이 “원래 부정당不正當의 심리로 조직된 단체라 중간에 파열되야 공교회인은 오숭단五崇團·정명단正名團·광복단光復團 등 각단으로 분립되고 대종교인은 군정부라 칭하였다”며 군정부 성립의 불순한 동기를 지적하였다. 대한국민회는 이에서 더 나아가 군정부를 비롯한 이들 단체들이 “동일 구역내에 동일 인민에 대하야 각각 의연금을 청請함으로 민심을 의혹타락케 할 뿐아니라 인민은 군정부 강제에 반감되야 중국관헌에 고소”하게 되었다며, “외국인에게 독립국민의 체면을 손상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이어 대한국민회는 동포들에게 군정부 등 북간도 여러 단체들을 파괴할 것을 촉구하였다. 아! 동포여 일치분기一致奮起하야 각 단체의 연합을 독촉하라. 만일 연합을 불긍不肯하면 각소단체各小團體를 파괴하라 선두로 군정부를 파괴하라 군정부의 명칭은 일시각一時刻이라도 존립을 용서지 못하리로다. 일국내에 2개의 정부가 있지 못할지니라. 그네의 말이 군정부는 임시정부의 지휘를 받는다 하나 이는 사람을 기망함이니라 정부 2자는 법률상 절대 최고기관이니 아모리 군정부라도 타정부의 명령을 받지 못하리니라 지방단체의 불통일도 용서하기 어렵거든 하물며 최고기관의 불통일이리오 이를 외국인이 알면 절대로 독립을 승인치 아니하리라. 아! 동포여 일치분기하여 각단체를 파괴하라. 군정부를 주공격대상으로 한 이 「국민회장고유」는 이후 1920년 1월 10일자 『독립신문』에 게재되어 널리 알려졌다. 군정부의 명칭을 사용하는데 대한 대한국민회의 비판요지와 같은 취지에 입각하여 상해의 임시정부는 내무부가 제안한 ‘북간도 군정부안’을 논의하였다. 즉, 1919년 12월 1일에 개최된 임시정부 정례국무회의에서는 군정부에 대하여 군정서로 개칭할 것을 명령하고 국무원비서장이 그 이유를 밝히 공문을 군정부군정서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이 결정에 입각하여 임시정부가 보낸 「임시정부 국무원 제205호」의 명령을 따라서 군정부는 군정서軍政署로 개칭하였다군정서의 정식명칭은 대한군정서이다. 「대한군정서약사」에서 “12월에 임시정부 국무원 제205호에 의하야 군정서라 개칭하야 공인한 군사기관이 되다”라고 하여 명칭의 개칭과정을 압축적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대한군정서 총재부는 왕청현 춘명향春明鄕 대감자大坎子 유수천楡樹川, 군사령부는 춘명향 탁반령托盤嶺 한인명칭 서대파西大坡에 두었다. 註62) 대한군정서는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1920년 2월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를 춘명향春明鄕 십리평十里坪에 설립하였다. 대한군정서는 서간도의 서로군정서로부터 박두희·이범석·강화린姜華麟·백종열白鍾烈 등을 교관으로 초청하여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서로군정서와의 연결은 신흥무관학교 관계자들과 교유가 있었던 김좌진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신흥무관학교의 이장녕은 대한군정서 요청에 의해서 참모장이라는 요직을 맡았다. 또한 김좌진은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 일대에 근거지를 설치하고 신흥무관학교 교관 이범석과 졸업생 김춘식金春植, 김훈·오상세吳祥世·박영희·백종렬·강화린·최해崔海·이운강李雲崗 등을 교관으로 초빙하였으며, 다수의 군사관련 교재를 공급받았다. 대한군정서 사관연성소를 졸업하고 군정서교성대에서 활동했던 강근姜槿, 강회원은 서울에서 3·1운동에 참가한 후에 윤해尹海의 조카인 윤만정윤걸의 소개로 북간도로 망명하고 군정서 사관연성소의 사관학생으로 입학하였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1920년 3월에 ‘군정서 사관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응모자수가 모두 330명이었으나 30명은 자격부족으로 ‘보병대’로 넘기었다고 한다. 당시 사관학교는 그 조직체가 학도단이었고 2개의 학도대와 4개의 중대로 편성하였는데, 주요간부들은 학도단장 박영희, 제1학도대장 최중준형, 제2학도대장 이범석, 제2학도대 제1중대장 오상세, 제2학도대 제2중대장 이민화, 제1학도대 제일중대장 강모였으며, 강근은 사관학교에서 제2학도대 제1중대 제2실장으로 활약했는데 분대장과 동등한 직책이었다. 강근에 따르면, 사관연성소 입학생들은 6개월 속성과정으로 1920년 3월에 시작하여 그해 8월에 끝마쳤다. 학과는 20여개의 군사학과 전술· 전략을 배우고, 실제훈년으로 체조·운동·사격술·승마 등 여러 가지 훈련을 받았다. 오전에는 강당에서 군사학을 수업하고 오후에는 서대포촌 들판에 나가서 실지연습을 하였다고 한다. 대한군정서의 군지휘부는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이나 관계자들이 합세하면서 크게 강화되었다. 이들은 대한군정서에서 일선부대의 핵심직책을 맡았다. 이장녕이 참모장을 맡은 외에도 박영희는 대한군정서 사령부 부관겸 사관연성소 학도단장을, 이범석은 연성소 본부 교사와 연성대장을, 김훈은 종군장교와 소대장을, 백종렬은 제2학도대 제3구대장과 종군장를, 강화린은 학도단 제1학도대 제3구대장과 제1중대장 서리를, 오상세는 제3중대장을, 이운강은 소대장 서리를 맡아 대한군정서 부대를 이끌었다. 사관연성소의 학도단외에 군정서는 일반청년 300~400명을 모집하여 군대보병대를 편성하였다. 註68) 1920년 8월초 현재 군정서의 군사령부에는 경위병이 200명이 있었다. 사관연성소의 교관은 나중소羅中昭, 구한국육군 영장·이천을李天乙·윤창현尹昌鉉, 前道允 公署 통역이었으며, 학생은 400명이었다. 일본관헌들이 1920년 8월 현재 조사한 바를 보면, 군정서의 성격과 상황이 대략 정리되어 있다. 즉 군정서 회원의 대부분은 단군교도대종교도였다. 북간도에서 가장 유력한 무력단체로서 ‘과격파’러시아혁명세력과 연락을 갖고 있다. 군정서의 활동 역시 가장 ‘흉폭’하여 끊임없이 국내무력진공을 주창하여왔고, 1920년 3월부터 6월까지의 국내진입작전에 군정서 대원들이 참여하였다. 8월 현재 군정서의 간부진을 보면, 총재 서일徐一, 부총재 현천묵玄天默, 사령관 김좌진金佐鎭, 부사령관 김성金星, 참모장 나중소 등으로 대원수는 약 1,600명, 군총 1,300정, 권총 약 150정, 수류탄 80개를 보유하고 있다. 군정서는 특히 근거지 부근에 사관학교사관연성소를 설치하여 15~16세 이상 40세까지의 청년장정들을 모집하여 간부를 양성하고 끊임없이 병력 충실에 힘쓰고 있다. 특히 군정서는 현역 이외는 재향군인으로서 지방 각지에 산재해 있다고 유사시에 명령이 내리면 즉시 동원소집될 수 있도록 하였다. 보다 자세한 간부명단을 보면, 총재 서일, 부총재 현천묵, 명예고문으로 김가진金嘉鎭·최재형崔在亨·임창세林昌世, 前 野團 단장, 서무부장 임도준任度準, 재무부장 계화桂和, 참모부장 이장녕李章寧, 사령관 김좌진, 사령관 부관 박영희朴寧熙, 사관연성소장사령관 김좌진 겸임, 교수부장 나중소參謀副長 겸임, 敎成隊長 겸임, 교관 이범석, 학도단장 박영희사령관 副官 겸임, 김동진金東鎭, 김좌진의 實弟, 서간도군정서 사령관 지대영池大永, 이청천, 참모장 김동삼金東三은 안도현 삼인방에 있다. 註71) 군정서의 병력을 보면 대원 약 1,200명, 군총 약 1,200정, 탄약 24만발, 권총 150정, 기관총 7문, 수류탄 780발 등이었다.
