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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檀古記 - 58
중국과 일본의 합작품 - 漢四郡
『환단고기』에 따르면 고조선의 중심이었던 眞조선이 망하고(BC238), 40여년 후 番조선도 중국인 위만에게
탈취(BC194)되는 동안 진조선 땅에서 일어난(BC239) 북부여가 고조선의 대통을 계승했다. 하지만 한국의 강단
사학자 대부분은 이 같은 북부여를 무시하고 漢무제가 설치한 漢四郡이 위만정권 멸망이후 韓민족을 지배했다고
주장한다.
중국 사서에 漢四郡에 대한 기록은『사기』「조선열전」에 가장 먼저 나타난다.
그런데 저자 司馬遷(BC135-BC90)은 한사군이 설치되는 직접적 계기가 된 漢나라와 古朝鮮(衛滿정권) 사이의
전쟁(BC109)을 목격했지만 '조선을 평정하고 군을 설치했다'고만 했을 뿐 4군의 구체적 이름과 장소(위치)를
기록하지 않았다.
역사 기록을 현장답사로 꼼꼼히 확인했다는 사마천이 한사군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은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4군(郡)의 구체적인 명칭은 사마천이 죽고 100년이 더 지나 中華史觀이 뚜렷한 班固(32-92)가 쓴 『漢書』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하지만『한서』기록도 한사군의 실체에 대해 명확하게 밝히지 못했다.
「무제본기」는 "右渠의 목을 베고 그 땅을 낙랑, 진번, 임둔, 현도군으로 삼았다."고 하여 4군을 모두 적었다.
그러나「지리지」는 "낙랑과 현도는 무제 때 설치되었다"고 하여 2군을, 「五行志」는 "두 장군이 조선을 정복
하고 3군을 열었다"고 기록, 군의 수가 어긋난다.
『사기』의 주석서 간에도 한사군의 기록이 상이하다.
『사기집해』는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이다"로,『사기정의』는 "현도, 낙랑 2군이다"고 했다.
※한민족의 근대사에 대한 은폐는 비단 교과서에서만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해방 후 1980년대까지 역사학도들에게 근현대사는 일종의 금기 영역이었다.
그 사이에 독립운동에 대해 증언해 줄 전사들은 대부분 고통과 가난 속에서 죽었다.
독립운동사 연구가 금기사항이다 보니 정의부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 '정의부 연구'가 나온 것은 1998년이고,
'참의부 연구'는 2005년이었으며, 신민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박사학위 논문이 없다.
사마천『사기』의 漢四郡에 대한 언급은 후대 학자들이 삽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사군이란 것이 설치된 적이 없기 때문에 사마천은 한사군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을 하지 못한 것이다.
그 진실을 우리는『환단고기』에 수록된『북부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나라 무제가 우거를 멸하더니 그곳에 한사군을 설치하려고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이에 고두막한이 구국의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를 격파하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한사군은 한나라의 희망사항
이었을 뿐 결코 실현된 적이 없었다.
이와 같이 그 실존 사실조차 의심스런 한사군을 한국의 강단 사학계는 '확고부동한 역사의 진실'로 말할 뿐
아니라, 그 위치를 "낙랑(대동강 유역), 현도(압록강 중류), 진번(황해도), 임둔(함경남도) 등으로 비정(比定)한다.
하지만 이 한사군은 일제가 조선의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조작한 내용일 뿐이다.
일제는 한국사의 주요 흐름을 한사군→임나일본부설→조선총독부'로 연결시키고, '조선의 역사는 한사군이라는
중국의 식민지로 출발하였으니 일제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를 세웠다.
이 같은 논리를 해방 후 등장한 강단 사학자들이 실증주의란 미명하에 한국사의 주류 학설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한사군이 한반도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견해를 제시하는 학자를 在野 사학자로 몰아 講壇 사학계
에서 추방했다.
한나라와 고조선 간의 전쟁 후에 설치되었다는 한사군이 설사 실존했다고 가정을 하더라도, 4군의 위치에 대해서
中國의 사서들은 지금의 대릉하(다링 강. 大凌河. dàlíng hé. 중화인민공화국 동북부의 랴오닝 성 서부 遼西를 흐
르는 큰 하천. 허베이 성 동부의 롼허灤河와 랴오닝 성 중앙부의 랴오허遼河 사이에서 흐르고 있다.
옛날에는 백랑하白狼河, 백랑수白狼水로 불렸지만 遼代에 영하霊河로 개명되었고 金代에 능하凌河로 개명되었다.
元代 이후 서쪽으로 인접해 흐르는 샤오링허小凌河와 구별하기 위해서 大凌河 불리게 되었다.) 이남의 요녕성과
하북성 일대로 傳하고 있다.
한사군의 수도인 낙랑의 위치를 찾기 위한 가장 쉽고도 명확한 단서는 갈석산(碣石山)이다.
『史記索隱』「夏本記」에 인용된『太康地理志』의 주석에 "낙랑 遂城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는 구절이 있다(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記). 갈석산이 있는 지역이 바로 낙랑군이 있었던 곳이다.
갈석산은 중국에서 한국의 설악산, 금강산만큼 유명한 산으로 현재 하북성 창려현에 있다.
한사군이 실제로 설치되었다하더라도 그 위치를 한반도 땅으로 말하는 중국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日帝는 어떻게 한사군을 한반도 땅으로 옮길 수 있었을까?
이 같은 역사왜곡 난행의 선봉은 이마니시 류였다. 그는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근거로, 자신이 1913년
평안도에서 발굴했다고 주장한 秥蟬縣神祠碑(점제현신사비)를 제시했다(점제는 낙랑의 현 이름).
『한서』「지리지」에 낙랑군의 속현으로 점제현이 나오는데, 그 점제현의 우두머리가 백성을 위해 산신제를
지낸 내용이 새겨진 비석을 평안도 용강군(현 옥천군)에서 발견했으니 한사군은 분명히 한반도에 있었다는 것.
사방이 확 트인 평야지대에 2,000년 동안 서 있던 비석을 그 전까지 아무도 못 보았으나 희한하게도 이마니시가
단번에 발견한 것이다.
이마니시는 한나라 시대의 기와 封泥(봉니)까지 발견, 평양 일대를 낙랑군의 유적지로 만들었다.
그는 평양 지역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200여 개의 봉니에 낙랑이란 글자가 새겨진 것을 근거로 평양에 한나라의
낙랑군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봉니에는 관직명과 지명이 찍혀있다. 그래서 보낸 곳과 보낸 이의 관직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봉니는 보낸 곳이 아닌, 받는 곳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봉니에 찍힌 낙랑은 문서를 보낸 지역명인데 그런 봉니가 어떻게 낙랑 땅에서 발견될 수 있겠는가.
