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보편성과
특수성 (13) |
지나온 세월동안 진리의 보편성과 특수성의 인식을 위한 세미나들이 과거에 종종
있었다. 나도 거기에 참석해 본 적이 있었다. 보편성의 실재를 강력히 주장하는 분들은 보편성이 문화적 선진국들에서 전파된 것처럼 여기 고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기에 반대의견을 개진하면, 특수성을 보호막처럼 고집하는 국수주의자인 양 취급하려는 사고관행을 보았다. 그 경우에 내가
가장 자주 언급한 철학사상이 율곡의 이통기국론(理通氣局論=보편적인 理는 특수적인 氣의 제약과 같이 실존함)이었다. 나는 유가적인 율곡의 저 말이
진리를 하나로 회통시키는 본질사상과 다양한 사실들을 살리 려는 실존사상을 아울러 융합시킨 이사상자(理事相資=진리와 사실이 서로 의지함)나
이사무애(理事無碍=진리와 사실이 서로 장애없이 교환됨)라는 불가적인 화엄사상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늘 생각해 왔었다. 나는 사상의 보편성을 늘
선진외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사고방식을 관행으로 여기는 한, 우리가 세계사에 우뚝 솟은 좋은 나라의 성공사례를 역사에 결코 남길 수 없고, 늘
아류국의 후진성을 면치 못하리라 생각한다. 옛날에 보편성이 중국에 있다고 여기는 것이나, 지금 그것이 서양 선진국에 있다고 여기는 것이나 전혀
다르지 않다. 중국 본토와의 교류가 터진 이후 별로 사상적으로 대단찮은 현대 중국의 책들이 번역되어 인기물이 되고, 그 주인공들을 불러 엄청나게
후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옛 사대주의의 업보를 언제 벗게될지 절망을 느낀 적이
있었다. |
율곡의 ‘이통기국론’이나 화엄의 ‘이사무애론’이나 다 보편적인 진리는
구체적으로 실존하는 ‘여기와 지금’의 특수한 사실이나 기질의 제약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우리 조선을 늘 동국이라 칭하는 관행을 비웃으면서,
조선입장에서 보면 조선이 중국이고 중국은 서국이라는 말을 개진했다.
이런 생각을 국수주의로 매도해서는 안된다.
국수주의는 자존망대의 배타적인 사고관행이다. 이것은 황당한 코미디다.
모든
문화는 잡종의 만남이다.
문화적 순종을 찬양하는 일은 근친교배처럼 문화적 허약체질을 만들고 시들어 죽을 뿐이다.
그런데 그 잡종의 만남에 어떤
중심이 따로 없고, 다양한 기국(氣局)의 사실들이 곧 중심이 될 뿐이다.
보편성의 중심은 사실상 어디에도 없다. 모든 기국의 사실에 보편성이
이미 녹아 있다는 것이다.
보편성은 실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냥 인간의 본성이 좋아하는 기호일 뿐이다.
그런데 그 본성이 사람들에게 개성과
함께 동거해 있다.
개성과 본성은 이원적인 것이 아니고,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하나도 둘도 아님)나
부잡불리(不雜不離=섞인 것도 분리된 것도
아님)의 방식으로 실존할 뿐이다.
원효나 율곡이 다 이 점을 아주 강조했다. 이것을 우리는 진지하게 사유해야 한다.
김치나 비빔밥이나 된장찌개는 다 한국음식이다. 이 음식이 동시에 국제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맛있는 한국음식을 개발하는 길 이외에 우리가
음식문화에서 어떻게 국제적인 경쟁력을 얻을 것인가?
누구나 다 외국음식들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좋아하는 보편성이 그들의 특수성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전통음식을 수구적으로만 지키려는 순수주의적 자세는 경쟁력에서 이기지 못한다.
왜냐하면 기(氣)의 특수성 속에 이(理)의
보편성이 이미 함축되어 있다 하여도, 그 기의 특수성도 역시 고착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습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습관은 어떤 일정한 경향성을
지니고 있지만 불변적인 것은 아니다.
혀의 미각은 인간의 오감의 느낌 가운데 가장 변화에 둔감하다. 그러나 그것도 불변적인 것은 아니다.
기국의
제약성은 기국의 독자적인 폐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미각의 기가 다른 나라의 미각의 기와의 차이의 변별성에 불과하다.
문화는 본디
잡종의 혼융이므로 순수한 것의 독존은 성립안된다.
한국인의 미각도 다른 나라의 것과의 교류관계 속에서 섞이는 혼융이다.
그런 한에서 관계의 차이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상관적 관계의 함수가 다르면, 자기의 맛도 조금씩 달라진다.
그러므로 기국은 자기문화의 어떤 습관화된 기호를
말하지만, 그 기호가 다른 문화와 맺는 상관관계의 함수에 따라
늘 변화를 빚는다. 기국도 시대의 인연에 따라 변한다. 김치도 임란 이후에 고추가
들어와서 맵게 변했다 한다.
그러나 기국은 늘 우리가 살아가는 실존적 살(肉)이다. 이 살을 떠나서 한국인이 성립하지 않는다.
살의 의미를 철학에 처음으로 도입한 이가 20세기 프랑스의 현상학자 메를로-퐁티다.
살을 통하여 내가 느끼고 생각한다.
사실상 살이란
객관적 도구를 통하여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이 느끼고 생각한다고 말해야
하리라. 왜냐하면 나의 느낌과 생각이 살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고, 살과 함께 생활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살은 주관적인 것인가? 그것은 주관적인 것도 객관적인 것도 아닌 상호주관적인
공통성을 띠고 있다.
살은 물론 내 몸이지만, 그 몸의 영역이 고착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다. 내 몸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모든
인연이 다
살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만 살일 뿐만 아니라,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현상과 사건도 다 살로서 연장된다.
살은 생활세계의 분위기다. 그래서
우리는 생활세계의 분위기와 함께 느끼고 생각한다. 이것이 문화다.
우리는 우리의 문화가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는 속에서 함께 느끼고 생각하고
말한다.
그래서 기국으로서의 한국문화는 한국인을 낳고 자라게 하는 집단습관의 태반과 같다.
이 집단습관의 태반을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무의식의
공동업(共同業)이다.
모든 인간은 다 살로서 생활하고 실존한다. 살의 실존과 관념의 사상이 따로 놀지 않아야 살이 건강하고 행복을
노래한다. 살의 실존과 관념의
사상이 따로 헛도는 경우에, 살은 자신의 공동업이 인간본성의 본질에로 접근되는
해방과 행복의 길을 얻지 못하고 자신의 하고싶은 말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무의미로 천대받는다.
그것은 삼국시대의 무속신앙이 외래 관념사상의 권위에 밀려 천대받아 온 것과 유사하다 하겠다.
살의 실존은 무의식적
공동업의 생활인데, 그 생활이 보편적 의미로 향하여 접목되려는 욕망을 가진다.
그 욕망의 표현이 곧 각 문화권의 관념적 사상이다.
