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한동희 | 날짜 : 09-11-24 19:58 조회 : 1752 |
| | | 두 주간의 유럽기행 한 동 희
독일 항공기 루프트한자(Lufthansa)에 몸을 싣고 12시간의 비행 끝에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렸다. 현지 시간으로 오후 6시40분, 이미 어둠은 짙게 깔렸고, 늦가을의 차가운 날씨가 나그네의 마음을 스산하게 한다. 잠시 낯선 곳에 대한 불안에 두리번 거리니, 작은 피켓을 든 김선자(69세)씨와 부군 박희병(65세)씨가 마중 나와 일행을 반가히 맞아준다. 그들은 60년대에 간호사와 광부로 이곳에 온 산업의 역군들이다. 이 번 독일행은 여행이 목적은 아니다. 1960~70년대에 서독에 건너온 간호사들이 그간의 독일에서 겪은 우여곡절의 한 많은 사연을 ‘자서전’으로 남기고 싶어 글쓰기도움의 요청을 해왔다. 그들을 돕기 위해 수필가 3명이 이곳에 왔다. ( 2009.10.28) 1960년대, 우리나라가 너무 가난하여 어떤 나라도 경제개발계획에 필요한 차관을 빌려주지 않을 때 같은 분단국인 서독이 차관을 지원했고, 서독에서는 그대신 모자라는 인력인 광부와 간호사를 데려다가 일을 시켰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대졸자들도 일자리가 없어 시멘트에 손을 갈아 거칠게 하여 광부로 지원했고, 간호사들은 남들이 꺼리는 시체 닦는 일등, 노동에 가까운 일들을 했다. 서독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서독에 온 우리 대통령 부부가 광부와 간호사들을 만났을 때 그들이 영부인을 보고 ‘어머니’라 부르며 통곡하여 대통령내외도 함께 울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실제 이번에 가서 들은 얘기로, 그때 영부인이 조그만 김치 통조림을 가져와 간호사들에게 선물했는데, 김치가 줄어드는 게 안타까워서 조금씩 아껴 먹었다며 그때를 회상했다.
김선자씨 내외는 우리를 승용차에 태워 크랑크푸르트 외곽지대 ‘알트긴 하임’(RLtGinnhaem)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교포 지학균씨가 경영하는 아담한 호텔 ‘비손’으로 안내해주어 여장을 풀었다. 김선자씨는 45년 전 제1차로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이다.
<로렐라이 언덕> ‘비손’에서 1박 후, 지학균 사장이 정성껏 끓여준 꼬리곰탕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쌀쌀한 날씨에는 역시 뜨끈한 국물이 최고다. 고국을 떠난 지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한식이 반갑기만 하다. 김선자씨가 처음에 이곳에 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3일을 굶었다더니, 입맛이란 참 묘한 것이다.
아침 식사 후, 오전 시간을 이용하여 김선자씨 내외는 일행을 ‘로렐라이 언덕’으로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독일은 비가 오거나 안개 낀 날이 많다는데 첫날부터 안개가 끼었지만 여행하는 데는 별로 지장은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안개 낀 라인강변을 달린는 것도 운치가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된다.
‘로렐라이 언덕’을 향해 마인강변을 지나 라인강으로 이어진 강변도로를 달리니 안개는 걷히고, 햇빛이 오른 편 비탈진 땅에 무수히 이어지는 포도밭 위에 내려앉는다. 역시 와인의 나라답다. 찾아온 손님이 ‘천사’일 때 햇빛이 내려쬔다고 하여, 그들이 얼마나 햇빛을 기다리는가를 알 것 같았다. 햇빛을 많이 받도록 포도밭도 빛의 각도에 맞춰 계단식으로 일구어 놓았다. 예전에는 광부로 갔던 사람들이 저 포도밭에서 포도를 따주며 용돈을 벌었다고 김선자씨 남편 박희병씨가 지나간 날을 회상한다. 강 건너편에는 그림이나 엽서에서 본 유럽풍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평화스런 모습을 이루고 있다. 그러한 마을 풍경이 수없이 펼쳐졌는데, 그곳에는 와인의 도시 ‘로젤’과 와인의 고장 뉴데스(New Deshbin)가 있다고 한다. 이따금 언덕에는 옛날 성주들이 살았던 돌로 지은 고성들이 보인다. 지금은 카페나 독일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 숙박업소로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강 가운데에도 높은 성벽을 이룬 건물에 작은 창문이 있는 고성(固城)이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다 그곳에 감금해 놓았다는 어느 성주의 아들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온다.
