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테마여행 - 해빙기의 항구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1. 25. 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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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테마여행
해빙기의 항구
“여행의 발견이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얻는 것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세 명의 탐험대원과 열여섯 마리의 썰매개들이 북극권의 빙원을 행군하고 있을 시각, 나는 일루리사트의 항구를 걷고 있었다. 주로 새우나 넙치를 잡으며 살아가는 일루리사트 사람들은 이 항구에서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고 정보를 주고받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5월의 일루리사트 항구. 얼음에 묶인 배들이 여름을 기다리고 있다.
얼음대륙의 섬마을
항구는 배가 드나드는 곳이고 배는 물이 있어야 뜰 수 있지만, 그린란드의 5월 말 아직도 꽁꽁 언 일루리사트 항구는 마치 정지된 화면처럼 ‘멈춰’있었다. 얼어붙은 부둣가의 빙판 위에는 고기잡이배들이 얼음에 반쯤 먹힌 채 여기저기 제멋대로 흩어져 있고, 빙판과 바다가 만나는 접경에 이르러서야 몇몇 배들이 조심스럽게 얼음을 헤치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좀 있으면 요란해질 게야.” 오래 전부터 일루리사트에서 제일 큰 어구상을 운영해오고 있는 니콜라이 할아버지가 항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구상에는 그물이며 로프, 옷, 장화, 장갑 낚싯대…… 없는 게 없다. 여기서 나는 처음으로 물건 값을 깎아보고 덤으로 장갑을 받기까지 했다. 그동안 탐험대의 물품을 준비하느라 이 어구상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들었던 곰 같은 ‘한국 이누이트’를 귀엽게 봐주신 모양이다. 니콜라이는 다시 턱짓으로 항구를 가리키며 환갑이란 나이답지 않게 ‘예쁜’ 영어로 말했다.
“일루리사트는 항구 때문에 숨을 쉴 수 있지. 갈수록 항구가 점점 중요해지고 있어.”
겨울잠을 자던 배들이 하나둘씩 깨어나고 있다.
항구가 중요한 까닭은 그린란드의 다른 도시들처럼 일루리사트도 사실상 ‘섬’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오랜 옛날 이누이트들은 물을 구할 수 있고 조금이라도 배를 띄울 수 있는 곳을 찾아 마을을 이루었다. 그러나 마을들 대부분이 해안을 따라 형성된 탓에 바다 쪽은 빙산에 둘러막히고 내륙 쪽은 만년 빙하로 뒤덮여 있었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도로라고는 애초부터 생겨날 수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개썰매는 더없이 유용한 교통수단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륙빙하가 녹아내리면서 개썰매 운행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반면에 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그만큼 항구의 역할이 중요해진 것이다.
“항구가 지금은 저렇게 얼어있지만 이제 곧 여름이 시작되면 영 딴판으로 바뀔 걸세.” 니콜라이의 말은 6월이 되어서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겨울잠을 끝낸 항구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5월, 얼음이 녹기 전의 항구 풍경 |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6월, 얼음이 녹은 후의 항구 풍경 |
6월, 생애 처음으로 북극에서 맞는 여름이다. 일루리사트의 여름은 요란한 크레인 소리와 함께 시작됐다. 이른 아침부터 옆집에 커다란 크레인 트럭이 나타나 우르릉거리며 배를 실어 올리는 것이었다.
“뭐 하는 거죠?” 나는 큰소리로 주인에게 물었다.
“바다에 배를 띄워야죠. 여름이니까.” 그러는 사이 배를 다 실은 크레인 트럭은 눈 녹은 길을 달려 항구 쪽으로 사라졌다.
그린란드에서는 배들도 겨울잠을 잔다. 겨울이 되어 얼음이 얼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크레인 트럭을 불러 바다에 떠있던 배들을 육지로 끌어올린다. 그때부터 배들은 눈 속에 파묻힌 채 긴 휴식에 들어간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다시 크레인 트럭이 내륙과 항구를 분주히 오가며 배들을 하나둘씩 바다에 띄운다. 배를 한 번 싣고 내리는 데는 300~500크로네(6~10만원)정도라는데 일루리사트를 통틀어 크레인 트럭은 딱 3대밖에 없다. 그래서 크레인 기사들은 여름과 겨울이 겹치는 시기, 즉 얼음이 녹고 다시 어는 6월과 11월이 대목인 셈이다. 나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여름을 맞은 항구를 보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마침 1박 2일 조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어부를 만났다. 함께 배로 가봤더니 북극넙치가 한 가득이다. 생긴 게 광어는 광언데 엄청 크다. 이 녀석을 잡으려면 도마가 아니라 회의용 테이블이 필요할 것 같다. 얼씨구나, 나는 두 마리를 골랐다. 횟감으로 쓰려고 내장을 다 빼냈는데도 여전히 살아서 팔딱거린다. 남아있는 썰매개들에게도 만찬을 베풀고 싶어 열 마리를 더 골랐더니 전체 무게가 20kg를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