기국이라는
무의식의 공동업은 율곡의 생각처럼 내용을 담는 특수한 기질(氣質)이기도 하고, 또 발현하는 기운
(氣運)이기도 하다. 기질과 기운이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같은 의미를 달리 전하는 것이다.
몸은 제약의 기질이지만, 동시에 그 기질을 통하여 우리가 기운을 낸다.
기질이 머금고
있는 특수한 기운이 보편적 의미의 옷을 입고 솟아야 우리의 마음이 유의미해진다.
보편적 의미의 옷이 바로 율곡이 말한 이통(理通)이겠다. 그
의미의 보편적 옷이 다른 곳에서 수입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 안에 이미 주어져 있는 인간의 본성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율곡의 이통기국론은
보편적 이(理)가 기국의 살밖에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살의 기질과 기운
속에 함께 동거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화엄학처럼
해석하면,개성의 사실 속에 진여의 진리가 함께 동거하고 있다는
것과 같다하겠다. 개성이 곧 진여인 것은 아니지만, 개성의 발현을 떠나서 진여의
꽃이 피는 것도 아니다.
이 말은 개성의 업(業) 속에 진여의 출현을 가로막는 장애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을 좀 더 확대하면, 한국인의 상호주관적 공동업의
살 속에 본성인 보편성의 출현을 방해하는 악업이 깃들어
있다는 것과 같다.
한국적 관념의 사상이 한국의 정신문화인데, 이 정신문화가 실존적 살의
분위기와 어긋나 헛돌지 않으려면,
실존의 살이 안고 있는 업장의 병을 고치려는 구원의 사상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관념의 사상이 살이 아파하는
병을 치유할 수 있게 되면, 그 살은 자신의 의미를 말하는 통로를 얻어 세상을 향하여
풍요하고 다양한 삶의 잔치에 높은 대우를 받으면서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마치 우리 음식이 자신의 기국을 통하여 세상이 다 좋아하는 세계적 음식으로 통하게 되는 것과 같겠다.
그러기 위하여 좋은
요리사의 창조가 선행되어야 한다.
살의 업은 장애이기도 하고, 동시에 물결이나 나무결과 같은 결이기도 하다. 장애와 결의 차이가 객관적으로 실재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활용에 따라 구분된다. 즉 마음의 활용에 따라 우리를 방해하던 그 업이 오히려 우리를
생기나게 하는 결로 되살아난다.
그러므로 한국의 정신문화는
우리의 공통적인 마음을 잘 활용하는 법을 익히는 이치와 다르지 않겠다.
그렇게 되면 우리 속에 깃든 특수성이 본성의 보편성과 접목하여 각자가
자기의 타고난 결대로 꽃을 피워 이타행을
하며 즐거워하는 찬란한 정신문화의 금물결을 세상에 반짝이게 하리라.
보편성은 밖에서 수입해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본성인데, 이것이 특수성과 함께 살아나는 길을 창조
해야 한다.
그러면 왜 외국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외국을 공부해야 한국의 병과 결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를 알기 위해서 자기를 떠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자기는 타자와의 인연에서 생기지, 홀로 독생(獨生)하는 것이
아니다. 보편성이 선진국에 있는 것이 아니듯, 특수성도 자기 것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독일에서만 나오고, 베르그송도 프랑스에서만 생긴다. 듀이는 미국에서만 탄생되며, 도스토예
프스키는 러시아적
신비를 풍긴다.
왜 그럴까? 이 물음에 이통기국의 비밀이 있겠다. 성철스님, 청화스님, 숭산스님 등은 한국이 낳은 자랑스러운 고승
들이다. 이
고승들의 실존을 한국문화의 이념형(Ideal type=사회문화의 특수성을 인식하기 위하여 경험적 현상들을
개념적 준거의 틀로 유형화하는 막스
베버의 사회학이론)으로 삼을 수 있을까?
원효의
화쟁사상 (14) |
7세기 신라의 원효대사(元曉大師)를 모르는 사람이 없겠다. 그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화쟁(和諍)사상이겠다. 12세기에 들어와서 고려 숙종은 원효대사를 기려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를 세우도록 왕명을 내렸다고 한다. 원효의
사상을 이미 고려시대부터 화쟁으로 대변하였음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원효의 화쟁사상은 많은 이들이 말하는 만큼 그 사상의 진수가
그렇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원효의 사유에는 대중적으로 쉽게 접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기 때문이리라. 원효의 화쟁은 불법을 설명하는
기본 사유의 방식이지만, 이 사유가 우주의 필연적 법칙을 일깨워주는 가르침에 다름 아니므로, 결국 화쟁적 사유는 우주의 필연적 법칙을 말하는
방식을 뜻한다. ‘금강경’(17장)에 불법이 우주의 사실적 법칙이라고 암시되어 있다. 단적으로 우주의 필연성은 공(空)과 색(色)의 두 가지
계기의 실이 서로 새끼꼬기나 천짜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화쟁사상의 기본이다. 불교를 상징하는 卍(만)자가 바로 저 새끼꼬기나 천짜기의
법칙을 형상화한 것이리라. |
공은 눈에 안 보이는 진여의 진리요, 색은 눈에 보이는 세속의 진리다. 안 보이는 진리와 보이는 진리가 물론 서로
다르지만 또한 연계되어
있다.
눈에 보이는 색의 존재는 눈에 안 보이는 허공의 바탕에 의지하여 생긴 무늬에 불과하다.
만약에 허공이라는 배경이 없고 모든 공간이 다
색의 물질들로 빈틈없이 꽉 차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색의 물질들도
구분할 수 없으리라. 허공이 바탕이요, 물질은 무늬에 비유되므로 허공은 물질을
물질로 존재하게끔 해주는 근거
이고, 물질은 그 허공의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허공의 공과 물질의 색은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님)의 관계를 맺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허공과 같은 공을 어떻게 이해할까?
허공은 생사(生死)와 유무(有無)의 모든 변화무쌍한
순환을 다 초탈하고 있다. 무릇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죽게 되므로
오직 영원한 것은 불생불멸한 공밖에 없다.
바다를 공에 비유한다면, 바다에서
일어나는 모든 파도의 부침은 곧 생멸의 현상과 같다.
따라서 공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이중부정과 같다. 불생불멸은 또 비유비무(非有非無=유도 아니고 무도 아님)의
이중부정과 같다고
하겠다.‘금강삼매경론’에서 원효는 이 이중부정의 공 세계를 홀로 해맑은 초탈의 의미를 지닌
‘독정(獨淨)’이라고 명명했다.
현상적 존재의 생멸과
유무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 해탈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허공이나 바다가 만물의 부침에 의하여 조금도 영향을 입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만물의
부침을 가능케 해주는
근거다. 그래서 공은 불교에서 허무의 상징이 아니라, 고갈되지 않는 무한기(無限氣)의 상징이 된다.
공이 이중부정이라면,
색은 어떠한가? 색은 물질인데, 그 물질은 독존하지 않고 연기(緣起)의 법으로 존재한다.