3. 홍범도군대, 대한독립군
홍범도洪範圖군대는 어떤 특별한 군대명칭隊號를 갖지 않았고, 통칭 대한독립군으로 불렸고, 북간도에서는 형식상으로 국민회에 속하였다. 홍범도의 옛동지들과 단체들의 도움으로 유지되었는데, 그 병력은 통상 400명에 달하였고, 지도적 간부는 의병출신의 전대복全大復과 박운봉朴雲鳳 등 이었다. 홍범도가 한말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여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북간도로 나오게 된 것은 1919년 3·1운동 이후였다. 홍범도 일기에서 홍범도는 러시아 추풍秋豊·秋風 지역 다아재골에서 농사를 짓다가 3·1운동의 소식을 듣고 무장투쟁 재개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했다. “18년전1919년 고려 독립만세가 불일 듯 하므로 농사고 뭐고 나가자 하고 묻어 두었던 총을 끄집어 내여 일변 닦으며 일변 의병모집과 탄환 모집과 일변 원조하여 의병들 입힐 것과 천리경 그러한 것을 갖추”고 10월 1일음력 8월 8일 떠나서 앵덕기에 도착하였는데, 당시 홍범도 휘하에 모인 의병은 106명이었다. 홍범도부대는 이후 수청현재의 빨치산스크 일대에서 백위파와 싸우다가 도피하여온 러시아빨치산 6명과 함께 중국 훈춘琿春의 차모정자草帽頂子로 들어왔다. 이들은 차모정자 서쪽골짜기의 한인촌에서 주둔하던 중 습격한 홍호적紅鬍賊, 홍후즈, 중국마적 70명을 처치하고 홍호적 90명을 잡고 총50개·탄약1,200개·아편여성 봉지·천190자·대양화300원와 일화700원를 전취했다. 다음날 홍범도 부대는 밤에 나자구 합마당의‘예수촌’기독교도촌에 들어가 무장을 벗고 주둔하게 되었다. 이후 1919년 12월 6일음력 10월 14일부터 다음해인 1920년 4월 21일음력 3월 초3일까지 ‘무단봉’으로 나가서 유숙한 후 봉오골에서 최진동부대와 연합하였다. 1919년 10월초 무렵 홍범도가 추풍지역에서 독립군을 모으고 있던 정황은 일본측 관헌자료에서도 확인된다. 註75) 또한 홍범도가 150명을 이끌고 체류하고 있던 합마당을 떠나 안도현安圖縣 방면으로 떠났다는 일제측 첩보가 있다. 12월 16일에는 학동鶴洞, 龍井村 서방 약 1리반에서 14~15명의 군복을 입은 한인들이 동민들을 모아놓고 “우리들은 홍범도의 부하로서 한족독립을 기도하는 결사대원이다. 한족독립의 업業은 지난할지라도 그 목적의 달성에는 큰 희생을 요한다. 우리들은 그 급선봉으로서 결빙기를 이용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국내로 침입하여 독립혈전의 대의를 다하려고 하는 것이다”며 강개적慷慨的 연설을 하고 독립운동자금 1,500원을 제공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위에 인용한 일제첩보기록의 경우도 해당되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독립군을 가장하여 한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2월 홍범도가 대한독립군의용대장으로서 대원 박경철朴景喆·이병채李秉埰와 함께 3인의 명의로 「유고문諭告文」을 반포하였는데 바로 한인주민들을 상대로 한 폐단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유고문에서 홍범도는 간도방면에서 무뢰배가 인장을 시세를 타고 인장을 위조하여 독립군으로 빙자하여 민간으로부터 강제모연하거나 군복을 가장假裝하며 무기를 휴대하고 각 동리에 시위적 작난作亂이 있을 경우, 동리 자체로 이들을 엄히 징치懲治하거나 만약 힘이 부족할 경우에는 독립군의용대에 보고하여 군율로 처치케 하라고 하였다. 대한독립군의 「유고문」은 앞서 소개한 대한국민회장의 구춘선이 발표한 「국민회유고」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라 판단된다. 아울러 대한독립군의용대의 「유고문」에서 주목되는 점은 홍범도·박경철·이병채 등 지도자들의 무장투쟁노선이 개략적으로 표명되었다는 사실이다. 우선 이들은 정의·인도를 주창하는 평화적 시위 만세운동방식이나 파리강화회의나 국제연맹에서의 외교적 활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무장투쟁에 의해서만이 독립달성이 가능하다고 인식하고 있었고, “군국대사를 주모하는” 상해의 임시정부의 “광명정대”한 선전포고을 기다려 독립전쟁을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선은 향후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부대의 활동방향이 제시된 문건이라 할 것이다. 홍범도 부대의 이 「유고문」은 일본관헌에 입수되었다. 즉 일본총영사관 백초구百草溝 분관의 첩보원 정성옥鄭成玉이 1919년 12월 18일부터 22일에 걸쳐 합마당蛤螞塘 산차고우三岔口 방면을 탐방한 후 일본영사관에 제출한 것이다. 일역된 이 「유고문」은 『독립신문』에 게재된 「유고문」과 내용이 거의 같으나, 홍범도의 직함이 ‘노령주둔대한독립군대장露領駐屯大韓獨立軍大將’으로 박경철과 이병채가 참모參謀로 되어 있는 점이 다르다. 이상에서 검토한 기록들을 종합하면,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의용대 부대는 1919년 10월 초 러시아 연해주 추풍지역을 떠나 중·러국경을 넘어 훈춘 차모정자를 거쳐 12월초에 합마당 삼차구 한인촌에 주둔하고 유고문을 배포하여 그 조직을 대내외에 알리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북간도로 들어온 이후 홍범도는 국민회와 밀접한 협력관계를 맺었다. 