나는 지금 라인 강변을 달리고 있다. 라인 강변을 달린다는 것만으로도 꿈을 꾸는 것만 같다. 안개와 햇빛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종잡을 수 없는 날씨가 오히력 몽환적이어서 시정(詩情)을 자극한다.
독일의 젖줄이나 다름없는 라인강을 독일민족과 떼어놓을 수 없듯이, 독일을 선망하는 여행객의 첫 번째 로망은 라인강변을 유람하는 것일께다. 알프스 산록에서 발원하여 북해(北海)로 흘러드는 전장 1,300km의 라인강은 빙하로 침식된 깊은 골짜기를 타고 흘러 예부터 일년 내내 그 수위(水位)가 변하지 않아 유럽의 통상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산업운하이다. 이 천연의 수로를 지키기 위해 강을 따라 자연히 성곽과 도시가 건설되어 왔다. 강 연안의 푸른 언덕, 낭만적인 중세의 고성, 평화로운 포도밭과 교회의 첨탑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고풍스런 촌락들은 관광의 하일라이트라 할 수 있다.
유람선 갑판 위에 앉아 포도주를 마시면서 강변의 풍경을 바라보던 관광객들은 물살이 북서쪽으로 구부러져 강폭이 좁아지고, 이내 배를 가로막듯 오른쪽에 불쑥 나타난 가파른 로렐라이 언덕을 보며, 정열의 시인 하이네의 시로 유명한 ‘로렐라이 언덕’을 합창한다고 한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쓸쓸한 이 말이/ 가슴 속에 그립게도 끝없이 떠오른다/ 구름 걷힌 하늘 아래 고요한 라인강/ 저녁 빛이 찬란하다 로렐라이 언덕’
하인리히 하이네는 이름만으로도 유태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로렐라리 언덕’의 노래가 하도 유명하여 나찌스도 하이네를 말살시킬 수 없었다고 한다. 나도 학창시절에 즐겨 불렀던 로렐라이 언덕을 흥얼거리며 라인강을 내려다본다. 로렐라이 언덕 위에서 바라 본 강 양편 기슭의 풍경은 장관을 이룬다.
<칼스루에(Kalsruhe)> 칼스루에는 부채살 모양의 도시로, 600년 전에 지금의 국무총리 격인 ‘칼스’라는 사람이 지나가다가 잠시 쉬게 됐는데, 이 고장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이곳에 도시를 만들고 죽은 후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칼스’는 사람의 이름이고 ‘루에’는 누워 있다는 뜻으로, 시내에는 삼각형 모양의 탑이 있는데 그것은 칼스가 누워있는 무덤이라고 한다. 그런 연고로 이 도시의 이름이 ‘칼스루에’가 되었다.
로렐라이 언덕에서 숙소로 돌아온 시간은 오후 2시 30분경. 늦은 점심으로 ‘비손’의 지학균 사장이 손수 끓여준 돼지고기 김치찌개 맛은 일품이었다. 식사 후, 독일 교포신문 나남철 기자의 차로 세미나 장소 ‘칼스루에’로 향한다. 김선자씨는 다음날 세미나 장소로 직접 오기로 하고 헤어졌다. 낯선 독일 땅에서 처음 만난 언니같은 김선자씨. 하루 사이 정이 든 것 같다.