연기의 법은 서로 다른 만물과의 상호 얽힘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무는 물과 햇볕과 땅과 바람과의 상호 연관성에 의거해서 존재한다. 이 연관성의 관계가 다르면, 다른 나무가
생긴다. 이것을
연생(緣生)이라 부른다.
이 연생의 관계를 최소한도로 생략하면, 이중긍정이 된다. 나무는 물과 햇볕, 또는 땅의 흙과 하늘의 바람과 각각
이중긍정의 존재양식을 얽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나무는 자기와 관계를 맺고 있는 타자인 물과 햇볕과 흙과 바람의
흔적을 이미 함축하고 있다.
색의 물질은 고착된 하나의 독립개체가 아니라, 여러 개의 인연으로 다양하게 얽힌
타자들과의 관련성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색의 물질을 차이의
상관성으로 읽는다.
나무는 물과 불(햇볕)과 흙과 바람이라는 차이의 상관성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연기법이다.
이 연기법의 존재방식을 현대 포스트 모더니즘의 철학에서 차연(差延=difference)이라 부른다.
차연은 차이(差-異)와 연기(延-期)
또는 연장(延-長)의 두 뜻을 합쳐서 줄인 말인데, 예컨대 나무는 물과 다르면서
(차이) 물의 힘이 거기에 시간적으로 약간 연기되어 작용하거나
공간적으로 연장되어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상징한다.
철학적 차연과 불교적 연기는 같은 뜻이다. 연기법은 이 세상 모든 만물의 존재방식이
서로 다양하게 차이 속에서
연계돼 있음을 가리킨다. 차이 속의 연계와 같은 존재방식은 허공처럼, 바다처럼 넓고 깊어야 가능하다.
한국의 식자들은
흔히 다양성의 문화를 당위로서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다양성의 문화가 연기법처럼 가능하기 위하여 마음과 문화가 깊어져야 한다.
깊지 않은
마음과 문화는 결코 다양한 존재방식을 사실적으로 수용하지 못한다. 화쟁사상도 깊어진 사유에서 가능
하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에서 이중긍정의 연기법을 담연(湛然=깊고 넉넉함)의 세계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다 아는 얄팍한 당위만 역설하지 말고,
깊고 넉넉한 문화를 일구기 위해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중부정인 공의 해탈이나 이중긍정인 색의 존재가 서로 다르지만 동시에 상관적으로
얽혀 있어서 새끼꼬기나
천짜기의 상관성을 맺고 있다.
공이 없으면 색의 존재도 성립되지 않는 것을 앞에서 설명했다. 또 색이 없다면 공도
인식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늘의 구름과 새들의 비상과 해와 달의 색으로 인하여 우리가 허공을 문득 지각하기 때문이다.
만물도 서로 다른 것과의
차연적(연기적) 관계로서 존재한다. 공사상은 2∼3세기경 인도의 나가르주나(한자명=龍樹)의
중관사상으로 대변되고, 색사상은 역시 3∼4세기경
인도의 마이트레야(한자명=彌勒)의 유식사상에서 개화된다.
원효의 화쟁사상은 이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불교적 쟁론을 통합시킨 사유라고 보겠다.
그러나 원효의 화쟁사상은 그 이상의 철학적 의미를 갖는다.
그의 화쟁사상은 이 우주의 법이 일원론도, 이원론도 아닌 이중성의 사실로 존재함을 인식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중성은 모든 사실의
근원적인 존재방식을 말하는 것으로서, 일원적으로 합일되는 것도 아니고 이원적으로 갈라
지는 것도 아닌 중도의 법으로서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고,
원효는 이를 또한 융이이불일(融二而不一=둘을 융합
하되 하나로 만들지 않음)이라 불렀다.
공과 색이 이미 그런 이중관계로 엮어져 있음을 우리가
앞에서 설명했다. 색의 존재방식도 역시 이중긍정의 방식
인데, 그것은 나무의 경우처럼 물과 불(햇볕)이 소 닭 쳐다보듯이 외면하는 것도 아니고,
서로 변증법적 투쟁에
의하여 하나로 합일하는 것도 아니다.
나무에서 물과 불이 차이를 유지하면서 서로 상관하고 있다. 화쟁사상은 이런 이중성의
존재방식을 말하기에 변증
법적 통일을 부정한다.
차이가 모순투쟁을 초래하지 않고, 차연과 같은 상관적 관계를 부른다. 이것이 화쟁사상이다.
이
화쟁사상은 노자의 도(道)와 유사하다. 선과 악이 다르지만 동시에 동거하고 있고, 약이 독과 다르지만 역시
동거하고 있다(3·4회 글). 노자는
명암의 이중적 동거양식을 밝음(明)에 염하듯(襲) 옷을 입히는 뜻으로서 습명(襲明)
이라 비유했다. 이런 이중성을 장자는 보광(光=빛을 보자기로
덮음)이라 불렀다.
이것은 다 흑백의 선명성 논리와 택일적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보지 말 것을 종용하는 사유다.
이 점에서 원효의 화쟁사상은 노장사상과 맥락을
같이 하며,20세기 서양의 해체주의적 철학자인 독일의 하이데거와
프랑스의 데리다의 차연적 세상읽기와 그 궤도를 같이 한다.
선명성을 좋아하는
택일의 논리는 이 세상의 필연적 사실의 법과 맞지 않고, 자아가 타자를 박살내고 자아의 동일
성만이 승리하기를 노리는 투사의 심리와 다르지 않다.
투사는 자기동일성의 승리를 쟁취하는 투쟁의 도사이나, 세상을 경영하는 지혜와 내용이 없다.
왜냐하면 세상의 경영은 배척의 투쟁에서가 아니라,
화쟁과 같은 다양성의 포괄과 그것을 포용하는 깊이에서 우러
나오기 때문이다.
화쟁사상은 투쟁사상이 아니다. 화쟁의 ‘화(和)’자는 불교의
卍(만)자처럼 동일성과 타자성이 서로 새끼꼬기하듯
만나고 갈라지기를 반복하는 그런 이치를 가리킨다. 거기에 이미 허공의 빈 곳이 사이에 끼어서
둘을 갈라놓고 또
하나로 합치게 하는 배경을 이룬다.
이것은 또 마음이 허공처럼 허심하여 소유론적 집착을 놓지 않으면, 화쟁의 사실을 결코
실천할 수 없음을 가리킨다.
마음이 이미 자기고집에 편파적으로 집착되어 있으면, 화쟁은 말로만 하고 실제로는 투쟁의 심리로 마음이 꽉 차
있다는
것을 뜻한다.
약간 어렵겠으나 원효의 화쟁사상을 말하는 한 구절을 ‘대승기신론소’에서 인용한다.
“동일함(一)은 동일하지 않음(非一)에 상응하므로 다름에
상관적이어서 다름과 같이 동거하며, 다름(異)은 다르지
않음(非異)에 상응하므로 동일함에 상관적이어서 동일함과 동거한다.”