일제측 첩보보고에서도 확인된다. 즉, “홍범도는 1920년 말 부하 약 70명을 인솔하고 합막당蛤螞塘 부근으로 와서 국민회장 구춘선具春先과 회견하고 무엇인가 계획을 하고 있었다.”또 다른 일본첩보보고1920년 2월 19일자에는 홍범도가 나자구에서 ‘도독부’를 조직하였다는 것이다. ‘도독부’의 간부는 임시독판겸 군무 총지휘관 홍범도, 총무국장겸 의무대장義務隊長 전이근全利根, 재무국장겸 교섭위원장 최정국崔正國, 군기軍器국장 박창준, 군기국원 전천보全天寶, 경호국장 박경철, 경호국원 한상열韓相說, 모연국장 김낙용金洛鏞, 모연국원 이광준李光俊·오백녀吳伯汝, 교섭위원장 이성열 등이었다. 당시 ‘도독부’군대는 병력 총 330명의용대 80명, 상비대 250명(나자구 지방 거주자)에 러시아식 5연발 180정, 중국제엽총 50정, 탄약 약 2만발을 보유하고 있었다. 註81) 이 ‘도독부’의 간부들 면모를 보면, 홍범도를 제외한 나머지는 이후 나자구를 근거로 활동하게 되는 나자구의 국민의사부의 간부들이다. 홍범도가 북간도지역으로 근거를 옮기면서 이 ‘도독부’ 조직이 국민의사부회로 개편된 것으로 추정된다. 간도로 들어온 이후 홍범도부대는 일반적으로 대한독립군으로 알려졌으나, 1920년 5월 말 이후 대한국민회 군무위원회, 대한군무도독부가 통합하여 조직한 대한북로독군부 소속의 독립적인 부대로서 정식명칭은 정일제1사령부征日第一司令部이었고, 홍범도는 정일제1군사령장관征日第一司令長官의 직함을 갖고 활동했다. 이처럼 홍범도군대가 국민회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 사정을 대한군정서측은 매우 비판적으로 보았다. 즉 대한군정서는 1920년 9월 30일자로 총재 서일의 명의로 발표한 「성포문聲布文」에서 “당초는 의병장 홍범도씨를 감언甘言을 갖고 유誘하여 자기 구역내로 안접安接하고, 그 위세를 빌려 인민 에게 강제를 시작하였지만, 마침내 홍모홍범도로 하여금 제1사령에 정하고 독군부장의 지휘하에 두어 3단의 연합을 강화”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앞에서 살펴본 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대한국민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협조를 받으면서 정일제1사령부로 활동하였다. 1920년 국민회의 지출 가운데 ‘제1사령부 2,12원’은 홍범도에게 지원한 군자금이었다. 뿐만 아니라 국민회는 홍범도군대에 요원파견 등 적극적인 지원도 하였다. 그 사례를 들면, 홍범도의 제1사령부의 요청에 따라, 국민회 회장 구춘선은 1920년 7월 22일자로 의사 이원백李園白에게 통달문 보내어 적십자사 의사로 임명하여 홍범도부대에게 시무할 것으로 요청하였다. 1920년 8월 현재, 대한독립군은 연길현 명월구明月溝에 근거를 두었는데, 국민회와 상호 제휴하면서 점차 다른 단체의 세력을 잠식하여 세력이 우세하게 되었다. 주요간부는 단장은 홍범도, 부단장 주건, 참모장 박경철이며 대원수는 약 400명, 군총 약 200정, 권총 약 30정을 보유하고 있었고, 국민회와 공동경영으로 명월구에 사관학교 설립에 착수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국민회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력을 받았다. 일본군의 간도침공 당시 일본측에 귀순한 국민회 간부국민회 참사 김병흡金秉洽이 진술한 바에 의하면, 국민회가 간도지방에서 모연한 총액은 6~7만원이었는데, 이 가운데 2만원을 1920년 3월 홍범도에게 군수품구입비로 교부하였다는 것이다. 사실여부는 차치하도라도 홍범도부대에 대한 국민회의 지원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4. 대한군무도독부
대한군무도독부大韓軍務都督府는 왕청현 춘화향春華鄕 봉오동鳳梧洞에 근거를 두었는데 최진동崔振東, 본명 崔明祿이 통솔하는 단체이다. 최진동은 “일찍부터 중국국적을 취득한 인물로 봉오동에서 재산으로나 명성으로서 상당한 세력을 가진 유력자”였다. 그리하여 자택을 장벽으로 둘러쌓고 사방에는 포대를 지어놓고 자위단을 설치하였던 유명한 토호였다. 3·1운동이 발생된 후에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자기 재산의 전부를 독립운동에 바친 애국자였다. 도독부의 군인들은 대부분 광복단과 같이 공교회 교도이고 항상 국경지역을 공격하였다. 1920년 3월 이후 6월까지 국내진격전 대부분은 군무도독부 소속원들이 감행하였다. 1920년 8월 현재 주요 간부들은 총재 최진동, 참모장 박영朴英, 대대장 이춘승李春承, 중대장 이동춘李同春, 李東春, 소대장 최문인崔文仁이었다. 대원수는 약 600명, 군총은 약 400정, 권총 약 50정, 기관총 2문, 수류탄 약 120개를 보유하였다. 이후의 변경된 간부진을 보면, 부장府長 최진동, 고문 김성극金星極, 참모 박영朴英·최정화崔精化, 총무 박시원朴施源, 모연대장 최태여崔泰汝, 중대장 최봉세崔鳳世·김만순金萬順 등이다. 註87) 간부 중에는 중국관헌과 친숙한 공교회 회원과 의병출신이 많았으며, 대한신민단과 친숙한 관계에 있다. 註88) 1920년 5월 국민회, 홍범도의 대한독립군또는 정일제1군과 통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로 통합되었다.
