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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가가족 원문보기 글쓴이: 양천권 양희성
법련 4월호 특집기사
‘다음 50년’의 문을 열어라!
미래부 육성(상)
있는 힘껏 하루를 살며 자신의 숙명전환에 급급했던 학회의 초창기.
그때, ‘다음 50년’을 구상하며 미래부 육성에 고심한 제자가 있었다.
학회 창립 80주년, 100주년을 향하는 지금, 창가의 미래를 누가 리드하는가!
‘후계의 한 사람’을
철저하게
소중히 하라!
저출산화의 여파 속에서
창립 80주년을 향해 ‘청년·약진의 해’의 분투가 시작되었다.
창립 100주년의 학회는 어떻게 발전되어 있을까.
이케다 SGI회장은 지도하고 있다.
“학회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2030년을 짊어지고 세계 광포의 중핵이 될 사람이 바로 현재의 미래부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라고.
본부 대표자 회의에서 한 청년부가 이케다 SGI회장에게 질문했다.
“저출산화가 가속화하는 지금과 같은 시대에 미래부를 어떻게 육성하면 좋겠습니까?”
여러 모로 고민한 그 질문에 이케다 SGI회장은 “중요한 관점이다. 나도 진지하게 고심하고 있다”고 말하며 이러한 요지로 답했다.
“미래부의 성장이 학회의 운명을 결정한다. 저출산화가 진행되는 시대이므로 더욱더 ‘한 사람’이 중요하다.
철저하게 ‘한 사람’을 소중히 하는 것이다. 후계의 한사람 한사람이 ‘일기당천의 인재’로 성장해야 평화의 미래는 반석같이 되는 것이다.
그를 위해 나도 교육에 전혼을 기울여왔다. 미래부를 육성하는 데 온힘을 다해 주력해 왔다.”
“학회에서 보면 ‘미래의 보물’이자, 세계에서 보면 ‘희망의 태양’인 미래부를 잘 부탁합니다!”
마키구치 초대회장의 신념
창가학회는 창립 당시부터 ‘미래부’를 중요시했다.
학회 창립의 날(11월 18일)은 바로 《창가교육학체계》가 발간된 날이다. ‘어린이’에 대한 열띤 관점과 미래부를 향한 시선이 바로 학회 창립의 원점에 담겨 있었다.
미래 — 마키구치 초대회장의 자애로운 눈은 어린이 한사람 한사람의 내면속에서 똑같이 무상의 ‘보물’을 발견한 것이다.
“1천만 명의 어린이와 학생들이 수라의 갈림길에서 허덕이고 있는 현대의 고뇌를 다음 대(代)까지 이어지게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자 마음은 미칠 듯하고 구구한 훼예포폄(毁譽褒貶) 같은 것은 나의 안중에 없었다.”(《창가교육학체계》)
바로 이것이 마키구치 초대회장의 신념이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환희
마키구치 초대회장은 어떻게 하면 어린이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 심사숙고했다. 그것은 초대회장 자신이 잇달아 자식들을 잃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키구치 초대회장은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과 만난 감동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환희를 안고서 60년에 가까운 생활법(生活法)을 일신(一新)하기에 이르렀다”라고.
이러한 입신 당시에 느낀 환희 중 하나는 ‘세계의 어린이를 이 신심으로 반드시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14세였던 요시다 켄노스케 씨가 좌담회에서 마키구치 회장과 만난 추억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한 사람씩 자기 소개를 시키고 격려하셨습니다. 어린이라고 해서 결코 대충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인격체로서 높이 평가하며 엄하게 신심의 기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총회 때는 초·중학생들의 서예도 전시하셨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의 위대한 인간교육의 전통은 초대, 이대(二代), 삼대(三代)로 그대로 계승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이를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하는 것이 신심
정신의 계승
《창가교육학체계》의 원고 정리부터 출판까지 홀로 분주했던 사람이 도다 2대회장이었다.
‘창가교육’이라는 명칭도 도다 2대회장의 제안으로 결정되었다.
마키구치 초대회장이 쓴 메모를 도다 2대회장은 정리했다. 중복되는 부분은 가위로 잘라 다다미 8장의 방 가득히 한조각 한조각 늘어놓았다.
스승이 사색한 결정(結晶)은 제자의 생명에 불타올랐다.
이케다 SGI회장은 술회한다.
“어린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힘’, 즉 ‘가치창조의 힘’을 어떻게 끌어내어 개시오입(開示悟入: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지혜를 열게 하는 것)시키는가. 마키구치 선생님은 이 한 가지 점에 심혈을 기울이셨다.”
그러한 마키구치 회장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이 바로 도다 2대회장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아침 창제를
누가 신심을 계승할 것인가. 누가 창가(創價)를 이어받을 것인가. 도다 2대회장의 깊은 번뇌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투옥된 옥중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도다 2대회장은 감옥에서 이와테 이치노세키에 떨어져 살고 있는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구스노키 마사쓰라 공(公)은 11세 때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았다. 너도 열 살이다 … 혼자서 여행을 떠나는 것쯤 문제 없을 나이다. 강하고 올바르게 살거라.”
