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말씀의 향기♣ No2539
10월5일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3fgoOwC0Ofc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대 앞에 설 때마다>
강론대 앞에 설 때마다 온몸으로 느끼는 두려움이랄까 송구스러운 감정에 자주 사로잡히곤 합니다.
제 입으로는 갖은 좋은 예화나 미사여구를 총동원해서 하느님 사랑의 메시지를 선포하지만, 정작 내가 그 메시지를 삶으로 실천하고 있지 못하는데서 오는 일종의 죄책감이겠지요.
사랑이 지닌 속성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속성 한 가지를 뽑으라면 아무래도 역동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참사랑은 움직이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극진히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동료 인간들을 향해 활기차게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서 가난하고 고통 받은 이웃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냉담하다면 그 사랑은 철저하게도 거짓 사랑이 분명합니다.
율법교사의 사랑이 그랬습니다. 그는 틈만 나면 하느님 사랑의 위대함에 대해서 목청 높여 외쳤지만, 그의 마음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등장하는 사제와 레위인의 사랑도 철저하게 허황된 사랑, 입술로만의 사랑이었습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하느님의 성전에서 전례봉사를 업으로 삼던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하느님께서 가장 기쁘게 여기시는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는 행동을 한번 보십시오. 사랑과는 전혀 무관한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에서 열심히 전례봉사에 전념했습니다. 막 끝낸 거룩한 예식과 사랑으로 가득 찬 감동적인 말씀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직면한 한 동료인간의 비참한 실상을 외면하고 그냥 지나가버렸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피곤하고 짜증나는 이웃 사랑은 실천하지 않고 하느님 사랑만을 추구했습니다.
결국 그들이 추구한 사랑은 반쪽짜리 사랑, 철저하게도 이중적인 사랑, 결국 거짓 사랑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 가톨릭교회를 칭찬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조화요 공존입니다.
가톨릭은 예로부터 다양한 사회복지사업이나 교육사업, 사회참여 등을 통해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등장하는 세 명의 행인 가운데 사마리아 사람은 가장 낯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강도를 만난 사람을 향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정말이지 꼼꼼하고도 친절하게 치료하고 보살피고 헤아립니다.
치료뿐만 아니라 호송, 입원, AS까지 최상급 케어를 하고 있습니다. 강도 당한 사람 입장에서 보면 정말이지 눈물겹도록 고마운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 가장 멀었던 사람이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어쩌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반쯤 죽은 가련한 인류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처지가 너무나 기구했던 나머지 천상에서 지상까지 먼 길을 오셔서 인류를 굽어보셨습니다.
갖은 결핍과 병고와 죄로 생겨난 우리의 상처에 치유의 포도주를 부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우리의 원기를 회복시키고 편히 쉴 수 있도록 영혼의 여관인 교회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당신의 죽음과 피로 우리의 죗값과 천국 가는 여행비를 치루십니다.
오늘 우리도 율법 교사처럼 질문을 던져야겠습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구원의 신비가 담겨져 있는 성경을 펼쳐야 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잔치가 매번 벌어지는 교회의 성사에 열심히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과 성사가 우리에게 강조하는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야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계명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는 이유>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KcN2kXIxAXw
----------------------
오늘 복음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제와 레위인은 종교적 행위에는 충실했지만, 계명은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계명을 안다고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계명이 나를 지배하고 있어야 합니다. 계명이 때 되면 식사하거나 잠을 자야 하는 것처럼 완전히 나를 지배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누구는 도와주고 누구는 도와주지 않고 결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든 당연히 도와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계명이 나를 그렇게 완전히 지배하게 만들려면 그 계명을 주신 분께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왠지 나를 희생시키고 고생시키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은 그러한 계명이 나를 지배하지 않는 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유튜브 동영상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에서는 삶에 힘겨워하는 젊은이들에게 설문 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꿈을 잃은 사회 초년생, 매번 면접에서 떨어지는 취업 준비생, 승무원 포기한 배우 지망생, 고3 수험생 등이었습니다. 질문은 이런 것들입니다.
“하루 수면시간은 어떻게 되나요?”, “일주일에 몇 번 사람들과 어울리나요?”, “모든 일이 힘들게 느껴지나요?”, “꿈이 있나요?”, “하루에 몇 번 소리 내 웃나요?”
그리고 뒷장에는 같은 질문 앞에 ‘어린 시절에’란 단어를 붙였습니다. 어린 시절 수면시간은 얼마였나요? 어린 시절 몇 번 소리 내어 웃어보았나요? 등입니다. 당연히 어린 시절이 앞길이 막막한 청년들보다 훨씬 행복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른들은 어린 시절 행복한 이유는 다른 것은 신경 안 쓰고 공부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과연 공부가 쉽습니까? 저는 공부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공부 좀 그만하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제가 되었는데 또 공부하라고 유학 가라고 했을 때는 정말 순종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어린이가 행복한 이유는 공부만 하면 되어서가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이 불안한 것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무도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살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막막한 것입니다. 재빠르게 버스를 잡아타긴 했는데 이것이 집으로 가는 것인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인지 모를 때의 불안한 마음과 비슷할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이 명확히 있을 때 그 사람은 그 일을 하면서 행복합니다.
