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후 3:8~10, 여러분, 주의 강림이 더딘 이유가 있습니다.
찬양팀과 함께 금요일 저녁에 찬양을 배우러 갔다 오면서, ‘일주일이 너무나 빨리 간다’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1주일에 한 번씩 선산에 나가니,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런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모님이 말하기를 ‘10대는 10km로, 20대는 20km, 80대는 80km로 간다 더라’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친구가 ‘그럼 200살은 시간이 200km로 가요’라고 말합니다.
영미철학에서는 특히 ‘대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여러분이 말할 때, 듣는 사람은 다르게 듣는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여러분이 눈을 한번 깜짝일 때, 그 신호를 알아듣는 사람은 얼마나 친근한 사람이여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말할 때, 듣는 사람이 오해하는 경우도 너무나 많습니다. 자기가 경험한 환경과 문화 속에서만 듣고 본 것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누군가를 오라고 할 때에 손짓을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서구지역에서는 그 의미가 ‘가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돈’을 손가락으로 표현할 때는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듭니다. 그런데 프랑스 일부지역에서는 ‘무가치하다’, 미국에서는 ‘좋다’, 브라질에서는 ‘외설적인 표시’로 쓰인다고 합니다.
승리를 나타내는 V자 표시도, 그리스에서는 ‘욕’를 의미하고, 그리스에서는 손등을 바깥으로 보이는 V자가 ‘승리’를 나타내지만, 영국에서는 ‘꺼져’라는 뜻을 같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나라와 민족마다 같은 표시지만 다른 뜻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말씀입니다. 인간이 교묘히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직 성경은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사람이 해석을 해야 합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억지로 풀어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멸망 받을 거짓교사입니다. 그들이 주의 강림과 심판이 없다고 그것을 조롱하는 자들입니다.
3: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각주 2), ‘또는 교묘하게’]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첫째, 하나님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이 다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 요한에게 계시의 말씀을 다 하신 후에, ‘속히 오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 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여러분도 어릴 적에는 “시간이 왜 이렇게 안가나, 빨리 시간이 가서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이가 들다 보니,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지, 아침 밥 먹은 듯한데, 벌써 저녁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월요일 인 것 같은데 벌써 주일이 되었습니다.
시간의 개념이 이렇게 사람들도 연령에 따라 차이가 나는데, 하물며 인간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시간과 짧은 인생만 살다가 가는 여러분의 시간의 개념이 어찌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속히 오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은 너무나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역사 가운데 살았던 모든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인간의 기준에 천년은 하나님의 기준에는 숨 한번 쉬는 순간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시 90:4,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의 강림이 더디다고 불평하는 자들은 그들의 시대에 그것을 보고자 안달이 나서는 짧은 인생만 살고 마는 인간이 그들에게 익숙한 짧은 기간에 예상되는 역사로 하나님의 시간을 제한해 버립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오지 않으신 것을 보니까, 그들의 시간의 기준에 따라 주께서는 아예 오직 않으실 것이라고 주의 강림을 조롱하게 된 것입니다.
3~4절,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하니”.
둘째, 주의 백성에 대한 은혜와 자비를 베풀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하시기 전에, 자기 백성들에게 은혜로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오래 참으십니다. 하나님은 ‘화를 더디게’ 내십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려 시내산에 올라가 40일간 금식할 동안에, 지도자 모세가 없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이 그들을 인도해 난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경배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나 화가 내서 그들 중에 3,000명을 죽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를 세우고자 그들을 다 멸하고자 하셨습니다.
출 32:3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
모세가 범죄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출 32: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는 하겠지만, 그들과 함께 가지는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모세가 ‘하나님이 함께 가셔야만 됩니다. 하나님을 보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도 들어 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출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심판 날 닥칠 자기 백성들의 멸망에 대해 자비를 베풀어서 죄인들이 회개하여 멸망하지 않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주의 강림을 지연시키셨습니다. 그의 그리스도인 백성 중 어느 누구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God delays the Parousia because he is not willing that any of his Christian people should perish).
그러므로 주의 강림이 더디다고 불평할 이유할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9절,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셋째, 그러나 주의 강림은 도적같이 오십니다.
여러분이 아직 회개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더 더디게 오시겠구나. 내가 회개할 때까지 기다리시겠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주의 강림은 무기한으로 연장된 것이 아니라 예상하지 않을 때에 도적같이 죄인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10절,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주의 강림의 날에는 하늘과 땅이 불 타 없어질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심판을 위한 종말론적 강림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소리로 말미암아 하늘이 불타 버리고, 땅과 악인은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악인과 그들의 행위는 다 드러나고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10절, “..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선생들은 종말론적 심판을 거절하고, 하나님은 악인을 이 땅에 영원히 두지 않으시고 그의 의를 세우기 위해서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거절해 버립니다.
주의 강림과 심판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증거하는 승리의 표시이며, 의인에 대한 축복의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