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나리는 지고 벗꽃비가 내리는 4月에
~~~역사 찾아 거닐어 보다<1>~~~
언 제 ; 2015년 4월 11일 오후
어디에 ; 경북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492
언제인가 정무공 동상 기념식때 잠시 참석하여
그곳의 이미지를 몇컷 담아 왔었는데 다시 섬세하게 조용히
담고 싶어서 모처럼 그 방면으로 갈 기회가 있어 들러보았었다.
◎ 정무공 최진립 장군 약전 ◎
본관은 경주, 자는 사건(士建), 호는 잠와(潛窩),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1568년 경주 내남면 이조리 충의당에서 부 최신보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3살때 모, 10살때 부가 일찍 죽어 외로이 되었으나 그 시련에 굴하지 않고 의기를
다지고 학문과 무예를 연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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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당 입구 입석부터 조화를 이룬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아우인 최계종(崔繼宗)과 의병을 일으켜
경주,영천,울산 등지에서 활동하였고 1594년 무과에 급제하면서 출사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다시 참전하여 결사대를 조직, 서생포와 울산 도산성 전투에서
군공을 세웠다.그 후 1600년 여도만호 겸 선전관, 1607년 오위도총부도사, 1608년 마량진첨사를 역임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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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공원 입석도~~
광해군 말기때에 능창군 옹립사건에 연루되어 갑산에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 후 복권되어 다시 가덕첨사, 경기수사와 삼도수군통제사, 전라좌수사
등 각지의 군진을 돌며 주요 군직을 수행했다.마지막으로 그가 있던 자리는
공주영장(公州營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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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근경절의 훌륭한 무구가~~~
중립외교를 펼치던 광해군이 쫓겨나고 상국인 명에 대한 의리를 중시하는
명분외교에 집착한 우리 조정은 7년에 걸친 조일전쟁, 인조반정 후 이괄의 난,
뒤이은 정묘호란에 이르기까지 연속되는 내우외환으로 피폐해진 조선의 실정을 도외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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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돌에도 좋은 문장이~~~
중원의 주인인 명(明)이 쇠퇴하고 만주의 청(淸)의 국운이 승천하여 천하의
정세가 바뀌고 있음도 애써 무시하고 친명배금 정책을 용감하게(?) 밀어붙였다.
만주의 청은 본격적인 중원진출을 앞두고 그 전에 후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표적은 바로 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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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공기념석도~~~
병법에 이르기를 지피지기(知皮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도 이기진 못해도 스스로를 위태롭게
하진 않는다고 하였는데우리 조정은 적도 모르고 나도 모르면서 섣불리 전쟁의
길로 나섰으니 이보다 더한 어리석음이 또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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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공원 전체를~~~
그럼에도 적인 청나라에 대한 방비는 또 얼마나 허술했는지. 한심하기 이를데 없었다.
1636년 12월 드디어 청 태종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공했다.
명장 임경업 장군이 지키는 의주의 백마산성을 지나쳐 그대로 한성을 직공하는데
그 수비진이 얼마나 허술했는지 순식간에 한성이 무너져 내렸고 천혜의 요새인 강화도
무너져 왕자를 포함하여 수많은 왕실가족과 관료들이 인질이 되고 말았다.
거기에 인조와 함께 파천했던 조정도 급히 피난했던 남한산성에 갇혀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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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 이정표도~~~
전국각지에서 고립된 인조를 구출하고자 근왕병이 차출되었다.
충청도에서도 근왕병 약 8천의 병력을 동원하여 관찰사인 정세규(鄭世規)는 출천했다.
당초 정세규는 70을 바라보는 노장인 최진립 장군을 제외하려 했으나 최진립 장군이 충의로
나가 싸워 죽기를 결심하고 강하게 자원하여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는 그와 함께 진군하여
남한산성이 지척인 용인 험천(險川)에 이르러 진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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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관 옆에서~~~
그러나 역시 청의 침략군은 전쟁을 알고 있는 노련한 군대였다.
