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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627. [역경의 열매] 김향숙 (1-15) 부모님 다툼으로 시작된 하나님 향한 분노와 불만
목회자이자 신학대학 교수인 아버지
분노 조절 문제로 화나면 통제 불능
화는 어머니 통해 자녀들에게 상처로
피할 수 없는 무력감에 현실도피 꿈꿔
김향숙 하이패밀리 공동대표. 김 대표 제공
내 삶의 첫 역경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됐다. 나는 1960년 8월 5일 신앙 가문의 1남 5녀 중 둘째로 부산 사하구 감천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목회자이자 신학대학 교수였다. 겉보기엔 부족함 없어 보였지만 실상은 역기능 가정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자주 다투셨다. 새벽이면 어김없이 잠을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두 분이 두런거리며 이야기 나누는 소리였다. 아버지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결국 고함으로 이어졌다. 나는 손가락이나 베개 이불로 귀를 틀어막으며 기도했다. “하나님, 제발, 여기서 멈추게 해주세요.”
소원하고 또 소원했지만 두 분 다 절대 먼저 사과하는 법이 없었으므로 대화는 점점 더 험악해졌다. 아버지는 분노조절에 문제를 갖고 있었다. 화가 폭발하면 통제 불능 상태였다. 물건 던지는 소리, 벽을 치는 소리에 이어 방문을 쾅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려야 싸움은 끝이 났다.
그런 아침이면 나는 어김없이 아침을 걸러야 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퉁퉁 부은 눈으로 입술을 꽉 다물고 옷장을 정리하곤 했다. 어머니의 침묵은 무서웠다. 어린아이의 눈에도 보였다. 한으로 짓눌린 굽은 등, 땅이 꺼질 듯 내쉬는 한숨, 거친 손놀림, 서늘한 눈빛. 어머니의 몸은 분노 덩어리였다.
아버지를 향해야 할 어머니의 분노는 자녀들을 향했다. ‘탁’ 서랍 닫는 소리와 동시에 화산이 폭발하듯 화가 분출됐다. 어머니의 화는 언제나 세 치 혀로 옮아 붙었다. 미친 듯이 제멋대로 날뛰는 혀는 지독한 욕설들을 쏟아냈다. 내가 얼마나 못됐고 못나고 모자라고 형편없고 싫은지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이야기했다. 그 말은 비수처럼 날아와 내 가슴에 꽂혔다. 어린 나는 내가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믿었다. 태어남이 저주임을 확신했다.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져 피멍이 맺혔다. 아팠다.
이런 일을 겪을 때면 나는 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이불은 지옥 같은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였다. 어둠 속에서 부모님을 원망하고 증오했다. 복수를 꿈꾸기도 했다. 맞설 수도 피할 수도 없었던 어린아이의 무력감은 나를 깊은 우울의 나락으로 끌어들였다.
마지막 분노의 화살은 하나님을 향했다.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하나님,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부모님을 내가 선택했나요. 싸우지 말게 해달라고 얼마나 기도했는데 왜 한 번도 안 들어주시나요.” 아무리 항변하며 질문을 던져도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대답을 기다리다 지칠 때쯤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향숙아, 네 부모님조차 너를 사랑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너를 사랑할 리가 있겠니. 그러니까 네 말도 안 들어 주시지….”
이후 나는 하나님에 대해 비뚤어진 아이가 되었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애벌레처럼 만나는 모든 것마다 장애물이었다. 우울한 얼굴로 불행에 빠져 불행을 전염시키며 살았다.
나는 영원히 이렇게 살 줄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고 계셨다.
약력△1960년 출생 △고신대·고신대대학원 기독교교육학과 △부산대 대학원 심리학과(EdD) △한예종 무용원 예술전문사 △명지대 대학원 예술심리치료학과 객원교수 △하이패밀리 공동대표
* [역경의 열매] 김향숙 (1) 부모님 다툼으로 시작된 하나님 향한 분노와 불만
* [역경의 열매] 김향숙 (2) 무신론에 빠져 절망에서 허우적댈 때 찾아오신 하나님
* [역경의 열매] 김향숙 (3) 유머 넘치는 전도사와 결혼… 성격 차로 전쟁터 된 가정
* [역경의 열매] 김향숙 (4) "네가 먼저 변하라" 하나님의 따끔한 충고에 무릎 꿇어
* [역경의 열매] 김향숙 (5) 우리 부부는 '공사 중'… 서로 회개하고 눈물의 회복
* [역경의 열매] 김향숙 (6) 철저히 외로웠던 아버지의 마지막 숨 앞에 "사랑합니다"
* [역경의 열매] 김향숙 (7) 기러기 가족으로 살던 아픔이 가정사역 원동력으로
* [역경의 열매] 김향숙 (8) 방송이 선물한 엄마의 사랑 고백 "향숙아 사랑한다"
* [역경의 열매] 김향숙 (9) 자립형 가정사역으로 패러다임 전환… 교회 내 전문가 키워
* [역경의 열매] 김향숙 (10) 고통 겪는 단 한 명의 사모라도 치유할 수 있다면…
* [역경의 열매] 김향숙 (11) 갱년기 늪에 잠들었던 끼와 열정, 춤 만나 다시 깨어나
* [역경의 열매] 김향숙 (12) 신체심리학으로 치유혁명… 하이패밀리 사역에 접목
* [역경의 열매] 김향숙 (13) 몸의 수난, 기도로 극복… 한예종 입학 '춤건강' 탄생
* [역경의 열매] 김향숙 (14) 신체심리학자에서 몸엔춤예술가로 생애 마지막 변신
* [역경의 열매] 김향숙 (15·끝) GMC서 펼칠 가정문화예술사역, 교회 넘어 세상 품으리라
정리=박용미 기자 mee@kmib.co.kr
***[역경의 열매] 김향숙 (2) 무신론에 빠져 절망에서 허우적댈 때 찾아오신 하나님
아무리 애써도 믿어지지 않는 주님 존재
허무주의에 빠져 죽을 궁리만 하자
언니가 데리고 간 예배에서
십자가 사랑 깨닫고 주체할 수 없는 눈물
김향숙(가운데) 대표가 1982년 부산 감천중앙교회에서 모자원 아이들과 찬양 발표회를 마친 후 함께 사진 찍고 있다. 김 대표 제공
어릴 때부터 청년이 될 때까지 나는 부산 감천중앙교회를 다녔다. 교회는 유일한 피난처였다. 외롭고 슬프고 화가 날 때 무작정 집을 나섰다. 발 길가는 대로 걷다 보면 어느새 교회 문 앞이었다. 할 일 없이 바닥을 뒹굴기도 하고 풍금을 치며 노래하거나 춤을 추기도 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교회는 최고의 놀이터였다. 아이들과 선생님, 청년부 언니·오빠들까지 매일 모여서 발표회 준비를 했다. 실은 준비는 뒷전이고 놀기에 바빴다. 꾸벅꾸벅 졸면서 기어코 새벽송을 따라다닐 때조차 그저 즐겁기만 했다.
하나님은 내 관심 밖이었다. 내 부모가 믿는 하나님은 절대 믿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단지 교회 생활이 좋았다. 고신대에 입학한 후에는 공부는 뒷전이었고 아예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교회 근처에는 모자원이 있었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들을 위한 시설이었다. 돌봄을 받지 못해 결핍이 있는 아이들이 불쌍했다. 매주 이 아이들을 교회에 데려오고 예배 후 다시 데려다주길 반복했다. 설교부터 성가대 지휘, 찬양발표회 등 각종 행사까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전임 사역자처럼 일했다. 그저 아이들이 좋았고 가르치는 일이 재밌었다. 내가 쓸모없는 인간이라 생각했는데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어느 날 대예배 중에 갑자기 천둥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믿지도 않으면서 아이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가르치느냐.” 사실이었다. 교회는 무보수로 일하는 직장이었고 나는 교회로 출퇴근하는 직원이었다. 양심의 가책이 심하게 몰려왔다. 아이들 앞에서 더는 위선 떨 수 없었다.