5. 대한신민단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의 창립자 백추白秋 김규면金奎冕은 함경북도 경흥 태생으로 한성에서 국립사범학교와 무관학교 단기과정을 졸업했다. 그는 신민회에 가입하여 ‘신교육운동’에 참여하였고, 한일합병 후에는 침례교에 입교하여 교사와 목사로 활동하였다. 1914년 침례교 교단이 말콤 펜위크Malcom C. Fenwick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분열되자, 서양 선교사들의 교리와 교회운영방식, 특히 일제총독부에 대한 타협적인 태도를 비판하며 “해외외국인선교사로부터의 독립”이란 기치를 내세우며 스스로 성리교聖理敎라는 ‘독립교회’를 창설하고 그 감독에 취임하였다. 김규면은 외국인 선교사들에 종속적인 관습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며, 주로 북한·만주와 연해주 지역의 기독교도들을 규합하여 교세를 확대하여, 300여 교회와 신도수 3만 명에 달할 정도로 교세를 확대하였다. 1915년 8월 16일 조선총독부가 이른바 포교규칙布敎規則을 제정하자 총독부에 자신의 교회를 등록할 것을 거부하였다. 김규면은 1917년 태평양서원太平洋書院을 설립하였다. 김규면은 3·1운동 직전 한중러 국경지대인 훈춘에서 자신의 독립교회 핵심교도 200~300여 명을 주축으로 군사행동을 주요활동목표로 하며, 신민회를 계승한다는 취지의 대중적인 비밀군사조직인 신민단을 창설하였다. 창립 당시의 간부들은 단장 김규면, 경리국장 이존수, 재무 한경서, 서기 박재섭, 총찰惣察 이인李仁, 총찰 이원준李元俊이었다. 창립 직후인 1919 년 3월 12일, 발표한 헌법과 강령에서 신민단은 ‘지연地緣에 기초한 파벌과 부당한 야망의 타파에 의한 민주제’에 의한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당파 초월의 ‘민족대동주의民族大同主義’를 표방하였다. 註92) 창립이후 신민단은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군인과 군자금 모집에 주력하였다. 창립이후 신민단은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장정모집과 군자금 모금에 주력하여 훈춘·북간도·연해주 지역에 독자적인 유격부대들을 조직하였다. 한인사회당 당대회 당시 김규면이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동휘와 비밀회동을 가진 후, 신민단은 훈춘과 북간도에 지부를 유지한 채, 본부를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겼는데, 이 지역의 기독교신도들 사이에서 세력을 확장하였다.1919년 7월초에 작성된 일본첩보문서에는 신민단의 주요지도자로 단장 김규면을 비롯하여 경리국장겸 참모부장 이존수李存洙, 기독교 교사 이인李仁, 기독교 목사 김준근金準根, 이춘범李春範·이춘보李春甫·이원준李元俊·박재섭朴在涉·한경서韓京瑞 등이었다. 註94) 일제의 1919년 6월 26일자 첩보문서 역시 “여타의 독립운동기관과 비교하여, 신민단은 점차 그 기초를 공고히 해가고 있으며, 자신의 강령을 실현할만한 역량이 있고, 견고한 조직력과 확고한 자금모집력을 갖추고 있었고, 대중들간에도 평이 좋으며 단원이 이미 3만 명에 달하였고 단결력도 강고하”다고 평하였다. 일본관헌자료에 의하면1920년 8월조, 신민단의 북간도 지부는 왕청현 춘화향 상석현上石峴에 근거하였다지단장인 김준근의 집 주소. 주요간부는 북간도 지부 단장 김준근, 총무 이존수, 모연대장 김성金聲, 경리국장 이전수李典洙, 李存洙이며 대원은 200명, 군총 약 160정, 권총 약 30정을 보유하였다. 이 자료보다 늦은 시기에 작성된 일본첩보자료인 「간도방면間島方面에 있는 불령선인단不逞鮮人團의 조직組織과 역원조사서役員調査書」1921년 4월조에 따르면, 신민단의 본부는 노령 블라디보스토크 부근에 있다고 하나, “그 실재 의심스럽다”고 하면서 “김규면이 간도방면에서 행동한 것 사실”이며 “군무부, 재무부에 속한 무장대원 약 60명”이라고 했다. 1920년 8월 현재 신민단의 병력은 대원 약 200명, 군총 160정, 탄환 9,600발, 권총 30정, 수류탄 48개를 보유하였다.
위의 일본첩보자료에 의하면, 1920년 8월 당시 신민단의 주요간부들은 다음과 같다. 본부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단장 김규면, 부단장 이강李剛, 고문 유동렬, 군무국장 박인묵朴仁默, 통신국장 이명순李明淳, 외교부장 김병학金炳學, 간사장 박남수朴南洙, 결사대장 최봉명崔鳳鳴·장봉한張鳳翰·나봉남羅鳳南, 모연대장 남영화南永化·서규일徐圭日·오경석吳景錫. 신민단 지단신민단 중부, 왕청현 춘화향 지단장겸 신민보사新民報社 사장, 통신부장 김준근춘화양 石峴, 군무부장 한경서韓京瑞, 경위부장 전춘수全春洙[秀], 무기국장 한경철韓京喆, 무기감독 최규남崔奎南, 재무부장 최기업崔基業 전임前任·이사범李仕範·박사원朴仕源, 이상 후임, 경리국장 이존수李存洙, 외교부장 양통역梁通譯, 모연국장 고원국高元國, 모연대장 오기순吳琦順외 7명, 모연반장 이재송李載松·장기영張基榮외 3명, 부속 신민보주필 이흥수李興秀[洙], 편집장 박덕수朴德洙 등. 북간도 지단장 김준근은 1920년 가을 일본군의 간도침공시 일본측에 귀순하였다. 1920년 여름 일본군의 간도침공이전 훈춘의 신민단은 국내진공전을 위한 군자금과 군인모집에 진력하였다. 신민단 부단장겸 군무부장 한경서는 신민단 독립군을 총지휘하고 있어서 일본첩보기관은 ‘신민단 단장겸 독립군대대장’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한경서는 중국어를 잘 하고 지방중국당국자들과도 친분이 있어 중국군대에 늘 출입하였다. 그리하여 중국당국의 해산명령에도 불구하고 중국관헌들은 해산령에도 불구하고 군사훈련을 계속하였고 중국당국도 이를 알고 묵인하였다. 이에 앞서 마적들의 중국군대 습격에 대비하여 중국군대의 지원요청에 한경서는 40명의 단원들을 중국군대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1920년 7월경 훈춘지역 신민단 군대의 주요한 간부들은 대장인 한경서를 비롯하여 부관 최태룡崔泰龍, 중대장 김덕규金德奎, 소대장 고원국高元國, 교관 이와실리, 하사관 오산초吳山初·김희근金熙根·최민보崔民甫 등이었다. 또한 자금조달을 위하여 12명으로 일종의 모연대인 모험단결사대, 단장 박운기朴雲基을 조직하여 단원들을 국내·북간도와 노령 각지에 파견하여 군자금과 장정들을 모집하였다. 7월 중순 북간도에 파견되었던 고원국高元國과 박모는 21명의 장정들을 모집하여 왔다. 아울러 한경서는 토문자土門子와 상·하 초모정자 일대의 한인 1가호 당 1명의 장정을 징모하였고, 1가호 당 5원내지 10원과 조 2말씩을 내도록 하였다. 모집한 의병수는 약 100명에 달하였다. 훈춘 초모정자에 근거를 두고 있던 신민단의 활동지역은 훈춘과 북간도는 물론 러시아 연해주 남부 중·러 국경지역의 슬랴방카·바라바시·노보키예프스코예 등지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훈춘의 토문자와 연해주 남부 국경지역의 바라바시·슬랴방카 등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동태를 정찰하였다. 이처럼 모집된 독립군들은 태평천과 상하 초모정자에 설치한 병사민가에 1가호 당 5명 정도씩 수용하였다. 신민단의 무장상태는 양호하여 러시아식 또는 일본식 군용총을 각자 휴대하고, 탄약은 총1정당 150발에서 300발을 소지했다. 권총 수십 정과 군도 약간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훈춘지역의 신민단은 한경서·신우여·김병권 등이 주요 간부들이 지휘하고 있었다.
