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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근의 원인
삼하 21:1-9
1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2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그들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물으니라
3 다윗이 그들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하니
4 기브온 사람이 그에게 대답하되 사울과 그의 집과 우리 사이의 문제는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며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는 문제도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하니라 왕이 이르되 너희가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
5 그들이 왕께 아뢰되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영토 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의
6 자손 일곱 사람을 우리에게 내주소서 여호와께서 택하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목 매어 달겠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내가 내주리라 하니라
7 그러나 다윗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 사이에 서로 여호와를 두고 맹세한 것이 있으므로 왕이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아끼고
8 왕이 이에 아야의 딸 리스바에게서 난 자 곧 사울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랍에게서 난 자 곧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붙잡아
9 그들을 기브온 사람의 손에 넘기니 기브온 사람이 그들을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 매어 달매 그들 일곱 사람이 동시에 죽으니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첫날 곧 보리를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
삼하 21:1-9 / [보복하는 기브온 사람들] 다윗왕이 통치할 때 3년 동안 큰 가뭄이 든 적이 있었다. 이렇게 긴 흉년이 계속되자, 다윗왕은 성소에 가서 여호와께 그 원인을 물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사울이 죄 없는 사람들의 피를 많이 흘렸는데, 그 피를 아직도 갚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 그가 죄없는 기브온 사람들을 떼죽음시켰기 때문에 지금 흉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2) 다윗은 곧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9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기브온 성읍으로 사람을 보내어 그 주민들을 불러왔다. 그들은 본래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가나안 원주민에 속하는 아모리 족속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 기브온 사람들과는 평화 조약을 맺고 그들을 보호해 주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나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인으로부터 완전히 보호해 주겠다는 지나친 열성으로 그들을 대학살했었다. 3)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에게 물었다. `내가 여러분에게 어떻게 보상해 드려야 되겠습니까? 내가 이제 어떻게 해드려야 여러분이 더 이상의 저주를 멈추고 이제부터 우리에게 복을 빌어 주시겠습니까?' 4) 그들이 대답하였다. `저희는 이 죄악에 대한 보상으로 사울의 후손들에게서 은이나 금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 족속의 엄청난 비극은 분명히 사람의 목숨으로 보상되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이스라엘 사람을 죽일 권리가 없습니다' 다윗이 약속하였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내가 이루어 드리겠으니, 마음놓고 말씀하십시오.!' 5) 그들이 이렇게 요구하였다. `사울은 우리를 전멸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영토 안에서는 우리가 한 사람도 발붙여 살지 못하게 하려고 잡아죽이기 시작하였습니다. 6) 그가 우리 족속을 멸절시키려고 작정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그의 족속을 멸절시킨다는 뜻으로 그의 후손 중에서 남자 일곱을 골라 우리의 손에 넘겨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그들을 사울의 고향 마을 기브아에 있는 여호와의 산으로 데리고 가서 그들을 나무에 매달아 여호와께 바치겠습니다. 사울이 우리의 고향 마을에 들어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우리도 사울의 고향 마을에서 그의 후손들을 처형하여 여호와께 바치겠습니다.' 왕이 즉석에서 약속하였다. `내가 그들을 넘겨 주겠소!' 7) 이리하여 다윗왕이 사울의 후손들 중에서 남자만 일곱 명을 골라 내게 되었으나 사울의 손자이며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은 빼어 놓았다. 다윗은 자기의 옛친구 요나단에게 그의 후손을 지켜 주기로 맹세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8) 그 대신에 왕은 아야의 딸 리스바가 사울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 알모니와 다른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갑이 므홀랏 사람 바실래의 아들인 아드라엘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다섯을 9) 기브온 사람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러자 기브온 사람들은 그들을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성소 앞에 나무를 세운 후 매달아 죽였다. 그때는 보리를 거두기 시작하는 4월 중순경이였다.
본문은 사무엘하의 부록으로 첨부된 말씀입니다. 20장과 시간적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아닙니다. 1-14절과 15-22절 서로 독립된 다른 두 개의 사건이 나옵니다.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1-3) 삼 년의 기근이 계속 되었기에 백성들이 많이 힘든 상태에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기근의 원인을 말씀해 주십니다. 사울이 언약을 어기고 죄 없는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나타난 재앙이라고 말씀하십니다(1). 이것은 여호수아 9장에서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점령할 때 기브온 사람들의 속임수에 빠져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 합니다(수 9:19). 그러나 사울은 그 약속을 깨고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민족이 단일 민족으로써 이방인과 피가 섞이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의 거류민으로 그들을 죽이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사이의 문제는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며(4-6)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과 자신들의 문제는 은금에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문제는 민수기 35장 31절에 의하면 죽음 외에는 갚을 수 있는 방법이 없지만,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 가운데 사람을 죽이는 문제도 우리에게 있지 아니 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다윗에게 사울 집안의 사람들을 죽여서 원한을 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시면 “학살 하였고, 멸하여, 모해한”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사울이 계획적으로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입니다. 사울에 대한 기브온 사람들의 민족적 원한은 깊었습니다. 그래서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의 집안사람 일곱 명의 목숨을 달라고 합니다(5). 7은 완전함을 상징합니다. 다윗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어 자신들을 죽인 사울의 집안사람 일곱 명을 내어 줌으로 기브온 민족의 속죄를 완전히 이루게 됩니다.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아끼고(7-9) 사울의 집안사람 일곱 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제외합니다. 요나단과의 맹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7). 사울의 첩(3:7)이었던 리스바의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을 내어줍니다. 이 둘은 사울의 직계 아들입니다. 이어서 메랍의 아들 다섯 명이 등장합니다. 메랍은 다윗의 아내가 될 여인이었지만, 사울의 속임수 때문에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과 결혼하게 되고 둘 사이에 낳은 아들 다섯 명을 내어 줍니다(8). 사울의 일가 일곱 명이 죽은 때는 보리를 베기 시작하는 4월 중순 때입니다(9). 삼 년의 기근으로 수확이 없었지만, 수확의 시기에 죽임으로 풍성한 수확을 바라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적 용 : 민수기 14장 18-20절의 말씀을 찾아 보고, 19-20절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거둔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원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브온 족속과의 맺은 언약을 저버리고 그들을 죽인 사울의 죄에서 비롯된 기근으로 다윗은 자신의 잘못은 아니지만 한 나라의 책임자로서 책임을 다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과 죄의 값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가족의 잘못은 남의 잘못이 아닌 나의 잘못이 되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호크마 주석
=====21:1
다윗의 시대에 - 이 말은 정확한 연대를 말해 주지 않는 포괄적인 용어이다. 또한 본문에 나타나 있는 기브온 거민 학살 사건은 성경의 다른 부분 어느 곳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의 사건이 다윗 시대의 어느 때에 발생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7-9절에 기록된 내용으로 볼 때 사건은 다윗왕이 므비보셋을 찾은 얼마 후에 발생한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본 사건은 분명 압살롬의 반란(삼하 15:7-12, B.C. 979 ?)이전에 발생하였을 것이다(Keil, Ewald, The Interpreter's Bible).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기근(饑饉)은 단순히 자연적인 재해(災害)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기근은 칼(전쟁), 사나운 짐승, 온역 등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범죄한 백성들에게 벌을 내리시는 일종의 심판(審判)이었다(겔 14:21; 왕상 8:35). 특히 건조 지대인 팔레스틴 땅에서 3년 연속 기근이 계속되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치명적인 심판이었다(왕상 17:1-7; 왕싸하 25:1-7; 느 5:3; 애 4:4).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 이는 연속적인 기근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범죄한 사실이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그 진상을 알아보는 다윗의 신앙적 행동이다. 여기서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란 말을 직역하며, '여호와의 얼굴을 찾으매'란 뜻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심판의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갔다는 말이며, 이는 구체적으로 다윗이 대제사장에게 있는 '우림과 둠밈'(출 28:30)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았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Lange).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 기브온 거민 학살 사건이 사울 시대에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윗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징벌이 가해진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 행위는 다음과 같은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즉 (1)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시간과 인격을 초월한 단일 공동체이며, (2) 아비의 허물이 자손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는 윱법의 성취인 동시에(출 34:7), (3) 징계를 통하여 당신 백성의 범죄를 방지하고 성숙한 신앙 인격을 갖추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악 1:2-4) 및 (4) 인간의 죄는 언젠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부르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전 12:14; 고후 5:10).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 여기서 기브온 사람(the Gibeonites)은 가나안 땅의 기브온 성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본래 진멸의 대상이었으나(신 7:1-5),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당시 이스라엘과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당시 이스라엘과 '여호와의 이름으로'(수 9:15, 18-20) 화친 조약을 맺고 이스라엘의 종, 곧 여호와의 단을 위해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자가 되었다(수 9:3-27). 그 약조의 내용은 이스라엘이 기브온 사람들을 해하지 않고 살릴 것이라는 언약이었다(수 9:15). 따라서 사울 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브온 거민과 맺은 약조를 무시하고, 이들을 죽인 행위는 하나님의 성호를 가볍게 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실추시킨 변명할 여지없는 살인죄였다.
=====21:2
기브온 사람은...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 본래 기브온 사람은 히위 족속(Hivites)이었다(수 11:19). 그러나 구약 성경의 용례상 아모리 족속은 일반적으로 남쪽의 수리아와 팔레스틴 지역을 대표하였다(창 15:16). 즉, '아모리 족속'(the Amorites)은 가나안 땅의 이방 민족을 통칭하는 말이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기브온 사람이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고 불리웠던 것이다(Keil, Ewald).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맹세하였거늘 - 가나안 정복 시대 당시, 여호수아 군대의 승승 장구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기브온 거민들은 마치 먼 나라 족속인양 위장하고 사신(使臣)을 보내어 이스라엘과 화친 조약 맺기를 원하였다. 이때 이스라엘은 확인함도 없이 섣불리 그들과 화친 조약을 맺었다. 이유야 어떻든 이스라엘은 당시 그들을 해하지 않고 살릴 것이라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약조를 맺었던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수 9:3-27부분의주석을 참조하라.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 사울 왕이 기브온 사람을 죽인 동기가 본 구절에 나타나 있다. 즉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라는 말은 사울이 자기 민족에 대한 애족심(愛族心)에서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음을 나타낸다. 곧 사울 왕은 순수한 단일 민족을 구축하고자 하는 열심으로 이방 족속 축출 정책을 시행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울의 열심은 원칙상 율법의 조항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신 7:2, 24; 출 34:11).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율법의 조항은 이방 민족과 약조를 맺기 이전에 관한 것이며, 사울의 학살 행위는 약조 이후의 일이기 때문에 사울의 행위는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율법 정신에서 벗어난 그릇되고 편협한 민족애의 한 예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저희 죽이기를 꾀하였더라 - 기브온 거민 학살 사건이 언제 발생했는지는 기록이 없으므로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혹자는 사울이 놉의 제사장들을 살해할 때(삼상 22:18, 19) 기브온 사람들도 함께 살해하였다고 주장한다(Hertzberg, Abarbanel). 그리고 혹자는 사울이 그의 통치 초기에 율법에 근거하여(출 22:18; 레 20:6) 가나안 땅의 신접한 자와 박수를 쫓아낼때, 기브온 거민들도 학살하였다고 본다(Smith, Fay). 그러나 이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미흡하다.
=====21:3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 여기서 '속죄하여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기본동사 '카파르'(* )는 문자적으로 '덮다', '가리다'는 뜻이다(창 6:14). 그러므로 다윗의 이 물음은 어떻게 하면 기브온 사람들에게 행한 이스라엘의 죄가 여호와 앞에서 가리워질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와 같은 다윗 왕의 말은 피해를 입은 기브온 사람들에게 보상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 중에 거하는 연약한 거류민들이었기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보상을 요구할 길을 찾지 못했으나 이번의 기근을 통하여 보상을 약속받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죄 없이 학대 당한 자들을 마침내 신원(伸寃)해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발견하게 된다(시 10:17, 18).
여호와의 기업 - 열조와 맺은 언약에 따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락해 주신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20:19).
=====21:4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나 - 고대 근동 지방에서 살인죄에 대한 보상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속전(贖錢)을 내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 살인자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모세 율법에서는 부요한 자의 횡포를 막기 위해 고살자(故殺者)에 대해서는 속전 내는 것을 금하고 반드시 죽일 것을 명하였다(민 35:31). 이렇게 볼 때 기브온 사람들의 대답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즉,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과 그 집이 고의로 자기들을 살해하였으므로, 반드시 죽음으로 보상해야 한다고 율법의 규정대로 주장했던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 즉 사람을 처형시키는 것은 자신들의 권한 밖의 일이라는 뜻이다. 더군다나 이스라엘 본토인도 아니며 거류민들인 기브온 거민들로서는 다윗 왕의 허락이 없이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21:5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 여기서 '학살하였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칼라'(* )나 '멸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마드'(* )는 모두 '진멸하다', '멸망시키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기브온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 사울이 그들을 가나안 땅에서 완전히 진멸하려 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사울은 '이방 세력 멸절'이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공명심과 명예욕을 충족시키고자 기브온 사람들을 전부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울의 인간적인 정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으며, 오히려 보복의 화를 자초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여호와를 위하는 일은 그 목적과 실행 방법 및 실행 원칙이 공명 정대하고 선해야 한다.
=====21:6
자손 일곱을 내어 주소서 - 여기서 일곱 명의 자손들은 사울의 기브온 거민 학살 행위에 동참한 사울 가문의 자손들이다. 그 근거로 우리는 사울의 친척들(사울의 집)이 이일에 깊이 관여했음을 1, 4절에서 보게 된다. 그리고 '일곱'이란 숫자는 여기서 신성한 의미의 숫자(a sacred umber)이다 (Keil, Lange). 즉 일곱은 하나님의 숫자로서, 이번에 사울 집안에 속한 일곱 명의 자손들이 처형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임을 알리는 것이었다. 또한 일곱 명의 자손은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는 속 제물의 의미도 있었다(The Interpreter's Bible).
여호와의 빼신 사울 - 이는 곧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사울'이란 말이다. 실제 사울은 기름 부음 받아 세워진 이스라엘의 선택된 왕이었다(10:1). 그러나 여기서 이 말은 풍자적인 의미를 띤다. 왜냐하면 사울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 마땅히 여호와의 뜻을 성실히 좇았어야 했으나, 그렇지 못하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화친 조약을 맺은 기브온 거민들을 대량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Keil & Delitzsch, Vol. II-ii, p. 461).