오른쪽은 왼쪽과
다르지만 왼쪽이 없으면 자기도 존립하지 못하고, 반대로 왼쪽도 오른쪽과 다르지만 오른쪽이
없으면 자기도 성립하지 못한다.
화쟁사상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홀로 생기는 법이 없기에 반드시 어떤 일의 작용과 상대방의 반작용을 동시에
고려함이다.
이것이 이중긍정의 태도다. 이것과 저것은
서로 작용과 반작용의 상관관계를 지니므로 오로지 나는 100% 정당하고,
상대방은 100% 그르다는 생각으로서는 끝없는 투쟁의 연속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노장이 말하는 습명과 보광의 중도적 태도가 아니다. 중도는 어중간한 기회주의적 눈치보기나 단물만을
좇는 속물적 출세주의를 더구나
말하지 않는다. 이들은 사리사욕의 대명사다.
중도는 세상의 필연적 존재방식이 다 이중성의 공존으로 짜여져 있기에 단정적인 막말을 하지 않는 마음가짐에서
핀다. 우리는 세상일에 대하여
너무 흑백논리와 선악심리로 막말을 하고 단죄한다.
그런 풍토에선 같이 참회하고, 같이 손에 손잡고 강강수월래를 부르기가 어려워진다. 빨리 끓고
쉽게 식는 사회는
사유가 얄팍하다. 화쟁은 오직 사회가 깊어지기를 바라는 곳에서 자란다
소유에서
존재로 (15) |
지금까지 독자들은 이 연재를 통하여 소유와 존재라는 낱말을 여러 번 보았을
것이다. 이 두 낱말의 의미는 이 연재를 관통하는 핵심적 철학용어 중의 하나인데, 소유라는 개념은 쉽게 와닿지만, 존재라는 낱말은 다소 어려운
의미로 여겨졌을 것이다. 더구나 존재론적 사유라고 하면 더 아득해서 손에 쉽게 잡히지 않는 그런 말이겠다. 실제로 존재와 존재론적 사유는 쉽게
파악이 안 되는 그런 용어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존재의 의미를 살펴보자. |
우리는 인생이 있다는 것을 안다. 또 죽음이 있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내가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막상 인생과 죽음과 내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그것들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정의하기가 어려워진다.
돈과 명예와 권력과 지식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다 안다. 그런데 그것들을
내가 소유하려고 하며 또 소유할 수도 있다.
내가 그것들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것들을 남들에게 자랑삼아 으쓱대면서 제시하거나 전시할 것이다.
물론 제시나 전시하는 방법이 가지각색일 수 있다.
그런데 인생과 죽음과 나를 물으면, 나는 그것들을 남들에게 소유물로서 제시하거나 전시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나의 소유물일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소유는 인생의 존재를 딛고 서서, 그리고 나를 근거로 삼아서, 죽음의
이전에서만 가능하다. 죽음은 인생에서의
모든 소유의 한계를 뜻한다.
죽음의 너머로 인간은 이승의 어떤 것도 가져갈 수 없다.
모든 소유를 다
버리고 인간은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야 한다. 죽음은 소유의 무상함을 철저히 가르쳐 준다.
죽음은 존재하나 그 누구도 죽음을 소유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죽음은 소유의 탐욕을 철저히 고쳐줄 수 있는 존재의 약이기도 하다.
소유는
미술전시회처럼 전시가능한 것, 제시가능한 것을 일컫는다.
또 소유는 명사처럼 분명히 구획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구획짓기가 불가능한 모호한 것은
소유의 싸움을 일으킨다.
돈의 구획이 불분명하고, 권력과 명예가 선명하게 그어지지 않으면, 사람들 사이에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분쟁이
일어난다.
지식과 도덕도 소유의 영역에 속한다. 지식도 인간이 배워서 소유한 능력이고, 도덕도 사회생활에서 인간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공공(公共)의 원리가
되기를 사람들이 원한다.
이 말은 사회생활에서 사람들이 도덕을 공통으로 소유하여 그 힘이 지배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인생이나 나와
죽음 등은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이나 나는 소유를 가능케 하는 근거가 되고,
죽음은 소유를 불가능하게 하는 한계상황이다.
철학에서 이런 것을 존재라고 명명한다. 인생이나 내가 있기에 소유가 가능해진다.
인생과 내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소유하려고 그렇게 안간힘을 쓸
것인가? 그러나 인생과 나의 구획은 명확하지
않고 대단히 모호하다. 내 인생의 폭과 반경이 얼마나 될는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그리고 누구나
자의식을 갖고 있으나, 그 자아의 경계가 얼마인지 상상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자아는 넓게는 하늘의 허공만큼 광대할 수 있고, 작게는 바늘구멍만큼
미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존재는 구획불가능하고, 그 경계가 모호하다. 또 존재는 전시되거나 제시될 수 없다.
인생과 자아를 전시하거나 제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가 내 인생을 보여달라고 하면, 나는 비밀창고에서
물건을 꺼내는 것처럼 그것을 전시하거나 제시할 수 없으므로 그냥 있는 그대로
나의 인생을 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방편을 우리는 현시나 계시라고 부른다.
소유는 전시(展示)나 제시(提示)가 가능하지만, 존재는 오직
현시(現示)하거나 계시(啓示)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소유와 존재의 두 번째 차이다. 모든 소유는 대상화가 가능하다.
대상화가 가능하다는 것은
객관화가 가능하다는 것과 같다. 대상화가 가능하기에 내가 그것을 취득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 빼앗길 수 있다.
그러나 존재는 그런 대상화가
불가능하다. 인생과 나라는 것은 모든 대상화를 가능케 해주는 근거이지 스스로
대상화가 안 된다. 나의 인생을 대상화해도 그것을 다시 대상화하는
다른 나 자신이 뒤로 물러나 있기에 결국 나의
인생은 대상화가 안 된다고 볼 수 있다.
소유는 형이하학적인 물질의 영역에서 기술의 대상이거나
경제적 영역으로서 상품가치를 지닌다.
또 다른 한편으로 소유는 형이상학적 정신의 영역에서 사회생활을 혼란과 무질서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사회구성
원들이 소유해야 할 정신적·도덕적 가치로서 제시될 수도 있다.
이처럼 소유는 가치와 동격의 의미를 지닌다. 가치가 없는 것을 사람들은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인생을 가치있게 만들려는 사상은 결국 인생에서 비싼 소유를 많이 지닐수록 더 값나가는 이치와 같다 하겠다(9회 글).
결국 나의 인생은 가치를 소유하게끔 해주는 근거의 역할을 하지, 그 자체가 가치로 매겨지지 않는다.
존재는 명사적 개념으로 쉽게 구획되지 않고 모호하며, 오직 사실을 사실 그대로 현시하거나 계시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고, 또 대상화가 안
되고, 경제기술적 가치나 도덕적 가치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에 대단히 표현하기 어려운
그런 본질을 지닌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까지
존재는 자의식처럼 나의 존재를 근거로 하여 소유가 생기게 되는 그런 근거와 같다고 언급되었다.
