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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제 思想의 正體와 그 行方
李 禹 煥
<在日 作家․美術評論家>
Ⅰ. 현대미술의 樣相
어느날 「니이가타」의 어느 작가로부터 나에게(東京) 등기로 「돌」이 우송되어 왔다.
주먹만한 돌을, 가는 쇠줄로 감고 명찰을 부쳐 보내진 作品인 것이다.
별로 특별한 돌로는 보이지 않고 아무데나 굴러다닐 그런 돌이기는 하나 일부러 쇠줄로 묶은, 작가의
作爲적인 의도가 담긴 물건이라 그것을 받은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돌을 열심히 들여다보기도 하고
부친 사람의 의도를 여러가지로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그것이, 어떻게 눈여겨보든 결국은 단순한 「돌」이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정해진 개념」으로서의 돌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어떠한 「돌」의 개념에도 묶이지 않는 자유롭고도 생생한 자연의 돌이 아니라
반대로 부친 사람의 관념의 응고물이라는 형태와 情報的인 「돌」이라는 것을 차차 깨닫게 된 것이다.
그 「돌」이 돌을 이야기하지 않고 오히려 부친 사람의 의도나 관념을 나타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돌 이야기가 나와 생각되지만 어느 땐가 또 어느 작가는 多摩川 중류의 강가에 수없이 딩굴고 있는
돌의 세계로 들어가 돌덩어리에다가 일정한 숫자를 페인트로 써넣고 있었다.
작가가 의도한 情報를 나타내게끔 규정지워진 이 돌덩어리는 그리하여 자신의 표정과 말을 억제 당
하고 「일정한 숫자」의 얼굴이 되고 자신의 모습을 숫자 뒤에 숨겨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이때, 작가에 의해 정해진 숫자로 변한 돌은 그 때문에 자연스러운 돌의 세계로부터 절단된 피상적인
존재가 되어버리고 「對象化된 단편」, 「조작된 情報」, 즉 작가의 表象物로서의 虛像이 되고만 것
이다.
거기에는 돌을, 캔버스로서의 「돌」로, 다시 말해서 작가의 관념의 게시판으로서의 「돌」로 밖에는
보지 않는, 이른바 가치 설정의 논리가 일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거기에서 당연히 나타나는 현상은 돌이 像의 공간속에 매몰되고 아무런 身體性도 수반하지
않는 개념적인 숫자의 現存, 情報로 화하는 숫자의 추상화 경황이 되고마는 것이리라.
세계를 살아있는 자연의 넓이로부터 절단하여 작가의 지배․소유 의식에 의해 추상화하고 表象物로
만들어 情報化하려는 對象主義的 사고는 그 누구라도 불문하고 오늘의 작가 전반에게서 볼 수 있는
일반적 특징이다.
또한 이는 비단 미술에만 그치지 않고 物象化-疏外 현상을 초래하고 있는 文化 상황 전반을 물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자신이 「세계를 만들어내는」 조작의 주인이고자 하는 한, 그는 자연물에 대해서도 거기에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는 하나, 미니멀․아트 이후, 많은 작가들이 사물로부터 자연에로 눈을 돌려, 거기에서 그 어떤
「反예술」을 시도하려는 경향이 오늘날 세계적인 유행이 되고 있다.
「어드․워크 (大地작품)」작가의 일군중에는 문명공간의 산물로서의 사물을 혐오하는 나머지, 虛像
세계에 속하지 않는 자연계에만 관심을 가지려는 작가들까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어찌하여 작가들이 사물에서부터 자연으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가는 뒤에 논술하기로
하겠거니와 어쨌든 歐美에서는 「랜드․아트」라는 새 낱말이 나돌 정도로 자연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한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자연을 대하는 方式으로서는 지역, 작가, 방법론에 있어 각양한 양상을 띄고 있다.
그러나 그 자연이 작가의 表象작용을 거쳐 對象으로 화해버린 情報 세계로서 포착되어 있다는 점에
서는 앞서 든 예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아니, 歐美의 작가들은 자연과의 관련에 있어 일본의 對象主義者들의 태도보다도 훨씬 더 도전적이요
조작적이요 따라서 情報 작성적이라고까지 보이는 것이다.
이를테면 로버트․스미슨이 그렇다.
그는 돌을 채집해서는 일정한 규격의 나무 상자에 집어넣어, 그것을 가장한 단순한, 정해진 개념의
표시물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게 설정한다든가, 화랑에다 일정량의 자갈을 실어다 놓고 그것을 어떤
槪念에 따라 쌓아 올려 놓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보여주는 것은 실은 그저 그런 자갈에 지나지 않는다.
또는 목판이나 철판, 캔버스위에서 행하여진 종래의 미니멀․아트를 사막으로 가서 大地를 소재로 하여
자신이 表象하고 싶은 관념대로의 凹형을 실현한 마이클․하이저 또는 「네가와 포지의 개념에 따라」
몇 입방미터가 되는 흙을 팠다가 다시 원형대로 메우는 그야말로 大地를 작가의 관념의 實演場으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는 올덴버그 등등….