사울의 고을 기브아 - 지난번 기브온 사람 학살 사건의 책임은 누구보다도 사울에게 있었다. 따라서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 집에 속한 일곱 명의 자손들을 처형할 장소로 사울의 고향인 기브아(Giveah, 삼상 10:26)를 지정한 것이다.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겠나이다 - 여기서 '여호와 앞에서'란 말은 정확히 '여호와를 위하여'란 뜻이다. 즉, 이 말로써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의 일곱 자손들을 처형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기 위한 공의적 차원의 일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한편 '목매어 달겠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카'(* )는 '매달다'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이 말은 목매어 교수형(絞首刑)에 처하겠다는 의미 보다는, 죽이기 위해 매달거나 또는 죽인 후 시체를 매어 달겠다는 의미이다(Smith). 특히 이 말에 상응하는 헬라어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 사용했던 어휘 '스타우로오'(* )이다.
=====21:7
왕이...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아끼고 - 본 구절의 배경은 9장에 잘 나타나 있다. 다윗 왕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했던 요나단과의 우정의 언약(삼상 18:3; 20:16, 42; 23:18)을 지키는 뜻에서 일곱 명의 명단에서 므비보셋을 제외시킨 것이다.
=====21:8
아야의 딸 리스바 - 리스바(Rizpah)는 사울의 첩이었으며, 사울 사후 아브넬과 이스보셋 간에 불화의 요인이 되었던 장본인이었다(3:7).
사울의 딸 메랍 - 메랍(Merab)은 사울의 장녀였으며, 사울이 다윗에게 주기로 하였다가 그 약속을 어기고 아드리엘에게 시집보낸 여인이었다(삼상 18:17-19). 한편 히브리 본문과 흠정역(A.V.)에는 '메랍' 대신 '미갈'(Michal)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필사자의 착오이다(Keil, Fay, Smith). 왜냐하면 '아드리엘'(Adriel)의 처는 분명 메랍일 뿐 아니라(삼상 18:19), 미갈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다(6:23).
=====21:9
산 위에서 - 사울의 고향인 기브아 근처의 산을 의미한다(6절).
함께 죽으니 - 이는 사울의 일곱 자손들이 모두 '같은 날에 같은 방식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말이다.
보리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 - 이 때는 히브리 종교력으로 니산(Nisan)월 중순이며, 오늘날의 태양력으로 말하자면 4월 경이다.
< 설 교 >
사울적인 요소
삼하 21:1-9
성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은,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대한민국’과 같은 국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안에 남겨두고자 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임을 보여주는 것이 될 것이고 반대로 이스라엘 안에서 끊어 버리고자 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백성은 어떤 속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인가에 관심을 두는 것이 옳은 것이지 어떻게 하면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보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러한 관심거리를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은 ‘너는 말해라 나는 내 생각대로 살아가겠다’는 식으로 성경을 펼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나는 나대로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성경을 대하기 때문에 성경이 말씀하는 것들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말하되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무관심한 채 그냥 내 식대로 살아가는데 열심인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이해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파 묻혀 있는 사울적인 요소들을 파헤쳐 드러내며 고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다운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 내고자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사울적인 요소가 무엇인가를 발견해야 할 것이고, 하나님은 결코 사울적인 요소를 용납하지 않으심을 깨닫고 우리에게 있는 모든 사울적인 요소가 무너지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인간으로 고침받기를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1절을 보면 “다윗의 시대에 년부년 삼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어느 시기에 기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에게 삼년 기근을 있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떤 문제가 있음을 경고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가 뭔가 하면 이스라엘이 해결하지 않은 사울적인 요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울적인 요소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울이 기브온 사람을 죽인 일입니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을 죽인 일에 대해 다윗이 어떤 해결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근을 내리심으로서 이스라엘이 사울이 기브온을 죽인 일을 해결하지 않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다고 할 수 없음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울이 기브온 사람을 죽인 일에서 드러난 사울적인 요소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예수를 말하고 교회로 모인다고 하면서 여전히 우리가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사울적인 요소란 또 무엇일까요?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사울적인 요소를 그대로 간직한 채, 아무리 하나님을 찾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거부하시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면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저희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저희 죽이기를 꾀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물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말한 대로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고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입니다. 즉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이 죽인 것은 이방인들인데, 왜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여호수아 9:15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는 말을 합니다.
기브온 족속은 여호수아 당시에 아모리 족속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할 때 이미 이스라엘이 여리고와 아이 성을 무너뜨렸다는 소식을 듣고서 먼 지방에서 온 것으로 위장을 하여 여호수아와 화친의 언약을 맺은 사람들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들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았으나 이미 여호와로 언약을 맺은 관계이기에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들을 죽이지 말 것을 명하고 여호와의 단을 위하여 나무를 패고 물 긷는 자로 삼았던 것입니다(수 9:27). 결국 기브온 사람들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언약을 맺은 것으로 인해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기브온 사람들을 치고자 하였으나 족장들은 그들에게 맹세한 맹약을 인하여 오히려 진노가 임할까 하노라 하면서 기브온 사람들을 죽이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결국 기브온 사람들을 살린 것은 여호와로 인한 언약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약이 그들을 보호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한 사울의 열심이 무엇인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5절에서 사울을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경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으로 말한 것을 보면, 어쩌면 평소에 이스라엘이 이방인인 기브온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기에 사울이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경내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극소수와 기브온 사람들 간에 언쟁이라든가, 상거래, 인간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불상사가 결국은 큰 화근을 불러 일으켰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큰화근을 불러오게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우상을 섬겼다면 문제는 달라졌겠으나 그러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죄였습니다. 그 이유는 기브온 사람들이 언약 아래 보호 받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은 하나님의 언약 자체를 무시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이 되었던 것입니다.
에스겔 17:18-19절의 “그가 이미 손을 내어 밀어 언약하였거늘 맹세를 업신여겨 언약을 배반하고 이 모든 일을 행하였으니 피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가 내 맹세를 업신여기고 내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그 죄를 그 머리에 돌리되”라는 구절을 보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언약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하나님이 언약 안에 있는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멸시하고 배반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청산해야 할 사울적인 요소는 하나님의 언약을 멸시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을 멸시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먼저 이스라엘이 거하고 있는 가나안 땅의 속성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가나안 땅은 아시는 대로 약속의 땅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공로도 힘도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를 살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나안 땅의 속성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은 이 속성에서 어긋나는 자는 토해내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보호 받는 땅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는 피를 흘리면 안 됩니다. 민수기 35:33절의 “너희는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는 말씀처럼 누구든 피를 흘리면 그는 피로써 갚아야 하는 것이 가나안 땅의 원칙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3절)라고 묻자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의 자손 일곱을 요구하게 되고 다윗이 일곱을 내어주자 그들을 목매어 죽인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가나안 땅은 피를 흘리면 안 되는 땅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아래 보호 받는 것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누구든 피를 흘린다는 것을 언약을 멸시하는 것이기에 피 흘린 자의 피가 아니면 그 죄를 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그대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법칙을 알았기 때문에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대로 사울의 자손 일곱을 내어준 것입니다.
9절을 보면 “저희를 기브온 사람의 손에 붙이니 기브온 사람이 저희를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매 저희 일곱 사람이 함께 죽으니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처음 날 곧 보리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고 말합니다. 결국 피는 피로써 갚게 됨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내용이 오늘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울이 피를 흘린 자라면 우리 역시 피를 흘리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피는 피로써 갚는다는 법칙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결국 우리가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매달려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매달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은총과 용서가 적용되는 땅이 곧 예수 그리스도 안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납되지 않는 것은 사울적인 요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써 용서 받고 보호받으며 살아가는 땅에서 타인을 비판하고 판단하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사울적인 요소를 가지고 예수를 찾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런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본문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아래 보호 받는 존재들이라면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이었지만 기브온이 언약으로 인해 가나안에 머물게 된 것처럼 우리 역시 언약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그리스도 안에 머물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죄가 심판으로 끌어 갈 수 없습니다. 언약이 우리를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용서하심의 언약이 우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 언약입니다. 이 언약 안에 있는 관계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지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체가 사로 다투고 피를 흘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멸시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은 기브온 사람들은 자신의 뜻대로 죽일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자신은 왕이기 때문에 왕의 권력으로 마음대로 죽일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왕이라는 것이 결코 권력이 아니며, 설사 권력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아래 있음을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라는 것은 자신의 뜻대로 자기 마음대로 타인을 비난하고 판단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언약 아래 보호 받고 있으며, 예수님의 피가 우리 모두를 용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님이 용서하고 계시고 용납하고 계시는 지체를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때로는 지배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는 착각으로 사울적인 요소를 수시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명심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러한 사울적인 요소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흘려야 할 피를 대신 흘리시고 죽으신 예수님의 용서의 은총을 깊이 묵상하시고 그 은총 아래 살고 있는 것이 성도라는 관계임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다윗과 기브온 사람들
곽창대목사 / 삼하 21:1-14
성경학자들은 사무엘하 21장에서 24장까지를 사무엘서의 부록으로 여깁니다. 사무엘상 15장부터 사무엘하 20장까지에 기록된 다윗과 관련된 이야기는 연대기 순으로 기술되었지만 사무엘하 21장에서 24장까지는 사무엘서 저자가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몇 가지 특별한 사건들과 내용들을 시간의 순서와 상관없이 기술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다윗이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을 때에 3년이 지나도록 기근이 계속되었습니다. 언제 이 기근이 들었는지 본문은 밝히지 않습니다. 7절에서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아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기근은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왕궁에 데려와 항상 자기의 식탁에서 식사하게 했는데 그 이후인 것은 확실합니다.
3년간의 계속된 기근으로 백성들의 고통은 날로 가중되었을 것입니다. 왕의 마음도 새까맣게 타들어갔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고요하고 평안하게 사는 것이 왕의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합니다. “여호와 앞”이라는 어구는 성소를 뜻한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다윗이 성소에 올라가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3년이나 계속되고 있는 이유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울과 그의 집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여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1절). “사울과 그의 집”이란 사울과 그가 속한 베냐민 지파 사람들을 뜻합니다. “기브온 사람”은 2절에서 밝힌 대로 원래는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거주하고 있던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였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에 이스라엘이 점령해야 했던 가나안 땅에는 대표적으로 일곱 족속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일곱 족속을 쫓아낼 때 반드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 주의사항을 모세가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신 7:1-4)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3]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4]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모세의 유언을 요약하면, 가까이에 있는 부족은 진멸하고 멀리 있는 부족과는 화친을 맺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2절에서 기브온 사람을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고 했는데, 그 당시 가나안 땅에 거주하고 있던 이방인들을 통칭할 때 아모리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란 아모리 사람들을 가나안 땅에서 쫓아내기 위하여 여호수아가 수행한 정복전쟁에서 기브온 사람들만 구원받았다는 뜻입니다.
여호수아 9:7과 11:19에 따르면 기브온 사람은 히위 족속에 속했습니다. 그 당시 기브온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던 가나안의 중부지역은 베냐민 지파에게 분배된 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고 있는 기브온 사람과 화친조약을 맺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여호수아 9장을 보면, 가나안 땅의 여섯 부족들이 연합하여 이스라엘과 맞서 싸우려고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때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화친조약을 맺으려고 여호수아에게 사신들을 보냈습니다. 그 사신들에게 여호수아가 묻습니다. “너희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왜 우리와 화친조약을 맺으려고 하느냐?” 사신들이 속여 대답합니다.
(수 9:8-10) 『[8]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하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묻되 너희는 누구며 어디서 왔느냐 하니 [9]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심히 먼 나라에서 왔사오니 이는 우리가 그의 소문과 그가 애굽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들으며 [10] 또 그가 요단 동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들 곧 헤스본 왕 시혼과 아스다롯에 있는 바산 왕 옥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들었음이니이다』
사신들의 말에서 기브온 사람들이 왜 이스라엘과 화친조약을 맺으려고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이스라엘과 싸웠다가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그들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속여서라도 이스라엘과 화친하려고 한 것입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있는 부족들은 진멸하고, 멀리 있는 부족과는 화친을 맺어도 좋다고 하신 정보를 알아내고는 머리를 썼습니다. 사신들에게 낡은 의복을 입히고 곰팡이가 핀 음식을 들려 보내어 멀리서 온 사람들인 것처럼 위장했습니다. 사실은 코앞에 사는 부족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신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는 기브온 사람들과 화친조약을 맺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하나님께 묻지 않았음을 추궁합니다.
(수 9:14-15) 『[14]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는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15]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조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사흘 후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브온 사람들에게서 속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한 언약을 파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속아서 체결한 언약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것이기에 반드시 지켜야했습니다. 기도하지 않은 것도 문제이지만 언약을 파기하는 것도 큰 죄가 되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멸시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수 9:19-20) 『[19] 모든 족장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하였은즉 이제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리라 [20] 우리가 그들에게 맹세한 맹약으로 말미암아 진노가 우리에게 임할까 하노니 이렇게 행하여 그들을 살리리라 하고』
그래서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말한 대로 여호와의 제단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제단이 기브온 산당에 있었습니다. 그 기브온 산당이 여호수아 시대 이후로 4-5백년간 이스라엘의 중앙 성소의 역할을 했는데 기브온 사람들이 그 산당에서 허드렛일을 하였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여호수아가 죽었고 그 후 350년간의 사사시대도 지났습니다.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에 의하여 사울이 왕이 되면서 이스라엘의 왕정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때에도 기브온 족속은 하나님의 성소를 섬기는 허드렛일을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요즘의 말로 하면, 예배를 돕는 일을 한 것입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이스라엘에 동화되어 평화롭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본문 1-2절과 5절에 따르면, 베냐민 지파 사람들 가운데 기브온 사람들을 쫓아내려고 모해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사울 왕의 허락을 받아 기브온 사람들을 자기들의 땅에서 거주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추방명령을 한 것입니다. 추방명령에 불응하는 자들을 죽이기까지 한 것 같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자기들의 땅에서 이방민족인 기브온 사람들이 평온하게 사는 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2절에서 언급한 대로 민족주의적인 열심이 특심했던 사울 왕이 이스라엘 경내에 거주하고 있던 이방인들을 죽이려고 했는데 그 일에 사울이 속한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이 앞장선 것으로 보입니다.