그날로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교회를 떠났다. 일이 없어지니 교회 갈 이유도 사라졌다. 1년쯤 지나자 갑자기 하나님이 계시는지 궁금해졌다. 오산리금식기도원 무척산기도원 등 유명하다는 기도원은 다 다녔다. 철야기도 금식기도를 밥 먹듯이 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믿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없다고 결론 내렸다. 무신론과 허무주의의 늪에 빠져 책을 탐독했다. 공허함은 깊어졌고 그럴수록 죽음은 의미 있게 다가왔다. 날마다 죽을 궁리를 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나에게 주님이 찾아왔다. 보다 못한 언니가 억지로 데리고 간 예배자리였다. 십자가 사랑을 깨닫자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밤낮으로 성경을 읽었다. 꿀 송이보다 달았다. 텅 빈 마음은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 찼다.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혀왔던 인생 질문들은 단숨에 해결됐다.
대학을 졸업한 후 고신대 복음병원에 취업해 의무기록사로 일했다. 첫 직장이라 온 힘을 다했다. 식사시간조차 아까워 비스킷과 커피로 때우며 일에 매달렸다. 결국 폐결핵에 걸렸다. 병은 나를 멈추게 했다. 밥 먹고 일하고 돈 버는 일상이 무의미하게 다가왔다. 그때 디모데후서 4장 7절 말씀이 내게 찾아왔다. 나에게 물었다.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으며, 종착지는 어디이며, 내가 싸워야 할 선한 싸움은 무엇일까.’
가야 할 길은 안보였지만 이 길이 아님은 분명했다. 직장에 사표를 던졌다. 1984년 무작정 고신대 대학원 기독교교육학과에 입학했다.
***[역경의 열매] 김향숙 (3) 유머 넘치는 전도사와 결혼… 성격 차로 전쟁터 된 가정
교회 고등부 사역자와 교사로 만나 교제
어려웠던 신혼 시절 남편 사랑으로 극복
꿈같은 신혼 지나며 정반대 성격 드러나
김향숙(앞줄 오른쪽) 대표가 1984년 6월 2일 부산 송도제일교회에서 남편 송길원 대표와 결혼예배를 드리고 있다. 김 대표 제공
1983년 가을, 나는 오랜 방황을 끝내고 부산 남교회에 출석하며 고등부 교사로 섬기고 있었다. 이듬해 봄에 한 전도사가 고등부 담당 사역자로 부임했다. 매사에 자신 넘치며 완벽하게 일 처리를 하고 유머가 뛰어난 그는 차츰 내 마음을 끌었다. 만남은 점차 구체화했고 그해 6월 2일 우리는 부산 송도제일교회에서 결혼했다.
남편은 3남 3녀 중 장남이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대식구의 맏며느리가 됐다. 신혼을 시동생 4명과 함께 시작했다. 도시락을 싸고 연탄불을 갈며 대학원 공부와 조교까지 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나날들이었지만 전혀 힘들다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남편은 나를 사랑해줬다. 그러나 꿈처럼 달콤했던 신혼의 나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이 났다.
남편과 나는 정반대였다. 전형적인 일 중심의 남편은 매사에 완벽했고 빈틈이 없었으며 자로 잰 듯 정확해야 했다. 모든 물건은 제자리에 놓여있어야 했다. 내가 틀렸다며 잔소리와 지적을 했다. ‘치약을 왜 이렇게 짜. 밑에서부터 눌러야지.’ ‘문지방 좀 밟지 마.’ ‘신발 좀 똑바로 정리해.’
남편에게 하소연했다. “여보, 애들 즐겁게 놀면 되고 어질러 놓으면 한꺼번에 치우면 되는 거지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해요.” 하지만 남편은 힘들어했다.
미안한 마음에 고쳐보려 애썼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성공률은 열 번 중 두세 번이었다. 나도 모르게 또 어질러 놓았다. 기어코 고치려는 남편의 잔소리는 집요했다. 수위는 점차 올라갔다.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할 핏줄을 건드렸다.
“아니, 당신은 집에서 이런 것도 안 배웠어.” 화가 난 나는 되받아쳤다. “그러는 당신 집은 얼마나 대단한데요.” 끝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시작됐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나는 터득했다. ‘노력해도 잔소리를 듣고 노력 안 해도 들으니 차라리 노력하지 말고 잔소리를 듣자.’
고집으로 맞섰다. 남편 말을 들은 척도 안 하고 더 어질러 놓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죽어도 안 했다. 심지어 명백한 잘못 앞에서도 입을 다물었다. 화내고 싶지 않은 남편이 몇 번이고 사과를 요구해도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미안하다는 말이 죽기보다 하기 싫었다.
어린 시절의 나도 그랬다. 아버지가 거짓말한 나에게 매를 대기 시작했다. 열대, 스무대, 서른대 숫자는 계속 올라가고 연약한 종아리엔 피멍이 맺혔다. 안타까운 어머님은 ‘잘못했다고 빌라’며 애걸했다. 매질을 그만두고 싶었던 아버지도 몇 번이고 ‘잘못했지’라고 물었지만 나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그 고집스러운 자아가 한 가정의 아내라는 역할 속에서도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있었다.
견디다 못한 남편이 폭발했다. 분노는 남편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순식간에 괴물로 변했다. 공격적이고 파괴적이고 부정적이고 극단적인 말들이 무차별로 쏟아졌다. 이후 남편은 자신을 자책하며 괴로워했다. 가정은 미리 맛보는 지옥이었다.
성질로 나의 고집을 꺾으려 했던 남편과 고집으로 남편의 성질을 이기려 했던 결과는 처참했다. 우리는 죽어가고 있었고 결혼도 종착지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이혼을 생각했다.
***[역경의 열매] 김향숙 (4) “네가 먼저 변하라” 하나님의 따끔한 충고에 무릎 꿇어
이혼 서류 내밀며 최후통첩했지만
도장 찍어주겠다는 냉랭한 대답뿐
먼저 고집 꺾기 싫어 주님과 힘겨루다
순종 선택하고 마음에 평화 찾아와
2012년 한 일간지에 실린 김향숙(오른쪽) 송길원 대표의 사진. 권혁재 중앙일보 기자가 부부 갈등과 대립을 코믹하게 연출해 촬영했다. 김 대표 제공
결혼 5년 만인 1989년 이혼 신고서를 썼다. 하나님이 만드신 결혼의 의도와 우리 가정의 모습은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가까이 가고 싶지만 다가서면 너무도 다른 모습에 남은 것은 상처뿐이었다. 창살 없는 감옥을 사는 기분이었다. 출구 없는 미로 속을 걸어가는 느낌이기도 했다. 더 이상 싸울 기력조차 없는 한계에 도달했다.
결국, 최후통첩을 보내기로 결단했다. 서글퍼 목 놓아 울며 버스에 올라 가정법원에 들어섰다. 모든 이의 시선이 나를 비난하는 듯했다. 서둘러 이혼 서류를 작성했지만 그것은 마지막 실낱같은 희망이기도 했다. 남편이 혹시 충격을 받고 회개할까 하는 희망 말이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남편은 말했다. “이혼? 뭐가 무서워서 못 하냐, 도장 찍어주면 될 것 아냐.” 짧지만 강한 한마디를 내뱉고 집을 나가버렸다.
나는 홀로 남아 방안을 뒹굴며 통곡했다. 문득 하늘을 바라봤다. 거기에 우리 가정의 건축자이신 주님이 계셨다. 그분이 나에게 물으셨다. “누가 이겼느냐.” 어디에도 승자는 없었다. 우리 둘 다 패자였다. 그 주님을 향해 포기를 선언했다. “하나님, 도저히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어요. 이제 끝낼래요.” 주님은 나를 슬피 바라보셨다.