여기에서 돌멩이나 大地는 작가의 행위 또는 관념을 나타내는 소재가 되고 만 것이어서 돌멩이와 大地
자체의 있는 그대로의 양상의 표정은 결코 드러나는 일이 없다.
돌멩이도 大地도 없고, 있는 것은 한낱 「돌멩이」또는 「大地」라고 하는 낱말로 화해버린 추상적
사실, 즉 情報 뿐이라고 이들은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일상성을 강조하고 모든 행위의 等價値를 주장하는 「카알․안드레」는 언젠가, 아무 것도 아닌, 부질
없고 자연스러운 행위인 것처럼 숲에서 돌멩이를 쌓아 올린다거나 또 들판에서 마른 풀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말하기를, 『이들 天然의 덩어리는 자연히 나타나는 조각들이다.
나는 다만 그것들을 꾸밈새 없이 제시한 것 뿐이다』라고 했다.
사실 거기에 제시된 事象도 그저 그것 뿐인 상태이며 안드레의 그 「그저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관념과 같은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바로 그 때문에 흔히 「어드․워크」가 제시하는 자연은 일상적인 사물의 현상으로 환원되는
경우가 많으며 따라서 작가는 주석이라든가 온갖 수단을 통해 짐짓 그의 의도에 대한 인식론적인 또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도 종래와는 크게 다른 두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하나는 작가의 눈이 사물 공간에만 머물지 않고 일단 자연계에로까지 넓혀지고 있다는 점, 그 또
하나는 작가의 관념과 작품으로서의 물체가 운명적인 일체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극히 任意的인
관계 밖에는 못 가지게끔 꾸며져 있다는 점, 이 두가지 특징으로 미루어 곧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작가가
사물을 자못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 있으며 거기에 전적인 신뢰를 두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작가가 얼마만큼이나 자신의 관념을 세계의 지배 이념으로서 절대시하고 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 될 것이다.
像을 전개시키는 물체로서의 작품을 생각한다면 필연적으로 여기에서는 像의 우월성과 자주성을 스스
로 주장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작가의 表象관념으로서의 像은 항상 모든 사물에 선행하고 작품은 그 직접적인 표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表象관념을 인지하게끔 응결화되어 만들어진 작품은 그 까닭에 그 자신의 존재가치는 그다지
인정되지 않는다.
작품의 身體性이라든가 그 완성도보다는 작가가 의도한 관념의 情報化만이 문제시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 해도 좋으리라.
관념의 우위, 그 철저화를 위해서는 차라리 완성된 작품이 지니는 身體性은 방해가 되는 수도 있는 것
이다.
물체는 흔히 작가의 의도를 애매한 것으로 만들고 물체 자신의 존재성을 비치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올덴버그의 공상 모뉴멘트와 같은, 실제로는 세워질 수도 없고 프로젝트 뿐인 관념의 對象化
시도의 야심도 생겨난 것이라 하겠다.
한편 자연물에 의탁하여 자신의 관념을 이야기하게 하느니 보다는 관념 자체의 顯在化에 보다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작가군도 차츰 많아져 가고 있다.
자연물이 가지는 超개념적인 재질감의 표출에 뜻을 가진 일련의 작가들은 소재가 될 사물의 물리화학적
물질성을 최저한으로 머무르게 함으로써 관념의 완전한 표출을 시도하고 또는 숫제 판넬이라든가 엽서
등, 극히 희박한 물질위에서만 언어 表記에 의한 순수한 관념 제시를 시도하려고도 한다.
이들 작가는 「어드․워크」작가들 못지 않게 사물 자체의 物量과 虛像性의 직접적인 表出을 극도로
경계하기는 하나 동시에 자연을 다루는 경우에 있어서도 그 자연의 포착하기 힘든 물질감을 함부로 표출
하는 것 역시 두려워한다.
작가가 지닌 表象 관념의 對象化의 엄밀성을 기하려는 점에 있어서는 오히려 「어드․워크」보다 한층
첨단적인 측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미니멀․아트」를 더한층 개념화해 가며 최종적으로 겨우 그 의도만이 인지될 정도로 물질을 제거해
버린 작품들이 이에 해당된다. 제9회 現代日本美術展(1966.5. 우에노美術館)에서 볼 수 있었던, 벽에서
부터 마루바닥으로 傾斜지게, 실로 長方形을 구획지운 작품이라든가 마루바닥에 네모꼴의 일정한 면적을
셀로테이프로 둘러 싼 작품 등은 관념의 극히 개념적인 顯在를 의도하여 물질감을 제거하려 한 전형적인
작품이라 할 것이다.
이 「개념의 顯在體」라고도 부를 수 있을 실감을 떼어버린 表象(즉, 작품)에 있어서는 관객은 종래의
작품을 대하는 자세로서는 도시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맛스」라든가 「볼륨」으로서의 작품의 물질감은 거의 거세되고 겨우 그 윤곽과 같은 실 또는 셀로
테이프가 보일 따름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본 연후에 일부러 작가의 의도를 읽으려 하지 않는 경우에
한해서) 실 또는 셀로테이프로서 장방형이나 네모꼴을 구획짓고 있다는 사실이요, 또는 그렇게 「정해
진 개념」적 상태이다.