그리고 두 사람이 아침에 시간을 정해 제목을 백 번 부르기로 약속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두 사람의 마음’이 무선전신(無線電信)처럼 통하게 된다. 대화도 가능하단다. 이것을 부자동맹(父子同盟)이라고 하자.”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마사쓰라 부자의 맹세를 인용한 도다 2대회장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도다 회장 자신은 언제 출옥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신세였다.
그 당시의 일을 알고 있는 초창기의 선배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전쟁이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도다 선생님께서 굉장히 중요한 지도회를 여셨습니다.
저는 중요한 회합에 아이들이 소란을 피워 방해가 되면 선생님께 죄송스러울 것 같아 아이들을 다른 방에 모아 놓았습니다.
그러자 도다 선생님께서 엄하게 꾸중을 하셨습니다.
‘어째서 중요한 회합에 아이들을 참석시키지 않는가. 어린아이라고 해도 어엿한 한 사람으로서 존중해야 한다. 설령 지금은 아무것도 모를지라도 나중에 그 회합에 참석했다고 기억을 떠올리는 법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신심이다.’
그때까지 신심은 그저 어른들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잘못이며 아이들에게 신심을 가르치는 것이 어른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소년이여, 미래의 보물이여
위기에 처한 도다 회장의 사업에 돌파구를 열기 위해 젊은 이케다 SGI회장이 《소년일본》의 편집장으로 동분서주하고 있던 1949년. 괴로움의 한복판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가.
은사 도다 2대회장과 마찬가지로 학회의 미래를 짊어질 후계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광포의 대지도자인 두 사람의 생각은 이미 하나였다.
“《소년일본》 — 얼마나 풍요롭고 힘찬 단어인가. … 미래의, 차대의 사회를 건설할 일꾼이기에 일본의 보배로 생각해야 한다.”
(《젊은 날의 일기》 1949년 10월 24일)
“소년이여, 일본의 소년이여. 세계의 소년들이여. 바라건대 언제나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명랑하여라, 용감하여라, 천사와 같을지어다.”
(《젊은 날의 일기》 1949년 10월 24일)
“귀여운 아이들은 인생의 오아시스다. 존귀한 어린이를 만인이 함께 서로 소중히 한다면 전쟁을 피할 수 있는 하나의 큰 사상이 자연스레 만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날의 일기》 1949년 10월 30일)
어린이를 소중히 하면 평화의 일대 세력이 된다. 젊은 이케다 SGI회장의 뇌리에는 장대한 평화·문화·교육의 미래 구상이 솟구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한 통의 편지
〈수필 신·인간혁명〉에 고투하는 쓰루미 지부의 한 소년을 격려하는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1950년 무렵이었다고 기억한다. 요코하마 쓰루미의 회원님 댁을 방문했을 때 그 집의 부인부가 한 통의 편지를 보여 주었다.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다른 지방으로 나가 일을 하고 있는 10대 중반의 아들에게서 온 편지였다.
편지에는 여러 명이 한방에서 공동생활을 하기 때문에 근행을 할 수 없어, 수건과 비누를 들고 욕실에 간다고 하고 뒷산에 올라가 거기에서 근행을 한다고 했다.
부인부가 편지를 다 읽자마자 나는 그 자리에서 펜을 들었다.
‘자네에게는 자네밖에 할 수 없는 사명이 있다. 절대로 지지 마라’고 마음속으로 격려하면서 시 한 수를 적어 보냈다.
벗이여 강하고 씩씩하게
일어서라
내가 신뢰하는 그대의 마음
힘든 일 심야(深夜)의 공부
이것도 수행이라네 고(苦)는 낙(樂)이니
그대의 신념과 정열을
부처는 모두 보고 있다네
훗날 그 소년이 분기했다는 보고를 듣고참으로 흐뭇했다.”
이케다 SGI회장의 격려를 받은 7년 후. 〈세이쿄신문〉에 쓰루미 지부 미래부의 활약상이 소개되었다. 거기에는 천 명이 넘는 미래부의 진용이 갖추어졌다는 기사와 함께 쓰루미 지부의 미래부가(歌)까지 실렸다.
“석양 비추는 어린 잎사귀에 종달새 노래하듯 바람 불고 우리는 차대를 짊어질 아이들 씩씩하게 나아가자 어깨 펴고 광포의 여로를, 대도를!”
이케다 SGI회장이 학회의 장래를 내다보며 펼친 격려의 손길이 착실하게 열매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학회에도
소년 소녀부가
필요하다”
‘미래의 청년부’라는 표제
1951년 7월에 열린 임시총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회장(會場)에는 부모님을 따라 참석한 아이들이 마구 뛰어다니고 있었다.