세월은 흘러 사울은 죽었고 다윗이 왕이 되어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던 때에 기브온 주민을 살해하여 피를 흘리게 한 사건을 해결하도록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오늘 분문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기브온 사람들에게 사울과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범한 죄악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라도 그 죄악이 말끔하게 처리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3년간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들게 하셨는데 그렇게 하신 일차적인 이유는 사울과 베냐민 지파 사람들의 죄악이 아주 크고 중대한 죄임을 자각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기근으로 인해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그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그 응답을 통하여 다윗은 사울과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이 두 가지 면에서 큰 죄를 범했음을 깨달았습니다.
1) 언약파기의 죄
이미 말씀드린 대로 여호수아 시대에 이스라엘과 기브온 족속은 서로를 돌보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선조들이 맺은 언약을 사울과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이 파기한 것입니다. 선조들이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언약은 후손들도 이행해야 합니다. 이제 그 언약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준수해야 합니다.
성경은 서원(맹세 혹은 언약)을 하기 전에 잘 살펴서 하라고 합니다. 서원할 때 경솔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서원한 다음에는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전 5:4-6) 『[4]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5]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 [6] 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천사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시 15:4)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2) 불의의 피를 흘려 땅을 더럽힌 죄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귀화하여 하나님의 성소에서 일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며 평화롭게 살던 그들을 살해한 것은 불의의 피를 흘려 거룩한 땅을 더럽힌 것입니다.
(민 35:33-34) 『[33]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그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함을 받을 수 없느니라 [34]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 곧 내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있음이니라』
죄의 처리
사울과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기브온 사람들에게 행한 큰 죄를 명확하게 알게 된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합니다.
(삼하 21:3) 『다윗이 그들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하니』
다윗은 사울과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기브온 사람들에게 행한 폭행과 살인죄를 자신이 나서서 속죄하겠다고 합니다. 속죄는 진지하게 사과하는 것은 물론 그에 합당한 죗값을 치르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처럼 올바른 속죄는 죗값을 확실히 치른 후에 그 죄를 용서하고 덮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회개요 대속입니다.
더 나아가 피해자 가족들의 요구에도 부응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속죄를 위하여 자신이 어떻게 하기를 원하는지 기브온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들을 모해하고 학살한 사울의 자손 7명을 자기들에게 내어주면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겠다고 했습니다(5-6절). 여기 일곱은 완전수로서 충분한 수를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살인죄를 속죄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민 35:30-33) 『[30] 사람을 죽인 모든 자 곧 살인한 자는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 것이요 [31] 고의로 살인죄를 범한 살인자는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며 [32] 또 도피성에 피한 자는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는 속전을 받고 그의 땅으로 돌아가 거주하게 하지 말 것이니라 [33]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그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함을 받을 수 없느니라』
이 규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살인자를 처벌하는 두 가지의 절차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고의가 아니라 부지중에 살인한 경우에는 살인자가 도피성으로 피하여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도피성으로 도피한 살인자를 심리하여 부지중에 살인한 것이 증명되면 생명의 속전을 지불하고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피성으로 도피한 살인자가 고의로 살해한 것이 드러나면 반드시 사형을 집행해야 합니다. 33절의 말씀대로 피 흘림을 받은 땅은 그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함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브온 사람들이 제시한 속죄의 요구는 율법의 규정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대로 사울과 리스바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과 사울의 장녀 메랍과 그의 남편 사이에 낳은 다섯 아들을 그들에게 내주었습니다(삼하 21:8-9).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가문에 베푼 자비
그로써 사울 왕의 손자와 외손자 7명이 처형되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바대로 사울의 가문이 몰락하고 있음을 드러내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은 내주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7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 서로 여호와를 두고 맹세한 것이 있으므로.” 서로의 가문을 지키자고 다윗과 요나단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약속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언약을 파기한 사울과는 달리 요나단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켰습니다.
10절에서 사울의 첩 리스바가 자기가 낳은 두 아들과 사울의 장녀 메랍이 낳은 다섯 아들의 시체를 들짐승이 훼손하지 못하도록 하늘에서 비가 내릴 때까지 주야로 지켰다고 기록합니다.
리스바가 행한 일을 다윗이 듣고는 길르앗 야베스에 묻혀 있는 사울과 요나단의 뼈를 수거하여 가져다가 기브온 산 위에 메달아 죽인 사울의 손자들의 뼈와 함께 사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했습니다. 이것도 다윗이 사울과 맺은 언약대로 사울의 가문에 자비를 베푼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땅을 위한 다윗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14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에 내리신 기근이 종식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로써 사울과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기브온 사람들에게 행한 죄악이 처리되었고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회복되었습니다. 이처럼 다윗 왕의 우선적인 직무는 하나님의 법도로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인데 그 법의 근간이 공의입니다.
공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아니라 기브온 사람들처럼 귀화한 이방인과 종들에게까지 구현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였습니다.
십계명의 제4계명
(출 20:8-11)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십계명의 제10계명
(출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이방인들을 선대해야 할 이유
(출 23:9)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사 56:6-7) 『[6]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렘 7:5-7) 『[5]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6]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7] 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
하나님의 징계와 자비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의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는 “사울의 죄 때문에 사울의 손자 7명이 처형되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부합한가?”라는 질문입니다.
본문 1절에서 “사울과 그의 집”이라고 했는데 이는 사울 혼자서 기브온 사람들을 폭행하고 살해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려줍니다. 사울이 속한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은 물론 사울의 직계 가족들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폭행과 살인을 저지른 가해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가해자들 가운데 대표로 사울의 손자 7명을 처단한 것은 공의로운 처결인 동시에 자비로운 처결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왜 사울이 저지른 잘못을 다윗이 해결해야 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간단히 답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 일을 처리하도록 책무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세움 받은 다윗은 이스라엘 땅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구현해야 할 책무를 받았습니다. 그래야 그 땅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거룩한 땅이 되고 백성들이 고요하고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이 저질러놓은 죄악으로 그 땅이 더럽혀졌기 때문에 그 땅을 거룩하게 하는 일에 다윗 왕이 나선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무엘서 기자는 줄곧 사울 왕과 다윗 왕의 관계를 카운터파트(대응관계, 대척관계)로 묘사합니다. 오늘 분문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맺은 언약을 사울이 파기했지만 다윗은 그 언약을 회복했습니다.
언약의 파기와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결국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로 확장됩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했습니다. 그로써 아담의 후손인 인류는 죄와 사망에 종노릇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을 통하여 인류에게 죄와 사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여자의 후손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 의와 생명으로 충만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로마서 5장이 잘 해설하고 있습니다.
(롬 5:17, 19, 21) 『[17] 한 사람(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9] 한 사람(아담)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예수 그리스도)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누구든지 아담에게 속한 채로 그냥 있으면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이 옛 시대, 옛 세계에 속한 옛 사람의 실상입니다. 하지만 아담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소속을 바꾼 자들은 죄와 사망의 통치에 종지부를 찍고 은혜의 통치 안으로 들어갑니다. 넘치는 은혜로 인하여 영생에 이릅니다. 새 시대, 새로운 세계에 속한 새 사람은 은총의 통치 아래서 죄를 극복하고 의로운 삶을 산출하는 능력을 소유하게 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죄와 사망을 이기신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대조입니까? 그러므로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는 서로 대응관계에 있는 두 인류의 대표들입니다. 아담은 옛 인류의 대표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새 인류의 대표입니다. 아담은 옛 세계의 대표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새 세계의 대표입니다. 아담 안에서 죄와 사망으로 절망하던 세계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총과 생명의 세계가 침입해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은총과 생명의 새로운 세계는 죄와 죽음의 옛 세계를 점령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역사입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뜻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영접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셨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의 죗값을 단번에 온전히 처리하셨습니다. 인류의 대표인 아담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지만 아담이 깨뜨린 언약을 예수님께서 이행하심으로써 아담의 후손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강같이 흐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 외에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방도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요,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하는 유일한 진리요,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게 하는 유일한 생명입니다.
(롬 8:1-2)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31-32)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8-39)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속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속하셨습니까? 새로운 세계를 여신 그리스도에게 소속된 사람입니까? 아니면 여전히 아담에게 소속된 사람입니까? 이 질문은 모든 인류가 대답해야 할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소속되었느냐에 따라서 그 운명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주요 주님이심을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새 생명을 풍성하게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계십니까? 더 나아가 은혜 받은 자답게 살고 있습니까?
성도와 교회는 은혜 받은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이 시대의 다윗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이 땅에 구현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의 표현으로 바꾸면,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합니다. 풀어 쓰면, 성도와 교회는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와 교회의 존재목적이요 사명입니다.
성도와 교회의 사명
(마 28:19-20)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벧전 2:9-10)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은 하나님의 복을 마음껏 누리는 특권을 받았을 뿐 아니라 거룩한 책무도 부여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살펴본 대로 그 책무를 다윗이 수행했는데 오늘의 시대에는 우리가 그 책무를 이어받았습니다. 그 책무는 죄와 저주와 사망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 땅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시대의 성도와 교회가 하나님께 받은 거룩한 책무요 사명입니다. 가정과 교회와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나누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찬송 326장
요약
다윗이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을 때 3년이 지나도록 기근이 계속됩니다(1절). 사울과 그의 집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여 피를 흘렸기 때문에 기근이 든 것입니다(1절). 기브온 사람들은 원래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거주하고 있던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였습니다(2절).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고 있는 기브온 사람과 화친조약을 맺어서는 안 됩니다(신 7:1~4). 하지만 여호수아가 정복전쟁을 할 당시에 기브온 사신들이 여호수아를 속여서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었습니다(수 9:8~10). 여호수아가 그들의 말을 믿고는 하나님께 묻지 않고 화친을 맺은 것입니다(수 9:14~15). 사흘 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맹세했기에 반드시 지켜야했습니다(수 9:19~20). 그래서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 사울 왕이 속해있던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사울 왕의 허락을 받아 기브온 사람들에게 추방명령을 내리고 불응하는 이들을 죽입니다(1~2, 5절). 세월이 흘러 사울이 죽고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기브온 주민을 살해한 사건을 해결하도록 하나님께서 기근을 통해 다윗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기근을 주신 목적은 사울과 베냐민 지파 사람들의 죄악이 중대한 죄임을 자각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죄는 여호수아 시대에 이스라엘과 기브온 족속이 하나님 앞에서 서로를 돌보겠다고 맺은 언약을 사울과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파기한 것입니다. 성경은 서원하기 전에 잘 살펴서 하고 서원한 다음에는 지키라고 말씀합니다(시 15:4; 전 5:4~6). 두 번째 죄는 하나님의 일을 하며 평화롭게 살던 기브온 주민들을 살해하여 불의의 피를 흘려 거룩한 땅을 더럽힌 것입니다(민 35:33~34). 이 두 가지 죄를 깨달은 다윗은 사울과 베냐민 지파 사람들의 죄악을 자신이 나서서 속죄하겠다고 합니다. 속죄를 위하여 자신이 어떻게 하길 원하는지 기브온 사람들에게 묻자, 사울의 자손 일곱 명을 자기들에게 내어주면 기브아에서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겠다고 합니다(5~6절). 이 요구는 율법에 따른 것이었습니다(민 35:30~34). 그래서 다윗은 사울과 리스바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과 사울의 장녀 메랍과 그의 남편 사이에 낳은 다섯 아들을 그들에게 내줍니다(삼하 21:8~9).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은 내주지 않습니다. 다윗은 언약을 파기한 사울과는 달리 요나단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켰습니다(7절). 그리고 사울의 첩 리스바는 처형당한 이들의 시체를 들짐승이 훼손하지 못하도록 하늘에서 비가 내릴 때까지 주야로 지킵니다(10절). 이 사실을 알게 된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에 묻혀 있는 사울과 요나단의 뼈를 수거하여 처형당한 사울의 손자들의 뼈와 함께 사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합니다. 이것도 다윗이 사울과 맺은 언약대로 사울의 가문에 자비를 베푼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땅을 위한 다윗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기근을 종식시켜 주십니다(14절). 그로써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회복되었습니다. 공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아니라 기브온 사람들처럼 귀화한 이방인과 종들에게까지 구현되어야 했습니다(출 20:7~11, 17, 23:9; 사 56:6~7; 렘 7:5~7).
하나님 앞에서 맺은 언약을 사울이 파기했지만 다윗은 그 언약을 회복했습니다. 언약의 파기와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결국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로 확장됩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했습니다. 그로써 아담의 후손인 인류는 죄와 사망에 종노릇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에게 죄와 사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죗값을 단번에 온전히 처리하셨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지만 아담이 깨뜨린 언약을 예수님께서 이행하심으로써 아담의 후손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강같이 흐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 외에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방도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요,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하는 유일한 진리요,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게 하는 유일한 생명입니다(롬 8:1~2, 31~32, 38~39). 여러분은 새로운 세계를 여신 그리스도에게 소속된 사람입니까? 아니면 아담에게 소속된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새 생명을 풍성하게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계십니까? 더 나아가 은혜 받은 자답게 살고 있습니까? 성도와 교회는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와 교회의 존재목적이요 사명입니다(마 28:19~20; 고전 12:13; 갈 3:28). 하나님께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벧전 2:9~10). 왕 같은 제사장은 하나님의 복을 마음껏 누리는 특권을 받았을 뿐 아니라 거룩한 책무도 부여받았습니다. 그 책무는 죄와 저주와 사망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 땅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와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나누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라
이한규목사 / 삼하 21장 1-14절
< 하나님께 맡겨야 할 것 >
다윗 왕 말기에 연속적인 삼 년 기근이 있었다. 그 기근의 원인은 사울이 기브온 사람을 학살했기 때문이었다. 다윗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속죄 방법을 묻자 기브온 사람들이 사울 가문의 자손 7명을 목매달도록 내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다윗은 사울의 첩 리스바에게서 난 두 아들인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랍의 아들인 아드리엘의 아들 5명을 기브온 족속에게 넘겨주었다. 그러자 기브온 사람이 그들을 산 위에서 목매달았다.
리스바는 자신의 두 아들이 목매달려 죽자 굵은 베를 반석 위에 펴고 죽은 아들들의 시체 곁을 지키면서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했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했다(10절). 그 슬픈 얘기를 듣고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보관하던 사울과 요나단의 뼈를 가지고 와서 목매달려 죽은 7명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사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듣고 비를 내려주셨다. 본문 주는 교훈으로서 하나님께 맡겨야 할 것이 무엇인가?
1. 원수 갚는 것
기브온 족속은 동족을 학살한 사울에 대한 원수를 갚으려고 3년 기근을 기회로 삼아 다윗의 허락 아래 사울의 후손 7명을 처형했다. 그 일로 그들의 한은 어느 정도 풀렸겠지만 대신 사울의 후손 7명이 특별한 죄도 없이 억울하게 처형당함으로 그 가족들도 한 맺힌 눈물을 흘려야 했다. 개인적으로 원수를 갚으면 한이 또 다른 한을 낳기에 하나님은 사사로이 원한을 갚지 말고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셨다.