더구나 평양 땅에서는 다른 군으로부터 받은 봉니가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다.
평양 땅의 봉니 출토는 그 곳을 한사군 지역으로 조작하기 위한 日帝의 자작극인 것이었다.
결론으로 말해서, 한국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한사군은 "중국인들이 밑돌을 깔고, 일본인들이 못을 박은 조작된
역사"(이덕일)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이 1차적으로 왜곡하고, 그 날조된 내용을 일본이 다시 왜곡시킨 한민족사의 원형은 과연 언제나 회복될 수
있을까?
※이마니시 류가 1913년 '신의 손'이 되어 평안도 대동강변에서 발견했다는 '점제현신사비'에 대해 북한의『조선
고고연구』4호(1995)는 "비의 기초에 시멘트를 썼다"고 하면서 이 신사비의 정체에 의문을 제기했다.
비석돌 성분도 그 지역이 아닌 요동지역 화강석과 똑같음을 밝혔다(이덕일 주류역사학계를 쏘다.- 유적 유물로
보는 한사군, 한겨레신문, 2009.6.9). 북한 주장처럼 이 비는 요동에서 옮겨와 시멘트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점제현신사비는 이마니시 류가 날조를 한 것이다.
4) 서양 실증주의 사관에 의한 왜곡+洋毒
19세기 초에 생겨나 19세기 후반에 유럽과 아시아 등 여러 나라로 확산되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서구의 실증
주의 사학은 문헌과 고고학으로 확인되지 않은 역사 기록은 인정하지 않는 遺物主義, 과학주의 史學이다.
심지어는 고고학적 발굴로 증명되지 않으면 고대 문헌의 기록까지 부정을 했다.
따라서 실증주의 역사학은 개개사건의 사실입증에만 몰두, 대자연의 변화에 따라 전개되어온 인간 역사의 대세와
그 근본정신을 보는데 너무 무력하다.
뿐만 아니라 역사의 주체는 인간인데도 인간을 배제한 역사해석에 빠져 인간 정신사의 맥을 완전히 무시했다.
실증사학은 또 史料의 범위를 너무 좁게 잡는다. 민간 풍속, 口傳, 언어도 유물이고 심지어는 인간의 세포조직에
들어 있는 미토콘드리아와 DNA도 과거의 흔적을 담고 있는 사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최근 역사학의 지적이다.
이상과 같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 실증주의 사학은 1920년대 이후 식민사학에 의해 이 땅에 이식되어 韓民
族史 말살과 왜곡의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그리고 해방 후 지금까지 여전히 역사학계의 대세가 되었으며, 이에 편승한 강단 사학자들은 韓민족의 뿌리역사
와 시원문화에 대한 사료를 거의 수용하지 않은 채 부정을 하고 있다.
'實證不在'라는 핑계로『桓檀古記』같은 인류 원형문화와 한민족 창세의 뿌리 역사서를 외면하고 부정한다면
그것은 결코 학자의 올바른 태도가 아닐 것이다.
桓檀古記 -59
5) 유, 불, 기독교에 의한 역사왜곡
유교에 의한 역사왜곡
공자가 주창한 유교는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요 그 밖의 민족은 중국에 예속된 오랑캐에 불과하다는 中華主義를
내세운다.
유학을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은 고려와 조선의 尊華 사대주의자들이 위와 같은 중화주의사관을 그대로 답습
하여 우리 역사에 끼친 해악은 너무나 크다.
고려의 유학자들은 한민족의 국통(國統)맥이 기자조선→위만조선→南三韓→신라로 연결되는 것으로 왜곡했다.
이러한 역사 왜곡에 앞장선 인물은 고려중기의 김부식(金富軾)이었다.
그는『삼국사기』를 저술하면서 고구려를 계승한 大震의 역사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같은 시대 신라역사는 망
하는 날까지 세세히 기록했다.
그러면서도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것은 事大精神에 위배된다고 비판했다.
묘청, 전지상 등이 故土回復을 위한 발판으로 삼기위해 서경 천도운동을 벌였을 때 김부식을 대표로 하는 집권층
유학자들은 이것을 권력 장악음모라고 몰아붙였다.
유교를 국교로 신봉한 조선은 개국 초에『춘추』와『자치통감 강목』만 史筆로 여기고 한민족 고유사서를 이단
이라 하여 모조리 압수, 소각하였다.
태종은 書雲觀에 보관되어 있던 고유 사서를 공자의 가르침에 어긋난다하여 소각하였고, 세조에서 성종까지 3
대에 걸쳐 임금이 전국 관찰사에게 사서 수거령을 내렸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의 정통사서가 소실되었다.
조선중기 광해군 때 淸 태조 누루하치가 보낸 國書를 보면 조선의 사대 근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그 국서에서 누루하치는 "요동은 본시 너희 조선의 땅이다.
지금 明나라 사람들이 그 땅을 빼앗았는데, 너희는 明나라가 원수인 것도 모르고 도리어 信服하고 있다"며 조선
을 비웃었다. 光海君13년 1621년에 淸 태조가 보낸 국서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듣건대 周나라 武王이 자신의 신하 箕子를 조선국의 초대 임금으로 봉했다고 한다.
또 요동 땅은 원래 너의 朝鮮에 속했으나 나중에 明나라에게 빼앗겼다고 들었다.
조선 사람들을 천하게 여기는 것이 漢族 백성들보다 심해서 집안의 종처럼 기른다.
그대들은 明나라에 빌붙어서 몹시 두려워하며 감히 한마디 말도 어긋나지 않는 것을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노라.
우리는 明나라처럼 남을 위력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스스로 편히 살도록 바랄 뿐이로다.
어디서 오든지, 어디로 가든지 너희 편할 대로 놓아둘 것이로다."
(我聞周武王封其臣箕子爲朝鮮國一代之君, 又聞遼東之地原屬爾朝鮮後爲明奪取之, 賤朝鮮人甚於其漢民養之若家
奴也! 爾若以附於明惶惶然不敢有一言相悖爲善事者, 我則非若明威攝他人, 惟冀自身安然以居之矣, 何居何從聽憑
爾便一滿文老檔.)
더욱 가관인 것은 조선 유학자들이 보인 열렬한 慕華정신이다.