오후 3시경, 아우토반으로 진입한 승용차는 남쪽의 ‘칼스루에’를 향해 달린다. 독일의 고속도로에서는 시속 140km~160km로 달리는 게 보통이라는데, 우리가 탄 차는 그리 빨리 달린는 것 같지는 않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고속도로 양옆에는 황갈색으로 물든 울창한 숲이 이어지는데, 게르만 민족답게 독일 사람들은 숲을 좋아한다. 이따금 숲속에서 사슴이나 노루가 뛰어나와 목숨을 잃는다고도 한다. 산은 보이지 않고 끝없는 벌판에 하늘과 숲이 맞닿아 있다. 도시마다 1시간정도 걸을 수 있고,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숲속의 공원이 있어 사람들은 개와 함께 숲 속을 걷는 것을 생활화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칼스루에 까지는 140km의 거리로, 약 2시간의 주행 끝에 남쪽에 있는 작은 도시 ‘칼스루에’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교포 이완순씨가 경영하는 호텔 ‘마우러’(Maurer)가 있다 이곳에서 함께 지내며 3박4일간의 수필세미나가 진행될 예정이다. 이완순씨는 간호원으로 이곳에 와, 독일인과 결혼하여 1남1녀를 둔 교포 사업가다. 이 호텔은 교포들의 행사 모임 장소로 서로 만나 정을 나누는 친정과 같은 곳이라고 한다. (10.29)
<수필강좌> 첫날 수필강좌 시작 시간은 오후 2시. 아침부터 이곳 저곳에서 강의를 받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든다. 자동차로 기차로, 두 세 시간. 어떤 이는 400km를 달려온 사람도 있다. 독일 각지에 흩어져 있는 교포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는 일은 힘든 일로, 주말에 3박4일간의 일정을 잡아 이렇게 가정을 벗어난다는 것은 그 열의와 성의가 대단하다. 그들 중 90%는 재독 가정을 이루고 있다. 잊어버린 모국어도 많고, 독일 문장에 맞춰 쓰다 보니 단어의 나열 순서도 뒤바뀌는 등, 애로점이 많지만 ‘문학’이라는 말만 들어도 사춘기의 여학생들처럼 가슴이 설레이는 것 같다.
파독 간호사들의 이야기를 쓴 고동주 선생의 수필 ‘코리아 엔젤’을 낭독할 때는 잠시 숙연, 이내 모두들 흐르는 눈물을 주체 못한다. 밤늦도록 토의하고, 밤새워 글을 써서 다음날 아침 검증 받는 열성파도 있고, 시간이 아깝다며 저녁식사 후에도 보강을 해달라는 요청으로 수업시간 연장 등. 수필문학회를 발족하자는 결의를 하며 문학회 이름을 떠올리며 숙고하는 모습들이 진지하다.
강사는 열강, 수강생은 기쁜 마음으로 보람과 기대로 일정을 마쳤다. 단 며칠간의 강의로 자서전 쓰기와 수필문장을 이해시키기는 어려웠지만, 그들의 실태를 파악하고 교류의 물꼬를 튼다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아무쪼록 그들의 한 많은 사연을 가슴에 묻어두지 말고, 모국어로 풀어내기를 바란다.
그들은 아직도 60년대의 정서와 순박함을 지닌 우리의 이웃이다. 3박4일간의 합숙을 끝내고 헤어질 시간이다. 며칠간 함께 식사하고, 차 마시고, 담소하고, 시내관광도 하고... 그 사이 정이 들어 내년에 다시 만나자며, 헤어 질 때는 서로 포옹하며 눈물 흘리다. 그들을 먼 타국에 두고 온다는 것이 가슴 애리다. (10.30.31.~11.1) |
| 한동희 | 09-11-24 20:04 |  | 두 주간 동안 독일, 벨기에. 프랑스 파리를 다녀왔습니다. 짧은 기간동안 여러곳을 가봤지만, 코끼리 등 만지고 온 격입니다. 아쉬운 점도 많지만, 궁금해 하실분도 계실 것 같아 정리되는대로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 | 임병식 | 09-11-24 22:22 |  | 이번 유럽여행이 뜻깊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좋은 구경도 하셨겠지만, 무엇보다 교민들을 만나서 좋은 글씨기를 알려주신 것은 보람이었지 않나 생각됩니다. 미국과 호주등 수필모임이 활발한데, 그것도 수필모임이 결성되었으면 좋겠군요. 수고 하셨습니다. | |
| | 이진화 | 09-11-25 02:03 |  | 한동희 선생님, 독일에 모국어로 문학의 씨앗을 심어놓고 오셨군요. 그들 마음 속의 이야기들이 머잖아 꽃이 피고 좋은 열매를 맺기 바랍니다. | |
| | 한동희 | 09-11-25 08:28 |  | '임병식 회장님, 그새 들어와 보셨군요. 말씀대로 여행보다는 그들을 만나 조국애를 나누고 , 미력하나마 '수필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인식 시킨 것이 보람이었습니다. 그곳에도 몇몇 사람이 글을 꽤 잘쓰고 있어서 좋은 결과가 있을것 같습니다. 관심 갖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 | 한동희 | 09-11-25 08:42 |  | 이진화 선생님, 독일에서 처음 만난 김선자씨가 이진화 선생의 시고모님 성함을 대니 잘안다고 합니다. 편안히 계시답니다. 고국에 있는 조카님 안부 전해 드리겠다고 하고요. 시고모님을 '잘아는 언니'라고 하여 나도 반가웠습니다. 그곳에도 수필 수십편을 써서 스크랩 해놓은 열성파도 있습니다. 강의를 듣고보니 고칠 곳이 많다며, 수필 쓰기에 더욱 정진하겠다고 하여 좋은 결실을 맺을 것 같습니다. | |