도다 2대회장은 그 아이들을 회장의 옥상에서 기념 촬영하도록 했다. 그 사진이 당시 〈세이쿄신문〉에 실렸다.
‘미래의 청년부’라는 제목에 유머가 넘치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 아이들은 총회에 아버지, 어머니를 따라 온 고집불통 아이들로 회장이 좁은 듯 뛰어다녀서 아예 밖으로 데리고 나와 사진으로 기분을 맞춰 주는 중이다.
장래 현재의 청년부원이 대간부로 활약할 때 이 어린이들이 얼마나 훌륭한 청년부를 조직할 것인가.
〈사신오품초〉에 이르길 “청컨대 국중(國中)의 제인(諸人)들이여 나의 말제(末弟)들을 경시하지 말지어다. (중략) 멸여(蔑如: 멸시)하지 말지어다, 멸여하지 말지어다”(어서 342쪽)라고. 여러분, 이 미래의 청년부원들을 존경해 주세요.”
도다 2대회장이 ‘소년부’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한 것은 그 1년 후인 1952년 봄이다.
◆ 당시의 이야기 (구리바야시 토시토모 씨)
저도 당시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어린이 중 한 명이었습니다. 도다 선생님의 온화한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1952년 봄, 입종 700년 축제 때도 참석했습니다. 그것은 신본불적론(神本佛迹論)이라는 망설을 내뱉은 종문의 법주에게서 학회 청년부가 사죄를 받아낸 유명한 ‘너구리 축제 사건’ 때입니다.
그때, 우리 가족도 등산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입니다.
삼문(三門) 근처에서 도다 선생님을 만났는데 선생님은 “학회에도 소년 소녀부가 필요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시대의 불을 켜는 것은 우리들 너희들 소년 소녀, 밝고 강하게 올바르게 살아가며…”라는 노래까지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얼마 후 소년 소녀부의 모임이 열렸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마키구치 선생님을 옥사(獄死)하게 만든 악승과 한창 분투할 때였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도다 선생님은 저 먼 미래까지 내다보고 손을 쓰신 것입니다.
몇몇 지부에 소년부가
젊은 이케다 SGI회장의 ‘한계를 부수는 고투’로 학회원이 급증하고 그에 따라 학회원의 자녀들도 급격하게 증가했다.
혼고 지부나 스기나미 지부, 쓰키지 지부 등에서는 학회원의 자녀들을 모아 ‘소년부원회’를 개최했다. 당시 소년부는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대상이었다.
이케다 SGI회장도 당시의 모습을 〈수필 신·인간혁명〉에 이렇게 적고 있다.
“도다 선생님이 계시던 때에도 몇몇 지부에 소년부가 있었지만 학회에서 부(部)를 결성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장래의 구상을 품어 왔다.”
◆ 당시의 이야기 (사사키 스미코 씨)
혼고 지부에서는 매달 셋째주 일요일에 구(舊) 학회본부에서 소년부 회합을 개최했습니다. 회장실이 바로 근처에 있어서 가끔 도다 선생님을 뵌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다 선생님이 회합장소에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모두 노래를 부르거나 손으로 박자를 맞추었고 도다 선생님은 싱글벙글하며 흐뭇해하셨습니다.
그런 뒤 모두 회장실로 불러 어서를 펼치시며 “집을 보는 것도 몸의 공양이 되어 공덕이 있어요”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 한사람 한사람에게 “장래 무엇이 되고 싶나요?” 등을 물어보시며 회합에 참석한 모든 소녀부와 악수를 해 주셨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월 1회 본부에서 실시하는 회합에 참석하는 멤버가 점점 늘어나자, 어린이들만 모아서 회합을 하는 것은 어떤지 하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 지역 내에서 회합이 실시되었습니다.
◆ 당시의 이야기 (이노우에 미키오 씨)
스기나미 지부에서도 독자적으로 소년부가 결성되었습니다. 120명 정도의 부원(部員)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음 달부터 월 1회, 예전 학회본부 2층 대회합실에서 소년부원회를 실시했습니다.
회를 거듭할 때마다 참석자가 늘어나 1주년 기념회합에는 750명이 참석하여 본부 회합실을 가득 메웠습니다.
◆ 당시의 이야기 (마쓰오카 사키코 씨)
1954년 주오대학 강당에서 혼고 지부의 총회가 열린 후, 별실에서 도다 선생님을 중심으로 간담회가 열렸습니다. 운 좋게 그 자리에 소년부원들도 참석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도다 선생님은 우리 소년부원 한사람 한사람과 악수를 해 주셨습니다. 또 그때, “오늘은 명함이 없으니까 그 대신…”이라고 하시며 빨간 사과를 한사람 한사람에게 건네 주셨습니다.