6. 대한의민단
대한의민단大韓義民團 또는 대한민국의민단이라고도 한다. 1920년 4월말 5월초에 조직된 것으로 알려졌다. 의군단은 원래 근거지가 왕청현 초모정자草帽頂子이었는데, 1920년 4월경 왕청현 명월구용정에서 서북 17,8리로 이전하고 국민회 소속원과 합하여 주둔하고 1920년 여름에는 국민회와 협력하여 무관학교 창설에 참여하였다. 의민단은 천주교 교도와 의병계열 인사들이 중심이며, 군무도독부와 노령 독립운동단체들과 밀접히 연락하여왔다. 천주교도이며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안정근과 제휴하여 임시정부의 공채모집, 대한적십자회 운동에 협력했다. 1920년 8월 당시 의민단은 단원 300명, 군총 400정, 탄약 약 4만발, 권총 50정, 수류탄 480개를 보유하였다. 의민단의 본부는 왕청현 숭례향崇禮鄕 묘구廟溝, 明月溝라고도 함에 두었고, 산하에 5개 지방회를 설치하였다. 의민단 간부를 보면, 단장 방우룡方雨龍, 부단장겸 총무 박정규朴定奎, 서무부장 김연군金演君, 재무부장 석해일石海一, 경호부장 신재영申辛在英, 외교부장 윤광해尹光海, 통신부장 현주일玄周一, 선전부장 정준수鄭駿秀, 서기 이덕천李德天, 참모 박재눌朴載[在]訥, 모연대장 신헌申憲·최규남崔奎南·박창래朴昌來이었다. 부단장겸 총무인 박정규, 선전부장 정준수 등이 1920년 10월 일본군의 간도침공 당시 일본측에 귀순하였다.
7. 대한의사부
대한의사부大韓議事部는 국민의사회나 국민의사부 등으로 불리는 단체로서 주로 대한국민회와 깊은 관계를 맺고 활동한 단체이다. 본부 노령과 북간도 방면의 국경지대인 수분綏芬 대전자大甸子, 한인명칭 羅子溝에 위치해 있던 관계로 노령과 간도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간의 통신연락과 무기운반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직원들이 나자구의 주민들이었고, 1910년대 나자구 무관학교를 설립했던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의 직속 인물들로서, 단원은 엽사사냥꾼가 많고 또 노령으로 통하는 데에 편리상 무기 수입의 자유가 있으므로 다수의 무기를 비축해 둔 단체이다. 일본첩보보고 역시 “일본과 선전 포고하면 언제든지 포고전 출동할” 태세가 되어있을 정도로 단원들이 매우 활기 있는 단체였다. 1920년 7월말 8월 초순경 중국관헌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의사장은 전석규全錫奎, 총무 전의근全義根, 재무 최정국, 의사원 박창준외 3명이었다. 註104) 1920년 10월 일본침략군이 훈춘을 침입하였을 당시 간부진은 회장 전석규, 부회장 오기연吳琦淵, 총무 전천보全天甫, 의용대장 이춘범·최정국 등이었다. 최정국은 의사부 소속 150명의 의용대원을 이끌고 10월 27일 일본군과 전투하였다. 1920년 8월 의사부의 병력은 대원 약 200명으로 군총 160정, 탄약 9천600발, 권총 200정을 보유했다. 1920년 가을 나자구에 집결한 북간도 독립단체들이 대한총군부大韓總軍府가 성립될 때 참여하였으나 다시 1920년말에 분립하여 1921년 2월경부터는 독자적으로 활동을 개시하였다. 일본첩보자료인 「간도방면에 있는 불령선인단의 조직과 역원조사」1921년 4월조에 따르면, 의사부장은 전리근全利根, 총무 최정국崔正國, 대대장 박창준朴昌俊, 수뇌의사부원 이춘범李春範외 8명이었다.