이는 亡國滅族의 표본이다. 세종 때 최만리는 훈민정음 제정 반대 상소를 올리면서 "祖宗이래 지성으로 중국을
師事하고 모두가 중국 제도를 본받아 왔는데, 만약 훈민정음이 중국에 전해지는 날에는 사대문화에 부끄러운 일"
이라고 했다.
동방의 명현이라 불렸던 이퇴계조차 明을 本朝, 즉 '우리나라 조정'이라고 불렀다.
또 우리의 역사에 대해 "단군시대는 아득한 태고시대라 증명할 수 없고, 기자가 봉해지고 나서야 겨우 문자를
통했다. 삼국시대 이전은 별로 논할 만한 것이 없다"고 폄하했다.
(若檀君之世,鴻荒不懲 箕子肇封, 僅通文字, 三國以前, 槩無足論.『大東野承』「己卯錄別集」)
이율곡 또한 明나라 군주를 '우리 皇上'이라 하고 明나라 조정을 '天朝' 또는 '聖朝'라 불렀다.(『栗谷全書』「本國
請改系奏本」) 그는 「箕子實記」를 지어 "기자께서 조선에 이르시어 우리 백성을 천한 오랑캐로 여기지 않고
후하게 길러 주시고 부지런히 가르쳐 주셨다.
우리나라는 기자로부터 한없는 은혜를 받았으니 그것을 집집마다 노래하고 사람마다 잘 알아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단군의 출현은 문헌상 상고 할 수 없다"는 한마디로 한민족의 상고 역사 전체를 부정했다.
당대의 실학파 학자들은 어떠했던가?
『熱河日記』로 유명한 朴趾源은 "明나라는 우리의 上國이다. 상국이 속국에게 내리는 물건은 비록 터럭같이 미미
한 것일지라도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이 그 영광이 온 나라를 움직이고 경사가 만세에 끼칠 것이다."
(皇明吾上國也 上國之於屬邦 其錫賚之物 雖徵如絲毫 若隕自天 勞動一域 慶流萬世. 『燕巖集』「行在雜錄」)
실학파 대표격인 丁若鏞도 사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이라는 명칭은 평양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은 본디 기자가 도읍으로 삼은 곳이다.”(朝鮮之名 起於平壤 寔箕子
之所都也..『與猶堂全書』「地理集」)고 기자조선이 실존했던 것처럼 말했다.
또한 “우리나라는 번국이니 마땅히 제도가 작아야 한다.”(『經世遺表』「天官吏曹」)면서 조선은 제후국이니
중국의 관제보다 규모가 커서는 안 된다고 했다.
최인은 이 같은 행태를 두고 “조선은 한-일 합병으로 망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에 한-중 합병으로 망했다”고
일갈했다.(최인,『한국 사상의 신발견』,p.225.)
조상의 비문 첫 머리에 유명조선을 내세우고(서울 종로구 역사박물관 앞마당에 있는 은신君 神道碑文 첫 줄에
‘有名朝鮮’이라 쓰여 있다.
은신군은 정조의 이복동생이다. 16세기 이후 조선시대 사대부나 왕손의 묘비엔 당사자의 관직과 이름 앞에 ‘유명
조선’이 관용구처럼 사용되었다.)
조선 백성을 臣民이라 했으며 漢文은 眞書로 존중을 하면서도 한글은 諺書로 무시했으니 분명 韓-中 합병이다.
고려와 조선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한민족은 참으로 혼이 빠진 민족이었다.
불교에 의한 역사왜곡
삼국시대 이후 본격 수입된 불교를 우리 고유의 신교(神敎)의 郎家思想을 지워 버리고 우리 역사를 창조한 주인
공들을 모두 불제자로 만들어 버렸다.
고려의 승 一然은 한민족과 인류의 시원국가인 환국의 초대 환인 천제를 한낱 불법의 수호신으로 둔갑시켰다.
『삼국유사』를 지으면서 '昔有桓國(옛적에 환국이 있었다.)' 옆에 '謂帝釋也'라는 불교 교리에 따른 주석을 달았
다.(모든 思想은 어떤 생각의 그 시대상황에 따른 해석이다.)
환국을 帝釋의 桓國'으로 만들고, 桓因天帝를 불교에서 받드는 帝釋桓因이란 신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사찰에는 대웅전(大雄殿)이 있다. 이는 우리 조상들이 桓雄殿을 지어 배달을 개국한 초대 환웅천왕을 받들어
모신 풍습을 변질시킨 것이다.
불교의『법화경』에 석가모니를 ‘위대한 영웅’이라 표현했는데, 불교가 중국에 들어올 때 大雄이라고 번역을
했고, 석가모니를 봉안한 전각을 大雄殿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이 大雄殿과 환웅을 모신 桓雄殿의 의미가 통하는 것을 알고 환웅전에
석가모니를 대신 앉혀 한민족의 고유한 환웅 숭배 신앙을 근절시키고 대신에 석가모니 숭배신앙을 뿌리내리게
한 것이었다.
불교는 정착과정에서 神敎문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신교의 삼신사상과 칠성신앙이 불교에 흡수되어 전국 사찰의 三神閣과 七星閣이 되었다. 삼신각은 우주의 조물
주인 三神을 모시던 신교풍습의 자취이고, 칠성각은 인간의 수명과 복록을 관장하는 칠성에 대한 신앙의 흔적
이다.
불교는 또 북부여의 시조인 해모수(解慕潄) 단군의 건국을 기리기 위해 등(燈)을 달아 축하했던 민족전체의 대축
제일인 4월8일을 석가탄신일로 변조했다.
그 까닭은 당시 낮선 인물인 석가의 생일을 한민족에게 친숙한 해모수단군의 북부여 건국일과 동일한 날짜로 함
으로써 이 땅에 불교를 빨리 정착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檀君王儉께서 天祭를 올린 유서 깊은 마이산(摩利山)을 마니산(摩尼山)이라 하여 불교식으로 개칭하기
도 했다.(mani = 寶珠를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 불행, 재난을 없애주고 더러운 물을 깨끗하게 하는 德.)
한국의 대표적인 외래종교 중 가장 오래된 불교는 전래 초기부터 우리의 전통신앙인 신교를 퇴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민족의 역사를 불교사관으로 기록하는 잘못을 남긴 것이다.
①昔有桓國의 오해 ②桓雄殿에 석가모니(大雄)르 봉안 ③사월초파일 변조 ④마리산을 마니산으로.