2차 세계대전 때 루마니아의 리처드 범브란트 목사가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혔다. 하루는 감옥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잡혀 들어왔는데 그는 자신을 체포해 고문하던 대위였다. 수용자들이 의아해할 때 그가 자신이 갇힌 사연을 말해 주었다. 어느 날 그의 사무실에 열두 살 된 소년이 예쁜 꽃다발을 들고 면회를 와서 말했다. “대위님! 오늘은 엄마 생일인데 엄마가 대위님에게 잡혀가서 꽃다발을 선물할 수 없게 되었어요.”
소년이 계속 말했다. “엄마는 늘 원수도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셨는데 지금 제게는 엄마가 없으니까 이 꽃다발로 대위님 아이들의 엄마를 기쁘게 하고 싶어요. 이것을 대위님 부인에게 전해주세요.” 그 말을 듣고 대위는 큰 감동을 받고 소년을 꼭 안은 채 눈물로 회개했다. 그때부터 은밀하게 수많은 신자들을 돕고 살려주다가 그 사실이 발각되어 체포된 것이었다.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알아서 원수 같은 사람이 한 일에 대해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면 하나님이 나의 한을 더욱 큰 복과 영광으로 보상해 주고 원수조차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사사로이 원한을 갚으면 감정은 풀려도 인생 전체로는 유익이 없지만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의 위로와 동행과 보상이 더욱 넘치게 될 것이다.
2. 잃어버린 것
리스바는 한 때 사울 왕의 총애를 받고 두 아들도 얻었다. 그러나 선왕의 첩이란 불행한 꼬리표가 늘 따라다녔고 마침내 의지했던 두 아들이 목매달려 죽었다. 누구든지 리스바의 입장이 되면 반쯤 미치겠지만 그녀는 굵은 베를 아들들이 목매 달린 곳의 바위 위에 펴 놓고 오랜 시간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보냈다. 그 슬픈 얘기가 백성들을 통해 다윗에게 들렸고 다윗도 감동해서 희생 제물로 죽은 그 7명을 위해 성대한 장례를 치러 주었다.
한 여자가 마음의 고통을 녹여낸 정성으로 백성을 감동시키고 그 감동이 왕에게 전해지고 결국 하나님도 감동하셨다. 마침내 백성들의 간절한 염원대로 그 땅에 비가 내려졌다. 그런 회복의 역사는 모든 고통을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맡기고 불행의 현장을 끝까지 지킨 한 여자가 일궈낸 믿음의 승리였다. 그처럼 때로 큰 고통이 있어도 거기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믿고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면 조만간 최종 승리의 역사가 펼쳐질 것이다.
얼마 전에 두 딸이 어디로 놀러갔을 때 예약 잘못으로 15만 원 이상의 돈을 날렸다. 예전에는 그런 일이 있으면 속상해하는 시간이 몇 시간은 갔는데 그때는 첫째 딸이 남 앞에서 창피하지 않도록 화장실에 가서 잠깐 눈물을 흘린 후 곧 즐거움과 유쾌함을 회복하고 계속 놀았다. 그 일로 인해 둘째 딸이 외적인 감정 표출을 자제한 언니로 인해 고마움을 느꼈고 나중에 필자에게 말했다. “아빠, 저도 원래 그런 일을 잘 잊지 못하는 편인데 아빠의 반복된 교육으로 그런 일을 잘 잊게 된 것 같아 감사해요.”
무엇인가를 잃어버렸을 때 감사하는 믿음만 잃지 않으면 사실상 잃은 것이 아니다. 그 믿음을 보고 하나님이 나중에는 더 많은 유무형의 것을 얻게 하시기 때문이다. 돈이나 물건을 잃고서 속상할 때도 감사 고백을 하면 하나님이 더 소중한 복과 건강과 사람을 잃지 않게 하신다. 더 나아가 최상의 것을 잃고도 죽도록 감사하면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이 땅에서 최상의 복을 주시거나 천국에서 최상의 상급을 주실 것이다.
3. 응답 받는 것
당시 리스바는 아들들의 시체 곁에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비가 쏟아질 때까지 약 6개월 정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6개월간 목매 달린 아들들의 시체 곁을 지키며 마침내 사람들과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모습을 보라. 예수님은 침노하는 자가 천국을 얻는다고 하셨다(마 11:12). 아무리 불행한 사람도 회개와 믿음과 감사와 절대 순종과 간절하고 꾸준한 기도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면 얼마든지 불행을 행복으로 만들 수 있다.
기도한 후 조급하게 열매를 구하지 말고 넉넉한 마음과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최선을 다하라. 남의 외적인 성공을 너무 부러워하지 말라. 현재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인생 성공이 판가름되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모습은 부족해도 지금보다 10년 후에 영향력이 커지고 살아 있을 때보다 죽은 후에 영향력이 커지고 100년 후보다 1000년 후에 영향력이 커지는 것이 진짜 성공이다. 너무 조급하게 성공을 추구하면 오히려 문제와 사고와 부작용이 생긴다.
한국 교계에 한때 ‘교회 성장 세미나’가 크게 유행했다. 그런데 교회 성장 세미나가 인기를 끌면서 오히려 교회 성장이 멈추었다. 사람의 방법으로는 하나님을 움직이지 못한다. 누가 어떤 방법으로 급속히 성장했다고 해서 그 방법대로 하면 성장이 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과 특징을 잃어버리고 좌절하는 경우도 많다.
예전에 한때 사람을 넘어뜨리는 성령 사역이 크게 유행했다. 당시에 한 목사가 그런 사역을 세미나에서 배운 후에 넘어뜨리는 훈련을 한다고 사모를 훈련 대상으로 삼았다. 그런데 사모가 잘 넘어지지 않으니까 자꾸만 강제로 밀어서 넘어뜨렸다. 사모가 흔쾌히 넘어지지 않을 때는 사탄의 방해를 물리치려고 사탄을 욕한다면서 사모에게 “이 더러운 사탄 마귀야, 썩 물러가라!”라고 자주 소리쳤다.
나중에 그 사모가 필자에게 말했다. “당시에는 너무 속상해서 수시로 이혼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 사모의 얘기를 옆에서 듣던 그 목사도 말했다. “그때 왜 제가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언가 씌워진 것 같았어요. 지금은 누가 어떤 방식으로 교회를 크게 키웠다고 해도 그런 방식을 무조건 따라하지 않겠다고 수시로 다짐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특정한 사람이 시행했던 방식을 무조건 따라하면서 빨리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자기 길을 인내하고 가면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 하나님을 감동시키라 >
무엇이든 끈질기게 기도하며 시도하고 일시적인 실패로 주저앉지 말라. 하나님 안에서는 실패도 성공 재료가 된다. 인생은 경기와 같다. 때로는 이기고 때로는 진다. 좋은 때도 있고 나쁜 때도 있고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다. 때로는 좋은 일을 결심하고 실천하는데 오히려 상황이 나빠진다. 그 테스트 기간을 잘 이겨내라.
어느 날 한 기업 사장이 책임적인 교인이 되자고 결심한 후 십일조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후 동업하던 보험회사 사장에 의해 사기를 당했다. 그 일로 파산하자 처음에는 믿음에 회의가 생겼다. “하나님! 십일조를 드리면서 오히려 망했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러나 곧 그가 생각했다. “여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다. 사업은 파산해도 믿음은 파산하지 말자.” 결국 그는 멋지게 재기했다.
좋은 목표를 가지고 나아갈 때 어려움이 있어도 끝까지 목표를 잃지 말라. 돈을 잘 버는 목표만 가지지 말고 돈을 잘 쓰는 목표까지 가지라. 한 신실한 사업가는 자녀한테 고가의 물건을 사고 싶으면 그 값만큼 좋은 일에 드린 후에 사라고 교육해서 자녀가 적절히 누리고 살면서도 사치에 빠지지 않았다. 좋은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면서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며 헌신하면 어려운 일을 당해도 금방 재기할 수 있고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는 복과 능력이 넘치게 주어질 것이다.
리스바는 아들의 시체가 있는 불행한 현장을 끝까지 지켰기에 백성들을 감동시켰고 다윗 왕과 하나님도 감동시켰다. 그처럼 좋은 꿈과 목표를 가지고 힘써 예배와 봉사와 헌신의 자리를 지킴으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고난을 축복으로 변화시키면서 사람들과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의 주인공이 되라.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신 화해
삼하 21장 1~14절 / 이준원목사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약속을 잘 지키십니까? 사업을 할 때의 계약을 비롯해서, 직장에 들어갈 때 계약서를 쓰고, 집을 사거나 렌트할 때 계약서를 쓰는 것이 다 약속입니다. 그런 법적 계약뿐 아니라 우리끼리 어디서 몇 시에 만나자고 하는 것도 약속이고, 예배 시간도 약속입니다. 특히 어린 자녀가 있는 경우 뭔가를 사달라고 할 때 “말 잘 들으면 사줄게.”라고 하는 것도 약속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약속을 많이 하는데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약속을 잘 지키십니까? 여기 계신 여러분 대부분은 아마 그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럼, 나는 약속을 잘 지키지.’
그렇다면 5년 전 했던 약속을 잘 지키고 계십니까? 50년 전에 했던 약속은 어떻습니까? ‘난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는데.’라고 할 분들도 있습니다. 500년 전에 했던 약속은 지키십니까? 그때는 당연히 우리 중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상님들이 했던 약속까지 다 조사해서 안 지켰으면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누가 500년 전에 했던 약속을 지키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500년 전에 한 약속까지 다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에 500년도 하루 같이 보십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는 500년 전 여호수아와 기브온 족속이 맺은 평화 조약을 사울 왕이 깨뜨림으로써 하나님이 기근을 내리신 내용이 나옵니다. 약속을 안 지키니까 징계하셨습니다.
5년도 50년도 아니고 무려 500년 정도 전에, 그것도 속아서 맺은 평화 조약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지키라 하십니다.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것이 바로 ‘신실함’(faithfulness)입니다. 그런 면에 있어 우리는 사실 신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하신 것을 500년 아니라 5천 년이 지나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에게 엄청난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확신을 어떻게 갖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 즉 한 번 약속했으면 반드시 지키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너 왜 여기 들어와?’라고 하실 때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셔서 들어갑니다.’라고 하니까 ‘그건 2천 년 전 이야기이고 지금은 달라졌지.’라고 하시면 큰일입니다. 하지만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약속을 지켜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절대 그 효력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깨닫고 믿으면 자신의 말씀이 됩니다.
둘째, 과거의 청산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무리해서 잘못 청산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게 됩니다.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미래를 향해 최선을 다해야 하며,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하면 오히려 심판받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1. 기근의 원인 (1~2절)
다윗이 사울이나 그 후손들을 죽이고 왕이 된 것은 아니지만, 사울 집안과의 관계가 다윗이 통치하는 내내 껄끄러웠습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지난번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피난 가던 다윗에 대한 시므이의 저주 내용입니다. 시므이는 다윗을 향해 ‘살인자여!’라고 하며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된 살인자라는 식으로 저주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지만 당시 많은 사람들, 특히 사울의 지파인 베냐민 지파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정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하고 다시 왕이 되어 귀환한 다윗은 시므이를 벌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압살롬의 반란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국론이 분열되는 상황에서 시므이에게 벌을 내리지 않은 것이 진정한 용서라기보다는 정치적 필요가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죽기 전에 아들 솔로몬에게 시므이를 처리하라고 유언한 것을 보면 확실해집니다.
이 모든 것은 다윗과 사울의 집안 사이에, 나아가 유다 지파와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들 사이에 온전한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나중에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 나라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완전히 나뉘어 망할 때까지 그것을 유지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열두 지파가 정의와 생명을 위해 연합할 때 이 땅에 성취되는 것인데, 지파들간에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니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데 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께 반역만 하다가 망하는 것을 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뿌리 깊은 분열과 갈등의 문제를 다룹니다. 인간은 이렇게 몇천 년 전뿐 아니라 지금도 끊임없는 분열과 갈등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라와 나라 간에, 민족과 민족 간에, 심지어 같은 민족이나 나라 안에서, 또 같은 진영 안에서도 분열하고 갈등합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본성이 분열과 갈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서가 유다 지파와 나머지 지파들의 갈등이 표면화된 세바의 반역을 이야기한 다음에 다윗과 사울의 집안 사이의 갈등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결국 다윗의 통치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아무리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 믿음의 사람, 그리고 위대한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실수도 많이 하고 잘못도 많이 저지른 사람이었다는 것, 그의 통치에는 한계에 있었다는 것, 그래서 진정한 소망은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서로 다른 지파와 민족과 국가들 사이의 용서와 이해와 평화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1절)
이 이야기는 다윗의 통치 기간 중 어느 시점에 발생한 사건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많은 구약학자들이 이 본문을 주석하면서, 사실은 이 내용이 9장 전후에 일어난 일이라고 봅니다. 9장에서 다윗이 자기의 사랑하는 친구였던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마치 왕자들 중 하나처럼 거두고 상에서 먹게 해준 사건 이후에 일어난 일로 봅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 때문에 사무엘하의 뒷부분에 놓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시간적 배경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인 배경입니다. 즉, 기근이 일어났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은 정기적으로 기근을 겪은 나라입니다. 고대에는 비가 안 오면 죽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땅은 건기와 우기가 아주 뚜렷합니다. 늦가을부터 봄까지는 우기이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건기로 아주 날씨가 좋습니다. 날씨가 로스엔젤레스 쪽과 아주 비슷합니다.
적어도 다윗 때까지 이스라엘에는 강력한 중앙 정부가 없었습니다. 첫 번째 왕이 사울이고 그다음이 다윗인데, 사울 때는 사사시대에서 넘어와 약간 과도기였습니다. 그래서 사울 정권은 강력한 중앙 정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가뭄이나 전염병과 같은 재해를 대비한 국가적 체계가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해만 가뭄이 들어도 많은 사람이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던 겁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3년이나 연속으로 가뭄이 들었다면 죽음의 위기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자연재해를 넘어,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재앙입니다. 실제로 가뭄이나 지진이나 전염병은 고대 사회에서 한 나라를 무너뜨리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런 상황에서 왕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다윗은 회의를 소집하고 장관들 불러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국무회의를 한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이 말을 풀어서 보면 ‘주님의 얼굴을 구했다.’라는 겁니다.
