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의 세계는 고름이나 패총처럼 ‘느낌’의 잔해이다. 일상적 삶은 ‘느낌’에서 ‘사실’로, ‘위험’에서 ‘안정’으로의 끊임없는 이행이다.
예술이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라면, 예술은 일상적 삶과는 반대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다. 즉 사실에서 느낌으로, 안전에서 위험으로. 예술 ― ‘느낌’의 잔해인 ‘사실’로부터 ‘느낌’을 되살려내는 일. 즉 패총으로부터 옛날 조개를, 고름으로부터 흰피톨을 되살리는 일. 요컨대 죽은 나무에서 꽃을 피우는 일. 그러므로 예술은 본질적으로 무모하고 어리석다. -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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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수없이 하늘을 쳐다보았지만 하늘이 왜 파란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여기에 의문을 가졌던 최초의 인물은 18세기 물리학자 존 틴달이었고, 그는 하늘의 색깔이 대기 중의 먼지나 다른 입자들과 부딪쳐 산란하는 햇빛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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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의 기성품들은 눈을 치우는 삽이나 변기처럼 변형을 가하지 않은 오브제들인데, 이는 보다 충격적인 미술의 재관찰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찾아낸 오브제들은 관람객들을 향해 이렇게 말을 건다.
“당신이 보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라. 당신이 가장 생각을 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해 보라.” -로버트 루트번스타인·미셸 루트번스타인, ‘생각의 탄생’
일상화되어 있는 우리의 지각은 보통 자동적이며 습관화된 틀 속에 갇혀 있다. 특히 일상적 세계는 이런 자동화에 의해 애초의 신선함을 잃은 상태이며, 자연히 일탈된 언어의 세계인 문학 언어와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지각의 자동화 속에서 영위되는 우리의 일상적 삶과 사물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채 퇴색하는데, 예술은 바로 이러한 자동화된 일상적 인식의 틀을 깨고 낯설게 하여 사물에게 본래의 모습을 찾아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한용환, ‘소설학 사전’
르네 마그리트 ‘이미지의 배반’(그림 속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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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케이지와 앤디워홀의 작품이 예술이 될 수 있는 이유를 논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첫 번째 관점은 예술을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설명하면서, 예술계라는 사회제도가 예술로 여기는 것을 예술로 바라본다. 두 번째 관점은 칸트를 원용하면서 미적 경험을 위해서는 통상의 관심을 배제하는 태도 변경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 관점은 예술을 예술이 되도록 하는 것은 기법에 있다고 말한다. 대상을 새롭게 느끼게 하는 ‘낯설게 하기’가 심미적 경험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관점에 입각하여 존케이지의 ‘4분 33초’와 앤디 워홀이 브릴로라는 비누 회사에서 사용하던 포장용 상자들을 거의 똑같이 묘사한 작품들을 만들어 뉴욕 스테이블 갤러리에 전시한 것이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 이유를 논술하라는 것이다.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아트스페이스 에이치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한 시민이 그림 앞을 지나고 있다. 예술은 일상을 낯설게 바라봄으로써 본질적인 삶의 의미를 모색해 가는 과정이다.
모두 예술이 일상적 삶을 낯설게 바라봄으로써 본질적인 삶의 의미를 모색해 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예술은 일상적 삶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일상의 사실과 안정으로부터 느낌과 모험을 이끌어 낼 수 있을 때, 예술은 진정한 삶을 복원하는 역할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의 재관찰을 통해 위대한 발견과 예술이 가능하다. 일상에 존재하는 기성품이 예술작품이 된 것은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예술가의 안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일상화된 우리의 지각은 자동적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일상을 낯설게 하여 자동화된 지각의 틀을 깸으로써 삶과 사물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일상에서 자주 만나는 파이프를 보고 파이프가 아니라고 하는 작가의 의도가 무엇일까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이미지(기호)와 의미의 배반을 통해 인식의 틀을 깨려고 하는 작가의 의도를 읽어내고, 이미지는 실제 사물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통해 이미지와 실제 현실을 혼동하고 있는 현대인에게 사물의 본질적 의미를 이끌어 낸다.
이처럼 예술은 ‘낯설게 하기’를 통해 죽어있는 일상과 사물에 더욱 새롭고 본질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삶의 진정한 의미를 복원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예술의 본질은 절대적이거나 보편적이라기보다는 시대마다 문화권마다 상대적일 수 있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와 앤디 워홀의 포장용 상자들은 낯설게 하기를 통해 우리의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었다는 점에서 예술작품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 이들의 작품은 자동화되고 익숙한 우리의 사고체계를 벗어나게 했다는 점에서 예술이 될 수 있지만 이러한 관점은 전통적 예술의 관점에는 부합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