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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0월 학교 전시장에서 77학번 모원종과 이창호.
모원종은 학도호국단 사진과 대표이기도 했다.
와이셔츠의 깃이 지금의 두배는 되는 것 같다.
또한 '빡빡머리' '스포츠머리'로 대변되던 중고딩 시절에 대한 보상심리로 장발단속에 걸리지 않을 범위 내에서
최대한 머리를 기르고 다녔다. 머리카락이 귀를 덮는 것은 기본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1978년 봄 인천 송도유원지에서 촬영.
이창호가 인천 도화동, 이문근이 인천 부개동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78학번들이 인천에 내려오게 되었다.
사람만 보지 말고 배경에 있는 차를 한번 보시라. 이제는 시대극에서나 볼 수 있는 차량이다.
1978년 4월 하동 십리벚꽃길.
신영회원 중 일부가 따로 뭉쳐서 벚꽃사진전을 열려고 진해와 하동 등지에서 촬영했다.
화개에서 쌍계사에 이르는 십리벚꽃길은 당시에 비포장 흙길이었다. 차 한대가 지나가면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쓰지만
그래도 운치는 있었다.
1978년 4월 진해에서 촬영.
오른쪽 하단 이안 리플렉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이 이문근이다.
이문근은 본래 77학번인데 집안 사정으로 휴학을 했다가 78학번들과 학교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1978년 여름 망상해수욕장으로 가던 중간에 촬영.
맨 뒷줄 왼쪽에 앉아있는 여학생이 78학번 인남선인데, 언니는 76학번 인영선이고 둘 다 신영회였다.
1978년 여름.
아랫쪽에 기타를 든 사람이 77학번 이영오 인데, 지나놓고 보면 이 동문이 들어간 신영회 사진이 무척 적다.
이창호가 목에 걸고 있는 카메라는 Canon FT, 당시 Nikon 사용자들 중에서 부르쥬아들은 Nikon F2를, 불우이웃들은
Nikkomat 를 사용했다. 여학생들은 body가 작고 가벼운 Asahi Pentax를 선호했다.
1978년 여름 망상해수욕장.
앉아있는 사람이 77 이창호이고, 뒷줄 왼쪽부터 78 서광호, 77 박태균, 78 서형용이다.
당시에는 교련복 바지를 자주 입고 다녔다. 옷을 살만한 여유도 별로 없었거니와 막 입기는 교련복이 편했다.
1978년 여름 망상해수욕장.
왼쪽이 78 서광호, 오른쪽이 77 이창호다.
둘 다 선글라스를 끼고 폼을 잡았는데, 서광호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쌍절곤이다.
1978년 7월 백양사.
담양으로 대나무 촬영을 가는 길에 들렀다. 77학번과 78학번 신영회원이 가장 많이 모인 단체사진이 아닐까 싶다.
이창호는 내 사진만 열심히 찍으면 됐는데 박중권의 경우는 달랐다. 박중권은 신영회의 행정 일 특히 섭외 쪽을
맡아서 동분서주 했다. 촬영할 마을에 미리 가서 동네 어르신들의 이해를 구하고 마음을 사로잡는 일 부터, 숙소에서
여학생들이 자는 방 근처에는 일반 손님을 받지 못하도록 조치하는 등 박중권은 영화 보디가드의 캐빈 코스트너처럼
든든하고 멋진 존재였다. 섭외할 때는 넉살 좋게 동네 아주머니들을 사로잡고 여학생들에게는 이처럼 자상한 마음씨를
가진 박중권이었지만, 젊은 처녀 한 명 앞에서는 영~~ 숙맥이라 장가를 늦게 갔다.
이 점에 있어서는 이창호도 별반 다르지 않다.
김수희가 부른 노래 '애모'의 가사처럼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였다. ㅋㅋㅋ
1978년 8월 하동.
