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은 가고 없으니
十日秋香未必衰(십일추향미필쇠)-초열흘 가을향기 아직도 약하지 않았기에
登高意欲共傾巵(등고의욕공경치)-높은 데 올라가 함께 잔을 기울이려 했네
舊遊伴侶今無在(구유반려금무재)-예 놀던 짝은 이제 가고 없어졌으니
獨有黃花尙滿籬(독유황화상만리)-울타리에 가득찬 국화만 홀로 남아 있네.
정습명(鄭襲明)
당신의 평생 반려(伴侶)는 누구입니까?
아파트 입구 벽에
“반려견 가까운 동물 병원에 등록”이라는 현수막이 붙어있다.
한자사전에는
반려(伴侶)-짝이 되는 것. 동무가 되는것. 이라했다.
1964.09.19. 경향신문
다(茶)는 빼놓을 수 없는 생활의 반려(伴侶)
1983.10.01 동아일보
부부(夫婦)는 사랑과 평등의 반려(伴侶)
1981.10.16 경향신문
나환자들의 영원한 반려(伴侶) 노기남(盧基南) 대주교
이런 글들을 보면 사람이 죽을 때 까지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가까운 사이를 반려(伴侶)라고 하는 것 같다.
짝반(伴) 짝려(侶)로 구성되어 있는 한자(漢字)를 보면 가장 가까운 동무를 이름이다.
예전에는 부부(夫婦)사이를 “평생 반려(伴侶)”라고 하였는데 세상이 변함에 따라
“평생의 동무”도 범위가 넓고 대상(對象)도 다양하여졌다.
“짝”이라는 말이 나오면 떠오르는 생각이
오상순(吳相淳)의 “짝 잃은 거위를 곡(哭)하노라” 이다.
『내 일찍이 고독의 몸으로서 적막과 무료의 소견법(消遣法)으로
거위 한 쌍을 구하여 자식 삼아 정원에 기르기
십개성상(十個星霜)이거니 올 여름에 천만 뜻밖에도 우연히
맹견의 습격을 받아 한 마리가 비명에 가고, 한 마리가
잔존하여 극도의 고독과 회의와 비통의 나머지, 음식과 수면을
거의 전폐하고 비 내리는 날, 달 밝은 밤에 여읜 몸 넋 빠진
모양으로 넓은 정원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동무 찾아 목메어
슬피 우는 단장곡(斷腸曲)은 차마 듣지 못할러라.』
우리 국문학 상에 있는 반려(伴侶)를 잃은 대표적인 슬픔의 한
장면이다.
애완동물의 문화가 외국에서 들어 온 것 같은 느낌이 있지만
우리의 전통 속에는 동물(가축)을 가족과 같이 생각하는 이야기들이 여러 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전북 남원 오수의 의견비(義犬碑)
경복 선산 문수산 의로운 소무덤(義牛塚)
경주에 있는 신라시대의 마총(馬塚) 등등
우리 역사 속에 동물을 진심으로 사랑한 이야기가 있다.
세종 때 학자 윤회(尹淮)의 거위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일이다.
윤회가 젊었을 때 낯선 마을, 한 집에 들어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야박한 인심에 실망하여 어찌할까, 생각하던 차에
마침 마당에서 그 집 아이가 가지고 놀던 비싼 구슬을 옆에 있던 거위가 삼키는 장면을 목격했다.
잠시 후 구슬을 찾던 주인은 윤회를 의심하여 윽박지르며 결박했다.
날이 밝으면 관아에 고발하겠다는 것이였다.
그러나 윤회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다만 저 거위를 자기 옆에 매어달라고만 했다.
다음 날 아침 거위 똥에서 구슬이 나오자 부끄러워진 주인은 어젯밤에는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윤회가 대답했다.
만약 어제 밤에 말했더라면 당신은 구슬을 찾겠다는 급한 마음에 거위를 죽였을 것이다.
거위를 살리기 위해 치욕을 견딘 아름다운 마음은 동물을 사랑하는 우리조상들의 일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지난 2014년 2월 19일에 원로배우 황정순씨가 별세 했다는 신문기사를 보았다.
그리고 3월 11일 신문에
“故 황정순 곁 10여년 지킨 반려견…주인 죽자마자 안락사 처리”
라는 기사도 뒤따라 나왔다.
남의 가정사 일이라 뭐라고 말 할 수는 없지만
애완동물을 반려(伴侶)라고까지 이름붙이는 지금에
“진시왕 죽음에 궁녀도 따라 매장”하는 것처럼 주인 죽자마자 안락사 처리하는 사람의 매정한 모습에 씁쓸한 입맛을 다시게 한다.
진실로 애완동물(愛玩動物)을 “반려(伴侶)”라 이름 붙인다면
비록 미물(微物)이지만 인격(人格)과 같이 동물격(動物格)으로 생명과
존재가치의 소중함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현수막을 보면 이제 동물도 법의 보호를 받는 기본권의 소유자가 되었다.
동물을 단순히 노리갯감이나 내 기분대로 존폐(存廢)를 결정하거나
성질난다고 발길로 걷어 찰수도 없는 세상이다.
진실로 동물을 반려로 생각한다면 내 자리의 한 부분을 반려에게 나누어 주는 사랑이 없으면 “반려(伴侶)”라는 말을 함부로 쓸 수가 없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가 동물을 대하는 것이 성숙된 것인지
아니면 사람이 너무 악(惡)해져서 법(法)으로 동물을 보호하는 것인지 판단이 안 선다.
이 글을 쓰면서 입맛이 씁쓸한 것은
어찌 하다가 부부(夫婦)사이에 전용구(專用句)처럼 사용되던 “반려(伴侶)”가 동물에게 이름표를 옮겨 달게 되었는지--
사랑하는 사람보다 애완동물에게서 더 위로를 받는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사람끼리 인정의 삭막함”을 탄식하게 한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