8. 대한의군부
북간도와 연해주의 의병세력이 중심되어 3·1운동 이후에 결성된 단체이다. 의군단義軍團이라고도 불렸으며, 정식명칭은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다. 총재부장府長는 북간도 관리사를 역임하고 연해주의병의 지도자였던 이범윤이었다. 북간도지역의 의군부 군대를 실제로 지휘했던 인물은 허재욱허근이었다. 의군부의 결성장소는 러시아 추풍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나, 한말 의병장 허재욱이 북간도 봉오동 일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허재욱은 일반사람들이 보통 허영장許營將이라고 불렀다. 1920년 6월 봉오동전투 이후에 독립군 상황을 보고하고 있는 일본첩보보고에 허근 군대의 활동이 나타나 있다. 즉 1920년 6월초의 봉오동전투 후 북간도 일반인들 사이에 일본군이 다시 봉오동 부근을 공격한다는 풍설이 돌았고, 의군단에서는 영장 허근이 300여 명을 이끌고 무산茂山 간도 방면 경계를 위하여 출발하였으나, 일본군이 다시 월강하지 않아 최진동의 북로독군부로부터 허근에 대하여 철수할 것을 통보하였다. 그리하여 허근은 부하 150여 명을 인솔하고 6월 27일 일량구一兩溝 남북촌南北村으로 귀환하였고, 허근은 다음날 부하 4~5명과 함께 북간도의 각단연합회가 개최되고 있던 장동獐洞으로 출석하기 위하여 출발하였다는 것이다. 1920년 8월 당시 대한의군부는 본부에 총재 이범윤을 비롯하여 사령관 김영선金營善·진단산秦檀山, 검사부장 최우익崔于翼, 검사관 김영범金永範, 재무부장 강봉거姜鳳擧, 서기 지장호池將虎, 池章會였으며, 참모부 부장副長 강두황姜斗璜, 군사령관 신일헌申日憲, 참모장 강봉거姜鳳擧, 대대장 허근許根, 참리부총장參理部總長 김영술金泳述 등이었다. 의군부의 군사조직은 전위대前衛隊와 산포대山砲隊로 이원화되어 있었는데, 대한의군 전위대는 대장 허근, 참모부장 박재율朴在律, 박재눌?, 참모 한상열韓相烈, 군무사령관 신일헌, 헌병대장 조정윤趙正允, 서부장 이을李乙, 재무부장 홍림洪林 등이었다. 산포대는 이범윤을 본부장총재, 총무 최우익, 재무 홍림, 외교관 김해룡金海龍 외에 대장산포대사령관 조상갑趙尙甲, 중대장 박만홍朴萬弘 등이었다. 전위대원은 약 100명, 산포대원은 약 160명이었다. 산포대는 “산포山砲를 가진 포병砲兵의 뜻이 아니라, 산과 들을 경장輕裝으로 치구馳驅하여 유력한 사격에 의한 기습을 목적으로 한 별동대로서 가장 사격에 능한 포수사수로 편성된 일종의 저격대狙擊隊”의 특별한 명칭이다. 일본첩보자료에 1920년 8월 당시 ‘의군단’은 단장 방우룡, 참모장 김종헌金鍾憲, 영장營長 허근許根, 재정부장 홍림洪林이며, 대원수는 약 300명, 소총 400정, 권총 약 50정, 수류탄 약 480개를 보유하였다고 되어있는데, 의군단은 의군부의 오류이고, 단장이 방우룡으로 잘못되어 있는데, 그외는 의군부에 관한 기록이라고 보여진다.
9. 대한광복단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은 1919년 9월 정의단군정회에 참여하였던 공교도 김성극·김성륜·홍두극 등이 조직하였다. 정의단과 결별한 공교도들인 이규·김성극·강수희·김성륜·홍두극 등 12명이 화한구국동맹華韓救國同盟을 발기하고 1919년 음력 7월 「화한국국동맹격고문華韓救國同盟檄告文」을 발표했다. 광복단은 복벽주의 노선에서 공화제를 반대하고 대한제국의 복벽을 주장하였다. 광복단의 이러한 이념은 광복단이 ‘백산주국대한광복단’이라는 명칭으로 1920년 1월 발표한 「광복단비격문光復團飛檄文」건국기원4253년 1월에 잘 나타나 있다. 광복단은 “단지 국가를 광복하려는 것만이 아니기 때문에 국수國粹를 광복하고 또 강상綱常의 대륜大倫을 광복하고 그 국치國治를 유지하려는 것”이고 선언하고, ‘대한광복의 3대 종지宗旨’로서 ‘국가극복克復의 준비’, ‘군수보복君讐報復의 주의主意’, ‘외교광복의 성명聲明’를 제시했다.
광복단은 1920년 3월조로 발표한 「광복단격고문光復團檄告文」에서 “우리들은 천의天意와 인심에 순응하여 의사義士와 용군勇軍을 규합하여 대한독립의 공구公仇인 인도정의의 서적鼠賊인 동양평화의 악마인 일본을 성토聲討하려고 한다”며 이를 위해 광복단내에 군무부軍務部를 조직하였음을 알렸다. 광복단이 1920년 3월에 이르러 본격적인 항일군사활동에 나설 것임을 선언한 것이라 하겠다. 1920년 8월 현재, 광복단은 왕청현 춘명향 대감자大坎子에 근거를 두었는데 단원의 대다수는 공교회교도구학파舊學派였다. 이념은 복벽주의로서 임시정부 계통의 국민회의 공화주의와는 이념을 달리했다. 광복단의 세력은 왕청현의 서부, 연길현의 중부 일부에 한정되어 다른 단체에 비하여 세력이 약하나 1920년 여름에 이르러 세력확대를 하였다. 간부들은 단장 이범윤, 대변代辨 김성륜, 고문 김성극, 총무 홍두극, 참모 황운서黃云瑞였다. 대원수는 약 300명, 군총 150정, 권총 200정을 보유하였다. 총무 홍두극과 참모 황운서는 무기구입을 위해 부하 100을 인솔하고 노령으로 갔다고 한다. 일본첩보자료인 「간도방면에 있는 불령선인단의 조직과 역원조사서」1921년 4월조에는, 대한광복단이 이범윤을 단장으로 하고 노령에 그 본부가 있다고 하나, 이름뿐이고 북간도지역에서는 대변代辨 전성륜이 실질적으로 통솔하고 있다고 했다. 註115) 1920년 7월초 대한광복단의 병력은 단원 약 200명, 군총 150정, 권총 약 30정이었으나, 註116) 한달 여후인 1920년 8월 당시에는 무장력이 늘어나 광복단의 병력은 단원수 200명, 군총 400정, 탄약 1만 1천발, 권총 30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광복단의 간부들은 단장 이범윤, 중부 대변 김성륜, 고문 김성극, 김동우金東宇, 총무 김일구金日鳩, 서무부장 주국언朱國彦, 재무부장 홍두극, 통신부장 이기준李基俊, 모연대장 김헌金憲·오희吳喜, 참모 김백우金伯禹 외 6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재무부장 홍두극, 모연대장 오희 등이 1920년 10월 일본군의 간도침략시에 일본측에 귀순하였다.