그때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다. 더 못 견딜 고통이었다. 어미로서 차마 못 할 일이었다. 가슴 찢어지는 아픔이었다. 사흘 밤낮을 울부짖고 몸부림치고 가슴을 치며 주님을 찾았다. 묻고 또 물었다. “하나님, 함께 살아도 고통이고 헤어져도 고통인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주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변해라, 네가 변해야 한다.” 나는 강하게 항변했다. “아니 주님, 왜 저더러 변하라 하십니까. 남편이 먼저 바뀌어야죠.” 주님은 계속 말씀하셨다. “네가 먼저 변해라.”
하나님과 힘겨루기는 계속됐다. “싫습니다.” “네가 변하면 남편도 변할 것이다.” “그걸 왜 제가 먼저 해야 하냐고요. 남편은 성질 나쁘죠, 잔소리 심하죠, 감정 못 읽죠, 걸핏하면 소리 지르고….” 나는 끝도 없이 남편이 먼저 변해야 할 이유를 고자질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셨다. “향숙아, 너는 완전하니. 그래서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거니.” 암울했던 청년 시절에 만났던 십자가 사랑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제야 내 모습이 보였다. 절대 미안하다고 말할 줄 모르는 고집, 급한 성격, 앞뒤 생략하고 결론만 말하는 습관, 어리석음, 무질서, 열등감, 게으름, 우울감, 미루는 버릇…. 상처투성이였던 내가 변해야 할 이유는 더 많았다.
주장하는 내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마침내 하나님께 항복했다. “주님, 잘못했습니다. 모자란 아내입니다. 제가 먼저 변하겠습니다.” 이혼하는 고통과 이혼하지 않고 사는 고통, 둘 다 희망이 없는 고통이었다. 하지만 나를 변화시키는 고통은 희망이 있는 고통이었다. 나는 제3의 고통을 선택했다. 아니 순종했다. 이 고백 끝에 깊은 평화가 찾아왔다.
이혼 서류를 찢어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때 이 고통을 택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가정사역자 송길원과 김향숙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가정을 회복시키려는 개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셨다.
***[역경의 열매] 김향숙 (5) 우리 부부는 ‘공사 중’… 서로 회개하고 눈물의 회복
부부 세미나 중에도 싸우기만 하다
서로 미완의 존재임을 깨닫고 화해
기독교가정사역연구소 시작한 남편
동역자로 함께하며 가정사역자 길로
김향숙 대표 부부가 1989년 김인수 김수지 박사가 부산에서 개최한 부부 세미나에 참가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송길원 대표, 김 대표, 김 박사 부부. 김 대표 제공
결혼 5년 만에 겪은 이혼장 사건은 내 생애 가장 큰 역경이었다. 미리 맛보는 작은 천국을 꿈꿨으나 미리 맛보는 참혹한 지옥이었다. 하나님의 가정 건축설계도를 본적도 배운 적도 없이 내 멋대로 살아온 결과였다. 이혼의 위기는 넘겼지만 즉시 불행이 끝나고 행복이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배움이 없으니 또다시 넘어졌다.
1989년 이제는 고인이 되신 김인수 김수지 박사님이 부산에서 개최한 부부 세미나에 남편과 참여했다. 강의를 듣고 방에 들어가 대화를 나누는데 우리는 매번 싸웠다. 남편은 이 상황 자체를 못 견뎌 했다. “여기까지 와서 싸우는 부부는 우리밖에 없을 거야. 관둬. 그만두자고.”
참담하고 참혹했다. 급기야 체면도 내팽개치고 세미나 현장을 뛰쳐나가려던 순간이었다. ‘공사 중’이라는 단어가 우리를 붙잡았다. ‘우리 둘 다 미완의 존재였구나. 남편도 나도 아직 공사 중이었구나.’ 이 깨달음 하나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포기하지 않고 세미나 끝까지 버텼다.
마지막 기도 시간에 하나님이 개입하셨다. 둘이 끌어안자 회개의 눈물이 쏟아졌다. ‘네 탓’이 사라졌다. “여보 미안해요.” 나는 남편의 최대 약점인 분노 조절을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폭발을 부추기는 못난 아내였다. 남편도 나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다. 한참을 울었다. 그 눈물이 회복이었다.
첫 회복의 경험은 놀랍고 신기했다. 가정사역의 힘을 알게 됐다. 이후 변화를 향한 발걸음은 빨라졌다. 당시 기독교에는 부부 관련 콘텐츠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종파를 초월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배웠다. 그러나 이 모든 프로그램을 능가하는 것이 있었다. 성경 말씀이었다.
우리는 차이 때문에 이혼할 뻔했다. 나와 다른 것은 틀렸다며 고치려 했다. 그러나 나와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이 톨레랑스(Tolerance) 정신의 배경은 성경이었다. 말씀에 순종하자 우리는 하나가 됐다. 결국 가정 사역은 말씀 사역이었다. 가정사역단체 하이패밀리의 정체성이 확립된 순간이었다.
회복되고 보니 주위에 힘들어하는 가정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됐다. 온몸으로 겪어봤기에 보는 것만으로도 아팠다. 이즈음 남편이 기독교가정사역연구소를 시작하겠다 선언했다. 1992년이었다. 반갑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하나님과 남편에게 순종하니 저절로 가정사역자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처음에는 주로 아버지학교 결혼예비학교 아내행복교실 등 남편이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나는 함께 진행하는 동역자의 위치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행가만(행복한 가정 만들기) 부부 세미나는 당시 하이패밀리 대표 프로그램이었다. 30대 후반의 젊은 부부가 남긴 참석 소감을 지금도 기억한다.
“6년을 살다가 이혼을 했습니다. 제 실수로. 날마다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여기에 와서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라는 하늘의 뜻을 알게 됐습니다. 죽을 용기로 다시 시작하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습니다.” 이 부부는 마지막 날 앙코르 웨딩을 올렸다. 이후 이 세미나는 KBS ‘다큐3일’(2007년) ‘VJ 특공대’(2017년)에 방영돼 수많은 부부를 회복시켰다.
***[역경의 열매] 김향숙 (6) 철저히 외로웠던 아버지의 마지막 숨 앞에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용서의 마지막 기회 주셨고
아버지는 마침내 용서 선물하고 떠나
용서하는 여정에서 용서의 힘 깨닫고
가정사역에 치유 사역 접목되기 시작
김향숙 대표의 남편 송길원(오른쪽) 대표가 1994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김 대표 아버지(왼쪽),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김 대표 제공
“누나, 아버지 산소호흡기 떼셨어.”
1997년 12월 이른 아침, 남동생에게서 긴급 연락이 왔다. 급히 비행기를 타고 부산 복음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실 문을 열자 시체처럼 누워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샛노랗게 변한 눈동자는 멈춰 있었고 깡마른 몸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머리맡에 섰다. 지나온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청년 시절 예수님을 만났을 때 십자가 앞에 미워했던 아버지를 내려놓고 크게 울었다. 이제 아버지를 사랑하겠노라 고백했다. 하지만 막상 아버지 얼굴을 마주하면 화를 폭발하던 모습이 겹쳤다. 불안 원망 미움 분노가 교차했다. 마음은 다시 얼어붙었다.