그때 뵌 도다 선생님의 상냥한 눈빛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 당시의 이야기 (쓰치야 미나코 씨)
그 장소에 저도 동석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워서 도다 선생님이 〈성락추풍오장원〉의 지휘를 하시는 데 반주를 맡았습니다.
그때 저는 선생님의 바로 곁에서 연주했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부채를 들고 용장(勇壯)하게 지휘를 하셨습니다. 참으로 원기왕성하셨습니다.
사제(師弟)의 정신을
가르치지 않으면
미래부 육성은 실패다
‘어린이 모임’의 결성
도다 2대회장은 청년부 간부 대표의 자녀들을 선발하여 차기 학회의 중추를 담당할 인재육성을 위해 ‘어린이 모임’을 결성했다. 도다 2대회장이 참석하는 이 모임은 연1회 열렸다. 거기에는 선발된 자녀들의 부모도 함께 참석했다. 그것에 대해 이케다 SGI회장은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어린이 모임’을 결성한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도다 선생님께서 그 모임을 통해 대대로 회장을 비롯한 학회의 중추를 육성하려고 하신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멤버들 중에는 도다 회장의 훈련의 진의를 분별하지 못하고 특권의식을 느끼거나 모임에 선발된 사람에게 질투심을 품은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케다 SGI회장은 또 이렇게 말한다.
“그만큼 당시의 훈련은 엄격했다. 나는 도다 선생님이 이 모임을 만드신 의도를 끝까지 믿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신심의 세계에서 우리가 만들려는 광선유포의 세계만큼은 서로 믿고 기분 좋은, 그리고 상쾌한 세계로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 항상 있었다. … ‘어린이 모임’에서 탈락된 사람이 모임에 선발된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한 것도 나는 전부 알고 있었다.”
당시의 모습이 이케다 SGI회장의 《젊은 날의 일기》에 이렇게 적혀 있다.
“저녁 6시. 연중 행사인 어린이 모임. 장소 — N원.
수많은 부부와 자녀들이 모였다. 모두 즐거워 보인다. 어느 부부가 지각하여 선생님께서 엄하게 지도하셨다. 당연한 일이다.
어린이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즐기고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반드시 쓸쓸해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을 평생 잊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 공평한 사람이 되고 싶다. 아니 그늘에 가려 있는 사람, 외로운 사람, 슬퍼하고 있는 사람의 편이 되고 싶다.
학회가 〈오장원(五丈原)〉, 〈대남공(大楠公)〉, 〈일본 남아의 노래〉를 계속 불렀다.
여기에 모인 부부와 자녀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학회의 중핵이 되어야 할 책무가 있다.”
“몇 쌍에 불과했던 어린이 모임이 20여 쌍으로 발전. 수가 늘어남에 따라 불분명하고 왠지 복잡해졌다는 느낌이다. 계곡 물처럼 깨끗하고 따뜻한, 강한 단결이 필요하다고 절감. 지각하는 사람도 많다. 선생님께서 몹시 노여워하심.”
당시 상황을 알고 있는 한 간부는 이렇게 말한다.
“도다 선생님은 학회의 미래를 짊어질 인재를 육성하셨는데, 도다 선생님이 전개하시는 인재육성의 의의를 전부 알고 있던 이케다 선생님은 홀로 고민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제의 정신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사제의 정신을 가르치지 않으면 학회의 미래를 짊어질 진짜 인재는 육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케다 SGI회장은 사제의 정신을 미래부에게 어떻게 가르칠까 고심하고 있었다.
◆ 당시의 이야기 (데라시마 토시노리 씨)
형과 함께 예전 학회본부의 현관에서 진행요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다 선생님이 나오시길래 구둣주걱을 건네 드렸는데 “착한 아이구나. 앞으로 훌륭하게 되거라”하며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즉시 이케다 선생님이 제 곁으로 오셔서 “잘 했어요”라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도다 선생님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때 도다 선생님과 이케다 선생님의 호흡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당시의 이야기 (쓰치야 미나코 씨)
지방에 지도차 가시는 이케다 선생님을 배웅하려고 언니와 역까지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혼고 지부의 소녀부원이구나. 고마워요. 열심히 하세요”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커다란 기쁨이 되어 인생의 원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 막대한 빚을 지고 집을 압류당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어머니까지 병석에 누운 상태에서 저는 고등학교 3학년으로 네 자매의 막내였습니다. 그야말로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럴 즈음 저희 네 자매를 고바야시 초(오타 구)에 있는 자택으로 불러 격려해 주신 분이 이케다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때 저희에게 커피와 케이크, 귤을 주셨습니다. 한 사람을 생각하는 따스한 진심에 코끝이 찡했습니다.
“부모님이 쓰러졌다면 자식이 일어서는 것이에요. 그것이 학회의 자식이에요”라는 엄하고 따뜻한 격려 말씀에 마음이 분기했습니다.