77학번 이창호와 박태균, 그리고 78학번 이희상 이렇게 셋이서 방학을 활용한 촬영 여행을 갔다.
1978년 8월 하동에서 77학번 이창호와 박태균.
하동읍에서 화개까지 걸으며 촬영을 했다.
하동읍에서는 봉변도 겪었다.
하동 버스터미널에서 내려서 걸어 가다가 우리 셋(이창호,박태균,이희상)이 파출소로 연행되었다.
"무엇 하는 사람들이냐?" "무슨 사진을 찍으러 다닌 다는 것이냐?"
"이 카메라는 얼마짜리냐?" "학생이라면서 카메라를 두 대씩 들고 다니는 것이 수상하다"
"아버지 직업이 뭐냐?" "아버지 월급이 얼만데 이렇게 비싼 카메라를 사줄 수 있는 것이냐?"
등등 한 시간이 훨씬 넘게 닥달을 해댔다.
정말 기분이 나빴던 것은 조사를 하면서 미심쩍은 부분에 관해 어떤 소신을 가지고 추가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나쁜 놈으로 낙인을 찍고 거기에 끼워 맞춘 질문을 계속 해대는 것이었다.
가관이었던 것은 "순진한 시골 사람들을 감언이설로 꼬셔 카메라를 비싼 값에 팔려는 것이 아니냐?"
는 말과 조사하면 다 나오니 빨리 불라는 말이었다.
그 들을 보면서 일제시대의 순사가 생각날 쯤 홍현식(77학번)이 하동 출신이란게 생각이 났다.
홍현식의 집으로 전화가 연결되자 마침 방학이라 집에 내려와 있던 홍현식이 번개 같이 뛰어왔다.
"얘들 제 친구들인데요" 이 한마디로 상황은 종료됐다.
홍현식의 아버지는 하동 지역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지역 유지였던 것이다.
경찰의 입장에서는 자기들 한 달 월급보다도 비싼 카메라를 어린 녀석들이 들고 다닌 것이
아니꼬왔고, 자기는 더운 날 고생하고 있는데 팔자 좋게 여행을 다닌 다는 것이 열 받았던 것이다.
파출소를 나오면서도 기분이 나빴던 것은 우리를 두시간 가까이 붙잡아 놓고 온갖 죄인 취급을 하다가 풀어
주면서 어떤 미안함도 가지지 않던 그 들의 표정이었다.
이런 인간들 때문에 열심히 일 하는 경찰관들이 욕을 먹는다!
1978년 8월 쌍계사 앞 여관 마당.
촬영을 마치고 여관에 들어오니 열대여섯살쯤 먹은 동네 아이들이 권투를 하고 있었다.
살살 할테니 나 좀 끼워달라 했더니 안된다고 한다. 그래서 단 한번이라도 내가 세게 휘두른다면 즉시 그만두어도
좋다고 했더니 결국 끼워줬다. 그 바람에 몸을 좀 풀었다.
1978.11.17~11.21까지 출판문화회관에서 열린 77학번과 78학번의 대나무 사진전.
테이프 컷팅을 하고 있는 사람은 왼쪽부터 학장직무대리를 맡았던 이상직 선생님, 지도교수 였던 김규호 교수님, 그리고
77학번 신영회장인 김훈이다. 김규호 교수님은 전공인 화학은 물론이고 기계적 매카니즘까지 박식한 분이셨다.
칼라 네가티브 필름을 흑백 현상하는 바람에 울상을 짓는 학생에게 약품을 조제해주어 필름을 살려낸 일, 대나무 사진전
암실 작업 때 fog 방지액을 조제해 주셔서 인화지를 조금이라도 아낄 수 있었던 일 등 많은 일화가 있다.
김규호 교수님은 이때 이미 "앞으로 필름 없이 사진 찍는 세상이 올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는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필름 없이 디지털 사진을 찍고 있다.