아버지는 신학교를 은퇴하자마자 일흔의 나이에 러시아 선교사로 떠났다. 모스크바에 세워진 신학교 총장직을 수락한 것이다. 이후 1년간 힘차게 사역하다 대상포진에 걸린 뒤 잘못된 치료로 신장이 망가졌다. 귀국하자마자 혼수상태에 빠진 아버지를 의사들은 살려냈다. 일주일에 세 번씩 혈액투석을 하다가 결국은 더 이상 가망성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나는 당시 서울에 머물면서 부산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터라 부산에 내려갈 때마다 아버지 병상을 지켰다. 가끔 의식이 돌아오면 많은 이야기를 하셨다. 울릉도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전도자의 아들로 태어나 늘 배고픔에 시달렸지만 그렇게 공부가 하고 싶었다 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무작정 집을 나와 낮에는 철도 지기로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면서 검정고시를 통과해 박사 목사 교수까지 되고 대학 부총장까지 지냈다. 유학 한번 가 본 일 없이 영어 일본어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던 아버지의 삶은 신기했다.
나는 천재적인 삶 너머에 철저히 홀로였던 아버지를 봤다. 발가락이 잘려나가고 신장이 다 망가져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을 때조차 옆에 가족이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이해했다. 잔혹성이 아니라 연약함이 보였다. 아버지 됨과 남편 됨이 무엇인지 본 적도 배운 적도 경험한 적도 없었던 것이다. 가만 보니 불쌍했다. 용서란 잊어주는 것이 아니라 관점을 바꾸는 것이었다.
바로 그 아버지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오래전에 해야 했을 말을 이제야 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세 번의 고백. 기적처럼 모든 감정의 찌꺼기가 사라졌다. 머리로 이해된 용서가 가슴으로 내려왔다. 하나님은 내게 용서의 마지막 기회를 주셨고 아버지는 마침내 용서를 선물하고 떠났다. 내 속에 있던 분노의 뇌관이 제거됐다.
아버지를 용서하는 여정에서 용서의 힘을 알게 됐다. 가정사역에 치유사역이 접목되기 시작했다. 치유되지 않은 부모나 부부의 상처는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대물림된다. 용서를 통해 이 대물림을 끊어내야 했다. 나는 상처 입은 피해자에서 치유 받은 치유자로 다시 서게 되었다.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선교의 꿈은 나의 DNA에 각인되어 있었다. 2007년 12월 16일 우리 부부는 부산 호산나교회에서 가정선교사 1호로 파송되었다. 이후 가정사역 MBA를 통해 중국 캄보디아 대만 호주까지 가정선교사가 계속 세워지고 있다. 이제 하이패밀리는 전 세계 가정을 품으라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서게 됐다.
***[역경의 열매] 김향숙 (7) 기러기 가족으로 살던 아픔이 가정사역 원동력으로
남편의 안식년에 가족이 머물렀던 미국
아이들 학교 적응하며 미국서 양육 결정
김향숙 대표가 2004년 서울 서초구 양재시민의숲에서 찍은 가족사진. 왼쪽 윗줄부터 시계방향으로 첫째 예찬, 둘째 예준, 송길원 대표, 김 대표. 김 대표 제공
1998년 여름, 우리 가족은 미국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 도착했다. 남편의 안식년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1년 예정이었던 미국 생활이 8년으로 연장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1년이 지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쯤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이들은 이미 미국 학교생활에 완전히 적응한 상태였다. 휴일이라 학교가 쉬면 종일 슬퍼했다. 교육시스템이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줬다. 남편과 오랜 대화 끝에 기러기 가족이 되기로 했다. 나는 남아서 아이들을 양육하고 남편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방학마다 남편이 미국에 들어와 가족들과 합류했다.
8년간 오헤어 공항은 우리 가족의 만남과 이별의 추억으로 가득했다. 분리의 아픔을 덜어주려는 남편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올 때마다 늘 깜짝 이벤트를 준비했다. 어느 날은 극심한 더위에 중절모를 깊이 눌러쓰고 검은색 선글라스와 흰색 마스크로 얼굴 전체를 가린 채 나타났다. 모자와 마스크는 물론이고 팔 등 배 엉덩이 등 온몸에 사진이 붙어 있었다. 활짝 웃고 있는 우리 가족의 모습이었다. 선글라스를 벗고 나서야 남편인 줄 알았다. 우리는 박장대소했다.
함께 지내다가 떠날 시간이 다가오면 아이들은 침울해졌다. 떠난 아빠를 그리워하며 몇 날 며칠을 울었다. 잦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었지만 가족 단절이 생겨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처음 가정사역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 먼저 우리 가정 안에서 사역을 제대로 하는 부모가 되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했다. 이 약속은 기러기 가족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유효했다. 거의 매일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하나님은 이 상황에서도 일하셨다. 기러기 가족의 경험을 통해 시대적 아픔에 대한 해답을 주고 싶어 하셨다. 당시 한국에서는 해외 조기 유학 붐이 불면서 기러기 가족이 급증했다. 부작용도 많았다. 이혼이나 청소년 범죄, 자살률 증가, 중독 등 기러기 가족과 관련된 육체적·심리적 문제가 연일 뉴스를 장식하고 있었다. 기러기 가족으로서 마음이 아팠다. 이 긍휼의 마음은 가정사역의 원동력이 되었다.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행동해야만 했다.
기러기 가족 서포터즈를 결성하고 기러기 부부관계회복캠프, 기러기 가족에게 주는 10가지 지혜와 기러기 가족의 8가지 유형 발표, 기러기 아빠와 일반인 대상 의식실태조사 등을 진행했다. 두 아들은 ‘우리 행복, 우리가 지킨다’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가정평화를 지키는 ‘와이 홈 키퍼스(Y-Home keepers)’운동을 펼쳤다. 한부모가족 힐링캠프 등 소외된 가족 사역으로도 발전했다. 홀로 사춘기 자녀를 양육하면서 겪었던 치열한 전쟁을 책 ‘행복샐러드’로 엮어 출간했고 박사학위 논문도 완성돼 이를 바탕으로 사춘기 부모교실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기독교가정사역연구소 미주 본부를 운영하며 기획 재정 사무 행정 홍보 진행까지 모두 혼자 했다. 혹독한 훈련이었다. 돌아보니 하나님의 경영수업이었다. 역경이 클수록 열매가 풍성했다. 두 아들을 대학에 보낸 2006년 드디어 귀국했다. 가정사역자로서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되었다.
***[역경의 열매] 김향숙 (8) 방송이 선물한 엄마의 사랑 고백 “향숙아 사랑한다”
다큐 시리즈 촬영 중 PD 요청으로
어머니와 공기놀이 장면 담으면서
벌칙으로 이긴 사람에게 사랑 고백
아버지에게 못 했던 응어리 풀어
2008년 방송된 EBS ‘다큐 여자’에서 김향숙(왼쪽) 대표가 어머니와 공기놀이를 하며 서로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영상 캡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SBS) ‘백 마디 말보다 소중한 단 한 번의 포옹’(SBS) ‘다큐 3일’(KBS1) ‘신세계’(MBN) ‘교육위원회’(JTBC) ‘종교와 인생(KBS 라디오)’ ‘부부수업 파뿌리’(MBN)….
2006년 귀국하자마자 방송국 출연 요청이 쏟아졌다. 기독 언론이 아닌 일반 언론에서 말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8년간 미국에서 사역했고 한국에서는 방학 중 잠깐 활동한 것이 전부였다. 내가 한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이제 막 한국 사역을 시작한 나에게 날개를 달아준, 하나님의 귀국 선물이었다.
초기에는 카메라 앞에만 서면 울렁증이 심했다.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방송이 나가고 나면 큰 반향이 일었다. 세상적 가치와 맞서 복음적 가치를 전하는 데 방송만큼 효과적인 통로는 없었다. 방송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해야만 하는 사역이었다. 방송 출연이 잦아지면서 울렁증도 점차 사라졌다. 이후 ‘4인 4색’(CTS) ‘내가 매일 기쁘게’(CTS) 등 기독 언론에서도 방송 사역을 이어갔다.