‘비벡 H 머시’의 『우리는 다시 연결되어야 한다』라는 책은 ‘외로움’과 ‘인간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복권 당첨자가 머시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복권 당첨된 것은 저에게 저주가 되었어요.”
“아니, 왜요?”
“복권 당첨되기 전에는 직장 동료, 친구와 이웃들이 많았습니다. 복권에 당첨되고 부자 동네로 이사 오고 나니 모든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저는 그저 집에 갇혀있는 외로운 사람입니다. 다시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습니다.”
사람은 돈보다 왜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어 하는 것일까요? 어딘가에 속해야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술자리에 있으면 술을 마시면 되고 직장에 있으면 일을 하면 됩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며 불안에 떨 필요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못하면 마치 방전된 스마트폰처럼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같은 책에 이런 예도 나옵니다. 어떤 전직 조직폭력배가 말했습니다.
“저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단체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를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모두 저를 안아주었습니다. 처음 느껴보는 평안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보답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 주었습니다. 물론 세상에 악한 일이기는 하였지만요.”
나의 행동들이 나의 자유의지로 행하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태어나서 인간에게 자라지 않으면 인간다운 행동이 전혀 나올 수가 없습니다. 늑대에게 자라면 늑대의 행동을 하고 인간에게 자라면 인간의 행동을 합니다. 아무도 만나지 못하면 기생충이나 모기처럼 생존을 위해 먹기만 합니다. 이 또한 자아라는 것에 속해있기에 그의 뜻을 따라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람은 세상에 악한 일을 하면서까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외로움과 불안함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우리가 명확히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그런데 그 계명은 내가 그 계명을 주시는 분에게 감사할 때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자녀가 감사하지 못하면 아무리 부모라도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해야 할 유일한 것은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조직폭력배도 그 조직에 고마워서 그 일을 하는 것처럼 주님께 감사의 제물을 드릴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 계명이 그 사람을 평안하게 해 줄 수 없습니다. 물론 조직폭력배는 나중에 그 조직에 감사를 잃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주는 모든 계명은 다 그 사람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이웃을 사랑해야만 하는 계명을 주는 어떠한 공동체에 속해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지배하는 계명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그리스도의 상징인데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쓰러져가는 인류를 구원하지 않으실 수 없으셔서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께 속해있었고 아버지의 계명이 그분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우리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따라야 하는지 모르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려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은 스마트폰으로 쓰여야 행복하지 망치로 쓰이면 결국 또 내가 하는 일이 맞는지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사람은 하느님 모습대로 사랑해야만 행복하게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죽기까지 따를 수 있는 계명을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계명이 나를 지배하게 만들기 위해 오셨습니다. 사랑의 계명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오늘 복음의 사제와 레위인처럼 그 사람들을 완전히 지배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계명을 주시는 분에게 속하는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계명만 안다고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할 수 있어야 지킬 수 있기에 그분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당신 몸을 양식으로 내어주심으로써 감사한 마음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면 이제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나를 지배하는 행복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을 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분의 계명이 나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행복의 유일한 길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0,25-37 :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율법 교사는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으나, 결국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25절) 여기서는 율법 학자지만 법조문만 잘 알 뿐 그 정신은 모르는 자들임을 알려준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율법의 첫 줄부터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신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26절) 율법 교사는 계명을 말씀드렸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의 속마음을 아시고 꾸짖으시며 벌을 주시듯이 말씀하신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28절) 그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이웃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29절)라고 묻는다. 그리스도를 모르면 율법도 모른다. 율법은 올바른 것을 가르치는데, 그것을 모르고 있다면 어떻게 율법을 알겠는가?
주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율법을 지키고자 하여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줄 준비가 된 사람만이 예리코로 내려가던 사람의 이웃이었다고 가르치신다.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36절) 사제도 레위인도 아니었다. 율법 교사가 대답한 것처럼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37절)이 그의 이웃이었다.