기독교에 의한 역사 왜곡
기독교의 뿌리는 Sumer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Abraham에 있다. Sumer 문화가 한국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결국 기독교 속에는 동북아 환단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신교문화의 원형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한국의 기독교인은 이스라엘인의 수호신인 야훼(여호와)를 온 인류의 하나님이자 우주의 유일신으로 섬긴다.
“믿음의 조상 Abraham은 사라와의 사이에서 이삭을 낳고, 이삭은 리브가와의 사이에서 야곱을 낳았다.
야곱은 레아와의 사이에서 르우벤과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을 낳고” 라는『구약전서』와『신약전서』
에 나오는 유대인 족보를 줄줄 외우고 다닌다.
그러면서도 환인, 환웅, 단군은 누구인지도 모르고, 심지어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설사 알게 된다하여도 신화 속의 인물로 치부해 버린다.
서울 Olympic이 열렸던 1988년, 서울시는 단군성전이야말로 세계에 자랑할 우리의 문화유산이라 하여 사직공원
의 협소한 檀君 齋室을 확대, 개축하려고 했다.
그러나 기독교 단체들이 전국적으로 ‘단군성전 건립 결사반대’라는 붉은 글씨의 현수막을 교회마다 내걸고 단군
은 신화 속의 인물이고 우상이라면서 당국에 압박을 가했다.
결국은 계획(확대, 개축)이 무산된 바 있다. 그들은 또 10여 년 전에는 전국 초등학교에 세워진 단군상의 목에
톱질을 하기도 했다.
丹齋 申采浩(1880-1936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적 아나키스트)는 외래종교, 외래사상에 물이 들어 역사와 문화
를 잃어버린 가엾은 한민족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 사람은 매양 利害 밖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다.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
역사가 H.Plumb(플럼)은『The Death of the Past』(과거의 종말)에서 “과거의 착취와 구속에 대한 해방선언이
과거의 종말”이라고 주장했다.
왜곡된 과거의 진실이 밝혀지고 바로 잡힐 때, 그래서 진정으로 과거의 종말이 올 때, 오늘의 현실과 인간의 문제를
바르게 보고 희망찬 미래를 창조적으로 건설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J·H. Plumb, Niall Ferguson,『The death of the Past』)
※ 이 땅의 한민족뿐만 아니라 지구촌 70억 인류가 오늘의 현실과 인간의 문제를 바르게 보고 희망찬 미래를
창조적으로 건설할 수 있는 길은 동북아 역사의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다. 오늘날 인류에게 닥친 여러 문제의 본질
적인 원인을 밝혀내고 그 해법을 찾기 위해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가 동북아 역사의 진실 규명이다.
일제에게 유린당한 한민족
일제는 민족말살 정책을 실시하여 종교, 언어, 문학, 예술 등 문화 전반에 걸쳐서 한국인의 정신과 혼을 말살하려
고 했다.
그 일환으로 조선의 성씨 파괴, 조선말, 조선 글을 빼앗고 신사참배 강요, 창씨 하지 않는 자의 자녀는 입학, 전학
을 불허. 창씨 않는 아동에게 이유 없이 질책, 구타. 창씨 않는 자를 징용 1순위로 하고 물자 배급에서도 제외.
(1920.5 천조대신과 명치왕을 모신 신사를 서울 남산에 세웠다. 1925년에는 조선8도에 神社가 150여개. 그 후
면 단위까지 확대, 광복직전에 2,229개 건립.)
일제는 1938년부터 모든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 전면 폐지. 일본어를 국어로 사용. 조선인 각 가정에 신단인 神棚
(가미다나)을 만들게 하고 각 학교 청소년들에게 신사참배강요.
조선 山河 명산과 혈 자리, 심지어 바다 속에까지 말뚝을 박아 천지의 정기를 끊으려 했다.
이 쇠말뚝은 땅에 박았지만 사실은 우리의 영혼 속에 박은 것.
일인들은 조선인들보다 인종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한다며 체질인류학적 연구를 했다.
당시의 연구 자료는 "조선인의 두골이 작고 골격이 두꺼워서 뇌 중량이 작기 때문에 야만에 가깝다." "일인에 비
해 동작이 활발하지 못하고 안면 표정이 섬세하지 못하며 조잡한 음식을 먹는 까닭에 소화기관이 발달했다"는 등
편견으로 가득.
그러나 그 같은 연구결과는 일본 내 지역 간 인종적 차이가 일인과 한국인 간의 차이점보다 훨씬 큰 것으로 나타
났다. 그래서 한국인이 열등하다는 근거를 만들기 위해 시작한 체질인류학 연구가 나중엔 한국인과 일인의 뿌리
가 같다는 日鮮同祖論의 근거로 이용 되었다.
일제는 1907.3월에 明治王 재위 40주년 기념 도쿄 박람회를 열었다. 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아시아 최강
제국으로 올라 선 일본의 국력을 자랑하는 무대였다.
이 박람회에 조선이 2명이 살아있는 동물처럼 전시되었다. 사람이 사람을 전시한 반인륜적인 행위에 당시 일인
들을 '조선동물 두 마리가 아주 우습다'는 반응까지 보였다.
독일제국주의가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고, 일제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800만의 한국인을
학살했다. 1894년 甲午東學革命을 진압하면서 동학군과 양민 30만 명을 학살. 청-일 전쟁을 하고 동학군을
진압키 위해 1894.9-1895.7까지 10개월 동안 수도를 동경에서 히로시마로 옮기기까지 했다.
우지개라는 볏짚으로 만든 농기구를 머리에 씌우고 불을 질러 죽였다.
동학혁명에서 가장 치열했던 우금치 전투에서는 계곡, 산마루가 동학군의 시체로 하얗게 덮였고, 개천에는 핏물
이 여러 날 흘렀다고 한다.
1920년 만주 간도 땅에서는 3-4개월 만에 조선인 5,000명 이상이 무자비하게 학살되었다.
고종비 명성황후는 부관참시 되었고 만주와 한반도에서는 마루타(まるた,통나무)라는 암호로 통하던 생체실험을
했다.
만주주둔 731부대가 중심이 되어 세균성 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중국인, 러시아인, 한국인을 상대로 무려 31종의
실험을 했다. 아직 그 전모가 밝혀지지 않은 일본의 생체 실험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범죄중의 하나였다.
1933년 興亞연구소라는 특수 조직에서 도요카와 젠요(豊川善曄)라는 자가 작성한 京城천도 공작에는 일본이
세계를 경영하려면 동경보다는 조선의 경성이 수도로서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만약 日人 1,000만 명이 한반도로 이주했더라면(1925년 한반도 인구는 1,900만) 한반도는 완전히 일본인 나라
가 되었을 것.