하나님은 더 큰 선물을 준비하고 계셨다. 2007년 EBS에서 연락이 왔다. ‘다큐 여자’ 시리즈의 마지막 주인공으로 출연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이듬해 ‘향숙씨의 오 해피데이’라는 제목으로 3부작이 방영될 예정이라고 했다.
당시 나는 일흔이 된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난 뒤 홀로 되신 어머니는 아버지와 지냈던 집을 떠나지 않았다. 그랬던 어머니가 웬일인지 고집을 꺾고 잠시 우리 집으로 오셨을 때였다.
어느 날 어머니가 화단의 장식용 돌멩이 다섯 개를 주웠다. 눈썰미 좋은 PD가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어머니, 뭐 하시려고요.” “공기놀이 좀 하려고.”
촬영팀은 엄마와 딸이 공기놀이하는 모습을 담고 싶어했다. 나는 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어머니께 제안했다. “엄마, 우리 내기해요! 엄마가 이기면 내가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말하고 내가 이기면 엄마가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해 주세요. 지금까지 딸한테 사랑한다고 말한 적 한 번도 한 적 없잖아요.”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말이었다. 사실이었다. 나는 이 말을 꼭 듣고 싶었다. 아니 이 말을 꼭 들려드리고 싶었다. 아버지를 떠나보내며 가장 후회했던 것이 바로 이 말 한마디였다. 너무 늦게 고백했기 때문이다. “향숙아, 나도 너를 사랑한다.” 이 말을 나는 아버지에게서 듣지 못했다.
엄마와의 내기서 내가 이겼다. 어머니는 쑥스러워하시면서도 깔깔대고 웃으며 나를 끌어안고 말했다. “향숙아, 사랑한다.” 나도 어머니를 꼭 안고 말했다. “엄마, 사랑해요.”
처음이자 마지막 고백이었다. 어머니는 석 달을 머무신 후 집으로 가셨고 넉 달 후 세상을 떠나셨다. 방송이 모녀에게 작별인사를 선물했다. 지금도 엄마가 그립거나 삶이 버거울 때면 그 영상을 꺼내 본다. 보고 또 봐도, 듣고 또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혹자는 가족을 뜻하는 영어 ‘Family’엔 ‘Father And Mother I Love You(아빠 엄마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의미가 담겼다고 말한다. 가정사역은 바로 이 말을 더 늦기 전에 가족들에게 전하게 하는 일이다. 이 고백으로 용서가 완성되는 것을 나는 경험했다.
***[역경의 열매] 김향숙 (9) 자립형 가정사역으로 패러다임 전환… 교회 내 전문가 키워
코로나19 통해 가정의 소중함을
알게 되면서 가정사역 관심 급증
자립형 가정사역 콘퍼런스 첫 개최
교회마다 자체 사역 ‘놀라운 열매’
김향숙(앞줄 왼쪽 네 번째) 대표가 지난해 8월 경기도 양평 하이패밀리에서 목회자를 위한 자립형 가정사역 콘퍼런스 참석자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김 대표 제공
기러기 생활 8년간 남편은 아내 없이 홀로 하이패밀리를 운영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타고난 가정사역자다. 여성의 재능이 설거지 개수대로 흘러가는 걸 아까워하다 못해 안타까워한다. 2006년 귀국한 후 남편이 제안했다. “여보, 가정사역 평생교육원 좀 맡아줄래.” 1996년 가정사역전문가 양성을 위해 ‘가정사역 아카데미’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평생교육원은 현재는 ‘가정사역 최고위과정(MBA)’으로 발전해 있다.
남편을 통해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이라 여겼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나를 하나님이 사용하시기로 작정하셨다. 하나님은 몽당연필로도 명화를 그려내는 분이 아니신가. 기쁨으로 순종했다.
전 세대를 아우르는 가정사역의 특성상 부부가 함께하는 것은 하이패밀리의 큰 자산이었다. 아버지학교 부부행복학교 해피엔딩스쿨 등 남편이 이미 탄탄하게 개발해둔 콘텐츠에 사춘기부모교실 영유아부모교실 아빠육아교실 등 귀국 후 내가 개발한 콘텐츠가 통합되면서 커리큘럼이 풍성해졌다. 내 속에 잠자고 있던 창의성을 실험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 당시 가정사역은 스타 중심이었다. 몇 안 되는 인기 강사들이 전국을 다니며 강의를 했다. 상담 현장에서 수많은 고통을 목격했다. 부부 갈등이나 사춘기 자녀 문제로 신음하는 부모들, 그리고 공황장애 우울증 ADHD로 고통받는 자녀들…. 그들은 지옥 같은 가정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절벽 아래 떨어진 후 구급차를 부르기 전에 절벽 위에 울타리를 쳐야 했다.
문득 의문이 생겼다. “교회는 뭐 하고 있는 걸까. 1년에 한두 번 외부 강사를 초청해 강의 듣고 난 뒤 강사가 떠나면 성도들의 가정은 누가 돌볼까.” 목회는 목양이고 가정사역은 목양사역이다. 목양을 계속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가정에서 부모가 집밥을 해먹이듯 교회가 가정사역을 직접 하면 된다. 바로 자립형 가정사역이다. 2015년 이를 처음 제시했을 때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코로나19를 통해 가정의 소중함을 알게 되면서 관심이 급증했다. 2017년에 설문조사와 함께 최초로 자립형 가정사역 콘퍼런스를 개최했다. 외부 강사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전문가를 키워낸 교회들이 직접 사례를 보여주자 한국교회도 확신을 얻기 시작했다. 현재 100여개 교회가 의뢰형에서 자립형으로 전환했다.
열매는 놀라웠다. 가정 회복과 변화가 개교회를 중심으로 전국에서 일어났다. 프로그램 개발자인 우리보다 교회 내 가정사역자들이 진행을 더 잘했다. 각 교회가 자체적인 가정사역 시스템을 갖추게 되면서 전문적이고 지속 가능한 가정사역이 가능해졌다.
탁월한 강사 양성을 위해 한국직업능력연구원 인증 자격제도를 마련하고 협회를 통한 자격취득시스템을 구축해 자격증 시대를 열었다. 드디어 2021년 한홍 새로운교회 목사님 후원으로 MBA 과정이 사이버 교육으로 전환됐다. 시공간을 초월한 자립형 가정사역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현재 세계 12개국에서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사과 속의 씨앗은 누구나 헤아려도 씨앗 속의 사과는 하나님만 아신다. 자립형 가정사역도 그러했다.
***[역경의 열매] 김향숙 (10) 고통 겪는 단 한 명의 사모라도 치유할 수 있다면…
귀국 후 개발한 첫 콘텐츠 ‘러빙유’
사모로서 성도들 기대 부응하기 위해
채워주려고 애쓰다 생기는 ‘사모병’
그들의 고통 절감하고…
김향숙(원 안) 대표가 지난해 5월 경기도 양평 하이패밀리에서 열린 74차 한국 러빙유에 참가한 사모와 여성 성도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 김 대표 제공
2006년 12월 사모 20명과 스태프 5명이 경기도 양평 하이패밀리에 모였다. 사모 치유회복세미나 ‘러빙유(Loving You)’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귀국 후 개발한 첫 콘텐츠였다. 사모는 역경의 대명사다. 소위 ‘연고대(연단과 고난의 대학)’ 수석 입학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날 제자 사모가 머리를 빡빡 밀고 나타났다. 암에 걸린 줄 알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연을 들어보니 성도들 때문이었다. 긴 머리를 하고 갔더니 한 권사가 말했다. “아가씬 줄 아나 봐. 사모가 어려 보여서 뭐 하려고.” 그래서 나이 들어 보이려고 파마를 했더니 다른 집사가 비아냥댔다. “50대 아줌마처럼 촌스럽게 그게 뭐예요.” 신경이 쓰여 다시 단발로 폈더니 이번에는 또 다른 권사가 쏘아붙였다. “젊어 보이려는 것도 유분수지 고등학생인 줄 아나 봐”. 결국 짧게 잘랐더니 이번에는 “사모가 요즈음 무슨 일이 있나 봐”라며 수군댔다. 화가 난 사모는 머리를 아예 밀어버렸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끝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충격이었다. 21세기에도 이렇게 살아가는 여성들이 있다니. 인권 사각지대에 방치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교역자도 권사도 그렇다고 평신도도 아닌 이 모호한 위치가 일방적인 역할 기대를 낳은 것이다. 사모는 한 명인데 그를 향한 역할 기대는 성도 수만큼이다. 애초부터 채워줄 수 없는 기대임에도 채워주려고 애쓰다 병이 난다. 이른바 ‘사모병’, 괜찮은 척하는 병이다. 아파도 괜찮은 척, 화가 나도 괜찮은 척, 슬퍼도 괜찮은 척….