이것은 3년 동안 기근이 계속되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구했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 제발 저희에게 비를 내려주십시오.’라고 간구했을 것입니다. 기근이 든 첫해부터 다윗은 ‘왜 기근이 들었습니까? 그 원인을 알려주십시오.’ 하고 하나님께 원인을 여쭤보며 간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기근이 다윗의 통치 중 어느 때에 발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윗은 항상 하나님께 여쭤보며 모든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때도 하나님께 여쭤보며 나아갑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라고 되어 있는데, 오늘 본문은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스라엘의 기근을 해결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내용이 아니라, 통치자이고 왕인 다윗의 한계를 설명해주는 내용입니다.
다윗은 이상적인 왕으로서 지금 이스라엘 국기 안에 그려진 별도 다윗의 별이고, 최고의 왕이었고, 메시야의 조상으로서 그의 후손 가운데 예수님이 오실 정도로 아주 훌륭하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그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정치적인 결정도 많았고, 그런 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해친 적도 많았고, 여러 가지 한계가 있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윗을 우상화하지 말라는 겁니다. 다윗을 영웅시하지 말라는 겁니다. 다윗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다윗 위에 계시며 그를 사용하신 하나님이 위대하신 것이지, 다윗을 우상이나 영웅으로 만들지 말라는 메시지가 여기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행동한 사람은 다윗이 아니라 리스바라는,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을 통해 오히려 다윗이 귀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도 오늘 우리처럼 자기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종종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할 때가 있었습니다. 다윗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너무나 많이 그랬습니다. 자기가 악을 행하는 것에 동조하는 사람을 향해 “하나님의 복을 받아라.”라고 했고, 일이 잘 풀리면 “하나님이 도우셨다.”라고 했습니다. 다윗도 자기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행동을 종종 하나님의 뜻이라는 식으로 한 적이 있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그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빌려서 다윗은 사울과 그 가문에 3년 기근의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사울 집안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났다고 하며, 그 책임을 그 집안에 돌리는 겁니다. 다윗에 따르면 기근의 원인은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과의 화친 맹세(수 9:15-27)를 어기고 그들을 죽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그들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물으니라” (2절)
여러 구약학자들이 말하기를,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핍박하거나 죽였다는 기록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성경을 읽어보면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기록은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미드라시 전통에 의하면 성경에 그것이 있다고 합니다. 어디에 있습니까?
오래전 다윗이 젊은 날 너무 인기를 끄니까 사울이 질투해서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자기 사위인데도 죽이려 해서 다윗이 도망갔는데, 급하게 도망하느라 무기도 없이 갔다가 제사장 아히멜렉이 있는 놉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거기에 자기가 죽였던 블레셋 장수 골리앗의 칼이 보관되어 있었고 그것을 받아서 들고 떠났습니다.
그런 일 때문에 아히멜렉을 비롯하여 놉의 모든 제사장들을 처형합니다. 도엑이라는 에돔 사람의 손으로 죽일 때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멜렉이 유일하게 도망을 쳐 다윗에게 와서 나중에 제사장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것은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그날 그 자리에 기브온 사람들도 있었고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다윗 때는 대략 BC 1000년 정도이고, 모세와 여호수아 때는 BC 1500년경입니다.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가 정복 전쟁을 벌여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때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면서 화친을 맺으려 시도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멀리서 온 것처럼 속여서 낡은 옷을 입고 음식도 곰팡이가 난 것을 가지고 가서 보여주며 멀리서 왔으니 화친을 맺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여쭤보지도 않고 평화 조약을 덜컥 맺었습니다.
얼마 후 알고 보니 그들은 바로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언약을 맺었기 때문에 깰 수가 없었고 그들을 정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하나님의 제단을 위해 나무를 패며 물 긷는 자로 살도록 합니다.
그때 놉 성소에도 기브온 사람들이 제사장들을 섬기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울이 그들을 죽일 때 거기 있던 기브온 사람들도 같이 죽었다는 겁니다.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유대인의 전승에 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다윗에게 복수를 위해 사울의 후손 일곱 명을 내달라고 했는데, 거기서 죽은 기브온 사람들이 일곱 명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직접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사실 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제단 봉사자였기 때문에 사울의 제사장 학살 때 함께 죽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하지만,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 죽은 기브온인이 일곱 명이었기 때문에 다윗에게 일곱 명을 요구했다는 것도 약간 일리가 있는 것 같지만 정식으로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왕이 신의 이름으로 맺은 맹세를 깰 때 국가적 재앙이 일어난다는 것이 고대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브온과 맺은 맹세를 어긴 것이 사실이라면, 3년 기근이라는 국가적 재앙은 다윗에게 사울 집안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기근의 원인이 사울 집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맹세를 어기고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이라는 말은 당시 사람들에게 상당히 공감을 얻었을 것이고, 그래서 사울 집안의 나머지 사람들을 제거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어진 맹세에 대한 다윗의 열심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아니라 안타깝게도 정치적인 의도가 분명히 들어가 있었다는 것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다윗이 너무하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그도 여러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후손을 죽음에 넘겨줄 때 그것은 다른 하나님의 맹세를 어기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요나단과 맹세를 했는데, 그때 요나단은 다윗에게 “너의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삼상 20:15) 하고 부탁하며 언약을 맺었습니다.
다윗의 맹세는 직접적으로 요나단과 그 후손들에게만 해당하지만, 요나단의 의도는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자신을 포함한 집안사람들 모두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고대에는 왕위를 빼앗은 왕이 이전 왕조 사람들을 살려두는 것은 정치적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대부분 왕권을 잡으면 이전 왕조 사람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나단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윗에게 그러지 않도록 맹세하게 한 것입니다.
다윗이 그 맹세를 넓게 해석하여 사울의 다른 후손들도 살려 주었어야 했는데, 기브온 사람들이 ‘여호와의 선택된 자’라고 사울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다윗의 가장 큰 대적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다윗은 사울의 음악치료사이기도 했는데, 사울에게 악한 영이 내릴 때 다윗이 하프를 연주하면 악한 영이 물러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장군으로 나가서 싸우기도 했고, 사위로서 많은 전과를 세운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다윗을 시기해서 죽이려 하니까 다윗이 도망자 시절을 보내게 되었는데, 두 번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하나님이 기름 부은 왕이라는 이유로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왕위를 빼앗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름 부으심으로 왕이 된 것이라면, 쿠데타로 왕위를 빼앗아 왕이 되었으면 이전 왕과 사람들을 죽이지만 그게 아니기 때문에 지금 사울의 자녀들을 죽일 이유는 없습니다. 게다가 이미 사울의 집안은 거의 몰락했기 때문에 죽일 것도 없습니다.
요나단과의 맹세를 넓게 해석해서 그렇게 그들을 용서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의 면모가 아니겠습니까?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살려둡니다. 그런데 므비보셋이 어릴 때 떨어져서 두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 아니라 멀쩡한 사람이었다면, 그래도 다윗이 살려두었을까에 대해 많은 사람이 의심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잘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은 분명히 엄청난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 중 ‘내가 다윗보다 믿음이 더 좋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다른 이면에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라면 정적을 제거할 수 있는 면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100% 선하거나 100% 악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정도 다 선한 면과 악한 면이 있는데, 어느 쪽이 더 드러나느냐 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100% 순수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윗도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왕으로서 또 하나님 앞에서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라면 이렇게 더러운 짓도 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음의 사람으로서 주님을 잘 믿어보려고 합니다. 이 일요일 아침 황금 같은 시간에 왜 이렇게 나와 예배를 드립니까? ‘그래도 내가 하나님께 예배드려야지.’라고 하지만, 다른 이면에는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더러운 것도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섬기지만 동시에 그렇게 악한 면과 죄악 된 면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된다는 게 아니라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결해야 문제도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일부가 아니라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입니다. 여호수아 때 했던 맹세 때문에 이스라엘 영주권을 얻어서 나중에 시민권까지 얻어 그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은 다릅니다. 그런데 맹세를 어긴 것이 사울의 민족주의 정책이라는 것을 여기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자기 왕국을 순혈주의, 오직 단일민족 이스라엘 사람의 국가로 만들려는 열심을 가지고 그 가운데 사는 기브온 사람 같은 이방 민족들을 핍박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에 대한 사울의 정책을 그보다 훨씬 더 과장해서 부풀려 묘사합니다. 사울이 그들을 죽이고자 했다는 것, 즉 완전히 그들을 끊어 버리려 했다고 합니다.
2. 기근에 대한 해결책 (3~9절)
“다윗이 그들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하니” (3절)
이처럼 사울에 대한 반감을 다윗이 상기시킵니다. 기브온 사람들뿐 아니라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 앞에서 사울의 잘못이라는 것을 굉장히 부각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기근 때는 민심이 굉장히 흉흉하기 때문에 책임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이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무엇을 해줄까? 어떻게 속죄할 수 있을까?’라고 묻습니다. ‘속죄’는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그 말속에 피흘림 혹은 희생의 개념이 들어 있는데, 기브온 사람들이 사울의 후손들을 속죄물로 달라고 요청하도록 이끌어가는 겁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기브온 사람들은 다윗이 원하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기브온 사람이 그에게 대답하되 사울과 그의 집과 우리 사이의 문제는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며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는 문제도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하니라 왕이 이르되 너희가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 (4절)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은 피해자였지만, ‘우리에게 돈으로 보상해주십시오.’ 또는 ‘우리도 복수하겠습니다.’라는 대답을 하지 않는 겁니다. 그 문제는 은금에 있지 않다는 것은 자기들이 돈을 원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는 문제도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라는 말도 이민자처럼 이스라엘 가운데 사는 이방 민족으로서 이스라엘 사람을 죽이는 문제는 자기들이 할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뒤로 물러가며 자기들은 복수를 원하지 않는다는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이 그들에게 뭐라고 합니까? “너희들이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라고 합니다. ‘우리는 돈도 복수도 원하지 않습니다.’라는 식으로 말하니까 ‘아니야, 아니야. 뭐든지 이야기해봐. 내가 다 들어줄게.’라고 자꾸 뭔가를 하라고 부추기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까 기브온 사람들은 ‘다윗 왕이 원하는 게 따로 있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의중을 파악하고 새로운 것을 요구합니다.
“5 그들이 왕께 아뢰되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영토 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의 6 자손 일곱 사람을 우리에게 내주소서 여호와께서 택하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겠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내가 내주리라 하니라” (5-6절)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의 단일민족 정책, 순혈주의 정책이 있기는 있었지만 다윗이 그것을 부풀려서 과장하여 말하니까 그 의중을 정확히 알고 ‘그럼 이제는 우리가 보복하겠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울의 자손 중 일곱 남자를 요구합니다.
기브온의 요구대로 사울의 후손을 넘겨주는데, 이것도 다윗의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기근의 원인이 분명히 맹세를 어긴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죄인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세운 언약을 깼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죄도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세운 언약을 깨면 왕이 반드시 그것을 깬 사람에 대한 심판을 집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다윗이 사울의 후손을 이방인 기브온 사람들에게 넘겨주어서 나무에 매달아 죽게 하는 것은 기브온 사람들을 ‘피의 복수자’로 간주하는 것이 됩니다. 형제들을 죽인 살인자에 대해 보복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기브온 사람들이 사울의 집안사람들을 사적으로 죽이도록 허락하는 게 됩니다. 원래 왕인 자기가 사형을 집행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 보복하도록 내어주겠다는 게 아닙니까?
하나님에 대한 범죄는 반드시 왕이 주도권을 가지고 사형을 집행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단순 살인죄라면 개인적으로 보복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지금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범죄라고 말은 해놓고서는, 처형에 있어서는 자기가 하는 게 아니라 일반 살인 사건이나 단순 살인죄처럼 기브온 사람들에게 사적으로 처형하도록 허락해줍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서 사울의 후손들을 매달겠다고 말은 했지만, 그것은 다윗의 귀에 좋게 들리도록 말한 것뿐입니다. 정말 주님을 위해서 한다면 기브온 사람들이 처형하면 안 되고 다윗이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기브온 사람들도 그렇고 다윗도 그렇고, 자기의 의도를 이루기 위해서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인간은 오래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후손들을 직접 죽이면 사람들 보기에 좋지 않기 때문에, 사울에게 원한이 있는 기브온 사람들의 손을 빌려서 그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을 한 다음에 우리아를 죽일 때도 이스라엘과 전쟁하는 암몬 사람들의 손을 빌려서 죽였습니다. 여기도 기브온 사람들의 손을 빌려 사울의 자손들을 죽입니다.
“7 그러나 다윗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 사이에 서로 여호와를 두고 맹세한 것이 있으므로 왕이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아끼고 8 왕이 이에 아야의 딸 리스바에게서 난 자 곧 사울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랍에게서 난 자 곧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붙잡아 9 그들을 기브온 사람의 손에 넘기니 기브온 사람이 그들을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 매어 달매 그들 일곱 사람이 동시에 죽으니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첫날 곧 보리를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 (7-9절)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살려줍니다. 그러나 그가 므비보셋을 살려준 진짜 이유는 요나단과의 언약 때문이 아니라 므비보셋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그랬던 것입니다. 므비보셋은 북동쪽인 길르앗 지방 마길이라는 사람의 집에 꽁꽁 숨어 있어서 찾는 데 오래 걸렸습니다. 나중에 그를 찾고 보니까 그가 다리를 못 쓰는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혀 위협이 안 되기 때문에 살려둔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를 볼 때, 다윗은 기근의 원인이 사울 집안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회로 사울의 후손들을 모두 숙청한 겁니다. 다윗의 주장대로 사울의 범죄가 정말 하나님에 대한 것이라면 재판권이 왕에게 있으니까 자기가 해야 하는데, 기브온 사람들에게 사울 집안의 처형을 맡겼다는 것은 다윗이 기근을 자신의 정적 제거의 도구로 삼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근 자체를 사람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것도 시도하고 저것도 시도했지만 안 되었다고 누가 왕을 비난하겠습니까? 사울의 후손을 죽였지만 기근이 해소되지 않았다고 왕을 비난할 사람은 없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기근이 왔다고 하셨는데, 오래전 죽였는데도 왜 하필 이때 기근이 왔는지부터가 이상합니다.