이 같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민족역사가 난도질당하고, 한국인의 ⅓이 살해되었으며 민족의 씨까지 말라버릴
뻔했던 참담한 과거)을 너무나도 쉽게 잊고 산다.
왜곡된 한국사의 핵심
잘못된 한국사 체계 :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국→배달→고조선으로 이어진 한국의 역사는 9,000년이 넘는다.
하지만 중, 일은 환국, 배달의 실존을 인정치 않았고, BC2,333년에 단군왕검에 의해 시작된 고조선의 역사도
있는 그대로 인정을 하지 않았다.
단군조선 대신에 중국은 箕子조선을, 일본은 衛滿조선을 고조선 역사의 시작으로 조작했다.
箕子조선은 BC12세기 말 중국의 商나라 사람인 기자가 세웠다는 조선이고, 위만조선은 BC194년에 중국의
燕나라 출신 위만(衛滿)이 준왕(準王)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것.
한국의 강단사학계는 이 같은 두 조선을 그대로 수용, 고조선의 역사를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설명
을 하고 있다. '기자조선은 허구'라는 주장이 강단 사학계 내부에서도 제기되지만 아직도 기자조선은 여전히 살아
있다.
강단사학은 또 위만조선을 이어 漢四郡이 한국을 지배했다고 한다. 한사군은 사실 여부가 불분명함에도 불구하
고 한국 사학계는 역사적 사실로 굳혔다.
뿐만 아니라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의 대동강 유역으로 설정하기까지 했다.
(요동, 요녕, 하북성에 있었다는 주장은 일축하고 있다.)
한국이 인정한 한사군을 중국은 동북공정에 그대로 악용, 漢나라 때 자기 영토가 대동강 유역에까지 이르렀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서양의 학자들과 교과서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묵인, 동조하여 한국사를 겨우 1,000년의 역사로 잘못 알고 있다.
桓檀古記 - 60
v. 韓의 뿌리와 미래 :『환단고기』解題를 마치며
대한민국의 대한은 어디서 왔는가?
동서양 사람 대다수가 한국(KOREA)이란 이름을 익히 알고 있지만 정작 그 본딧말이 대한민국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것은 2002년 월드컵 때 우리가 외쳤던 '대~한 민국!' 이라는 응원 때문이었다.
우리 국호에 대한이라는 말을 처음 쓴 분은 高宗황제였다.
『조선왕조실록』1897년10월11일자 기록에 따르면, 고종은 "우리나라는 곧 三韓의 땅인데, 개국 초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으니 지금의 천하의 호칭을 '大韓'으로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고 하며 앞
으로 "모두 대한으로 쓰도록 하라"고 명했다.
이틀 후 고종황제는 원구단에서 하늘의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대한제국의 출범을 천하 만방에 선포했다.
삼한은 한강 이남의 南三韓이 아니라 神敎의 삼신사상이 인간 세상의 통치원리로 구현된 본래의 北三韓이다.
고조선 시대에 초대 단군왕검께서 삼신의 원리에 의해 나라를 眞韓, 蕃韓, 馬韓으로 나누어 다스린 三韓管境制가
삼한의 시초인 것이다.
19세기 말 고종황제가 조선 대신 대한으로 국호를 바꾼 것은 이 나라가 고조선의 삼한을 계승한 天子國이자 자주
독립국으로 재탄생함을 천명한 것이다.
※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새 왕조를 세운 후, 국호를 옛 조선의 맥을 잇는다는 취지로 조선과 자신의 출생지
에서 따온 和寧 중 하나로 정하려 했다.
明나라는 조선을 택했다. (그런데) 明나라 朱元璋이 택한 조선은 이성계의 뜻과는 달리 기자조선(중국이 조선
역사의 시작으로 설정한 조선)을 가리켰다.
『조선왕조실록』에 "너희 나라는 원래 기자조선으로 시작했으니 국호를 조선으로 하라"는 주원장의 말이 있다.
그러나『환단고기』에는 ‘吾桓建國이 最古’라는『삼성기』上의 첫 문장이 나온다.
"우리 환족이 나라를 세운 것이 가장 오래다"는 이 선언은 한민족이 원래 '桓族'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桓은 하늘의 광명(天光明)을 뜻한다. 이 桓에서 탄생한 것이 韓이다. 즉 韓(한)은 '하늘의 광명'이 인간에게 내려
와 깃든 것(人光明)이다. 한은 바로 인간을 하늘의 광명을 내려 받은 신성한 존재로 자리매김을 하는 말인 것 이다.
아시아에서 북미까지 퍼져 있는 韓
국어사전을 보면 韓은 20가지 이상의 뜻을 갖고 있다.
하나, 多, 大, 同, 中, 凡(대략)....『환단고기』에서도 여러 가지로 정의한다.
"韓은 역사의 통치자인 皇(임금)이라는 뜻이다. 황은 크다(大)는 뜻이며, 크다는 것은 하나(一)라는 뜻이다.“
(『태백일사』「소도경전본훈」) 한의 크다, 하나라는 뜻은 온 인류를 하나로 묶는 말이 될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온 인류를 하나의 큰 가족으로 보는 大韓思想이 나왔다.
고조선 시대에 갈려 나간 북방민족 중 몽골족의 언어에서 한 또는 한과 유사한 말을 쉽게 볼 수 있다.
몽골제국을 구성한 4대 왕국인 오고타이 한국(汗國), 차가타이 한국, 킵차크 한국, 일한국의 이름에 비록 한자
표기는 다르지만 한이 포함되어 있다.
이 汗國은 칸국으로도 발음이 되는데 김상일 교수는 "몽골에서의 칸은 신의 이름과 영웅, 산, 강 같은 숭배 대상
에 붙여진다"는 것. 마야 Indian들에게서도 Kan이 신적존재와 관계되어 사용되고 있다.
북미의 호피 Indian들에게서 발견되는 한야(Hania)는 戰爭神을 가리킨다.
잉카 세계에 있어서 천상세계는 하난파차(Hanan Pacha)로, 여기서 하난은 하늘 세계 혹은 '높다'는 뜻이다.
여러 Indian 부족들의 말에서 한 혹은 칸을 어간으로 하는 어휘 대부분이 '하늘', '하느님'을 의미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문화 속에서도 한이 숨어있다. 미얀마의 네 부족 중 맨 위쪽에 위치한 친(Chin)족이 부르는 신의
이름은 팟 히안(Pat Hian)이다. Pat은 아버지, Hian은 하늘이란 뜻이다.