1) 야단
야단野團은 청림교靑林敎 단체로 1919년 9월경 조직되었다. 총부는 연길현 상의향尙義鄕 대교동大轎洞에 두었고, 산하에 총무와 군부軍部를 두었다. 단장은 임창세林昌世, 林大聖 또는 林甲石로 군정서에 통합된 후 군정서 고문이 되었으나, 일본측에 귀순하고 말았다. 총무는 김광숙金光淑, 수뇌간부는 지창우池昌宇 등이었다. 註118) 야단 총재 임창세는 북간도 6개 단체인 국민회·군정서·신민단·군무도독부·광복단·의군단 대표자회 하루 전인 1920년 5월 2일자로 「선유宣諭」를 발표하여 대한군정서와의 흡수통합을 선언하였다.
2) 대한학생광복단
대한학생광복단大韓學生光復團의 조직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대한학생광복단장’ 천임백千任百과 군사 참모 김천풍金天風 제1참 지대장持隊長의 명의로 학생광복단이 향후 “두만·압록을 뛰어 건너 조국을 광복”하기 위한 혈전대를 조직할 계획이라면서 흥신동興新洞의 김주약金周若에게 금 3천원의 의연을 촉구하고 “위반즉포살違反卽砲殺”라고 경고하였다. 1920년 8월 현재, 학생광복단은 연길현 춘양향春陽鄕 합마당蛤蟆塘에 본부를 두었는데, 단장은 오인백吳仁伯, 총무 김남철金南徹, 참모 김운종金雲鍾, 나익羅益, 단원 박창준朴昌俊이었다.
3) 간도청년회와 청년단
간도청년회間島靑年會는 서성권徐成權·김정金精·조경환趙擎煥 등 22명이 1919년 11월 1일자로 「간도청년회비격문間島靑年會飛檄文」를 발표하며 발기한 단체이다. 이들은 “내외 각처의 청년은 대성질호大聲叱呼하고 미주·상해·아령 등 각지에 교거僑居하는 청년은 무력을 잡고 그 단체적 동작은 어느 것이나 국가를 위하여 헌신적 정신으로 나온 것으로 그 주의는 파괴와 건설에 있다”며, “본회는 이에 간도 수만의 청년들의 정신과 의지를 통일하여 그 비상한 수단과 위대한 능력을 시험”하며, “공편한 주의와 충성한 행사를 실습하려고 하며, 파괴적 상식과 건설적 기능을 수련하고 태만한 성벽과 고식적 행위를 타파하려”고 한다고 선언했다. 서성권을 비롯하여, 김정·조경환·이광李光 등은 대한국민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이고 특히 이후 15만원사건의 주동자가 되는 임국정林國禎, 신한촌에서 15만원사건에 연루되어 함께 체포된 나일羅一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청년단 단원들은 주로 기독교도들로서, 임시정부-대한국민회와 연통제-청년회로 연결되어 임시정부의 정책과 노선에 충실한 단체로 일본첩보보고에서 “그 범위 심히 광범하다”고 평할 정도로 활동이 활발했다. 간도청년회는 연길현 용지향勇智鄕에 두었는데, 간부로는 단장에 서성권·김일金鎰·박기만朴基萬, 부단장에 강백규姜百奎·한학열韓學烈, 총무 김정, 서기 나일·강승범姜承範, 통신부장 최용섭崔龍燮 등이었다. 단원수는 1921년 4월 현재 약 70명이었다. 부단장 한학열은 일본당국에 귀순했다. 1921년 2월이후 안정근 등의 알선으로 행동을 개시하여 공산주의를 선전하였다. 간도청년회는 김약연金躍淵·김내범 등 기독교지도자들의 후원을 받았다.
4) 대한공의단
대한공의단大韓公義團은 1920년 1월 왕청현 춘명향春明鄕 이차자구에서 창립되었는데, 3월 대한독군부에 병합되었다가, 5월에 다시 분리되어 활동을 계속했다. 7월에는 의군단산포대에 병합되었다가 이후 10월에 여러 독립단체가 합동하여 조직한 대한총군부大韓總軍府에 합동하였다. 공의단의 단장은 엄준嚴俊 초대, 심형의沈亨義 제2대, 총무 심용운沈龍雲이었다. 1920년 8월 현재 병력 50명, 군청 40정, 탄약 1,600발, 권총 10정 보유하고 있었다. 1920년 10월 일본군의 공격시 단장 심형섭, 총무 김용운이 일본측에 귀순하였다.
5) 구국단
1920년 2월 군무부軍務府이란 명칭으로 결성된 독립군단체로 5월에 구국단救國團으로 개칭하고 간부들을 선출하였다. 본부를 북간도 왕청현 춘융향春融鄕 소백초구小百草溝에 두었다. 1920년 7월 현재 구국단 단원은 60명이었고, 군총 42정, 권총 1정, 탄약 3천발을 보유했다. 간부들은 단장 한진韓振 부단장 김동훈金東勛, 통신부장 장두혁張斗赫, 모연대장 장운섭張雲燮, 사령관 김일경金日京, 부사령관 고성환高聖煥, 참의장 현병순玄柄順, 대대장 장남섭張南燮 등이었다. 구국단은 세력이 아주 미약하여 1920년 10월 일본군의 공격시에 거의 자연소멸되고 말았다. 단장 한진을 제외한 거의 모든 간부 들이 일본측에 귀순하였다.