즉 존재는 소유의 근거와 같지만, 존재 자체는
철저히 비소유적이다.
그런데 ‘나’나 또는 ‘우리’라는 자의식이 강렬하면 할수록, 소유는 그런 자의식의 강도에 비례하여 발생한다는 것이다.
소유의식이 두드러지게 대두되는 이유는 경제성과 도덕성에 있다.
즉 경제성은 자아의 이기심이 좋아하는 이익과 연관되어 있고, 도덕성은 공동체적
우리의식의 공공적 정의가 옳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소유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있다.
경제적 자아의식이든 도덕적 공동체의식이든 다 예리한
자의식활동을 전제한다.
그런 점에서 소유의 가치론인 경제기술학과 사회도덕학은 다 의식의 철학에 바탕하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인간은 가치를 만들고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는 요청 때문에 인간의 역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경제성과 도덕성의 가치창조에
몰입되어 왔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장사상과 불교사상에서 가치창조를 넘어서는 무위법을 말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인간의 현실세상에
맞지
않는 둔세적 사유라고 하여 개인의 사적 공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과거의 서양철학에서도 존재론이라는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말은
철학적으로 존재(Being)를 존재자(beings)
로 오독한 철학의 과오라고 지적한 이가 바로 독일의 하이데거다.
과거의 전통 철학은 존재를
존재자로 잘못 읽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는 쉽게 손에 잡히지 않음으로 사람들은 그것을 존재자로 해석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소론이다.
존재자는 존재를 명사적 개념으로 구획가능한 어떤 형이상학적 대상으로 취급하여,‘신이 존재한다.’,‘사람이 존재한다.’,
‘산과 구름이
존재한다.’에서와 같이 주어의 명사들이 바로 ‘존재하다’라는 동사의 개념적 주체와 같은 것으로 보는
그런 철학이 재래의 존재론이다.
이런 철학을
하이데거는 존재자적(ontic)인 사고방식의 철학으로 여겨 존재론적(ontological) 사유와 엄격히 구분
했다. 엄밀히 말하여 존재자적인
사고의 철학은 존재론이 아니고 소유론인 셈이다.
왜냐하면 존재자학은 의식이 써먹으려는 소유적 가치의 관념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하이데거는 포착하고 파악하기 어려운 존재론적 사유를 주장하는가?
인생과 세상은 인간이 능위적으로 창조한 경제기술적 가치와 사회도덕적 가치로 황폐화되었고, 따라서 인간의
마음도 그 가치들에 의하여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으로 둘러싸여 세상을 여여하게 사실 그대로 보지 못하는 편견
으로 꽉 찬 것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이다.
아집에 먹힌
경제기술적 가치는 탐욕을 부르고, 법집의 분노에 젖은 사회도덕적 가치는 독선의 독기를 세상에
뿌린다.
존재론적 사유는 ‘신/사람/산/구름’ 등의
구분없이 일체의 존재를 명사적 개념으로 보지 않고,‘존재하다.’의 동사적
방식으로서 읽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들의 존재방식은 서로
연계되어 연기법적으로 얽혀 있어서 우주가 모두 한 몸임을 알게되고, 신약
(마태복음 6:25-33)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공중의 새와 들에 핀
백합화’처럼 무위적으로 먹이를 먹고 옷을 입는
사실을 대우주의 필연적 존재방식의 선물로서 깨닫게 되리라는 것이다.
하느님이 새와 백합화에게도
그런 존재의 선물을 주는데, 하물며 지혜를 가진 인간에게 어찌 존재하기에 필요한
경제와 도덕의 선물을 주지 않겠는가?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이상주의적 공상이 아니다.
이상주의는 이성이 꾸미는 꿈이다. 이것은 그런 꿈이 아니다. 이것은 존재하는 필연법(하느님)의
사실이다.
자연은 필요한 것을 다 보시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이기도 하다.
자연은 인간이 돈의 탐욕으로 환장하거나 정의의 분노로 흥분하지
않으면, 자리이타하는 본성을 준다.
이것이 또한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자연적으로 행하는 일이겠다.
존재론적 사유는 인간의 의식이 잘난 체하지 않고 고요히 쉬면, 깊은 마음에서 본성(本性)과 신성(神性)이 다 함께
공명하는 경제성과
도덕성을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존재론적 사유는 인간도 공중의 새와 들에 핀 백합화처럼
그렇게 살기를 기약하는 지혜닦기에 다름 아니다.
14세기
독일의 가톨릭 수도사인 에카르트는 예수가 그리스도의 길을 보여준 하나의 큰 활용이고, 인간 모두가 다
작은 그리스도라고 언명했다.
석가모니가
용대(用大)로 마음의 활용법을 크게 가르쳐 준 화신불(化身佛)이라고 인도 고승 아슈바고샤(1세기)가
말했듯이, 예수 그리스도도 인간에게
그리스도가 되는 마음의 활용법을 보여주기 위해서 육화(肉化)하였다는 것이
에카르트의 가르침이다.
마음과 무의식의
중요성 (16) |
이 연재를 통하여 인간을 이해하는 열쇠는 이성이 아니라 욕망이라고 하는 말이
여러 번 강조되어 나왔다. 이성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사회생활에서 지적인 분별력으로 생존을 추구하면서도 도덕적 의지로 좋은 공동체를 이룩할 수
있게 하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을 일컫는다. 인간이 인간에 거는 최고의 신뢰처가 이성이라는 것이다. 이성은 의식의 판단을 신뢰하고 그것을 최고의
진리로 간주한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지금까지 인간은 이성을 지닌 의식의 존재라고 여겨 이성과 의식의 자각만 강조한
가치론과 당위적 도덕론을 우리는 이제 그만 사용해야겠다. 다 별로 효용도 없는 그럴싸한 명분만 가지고 헛농사를 짓는 셈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무의식이 정신이상자의 영역에 속한다는 무식한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인간들의 실질적 사고방식을
결정하는 요인임을 알지 못하고, 우리는 사회생활의 문제점을 의식의 이성적 판단에 맡겨 해결하려고 애써 왔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적 존재가 아니고
욕망의 존재다. 의식의 이성은 욕망의 무의식을 지우지 못한다 . |
의식은 빙산처럼 6분의1정도만 표면에 나와 있고, 나머지 6분의5는 무의식으로 바닷물 속에 은닉되어 있다는
항간의 말이 옳다.
우리는
의식과 마음을 구별해야 한다. 의식은 자의식과 동의어로 쓰이고, 이성적 판단을 가능케 해주는 영역이다.
이성적 판단은 진리와 허위를 나누고,
선과 악을 확연히 분별하고, 경제적 이익과 손실을 계산하는 능력이다.
그래서 이성은 의식의 선명한 명증성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식은 물질적 자연처럼 자기자신을
자각하지 못하는 바보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자각을 통하여 가치를 새롭게 창출할 수 있는 자유의 진원지라고
여긴다.