어쨌든 기근의 원인은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브온 사람들의 원한을 해결하게 해준 다음에도 비는 내리지 않습니다. 기근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진짜 이유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었는지도 사실 의심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뭔가를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이 진짜로 원하셨던 것은 사울의 후손들을 처단하는 게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오히려 그들을 향한 다윗의 용서와 화해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근이 임한 것은 사울의 죄나 사울 집안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은 사울 집안에 대해 여전히 다윗이 품은 채 아직 해결하지 못한 마음의 응어리였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마음속으로 사울 집안과 아직 완전히 화해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다윗의 마음속에 사울에 대한 증오가 있고, 그 집안에 대한 경계심이 남아 있습니다. 혹시라도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항상 불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사울은 오래전에 죽었지만 화해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앞으로 위협이 될 수도 있는 그의 집안을 완전히 해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다윗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결국 다윗의 후손들이 다른 지파들과 화해하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나라가 갈라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온전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결국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됩니다.
결국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기근을 주신 이유는, 사울의 잘못도 어느 정도 있었겠지만, 진짜 이유는 다윗의 마음의 치유였던 것입니다. 다윗이 정말로 화해하기를, 원수 집안이라도 사울의 집안을 품어주고 용서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3. 사울 집안과의 진정한 화해 (10~14절)
“아야의 딸 리스바가 굵은 베를 가져다가 자기를 위하여 바위 위에 펴고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 시체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한지라” (10절)
이 이야기의 결론이 약간 의외인데, 의외의 주인공이 바로 사울의 첩이었던 리스바라는 여인입니다. 리스바는 자신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모셋이 사울의 첫째 딸인 메랍의 다섯 아들과 함께 기브온 사람들에 의해 처형당하자, 아들들의 시체를 거두어 약 6개월 동안이나 산속에서 베옷으로 만든 간이 천막 아래에서 시체들을 지켰습니다. 매장하지 않은 것은 어머니라도 왕의 명령이 없이는 죄수의 시체를 거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리스바는 보리 수확이 시작되는 4월부터 우기가 시작되는 10월까지 약 6개월 동안 산에서 아들들의 시체와 함께 생활한 것입니다. 아무리 아들을 사랑해도 누가 아들 시체를 6개월 동안이나 붙들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시체들이 새나 들짐승에게 훼손당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억울하게 죽은 아들들의 죽음을 항의하고 왕에게 시체를 거둘 수 있도록 호소하기 위함입니다.
“11 이에 아야의 딸 사울의 첩 리스바가 행한 일이 다윗에게 알려지매 12 다윗이 가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서 가져가니 이는 전에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을 길보아에서 죽여 블레셋 사람들이 벧산 거리에 매단 것을 그들이 가만히 가져온 것이라” (11-12절)
리스바가 한 일이 다윗에게 보고되니까 다윗은 그 일곱 명의 유골뿐 아니라 길르앗 야베스에 묻힌 사울과 요나단의 유골을 거두어서 사울의 조상 무덤에 정식으로 매장하도록 명령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을 때 그들을 위해 애가를 짓고 그들의 장례를 국장으로 성대히 치러 주었지만, 정작 그들의 유골은 기브아의 조상 무덤에 매장해 주지 않고 그냥 저쪽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애가를 지은 것과 옷을 찢고 운 것에도 역시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에 대한 장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신과 뼈를 수습해서 조상의 무덤에 안치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을 당시에는 다윗이 아직 그럴만한 정치적 힘이 없었다고 해도, 왕이 된 다음에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 사울과 요나단의 유골을 요단 동편 길르앗 땅에 방치해 두었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왕이 된 후에도 여전히 사울의 집안과 마음속에서 화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바로 그것을 하나님은 해결하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3년 기근을 빌미로 사울의 일곱 후손을 죽인 것도 바로 이런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왕이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었지만, 여전히 우리와 똑같이 부족함이 많은 사람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위대한 그도 그랬다면, 우리는 얼마나 만이 부족합니까?
“13 다윗이 그 곳에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가지고 올라오매 사람들이 그 달려 죽은 자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14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 (13-14절)
여기 보십시오.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 사울 집안 사람들을 처형했을 때 아직 비가 안 내렸습니다. 그런데 모든 유골을 가지고 모든 것을 돌려놓았을 때, 다 거두어 화해했을 때, 바로 그때 비가 내립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오늘 리스바라는 한 여인의 헌신과 눈물의 간구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움직였는지, 특히 어떻게 다윗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를 보게 됩니다. 의외의 인물 리스바가 끝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있던 다윗의 마음을 열게 만들고, 결국 사울의 집안과 완전한 화해를 이루게 했습니다. 그 결과 비가 내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시대에도 리스바 같은 중보자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죄악을 회개하며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이런 중보기도자가 많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다윗이 변화되어 진정한 화해를 이루었고, 그 화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다윗처럼, 아니 다윗보다 훨씬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이웃과 원수까지도 마음에 품고, 해결하지 않은 채 계속 덮어두고 사는 게 아니라 결국 그것을 해결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게 임하는 통로로 쓰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기근의 원인과 대안
삼하 21장 1~4절 / 이규왕목사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생이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 속에 살면서도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특별히 알려주시기 위해 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신구약 성경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비록 눈에 보이지 않으시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셔서 그것을 지키게 하심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통해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세계 만민에게 증거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신 7: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말씀을 따라 신실하게 살면 열악한 환경에서도 축복을 약속하셨고, 정반대로 말씀을 불순종하고 불성실하게 살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보다 더 고통스러운 재앙과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약속하신 것이 곧 성경 말씀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원칙을 정해 놓고 자기가 불리하면 헌법까지라도 바꾸어 자기에게 유리하게 적용하려고 하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가 누구이든지 그 말씀대로 신실한 삶을 살면 복을 주셨고 그 누구이든지 신실하지 못하면 경고하신 재앙과 심판을 받게 하셨음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원칙을 재확인하면서 때로 우리가 원치 않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될 때 그것을 주변 환경 탓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실하지 못했던 부분이 무엇인가를 먼저 돌이켜보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1. 기근의 원인
이스라엘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에 둘러 쌓여 항상 전쟁의 위협과 평야 지대가 많지 못한 열악한 자연 환경 때문에 풍요로운 삶을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매년 농사를 지을 때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아니하면 흉년을 당하여 온 백성들이 기근의 고통을 맛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배가 고팠던 시절이 있던 사람은 배고픈 고통과 설음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근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고통 중에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나안 사람들은 그것을 면해보려고 그 대안으로 바알이라는 풍요의 신을 만들어 대대로 우상을 숭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지리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은 유일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한 가운데 심어 놓으시고 그들만이 유일하게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되게 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우상을 숭배하는 주변 나라들이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를 기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 있어서도 이방나라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만 하였으며 그 지침서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 바로 율법의 말씀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언약입니다. 언약의 주체는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며, 그 하나님을 사이에 두고 맹세한 것은 반드시 이행을 하여야 하며, 만일 언약을 하고서도 지키지 아니하면 그것은 신실한 하나님의 이름을 훼손한 것이기 때문에 죽거나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의 배경도 그 중에 하나로 그 동안 시간대를 따라 차례로 살펴본 성경 말씀과 달리 다윗이 왕이 된 후 얼마 오래지 아니하여 일어났던 것을 기록한 사무엘하의 부록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다윗의 집권기간 중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기근이 자그만 치 삼 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경우 그 원인을 자연 환경적인데서 원인을 찾으려고 합니다. 날이 가물어서, 아니면 병충해가 심해서, 종자를 잘못 파종해서 라고 생각하고 그 것을 바꾸어 기근을 면해보려고 먼저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삼년 동안이나 계속되는 기근의 원인이 자연적인데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계속적으로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다윗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원인이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삼하 21:1) 다윗의 시대에 연부년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다윗의 그 같은 모습은 오늘도 우리 성도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려운 문제를 만나게 될 때 그 문제를 어떻게 불신자와 다른 안목으로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고 그것을 신앙적으로 풀어가야만 하는가 하는 좋은 본보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다윗은 비록 그것이 육신의 양식이 문제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는 기회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삼년 연속의 기근을 놓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은 즉시 그 원인이 사울 왕이 기브온 사람들에게 잘못한 죄 때문이라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기근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보다는 어디에 가서 양식을 구해오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근에 대한 최선의 대안은 양식이 아니라 기도라는 것을 믿는 고 더욱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불신자와 다른 점입니다.
견디기 힘든 어려움 속에서 먼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펴보고 과연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으며,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과연 신앙적인 자세인가를 살피고, 아프지만 인내와 소망을 가지고 실천에 옮기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자세인 것입니다.
2. 기근에 대한 대책
하나님께서 다윗이 통치하는 이스라엘 나라에 삼년이나 연속으로 기근을 내리신 원인이 다윗의 죄 때문이 아니라 사울의 죄 때문이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던 여호수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고 요단 강을 건너 파죽지세로 가나안 땅을 점령해 들어갈 때 기브온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간교한 연극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수아에 화친을 위한 사절을 보낼 때 다 헤어진 전대와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다 낡은 신을 신고 다 헤어진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 난 떡을 내어 보이면서 자기들은 멀리서 왔으며 자기 백성들을 이스라엘의 노예로 삼고 죽이지 않을 것을 조약해 달라고 매어 달렸습니다.
여호수아는 경솔하게 그들의 외모만을 보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한 채 그들의 요구대로 화친의 언약을 맺었습니다.
(수 9:14)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수 9:15)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그러나 삼일이 지난 후에 기브온 사람들의 말이 거짓임이 드러났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한 것이기 때문에 그 조약은 유효한 것이 되었고 기브온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살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기브온 사람들이 거짓말을 해서 맺은 조약이기 때문에 무효가 되어야 하는데도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조약을 자자손손 지켜야만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자세히 나타나 있지 않으나 그 기브온 자손들이 사울 왕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함께 살고 있었으며 사울은 그것이 못마땅하여 무죄한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한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민족보다 민족주의가 강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울의 그와 같은 처사에 대해서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지 않고 다 좋게 생각하고 다윗 때까지 넘어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도 그 일에 대해서 침묵해 오시다가 왜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지나간 과거사를 다시 되돌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삼년 이나 거듭 기근의 재앙을 내리신 것일까요?
그것은 사울 왕만의 죄가 아니라 그 시대에 동참하고 있던 다윗을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일에 방관자요 동참자로소 다윗이 왕이 된 이후에도 그것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 조차 비로소 삼년 기근이 연속된 후에야 기도 중에 비로소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지요? 분명히 내가 그 사람을 추대하였고 그 현장에 내가 있었고 그 일을 목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의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느끼거나 나누려고 하지 않는 무책임이 공동체를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비록 다윗이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지만 다윗은 그것이 왜 내 책임이냐고? 하나님께서 흉년을 내리시려거든 사울 왕 때 내리시지 않고 왜 이제 와서 나에게 그 책임을 물으시는가 라고 원망 불평해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고 그것을 시인하고 그 대책을 강구하였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그에게도 누구 못지 않은 강력한 왕권과 더불어 자존심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울이 잘못한 과거사를 청산하기 위해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모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잘못된 것을 다윗의 일방적인 생각대로 처리하지 않고 약소민족인 기브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 한을 풀어 주면 되겠는지 그들의 요구를 물어 보았을 때 비로소 기브온 사람들은 그동안 마음 속 깊이 품고 있던 그들의 억울함을 드러내 놓았습니다.
(삼하 21:4) 기브온 사람이 대답하되 사울과 그 집과 우리 사이의 일은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나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왕이 가로되 너희의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
그것은 돈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억울한 사람들을 죽인 사울 왕의 자손들에게 이는 이로 눈으로 눈으로 갚아야 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울이 생전에 다윗을 그렇게 괴롭혔지만 다윗은 사울 왕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그의 가문을 지켜왔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기브온 사람들이 그 사울 왕가의 가족들의 생명을 요구하였을 때 다윗은 어느 쪽을 선택해야 만 할까요?
약소 민족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사울 왕가를 살려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대로 사울왕의 자손 일곱명을 기브온 사람들에게 내어 주는 결단을 하였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그 일곱 명을 처단하였습니다.
(삼하 21:9) 저희를 기브온 사람의 손에 붙이니 기브온 사람이 저희를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매 저희 일곱 사람이 함께 죽으니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처음 날 곧 보리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
그것이 기브온 사람들의 맺은 한은 풀었는지 모르나 그 일곱 사람의 죽음을 목격해야만 하는 사울 왕의 첩이었던 리스바에게는 역시 크나 큰 또하나의 한이 되고 말았습니다.
(삼하 21:10) 아야의 딸 리스바가 굵은 베를 가져다가 자기를 위하여 반석 위에 펴고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 시체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한지라
그렇다면 왜 그러한 결과가 계속해서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목숨을 걸고 맹세한 언약을 지키지 않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만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책임을 묻지 않고 넘어가신다면 하나님은 신실하심을 무효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죄한 피를 흘렸다면 역시 그 죄는 피로써만이 갚아지는 것이 곧 대속의 원리인 것이며, 사울의 후손 일곱명이 죽임을 당함으로 무죄한 피를 흘린 죄에 대한 결과가 어떤 것인가 하는 하나님의 공의를 여실히 드러내주는 것입니다.
3. 기근이 물러감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세상 백성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이며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이방인들까지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이방인들과의 약속을 해 놓고 지키지 않고 약소민족이라고 짓밟고 억울하게 대할 때 하나님은 결코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소국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도, 예수님이 그 땅에 오신 이유도, 세상에서 별 볼일이 없는 저와 여러분을 택하시고 예수 믿게 하시고 구원하여 잘 살게 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사울의 자손 일곱 사람을 처형하는 것은 역시 잔인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책임한 조약과 그것을 사울왕이 지키지 않고 억울한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 그 후손이 그대로 당함으로 생명은 생명으로만이 대속 되어짐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후 삼년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다가 그 즉시 하늘에서 비가 내렸습니다.
(삼하 21:10) 아야의 딸 리스바가 굵은 베를 가져다가 자기를 위하여 반석 위에 펴고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 시체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한지라
뿐만 아니라 사람이 고난을 당하여 하나님께 아무리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던 기도가 다시 응답되었습니다.
