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淸通面) 거조길 400-67 신원리(新愿里) 팔공산(八公山)의 은해사(銀海寺) 경내에 있는 절. 거조사(居祖寺)라고도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銀海寺)의 산내 암자이다.
은해사에서 신녕면 쪽으로 8km 정도 가다 보면 거조사를 만난다. 거조사라는 이름은 팔공산 동쪽 기슭에 위치하여, 아미타불이 항상 머문다는 뜻이다. 원효대사가 거조암을 창건한 뒤 진평왕 13년에 혜림법사와 법화화상이 영산전을 건립하여 오백나한을 모시게 되면서 영험한 나한 기도도량으로 유명하다. ‘거조사 영산전’은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고, 2021년 3월 은해사 부속 암자인 거조암에서 거조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우리나라 목조건축물은 고려시대 이전의 것은 없으며, 남아있는 고려시대의 목조건축물로 안동 봉정사 극락전, 강릉 객사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조사당 그리고 이곳 거조암 영산전 6곳뿐이라는 점에서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다.
일설에는 거조사라는 이름으로 신라 효성왕 2년(738)에 처음 세웠다는 설과 경덕왕(742~764 재위) 때 왕명으로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고려시대는 1182년(명종 12) 지눌은 개성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여하여 동료들과 함께 선정(禪定)을 익히고 힘써 지혜를 닦자는 맹서의 글을 지어 후일을 기약하였다.1188년 봄에 거조사의 주지 득재(得才)는 지난날 결사를 기약했던 수행자를 모으고, 당시 경상북도 예천의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에 머물렀던 지눌을 청하여 처음으로 이 절에서 정혜결사를 시작하였다. 지눌이 1190년부터 7년간 머물면서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수선사(修禪社)를 세워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이룩하기 전에 각 종파의 고승들을 맞아 몇 해 동안 수행했던 사찰로 유명하다. 결사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신앙을 추구하기 위한 일종의 신앙공동체운동, 종교운동이다. 정혜결사는 개경 중심의 보수화되고 타락하여 많은 모순을 드러내고 있던 당시 불교계에 대한 비판운동이자 이를 개혁하려는 실천운동이었다.
지눌은 그 구체적 방법으로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제시하였다. 그는 결사를 시작하면서 그 취지를 밝힌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통해 마음을 바로 닦음으로써 미혹한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음을 천명하고, 그 방법은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는 데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선과 교로 나뉘고, 정과 혜로 갈려 그 두 가지가 한마음 위에 통일될 때 온전한 수행이 된다는 것을 망각한 채 시비와 분열을 일삼던 당시 불교계에 대한 반성과 자각이자 그 혁신을 위한 실천이기도 했다. 거조암은 정혜결사가 1200년 조계산 송광사로 옮겨가기 전까지 그 중심 도량이었다.
그 뒤 이 결사는 송광사로 옮겨갔다. 1298년(충렬왕 24)원참(元旵)이 밤중에 낙서(樂西)라는 도인을 만나 아미타불 본심미묘진언(本心微妙眞言)과 극락왕생의 참법(懺法)을 전수받아 기도도량으로도 크게 부각되었다.
그 뒤의 역사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근래에는 나한 기도도량으로써 3일만 지성껏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여 많은 신도들이 찾아들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국보 제14호로 지정된 영산전(靈山殿)과 2동의 요사채가 있다. 영산전 안에는 청화화상이 부처님의 신통력을 빌려 앞산의 암석을 채취하여 조성했다는 석가여래삼존불과 오백나한상, 상언(尙彦)이 그린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그 중 법계도(法界圖)를 따라 봉안된 나한상은 그 하나하나의 모양이 특이하고 영험이 있다고 전한다.
이 밖에도 영산전 앞에는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높이 3.6m의 삼층석탑 1기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04호로 지정되어 있다.
단층 맞배지붕의 주심포집으로 장대석과 잡석으로 축조된 높다란 기단 위에 세워진 거조암은 마구의 수법이 간결하고 기둥에 뚜렷한 배흘림이 있는 것이 특색인데, 주심포 양식의 초기적 형태를 잘 나타내는 중요한 건물이다. 영산전 안에는 청화화상이 부처의 신통력을 빌려 앞산의 암석을 채취하여 조성했다는 석가여래와 문수보살, 보현보살과 오백나한상 및 상인화상이 그린 영산회상도가 있으며, 뜰에는 손상이 심한 삼층석탑이 있다.
화강암을 깎아 만든 뒤 호분을 입히고 머리에 칠을 한 나한상들의 자세와 표정은 다양하기만 하다. 옆 사람을 그윽하게 쳐다보기도 하고 명상에 잠겨 세상을 잊은 듯 보이기도 하고 팔짱을 낀 채 거드름을 피우는 듯도 보이는 오백나한(정확히는 526나한)은 수많은 사람의 다양한 공부 방법과 세상 사람이 천태만상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듯하다.
마음에 드는 나한상 앞에 앉아 절 안팎 어디고 단청을 하지 않았으면서도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영산전 구석구석을 바라보면 마음이 평안해지는데, 영산전에는 그 색조나 화풍이 특이한 영산탱이 있다. 청, 학, 적, 백, 흑의 다섯 가지 원색을 주조로 그려진 조선시대 불화들과 달리 붉은 바탕에 호문으로 선묘만 하였을 뿐 청록색, 흑백색 등은 극히 적은 부분에만 사용하였다. 바탕색의 변화로 모든 색을 대신함으로써 붉은색이 자극적이지도 들뜨지도 튀지도 않는 이 후불탱화를 미술사학자인 고유섭은 “명랑하고 침착하고 품위 있는 색조”라고 표현하였다. 이 후불탱화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네 명의 보살과 네 명의 불제자 그리고 두 명의 사천왕만으로 영산회상의 여덟 장면을 간략하게 압축해 구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