「로버트․모리스」는 이와 같은 계열에서 다시 그 첨단을 가려는듯이, 이를테면 전람회 개최를 위하여
은행에서 받은 借金과 「변상의 뭇 수속」에 쓰여진 서류만을 미술관에 전시하고 있다.
우선 그 절차를 절차로서 일단 눈으로 확인하고 연후에 작가가 시도하는 의도를 생각(인식)해 달라는
식이다.
이에 이르면 이미 일정한 「볼륨」과 형태를 가진 것으로서의 종래의 「작품」의 개념은 마침내 무너져
버렸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다.
表象관념으로서의 작품이 가지는 그 對象性의 물리적인 實體性이 개념적인 現存化의 위에 거의 감추어
지고 만 때문이다.
表象으로서의 관념의 의도 외에 작품의 對象性, 즉 물체가 보인다고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그 작품은
실패작으로 간주될 것이다.
물리적 실체로서의 對象性의 제거, 이와같은 방식에 의한 작품의 對象性의 음폐속에서 작품은 더욱 더
보이지 않는 實體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관객이 거기에서 보는 것은 작품의 對象感 자체가 어떠하든 작가의 의도-관념의 순수한 인식
론적 세계일 것이다.
따라서 세계를 直接性속에서 마주 본다기보다는 알아내고 인식한다는 知的 작업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
리라.
작품은 「어드․워크」이상으로 자신의 완성품적인 존재가치를 필요로 하지 않고 작가의 表象관념의
現存化를 위한 최저한의 액자라든가 또는 그 이상의 非물질적인 도구장치로 머무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어떤 작가가 「작품을 만들어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요컨대 관념만을 情報化하고 싶을 따름이다」라고
한 것도 바로 이 까닭이다.
극소한 캔버스 또는 언어를 도구로 삼는 또 다른 일군의 작가들에게 있어서도 사정은 대동소이하나,
河原溫처럼 관광엽서에다 자신의 거주지, 시간, 이름 등을 적어 작가들에게 보낸다든가 아니면 판넬에
다 이를테면 「MAR. 30. 1970.」이라는 날짜만을 인쇄하여 미술관에 전시하는 작가도 있다.
또한 山崎秀人처럼 「시계 바늘을 보면서 주변의 소리를 듣고, 초침 소리를 들으면서 바깥을 보아 주시오」라는 글귀를 인쇄한 종이를 화랑에 내놓는 작가도 있다.
한번 읽어서 알 수 있듯이 그 글귀는 일상적 상황에 흔히 있는 것들이요 각별히 말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문장도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는 말의 지각적인 부피라든가 깊이를 제거하여 그 내용(의도)에 대해 생각케 하고 인식시키
려는 (서로 보고 서로 느낀다느니 보다는) 작위가 더 강하다.
이들 方式은 최저한의 사물로서 최대한의 관념을 이야기하게 하는, 사물의 개념적 裝置化와는 달리 表象
관념-像을 언어의 시각화만을 통하여 정확하게 情報化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물질의 제거과정을 빼버리고 무기적인 말의 나열을 시도해 보는 것이 작품을 보다 철저하게 세계의 直接性
으로부터 멀어져 가게 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리라.
기왕에, 「죠세프․코즈스」의 작품 제작 과정을 빌려 옮겨 보자면 다음과 같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두툼한 미술사, 철학 서적을 펼친다.
그는 그에게 어필해 오는 말들을 찾아 사전을 뒤지면서 그 정의를 노트해 둔다.
이를테면 《一般》의 항목에는 <현실의>라든가 <궁극의>라든가 하는 말들, 또 《특수》의 항목에는
<물>이라든가 <칠해지지 않는> 따위의 말들을 기록해 놓고 두권의 파일을 준비한다.
콜렉터의 주문이 있으면 주문대로의 아이디어는 항상 준비되어 있는 셈이어서 희망하는 항목은 약식
확대기에 의해 검은 바탕 위에다 희게 확대되고 이렇게 해서 즉석 오브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美術手帖,1969.10.「작가의 프로필」에서)
Ⅱ. 오브제美學의 由來
오늘의 미술이 일찌기 없었던 다양한 방법론을 펼쳐내고 관념을 顯在化하고 그것을 위한 의식의 움직임을
전면적으로 表象작용化하려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 모두가 넓은 의미에서 「컨셉츄얼리즘 槪念主義」
으로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평론계의 일각에서는 이미 관념의 非實體的인 顯在化로서의 情報化 시대를 구가하면서 이 「컨셉츄얼리즘」
을 하나의 운동으로 이끌어가려는 사람들까지도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념의 情報 처리적 작품화에 의한, 그리하여 세계를 전면적으로 對象化(支配 또는
所有)하려는, 말하자면 정신사적 修正인간주의의 시도-이는 과연 어디서 유래된 것이며 또 어떠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또한 近代에 있어서의 이른바 관념이라는 것의 정체는 무엇이며 어찌하여 그것만이 오늘날 미술 상황
의 전면에 뛰어나오게 된 것일까?