나도 사모다. 나는 사모병을 겪지 않을 줄 알았다. 2017년 9월 남편이 경기도 양평에 청란교회를 개척했다. 처음으로 담임 사모가 됐다. ‘사모의 심장’이라는 책을 쓸 만큼 사모들의 아픔을 잘 아는 남편은 일부러 나에게 가정사역원장이라는 공식 직함을 줬다. 그런데도 성도들은 나를 모함하기도 하고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며 비난하기도 했다. 머리로만 알던 사모의 고통이 온 마음으로 다가왔다. 통곡하며 울었다.
나와 같은 고통을 겪는 단 한 명의 사모라도 살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이 거룩한 부담은 치유사역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선택이 아니라 순종의 문제였다.
내년이면 한국 러빙유가 20주년을 맞는다.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수많은 사모가 살아났다. 하나님이 써 내려간 회복 스토리는 기적 그 자체였다. “죽고 싶은 마음으로 왔다가 살고 싶은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사모라는 감옥 안에 스스로를 가두었던 내가 이제는 사모라는 행복한 세상으로 다시 날아갑니다.”
내년엔 미국 동부 러빙유가 10주년을 맞고 보스턴 러빙유가 새롭게 출발한다. 러빙유에서 회복한 후 강력한 후원자가 된 이들의 연대가 있어 가능한 일이다. 이 스토리는 ‘결혼한 여자도 힐링이 필요해’(2015, 두란노)라는 책으로도 출간됐다.
이제 사모의 자리는 덫이 아니라 닻이 됐고, 돛을 달고 날아오르는 사모들은 당당하고 아름답고 행복하다. 꿈 끼 깡을 회복한 사모들이 외친다. “나는 사모다!” 한마디 더 외친다. “니들이 사모 맛을 알아.”
***[역경의 열매] 김향숙 (11) 갱년기 늪에 잠들었던 끼와 열정, 춤 만나 다시 깨어나
건망증, 감정 기복, 우울, 무기력 등
몸의 변화로 마음과 영혼까지 흔들려
지인 사모 권유로 ‘춤 세미나’에 참가
김향숙(오른쪽) 대표가 2003년 송길원 대표와 함께 앙코르 웨딩을 하는 모습. 김 대표 제공
가정사역자로서 강의 상담 집필 방송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2007년 가을, 당시 나이 마흔일곱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이제는 파도타기를 즐길 법도 한데 나는 또다시 깊은 물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갱년기가 찾아온 것이다.
처음에는 건망증이었다. 단어 조합이 뒤엉켰다. 비슷한 단어인데 한두 글자가 틀렸다. 키친타올은 ‘치킨타올’로 바나바는 ‘바나나’로 양촌리는 ‘양수리’로 바뀌었다. 건망증은 점점 심해졌다. 단어가 기억나지 않았다. ‘이것’ ‘저것’ ‘그때’ ‘그 사람’ 같은 대명사를 자주 썼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리는 건 기본이었다. 하도 자주 잃어버리니 직원들이 폰 찾기 기능이 있는 스마트워치를 사줬다. 문제는 스마트워치까지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감정은 예고 없이 요동쳤다. 불쑥불쑥 화가 치밀었다. 예고도 없고 이유도 없었다. 어느 날 부엌에서 칼질하고 있는데 남편이 “여보” 하고 불렀다. 나는 칼을 도마에 ‘탁’ 내리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왜!” 놀란 남편은 “아무것도 아냐…” 하며 자리를 피했다. 불평이 늘어났고 자기주장은 강해졌다. 부부 세미나 진행 중에 남편과 다투기까지 했다. 남편은 이런 나를 ‘거라사의 광인’이라 불렀다.
얼굴은 화끈거리며 벌겋게 달아오르기 일쑤였고 외출조차 어려울 정도로 피부가 뒤집혔다. 잠도 오질 않았다. 불면증에 시달렸고 결국 우울증에 걸렸다. 무기력했고 공허했다. 그토록 열정을 쏟던 사역조차 싫어졌다. 남편과 함께 진행해야 하는 프로그램에서 내 차례에도 멍하니 앉아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날마다 불행한 얼굴로 죽음을 생각했다. 청년 시절 하나님 없이 살 때 생각했던 죽음과는 달랐다. 내 안에 나를 망치려고 작정한 괴물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정체를 몰랐다. 기도해도 소용이 없었고 기도조차 안 나왔다.
어느 날 지인 사모가 찾아왔다. 죽고 싶다는 말을 했다. 한 시간 가까이 자신의 고통을 호소했다. 놀랍게도 내가 겪고 있는 증상과 똑같았다. 비로소 괴물의 정체가 드러났다. 다름 아닌 호르몬이었다. 몸의 주인이 바뀌고 있었다. 여성호르몬 에스트로겐은 급감하고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이 급증했다. 불규칙하던 생리도 멈추면서 내 몸은 더 이상 생명을 잉태할 수 없게 됐다. 여자로서도 끝난 듯했다. 드디어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다. 호르몬 변화로 인해 바뀐 몸 시스템에 적응하느라 겪는 몸부림이었다.
문득 의문이 생겼다. ‘호르몬 변화는 몸에서 일어났는데 왜 마음과 영혼까지 흔들리는 걸까.’ 이 질문이 훗날 하이패밀리 사역에 얼마나 큰 전환점이 될지 그땐 몰랐다. 다만 몸과 마음, 영혼이 따로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어렴풋이 들었을 뿐이다. 사모는 떠나기 전 툭 한마디를 던졌다. “며칠 전에 춤 관련 세미나에 참가했는데 도움이 많이 됐어요. 사모님도 한번 가보세요.” 춤이라는 단어에 눈이 번쩍 뜨였다. 무작정 달려갔다.
세미나가 끝났을 때 내 가슴은 힘차게 뛰었다. 내 안에 깊이 잠들어 있던 춤의 끼와 열정이 깨어났다. 행복했다. 나는 평생 가야 할 내 길을 만났음을 직감했다. 바로 신체심리학자의 길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향숙 (12) 신체심리학으로 치유혁명… 하이패밀리 사역에 접목
댄스 테라피 3년, 무용동작치료 5년
병원 치료사로 4년 일하며 임상경험
수련생 지도 가능한 ARDT 자격 취득
하이패밀리 무용동작치료센터 개설
김향숙 대표가 신체심리학자로 활동하던 2017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동작을 취한 모습. 김 대표 제공
2007년 겨울 시작한 춤 세미나는 내 인생의 변곡점이었다. 알고 보니 댄스 테라피(Dance Therapy)라는 학문이 있었다. 1박 2일 과정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정식과정에 등록해 3년간 공부했다. 어느덧 갱년기의 늪에서 탈출해 있었다. 갱년기 때 던졌던 질문이 발전했다. “왜 몸을 움직였는데 마음과 영혼까지 회복되는 걸까.”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 하나님은 또 다른 학문을 준비하고 계셨다. 무용·동작치료(Dance Movement Therapy)였다. 인지 정서 행동의 통합을 위해 몸의 움직임을 심리치료적으로 활용하는 학문이었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공부가 2009년부터 5년간 이어졌다. 경기도 용인정신병원에서 4년간 치료사로 일하며 1000여건의 임상경험을 쌓았다. 마침내 2013년 슈퍼비전(경험이 많은 전문가가 경험이 부족한 전문가나 수련생을 지도)이 가능한 ARDT(공인무용동작치료전문가) 자격을 취득했다.