여기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34절)이라고 한다. 우리를 치유하시는 의사는 필요한 치료제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분의 말씀이 치료제이다. 어떤 말씀은 상처를 싸매고, 어떤 말씀은 기름을 바르고 어떤 말씀은 포도주를 붓는다. 그분은 그에게 다가가 상처를 싸매주고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주고 노새에 태우고 그의 짐을 대신 져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우리에게도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절) 말씀하신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35절) ‘이튿날’은 바로 강도를 맞은 사람이 구원받은 날로 부활의 날이다. 그리고 두 데나리온은 하느님의 두 계약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아들이 상처 입은 값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다. 그 고귀한 피가 우리를 구원하여 죽음의 아픔을 면하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강도를 만나 매 맞고 반죽음 상태로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도와준 이가 당신이심을 알려주셨다. 우리의 상처를 보살펴 주는 이보다 더 가까운 이는 없다. 그러니 그분은 우리 주님으로 사랑하고 우리 이웃으로 사랑하자.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도 사랑하여야 한다. 하나 된 몸 안에서 다른 어려운 지체들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
《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율법 교사가 예수님과 이웃 사랑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중에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당시 유다인들은 이웃의 범주를 동족으로 제한하였습니다. 다만 이방인이라도 이스라엘 땅에서 살고 있다면 이웃으로 받아들였습니다(레위 19,18.34 참조).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율법 교사의 질문에는,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인과, 갈등 관계에 있는 사마리아인을 이웃의 범주에 넣지 말아야 하지 않겠냐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동족일지라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들도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단죄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을 것입니다(요한 7,49 참조). 그러므로 그가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질문을 하며 대화를 이어간 것은, 그동안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친구로 지내신 것을 비판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은 하지 않으시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비유 끝에 율법 교사에게 되물으십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여기서 율법 교사의 질문과 예수님의 질문을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율법 교사의 질문이 ‘이웃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예수님의 질문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랑해야 할 이웃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묻는 말에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라도 먼저 자신이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바오로 사도는 ‘사랑’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2-3) “사랑이 없으면”이라는 말은 뜻으로는 “사랑 실천을 하지 않으면”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 소용이 없다.”라는 말은 “구원받지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사랑 실천을 하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을 가지는 것이 가능할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사랑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그래서 산을 옮길 수 있는 능력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라는 말은 “산을 옮길 정도로 큰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도”라는 뜻인데,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가짜 믿음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능력이 아니라면, 사탄에게서 온 능력입니다.)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는 일과 자기 몸까지 넘겨주는 일도, 사랑 없이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실천’에 관해서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 이 말에서 ‘믿음’이라는 말은 ‘사랑’으로 바꿔서 생각해도 되는 말입니다. 실천 없는 사랑은, 즉 말로만 하는 사랑은 ‘죽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루카복음에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사랑 실천’을 강조하는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이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사랑학’에 관해서 논문을 여러 편 쓰고, 학위를 여러 개 받아도, 실제 사랑 실천이 없다면, 그 논문과 학위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루카 10,30-32)
그냥 지나가 버린 사제와 레위인도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야고보서에 나오는 것처럼 “빨리 집에 가서 치료를 받으시오.”라는 말만 하고 가버렸다면, 그것은 사랑도 아니고, 강도당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잔인한 일이 될 것입니다. 또 혹시라도 사제와 레위인이 하느님께 “이 사람을 도와주십시오.” 라고 기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도 안 하면서 기도만 한다면, 그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빈말’입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적절한 치료와 보호입니다. 아무 실속 없는 위로의 말도 아니고, 빈말 같은 기도도 아닙니다. (강도들을 쫓아가서 붙잡는 일도 부상자를 먼저 구한 다음에 할 일입니다.) 사랑은 가장 급하고, 가장 필요한 일을 ‘실제로’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10,33-35)
어떤 사마리아인은 강도당한 사람에게 당장 필요한 일을 해 주었습니다. 가엾게 여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말로만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두 데나리온’은 별로 큰돈이 아닙니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라는 말과 ‘두 데나리온’이라는 돈은, 사마리아인의 형편이 넉넉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고, 또 시간 여유도 많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했습니다.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킨 것은 강도당한 사람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당시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원수 관계였습니다. 따라서 사마리아인은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것이 되는데, 이것은 ‘원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같은 사랑’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또 사마리아인 앞에 사제와 레위인을 등장시킨 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또는 성직자들의 ‘위선’을 꾸짖기 위해서입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6-37)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은, “나의 이웃이 누구냐고 묻지 말고, 네가 먼저 다른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어라.”라는 가르침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든 사람’입니다. 사랑에는 어떤 차별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라는 말씀은, “생각만 하지 말고, 또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하여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말씀하셨으니, 강도당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각자 한 사람의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서, 예수님께 드리는 사랑과 똑같은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실천해야 합니다.>
=====================
[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북미주 엠이에서 100일간 10/10(십분 쓰고, 십분 대화하기)을 시작했습니다. 8월 1일에 시작했으니 벌써 66일이 지났습니다. 매일 대화의 주제를 카톡으로 받았습니다. 코로나19로 엠이 주말을 하기 어려웠고, 봉사자 모임도 하기 힘들어졌지만 매일의 대화는 부부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저도 매일 주제를 받으면서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대화 주제도 있었습니다. “화재와 같은 긴급한 상황이 발생한 집에서 단 3가지만 꺼내올 수 있다면(가족, 친지, 애완동물 제외하고) 무엇인가? 내 대답에 대한 나의 느낌은?” 저는 이 질문을 읽으면서 무엇을 가지고 나올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권, 거주자 등록증, 운전면허증’이 생각났습니다. 제가 미국에서는 이방인이기에 저의 신분을 보장할 수 있고,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것들이 떠올랐습니다. 미국은 한국에서와는 달리 서류를 받는 절차와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핸드폰, 노트북도 가지고 나올 것 같습니다. 외부와의 소통에 필요하고, 강론 준비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을 가지고 나오실는지요?