나는 육명심 교수님과의 일화가 많은데, 77학번 박중권이 김규호 교수님과 관련된 비하인드 스토리를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1978년 11월 대나무 사진전 전시장.
오른쪽 78학번 손현숙이 입에 물고 있는 것은 전설의 '모나미 153' 볼펜이다.
볼펜 때문이었을까? 나중에 시를 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 같다.
앞줄 왼쪽부터 77 김혜수, 78 이수용, 78 손현숙, 78 강정숙, 78 이형숙, 뒷줄 왼쪽부터 78 이희상, 77 박중권, 78 김재민,
77 김훈, 78 이종원, 77 이창호, 78 서형용.
78학번 서형용은 80년대 후반에 보안사령부에서 비디오 촬영 담당 군무원으로 일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이후 행적이
묘연하다. 멀리 남미 쪽으로 갔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정확한 것은 모른다. 와이프가 무척 미인이었다.
1979년 9월에 있었던 '이창호 사진전' 팸플릿.
한정식 교수님이 사용하셨던 일제 '이글' 인화지의 톤을 보고 매료됐던 나는, 외국에 드나드는 사람을 통해서라도 일제나 코닥 인화지를 구해서 사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국산 '아폴로' 인화지로 작업을 했다.
당시에는 국산품 보호라는 정책 때문에 외제 흑백 인화지가 수입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암실작업은 76 최광호 동문과 78 이희상 동문이 번갈아 도와주었다.
78 이희상은 현재 흑백 암실작업에 관한한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사람인데, 79년 당시에도 남 다른 면을 보였다.
99.9%의 사람이 암실에서 확대기 초점을 눈대중으로 맞추던 때였는데, 이희상은 '포커스 스코프'란 기기를 들고
나타났다. '포커스 스코프'는 꼭 현미경 처럼 생겼는데 아주 정밀하게 초점을 맞출 수 있는 기기였다.
인화 사이즈가 크지 않다면 별 차이를 못 느끼겠지만, 대형 인화 사이즈에서는 미세한 초점의 차이가 커다란 샤프니스의
차이를 보일 것이다. 이를테면 이희상은 대한민국 0.1%였던 것이다.
나도 흑백사진 고유의 톤을 충실히 표현하려고 일본의 서적이나 잡지 그리고 코닥에서 발간한 각종 데이터 북을
확보하며 나름대로의 자신감을 가졌는데, 이희상의 '포커스 스코프' 건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장하다 이희상! 훌륭하다 이희상!
1979년 9월 이창호 사진전.
왼쪽부터 한정식 교수, 일본대 사진학과 교수, 육명심 교수. 77 이창호다.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전시장 내 탁자에 재털이가 놓여져 있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예전에는 지금보다 액자를 다소 높게 걸었다. 그 후 액자 높이가 아주 조금씩 내려가더니
지금은 액자를 다소 내려다 보는 위치까지 조정되었다.
첫댓글 정말 추억이 아련한 사진들이 있으시네여 선배님 대단 하십니다. 존경합니다.
형님! 꽃미남이셨습니다. 영훈이랑 많이 닮아 보이는데요..ㅎ
77 홍현식 선배님은 KBS 보도국 촬영기자로 재직중 이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78 서형용은 파라과이로 이민 갔습니다.
78 강정숙님은 미국 텍사스주 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진을 보는데 왜 눈물이 나지?
창호선배님 대단하십니다 ^^
두번째 사진의 차량은 부리샤에요 재미니에요? 오랜만에 보니 헷갈리네...하여간 멋져요..
가까운 차 : 브리사 (기아자동차), 먼쪽 : 포니 (현대).... 재미니는 신영회에 있다.
길호야 재민이에게 물어봐라! ㅋㅋㅋ
두번째 차는 포니같은데..첫번째 차가 헷갈리네요..
창호선배님!!완전 꽃미남!!!훈남!!!!학!!학!!!
정말 ...사진으로보는 신영회 다큐네요 멋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