나는 이 놀라운 학문을 기독교적 가치와 함께 일반인, 특히 가정이 소명인 하이패밀리 사역에 접목하고 싶었다. 그러나 무용·동작치료사라는 용어는 적절하지 않았다. 춤을 가르치거나 배우는 것이 아님에도 사람들은 종종 오해하고 부담을 느꼈다. 고민 끝에 나를 ‘신체심리학자’로 포지셔닝했다. 신체심리치료 관련 콘텐츠를 개발하고 하이패밀리 사역에 적용했다.
현재 128차까지 진행한 ‘이모션 코칭’ 중 감정치유를 진행할 때였다. 불안장애를 앓는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이 함께 온 엄마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다시 잡으려 하자 엄마를 노려보더니 아예 등을 돌려버렸다. 몸은 분노 덩어리였다. 치유적인 접촉 몸놀이를 계속 제공했다. 뛰고 구르고 어루만지고 껴안으며 엄마와 아들의 몸이 만났다. 차츰 아들의 화가 풀렸다. 마침내 엄마 품에 안긴 아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마칠 무렵 아들은 양팔로 엄마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아들이 남긴 소감이다. “엄마가 저를 보는 순간 싸움을 걸고 싶었어요. 엄마가 저를 만지는 순간 싸움을 잊어버렸어요.”
이것이 바로 몸의 치유성이다. 몸속에는 마음을 치유하는 약이 있다. 하나님이 신묘막측하게 지으셨고(시 139:14) 몸 안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들어 있다.(롬 1:20) 나는 유레카를 외쳤다. 상한 감정을 치유하는 하나님(시 147:3)을 고백했다. 신비로웠다. 머리로 아는 1차 교육·치유 방식에서 머리로 알고(Knowing) 가슴으로 느끼고(Feeling) 몸으로 익혀서(Practicing) 삶에서 행하는(Doing) 4차 교육·치유 방식으로의 혁명이 시작됐다.
2012년 하이패밀리에 무용·동작치료센터를 개설하자 개인 상담부터 교회 기업 학교 정부 기관 등에서의 진행요청까지 쇄도했다. 신체심리치료사 양성이 시급했다. 2015년 신체심리치료학과를 개설하고 한국신체심리치료협회(KOBA)를 발족했으며 한국직업능력연구원 인증 자격 시스템을 갖췄다. 2016년에는 명지대 대학원 예술심리치료학과 객원교수로 활동했고, 그간의 임상 결과를 집대성한 ‘신체심리치료기법과 적용’(학지사)을 2024년 출간했다. 갱년기라는 역경의 늪에서 건져 올린 이 학문으로 하이패밀리는 ‘언어와 체험’이라는 두 날개를 달게 되었다.
***[역경의 열매] 김향숙 (13) 몸의 수난, 기도로 극복… 한예종 입학 ‘춤건강’ 탄생
세 번의 발목 인대 파열로 회복 불가 판정
허리, 갑상선, 어깨 등 계속된 부상에도
몸의 치유성 믿고 주님께 간절히 매달려
김향숙(왼쪽) 대표가 2018년 경기도 양평 하이패밀리에서 깁스를 한 채 사모 세미나인 러빙유를 진행하고 있다. 김 대표 제공
21세기 최악의 글로벌 재앙이었던 코로나19 때는 하이패밀리 사역도 중단됐다. 2019년부터 2023년까지 무려 4년에 걸친 암흑기였다. 교육·치유 콘텐츠를 책임지고 있던 나는 할 일이 없어졌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각 가정이 심각한 위협에 처하며 다시 할 일이 많아졌다. 가족갈등 예방수칙을 발표하고 가족 심리통합지원책을 마련했다. 야외공간과 유튜브를 활용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 무렵 연달아 몸을 다쳤다. 첫 번째 부상은 발목이었다. 남편과 등산로를 내려오던 길이였다. 낙엽 쌓인 돌계단을 왼발로 디뎠는데 발목이 휙 돌아갔다. 병원 진단은 왼쪽 발목 인대파열이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듬해엔 오른쪽 발목, 그다음 해에는 또다시 왼쪽 발목까지 총 3번이나 인대가 파열됐다. 다리 전체 깁스를 매번 3~4달씩 했다.
처음 다쳤을 때 의사는 말했다. “연세도 있으셔서 수술은 어렵고 치료를 한다 해도 발목이 불안정해 재발 가능성이 큽니다. 제대로 걷기 힘드실 겁니다.” 몸이 도구인 나에게는 사실상 사형선고였다. 춤추며 날아올랐던 몸이었기에 절망감은 더욱 깊었다. 나는 몸의 감옥에 갇혀버렸다. 삶의 질은 바닥을 쳤고 마음도 위축됐다. 자신감을 잃고 무기력과 우울감에 사로잡혔다,
병원에서는 약물과 주사치료를 권했다. 의문이 들었다. 수술도 불가능한 인대를 약물과 주사로 어떻게 복원한단 말인가. 통증과 증상만 관리하고 원인은 손도 못 댈 터인데 악화할 게 뻔했다. 나는 겨우 걸을 수 있는 몸이 아니라 춤추는 몸을 회복하고 싶었다.
현대의학의 한계를 절감하며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때 떠오른 질문은 이것이었다. “마음을 고치는 몸의 치유성이 몸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절박한 심정으로 몸의 치유성을 붙들었다. 하나님의 몸 설계를 자세히 들여다 봤다. 그분은 결코 우리 몸을 허술하게 창조하지 않으셨다. 몸은 회복을 위해 스스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인대 3개가 파열됐지만 부분 파열이었기에 여전히 기능하는 부분이 남아 있었다. 남은 인대와 근육과 힘줄들이 다친 부위를 대신해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기능하는 부분을 강화하는 재활운동을 택했다. 매일 3시간씩, 6개월간 치료에 매달렸다.
그 후에도 허리 디스크 재발, 갑상선 기능항진, 어깨 회전근개파열 등 몸의 부상이 계속됐다. 그래도 내 생체실험은 계속됐다. 몸의 치유성을 믿으며 길고 지루한 치료를 견뎌냈다. 걸을 수 없다던 나는 지금 걷고 뛰고 달리며 다시 춤추고 있다.
2021년, 나이 예순에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 무용원에 입학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무용수들을 가까이서 보니 아픈 학생들이 많았다. 무용상해예방 알렉산더테크닉 무용요법 무용생리학 등 몸 건강을 위한 해부학 과목들도 많았다. 하나님의 몸 설계를 제대로 알게 됐고 내 생체실험도 학문적 체계를 갖추게 됐다. 학업을 마치고 받은 전공은 춤건강(Dance Wellness), 학위 명은 예술 전문사였다. 올해 3월에 개설한 몸엔춤예술학교의 첫 번째 과목인 춤건강은 이렇게 탄생했다.