여기서' 히안'은 '한'과 유사음으로 볼 수 있다. 인구 400만 정도에 이르는 인도의 원주민인 Santal족의 창조신화
에서도 '한'이 나타난다. 산탈 신화에 등장하는 새의 이름이 Hans와 Hansin으로, 그 이름에 한이 들어 있다.
태국사람들도 우리의 '한'과 유사한 개념인 콰한(khwan)을 갖고 있다.
콰한은 무려 32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콰한'은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보는 개념이며, 너와 내가 조화되는 개념
이다.
인도네시아의 신화에서 최고신은 커투한(ketuhan)이다.
커는 크다는 뜻이고, 투한은 주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신 이름에 한을 포함하고 있다.
필리핀의 Igorot 원주민 최고신은 카후니안(Kafunian)이다.
카후니안은 카한 또는 칸으로 줄여질 수 있다고 보며, 반대로 한, 칸이 카후니안으로 풀어질 수도 있다.
김상일의 주장에 따르면, 韓은 문명의 기원에 있어서 동아시아의 문명을 하나로 묶어주는 띠와 같은 언어라는
것이다.(박성수, 김상일 외 ,『한류와 韓思想』pp.185~203.)
한이 궁극적으로 뜻하는 바는 미래의 인간상이다.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한은 인간에 내재한 光明, 또는 광명이
깃든 신성한 존재로서의 인간 등을 의미했다.
그러나 한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은 장차 천지의 뜻과 이상을 역사 속에서 직접 실현할 천지의 아들딸로서 太一의 人間을 가리킨다. 미래 문명
사회에서 보편적인 인간상이 될 태일인간, 이것이 한의 궁극이다.
『환단고기』는 大韓史觀으로 보어야 한다.
대한사관은 '인류의 창세 민족인 桓(大韓)족이 지구에 첫 문명을 열었으며, 그 문명이 동서의 여러 갈래로 뻗어
나아가 세계 역사와 문명의 기원이 되었다'는 시각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이다.
온 인류를 한 뿌리에서 나온 한겨레로 인식하는 사관이다. 이것을 온전히 밝힌 유일 정통 사서가 바로『환단고기』
다. (이는 필자가『환단고기』를 30여 년 간 암송하고 묵상하며 얻은 깨달음이라고 주장.)
그동안 역사학은 실증주의에 바탕, 상고 시대를 유적과 유물 중심으로 해석하는 구사학(old history)과 역사가의
이해와 주관에 따라 역사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신사학(new history)이 주류를 형성했다.
구, 신 사학은 인류사의 근원을 이루는 정신문화와 그것의 숭고한 가치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
또한 역사를 배우는 이들에게 '인류는 한겨레 한가족' 이라는 시야도 열어주지 못했다.
대한사관 (제3의 역사학)은 구, 신 사학의 관계를 능히 극복할 수 있는 통합의 사학이다.
한민족과 인류의 창세역사 그리고 원형문화는 대한사관으로 연구하고 해석할 때 그 온전한 모습과 웅장한
기상이 드러날 수 있다.
나(안경전)의 30여 년 간의 연구결과인 『환단고기』는
① 동북아 한민족과 인류의 창세역사와 원형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지구촌 유일의 역사서'이다.
상고시대 한민족의 나라 경영을 기록한 '통치법전'이요,
동서양 모든 종교의 모체로서 인류의 시원종교(urreligion )인 신교(神敎)의 전모를 기록한 '종교경전'이다.
② 인류 첫 조상인 광명의 환족이 어떻게 시원역사를 열고 문명을 일구었는지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③ 환국 이후 고려에 이르기까지 무려 9,000년의 한민족의 역사 개혁과정도 보여준다.
④ 장차 인류가 맞이하게 될 새 세상에 대한 전망도 제시한다.
한마디로『환단고기』는 韓(한)의 뿌리와 미래를 밝힌 보배로운 歷史書이다.
『환단고기』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환단고기』는 5명의 저자가 쓴『삼성기』上과 下,『단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등 5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라에서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1,000년에 걸쳐 서로 다른 저자가 기록한 책의 내용도 현 인류의 동서 문명이
환국에서 시작되었다는 것과 한민족의 상고역사가 환국→배달→단군조선으로 이어져 왔음을 일관되게 이야기
하고 있다.
5권의 특징은
①『삼성기』上은 신라 때 승려 安含老가 예로부터 전해오던 우리의 고유 사서를 기초로 하여 한민족의 국통
맥을 밝힌 사서이다.
②『삼성기』下는 고려 때 元董中이 쓴 책으로,『삼성기』上에 기록되지 않은 환국과 배달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 특히 치우천황(蚩尤天王)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③『단군세기』는 고려 말엽 杏村 李嵒(이암.1297-1364)이 간신배의 농간으로 몰락하는 국운에 비분강개하여
47명(분)의 단군이 다스린 동북아의 종주였던 단군조선의 영광스런 역사를 만천하에 드러내고자 저술한 역사서.
④『북부여기』는 이암과 동시대를 살았던 伏崖居士 范樟이 주권을 상실한 고려의 현실을 통탄하며 잃어버린
부여사(북부여와 동부여)의 전모를 복원하여 왜 북부여가 단군조선의 국통을 계승한 나라인지를 처음으로 밝힌
사서이다.
⑤『태백일사』는 조선시대 李貊(이맥)이 한민족의 7,000년 상고 역사를 세밀하게 다루면서 신관, 우주관,
인간관, 인성관, 윤리관을 중심으로 환인, 환웅, 단군이 전한 나라 다스림의 심법(天符의 三一心法)을 체계적
으로 집대성한 것. 그래서『태백일사』는 신교(神敎)문화의 총체적 진면목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특히 8편 중 첫 편인「三神五帝本紀」는 인류의 창세문화와 역사를 구성한 신교원형문화의 정수를 깨우쳐
주고 있다.
이처럼 당대 석학들의 귀중한 기록을 모아 雲樵 桂延壽(1864-1920)가『환단고기』라는 한 권의 웅혼한 역사서로
출간한 것은 이맥이『태백일사』를 짓고도 무려 400년이 지난 1911년의 일이었다.
조선이 강제로 일본의 제국주의에 희생되자 동북아의 宗主요, 인류 창세사의 주인공인 한민족의 모든 것이 자칫
멸절될지도 모를 지경에 이르렀을 때, 창세역사와 미래문명의 원형을 담고 있는『환단고기』가 절망에 빠진
한민족을 일으켜 세우려는 듯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 혼을 불어넣은 운초 자신은 일제에 의해 참혹한 운명을 맞아야 했다.