(삼하 21:14)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 아비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대로 좇아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니라
이처럼 사울 왕 때 죽임을 당한 기브온 사람들의 억울함을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으시고 다윗 세대에 와서 그것을 속죄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유리하게 하시는 민족 신이 아니라 세계 만민의 하나님이심을 깨우쳐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빈손으로 태어나지만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은 하나님의 돌보시는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인간들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더욱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아닌 그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주리고 목마른 기근의 고통을 허락하신 때가 종종 있으셨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오늘 말씀의 주 인공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도 바로 그와 같은 맥락에서 다윗이 저지른 죄가 아니라 사울이 범한 죄였지만 그것은 기브온과 이스라엘 공동체와 맺은 언약을 어긴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공동체와 개인이 공동적인 책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삼년 동안 계속해서 기근이 찾아왔다는 것은 죽음에 가까운 고난입니다. 그 원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였거나 제사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다만 과거에 사울 왕이 히틀러처럼 민족주의에 빠져 변질된 애국심으로 자기 나라 땅에 살고 있는 이방인 기브온 족속을 학살한 것이 결과적으로 자기 백성들을 더 고통에 빠뜨리게 된 것입니다.
결 론
오늘 성경에서 삼년 연속된 기근의 원인은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언약을 지키지 않은 불신실한 죄 때문이었습니다.
만약에 오늘도 그 같은 원칙이 적용되어진다면 해마다 기근이 임해야 하고, 조상의 죄로 인해 후손된 우리들이 대속의 죽음을 죽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들에게 그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까닭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요?
다윗처럼 우리의 후손에게 차압을 붙이시기 위함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원칙을 위에게 적용하신다면 단 한사람도 무사할 사람이 없고 평생 고통을 겪으며 살아도 그 빚을 다 갚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기근보다 더 두려운 문제는 곧 죽음과 심판입니다. 그에 대한 대안이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최선의 대안이 되어주셔서 우리가 살게 되었고, 구원받았습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은 바로 우리에가 죄로 말미암아 당하게 되는 고통을 우리가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 때문에 우리가 이처럼 평화롭게 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닮아 공동체 속에서 대속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좋은 일에는 함께 라고 말하지만 책임을 져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내 책임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최소한 우리라고 말하는 곳에 영광의 몫만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책임도 분담해야함을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커지고 강해질수록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인간과의 관계, 심지어 불신자와의 관계에서도 신실하게 지켜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세계 역사를 보십시오. 그러한 책임 의식을 가지고 사는 민족을 강대국이 되게 하시고, 그러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성공하는 지도자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 역사의 키를 잡고 계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속죄제와 속건제
삼하 21장 1~9절 / 조용기목사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중 속죄제와 속건제가 있었습니다. 속죄제는 사람이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을 속하는 것입니다. 속건제는 하나님 앞에 범죄했을 뿐 아니라 이웃에게도 정신적, 물질적 상처를 입혔을 때 하나님께 속죄하고 이웃에게도 보상을 겸하는 제사입니다.
마태복음 5장 23∼24절에서 예수님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 복을 받기 전에 내 이웃과 잘못된 일이 있으면 그것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예물을 드려야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다윗 시대의 속죄와 보상
다윗이 왕으로 시무할 때 극심한 흉년이 3년이나 계속되어 국민 전체가 기근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우물이 말라 물이 없고 짐승떼들이 죽었으며 사람들은 기근에 방황하여 나라를 떠나 이웃 나라에 가서 살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사무엘하 21장 1절에 “다윗의 시대에 연부년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점령할 때 여호수아와 족장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브온 사람을 죽이지 않기로 언약하고 맹세를 했는데, 사울 왕이 이스라엘과 유다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 그 나라에 있는 기브온 백성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하는 가나안의 칠 족을 멸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브온 거민은 히위 족속으로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먼 곳에 사는 것처럼 속이고 여호수아에게 와서 화친을 전했습니다. 이 때 여호수아와 장로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과 화친할 것을 약조했습니다. 사흘 후 여호수아와 장로들은 자신들이 속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속은 것을 뒤늦게 알았지만 이미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조를 한 것이므로 그 언약을 폐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점령했을 때 히위 족속인 기브온 거민들은 멸하지 않고 그들의 성막에서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종으로 삼았습니다. 여호수아 9장 15절에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맹세한 것은 절대로 깨뜨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울왕 때 여호수아와 그 족장들이 기브온 족속을 죽이지 않고 화친할 것을 맹세하고 언약한 것을 깨뜨리고 일방적으로 기브온 백성들을 멸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고 멸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 시대에 온 이스라엘에 연부년 삼 년 기근이 왔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속죄해야 할지를 물었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것은 하나님께 회개하면 되지만 이웃에게 범죄한 것은 이웃에게 속량해야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해 주시고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기브온 백성들은 “우리는 이스라엘에 사는 외부 민족이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일 권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원한을 풀기 위해서는 사울 왕의 직계 자손 중 일곱 명을 내주면 사울의 도시인 기브온에 그들을 목매달아 우리의 원한을 갚고 이스라엘을 위해 복을 빌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다윗은 할 수 없이 사울 자손 중에 일곱 명의 남자를 붙잡아 기브온 백성들에게 내어 주었습니다. 기브온 백성들은 다윗이 내어 준 일곱 명의 목을 매달아 자신들의 원한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늘이 비를 쏟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회개와 보상은 별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하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를 받아 의로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범죄하거나 이웃에게 해를 끼치거나 심신에 고통을 가했을 때, 혹은 이웃의 물건을 사기치거나 훔치거나 하면 이러한 것들은 우선 하나님 앞에 범죄일 뿐 아니라 이웃에게도 범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에게 보상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이 옵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범죄한 것을 하나님께 회개하면 우리의 죄는 용서 받되,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께 축복을 받으려면 범죄한 이웃에게 보상을 해야 됩니다. 교회의 장로 한 사람이 여러 장로들의 돈을 사기해서 미국으로 도망쳤습니다. 그 장로에게 보증을 선 분들이 가슴을 쳤습니다. 상당한 거액의 돈을 가지고 도망을 쳤는데, 세월이 흘러 그가 미국에서 크게 회개하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주의 종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고 신학교에 들어가 주의 종이 되었을지라도 그것으로는 절대로 하나님께 축복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회개하여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해도 반드시 보상을 해야 합니다. 그가 사기를 친 그 액수를 당사자들에게 보상하지 않는다면 그는 아무리 주의 종이 되어 교회를 개척할지라도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속건제입니다.
2.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의 속죄제물인 동시에 속건제물이 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우리의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박힐 정도로 흉악합니다. 이번에 김선일씨가 이라크에서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참수 당한 고통을 입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악하면 살아있는 사람의 목을 자를 수 있습니까? 사람의 마음이 가증스럽고 부패하기 짝이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아무리 부패하고 가증해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 이후로 죄로써 부패한 사람의 마음이 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엄청나고 무서운 죄는 아무리 수양과 도덕을 닦아도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들이 직접 와서 우리의 이러한 엄청난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몸을 찢고 피를 쏟아서 우리의 죄를 씻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야 비로소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2절에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말씀하셨고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 요한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일서 3장 4∼5절에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가 우리 죄를 없이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12절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말씀하고있습니다.
미국의 선교사였던 보먼 박사는 인도 캘커타의 나환자 수용소 안에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준공식이있던 날 82세의 한 인도 노인이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을 하고 앞으로 나왔습니다. 박사는 그 노인에게 “왜 그 나이에 예수님을 믿기로 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노인은 “지금까지 나는 많은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나를 위해 죽으신 신은 한 분도 만나보지 못했는데, 예수님 만이 나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우리의 속죄제물이 되셔서 우리 모든 죄를 대신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 십자가 공로를 통해 값없이 죄사함을 받고 용서받은 의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속죄제물이 되실 뿐 아니라 속건제물도 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범죄해서 하나님을 거스렸을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에 손해를 끼쳤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저주가 임하게 되어 가시와 엉겅퀴가 났습니다. 모든 만물은 병들고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직접 뜻을 거스렸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에 손해를 끼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손해에 대한 배상으로 예수님의 육체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입니다. 그 흘린 피는 죄악을 속하는 속죄제물의 피였지만, 그 못이 양손에 박히고 창으로 옆구리가 찔린 것은 속건제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체로 고난을 당하시므로 아담과 하와를 통해 입은 이 세상의 모든 손해와 상처가 속량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속죄제물이 되시면서 동시에 속건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레위기 6장 1∼7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치 못하여 범죄하되 곧 남의 물건을 맡거나 전당 잡거나 강도질하거나 늑봉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남의 잃은 물건을 얻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등 사람이 이 모든 일 중에 하나라도 행하여 범죄하면 이는 죄를 범하였고 죄가 있는 자니 그 빼앗은 것이나 늑봉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얻은 유실물이나 무릇 그 거짓 맹세한 물건을 돌려보내되 곧 그 본물에 오분 일을 더하여 돌려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그는 또 그 속건제를 여호와께 가져올지니 곧 너의 지정한 가치대로 떼 중 흠 없는 숫양을 속건제물을 위하여 제사장에게로 끌어 올 것이요 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는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는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받지만, 즉 예수께서 친히 속죄제물이 되시었지만 이웃과의 허물로 인한 죄는 속건제물을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상처를 입히고 이웃의 재물을 늑탈하거나 손실을 끼친 것은 속건제물 즉, 제물을 하나님께 드려 죄사함을 받을 뿐 아니라 보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보상하지 않으면 영혼은 구원받아 천국으로 갈 것이지만 절대로 축복 받지는 못합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다. 보상이 따라야 온전한 용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보상제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사회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제도입니다. 옛날 우리나라 고조선시대 팔조권법이 있어서 남에게 상해를 입힌 사람은 곡물로써 갚아야 했습니다. 남의 물건을 훔친 사람은 노비로 삼았고, 만일 속죄하고자 할 때는 50만전을 내야 했습니다. 부여에서는 1척 12법이 있어서 남의 물건을 훔친 사람은 그 훔친 물건의 12배를 배상해야 했습니다. 고구려에서도 도둑질한 물건의 12배를 물어야 했고 만약 배상을 안하면 자녀를 노비로 삼았습니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고대 로마에도 12표법이 있어서 도둑질한 것은 두 배로 배상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와같이 이웃에게 끼친 손해를 보상하는 것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행해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속건제입니다. 속죄제는 하나님께 범죄한 것으로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를 받고 의로움을 얻습니다. 이웃에게 손해를 끼치고 물질적, 정신적으로 해를 끼친 것은 역시 보상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용서 받을 뿐 아니라 이웃에 대한 우리의 허물을 보상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다윗의 시대에 연부년 삼 년 기근이 온 것은 그들이 기브온 민족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브온 민족이 원하는대로 보상하지 않고는 아무리 기도해도 이스라엘에 가뭄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보상했을 때 기도가 응답되는 것입니다.
3.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대속하심
성경에는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인해 죽었고 그 다음, 이 세상에서 수 많은 허물을 지었기 때문에 그 허물로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장면을 보면, 그가 죽어서 썩은 냄새가 나는데 나흘만에 예수께서 그의 무덤가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가 있는 동굴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씀하셨고 이에 죽었던 나사로가 나왔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썩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 피로 우리의 영혼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고 구원 받은 것을 상징합니다. 그 때 나사로는 살아 나왔는데 수의를 입은 채였습니다. 그가 죽음에서 다시 생명을 얻어 살기는 살았지만 아직도 수의를 입고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아나는 것과 풀어놓아 다니는 것과는 별개입니다. 살리는 것은 예수님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풀어놓아 다니게 하는 것은 사람들이 해야될 일입니다. 우리 영혼은 죄로써 죽었으나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허물이 보상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살았으나 허물을 풀어 놓아야 합니다. 이웃에게 허물진 누더기를 벗어 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많은 사람이 영혼은 구원 받았으나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 받지 못하고 축복을 받지 못하면 ‘나는 왜 이렇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그것은 영혼은 예수님으로 인해 살아났으나 이웃간의 허물과 누더기는 그대로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9장 8절에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리고에 있는 세관장 삭개오는 많은 사람에게 세금을 포탈하고 로마에 바칠 세금 이외의 세금을 거두어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기꾼이요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올 때 삭개오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삭개오의 생애 속에 큰 변화가 왔습니다. 그는 속죄제물 뿐 아니라 속건제를 드렸습니다. 그는 주께 “주여? 내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남에게 토색한 제물은 사 배로 갚겠나이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임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는 그저 예수님을 믿기만 해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토색한 것을 갚기 전에는 절대로 축복 받지는 못합니다.
마가복음 11장 25절에서 예수님은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23∼24절에서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는 것과 축복 받는 것은 별개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께서 우리의 속죄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보혈에 의지해서 받습니다. 그러나 축복은 속건제물을 드려야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해서 용서받을 뿐 아니라 내가 이웃에게 잘못한 것을 갚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청산해야 하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내가 남의 것을 거두어 먹고 난 다음 아무리 기도원으로 가서 일주일 금식하며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그 영혼은 불길 가운데 구원을 받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축복은 받을 수 없습니다.
