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드윈과 가우처가 조선 감리교 선교의 문을 어떻게 열었는가?
조선을 위해서 기도하며 조선 선교의 문을 연 캐나다, 호주, 미국 교회의 무명의 여신도들과 선교사들의 소명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눈물이 난다. 그들에게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기를 아낌없이 내주는 나눔과 섬김, 주님의 성육신과 같은 낮아짐의 역사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아무 조건 없이 주는 그들의 삶이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며 그렇게 살 수 있도록 격동시키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도와 죽음을 무릅쓴 조선인 사랑이 백수십여 년이 흐른 지금도 내 가슴에서 불을 활활 지핀
19세기 미국과 서구의 교회들은 인도와 중국 그리고 일본 선교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은둔의 나라로 알려진 조선은 쇄국정책으로 말미암아 세계 교회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 선교는 조중일 삼국에서 가장 늦게 시작되었으며 그 시작 또한 교단이나 교회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은 개인들과 신도들의 노력으로 된 것이었다.
호주장로회는 데이비스 선교사의 죽음으로 멜버른의 여신도들과 빅토리아교회 남청년친교연합회가 조선선교 소명으로 물코를 열었다.
캐나다장로회는 맥켄지 선교사의 죽음에 아픔을 느낀 그리어슨, 푸트, 막레와 노바스코샤 메리타임 여신도들의 기도와 열정이 물코를 열었다.
미국남장로회는 1891년에 언더우드에게 조선 선교 상황을 들은 전킨, 레이놀즈, 테이트, 매티 테이트와 리니 데이비스가 조선 선교를 자원함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남장로교 외지선교부 실행위원회에 조선선교신청서를 제출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며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각 주의 여러 도시 교회를 순방하며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1892년 2월에는 선교 잡지에 “왜 우리는 조선에 가기를 원하는가?”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결국 그들음 불타는 소명감과 열정으로 남장로교 외지선교부 실행위원회의 파송 수락을 받아내고 9월 7일에 파송예배를 드리고 1892년 11월 3일에 제물포항구에 도착하였다.
감리교선교 또한 인도, 중국, 일본 등보다 늦게 몇 개인들의 관심으로 시작되었다. 조선 선교는 선교부의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아래는 이덕주 저 ⌜상동청년 전덕기⌟, 56, 57쪽에서 발췌하여 정리하였다.
미감리회 해외선교위원회가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883년 9월, 미국 오하이오주 라벤나라는 작은 도시에서 개최된 해외여선교회 지방 모임에서 ‘한 노부인(old woman)이 일어나 “아직도 선교사가 들어가지 못한 조선이 언젠가 문호를 개방하여 조선 부인과 소녀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깨닫도록 선교사를 보낼 때 사용하라”며 적은 돈을 선교비로 내놓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 때 조선 선교를 촉구했던 ’노부인‘은 후에(1892년) 어머니 스크랜턴 선교사를 통해 서울 동대문에 부인병원과 교회를 짓도록 거금을 희사하여 ’볼드윈시약소(동대문 부인 병원 전신, 이화여대 부속병원 전 전신)와 볼드윈예배당(동대문교회 전신)을 건축할 수 있도록 도와준 ‘오하이오 클리블랜드 출신 볼드윈 부인’으로 밝혀졌다.
훗날 해외여선교회 파송으로 북감리회 최초의 여성 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게 될 어머니 스크랜턴은 1882년 클리블랜드에 정착하여 해외여선교회 클리블랜드 지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중에 라벤나 모임에서 ‘조선’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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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1882년 서구 국가로는 처음으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 미국과 통상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 조약에 따라 1883년 5월 초대 조선 미국공사 푸트가 내조하여 정동에 공사관을 설치하였다. 조선정부는 그 답례로 그 해 7월 민영익을 수반으로 하는 ‘보빙사절단’을 미국에 파견, 이들은 9월 워싱턴으로 가서 아서 대통령에게 고종황제의 국서를 전달하였다.
그런데 이들 보빙사절단 일행이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미감리회 볼티모어연회 소속 가우처 목사를 만나게 되었고 평소 아시아 선교에 관심이 깊었던 가우처는 사절단 인솔자 민영익과 대화를 나누면서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포착하고 그해(1883년) 11월 뉴욕의 미감리회 해외선교본부에 선교비 2천 달러를 기탁하며 조선 선교에 착수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그는 재빠르게 일본에서 사역하고 있는 매클레이 선교사에게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알아보도록 부탁하였다.
1847년 중국 선교를 개척하고 1873년 일본 선교를 개척한 매클레이는 가우처의 연락을 받고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확인하고자 1884년 6월 24일 서울을 방문하여 두 주간 머물렀다. 그는 미국 공사관을 통해 조선 정부에 ‘미국 선교사의 내조와 사역을 허락해 달라’는 제안서를 제출하였다. 매클레이는 당시 외부협판인 김옥균은 일본에서 이미 만난 적이 있으므로 그를 통하여 ‘선교사가 와서 병원과 학교를 해도 좋다’는 고종의 허가를 받아 냈다.
그리하여 조선 선교의 문이 열린 것을 확인한 미감리회 해외선교부는 학교와 병원을 개척할 선교사를 모집하였다. 미감리회는 교육 선교사로 아펜젤러, 의료 선교사로 스크랜턴이 선발하였고 스크랜턴은 1885년 1월 뉴욕에서 파울러 감독에게 안수를 받고 1885년 2월에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였다. 당시 어머니 스크랜턴도 53세의 나이로 해외여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독자적인 선교사로 아들과 함께 조선에 나왔다.
조선 선교의 맨 처음 이야기는 가슴을 흔든다.
볼드윈과 가우처는 와본 적이 없는 조선을 품고 기도하며 축복하였다. 그들의 그 복된 마음이 당시 조선을 향하신 주님의 애틋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주님께서 주신 그 마음을 붙잡고 순종하며 여신도들의 마음과 관심을 조선으로 이끌어갔다. 그리고 선교사들의 큰 어머니가 되어 물심양면으로 그들의 사역에 위대한 눈물과 사랑을 보탰다.
나라와 민족을 넘어서는 여신도들의 뜨거운 눈물의 기도와 나눔, 선교사들의 용광로처럼 타오르는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이 절절하다. 그들의 눈물과 기도, 가슴이 우리 모두의 가슴에 깊이 박혀서 별이 되고 한반도에 흘러 넘쳐서 어디서나 겨자씨가 무성하게 자라길 빈다.
2023.4.1.토요일 오후
우담초라하니
참고문헌
이덕주 저 ⌜상동청년 전덕기⌟, 공옥,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