모든 분야에 있어 近代의 超克이 부르짖어지고 있는 시기에 나타난 이와 같은 현상이고 보니 사태의
중대함은 미술사의 영역을 훨씬 뛰어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근대미술의 사상사적 측면에서의 어프로우치 가운데서 이들 「관념」이 지니는 여러 문제점의
소재를 살펴 보기로 하자.
「제들마이어」나 「프랑카스텔」등의 지적을 빌리지 않더라도 근대미술은 그 前提를 「거울의 倫理」
라고 하는 일류젼 錯覺 說을 바탕으로 하여 전개된 것이었다.
그리고 「거울의 윤리」의 구조, 그것은 근대미술이 자신의 얼굴을 세계에 비친다(反映한다)고 하는
表象化의 논리에 의한 이미지(像)의 對象化작업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것이 아닌 것을 그것인 것처럼 상정想定하는 것, 또는 세계에 비쳐지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것을 비치게 하는 쪽의 像이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 일류젼說의 정의로 되어 있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비단 미술사 뿐만이 아니라 근대문명의 구조 자체가 곧 像의 제조라고 하는 表
象化의 별명인 착각작용 외의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近代란, 神 중심의 中世에 대하여 산업 신흥계급(부르조아지)으로서 탄생한 인간의 자기 주장 시대를
뜻한다.
그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사고 구조는 이를테면 「의식의 表象작업에 의해 세계는 對象化될 수 있
으며」따라서 「세계는 나의 表象이다」(意志와 表象으로서의 世界)라고 하는 「쇼펜하우어」의 존재
론적 설정의 자세 등에서 분명히 들어나고 있다.
세계는 인간의 생각대로 재구성되고 「인간의 뜻에 맞도록 고쳐 그려져야 한다」고 하는 「다․빈치」
의 역설에서도 볼수 있듯이 表象작용은 近代를 규정짓는 결정적인 특징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세계를 하나의 「像」(이미지)으로서가 아니라 세계속의 자신의 모습으로서 對象을 포착하려는 顯在
작업은 그렇다고 近代에 이르러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계자체의 자기限定으로서 現存化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세계像을 눈앞
에 실현(對象化)함으로써, 거기에 있는 세계를 그의 自然性으로부터 왜곡, 절단해버리는 表象작용인 것
이다.
세계를 지배하고 소유하기 위한 對象化의 素材로 규정하고 모든 것을 그러한 表象 작용을 위한 인식
對象으로 꾸며놓는 인간중심주의의 그것은 역시 근대 특유의 의식작용이라 할 것이다.
「하이덱거」가 近代를 「세계像의 시대」라고 단정하는 것도 인간이,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는 세계로
부터 떼어내고 그것을 인간의 表象物로 되돌려 주면서 오히려 세계 그 자체마저를 지배하고 이미지化
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아가 그는 바로 그 까닭에 존재하는 것 자신이 뿌리로부터 잘려나와 공중에 뜬 物像이 되고
세계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잃고 만, 소외된 現實을 느끼고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를 인간의 뜻-像에 맞추어 「되돌려 주고」또는 「다시 조작하는」 따위의 자세는 바꾸어 말해서
세계를 자연스러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 수 없게 한다는 것을 말한다.
像의 세계를 나타내고 세계가 세계를 나타나지 않게 규정한다는 것, 여기에서 세계는 자연스러운 빛을
잃고 주인의 명령대로 표정을 짓는 사로잡힌 者, 즉 오브제가 된다. 생생한 자연스러움도 스스로를 비쳐
내는 신선함도 없는 허구의 세계, 像이 되어버린 文明공간의 세계는 그야말로 虛像의 세계라고 할 수밖
에 없으리라.
像은 그것이 像인 한에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虛像인 것이다.
왜냐하면 像의식이란 세계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고 세계와 일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함으로써
비로소 像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릴케」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의식이 취한 독자적인 방향과 의식의 앙양으로 말미암아
세계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앞에 하고 서 있는」(書簡集)것이다.
이는 곧, 자신이 세계의 모든 존재하는 것과 더불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밖에 그리고 세계를 앞에
하고 서 있는 認識者요 지배자라고 하는, 말하자면 부르조아적 自意識의 대립정신을 말하는 것이리라.
있는 그대로의 존재세계는 그 자체가 모든 것이며 그 어떤 像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에 반하여 세계에 대한 의식의 優位라고 하는 근대인의 생각, 그리고 그 특유의 表象작업에 의한 像은
따라서 애초부터 자연과는 뿌리를 끊겨 어디까지나 前提요 계획이요 假設이요 구성되어진 것이기에
그것은 虛像임을 면치 못 한다.