일제는 『환단고기』가 조선인의 독립의식을 고취할 것을 우려하여 운초를 살해하고 사지를 토막 내어 압록강에
내던져 버렸다.
『환단고기』는 일제 암흑기, 5.25남북전쟁, 사대주의, 식민사학자들의 외면과 배척 등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마침내 되살아났다.
桓檀古記 - 61
『환단고기』의 진정한 가치
그렇다면 1,500년이 넘는 세월을 거친 끝에 탄생하고 전수된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환단고기』의 두 핵심 Key Word는 三神과 光明이다.
삼신이 우주의 근원이며, 삼신 그 자체인 우주광명이 천지와 인간에게 두루 깃들어 있음을 밝혀준다.
삼신은 세 분의 신이 아니라 오직 한분 一神이다. 神의 조화 자체가 광명(밝음)이다.
바로 이 일신(一神)이 우주 삼라만상을 낳고 길러서 이끌어 갈 때 '세 가지의 신성(神性)과 창조법칙'으로 작용
하기 때문에 三神이라 부른다.
이러한 삼신의 작용으로 하늘에는 三神, 땅에는 三韓(단군 때 삼한관경제로 운영된 진한, 변한, 마한),
인간의 몸에는 三眞(性, 命, 精- nature, life, spirit)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天地人, 곧 대우주를 이루는 이들 모두에 삼신의 광명과 3대 신성이 동일하게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물주이신 우주 삼신의 3대 신성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그것은 하늘의 道인 造化의 道, 땅의 도인 敎化의 道, 인간의 道인 治化의 道이다.
만유생명의 근원인 삼신은 뭇 생명을 낳고 기르며(造化), 깨달음을 열어 주고(敎化), 질서 있게 다스려 나간다(治化).
따라서 대우주는 곧 살아 있는 삼신 그 자체이며, 인류역사와 문명에도 삼신의 섭리가 작동한다.
이런 까닭에 하늘, 땅, 인간은 삼신이 준 신성과 광명을 지닌 三位一體的 존재가 된다.
하늘도 밝은 존재(天一), 땅도 밝은 존재(地一), 인간도 밝은 대광명의 존재(太一)인 것이다.
『환단고기』를 통해 (우리는) 하늘, 땅, 인간이 숭고한 존재로서 하나가 된 가운데 인류 역사가 시작되었고
진행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환단고기』를 보면, 상고문화의 모든 것이 삼신의 가르침과 작용에 의해 비롯된다는 것과 한민족과 인류의
창세 역사의 내용이 바로 삼신의 가르침인 神敎文化라는 것도 깨닫게 된다.
신교문화란 '神(삼신)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역사와 문명을 일구어간다'는 뜻이다.
한민족의 신교문화권에서는 천상의 하느님을 상제님 또는 삼신상제님이라 불러왔다.
『환단고기』에서는 三神一體上帝(삼신과 한 몸이신 상제님) 또는 '三神卽一上帝'(삼신은 곧 한 분이신 상제님)라
해서 우주의 통치자로 계시는 하느님의 존재와 본래 호칭을 더욱 명확히 알려주고 있다.
'삼신의 신권을 현실세계에 집행하시는 통치자 하느님'이기 때문에 상제님을 그렇게 부른 것이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인간은 단순히 진화의 산물도 아니고 창조주의 일방적인 의지에 따른 수동적인 피조물도
아니다. 인간은 삼신상제님의 신성과 지혜와 광명을 내려 받은 존엄한 존재다.
나아가 자신을 낳아준 天地를 대신하여 천지가 꿈꾸는 원대한 이상을 이 땅 위에 직접 실현하는 존귀한 주체다.
『환단고기』는 인간이 바로 천지의 꿈을 실현해 가는 역사의 위대한 주체임을 알려주고 있다.
『환단고기』는 수행과 깨달음을 통해 삼신께서 내려 주신 본래의 신성과 광명을 되찾은 사람을 태일(太一)이라
일컫는다.
『환단고기』는 인간이 어떻게 태일로 거듭날 수 있는지(방법)를 알려 준다.
唐나라 여동빈은『太乙金華宗旨』에서 太乙이란 '우주의 가장 높은 차원의 영적경계'를 의미했다.
환국의 7세 지위리(智爲利)환인은 동방문명 개척의 길을 떠나는 거발환(居發桓. 배달국의 초대환웅)에게 '우주
광명을 체득하는 광명이세(光明理世)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심법(心法)'을 전수했다.
마침내 백두산의 神市에 배달을 건국한 거발환웅은 자신을 찾아와 '삼신의 계율'을 지키는 백성((神戒之氓)'이
되기를 바라는 호족(虎族)과 웅족(熊族)에게 100일 동안의 수행을 명했다.
그들 중 웅족 사람들만이 혹독한 수련과정을 거쳐 인간 내면의 天地光明이 발현된 진정한 사람다운 인격을 갖춘
대인(大人)이 되었다.
이처럼『환단고기』는 삼신이 바로 인간생명과 천지광명의 근원이고, 그 광명이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두루 깃
들어 있음을 밝혀준다.
또한 인간을 신성하고 광명한 존재로 밝혀 그 어떤 종교나 철학에서도 깨우쳐 주지 못한 인간의 지고한 위격을
드러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환단고기』는 태고 황금시대에 인간이 삼신상제님을 어떻게 모셨는지 천제문화를 통해 자세히
보여준다.
환인천제, 환웅천황, 단군왕검을 비롯, 역대 통치자들은 天帝奉行을 국가경영의 근원으로 삼았다.
(고조선시대 삼한의 祭天문화에 대해『태백일사』「삼신오제본기」는 “소도에서 올리는 제천행사는 바로 九藜
(구려)교화의 근본이 되었다”고 했다.
구려는 배달의 14세 치우천황(慈오支천황)과 관련된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로 동이족의 아홉 겨레,
즉 배달과 그로부터 분화하여 동북아에 널리 퍼져나간 모든 東夷族을 가리킨다.)
특히 환인과 환웅의 제천문화 전통을 계승한 고조선의 역대 단군은 매년 봄 大迎節(음력3월16일)에 강화도 마니
산에 올라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가을(음력10월3일)에는 백두산에서 천제를 봉행했다.
대영절은 말 그대로 하늘, 땅, 인간을 통치하는 삼신상제님을 맞이하는 한민족 대축제의 날이었고, 천제는 새해를
준비하면서 삼신상제님과 천지부모의 은혜에 감사하며 한해의 수확을 바치는 보은의 한마당이었다.