| | 이진화 | 09-11-25 20:41 |  | 아, 간접적으로 연결이 되셨네요. 짧은 일정 동안 많은 동기부여를 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 |
| | 박영자 | 09-11-25 15:15 |  | 한동희선생님, 좋은일하고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시누이가 푸랑크푸르트에 살고있습니다. 간호사로 가서 거기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지요. 아직도 간호사일을 합니다. 몇년전에 들렀던 라인강의 정경이 떠오릅니다. 소낙비가 오는날이었지만 좋았어요. 거기서 산 목각인형이 우리집 거실에걸려 가끔 그곳을 떠올려보곤하지요. 다시 한 번 가자고 벼르기만하고있지요 . | |
| | 한동희 | 09-11-25 16:40 |  | 박영자 선생님, 시누이님이 프랑크푸르트에 계시다니 성함을 알고 갔으면 이번 세미나에 참석하셨을텐데 아쉽군요. 이번에 안내를 해준 분이 여러사람을 로렐라이 언덕에 데려갔는데, 모두 시큰둥 하더라며 좋아하는 우리를 보며 안내한 보람이 있다고 하더군요. 로렐라이 언덕이나, 벨기에의 오줌싸게 동상은 기대보다 시시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떻게 의미부여를 하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봅니다. 먼저 갔다오신 곳이라 감회가 새로우시겠습니다. | |
| | 임재문 | 09-11-25 21:06 |  | 이번 여행은 참으로 뜻깊은 여행이라 생각됩니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하실 것같습니다. 감동을 느끼는 것도 그렇고 여행에 다녀온 순간순간들이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오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렇게 하고 싶어집니다. 어느땐가 꿈을 이룰때가 오겠지요. 감사합니다. | |
| | 한동희 | 09-11-26 07:59 |  | 임재문 선생님, 여행기를 감동적으로 느낀 건 선생님의 마음이 아름답기 때문이지요. 이런 행사에 여럿이 갔으면 좋았을텐데 아쉬웠습니다. 어느 땐가 선생님과 함께 가기를 저도 꿈꿔 봅니다. | |
| | 최복희 | 09-11-26 07:27 |  | 한동희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여행기를 읽으며 저도 함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제 가까운 친척분도 그 당시 간호사로 갔다가 독일인 의사와 결혼하여 지금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습니다. 가끔 고국에 다녀가는데 혹시 그 자리에 참석했는지 모르겠군요. 고향 중학교 선배도 되는데 학창시절 문학소녀로 소설책을 많이 읽고 여름 방학때 밤에 마당에 멍석 깔고 누워 별을 헤아리며 우리들에게 이야기기 해 주던 선배였지요. 이름은 '김문자' 그런데 제가 그 선배 사는 지역을 모르네요. 그녀의 동생과 지금도 가까이 지내고 있어 알아볼 수 있지만. 아뭍은 참 좋은 일 하고 오셨습니다. 그 선배가 이번 일을 모르고 있다면 알려줘야겠네요. 유익하고 흥미있는 글 읽었습니다. | |
| | 한동희 | 09-11-26 08:07 |  | 최복희 선생님, 여행기를 읽으며 함께 가신듯 느끼셨다니 기분이 좋습니다. 그곳 간호사들은 거의 독일인들과 결혼해 살고 있습니다. 선배님은 의사와 결혼했다니 걱정없이 노년을 보낼 것 같습니다. 재독한인여성합창단 명단에도 '김문자'라는 이름은 없고, 이번 세미나에도 참석하지 않았군요. 그곳 한인회 나남철 기자를 중심으로 '재독 한인 수필문학회'를 결성할 예정인데, 문학에 관심이 있으면 연락하여 같이 수필공부를 했으면 좋겠군요. | |
| | 강승택 | 09-11-26 09:36 |  | 한동희 선생님, 인사가 늦었습니다. 60년대의 파독 광부, 간호사들의 눈물겨웠던 사연, 그동안 신문, 방송을 통하여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번에 직접 글쓰기 지도를 통하여 우리 역사의 생생한 한 페이지가 기록되는데 일조하시게 되어 대단히 뜻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긴 여정의 피로가 아직 남으시진 않았습니까? 송년모임에서 뵙게되기를 기대합니다.~ | |