오늘 바오로 사도는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복음’입니다. 그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았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고 합니다. 헛된 것을 퍼트리는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그리스인이 말하는 지식은 참된 복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유대인이 말하는 율법은 참된 복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신자들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동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복음이 아닙니다. 정부의 방역지침을 어기면서 신자들을 감염병의 위험으로 내모는 예배는 참된 복음이 아닙니다. 검사를 거부하고, 방역당국의 조사에 협조하지 않는 것도 참된 복음이 아닙니다. 참된 복음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표징과 가르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집짓는 자들이 버렸던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돌이 반석이며, 그 반석위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이야기합니다. 십자가 없는 복음은 진정한 복음이 아닙니다.
오늘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강도당한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율법학자는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너도 그렇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장 중요한 계명을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계명을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교리와 신학이라는 ‘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종교의 존재이유는 교리와 신학의 틀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의 가르침을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악기는 연습을 해야 연주할 수 있듯이, 기도는 기도해야 기도의 맛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종교, 실천하지 않는 종교는 지친 이에게 위로를 줄 수 없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이에게 희망을 줄 수 없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빼앗기고 짓밟히는 이와 함께>
루카 10,25-37 (가장 큰 계명, 착한 사마리아의 비유)
그때에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빼앗기고 짓밟히는 이와 함께>
빼앗기고 짓밟히는 이에게서
애써 고개를 돌리는 것은
빼앗고 짓밟는 이와
말없이 함께하는 것이요
빼앗기고 짓밟히는 이에게
애써 한걸음 다가가는 것은
빼앗고 짓밟는 이에게
당당하게 맞서는 것이니
아무리 제 갈 길이 바쁘다 해도
아무리 제 일이 소중하다 해도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늘
곁을 세심하게 정성껏 살펴
언제나 곁에 있는 누군가
빼앗기고 짓밟히는 이를 살피고
빼앗기고 짓밟히는 이를 돌보고
빼앗기고 짓밟히는 이를 일으키는 것이
언제나 곁에 있는 무엇인가
빼앗기고 짓밟히는 이를 살피고
빼앗기고 짓밟히는 이를 돌보고
빼앗기고 짓밟히는 이를 일으키는 것이
빼앗기고 짓밟히는 이도 없고
빼앗고 짓밟는 이도 없이
모두가 서로를 자신처럼 사랑함으로써
모두를 있게 하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생명 정의 평화 흘러넘치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은
바로 그 세상 만드는 길입니다
=====================
[안동교구 배인호 베드로 신부님]
<나의 이웃은?>
우리나라에는 많은 외국인 노동자가 일하고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필리핀, 태국, 베트남, 중국, 중국 연변의 조선족입니다.
우리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진출했듯이 이들 또한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대한민국으로 밀려왔습니다. 그들은 주로 3D업종에 종사합니다. 더럽고 힘들고 보수가 적어서 우리는 실업자가 넘쳐나는 상황에서도 외면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열악한 임금과 노동 조건에도 묵묵히 참아내며 일할 뿐 아니라, 우리 경제의 중요한 몫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을 이웃이며 동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에서 왔으니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참아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우리가 베푼 시혜이니 조금 힘들고 어려워도 참아내야지 불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힘들고 어려웠던 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때 외국으로 나간 우리의 산업 일꾼들은 경제 선진국에서 얼마나 많은 무시와 인권침해, 아픔을 당했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지난날 우리가 받았던 아픔을 되돌려 주고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는 우리나라 사람, 우리의 이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입니다. 비록 나는 외국인 노동자와 아무 상관이 없다 해도 그들이 우리 곁에서 함께 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을 두고서 예수님 당시에 의인이라고 자처하던 사제와 레위인이 그랬듯이 외면하고 피해 가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사마리아인처럼 감싸주고 치료해 주고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루카 10,31-34)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태도입니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은 우리와 피를 나눈 가족·친지·동포만이 아닙니다. 지금 나와 함께 숨 쉬며 살고 있는 모든 아파하는 사람입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는 예수님의 말씀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모두는 나의 이웃이다.’라는 말씀이니까요.