◆ 당시의 이야기 (마치타 세이 씨)
이케다 선생님이 가마타 지부의 지부간사로 계실 때 선생님은 불과 24세였습니다. 그런 젊은 나이였지만 선생님은 아이들을 대단히 귀여워하셨습니다.
회합에 참석한 아이들을 보면 “착한 아이구나. 귀여워요”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학회의 아이들은 같은 학회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식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라며 웃음을 띠고 계셨습니다.
중·고등학생인 자녀들에게는 “책을 많이 읽으세요. 공부를 열심히 하세요. 목표를 세우고 신심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것을 향해 기원하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어요”하며 격려하셨습니다.
또 선생님이 결혼하시고 난 후의 일인데 부인부가 데리고 온 아이들이 소란을 피우면 사모님이 그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림책을 읽어 주시거나 동화를 들려주셨습니다.
저는 그러한 선생님 내외의 따스한 모습에 감동했던 일들을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대여
스승의 말씀을
절대로 잊지 마라!
은사가 참석한 소년부원회
도다 2대회장이 스기나미 지부의 소년부원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도다 선생님이 서거하시기 1년 전의 일이다.
도다 2대회장은 회합장소였던 구 학회본부에 택시를 타고 달려오셨다. 당시 선생님의 몸은 쇠약해져 있었다.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본부에 들어섰다. 그러나 부원회에 일단 참석하자 의연한 왕자의 풍격이셨다.
도다 2대회장은 이때, 요시다 쇼인과 구사카 겐즈이, 다카스기 신사쿠라는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를 역설했다.
구사카 겐즈이, 다카스기 신사쿠는 모두 스승의 가르침대로 끝까지 살았지만 안타깝게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쓰지 타케히사 씨는 말한다. “도다 선생님은 그러한 두 사람의 생애를 통해 오래오래 살면서 민중을 위해 분투하라고 지도하셨습니다.
제자에게는 스승의 다음 시대를 짊어지고 분투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을 완수해야 불이(不二)의 제자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러한 사제(師弟)의 계승이야말로 말법 만년에 걸친 광선유포가 있고 영법구주(令法久住)가 있다고 믿습니다.”
◆ 당시의 이야기 (이노우에 미키오 씨)
부원회가 한창 열리고 있을 때 갑자기 도다 선생님이 들어오셨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가르쳐 주겠어요. 모두 공부해서 위대한 사람이 되세요. 그러나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면 안 돼요 … 절대 걱정 끼치지 말고 훌륭한 사람이 되세요”라고 지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타이르듯 “나는 지금 58세예요. 내가 죽고 나서 여러분이 내가 말한 것을 한 마디라도 기억해서 실천에 옮기길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후계의 인재를 지금 육성해 놓지 않으면 광포의 흐름은 멈춰 버리고 만다 — 돌이켜 보면 도다 선생님은 그러한 진검승부의 심정으로 부원회에 참석하신 것입니다.
무엇에도
지지 않는 자기 자신을
만들어라
미래부에게 말을 걸자!
은사 도다 2대회장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사람은 이케다 SGI회장이었다. SGI회장은 은사와 마찬가지로 미래부를 사랑했다.
“청년부 때부터 회합이나 회원 댁을 방문했을 때 항상 ‘미래부’ 멤버에게 말을 건네는 데 신경을 써 왔다.
부모가 학회활동으로 집을 비우기 쉬운 가정의 자녀에게는 ‘언제나 집을 잘 봐줘서 고마워요’라고 말을 건네고 중·고등학생에게는 ‘열심히 공부해서 무엇에도 지지 않는 자기 자신을 만들어요’ 등, 여러 모로 격려해 왔다.
그것은 비단 그 자리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한번 연을 맺은 후계의 벗은 10년, 20년 계속 지켜보았다.”(〈수필 신·인간혁명〉)
◆ 당시의 이야기 (아키야마 에이코 씨)
청년부 실장이었던 이케다 선생님이 가쓰시카 구 회합에 참석하셨을 때의 일입니다. 회합을 마치고 복도를 지나칠 때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자 곧장 곁으로 가서 눈높이가 맞도록 자세를 낮춰 말을 거셨습니다.
“잘 왔어요” “훌륭하게 성장하는 거예요” “착한 아이로 자라세요”라고.
아이들에게 선생님의 진지함과 성실함이 그대로 전달되었는지 그때까지 떠들던 아이들도 조금 놀라고 당황했지만 모두 선생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이 취급하지 않고 훌륭한 한 사람의 인격으로서 경의를 표하며 대하셨습니다.