신체심리치료의 마지막 퍼즐이 맞춰졌다. 몸이 무너지면 가정도 무너진다. 몸을 세우는 일이 곧 가정을 세우는 일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향숙 (14) 신체심리학자에서 몸엔춤예술가로 생애 마지막 변신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춤추는 즐거움
남정호 선생님 만나 춤 DNA 깨어나
일상의 삶을 예술로 창조한 ‘예술춤’
‘몸엔춤예술학교’에서 행복 함께 나눠
김향숙(오른쪽) 대표가 지난해 제주도 한 카페에서 스승 남정호 선생과 교제하고 있다. 김 대표 제공
올해 3월 예순다섯 나이에 나는 신체심리학자에서 몸엔춤예술가(Soma&Dance Artist)로 생애 마지막 변신을 했다. 내 안에 깊이 잠들어 있던 춤의 DNA가 깨어난 것이다. 배경에는 남정호 선생님이 계셨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춤을 췄다. 아무도 없는 빈 공간은 어디든 무대였다. 안방 옷장에 달린 긴 거울 앞에서, 보름달이 휘영청 밝던 날 앞마당에서, 텅 빈 교회당 마룻바닥 위에서…. 춤을 출 때면 나는 책 속의 주인공이 돼 상상의 세계를 누볐다. 재투성이에서 벗어난 신데렐라가 되기도 하고 자유롭게 헤엄치는 인어공주가 되기도 했다.
고등학생이 된 후엔 춤추는 즐거움을 잊어버린 채 외롭고 우울한 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남 선생님이 부임하셨다. 그분의 무용 수업은 창의적이었다. 비 구름 나무를 나만의 몸짓으로 표현하라 하셨다. 나는 다시 춤추는 즐거움을 되찾았다.
졸업과 동시에 선생님과 인연은 끊겼고 다시 춤과 멀어졌다. 춤이 좋아서 빠져든 춤의 세계였지만 춤은 뒤로 밀려나고 신체심리학자로만 살아왔다. 2019년 우연히 TV에서 남 선생님을 다시 뵈었다. 이제는 거장이 된 모습이었다. 이 시대 최고의 현대무용가이자 안무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 등 거창한 직함을 가졌지만 오랜만에 만나 뵌 선생님은 여전히 소탈하셨다. 지난해에는 은퇴하신 후에도 춤꾼으로 무대에 선 선생님의 공연을 봤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춤의 힘이었다. “그래, 다시 춤추자.” 남을 살리다 소모됐던 내 몸이 살아났다.
질문이 이어졌다. “왜 춤은 무대 위 전문가의 전유물이어야 할까. 무대 아래 일반인의 공유물이 되면 안 될까.”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춤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여전했다. “나는 몸치, 춤치다.” “춤은 잘 춰야 한다.” “춤은 경건하지 못하고 퇴폐적이다.”
그중 가장 견고한 편견은 경건하지 못하다는 인식이다. 춤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하기 짝이 없다. 몸을 창조한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다윗도 여호와 앞에서 온 힘을 다해 춤을 췄다.(삼하 6:14) 다윗의 춤은 나의 춤, 나를 위한 춤, 저절로 추어지는 춤이다. 춤추는 것은 지구상의 온갖 시끄러운 일들을 외면하는 일이 아니라 일상의 삶을 예술로 창조하는 일이다. 나는 이를 ‘예술 춤’이라 부르기로 했다.
대한민국은 아프다. 행복하지 않다. OECD 38개국 중 삶의 만족도는 33위로 최하위권, 자살률은 부동의 1위, 우울증 환자 수는 100만명을 넘는다. 언제까지 제도를 탓하며 기다릴 것인가. 춤추면 행복 호르몬 엔도르핀이 급증하고 스트레스 호르몬 코르티솔이 급감한다. 춤은 지금 당장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나는 이 행복의 맛을 나누고 싶었다.
그렇게 ‘몸엔춤예술학교’가 탄생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춤춘다, 나도 그렇다’를 모토로 몸치(痴)를 춤치(致)로 만드는 춤신(神)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몸과 춤의 치유성이 만나자 신경실조증을 앓던 목사님이 회복되는 등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났다.
헨리 나우웬은 책 ‘춤추시는 하나님’에서 말했다. “결국 우리가 얻는 치유는 우리의 상한 영혼이 다시금 춤추게 하는 치유이다.”
***[역경의 열매] 김향숙 (15·끝) GMC서 펼칠 가정문화예술사역, 교회 넘어 세상 품으리라
33주년 맞은 하이패밀리 새로운 꿈
지친 선교사 위한 중증외상센터 건립
기독교계 최초 정부 기금 지원 받아
남편과 함께 하나님의 꿈 동행하길…
경기도 양평 하이패밀리 부지에 세워질 GMC(기독교문화체험관) 전경. 정택영 화백이 그렸다. 김향숙 대표 제공
내 인생 예순다섯 해 동안 만난 수많은 역경은 나를 상처 입은 피해자에서 상처 입은 치유자, 그리고 마침내 치유받은 치유자로 빚어내신 하나님의 훈련과정이었다.
“주님, 다시 일어서는 법을 깨우쳐주시고 무릎 꿇는 것 또한 잊지 않게 하소서.” 내내 붙들었던 기도였다. 수없이 넘어졌다. 내 힘으로 일어서보려 발버둥 치고 몸부림치며 가슴을 쳤다. 더 이상 일어설 힘조차 없어 주저앉아 포기하려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하나님께 항복선언을 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뒷전에 밀쳐두었던 하나님은 나의 일부가 아닌 전부가 됐다. 하나님은 매번 말씀으로 찾아오셨고 말씀은 나를 역경에서 건져 올렸다. 나는 말씀 앞에 부서졌다. 다윗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었다. “바로 내가 큰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 이제 이 종의 죄를 용서해주시길 간구합니다.”(삼하 24:10) 용서하고 용서받으니 은혜가 흘렀고 평화가 찾아왔다.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었다.
이 모든 역경을 거치는 동안 참으로 오랜 세월을 견디며 함께 해온 사람이 있다. 남편 송길원이다. 내게 춤 DNA가 새겨져 있듯 그에게는 가정사역 DNA가 새겨져 있다. 배운 가정사역자가 아니라 타고난 가정사역자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내가 가정사역자 신체심리학자 그리고 몸엔춤예술가가 된 것은 남편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사랑은 십자가 사랑을 닮은 사랑이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랑, 넘치는 사랑이었다.
하나님은 올해 33주년을 맞은 하이패밀리에 새로운 꿈을 주셨다. 처음엔 선교사들을 위한 중증외상센터 건립이었다. 몸 마음 영혼 가정까지 무너진 채 귀국하는 선교사들이 너무 많았다. 하나님은 이 선한 꿈을 지원하셨다. 기독교계 최초로 정부 기금 60억원을 지원받게 됐다. 프로젝트명도 GMC(기독교문화체험관) 건립으로 바뀌었다. 하나님의 꿈은 우리의 꿈보다 컸다.
하나님은 선교사뿐만 아니라 교회를 넘어 세상을 품으라고 명령하셨다. 시대적 아픔이자 국가적 과제로 떠오른 노령인구 1000만 시대와 우울증 환자 100만 시대에 공감의 마음으로 다가가길 원하셨다. 돌이켜보니 가정사역과 함께 GMC에서 펼쳐질 문화예술사역 콘텐츠가 이미 준비돼 있었다. 남편이 오랜 시간 구상한 장례문화혁명과 내가 하는 예술을 통한 4차교육·치유혁명이 그것이다.
또 다른 목표는 키즈 예술놀이학교를 만드는 것이다. 최근 5년 사이 6~11세 아동의 우울증이 두 배로 늘어났다. 약봉지를 한 아름 안고 찾아온 열 살 아이를 보며 절로 탄식이 나왔다.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몸맘건강교실 창의상상교실 감정소통교실 품성인성교실 중독예방교실 등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것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려 한다. 건강하고 행복한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어노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 못해 황홀하다.
나는 또다시 꿈을 꾸며 남편과 함께 역경의 파도 위를 춤추듯 항해하고 있다. 우리의 손을 잡고 함께 노 저어줄 더 많은 항해자를 기다리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