=====================
[부산교구 김강정 시몬 신부님]
<예리고의 세 번째 사람>
예리고 도상에서 강도 떼의 습격을 받아 만신창이가 된 사람 앞을 세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사제와 레위 지파 사람은 이웃사랑에 대한 훌륭한 이론을 결정적으로 증명해야 할 순간, 찬바람을 일으키며 무정하게 지나쳤습니다.
사랑에 관해 가장 많은 말을 해온 그들이 정작 사랑을 증명해야 할 순간 결정적으로 등을 돌려버렸던 것입니다. 입으로 선포된 사랑이 위선과 거짓으로 판명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행할 수 있는 모두를 행했고, 줄 수 있는 전부를 다 털어줬습니다. 물질만을 준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담아줬으며, 물질보다 더 귀한 헌신과 희생을 내놓았습니다.
사랑은 말보다는 행함에 있음을, 입으로 내뱉는 사랑보다는 몸으로 보여주는 사랑이 진실한 것임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참 사랑의 무대가 되었던 예리고 도정에서 가장 인간미 넘치는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기에 행복합니다.
그런 한편, 그동안 우리는 어떤 모습의 행인이었을까를 생각해보며, 세 번째 주인공이 되기를 조용히 빌어봅니다 사랑은 말수를 줄이고, 행동의 수를 늘려나가는 것입니다.
=====================
[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착한 사마리아 사람 되기>
하늘은 늘 열려 있습니다. 열린 가슴으로 하늘의 뜻을 받아들이고 하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열린 하늘을 누릴 수 있고 하늘로 오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느님을 사랑하다가 하늘을 닮는 것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하늘의 뜻입니다.
민족과 혈통, 지위와 신분, 율법 따위의 장벽에 갇힌 사람은 하늘의 뜻을 따를 수 없고 열린 하늘을 누리지 못합니다.
강도 만나 사경을 헤매는 동족을 외면하는 사제와 레위는 열린 하늘을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다릅니다. 그는 사랑의 사람입니다. 사랑은 그에게 모든 것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자유와 힘을 줍니다.
그는 혈통과 신분의 장벽을 뛰어넘어 하늘의 뜻을 실천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유태인들의 편견과 증오도 그를 가두어놓지 못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뛰어넘어 죽음을 생명으로, 비참을 환희로 바꾸어놓습니다. 사랑만이 저를 살리고 당신을 살립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난 7월, 몸에서 약간의 이상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아랫배에 계속 통증이 있고, 아침저녁으로 다리가 붓는 것입니다.
어느 신부에게 제 상태를 말하니, “나도 피곤하면 그럴 때가 있더라.”라면서 별 것 아닌 것처럼 말합니다. 또 다른 신부는 자신은 어디가 아프다면서 저의 통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합니다.
이 별 것 아닌 것을 가지고 병원에 가면 안 될 것 같아서 꾹 참았습니다. 그러다가 병원에서 근무하는 신부에게 제 증세를 이야기하면서 물었더니, 곧바로 응급실로 오라는 것입니다. 제가 꾀병 부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서 빨리 검사하자는 것이었지요. 이 말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른 신부들의 말에는 서운함과 거리감을 얻게 되었는데, 이 신부는 저를 믿어준다는 것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가장 큰 위로는 믿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말해주는 것도, 저를 진단해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나의 어려움, 아픔을 믿어주면서 이를 해소할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위로이며 힘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보여 주셨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은 두 날개, 곧 이 두 계명 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아는 것은 거룩한 육화의 신비를 아는 것이며, 이는 곧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바로 실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입니다. 강도를 만나 초주검 상태가 된 이를 보고서 사제와 레위인은 그냥 지나갑니다. 이들은 자기 입장을 내세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는 길, 성전에서 정화예식을 마치고 깨끗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피 흘리는 초주검 상태의 모습은 분명히 부정한 상태라서 자기도 부정하게 될까 봐 피했던 것입니다. 또 당시에 강도가 많았기에 낯선 사람의 모습에 의심하고 피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이렇게 믿지 못하는 사제와 레위인과 달리,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상처를 싸매 주고 여관에 가서 돌봐줍니다. 그를 믿었던 것입니다. 이 믿음이 사랑으로 표현된 것이지요.
주님께서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습니다. 바로 믿음을 가지고 자비를 베푼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입으로만 사랑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믿어줘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
<뒷담화>
누군가 제게 화를 내면서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어쩌면 그 사람이 제게 그럴 수가 있죠? 불만이 있으면 저에게 직접 말하지, 왜 뒷담화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뒷담화를 했다는 것, 그것도 부정적인 말을 다른 사람에게 하고 있다는 불만이고 이에 따른 ‘화’였습니다.
사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말이 ‘뒷담화’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뒷담화를 신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경을 쓰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것이 뒷담화입니다. 그러나 이 뒷담화가 돌고 돌아 듣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듣게 되면 기분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또 몇 번에 걸쳐서 전달된 말의 의미가 완전히 바뀌어졌을 때에는 더 기분이 안 좋습니다.