| | 한동희 | 09-11-26 14:50 |  | 강승택 선생님, 이번 여행을 통해 우리 역사의 중추적 역할을 한 파독 간호사들과 광부들에 대해 다시한 번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됐습니다. 그들도 차츰 잊혀져 가는 자기들의 존재에 대해 서운함을 갖고 있던차 우리들의 내방으로 인해 활력을 찾는 것 같았습니다. 송년모임에서 뵙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 |
| | 정희승 | 09-11-26 16:42 |  | 큰일을 하셨습니다. 무슨 일이든 시작이 중요하지요. 미국이나 호주와 달리 독일은 글을 쓰는 환경이 다소 열악한 것 같군요. 좋은 일이라 생각됩니다. 일도 일이지만 그분들의 외로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껴안아주었다는 생각을 하니 저도 제 일처럼 기쁩니다. 글을 읽다보니 독일에서의 동선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가슴이 찡한 대목도 있고요. 일단 첫 단추를 꿰었으니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교류가 있었으면 합니다. | |
| | 한동희 | 09-11-26 18:33 |  | 정희승 선생님, 관심을 갖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요청을 받아 그곳에 가기는 가야하는데 조건이 좋지않아 어려운 결단으로 다녀왔습니다.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가자고 결론을내고 다녀온 것입니다. 미국이나 호주의 교민들과는 달리, 그곳에 간 간호사들이나 광부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야 자리를 잡았거나 아직도 힘들게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모국에 대한 그리움과 모국어에 대한 갈증으로 힘들어하고 있더군요. 처음으로 그분들에게 문학에 대한 갈증에 다소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지속적으로 도울수 있는 길을 모색해볼 생각입니다. | |
| | 이희순 | 09-11-26 20:19 |  | 그분들의 특별한 인생역정이 그대로 커다란 문학적 자산이라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먼곳까지 달려가셔서 그분들의 열정이 샘솟도록 '통수식'을 해주셨으니 참으로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생님, 존경합니다. | |
| | 한동희 | 09-11-26 21:56 |  | 이희순 선생님, 과찬의 말씀입니다. 저희 일행은 그들에게 100여권의 책(수필집과 강좌 자료, 작가회 회원들이 쓴 수필작법 등)을 가지고 갔지만,그들에게 좀더 많은 자료를 남겨주지 못하고 온 것이 아쉽습니다. 책 한권이 귀해 서로 돌려가며 보는 실정입니다.여행중 우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또 다른 7명이 모였는데, 그들에게는 책을 한권도 주지 못하고 와서 안타까웠습니다. 남이 겪지못한 그들의 체험은 역사적인 자료요, 문학적 자산이라는 것을 일러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
| | 일만성철용 | 09-11-27 10:01 |  | 아름다운 여행을 하셨군요. 박통과 간호사 광부와의 눈물어린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세상이 더 가깝게 더 친근하게 느끼게 하는 한 편의 글이 감동을 줍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
| | 한동희 | 09-11-27 10:49 |  | 일만 선생님, 겨울산행 여전 하시겠지요? 여행을 다녀와서 추억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기행문을 써나는데 왜 그리 힘든지요. 선생님의 기행에세이 수록하시는 여력이 대단하시다는걸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 |
| | 정진철 | 09-11-28 08:56 |  | 여행은 항상 나이가 젊으나 많으나 사람의 깊이를 더해주는 자양분인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건강하실때 여행 많이 많이 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 |
| | 한동희 | 09-11-28 10:02 |  | 정진철 선생님, 감사합니다. 여행도 건강할 때 이니 건강하고 기회 있을대 많이 다니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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