그 때문에 像은 자연스러운 세계와는 단절되고 그 아무 것도 닮지 않은, 인간이 바라는 바로 그것, 미리
조화가 이루어져 있고 스스로로서 완결된 것으로 규정된 세계라 함을 그 본질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像은 필경은 虛像이라는 철저한 인식, 말하자면 세계란 결국은 對象세계 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는 자각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오브제이다.
「마르셀 뒤샹」의 「샘」이라는 타이틀의 便器를 상기할 필요도 없이 오브제는 그저 거기에 내던져진
물건에 불과하다.
미술사에 있어 이 「샘」은, 이를테면 「便器」의 개념을 벗겨버린 작품이라든가, 그것을 미술관까지
운반한다는 그 행위에 의의가 있다 라든가 하는 해석이 부쳐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떠한 해석이 따르던 간에 우선 일목요연한 것은 그 물체가 누구의 눈에든 단순한 便器 외의 그 어떤
것의 知覺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對象物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만일에 그 「便器」가 便器라고 하는 개념으로 스스로 완결지어진 것이 아니라 보는 者와 보이는 者
와의 사이에 신선한 「事態」를 불러일으키고 그 때와 장소 등의 關係項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면 문제는 다르다.
더 나아가 그것이 단순한 일상의 便器임을 뛰어넘고 보다 非개념적인 넓이의 세계로서 감득되는,
이를테면 成佛의 몸으로 화한다면 역시 이야기는 다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또 「뒤샹」자신에게 있어서도 그 물체는 한낱의 「便器」로 보여지는 것이
可하며 또 그렇지 않고서는 그것이 오브제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근원적으로 「便器」를 물체 그대로 그려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착각이요, 그렇다고 「便器」를
물체로 그대로 조작할 수가 있다는 생각이 착각이라고 하는, 즉 재현적으로 「만든다」는 것에 대한
절망적인 인식 그리하여 차라리 「便器」라고 하는 개념 자체의 응고물을 그대로 거침없이 코앞에 내
놓아 구경꺼리로 만들려는 미술사에의 도전.
따라서 일상의 「便器」를 미술의 감정이라고 하는 제도속에 끌어넣어, 그것이 어찌하여 「便器」인가
아닌가를 규정하는 인식의 自己確認. 연극을 꾸며내는 데에 오브제의 본령이 있었다 할 것이다.
이른바 일류젼 작용으로서의 「만든다」는 과정을 피해 기성품을 인식의 對象으로 제시한 소위도 여기
에 있는 것이다.
이상 본 바와 같이 오브제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表象化 작업에 의해 규정된 세계의 對象的 응고물이라
고 하는 다소의 익살과 역설이 섞인 재인식의 확인을 강요하는 인식의 도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오브제로부터 확인되는 것이 바로 그 오브제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또한 對象物의
본질이 表象에의 관념 즉 像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만일에 오브제가 오브제 외의 또 다른 그 무엇일 경우, 거기에는 像에 이탈해 나가는 무엇인가가 있으며
對象 개념이 될 수 없는 부분이 개재하는 결과가 되어 결국은 매우 애매한 것을 표출하는 非오브제가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아서도 像의 虛像性의 인식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쉽게
알만한 일이다.
묘사한다고 하는 自己完結性이 결여된 행위라든가 애매성을 나타내는 산 자연물은 가능한 한 배제된채
像의 대상화에 「레디․메이드」(기성품)가 많이 쓰여지고 있었다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레디․메이드」는 원래가 일상의 自己完結的인 넓이, 虛像이기 까닭에 그것이 表象개념의
卽物化 즉 像의 오브제로 꾸며대는 데 최적의 것이라고 함을 짐작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그러나 오브제는 반드시 「레디․메이드」일 필요는 없으려니와 그 까닭인즉은 오브제의 그 認識性의
본질로 보아 오히려 그것은 虛像의 實體化에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像이 虛像이라는 양해 아래 이번에는 단도직입적으로, 있는 그것 자체로서 對象을 「만드는」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虛像이 實體化로서 만들어진 작품, 다시 말해서 虛像을 表象하고저
하는 관념에로 응결시킨 작품의 좋은 예로서 「쟈스퍼․죤스」의 「旗」라든가 「올덴버그」의 「햄버거」
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거리라든가 하늘은 캔버스 위에서 위장되는 데 불과하다.
그러나 旗, 표적, 7이라고 하는 숫자 등, 이들은 만들어 낼 수가 있으며 그리하여 완성된 작품은 그 자신
외의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다.」
-이 귀절은 잘 알려진 「레오․스타인버그」의 말이다.
사실 여기에서는 表象하고저 하는 像으로서의 관념과, 그 관념이 대상화된 實體 자체로서의 虛像, 즉
작품은 전적인 합일을 이루어 말하자면 관념과 물체의 일체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세계를 像으로서 되돌려 보내는 虛像 작업으로서 「旗」를 물감으로 「旗」로 그려내고, 「햄버거」를
석고로 햄버거로 만드는 작업이 성립한다면 당연히 거기에는 自己완결적인 관념과 물체의 일체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보는 者는 오브제의 그 닫혀진 自己완결성 때문에 보는 者의 시선이 오브제의 윤곽을 넘어서지
못 하여 본 물체는 보인 물체(잡힌 물체)와 합치하여 自己同一만을 거기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나는 물체를 미워한다」고 부르짖으며 像의 虛像性이 지니는 보다 不在的인 특성에 착안한 「앤디․
와홀」의 작품이 이를 더 한층 잘 나타내고 있다.