예전에 어느 스님이 ‘뒷담화도 하나의 매너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의를 차리는 매너 때문에 당사자 앞에서 얘기하지 못하고 뒤에서 하는 것이랍니다.
이렇게라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뒷담화가 좋지는 않지만, 이를 막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100%의 지지란 있을 수 없다고 하지요. 그렇기에 뒷담화 생기는 것도 당연합니다. 따라서 그러려니 하면서, 자신은 이 뒷담화를 하지 않는 데 집중해 보면 어떨까요? 진짜 사랑은 멀리에 있지 않습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생명의 구원>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있습니다. 하나로 연결된 관계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혼자라는 생각은 착각이요 환상입니다. 외관상 아무리 혼자 살아가는 은수자같아도 잘 들여다보면 기도를 통해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고독중에 살아도 언제나 기도를 통해 연대連帶를 지향합니다. 관계의 힘, 연결의 힘, 연대의 힘은 바로 하느님의 힘을 상징합니다.
불암산 아래 고립되어 있는 것 같아도 세상에 활짝 열려 있는 세상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요셉 수도원입니다. 수도원이든 믿는 이든 결코 섬이 아닙니다. 올해의 어제 제 영명축일은 제 생애중 가장 은혜로운 날이기도 했습니다. 완전히 부활한 느낌이었습니다. 두 수녀님들의 친필 편지도 신선한 감동이었습니다. 결코 혼자가 아님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이 또한 좋은 이웃들을 통한 하느님의 위로와 격려임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신부님! 영명축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하루중 가장 캄캄한 새벽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밝히며 새 날을 준비하는 신부님의 부지런함은 저의 모델이자 이상입니다. 30년 가까이 뵈어도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변함없이 하느님께 충실한 그 모습에 감사드리며, 신부님이 밝혀주시는 그 빛속에서 저 또한 앞으로의 수도여정이 밝게 빛나길 바랍니다.”
“존경하는 신부님, 영명축일 축하드립니다. 며칠전 교통사고로 위기의 상황에서 신부님의 안전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날 이집트를 탈출, 홍해를 무사히 건너 구출해 주신 빠스카의 놀라운 체험을 잊지 못하시고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늘 건강하시고 은총의 여정 계속하시길 빕니다.”
진정성 가득 담긴 위로와 격려가 되는 아름다운 편지입니다. 더욱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이 또한 평범한 일상에서의 하느님 체험입니다. 참 행복의 구원의 길은, 영원한 생명의 길을 멀리 밖에 있지 않습니다. 늘 함께 계신 주님을 사랑하며 가까이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오로 사도가 고백한 복음입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분명히 밝혀 둡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에 그대로 공감합니다. 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내용을 강론합니다. 유별난 복음이 아니라 가장 큰 계명의 복음인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의 의도가 불순합니다만 예나 지금이나 구도자의 궁극의 질문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직접 답하는 대신에 에둘러 질문함으로 율법교사로부터 답을 받아냅니다. 이미 알고 있는 진리의 답을 스스로 새롭게 확인시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셨습니다.” 라는 율법학자에게 주님은 지체없이 답을 주십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가장 큰 계명은 주님의 복음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구원의 길도 이것 하나뿐입니다. 갈림없는 온 마음, 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별될 수는 있어도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진위가 검증되는 것도 이웃사랑에서입니다.