그러나 마음은 그렇지 않다. 마음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가 세상 만물의 존재방식을
욕망(conatus)이라고 주장하였지만,
불교와 노장사상에서도 삼라만상의 존재방식을 욕망이라고 읽었다.
욕망은 삼라만상이 다 서로 타자와의
상관성을 필연적으로 맺고 있는 관계를 가리킨다. 불교에서 마음을 욕망이라고
부르는데,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이 지은 것)의
화엄사상은 삼라만상의 일체가 다 마음의 욕망
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겠다.
그러므로 마음은 의식과 달리 자연을 대립적으로 보지 않고,
심물상응(心物相應· 마음과 물질이 서로 상응함)으로
생각한다. 인간이든 자연이든 다 욕망이고 마음이다.
단지 인간의 마음이 자연의 마음과 다른
점은 인간은 스스로가 욕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 유식(唯識· 오직 알고 있음)이라 한다.
유식으로서의 인간 마음은
물론 의식과 오감(五感)의 지각을 포함하고 있으나, 이것들은 표피적 마음이고 마음의
핵심은 의식보다 훨씬 깊은 심층적 무의식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무의식의 마음에서 자연과 인간은 서로
상응한다.
그런데 자연의 욕망은 두 가지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본능의 소유적 욕망과 자연성(본성=불성=신성)의 존재론적 욕망이 그것이다.
전자는
먹이사슬의 연쇄적 관계를 말하고, 후자는 삼라만상이 다 타자로부터 존재하기에 필요한 것을 받고 자신도
타자에게 존재하기에 필요한 것을 주는 그런
거래관계를 말한다.
자연성은 심지어 죽음마저도 타자에게 주는 증여로 여겨질 만큼 인간에 의한 사고사를 제외하고 자연사한 주검이
자연 속에
여기저기 널려 있지 않게끔 한다.
자연의 마음이 인간에게 전이된 것을 우리는 무의식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무의식은 자연의 욕망을 인간에게 옮겨
놓은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무의식에도 본능적 욕망과 본성적(자연성적=불성적=신성적) 욕망이 깃들어 있다.
인간의 무의식이 곧 자연의
욕망이지만, 하나의 큰 차이점이 있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다. 인간의 언어활동은 곧 인간의 사회생활을 말한다.
이와 동시에 자연의
본능은 인간에게 지능으로 전이되고, 지능에 의하여 인간의 사회생활이 언어활동으로 표현된다.
자연적 본능은 직접적인 먹이사냥으로 생존을 유지하지만, 사회적 지능은 간접적인 우회의 길(지식/권력/돈/명예)을
소유하여 사회적인 인정을
타인들로부터 받으려는 욕망을 추구한다.
인간은 사회생활에서 직접 타인을 먹이로 사냥할 수 없으므로, 간접적으로 타인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타인들이 많이
추구하는 욕망을 쟁취하려고 애쓴다.
지능의 소유욕은 사회적으로 사람들이 언어생활을 통하여 욕망하는 소유욕의 밀도에 비례하여
일어난다.
지능의 소유욕은 그가 유아기부터 부모와 타인들로부터 배운 언어활동의 막에 의하여 형성된다.
유아기의 인간은 언어활동을 타인들로부터
배우므로 타인들의 욕망이 그 언어활동에 용해되어 있다.
인간의 소유욕은 타인들이 심어준 것인데, 그것이 자기의 것으로 탈바꿈한다. 그래서
유아기의 무의식은 타인들의
언어활동이 형성한 나무나 물결의 결과 같은 셈이다.
이것이 프로이트 계열의 정신분석학자로서 20세기 프랑스 구조주의의 거장인 라캉이 말한 ‘언어활동의 벽’을 형성
한다. 따라서 내가 언어활동을
통하여 자아라는 주체를 형성하게 된 이후에 일어난 타인의 말은 나의 무의식에
새겨진 ‘언어활동의 벽’을 거의 뚫지 못한다.
내가 자아라고 부르는
주체는 사실상 타인들이 만들어 놓은 소유욕의 무의식적 함정인데, 나는 언어활동에 가입함
으로써 사회생활의 경쟁에서 그 소유욕의 덫에 무의식적으로
걸려든 것과 같다.
그래서 사회생활에서 나는 자존심의 덩어리로 형성되면서, 20세기 러시아의 언어학자 트루베츠코이의 말처럼
‘언어의 체’를
이루고 있는 자존심이 싫어하는 말은 그 체에 걸려 나의 무의식의 욕망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인간의 소유욕적 자존심의 무의식은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그런 점에서 20세기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하버마스가 말하는 것과 같은 이상적 대화의 통로는 이성적 의사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무의식적
자존심의 벽이나 무의식적 언어의 체를 도외시하는 의식의 이상주의적 명분에
그칠 뿐이다.
한국사회에 만연된 상생적 정치론도 주자학적 명분주의의
잔재이지, 한국문화의 무의식적 소유욕의 업장이 형성한
결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소박한 감상주의의 산물이겠다.
왜 한국에서 자식에게 기업과 권력을 세습하려는(북한) 무의식이 그렇게 강렬한가?
왜 한국인은 대개 어떤 일을 미리 대비하는 지능적 생각이
부족하고, 일에 부딪치면 감정적 흥분으로 들끓는가?
한국인은 왜 상업적 계산전략에서 일본이나 중국에 비하여 일반적으로 뒤떨어지는가?
왜 한국인은
국가를 믿지 못하고 스스로 생존 전략을 강구하기 위하여 일생을 허비하는가?
왜 대개 한국인은 속물주의적 과시욕이 강하며, 일단 성공하면
전문인으로 계속 노력 성취하지 못하고 타이틀만
들고 사회적 저명인사 행세하기에 바쁜가?
사회적 소유의 무의식은 불교에서 말하는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과 유사해 보인다.
각자가 지니고 있는 무의식의 소유욕은 사회적 역사적
공동업의 상자에 한국인의 마음이 갇힌 것이나 다름없는
것 같다. 한국인의 공동업의 테두리는 한국인의 공통적 언어활동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겠다.
한국인의 맵고 자극적 언어활용과 욕설의 난무(한국영화에서 흉칙한 욕설이 너무 심하다), 얄팍한 선악심리와
흑백심리에 의하여 까마귀와 백로로
세상을 이등분하기, 남북한 공히 종교적 정치적 열광심리로 미친 듯이 도취
하는 전투심리 등등은 다 한국인의 무의식적 공통 업감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무의식적 업의 속박은 이상적 의식의 도덕이나 이성의 명증성과 의식의 자유를 구가하는 행동철학으로 치유
되지 않는다.
자존심과 언어활동의
벽, 대화시 자기 말만 하고 상대방의 말을 안 듣기 등은 본능을 대신한 지능의 사회생활에서
지능이 타인들을 이기기 위한 욕망이 나타낸 결과겠다.
20세기 스위스의 심리학자 융이 이런 소유욕의 아상(我相)을 벗어나게 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무의식의 마음에 본능의 욕망 이외에 본성의
욕망이 있음을 밝혔다.