단군조선의 천제문화는 민족사의 격동 속에서도 부여, 고구려, 예맥, 마한, 신라, 고려 등으로 꾸준히 계승되었다.
고려시대의 국가 의례였던 팔관회, 연등회 등도 불교행사가 아닌, 천제문화의 일환이었다.
비록 일시적으로 단절되었지만, 한민족의 제천행사는 19세기 말 고종황제의 대한제국까지 이어졌다.
(고종은 1897년에 소공동 자리에 원구단을 건립, 천제를 봉행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원구단은 당시 9,000평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신위를 보관하는 곳인 황궁우만 남아있다.
환국시대 이래 수천 년 동안 봉행해오던 천제는 세조 때 명나라의 압력으로 중단되었었다.)
감사와 보은의 한마당인 천제는 또한 '소통의 한마당'이었다. 천제를 올림으로써 삼신상제님과 그 대행자인 天子
가 서로 통하고, 또 천자와 그 백성이 하나가 되어 화합하였다.
천제는 온 백성이 大韓의 마음으로 크게 하나가 되는 大同祭요 축제의 장이었다.
9,000년의 역사를 가진 한민족의 천제문화는 인류 축제문화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 사람들이 부른 多勿興邦之歌는 바로 이 같은 대동제의 정신과 천제문화의 핵심 주제를 담고 있다.
『환단고기』는 한민족과 인류의 시원역사와 원형문화를 밝혀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아홉 굽이 거친 한민족의 국통맥
安巴堅환인이 열었던 환국시대는 조화신의 신성을 깨닫고 그 신성을 역사와 일상생활에 구현한 때이다.
이 시대 사람들은 대자연과 한마음이 되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동식물 등 만물과 교감하며 제천문화의
원형시대를 활짝 열어 삼신상제님과 어려움 없이 소통하였다.
또 仙의 정수를 깨달아 병에 시달리지 않고 장수하였다.
동서양의 고대문명 탐험가들이 말하는 인류문명의 黃金時代란 바로 이 桓國時代를 가리킨다.
환국을 계승한 居發桓환웅의 배달(倍達)은 교화신의 신성이 발현된 때이다.
인간생활을 이롭게 하는 문자, 도구, 의술, 수학, 천문학이 이 무렵에 발명되거나 본격적으로 개발되어 나왔다.
배달의 강토였던 중국의 내몽골자치구와 요령성 일대에서 쏟아지듯이 발굴되는 紅山文化 유적들, 특히 5,500년
전 경의 거대한 祭天壇과 다양하고 정교한 玉器와 도기, 樂器 등은 당시 동방의 배달문명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인류의 상고시대는 수렵과 농경이 삶의 주축을 이룬 때이긴 하지만, 흔히 추측하듯이 사람들이 동굴과 숲속에
살면서 나무 열매나 따먹던 미개한 시대는 결코 아니었다.
배달을 이은 檀君왕검의 조선은 치화신의 신성이 발현된 때로서, 삼신상제님을 받드는 삼신문화와 신교의 우주
관과 신관의 핵심이념이 실제로 국가를 다스리고 운영하는 통치체제로 구현된 역사시대이다.
그 통치체제가 바로 三韓管境制이다.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경영했다.
한민족의 상고사 7,000년은 造化, 敎化, 治化라는 삼신의 3대 신성이 인간 삶속에 그대로 드러난 시기이다.
念標文은 환국, 배달, 단군조선의 국가 경영 법전이었다.
고조선 11세 道奚단군이 반포한 염표문은 살아있는 삼신 그 자체인 天地人의 신성과 역할을 노래한 신교문화
헌장이다. 여기에 인류의 원형문화인 신교의 우주관과 역사관 인간론의 핵심 정수가 담겨있다.
"天은 以玄默爲大하니 其道也普圓이요 其事也眞一이니라.
地는 以蓄藏爲大하니 其道也効圓이오 其事也勤一이니라.
人은 以知能爲大하니 其道也擇圓이오 其事也協一이니라.
故로 一神降衷하사와 性通光明하니 在世理化하여 弘益人間하라."
Pythagoras(BC582?- BC500)가 태어난 지중해의 Samos섬. 피타고라스 동상 현판에는 우주론의 핵심을 꿰뚫는
"3이라는 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중심축이다."는 글이 있다.
이것은 서양에서도 3수 원리를 '우주가 변화하고 인류사가 전개되는 근원적 원리이자 원동력‘으로 인식하고 있음
을 반영.
(그리스 원문을 로마자 발음으로 읽으면 ho arithmos tris estin to kentron tu sympatu kosmu"라고 읽는다.)
일찍이 三神의 3수 원리에 따라 환국, 배달, 단군조선의 7,000년 역사가 전개된 한민족사는 그 후로도 3수 원리
에 의해 전개되었다.
단군조선이 문을 닫은 후, 해모수(解慕漱)의 북부여를 필두로 한 '列國'(여러 나라)시대가 시작되었다.
열국시대는 동북아 대륙과 한반도 전체를 통치하던 단군조선의 몰락으로 야기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우리
한민족사가 여럿으로 나눠지는 계기가 되었다.
북부여, 동부여, 남삼한 등으로 나뉜 열국시대는 그 후 북부여를 계승한 高朱蒙의 고구려와 백제, 신라, 가야의 4
국 시대를 거쳐 북쪽의 大震(발해)과 남쪽의 통일신라가 대치한 '남북국시대'로 이어졌다.
이후 고려, 조선, 대한민국으로 이어져 오늘의 '남북분단시대'에 이르렀다.
국통 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3단계씩 3번에 걸쳐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환국→배달→조선→열국시대(북부여, 동부여, 남삼한) →4국 시대(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남북국시대(대진,
통일신라) →고려→조선→대한민국(남한, 북한).
한국사에서 국통은 이처럼 아홉 굽이를 거쳐(九變之道) 오늘까지 이어왔다.(3수 원리)
중국 역사가들은 부여사의 첫머리인 해모수의 북부여 역사는 감추고, 부여사의 잔여사인 서부여에 치중하였다.
해부루의 동부여는 마지막 3세 왕 대소가 고구려 대무신 열제와 싸워 죽고, 그 종제가 고구려에 투항함으로써
망했다.
투항한 부여의 무리를 연나부에 살게 했는데 이를 연나부 부여라 했으며, 고구려 서쪽에 있어서 서부여라 했다.
서부여는 고구려 21세 문자열제 때인 494년까지 존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