‘관상의 샘’에서 흘러내리는 ‘사랑의 강’처럼, 사실 하느님 사랑이 깊어질수록 그 무사하고 깨끗한 아가페 사랑은 이웃사랑으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누가 내 이웃인가 묻지 않고 곤궁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웃이 되어 주는 사랑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어떤 사제나 레위인은 경건한 신자로 하느님을 사랑했을지 몰라도 구체적 상황에서 그 부족함이 적나라게 드러납니다. 거룩한 전례 시간에 맞춰 몸을 정결히 보존하여 참여해야 하겠기에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별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무조건 곤궁중에 있는 초주검이 된 이웃을 살리는 조처를 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뜻밖에도 초주검이 된 이웃을 살린 자는 무명의 이교도,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종교 유무를 떠나 이런 익명의 의인들을 통해 놀랍게도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초주검이 된 이웃을 온갖 정성을 다해 성심성의껏 돌보고 살리는 사마리아인의 감동적 사랑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를 참으로 부끄럽게 하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회개의 표징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느쪽에 해당되겠는지요. 참으로 곤궁중에 있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참된 이웃임을 깨닫습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 물을 것이 아니라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 줄 것인가?’ 묻는 발상의 전환이 바로 분별의 사랑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영원한 생명의 구원은 사변의 대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곤궁중에 있는 이들을 살리는 자비행의 실천으로 입증됩니다. 그대로 사마리아 사람처럼 하느님 사랑의 현존이 되어 사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 사랑으로 충만케 하시어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살게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아멘.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이웃이 되어준 사람>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사람끼리 서로 돕고 의좋게 지내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친척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 이웃사촌만도 못하다.(잠언27,10)고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실제로 표현되어 나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잠언에는 “네 친구와 아버지의 친구를 저버리지 말고 불행할 때 형제의 집으로 가지마라.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낫다.”(잠언27,10)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이가 이웃입니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려는 마음이 불타오르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한 비유를 들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초주검이 되었는데 마침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는 피해 지나가 버렸고 또 레위인도 지나갔는데 그도 역시 길 반대편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상처를 치료해 주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람입니까?’하고 되물었습니다. 율법교사가 자신 있게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10,37) 하고 대답하였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 하고 이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누가 이웃이며, 이웃이 아닌지에 대해서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교회에 자주 다니고 하느님의 자비를 알아도 모두가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완벽하게 알지라도, 전례적인 것을 모두 알지라도, 신학을 다 알지라도 사랑하는 법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려면 다른 길로 가야 합니다. 똑똑함이 필요하지만 그 이상의 다른 것도 있어야 합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았지만 무시했습니다. 그를 살펴봤지만 돌보지 않았습니다.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 그러니까 남자든, 여자든. 아이든, 어른이든 그들에게 가까이 가지 않으면, 하느님께 다가가지 못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당한 사람을 남으로 보았고,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행동이 다르게 표현된 것입니다. 마음에 품은 것이, 밖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사실“우리가 병들고 궁핍한 사람을 만지는 것은, 곧 고통을 받는 예수님의 몸을 만지는 것입니다.”(마더데레사) 그리고‘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묻는 사람에게는 이웃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려고 마음을 먹을 때 이웃이 보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 이웃입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를 묻지 말고, 내가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의' 이웃이 아니라, '이웃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까지 미워하는 셈이며 멸시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에 의하면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저 '어떤 사실을 보는 사람'으로 머물지 않고, '예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웃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때 우리도 착한 사마리아인이 됩니다.”(프란치스코)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이 무엇으로 결정되는지 제시하십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어떤 율법 학자가 질문을 던집니다. 진정 영원한 생명을 갈망해서라기보다 예수님 수준을 떠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율법 학자라면 나름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니 그의 머리에는 이미 답이 들어 있겠지요. 율법이 무엇이라 하더냐는 예수님의 반문에 역시 그는 막힘 없이 정답을 읊습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8)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답한 율법 학자에게 예수님께서 이처럼 세 문장을 건네십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그가 배워온 지식이 틀림 없음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율법에는 오류가 없으니, 그가 기억하는 율법 내용 역시 옳고 바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여라." 예수님은 그에게 머릿속에 든 것을 실천하라고 독려하십니다. 머릿속에 갇혀 있는 문자들이 구원과 연결되려면 꿰어져야 합니다. 그 지식들을 잇는 고리가 바로 실천입니다.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실천이 생명으로 연결된다고 강조하십니다. 율법 학자가 처음 물었던 "영원한 생명"뿐 아니라 현세의 삶도 생명력을 얻게 될 것이니, 예수님의 답에서는 지상의 생명과 영원한 생명이 하나입니다.
누가 이웃이냐는 율법 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 주십니다.
"길 반대쪽으로"(루카 10,32)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이를 보고 사제와 레위인은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립니다. 레위인은 종교사회인 이스라엘에서 힘과 권한과 거룩함까지 소유한 이들입니다. 그들이 피신한 길 반대쪽은 위험이 제거된 안전지대일지 모르나, 안타깝게도 사랑 역시 진공 상태입니다.
"그에게 다가가"(루카 10,34)
반대로 여행 중이던 사마리아인이 그에게 다가갑니다. 이스라엘이 경멸하는 이방 지역의 부정한 사람이지요. 여기서는 두 부류의 신분적 격차 못지않게, 고통을 겪고 있는 이를 사이에 두고 갈리는 두 방향성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더군다나 그 사마리아인은 제 일을 마치고 다시 이 사람에게로 되돌아 오겠다고 여관 주인에게 약속합니다. 고통 받는 이를 향한 무아적 방향성은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반복됩니다. 진정으로 고통 당하는 이가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고통 겪는 이를 앞에 두고 피하느냐 다가가느냐의 차이는, 인간 안에 보편적으로 내재된 사랑이라는 하느님 모상성을 "실천"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이럴 때는 머릿속 지식이나 외적 신분보다 내면에 충만히 차 있는 "사랑"이 동력이 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갈라티아인들을 현혹시키는 "다른 복음"을 우려합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갈라 1,2)
사도가 전하는 복음은 기쁜 소식의 주인이신 예수님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구약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율법의 내용을 당신 죽음과 부활로 몸소 완성하셨지요.