이 본성의 욕망은 우리가 앞에서 본 자연성의 욕망과 같다. 이 길은 불교의 불성 밝히기와 거의 유사하다.
본능(지능)의
소유욕은 사회생활의 언어활동을 통하여 자존심의 덩어리를 지키는 데 신경을 쓰지만,
융이 말한 본성의 무의식적 마음은
완전성(perfection)이 아니고 온전성(integrity)을 유지하려는 욕망을 가리킨다.
완전성은 최고를 향하여 쌓아 나가는 의미를 지니지만, 온전성은 최적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마음의 무의식적
자세를 말한다.
그 자세를 융은
‘대립자의 무의식적 흐름’(enantiodromy)이라고 불렀다.
이 융의 사유와 유사한 노자의 사상을 우리가 이미 앞에서 읽었다. ‘대립자의
무의식적 흐름’은 세상만사를 자연
에서처럼 ‘선/비선(善/非善)’, ‘약/비약(藥/非藥)’, ‘진리/비진리’처럼 서로 상관적 차이로서 읽는 방법을
말한다.
예컨대 선과 악은 서로 이원론적인 적대의식으로 세상을 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선은 악을 전멸시키고 완전히 지배하려 한다. 그러나
선과 비선은 그런 적대의식의 관계가 아니고, 비선은
선의 다른 면, 선도 비선의 다른 얼굴로 비친다.
이것은 투쟁적 이원성을 보다 완화된
이중성으로 읽음으로써 극단적 열광의식과 배타적 자의식을 지울 수 있는
길이다.
이미 원효도 이런 사유를 개진하였다. ‘유/무’를 더 화쟁적으로 읽기 위하여 그는 ‘유/비유(무)’, ‘무/비무(유)’의
이중성으로 보기를
종용했다.
무의식의 마음이 이런 이중성으로 짜여져 있다고 여기는 본성의 사유는 자기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하여 박멸
해야 할 적을 만드는 지능적
소유욕을 잠재울 수 있다.
본능의 소유욕을 지우기 위하여 의식과 이성을 거창하게 장식하지 말고, 마음의 무의식적 본성을 조용히 살리는
지혜를
익혀야 한다.
우리는 무의식의 공통업장을 도외시하고 너무 공허한 이상론만을 주장한다. 속물주의처럼 이것도 한국병 중의
하나겠다.
‘나’의 말과
‘그것’의 말 (17) |
‘나’(I)라는 대명사는 자연의 생물학적 본능(It)이 사회화한 사회적 욕망의
무의식인 ‘그것’(It)의 기반에서 자란 어떤 가상(假像)에 불과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나’라는 자의식은 거품과 같은 환상이고, 실상은
‘그것’이라는 무의식의 말이다. 라캉의 생각에 설득력이 붙는다. 일상생활에서 ‘내’가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나의 말은 사회적 소유욕의
무의식인 ‘그것’이 나의 자존심의 덩어리를 빌려서 말하는 꼴이다. |
이 글은 생각을 좀 더 연장시켜서 우리가 쓰는 말과 연관시켜 보려고 한다.
인간의 의식은 자의식과 같은 개념이다.
자의식은 사회생활에서
남들과 자기를 분별하는 심리와 같다.
사회생활에서 모든 이는 다 자기 우선의 생각으로 살아간다. 이것이 인간의 이기심이다.
이 이기심은
생물학적으로 동물의 살려는 맹목적 생존의지의 본능과 통한다. 동물의 본능은 생물학적 생존의지의
유지로 끝나지만, 인간의 자연적 본능은 생물학적
생존의지에서 사회학적 생존욕으로 이행하면서 지능이 본능을
대신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기심은 사회적 이기심이고, 이것은 생물학적 본능의
생존의지가 사회생활에서 언어활동을 하는
주체로서의 자의식으로 변용된 것이다.
맹목적으로 살려는 생물학적 본능이 인간에게 사회학적 지능으로 자리바꿈하였다는 것은 사회적인 지배자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소유욕과 같다.
헤겔과 마르크스가 이것을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라고 읽었다. 사회생활은 곧 언어생활이다.
이 언어생활은 사회생활에서 각자가 자기의 지배욕을
남들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소유욕의 표현이다.
인간의 생존욕은 사회적 지배욕과 같은 의미다. 인간은 인정받기 위하여 지식을 쌓고 출세도 하고 부자가
되려고
안간힘을 쓴다. 인간의 지배욕은 언어생활에 인간이 가입할 수밖에 없는 유아기부터 시작된다.
인간은 타인들로부터 말을 배운다.
자기의
지배욕은 타인들로부터 익힌 지배욕의 반영이다.
이것을 정신분석가인 구조주의자 라캉은 ‘거울의 단계’라고 불렀다.
라캉에 의하면 생후 6∼18개월의 아기는 아직도 스스로 자의식도 없고 자존심도 형성되기 이전이다.
아기가 거울을 보면서 거울에 비친
자기영상이 타자의 영상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다가 그 영상이 곧 자기 자신의
반영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이 말은 인간이 사회생활의 와중에서
원초적으로 타자로부터 자기의 욕망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라캉이 말한 ‘거울의 단계’는 사회적 타자의 말이 자기의 말이 되는 무의식의
형성단계를 상징한 것이겠다.
그와 함께 타자의 말속에 잠재된 소유욕이 자기의 소유욕으로 탈바꿈한다.
나의 욕망은 사실상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형성되어 온 사회적 욕망의 언어적 굴레를 벗어날 길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나를 둘러싼 타자들로부터 말을 배웠고, 그 타자들의
소유욕에 무의식적으로 전염되었기 때문
이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타인들을 닮아 있으면서 그 타인들을 같은 소유의 경쟁자로 간주한다.
고대 그리스의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아들 오이디푸스가 그의 생부와 싸워 죽인 살부의 행위는 인간의 사회적 무의
식의 이중성을 반영한 것이겠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와 너무 닮았고, 동시에 그의 적수다. 인간은 남과 닮지 않기 위해 자기 것을 소유하려 한다.
그래서 패션도 유니크한 것을 찾는다. 그러나
결국 모든 패션은 다 유행으로 같아진다. 인간은 자기 것을 찾으면서
결국 다 타자의 것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행의 장난이다.
나의 소유욕은 타자가 준 것이라면, 왜 ‘나’라는 자존심에 인간은 그렇게 목숨을 거는가?
그것은 의식이 나와 남을 확실하게 나누기
때문이다. 의식이 말을 하면서 나의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고, 내 것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것은 사회생활의 대결에서 자란 나의 자존심이 굴종과
상처를 입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나의 의식은 무의식적으로 생긴 사회적 지배욕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 한다. 남으로부터 부러움과 선망을 얻기
위함
이다. 나만이 이기적이 아니다. 모두가 다 이기적이다.
그러므로 이기심은 사회학적 공동의 욕망이고,
이 욕망은 내가 생기기 이전부터 이미
있어 온 공통 무의식과 다를 바가 없다.
