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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ra Salih (2002). Judith Butler. 김정경 옮김 (2007).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 서울: 앨피. pp. 215~241.
권력의 정신적 삶
버틀러는 주체의 정체성이 “부인repudiation, 죄의식guilty, 상실감loss”를 통해 생겨난다고 말한다. 권력구조는 “피하거”나 “초월”하는 것이 불가하고, 동시에 주체는 이 “권력구조 내부에 귀착”된다. 이런 주체에겐 “종속subjection”이란 필연적인 것이며, 법이나 권위에 “수동적”인 양태를 보이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허나 버틀러는 법과 수동적 관계를 맺고, 권력구조에 종속된 개인으로부터 “저항적 행위의 잠재력” 또한 찾아낸다. 이는 ‘정신의 작용’을 통해 가능해지는데, “권력을 그 자신과 불화하도록 만드는 정신의 잠재력”으로 설명 가능하다. 역설적으로 이와 같은 ‘저항적 잠재력’은 권력구조의 기능 내부에 투여된invested 개념이기도 하다.
정신의 출현과 형성
버틀러는 “담론과 법” 내부에서 의식의 출현에 주목한다. 이는 “정신적 형식”과 “권력의 구조”를 함께 고려하는 방식으로서, 사라 살리는 정신분석학에 해당하는 전자와 푸코의 분석에 해당하는 후자의 결합으로서 버틀러의 ‘권력-정신’ 개념을 설명한다.
주체는 선험적 권력의 효과이며, 동시에 권력은 주체가 행위자로 존재할 수 있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주체는 권력에 복종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복종의 효과로서 저항적 행위는 가능하다. 이처럼 복잡한 인과를 버틀러는 저항적 행위가 “권력에 포섭되지 않는 의도를 가정하고 있으며, 논리적/역사적으로 얻어낼 수는 없는 것”이자 “우연성”과 “반전의 상호관계”에서 작동하고 그럼에도 “권력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주체가 맺는 관계란 매우 “양가적”인 것이다.
불행한 의식
버틀러는 헤겔이 제시한 자율성을 침해받으면서 동시에 이러한 위협을 통해 인정을 받는 노예의 사례를 언급하면서도, 이 노예가 스스로를 “조소의 대상으로 간주"하며, “주체의 정체성은 갈등과 모순”으로 가득하게 된다고 말한다. 노예의 불행한 의식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책망하며, “포기renunciation를 향한 끊임없는 수행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버틀러는 이를 “부정적 나르시즘”으로 정의하며, “예정된 몰두”로 설명한다. 버틀러는 자기-포기가 자아를 단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발전의 단계이며 주체는 이를 통해 자신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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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와 종속
주체-형성에 대한 정신분석학의 설명에서 육체는 결코 종속되지 않는다. 여기서 육체가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은 ‘육제의 완전한 종속’을 정신분석학이 인정치 않는다는 방향으로 해석된다. 그 대신 “욕망은 결코 포기되지 않으며 바로 그 포기의 구조 내에서 유지되고 거듭 주장된다.” 버틀러의 문장은 부정당한 육체인 “아브젝시옹abjection”이 그 자체로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억압하는 담론과 법에 육체가 선행한다고 바라보는 헤겔과 달리 담론과 법이 (대체로) 육체를 형성한다고 말하는 푸코와 닿아있는 지점이다. 헤겔의 ‘노예’ 주체는 버틀러의 해석 안에서 ‘종속에 대한 귀착’의 특징을 지닌다. 이는 욕망의 위협을 통한 욕망 포기를 의미치 않으며, “욕망에 대한 욕망은 오직 욕망을 지속시키려는 가능성을 위해서 정확히 욕망을 배제하는 것을 욕망하는 의지”로 설명된다. 그럼에도 이 종속에 귀착한 주체가 “저항적 행위”를 수행할 수 없다고 가정해서는 안된다.
법과 사랑에 빠져
니체에게 주체란 자기-폭력self-violence의 효과이다. 법과 같은 폭력적 도덕에 의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의지”, 죄책감 등 자기-반성성self-reflexivity을 통해 스스로를 외면하면서 육체는 주체를 형성하게 된다. 버틀러는 이러한 외면이 자기-구성self-constiution의 행동이라고 말한다.
이때 버틀러는 니체-푸코로 이어지는 선험적 폭력(억압하는 담론과 법)의 효과로서 주체를 인식하는 것에 동조한다. 버틀러는 니체가 법에 우선하는(법에 선행하는) 주체나 양심을 가정치 않았다고 말한다.
버틀러는 양심과 가책에 관한 니체의 설명을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발견한다. 이때 ‘금지적 행위자’(니체에게는 도덕적 폭력의 금지)가 욕망의 중심이 된다. 버틀러의 주체 또한 같다. 주체는 “소망하는 것을 가로막는 어떤 것”을 욕망한다. 그 억압 자체가 “리비도적 활동”으로서 투사된 욕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육체는 도덕적 금지로부터의 회피를 시도하기 보다는, 도덕적 금지의 유지를 선택한다. “주체는 어떤 것도 욕망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위협하는 법을 욕망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도덕적 맥락의 행위자(금지를 행하는 법이나 담론, 권력)는 되려 금지된 행위를 생산한다. 버틀러는 푸코가 권력의 작용을 설명하며 “과잉적이고 저항적인 정신을 간과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동시에 “정신의 과잉에 저항적 행위를 위한 잠재력이 존재한다”는 문장은 ‘도덕적 폭력이 금지하는 행위’에 대한 욕망이 정신 내부에 리비도적으로 투사된 채 존재함을 시사한다.
