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량은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서울의 북쪽 다보사(多寶寺)에 머물렀다. 빼어난 깨달음이 짝이 없을 만큼 뛰어나고 행동거지가 볼 만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강직하여 여러 사람의 비위를 거슬렀다. 마침내 이 사실이 대중들에게 드러나자, 원가(元嘉) 연간(424~452) 말기에 남월(南越) 지방으로 옮겨가는 벌을 받았다.
당시 사람들은 혹 그가 몸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라 조롱하였다. 이에 도량이 말하였다.
“업보의 이치로 가는 것이지, 특별히 사람이 시켜 된 일은 아니오.”
이에 승려들에게 명하여 밤을 세워가며 남쪽 광주(廣州)로 떠났다. 제자인 지림(智林) 등 열두 사람이 그를 따라갔다.
남쪽에 머물면서 6년 동안 강설로 대중을 인도하였다. 영외(嶺外) 지방을 교화로써 도야하다가,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성대하게 법석을 열고, 『성실론의소(成實論義疏)』 여덟 권을 지었다.
전송의 태시(太始) 연간(465~471)에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69세이다.
∙정림(靜林)ㆍ혜륭(慧隆)
당시 다보사에 또한 정림과 혜륭이 있었다. 정림은 『대열반경』에 빼어나, 전송의 효무황제로부터 큰 그릇으로 존중받았다.
혜륭도 많은 경전과 논리를 따지는 데 빼어났다. 또한 어떤 고난에도 굳건한 절개로 신령하게 통하였다. 혜륭이 심기(心氣)병을 오래 앓았다. 밤에 사람이 아닌 어떤 존재가 나타나 탕약을 보내주면서 말하였다.
“말릉령(秣陵令)이 보낸 것이다.”
약그릇을 주고는 갑자기 사라졌다. 혜륭이 이것을 취하여 한 번 복용하자 고통 받던 것이 곧 치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