수없이 확대된 저 「마릴린․몬로像」을 상기하면 족하다.
그것들이, 像은 像에 불과하다는 像의 自己완결성, 즉, 그리려고 한 것과 그려진 것과의 自己동일성을
보여주고 있음은 분명하다.
「마릴린․몬로」를 실크․스크린으로 수없이 확대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산 「몬로」가 아닌, 바로
情報化된 「마릴린․몬로」의 像이요 그 외의 아무것도 아닌 虛像이기 때문이다.
산「몬로」가 자연 세계와 관련을 가진 산 구조체이므로 해서 작가의 머리속에서 구성되는 「마릴린․
몬로」라는 관념을 항상 뛰어넘는 존재인 것에 반해 만들어진 「마릴린․몬로」는 작가의 관념과 樣式과
크기만큼의 응고물로 그치고 있다는 것.
사실은 이와는 반대로 살아있는 자연스러운 「몬로」는 「마릴린․몬로」라고 하는 像에 의해 살고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고 존재함으로써 항상 새로운 「몬로」, 즉 「몬로」가 아닌
「몬로」로 변하여 개념이나 情報에 갇히지 않고 自己완결되지 않는 항상 변하고 불확정적이요 개방
적인 존재임이 분명하다.
像으로서의 「마릴린․몬로」가 관념과 실제와의 自己완결적인 虛像이라는 인식이 있고서 비로소 그
虛像을 虛像으로서 「만들고-그리는」 對象化 작업이 가능했던 것이다.
近代가 흔히 「作家」라든가 作品이라든가 하며 操作의식을 내세우는 것도 이를테면 자연 또는
「이콘」圖像 의 재현에 있어서는 그것이 그린다고 하는 흉내놀음에 지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던 데
반해 像은 바로 虛像인 까닭에 그것 자체를 만든다(확인하고 지배하고 소유한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가치인식을 밑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입체이든 평면이든 간에 像의 본질로 미루어, 그와 같은 對象化사고 자체가 이미 오브제인 것이다.
다카마츠․지로 高松次郞 가 일찍이 단언하기를 자신은 「그림자를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한 자세는 적어도 近代主義가 무엇인가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할 것
이다.
오브제는 세계의 소유의식을 그대로 노정시킨 「근대 부르조아 가치관 위에선 인간」의 表象이라는
그림자 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뒤집어 말하면 그 虛像은 세계의 지배자로서의 인간의 自己확대욕에 의해 자신의 관념이 對象化된
세계이다. 그러한 전제 아래서는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對象-오브제-虛像은 바로 거울에 비쳐진 자기
자신의 얼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虛像이 인간의 의사에 의해 관철된 세계라고 할 때 그것은 실상인즉 인간화를 강요받은 세계요, 인간이
만들어낸 像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表象化 작업을 통해 세계를 모두 「人間」의 소유권 아래 두려고 하는 데에 虛像 생산의
물량적인, 그리고 情報化된 근대화가 추진되어 온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근대문명이 인간의 表象化 작업에 의해 조립된 허구의 세계라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表象化 작업이 이룩되는 가운데 꾸며지고 近代의 운명을 보다 결정적으로 가름한 것이 이른
바 「만든다는 것」의 法則化, 「테크놀로지」라고 불리우는 「근대 기술」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像은 虛像인 바로 그 까닭에, 생각하고 있는 대로 그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라는 자기확신. 끝 간
데를 모르는 인간의 自己확대욕은 「表象 작용에 의해 세계는 對象化가 가능하다」고 하는 의식의
自己확장적 작용을 더욱 더 입법화, 장치화로 몰고 갔다는 것.
그 오토메이션化에 의해 세계의 對象化에 박차가 가해지고 그칠 길 없는 虛像의 대량생산과 情報의
범람이 결과했음은 다시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근대 과학이 놀라운 발달을 이룩하고 虛像구축의 산업혁명을 몇 차례씩이나 달성할 수 있었다는 것도
모든 것이 이 對象化의 논리의 자기확신, 자기 運動化의 결과일 것이다. 假設의 실체화 작업이야말로
表象관념의 오브제 제조술의 별명이라 함은 미술사 해명에 있어서도 빼놓을 수 없는 확인점이라 여겨
진다.
그런데, 세계를 對象化하려는 인간의 자기확대慾의 전면적인 개발과 더불어 마침내는 虛像의 自己增
殖이 가능케 된다는 이 불온한 사태의 來訪.
이 사태가 과연 무엇을 가져올 것인가에 대해서는 「루카치」의 物象論을 빌릴 것도 없이 현실에서
이미 많은 가치전환의 현상과 맞부디치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알 수 있는 터이다.