◆ 당시의 이야기 (쓰지 타케히사 씨)
이케다 선생님께서 청년부 실장 시절의 일입니다. 쉬는 날 저는 초등학생인 장남과 둘째아들을 학회본부에 데리고 갔습니다. 아이들은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늘 싸워서 상처가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그날은 큰아이가 할퀴어서 둘째아이의 뺨에 상처가 있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이 그것을 보시고 “무슨 일 있었니?”하며 말을 거셨습니다. 둘째가 “형이 그랬어요”라고 답하자 이번에는 큰아이에게 “네가 그랬니?”하고 물으셨습니다. 큰아이는 난처한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선생님께서 “형제끼리 싸움은 사이가 좋다는 증거지”라고 하시며 둘째에게 “그러나 다음번에 싸울 때는 지지 말아요. 그래, 너에게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붙여 줄게”라고 타이르듯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때의 말씀이 두 아이의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진 것일까요. 그 후 큰아이는 사이 좋은 형제가 되려고 노력하는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또 둘째아이도 무슨 일이 있으면 “나는 나폴레옹이다!”라고 말하며 스스로 용기를 북돋우는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40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두 사람은 그때의 선생님 말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미래부 세대에게 건네는 진심 어린 한 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제 자식들이 40년 이상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 당시의 이야기 (하치야 유미코 씨)
1955년의 일이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저는 취직 문제로 매일 본부에 가서 제목을 올렸습니다.
어느 날 저녁 무렵, 창제를 마치고 돌아가려 하자 어깨를 탁 두드리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이 “무엇을 기원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어서 “취직 문제입니다”라고 답하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법은 승부입니다. 철저히 신심을 관철하는 사람이 반드시 승리하는 법입니다. 아무쪼록 열심히 하세요.”
짧은 말이었지만 굉장한 생명력을 느꼈고 용기가 났습니다. 집에 돌아와 집에 있는 〈세이쿄신문〉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까 그 청년은 바로 이케다 선생님이셨습니다.
그 후 기원하던 회사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기쁨은 이케다 선생님과 첫 만남의 역사였습니다.
자녀는
학회의 뜰에서
키워라!
미래부 육성에 대한 구상을 하다
1953년 4월 이케다 SGI회장이 ‘분쿄 지부장 대리’로 취임했다.
SGI회장의 지휘로 당시 C급 지부였던 분쿄 지부가 A급 지부, 전국 1위로 대전진을 이룬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그때부터 이케다 SGI회장은 ‘다음 50년’을 짊어질 미래부 육성에 대한 구상을 남몰래 하고 있었다.
◆ 당시의 이야기 (쓰치야 다케오 씨)
스기나미 지부 등에서는 초창기부터 소년부 회합을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저는 그것이 정말 부러웠습니다. 어느 날, 저는 용기를 내서 남자부 선배에게 말했습니다.
“분쿄 지부에도 소년부를 만들어 주세요”라고. 그때 선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러우니까 만든다는, 단순히 그러한 사고방식이면 안 됩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에요. 이케다 선생님께서 생각하고 계십니다”라고.
선생님은 그때부터 미래부 육성에 대한 장대한 구상을 차분히 준비하신 것입니다.
◆ 당시의 이야기 (오타 히사오 씨)
다나카 지부장이 반장인 저에게 “지부의 소년부장을 맡아 달라”고 말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께서 지명하신 것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절복만 염두에 두고 있어서 이렇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고 있으면 성과면에서 다른 반에 뒤처지고 말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짧은 생각이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애정을 담아 미래부를 만나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저도 점점 아이들이 좋아졌습니다. 학회원의 자녀들을 예뻐하자 부모들도 기뻐하고, 그러다보니 그 부모들의 지인(知人)들까지 인간적인 폭이 넓어져 홍교도 점점 진척되었습니다. 정말 불가사의했습니다.
오타에서 분쿄로
분쿄 지부는 이케다 SGI회장이 처음으로 손수 만든 조직이다. 분쿄 지부에 SGI회장의 자제도 미래부의 일원으로 그 당시 자택이 있던 오타 구에서 분쿄 구까지 회합을 다녔다.
이케다 SGI회장은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 집 아들들은 미래부 때부터 내가 분쿄 지부의 지부장 대리를 맡은 관계로 분쿄 지부의 여러 회원님들에게 많은 신세를 지게 되었다.
회합이 있을 때는 큰아들이 동생들을 데리고 오타 구 고바야시 초에 있는 집에서 분쿄 구의 회합장소까지 즐겁게 다녔다.
‘아이들은 학회의 뜰에서 키운다’는 것이 도다 선생님께 배운 우리 집의 방침이었기 때문이다.”(〈수필 신·인간혁명〉)
◆ 당시의 이야기 (다나카 요시오 씨)
이케다 선생님께서 분쿄 지부장 대리로 우리 집에 오셨을 때 저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린이들을 매우 좋아하셨습니다. 지부의 중요한 회합 때 저에게 “이쪽으로 오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회합의 중심에 계신 선생님의 무릎 위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어째서 내가 여기 있는 거지…’ 아마도 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가서 앉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은 비단 저 혼자만이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린이를 정말로 소중히 대하셨다는 말씀을 부모님께 몇 번이나 들었습니다.