결국 이기심은 모두가 다 소유하고 있는 것이고, 자의식은 각자의 언어활동에서 생긴 ‘나’라는 대명사의 자존심을
남들에게 으스대고 싶은
이기심의 산물이다.
자의식은 사실상 일반적인 무의식적 이기심의 반영에 불과하므로 ‘내가 생각한다.’는 의식의 말은 사실상 ‘사회적
무의식이 다
생각한다.’는 것을 자기화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사회적 무의식의 소유욕이 한 언어권에서 일반적으로 강렬한 것일수록 개인으로서의 나도 그것을
소유
하려고 강렬히 바란다. 그런 점에서 소유욕은 객관적 대상을 좇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욕망을 나도 욕망하려는
것과 같다. 이것은 한 시대에
사람들이 자기만의 것을 찾지만, 결국 다 유행의 무의식적 속성에 함께 섞이고 마는
것과 유사하다.
자의식은 소유적 무의식의 한 표피적 현상에
불과하다.
소유적 공통 무의식의 말을 라캉은 ‘그것이 말한다.’(It speaks)로 표현한다.
의식의 말인 ‘나는 말한다.’(I speak)는
기실 무의식의 말인 ‘그것이 말한다.’(It speaks)의 한 표피적 껍데기에
불과한 셈이다.‘그것’은 자아 이전에 이미 사회언어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공동의 업장과 유사하다 하겠다.
20세기 러시아인으로 미국에 귀화한 언어학자 야콥슨은 그의 저서인 ‘일반언어학시론-I’에서 인간이 말을 배움에서
가장 늦게 배우는 것이
1인칭 대명사, 지시사, 전치사들이고, 또 언어상실의 과정에서 가장 먼저 증발되는 것이 역시
늦게 익히는 1인칭 대명사, 지시사, 전치사들이라고
밝힌 바 있다.
즉 저 품사들의 내용이 무의식에 깊이 소유되지 않기 때문이겠다. 그렇다면 ‘나’(I)라는 대명사는 자연의 생물학적
본능(It)이
사회화한 사회적 욕망의 무의식인 ‘그것’(It)의 기반에서 자란 어떤 가상(假像)에 불과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나’라는 자의식은 거품과 같은
환상이고, 실상은 ‘그것’이라는 무의식의 말이다.
라캉의 생각에 설득력이 붙는다. 일상생활에서 ‘내’가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나의 말은
사회적 소유욕의 무의식인
‘그것’이 나의 자존심의 덩어리를 빌려서 말하는 꼴이다.
내가 나의 개성미를 추구하는 패션을 의식하지만, 결국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시대의 유행인 ‘그것’의 구조 아래서
내가 춤을 추는 것과 같다 하겠다. 이것이 불교의 업감연기설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무의식의 말이 있다. 이것이 본성의 말이다.
이 본성의 말을 하이데거는 ‘그것’(It)의 말이라고 불렀다. 그가 말한
‘그것’의 말은 라캉이 말한 ‘그것’의 말과 다르다.
왜냐하면 전자는 존재의 말이지만, 후자는 소유의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 다 자의식의
말을 중시하지 않는 데서 서로 비슷하기도 하다.17세기 프랑스의 데카르트가 말한 ‘내가
생각한다.’(cogito)의 철학은 의식의 주체로서 내가
진리를 소유해야 확실하다는 주장을 함축하고 있다.
진리의 소유주로서 내가 명증하게 말한다. 이것이 합리적 진리의식이고, 소유의식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의하면 저런 자의식의 철학은 자의식 중심주의가 되어서 절대로 우주와 세상을 존재하는 그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소책자인 ‘휴머니즘에 대한 편지’에서 ‘존재는 그것 자체’(Being is It itself.)라고 표명했다.
이것은 수수께끼 같은 말장난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해체철학의 선구자로서 모든 종류의 중심주의를 싫어한다.
재래의 서양철학은 고중세의 신중심주의에서 근현대의 인간중심주의로 생각의
중심을 옮긴 것이다.
생각의 중심이 이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생각의 질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중심주의는 신이나 인간이 모든 우주의 진리를
소유하는 주체라는 생각에서 전혀 변동이 없다. 말하자면 인격적
중심주의는 소유론의 진리를 반영하는 셈이다.
해체철학은 소유론을 해체시키고 세상을
원초적으로 존재하는 그대로 놓아두는 사상을 말한다.
세상의 필연성인 ‘그것’에 따라 세상을 편안하게 놓아두는 사상이 ‘나중심’과 ‘우리중심’이
될 수 없다.
그 사상은 중심을 모르는 ‘그것’의 사유라 할 수밖에 없다.
세상의 필연성인 ‘그것’은 삼라만상에 다 적용된다. 신과 인간을
비롯한 삼라만상에 다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의 의식이 소유하거나 장악할 수 있는 개별적
존재자들(beings)이 아니고, 자연성으로서의
절대무(絶對無)인 원기(元氣=potency)의 욕망과 같다고 하이데거는 ‘휴머니즘에 관한
편지’에서 설파했다.
그 절대무의 욕망은 타자를 소유하지 않고, 타자가 존재하도록 힘을 증여하는 원력과 같다.
절대무는 인격적 중심이 없기
때문이다. 절대무는 허무가 아니라 오히려 무진장한 기(氣)의 저장고를 뜻한다.
존재는 ‘그것’이 자신의 기를 증여하는 것(It gives)이라고
하이데거가 봤다.
이런 절대무의 사상이 14세기 가톨릭 교회의 수사였던 독일의 에카르트에게 나타났다.“신은 무엇이며 누구인가?
나는 대답한다. 신은
그것(Isness)이다.”, “신은 무(nothingness)다.
신은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이런 것이나 저런 것이 아니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 존재(a beingless being)다.”
재래의 전통신학에서 말하는 신중심사상이 인간중심의 소유적 진리의지를 무의식적으로
절대화하기 위한 작업
이라면, 에카르트는 그런 소유론적 신학사상을 해체시키려는 존재론적 신학사상을 선구적으로 펼쳤다고 볼 수 있다.
절대자인 신이
소유한 진리의지는 반드시 다른 절대자가 생각한 진리의지와 충돌을 일으킨다.
각 절대자의 진리의지는 인간들이 생각한 자의식의 진리의지를
무의식적으로 절대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각각 절대자를 숭배하는 다른 종교들 간의 전쟁이 성전의 이름으로 예나 이제나 역사를 장식한다.
절대자의 신격화를 해체시키는 길은 신을 ‘그것’, ‘무’,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 사유하는 절대무의 신학이겠다.
이것을 에카르트는 신성이라고
읽었다.
인간이 무의 본성을 닮으려는 한에서, 인간은 무의식의 본성인 무의 ‘그것’에서 그리스도를 본다.
바깥에서 전지전능한 절대자로서의 신을
보지 말고, 마음의 본성 안에서 그리스도가 자라게 하는 것이 미래 신학의
길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