(이를테면 원자․수소폭탄과 같이 사물은 이념의 한계를 뛰어넘고 계속 생산되고 있으며 실현해야 할
이념의 제시 없이 아직도 학생운동 또는 히피족은 번져 가고 있다.)
인간의 자기확대慾인 지배․소유의 의지를 위해 개발된 表象작용의 「테크놀로지」는 그것이 바로
「테크놀로지」인 까닭으로 해서 자기 運動化한다.
이 자기운동화하는 虛像 생산은 차츰 飽和 한계상황을 형성하여 量의 질적인 狀況性을 발현하기에
이른다는 것.
對象이 대상을 낳고 마침내는 그 양적인 自己自覺으로서의 對象 상황의 자기모순이 발효發效되는 데
에 스스로의 질적 변화, 능동적인 脫虛像化의 현상을 야기시키는 변증법이 있다.
인간이 소유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 인간의 理性을 쳐부시고 반대로 공해가 되는 현상은 근대인의
가치관으로서는 거의 공포에 가까운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이미, 虛像이 스스로의 조직을 통해 낳은 虛像은 그렇기 때문에 당초에 인간에 의해 규정지워진 表象
物임을 자인하려 하지 않는다.
虛像이 虛像을 낳게 됨에 이르러 마침내 그것이 인간의 像에 맞추어지지 않는 존재성을 표출하기에
이른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벌써 「對象의 붕괴」와 虛像의 자기해체증상을 노정한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존재의 定立, 가치의 규정을 행하는 者는 이미 작가연하는 지배이념으로서의 인간일 수는
없다.
세계는 인간의 像으로서가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산 모습으로 거기에 불가항력의 모습을 드러내
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對象세계가 산 모습의 존재와 전환에 대한 자각을 높여간다고 한다면 상황이 일반적으로 인간이 펼쳐
내는 表象관념 따위를 그대로 공중에 내던지고 말리라는 것은 사실상으로나 논리상으로나 그리 이해
하기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사물에다 像을 부착시키는 것을 거의 단념한 것같은 「미니멀․아트」의 출현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아니 이미 「오프․아트」의 선언이 있다. 對象확인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트릭과 일류젼, 눈을 현혹시키
면서 對象으로서 보여지는 것(認識)을 거부하는 몸짓, 작품의 像, 자신이 「일류젼」의 응결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기의 否定에의 자각으로서의 「오프․아트」.
「마르쿠제」가 근대사회의 붕괴상을 날카롭게 지적한 「理性과 혁명」속에서 말하고 있는 요지도
또한 헤겔의 「理性과 현실」의 자기同一이라는 像의 카테고리의 파산 선고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쿠제」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를 이념으로 만들어내는 表象化의 시대는 對象의 자각적 反亂에 의해 필연적으로 전복된다.」
이말이 오늘의 시대 상황을 훌륭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이념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 되지
않고, 현실적인 것이 이념적인 것이 될 수 없는 脫관념, 脫名詞化 경향 현상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表象 작용이 효력을 잃는 세계, 즉 對象化 작용으로서의 창조 행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시대이고 보면
「근대 인간」은 그의 지배․소유의식을 깨끗이 내던지고 모든 中心으로부터 물러나야 할 것이다.
「미셀․푸코」가 「인간은 죽었다」고 외친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상의 고찰에서 알 수 있는 것, 그것은 對象의 붕괴, 表象세계의 자기反亂이 미술에 결과한 것이 오브
제의 자기 해체요, 「부르조아․이데올로기로서의 인간」의 表象관념의 표현 불가능성에 대한 자각이라
는 것이리라.
「물체는 물체 자신이 만든다」는 사물의 자기규정 때문에 작가는 손을 들어버린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
인간이 세계를 대화할 수 없고 만들 수 없고 또 자기완결화 할 수 없는 빈손의 인간으로 되돌아 왔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인간은 지배자도 소유자도 될 수가 없고 작가도 될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다른 모든 자연의 존재물과 다를 바 없고 의식의 自然性으로서의 지각과 인식의 方式에 의해
세계와 신체적으로 관련지워지는 者에 불과하다.
바로 非인간 세계에의, 자연에의 해소를 강요당하고 있다 할 것이다.
「테크놀로지」의 세례를 받아 거의 작가의 손때를 묻히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눈에 보이는 곳에 내
놓은 것 같은 虛像性이 거의 배제된 사물의 새로운 모습.
「미니멀․아트」라 일컬어지는 지극히 단순한 「특정의 사물」이 바로 그것이기도 하거니와, 거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이야말로 앞서 언급한 관념과 물체의 분리현상이라고 하는 對象의 붕괴상 바로 그것이다.
「도날드․져드」와 「솔․레비트」가 한때 자신들이 제시하는 물체들을 또다른 虛像 오브제와 구별지어
「특정의 사물」이라고 규정한 것은 그 사물이, 表象의 對象化와는 「무관계(논․릴레이션)」하고 관념도
물체도 아닌 일종의 이름 없는 非虛像體라고 하는 인식에서 온 것이리라.