◆ 당시의 이야기 (기노시타 다케시 씨)
분쿄 지부의 회합이 끝났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이케다 선생님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떤 남자부 간부에게 주의를 주는 소리였습니다.
“방금 걸어온 곳을 한번 돌아보세요.”
남자부 간부는 방석 위에 누워 자고 있던 아이를 넘어온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소중한 아이의 머리를 넘어왔습니다. 다시 걸어오세요.”
선생님은 사소한 일에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엄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선생님의 그 말씀에 자고 있던 아이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아이는 다름 아닌 제 자식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어떻게 자고 있는 아이까지 신경을 쓰고 계셨을까, 불가사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다음 학회를 짊어질 후계자인 어린이를 진심으로 소중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 당시의 이야기 (마쓰오 노부에 씨)
집에서 회합이 열리던 날의 일입니다. 제가 집 밖에 있을 때 차 한 대가 멈추더니 이케다 선생님께서 내리셨습니다.
선생님은 주머니에 있던 한 송이의 카네이션을 주셨습니다.
중학생이던 저는 그날 집 밖에서 회합에 참석하신 분들의 어린아이들을 혼자 돌보고 있었습니다. 회합에 참석할 수 없었던 저까지 격려해 주신 이케다 선생님.
저는 정말로 기뻐서 회합이 끝나고 선생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그 카네이션을 손에 꼭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근행, 어서의 한 구절을 배독
이케다 SGI회장이 분쿄 지부장 대리가 되고 나서 분쿄 지부에서 ‘소년부원회’가 열렸다. 부원회에서는 신심의 기본, 사제(師弟)의 중요성을 엄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가르쳤다.
SGI회장이 아직 분쿄 지부장 대리로 있던 1959년. 이케다 SGI회장은 도다 2대회장이 결성한 ‘어린이 모임’에 지침을 보낸다. 미래부 육성에 대한 중요한 지도다.
“무의미한 회합이면 안 된다 — 어린이 모임의 지침이라고 해야 할 생각들을 피력했다.
—. 은사는 아버지다. 아버지의 유훈을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 근본이다.
—. 학회 전체를 지도할 수 있는 노력과 책임감을 기르자.
—. 참된 형제, 자매가 되어 학회를 목숨 걸고 지켜라.
—. 주·사·친의 후계를 지키고 광선유포를 실현하는 사람이어라.”(《젊은 날의 일기》)
미래부이기 때문에 ‘사제’를, ‘학회를 엄호하는 인생’을, ‘광포를 실현할 인재가 될 것’을 엄격하게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 — 이것이 이케다 SGI회장의 신념이었다.
◆ 당시의 이야기 (다나카 요시오 씨)
분쿄 지부에서 소년부원회가 일요일에 열리게 된 것도 이케다 선생님께서 분쿄 지부에 오시고 난 후였습니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저도 부원회에 참석했습니다. 월 1회 정도였는데 형들이 잘 보살펴 주었습니다.
부원회에 나가면 어서의 한 구절이나 학회가가 인쇄된 갱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수작업으로 한 등사판 인쇄물이었는데 학교에서 쓰던 검은색 잉크와 달리 푸른색 잉크였기 때문에 신기해서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조금이라도 기뻐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것이 아닐까요.
◆ 당시의 이야기 (스기우라 가쓰오 씨)
분쿄 지부에서 소년부원회를 시작한 것은 이케다 선생님의 제안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다채롭고 재미있는 회합이었습니다.
대학생 형들이 촌극, 그림 연극, 인형극 등 여러 가지로 궁리해서 니치렌 대성인의 생애나 알기 쉬운 교학, 학회의 역사, 사회에서 정의를 관철하는 중요성 등을 말해 주었습니다.
쓰카하라 문답에서 제종(諸宗)의 악승을 파절하는 대성인을 묘사한 촌극의 한 장면은 지금도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모조지의 그림이나 인형 하나하나에서 따스한 사람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회합에서 “여러분의 어머니나 아버지는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나날이 훌륭한 일을 하시고 있다”라고 배우는 속에서 학회의 자식으로서 긍지가 싹텄습니다. 학회원이라고 놀림당하거나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하던 저희들에게 커다란 용기가 생겼습니다.
정말이지 소년부 회합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혼자서 참석하는 것이 아까워서 같은 반 친구를 함께 데리고 갔습니다.
부원회에서는 신심을 하고 있든 하고 있지 않든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이 회합 덕분에 친구는 학회를 이해하는 폭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도다 선생님이 얼마나 굉장한 분이셨는지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제의 중요성을 어릴 때부터 몸으로 느끼게 해 주고 싶다”라며 이케다 선생님이 추진하고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 당시의 이야기 (다나카 요시오 씨)
당시 지부장이었던 아버지도 소년부원회에 참석하여 저희들과 함께 근행을 한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은 무엇이라도 실천하는 아버지셨기 때문에 아마도 선생님께서 아버지한테 그렇게 하도록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미래부 때 아버지에게 근행을 정성스레 배운 추억을 갖고 있는 분도 계십니다.