그러므로 복음은 예수님에게서 "실천"되어 완성된 율법입니다. 돌판에 새겨지고 일부 소수 계층의 머릿속에 박제되었던 율법이 예수님의 실천으로 피와 살을 얻어 세상에 구현된 것이지요. 말뿐인 교설은 믿음이 약한 이들을 교란시키고 복음을 왜곡할 뿐입니다.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 10,37)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예수님과 율법 학자 사이에서 간결한 질문과 답이 오고갑니다. 예수님 입에서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자비"라는 단어가 놀랍게도 율법 학자의 입에서 흘러 나옵니다. 이 대화를 통해 처음에 예수님을 시험하려 했던 그의 내면에 변화가 시작된 듯 느껴진다면 착각일까요? ...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향해 지치지 않고 나아가는 방향성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 것입니다. 이 방향성은 우리 머릿속 지식과 익혀온 관습, 사랑과 두려움 등등 우리가 지닌 모든 것의 종합적이고 실천적인 표현입니다. 더군다나 이 방향성은 고통 받는 인류를 향해 내려오신 주님의 방향성과 일치하지요. 그리고 이 방향의 끝에는 주님께서 계십니다. 그 끝에서 구원을 만날 것이니, 그때에는 자비를 입은 그 사람에게 우리가 오히려 고마워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금 마음에 떠오르는 "초주검이 된 사람"이 있습니까? 실직과 질병, 사고와 이별, 소외와 고독으로 쓰러져 있는 사람이 떠오른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그에게 다가가는 오늘 되시길 바랍니다. 따뜻한 안부와 염려, 위로와 격려, 작은 나눔과 사랑이 그를 살릴 것입니다. 우리도 살릴 것입니다. 아멘.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떤 율법교사와 예수님과의 두 번의 대화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이 질문 뒤에는 율법교사의 편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고 있습니다. 마치 스스로의 ‘행실’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자신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은 그분께 메여있는 ‘존재’임을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곧 구원은 ‘무엇을 하느냐?’는 행위의 문제라기보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라는 존재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보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의 문제에 먼저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소임을 맡느냐가 중요하기보다, 사랑으로 그 소임을 수행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곧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는 사람”(루카 10,27)이 되는 일입니다.
<두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마르 10,29)
이 질문 뒤에도 역시 그의 옹졸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사랑의 대상에 한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의 사랑의 대상에는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은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마르 10,36)
예수님께서는 누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대답하기보다, 오히려 ‘모든 이웃이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우리는 모두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이웃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모두에게 이웃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단지 이웃이 아니라 형제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누가 나의 이웃인가? 라는 문제보다, ‘나는 이웃이 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먼저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그가 나의 형제인가?’라고 묻기에 앞서, ‘나는 그의 형제인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곧 내가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해야 할 일입니다. 그가 바로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입니다.”(루카 10,37). 그래서 오늘 우리는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와 함께, “주님 저희가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할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대화의 마지막 구절에 있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8;37)
이 말씀은 아는 것에 멈추지 말고, 행동으로 실행하라는 요청입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몸으로 하라는 말씀이요, 의무적으로나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사랑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 때가 아니라, 그렇게 실행할 때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루카 10,36)
주님!
초라해진 저의 모습을 봅니다.
초주검을 당해 쓰러진 이들이 여기 저기 웅크리고 있는데,
저는 그들과는 반대방향의 열차에 앉아 길을 피해 달아납니다.
강도 맞은 이를 여관으로 옮겨 돌보아 준 사마리아인의 용기와 사랑 앞에,
부끄러움의 고개를 숙입니다.
말없는 그의 헌신과 뒷날까지 챙겨주면서도 고요히 떠나는 그가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주님! 제 안에 사랑을 담을 수 있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마음과 용기를 담을 수 있게 하소서!
제 안에 기꺼이 손해 보는 자유를 담을 수 있게 하소서! 아멘.
=====================
[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FWWNTGndj-Q&feature=youtu.be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 29)
사람
잘 만나는 것이
가장 큰 복이다.
착한 이웃은
착한 사랑을
실천한다.
착한 사랑은
쓰러진 이웃을
지혜롭게
돌보아준다.
고통에
외면하지
않는 마음과
실천이다.
오고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좋은 이웃으로
사는 것이 참된
복음이다.
우리자신이
먼저
좋은 이웃이
될 때 좋은
이웃을
만나게된다.
좋은 이웃은
자비가 만든다.
자비는
길을 밝혀주는
이웃에게 있다.
착한 이웃으로
존재하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복음의 이웃은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자비의 이야기는
이웃이 되는
이웃의 이야기다.
어제가 아니라
오늘을 함께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다.
신앙은
기도서에
있지 않고
따뜻한
이웃이 되는
실천에 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
분리될 수 없기에
가까이 있다.
우리는
어떤 이웃이며
어떤 사람인가.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