11. 훈춘대한국민회와 대한국민의회 훈춘지회
훈춘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는 훈춘에서 독립시위운동이 일어난 후인 1919년 3월 31일에 조직되었다. 본부의 소재지는 훈춘현 동문東門안의 박봉식朴鳳植집이었고, 간부진은 회장 이명순李明淳, 부회장 박관일朴貫一, 공교도 대표, 서기 여남섭呂南燮·오종범吳宗範이었다. 회원수는 3,000명이었고 훈춘현의 회원수는 200명에 달했다. 註126) 이후 노령의 대한국민의회 훈춘지회의 역할을 담당하였고, 훈춘 대한국민회로 알려지기도 했다. 국민의회 훈춘 지부는 1920년 10월경 훈춘한민회로 개칭된 것으로 보인다. 훈춘현 지역의 이동휘계통 기독교도들의 조직이었던 기독교우회基督敎友會의 기반위에서 훈춘에서 유력한 항일한인단체로 결성되었다. 1919년 6월 당시 훈춘대한국민회 본부는 동구東溝 남별리南別里에 있었고 육도구六道溝·동구·훈춘평야 및 황구荒溝에 근거를 두었다. 註128) 3·1운동 얼마후인 1919년 5~6월경의 조직을 보면, 회장 이명순李明淳, 부회장 박관일朴貫一, 공교회 대표자, 총무 서윤묵徐允默, 재무 오현경또는 吳玄宗, 서기 여남섭呂南燮, 서기 오종환吳宗煥, 통신반장지방연략계장 나정화羅正化, 교제과장교섭계 황병길黃炳吉이었다. 거사시에 단체의 지휘는 황병길에게 일임하는 것으로 하였다. 대한국민의회장 문창범文昌範과 대한국민의회 훈춘지회장 이명순李明淳의 명의로 1919년 8월 3일자 「경고문」파리강화대사 김규식와 국제연맹 참가 대사의 의 여비 의연 요청과 신인방 작성과 의연금 청구장1919년 8월 16일자를 배포한 것으로 보아, 대한국민의회 훈춘지회는 늦어도 대한국민의회가 해산선언을 하는 1919년 8월 31일까지 그 명의를 갖고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註130) 대한국민의회의 해산 직후인 1919년 9월 대한국민의회 훈춘지회는 훈춘한민회琿春韓民會로 명칭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훈춘한민회의 활동목표는 1920년 2월 28일자로 훈춘한민회 경호부장 황병길 명의로 배포된 「훈춘한민회 훈령 제1호」에 명시된 바, 독립전쟁을 위한 무장활동이었다. 즉 훈춘한민회는 “대한민국 2년은 즉 대한 독립 전쟁의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본회는 이 긴박한 시국에 당하여 제1 정부봉대政府奉戴, 제2 군기의 구입 수송, 제3 폭탄의 제조, 제4 군인의 비용, 제5 군수품의 공급 등을 오로지 준비하여 광복 사업에 노력할 것으로 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1920년 8월말 당시, 훈춘한민회는 훈춘현 사도구四道溝 소황구小黃溝에 본부를 두었는데, 대한국민회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활동하였다. 훈춘한민회는 회장과 부회장 밑에 사령관·군무부·군기부·경호부·재무부·통신부·교육부 등의 부서를 두었다. 1920년 8월말 당시 한민회의 간부는 회장 이경호李京鎬, 1919.10-1920.6, 윤동철尹東喆, 1920.6 이후, 부회장 장학년張學年, 사령관 최덕준崔德俊, 군무부장 최경천崔慶天, 군무부 대대장 최성삼崔成三 등이었다. 특히 훈춘한민회는 1920년 6월초의 봉오동전투시에는 후원을 위해 200여 명의 무장부대를 파견한 바 있다. 1920년 8월 현재 훈춘한민회의 병력은 부대원 약 250명, 군총 300정, 기관총 3문을 보유했다. 일본의 간도침공 당시 회장 이경호·윤동철, 사령관 최덕준 등이 일본측에 귀 순했다. 훈춘한민회 군무부軍務部에서는 6월 22일 군대 규율의 취체와 군사탐정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헌병대를 신설하였고 독립군병사에서 소질 우수한 자 1백명을 선발하기로 했다. 헌병대의 간부진은 헌병사령관 채덕승蔡德勝, 군무부 중대장, 헌병대장 김인화金仁化, 명동학교 출신, 헌병조련관 백규남白奎南, 명동학교 출신, 군무부 중대장 나정화羅正和이었다.
12. 맹호대
훈춘지역에 기반을 둔 결사대로서 황병길이 지도자였던 급진적 단체였다. 맹호단猛虎隊의 대원들은 약 4개월 군사훈련을 받은 후 국내 청진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등 요지에 파견되어 첩보활동을 벌였다. 1919년 11월 20일에 맹호단에 가입한 최득현崔得賢은 황병길의 명령에 따라 블라디보스토크에 일본군대의 소재와 병정수및 한인청년단의 상황 등을 탐지하여 황병길에게 보고하였다. 최득현은 이어 청진부근의 군대소재지·병력·주요지점의 교통상황과 중요지점의 약도를 제작의 임무를 부여받았다가 체포되었다. 맹호단은 청진·회령·용정촌·국자가·훈춘·회령 등지에 연락원을 배치하고 있었다. 일본측 첩보보고에는 1920년 1920년 5월경 북간도의 독립군단들이 총기구입의 충당한 군자금 가운데 간도방면에서 모집하여온 금액은 총50만원이었다고 한다. 이를 단체별로 보면, 국민회 17만원, 군정서 13만원, 군도독부 6만원, 의군단 7만원, 신민단 3만원, 광복단 4만원이었다고 한다. 일본관헌들은 북간도의 독립운동 단체를 평가하여 대한국민회를 “불령선인 단체중 가장 규모가 크고” 대한군정서를 “가장 과격하다”고 평가하였으며, 최진동 부대는 “조선국내에 대하여 가장 빈번하게 무력침력武力侵擊을 감행한” 부대라고 하였다. 일본관헌들이 작성한 첩보자료에 따르면, 1920년 8월 20일 전후의 북간도 독립군단체들의 무장력을 보면, 군총 약 3,300정, 탄약 약19만5천300발, 권총 약 730정, 수류탄 약 1,550개, 기관총 9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군총은 러시아식 5연발과 단발총이 대부분이고 미국식·독일식 또는 일본의 30년식과 38년식 보병총 등이었는데, 이들 독립군단체의 무기는 러시아 ‘과격파’볼쉐비키세력, 혁명파로부터 입수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첩보원들은 임시정부 파견원 안정근, 국무총리 이동휘와 김영학 등에 주목하였다.독립군이 3·1운동 이후 만주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할 정도로 성장한 것은 대단한 항일민족운동의 성과였다. 경신참변후인 1920년 말 대한군정서 총재 서일이 발표한 「군정서격고문軍政署檄告文」에 잘 나타나 있다. 서일은 “아한我韓이 독립을 선언함으로 내외가 동성同聲하야 위로 임시정부가 설립하고 아래로 민군民軍 각단各團이 병기竝起하야 일면으 론 재정을 구취鳩聚하고 무기를 구입하며 일면으로난 사관을 양성하고 군인을 훈련하야 대자大者난 수천에 이달已達하고 소자小者도 수백에 불하不下라. 적수공권으로 분기하야 전후 무릇 이재二載의 간間에 이만한 실력을 거유據有함은 참 우리 간고민족艱苦民族의 심진력갈처心盡力竭處라 아니치 못할지라”라고 자평했던 것이다.일본측 역시 3·1운동 이후 한인무장세력이 북간도지역에 기반을 구축하게 된 데 대하여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첫째로 이 지역이 지리적 역사적 관계가 가장 한인 독립군들의 활동에 유리한 것이다. 둘째로는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이동휘가 “일찌기 관동關東-만주지방에서 활동한 바가 있어서 내외의 사정에 정통하였기 때문에 그 무력적 세력을 이 방면에 집결한”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