푸코의 감옥들
버틀러는 푸코의 주체 구성에 관한 이론에서 정신의 문제가 생략되었음을 지적한다. 버틀러는 푸코의 주체-형성 과정에서 정신분석학의 정신the psyche 개념과 상응하는 개념으로 ‘영혼the soul’을 불러와 이것이 그저 표준화의 기능을 담당한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푸코에게는 영혼(정신)이 어떠한 저항 없이, 규율 형성에 구속된다는 것이다.
버틀러는 앞에서부터 계속 말했듯 (정말 계속 말했다), 규범적인 법이 그 자체로 리비도적 투사이며, 금지에 대한 욕망을 유지시키는, 금지된 행위를 불러일으키는 저항적인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더불어 버틀러는 푸코의 ‘구성이 일어나는 장소’로서의 육체에 반한다. 대신에 버틀러는 “주체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는 것은 파괴이다”라고 주장한다.
역호명
버틀러는 순종적 주체구성의 양식으로 알튀세의 호명interpellation을 언급하여, 이것이 수신인을 미리 가정한다는 점에 의문을 지닌다. 호명에 반응하기 위해선 주체는 이미 호명되는 언어에 대한 자기-인식을 지녀야 한다는 점에서 알튀세의 ‘뒤돌아보기’는 법과 같은 호명에 선행하는 주체를 가정한다. 이는 역으로 (아내를 죽인 알튀세의 사례와 같이) 죄책감의 추구를 통해 법에 호명되기를 원하는 주체를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버틀러는 위와 같은 주체-위치를 위한 ‘예식rites’을 수행하는, 그러니까 목적하는 선행적 주체의 존재를 거부한다. 그에게 주체란 ‘행동의 원인’으로서가 아니라 ‘행동의 효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호명은 그저 행동을 야기하며, “행함 자체가 모든것”으로서 주체의 행동을 “활성화”시킨다.
그러나 이 행동을 통한 “수행적 효능”이란 일관적이지 않다. 더불어 이는 법에 의해 강력히 규범화되어 일관된 행동양식을 만들어내지도 않는다. 되려 버틀러는 “법이 보기보다 강력하지 않다”는 입장에서 “비판적 탈주체화”가 발생함을 주장하고, 비판적 탈주체화는 법의 부름 속에 “용인되지 않는 욕망”, 즉 구성적 욕망을 추구함으로서 가능해 진다.
다시 우울한 젠더에 대하여
「젠더 트러블』에서 버틀러는 젠더가 주어진 것이 아닌 과정이며 남성성, 여성성은 ‘완성accomplishment’인데 반해 이성애는 ‘성취achievement’로 단언한다. 이 과정과 성취는 부정될 다른 주체를 상정하고, 버틀러는 이때 부정되는 욕망을 “동성애적 리비도”로 제시한다. 곧 “이성애는 부인된 동성애로부터 출현"하는 것이 된다. 이때 동시에 부정된 욕망으로서 아브젝트화abjected된 동성애적 욕망은 폐지되는 것이 아닌 “동성애에 대한 그 금지 속에서 유지”된다. 때문에 “동성애적 귀착”이라는 부정된 욕망에 대한 욕망을 통해 이성애는 ‘성취’되며, 아브젝트화된 욕망이 에고 안에 설치되어, 이 ‘비체화된 욕망’을 욕망하는 만큼 여 성은 여성이, 남성은 남성을 욕망한다.
이성애적 주체의 동성애적 욕망은 파괴된 것이 아닌, 젠더를 수행하도록 돕는 ‘거부’와 ‘부인’에 대한 욕망으로 자리한다. 그럼에도 이성애 규범적인 사회는 이 욕망을 끊임없이 제한하며, 동시에 동성애적 욕망은 허용되지 않아 “이성애적 문화”에 “젠더 우울증”을 드리운다.
긍정적인 우울증
버틀러의 우울증을 단순히 권력의 효과로 읽어서는 안될 것이다. 버틀러는 이러한 우울증이 그저 수동적 형식이 아니라 “반란의 형식”임을 호미 바바Homi Bhabha의 말을 빌어 설명한다. 이때 우울증은 전복적인 목적을 위해 배치될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헤겔과 니체 식의 자기 비판을 포함하지 않는 우울증의 성립 가능성을 시사한다.
“주체의 출현을 개시하는 결핍의 흔적을 인정하는 것”은 알튀세식 ‘선험적 주체’가 호명에 의해 주체-형성되는 모습과 버틀러의 주체간의 거리를 보여준다. 버틀러의 주체는 종속(법, 금지)이 행위를 활성화 시키고 이 행위로서 수행되어 동시 탄생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종속의 ‘금지적 행위자’는 욕망의 배제가 아닌 욕망의 대상으로서 성립한다. 그렇기에 버틀러에게 “주체를 성립하게 되는 결핍 부정을 인정”하는 것은 주체를 정신적 생존으로 이끈다.
참고문헌
Foucault, M. (1976). Histoire de la sexualithe history of sexuality: The will of knowledge. 이규현 옮김. (2011). <성의 역사 1: 지식의 의지>. 서울: 나남.
김선희 (2007). 여성주의와 니체 그리고 푸코의 새로운 만남. <한국여성철학>, 7, 31-58.
홍준기, 박찬부 (2007). 라깡의 임상철학과 정신분석의 정치성. <라깡과 현대정신분석>, 9(1), 4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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