그들은 근왕병들이 진군해 올 것을 미리 알고 그 길목인 험천에 일군을 두어 매복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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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문구와 충의관 모습을~~~
용인 험천에서 청의 기습을 받은 조선군은 일시에 무너져 내렸고
최진립 장군이 결사항전하여 수차례 막아내었으나 결국은 중과부적으로
장렬하게 전사하였으며 관찰사 정세규는 낙마하는 부상을 입고 퇴각하고 충청도
근왕병은 완전히 붕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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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과 뜻을 잘 몰라서~~~
마지막 전투에 임하여 최진립 장군은 부하들에게 후퇴할 것을 고하고
그 자신은 끝까지 제자리를 지키다 죽을 것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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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관 입간판을~~~
전후 과연 그는 수많은 시체 더미속에서 발견되었는데 그의 몸엔 수십개의 자상과
박힌 화살로 인해 처참하였으나 그 얼굴은 마치 살아있는듯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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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당 설명문도~~~
그의 사후, 조정은 그의 충의를 기려 시호를 정무(貞武)라 하였으며
1637년 병조판서에 추증,1647년 청백리로 녹선하였다. 또한 경주의 숭렬사,
경원의 충렬사에 제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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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꽃은 만발하고~~~
그로부터 시작하여 아들인 최동량, 손자인 최국선을 거쳐
마지막 최부자인 6대 최준에 이르기까지 명문가 최부자집이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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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대문 부터가 옛문화의 정취가 서린다~~
** 특별한 두 사노(私奴) 옥동과 기별**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마지막 전투인 용인 험천전투에서 그와 최후를 같이한
특별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옥동과 기별로 최진립 장군의 사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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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 내부로~~~
이들은 노비이기에 나라를 위한 전쟁에 참전할 이유도 또 싸워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지만
그들은 피하라는 최진립 장군의 명을 물리치고 그를 보호하며 싸우다최후를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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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자료관도~~~
그래서 이들은 노비이면서도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그들을 기리는 비각이
세워졌으며 또 그의 주인이었던 사람의 후손들에게 제사를 받는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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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와고택의 글씨가~~~
**경주 최부자 일가가 진정한 명문인 이유**
제1대인 정무공 최진립 장군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때 활약한 의병장이고 병자호란
때는 노구를 이끌고 출전하여 장렬히 산화함으로써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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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 사슴도 놀고~~~
제3대인 최국선에 이르러 그의 집안은 깨끗하게 부를 쌓아 일가를 이루는데
베품에도 인색함이 없었고 찾는 손님 대접에도 늘 후하여 인심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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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모각 주위를~~~
흉년을 이용하여 땅을 넓히지 말고 또 백리내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는 일가의 가르침을 보면 진정한 부자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것도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실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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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모각 정면에서~~~
마지막 6대인 최준선생은 또 어떠했는가.
그는 일가의 재산을 바쳐 독립투쟁에 헌신했다.광복회 사령 박상진 의사를
후원하고, 신돌석 의병장에게 은신처를 제공하였으며 지기인 백산 안희제 선생과
더불어 백산상회를 운영하여 독립자금을 대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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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게 가꾸어 놓은 소나무 한그루~~~
마지막엔 남은 부도 대학을 설립하여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그 일가의 부를
스스로 처분하였다.이는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궁극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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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패를 모신 충렬사를~~~
이런 훌륭한 일을 한 조상 한분만 있어도 명문이라 할것인데
경주 최부자집은 누대에 걸쳐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해 왔다. 그러므로
이들은 명가로 인정받고 존경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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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와선생 기념비와 오래된 고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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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식 비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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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돌의 출산지는 어딜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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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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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노각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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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동과 기별의 비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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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노의 표시를 이 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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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후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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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된 벗꽃은 만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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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담긴 고목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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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립 장군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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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 표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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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모습도 한 컷~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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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부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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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협천 전투 표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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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 오면서 다시 담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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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근원 표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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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서원 입석을~~~
===용산서원은===
있는곳 ; 경북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659
1993년 2월 25일 경상북도기념물 제88호로 지정되었다. 정무공 최진립(崔震立)을
향사하기 위해 1699년(숙종 25) 경주부윤 이형상(李衡詳)이 지방 유림과 함께 건립하였
으며, 이듬해 묘(廟)가 이루어져 위판(位版)을 봉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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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마을 입구 도로와 멀리 건물을~~~
1701년(숙종 27) 강당 및 남북재를 세워 강당을 민고당(敏古堂),
양 협실(夾室)을 흥인재(興仁齋)·명의재(明義齋)라 하고, 남재를 호덕재(好德齋),
북재를 유예재(遊藝齋), 문을 식강문(植綱門)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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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서원 전체를~~~
1711년(숙종 37) 권대규(權大規) 등의 진정소(陳情疎)에 의해 숭렬사우라는
묘액을 내렸는데, 이때 경주의 유림들이 원호를 용산서원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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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문도~~~
묘액의 글씨는 이익(李瀷)의 형 이서가 썼다.
이후 1870년(고종 7) 금령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1924년에 중건, 복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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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옆쪽을~~~
서원은 총면적 8,138㎡로 앞쪽에 강당인 민고당을 세우고
뒤쪽에 제향공간인 숭렬사를 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으로
배치되었으며, 입구에 신도비각을 세웠다. 소유자는 최채량이며, 경주최씨
가암파 문중에서 관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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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입구 삼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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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전당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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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편 숭렬사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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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열사우 앞에 향나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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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매화가 지는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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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꽃은 홍목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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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10년 5월 9일 경주의벙기넘일 일정 잘못되여 등굴(태용)아제,능계숙부님,금천(돈식)할배,저 4사람이 종손 최계량님의
안내로 선외가 왔다고 반갑게 맞아 주셔서 대접 잘받고 용산서원 방문하고 다녀온적이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오랜수목이 공간이 넓은데 걸인들이 불을 짚어서 내부을 많이 태웠는데 나무는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
있답니다,
그동안 정무공 동상 건립되고 주변 환경을 정리 잘되여있서 잘보았습니다,
영상 준비에 수고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