미술관 안의 놓여진 「맥크라켄」의 푸른 長方形의 번들번들 빛나는 한 장의 樹脂板을 앞에 하고 과연
사람들은 거기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
거기에 있는 것은 틀림없는 한 장의 푸른 樹脂板인 것은 분명하나, 그러나 그 아무도 그것을 단순한
물체로 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을 대뜸 색채나 형태로서 본다는 것도 어딘지 바보스러운 전문가의 태도라 할 수밖에
없다.
사실인즉은 「야! 이건……」하고 미처 말이 되지 않은채 되돌아오는 자신의 관념을 허공에 띄어 놓고
對象과 눈은 초점이 없는 지점에서 그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데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닐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선이 작품에서 떨어져 나와 주위의 넓이로 번져가는 것은 아니나 그나마 거기에서 인지해야
할 시점(像)은 벌써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은 아니다. 해체된 對象은 시점의 상실을 초래한다.
(「재스퍼․존스」도 역시 多視點論者이기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근법이나 황금분할법에서 볼 수
있는 작품내에 있어서의 이야기이며 시점이 작품 자체의 윤곽 밖으로까지 번져간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일찍이 「포프․아트」에 있어서는 어떤 물체와 갑자기 마주치는 일은 있어도 시선이 무엇을 보고 있는
가에 대한 초점이나 말을 잃는 일은 없었다.
비록 그것이 물감으로 된 것이든 석고로 만들어진 것이든 즉석에서 「야! 이건 <旗>다.
<맥주 깡통>이다.
<햄버거>다」하고 對象化된 像의 모습을 인지할 수가 있다.
여기에서 본다고 하는 것은 서로 보고 서로 느끼는 만남의 지각작용이 아니라 이른바 인식의 눈에 의한
판단, 즉 시선이 對象의 윤곽에 묶이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근대문명의 虛像性에 대한 「다소 知적인 패러디를 내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이들 물체가 미국문명 구조의 虛像性 그대로 「旗」라든가 「햄버거」의 추상화된 대명사,
그 情報化의 응고물이라는 데에 관련된 인식물이라 함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미술관 안에 놓여진 한 장의 푸른 樹脂板을 눈앞에 하고 「아!」하고 난 뒤 사람들은 실제로 아무
것도 눈에 띠는 것이 없을 것임이 분명하다.
모든 해석은 그 훨씬 뒤에 온다는 것이 진실일 것이다.
눈은 보고 있으면서도 볼 수가 없고 따라서 거기에서 자신의 像(名詞)을 읽을 수도 없는 것이다.
미야까와증 宮川淳이 테크놀로지와 「키네틱․아트」에 언급하면서 「거기에서 현저하게 드러나는
것은 작품의 非물질화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술(여기서 말하는 예술은 곧 表象관념이라 해도 좋다-필자)
이 작품 자체의 물리적 존재와 분리해 가는 현상이다」라고 한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 시사적인 발언이
라 할 것이다.
對象으로서의 작품이 表象主義 인식의 눈의 초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對象이 「對象性을
넘어선 사물」, 다시 말해서 「논․컨셉셔널」한 (非개념적인) 對象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表象 관념에 의해 「되돌려진」 자기완결적인 물체가 表象작용의 魔法으로부터 돌려나가는 해체
현상으로서의 새로운 사태의 시작이라고도 볼 수 있으리라.
거기에 그렇게 있는 이름지울 수 없는 「특정의 사물」은 이미 작가의 관념을 말해 주지도 않거니와
자연스러운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며, 그 사물이 그 아무것도 드러내 보여주지도 않는
反像적이요, 이름없는 中性化된 사물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미니멀․아트」가 「포프․아트」와는 다른 의미에서 「그것 외의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고 일컬어
지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상에서 오브제 붕괴의 역사를 돌이켜 본 셈이나 「포프․아트」를 거쳐 「오프․아트」에, 그리고
「프라이머리․스트럭츄어」基本構造 를 거쳐 「미니멀․아트」에 이르는 길은 다같이 관념과 물체,
즉 像과 세계의 분리과정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시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李 逸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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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 註-이 번역은 李禹煥씨의 評論集 「만남을 찾아서」(「出合ひを求めこ」 田畑書店刊, 東京, 1971년)에 수록된 글 가운데서 「관념 숭배와 표현의 위기」의 일부를 옮긴 것이다. 이 글에는 Ⅰ,Ⅱ,Ⅲ으로 각기 거의 독립될 수도 있는 세 단원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이 역문에서는 사정으로 「Ⅲ. 미술-日常속에 묻히다」가 빠져있다.
그러한 관계로 이 역문의 타이틀도 本題의 서브․타이틀을 그대로 따서 「오브제思想의 正體와 行方」이라고 붙였다.
출처: 「出合ひを求めこ」 田畑書店刊, 東京, 1971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홍익미술 편집위원회 창간호, 1972년(번역자: 이일)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II, Vol. 1(ICAS, 2001년) p.275-p.289에 再수록
(표기 및 맞춤법은 원본 그대로 따랐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