50년 후의 학회를 의탁할 후계자를 육성하고자 하는 선생님의 바람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진지하게 지도에 임한 것이 아닐까요.
젊은 날의
만남이야말로
생애 원점
《사서오경(四書五經)》을 가르치세요
남자부의 인재그룹 ‘수호회’ 멤버가 이렇게 술회한다.
“도다 선생님은 수호회의 훈련에서 어떻게 자녀를 양육하는가에 대해서 언급하셨습니다.
‘옛날에는 네 살만 되면 《사서오경》(논어 등 아홉 종류 책)을 가르쳤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령 어린아이의 머리로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어도 몸에 물들여 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훗날 이케다 선생님이 네 살 된 큰아들에게 〈간효팔번초〉를 강의하신 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스승의 말씀을 한 마디도 빠짐없이 그대로 실천에 옮기셨구나’하고 생각하자 창가의 사제불이(師弟不二) 정신의 깊이에 감동받았습니다.”
◆ 당시의 이야기 (이노우에 미쓰히사 씨)
중학교 때 사가미하라의 집에서 분쿄 지부의 거점에 갔을 때였습니다. 이케다 선생님과 부모님들이 협의를 하고 있는 사이, 저는 옆방에서 어린 여동생을 안고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협의를 마치고 나오시던 선생님이 저희를 보시고 “언제 한번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라는 한 마디를 건네 주셨습니다. 순식간의 일이었습니다.
10년 후 제가 직원이 되어 인사차 선생님께 갔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자네에게는 분명히 여동생이 있지?”하고 물으셨습니다. 어떻게 선생님이 그것을 아실까 신기하다고 생각하던 중 문득 기억이 났습니다.
‘아아, 그때 어린 여동생을 안고 있던 짧은 한순간의 만남을 기억해 주셨구나.’
저 자신도 까맣게 잊어버린 일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미래부 한사람 한사람과 맺은 순간의 만남을 마음에 깊이 새겨 두신 것입니다.
◆ 당시의 이야기 (스기우라 가쓰오 씨)
선생님은 지부의 거점인 저희 집을 방문하실 때마다 회합이 없는 틈을 내어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던 저를 데리고 근처 대중 목욕탕에 가셨습니다.
그때마다 집이나 학교에서 생긴 일 등 무엇이든 선생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가 반 친구들의 부모님을 찾아다니며 전부 절복해서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일도 말해 버렸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괴로울지 모르지만 어머니는 다른 사람을 위해 굉장한 일을 하고 계시단다”라고. 그 한 마디가 저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또 술을 좋아하시는 아버지가 가게에서 “술을 1홉만 덜어서 사오너라”고 시켜 가게에서 창피를 당한 일도 털어놓았습니다. 우리 집은 그때 경제적으로 힘들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아버지의 작은 낙이니까 조금 이해해 드리세요”하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런 뒤 얼마 후 아버지는 저에게 술심부름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선생님께서 아버지에게 제 속마음을 전해 주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참으로 한 소년의 한마디 한마디를 소중하게 들어주셨다고 생각하니 송구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 당시의 이야기 (데라시마 토시노리 씨)
우리 집을 방문하셨을 때, 이케다 선생님은 양복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제 앞에 내미셨습니다. “평생 친구가 되자꾸나” 선생님은 제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중학생이었던 저에게 명함을 주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또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때 ‘선생님 슬하에서 평생 분투하자’고 맹세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입니다. 제 앞으로 한 장의 엽서가 왔습니다. 발신인은 이케다 선생님이셨습니다. 엽서에는 ‘소년이여, 큰 뜻을 품어라’는 클라크 박사의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 저는 공부가 잘 안 돼 자포자기하여 대학 진학을 포기하려 했는데 선생님의 격려에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때부터 대학입시를 치르기로 결심했고 결국 합격을 거머쥘 수 있었습니다.
분쿄 지부에서는 이케다 선생님께 격려를 받은 미래부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 저는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창가의 인재란 이케다 선생님의 마음을 자신의 몸에 물들인 사람이라고.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세계 최고의 스승께 훈련받는 절호의 기회라고 호소하고 싶습니다.
이케다 SGI회장이 만들어 낸 ‘미래부 육성의 흐름’은 3대회장 취임 후 거대한 조류가 되어 전국으로 번져 고등부, 중등부, 소년부가 차례차례 결성되었다.
‘불멸의 인간변혁이라는 법리(法理)의 힘’을 이어받는 것은 젊은 미래부의 사자(獅子)뿐이다. 미래부 밖에 없다. 이것으로 창가의 장래는 모든 것이 결정된다. 단호하게 미래부를 육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케다 SGI회장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21세기의 광포의 지도자를 육성하는 여러분이야말로 최고의 사명이 있는 사람이며 대공로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