유명한 전도자였던 영국의 빌리 선데이는 14세부터 학교에서 급사로 일했습니다. 하루는 그가 월급 25달러를 받아 그 수표를 은행에서 바꾸는데 은행직원의 실수로 그만 40달러 지폐를 받았습니다. 그는 당시 모른체 하고 받아넣고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얼마가 지나자 곧 양심에 가책이 생겨 친구에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오히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그것을 신나게 쓰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용기를 얻어 빌리 선데이는 그 나머지 돈을 가지고 평생 처음으로 양복 한 벌을 사입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그는 살아가는 동안 내내 마음속에 양심의 가책이 생겼습니다. 그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는 기도만 하면 자신이 떼먹은 15달러가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모르고 자신의 실수도 아닌 은행직원의 실수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못 보았지만 내가 봤다. 너는 그 15달러를 갚기 전에는 어떤 기도를 해도 응답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괴로워 결국 은행직원에게 회개하는 편지를 쓰고 15달러를 동봉해 갚았습니다. 이후 그는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고 영국과 세계를 뒤흔드는 위대한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허물의 수의를 입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죽었던 영혼이 무덤에서 살았으나 아직도 여전히 냄새나는 수의를 입고 다닙니다. 허물을 입고 다닙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은 살았으나 냄새나는 수의를 입고 있는 이상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사람 앞에 설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계속 허물의 수의를 입고 사는 사람들은 마귀의 참소를 당합니다. 그가 아직도 썩은 옷을 입고 있으니까 마귀가 가만히 둘리가 없습니다. 마귀의 참소를 받고 있으면서 그 사람의 삶이 복될 수 없습니다. 허물의 수의를 벗기 전에는 마귀의 참소가 떠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자신의 죄로 인해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허물진 누더기를 벗어 놓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이웃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 죄와 허물을 보상할 때 비로소 우리는 누더기를 벗고 주 안에서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누더기를 벗고 주 안에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누더기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되기 때문에 그럴 땐 기도를 해도 힘이 없습니다. 이사야 1장 15절에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또한 이사야 59장 1∼2절에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907년 길선주 목사님이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실 때였습니다. 매일 1500여 명의 군중이 모였는데 목사님이 아무리 열렬한 마음과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말씀을 증거해도 한 사람도 감화 감동 받지 않고 ‘아멘’ 혹은 ‘할렐루야’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집회 가운데 죄를 회개하는 사람이나 구원 받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하도 답답해서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 나를 버리셨나이까, 왜 이리 부르짖고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까?”라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 가운데 ‘네가 사기쳤던 죄를 회개하라’는 음성을 주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난 과거 행적을 곰곰이 살폈습니다. 예전에 그의 친구가 죽으면서 그의 재산을 정리해서 아내에게 돈으로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친구 재산 목록을 받아 그것을 처리해서 친구의 부인에게 돌려주기 전에 거기서 100원을 떼었습니다. 그리고 친구가 자신에게 맡긴 것으로 아무도 모를 것이라 여기고 이후에 그 일을 잊어버렸습니다. 이게 바로 그의 누더기였습니다. 그 누더기를 입고 강단에서 아무리 외친들 사람들은 그가 입은 누더기로 인해 아무리 고함치며 설교를 해도 은혜가 안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생수가 불어와야 하는데, 그가 고함을 아무리 쳐도 성령의 생수는 없고 그저 구린내만 나는 것입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비로소 그의 설교에 은혜가 없는 것을 알고 그 다음 강단에 서서 자신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고 회개하며 땅을 치고 울었습니다. 그러자 성령이 임하여 회개 운동이 모든 사람들에게로 임했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그 이튿날 100원을 들고 그 친구의 부인에게 가서 회개하고 돈을 갚았습니다. 그러자 성도들 가운데 너도 나도 일어나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고 그 허물을 갚아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도적질 한 사람은 그것을 도로 갚아주고 남에게 상해를 끼친 사람은 그것을 회개하고 자복 하는 등 평양 장대현교회에는 굉장한 부흥이 일어나 1907년 이 교회를 중심으로 한국 교회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한국교회 부흥은 바로 길선주 목사님의 회개로 말미암아 일어났던 것입니다.
허물의 수의를 입고 있으면 하나님과 담이 막히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보상이 따르는 온전한 속건제를 드려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병자를 위해 기도할 때 병을 고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는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잘못한 것을 회개하고 마음으로 용서하고 그 허물을 갚으면 그 다음, 하나님께 드린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 묶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또한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보상의 법칙에 따른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8절에서 예수님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은 죄는 사람과 사람사이에 풀어야 합니다. 서로 용서하고 용서 받고 풀면 하늘에서도 풀려서 그 때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서 풀지 아니하면 하늘에서도 응답이 오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5장 15∼16절에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중에 속죄제와 속건제를 잘 이해해야 원만한 축복받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원죄는 아담과 하와를 통해 받은 것으로 이는 오직 믿음으로 씻어지지만,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지은 허물과 죄는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받음과 동시에 그 허물을 벗는 실천이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지은 허물을 고백하고 그 허물을 보상하고 갚아야 합니다. 청산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축복받는다는 것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구원 받는 것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 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주께 나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면 값없이 용서와 의와 구원을 받습니다. 이는 속죄제물입니다. 그 다음, 속건제물은 우리 각자의 보상이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축복 받는 것은 매우 힘든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내 자신을 죽여야 됩니다. 나를 깨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웃에게 지은 죄와 허물을 고백하고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아내를 괴롭혔으면 아내에게 용서받아야 하고 부모에게 불효했으면 불효한 죄를 회개하고 용서 받아야 합니다. 이웃에 상해를 끼쳤으면 상해 끼친 것을 용서 받아야 합니다. 물건을 훔쳤으면 갚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과 친밀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이웃에게 지은 허물을 보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에 3년 동안의 기근을 멈추시고 비를 내리셨습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할 때 우리의 생활에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고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기 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속죄제물도 되시고 속건제물도 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어 하나님 앞에 선 것을 기뻐하지만, 우리가 우리 삶 속에 기근이 다가오고 우리 영혼과 생활에 기근이 다가오고 행복하지 못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죄와 허물에 대한 보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을 압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다시 한 번 우리 가슴에 손을 얹고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 지은 죄와 허물에 대해 속건제물을 드리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천국에 갈 뿐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늘이 비를 내리고 땅이 열매를 맺는 기적을 가져오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기브온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준 다윗
삼하 21:1-9 / 우인택 목사
사무엘하는 1-10장, 11-20장, 21-24장,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1-10장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과정과 업적에 대하여, 11-20장은 다윗의 범죄와 그로 말미암아 겪게 된 하나님의 징계와 시련에 대하여, 그리고 21-24장은 계속 되어진 역사를 연속해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앞부분의 역사에서 누락된 중요한 사건들을 부록처럼 추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에 있었던 3년 기근과 기브온 사람들이 사울의 후손을 처형한 사건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먼저 1절에,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겼기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여 기름 부어 세운 다윗 왕의 통치시대에 3년이나 기근이 있었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생각에 따라 하나님이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합당하게 여기시지 않는다는 의미로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재앙의 원인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묻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죄’로 인함이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반드시 진멸하라”고 명하셨던 가나안 족속 중 일부였던 기브온 사람들의 원한을 갚아 주시기 위해 선민 이스라엘을 징계하신 것은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이같은 징계를 내리신 것은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한 것은 그들의 조상인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서 했던 맹세를 저버린 악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언약을 쉽게 생각하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일방적으로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잘 아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고 그들과는 어떤 언약도 하지 말고 그들을 완전히 진멸하라고 단단히 명령하셨습니다(신 7:1-2).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 데서 온 사람들로 위장한 기브온 사람들에게 속아 그들과 언약을 맺고 말았습니다(수 9:3-21). 하지만 그 언약은 속아서 맺은 언약이었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이었기에 이미 맺은 이상, 어떤 경우에도 지켜야 했습니다. 만일 그 언약을 어긴다면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2절에 기록된 것처럼, 민족적인 배타성이 강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이방인인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하는 악한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죄는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언약과 공의가 무너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사울이 이것을 회개할 리는 만무했습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을 떠난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시대에 이스라엘에 3년간이나 기근의 재앙이 임하게 하심으로 다윗과 백성들이 그들 가운데 있는 죄를 깨달아 그것을 해결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떠한 시련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언가 해결하지 않은 죄가 있기 때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에게 찾아오는 모든 시련을 죄의 결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욥의 경우처럼, 어떤 특별한 죄가 없이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인해 시련이 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의 그릇된 행위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 시련이 오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를 힘입어 산다고 하지만 은연중에 이전의 죄악 된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을 반복하여 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양심이 무뎌져 그러한 죄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방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할 경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여 죄를 생각나게 하시고 그것을 통해 죄 문제를 해결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만일, 알 수 없는 시련이 계속된다면 여러분의 삶을 곰곰이 돌아보아 무언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질 만한 일이 없는가, 하나님 앞에서 아직 해결하지 못한 죄는 없는지 살피시기 바랍니다(전 7:14). 그리고 만일 해결하지 않은 죄가 생각난다면, 그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철저한 회개만이 당면한 시련을 속히 극복할 수 있는 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의 죄를 결코 용납하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해결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면 징계에 의한 시련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고도 회개하지 않고 그대로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피하지 못했던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해 줍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지금 나에게 주어진 모든 시련과 근심 걱정 염려들이 나의 죄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닌지 살피시고, 죄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하나님의 평안을 다시 회복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지금의 고난을 죄 문제가 아니라 나를 단련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응답을 받으셨다면, 더욱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크신 일을 감당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3절에,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기브온 사람들은 4절에서 “사울과 그의 집과 우리 사이의 문제는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며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는 문제도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물질적인 보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원한을 갚아 달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울의 악행으로 인해 파기되었던 이스라엘과 자신들과의 언약이 바로 세워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5-6절에, 자기 족속을 죽인 사울의 자손 가운데서 일곱 사람을 내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족속을 죽인 사울의 자손들을 죽임으로써 사울로 인해 깨어진 언약이 새롭게 회복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기브온 사람들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갚았다면 그 원한은 계속 돌고 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깨어진 언약이 회복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를 위해 필연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속죄의 제물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속죄의 제물을 바치므로 깨어졌던 이스라엘과 기브온의 언약이 회복되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죗값은 은금으로 갚을 수 없습니다, 오직 목숨으로 갚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갚아 주셨기에 잠시 실수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더라도 우리의 목숨으로 갚지 않고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여 회개함으로써 언약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사울의 죄악과 그의 후손들의 희생을 보면서 죄의 삯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다시 돌아보며, 죄로부터 구원받은 자로서 믿음의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7-9절에, 다윗은 요나단과의 맹세를 생각하여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속죄 제물 대상에서 제외하고 사울의 두 아들과 사울의 외손자 다섯 아들을 붙잡아 기브온 사람들에게 주어 그들의 목숨으로 죗값을 갚게 했습니다. 그러자 14절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서 하나님께서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를 심판하시되 약속을 소중하게 여기고,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 그것을 즉시 바로잡는 공동체를 축복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사람 간의 약속이라고 해도 그것이 온전히 지켜지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약속을 고의로 어기고 잘 지키지 않는 사회는 거짓되고 부패한 사회로서 그러한 사회에서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 간의 약속이라도 제대로 지키지 않을 때는 그들이 더이상 부패하지 않도록 심판의 회초리를 드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속을 신중하게 하고, 이미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약속을 잘 지켜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축복도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나는 약속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는지, 또, 약속을 잘 지키며 살고 있는지 돌아보고,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킬 수 있도록 믿음으로 결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사울 왕은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의 후손 일곱 명이 희생되는 아픔이 있게 했습니다. 저희도 알게, 모르게 사울처럼 행할 때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다윗이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하여 므비보셋을 살려준 것처럼, 예수님의 보혈의 언약으로 인해 회개하는 저희를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러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작은 약속이라도 소중하게 여기며 반드시 지키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신 화해
삼하 21장 1~14절 / 콜럼버스한인교회
여러분은 약속을 잘 지키십니까? 사업을 할 때의 계약을 비롯해서, 직장에 들어갈 때 계약서를 쓰고, 집을 사거나 렌트할 때 계약서를 쓰는 것이 다 약속입니다. 그런 법적 계약뿐 아니라 우리끼리 어디서 몇 시에 만나자고 하는 것도 약속이고, 예배 시간도 약속입니다. 특히 어린 자녀가 있는 경우 뭔가를 사달라고 할 때 “말 잘 들으면 사줄게.”라고 하는 것도 약속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약속을 많이 하는데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약속을 잘 지키십니까? 여기 계신 여러분 대부분은 아마 그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럼, 나는 약속을 잘 지키지.’
그렇다면 5년 전 했던 약속을 잘 지키고 계십니까? 50년 전에 했던 약속은 어떻습니까? ‘난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는데.’라고 할 분들도 있습니다. 500년 전에 했던 약속은 지키십니까? 그때는 당연히 우리 중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상님들이 했던 약속까지 다 조사해서 안 지켰으면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누가 500년 전에 했던 약속을 지키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500년 전에 한 약속까지 다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에 500년도 하루 같이 보십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는 500년 전 여호수아와 기브온 족속이 맺은 평화 조약을 사울 왕이 깨뜨림으로써 하나님이 기근을 내리신 내용이 나옵니다. 약속을 안 지키니까 징계하셨습니다.
5년도 50년도 아니고 무려 500년 정도 전에, 그것도 속아서 맺은 평화 조약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지키라 하십니다.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것이 바로 ‘신실함’(faithfulness)입니다. 그런 면에 있어 우리는 사실 신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하신 것을 500년 아니라 5천 년이 지나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에게 엄청난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확신을 어떻게 갖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 즉 한 번 약속했으면 반드시 지키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너 왜 여기 들어와?’라고 하실 때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셔서 들어갑니다.’라고 하니까 ‘그건 2천 년 전 이야기이고 지금은 달라졌지.’라고 하시면 큰일입니다. 하지만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약속을 지켜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절대 그 효력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깨닫고 믿으면 자신의 말씀이 됩니다.
둘째, 과거의 청산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무리해서 잘못 청산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게 됩니다.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미래를 향해 최선을 다해야 하며,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하면 오히려 심판받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1. 기근의 원인(1~2절)
다윗이 사울이나 그 후손들을 죽이고 왕이 된 것은 아니지만, 사울 집안과의 관계가 다윗이 통치하는 내내 껄끄러웠습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지난번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피난 가던 다윗에 대한 시므이의 저주 내용입니다. 시므이는 다윗을 향해 ‘살인자여!’라고 하며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된 살인자라는 식으로 저주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지만 당시 많은 사람들, 특히 사울의 지파인 베냐민 지파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정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하고 다시 왕이 되어 귀환한 다윗은 시므이를 벌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압살롬의 반란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국론이 분열되는 상황에서 시므이에게 벌을 내리지 않은 것이 진정한 용서라기보다는 정치적 필요가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죽기 전에 아들 솔로몬에게 시므이를 처리하라고 유언한 것을 보면 확실해집니다.
이 모든 것은 다윗과 사울의 집안 사이에, 나아가 유다 지파와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들 사이에 온전한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나중에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 나라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완전히 나뉘어 망할 때까지 그것을 유지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열두 지파가 정의와 생명을 위해 연합할 때 이 땅에 성취되는 것인데, 지파들간에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니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데 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께 반역만 하다가 망하는 것을 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뿌리 깊은 분열과 갈등의 문제를 다룹니다. 인간은 이렇게 몇천 년 전뿐 아니라 지금도 끊임없는 분열과 갈등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라와 나라 간에, 민족과 민족 간에, 심지어 같은 민족이나 나라 안에서, 또 같은 진영 안에서도 분열하고 갈등합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본성이 분열과 갈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서가 유다 지파와 나머지 지파들의 갈등이 표면화된 세바의 반역을 이야기한 다음에 다윗과 사울의 집안 사이의 갈등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결국 다윗의 통치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아무리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 믿음의 사람, 그리고 위대한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실수도 많이 하고 잘못도 많이 저지른 사람이었다는 것, 그의 통치에는 한계에 있었다는 것, 그래서 진정한 소망은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서로 다른 지파와 민족과 국가들 사이의 용서와 이해와 평화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1절)
이 이야기는 다윗의 통치 기간 중 어느 시점에 발생한 사건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많은 구약학자들이 이 본문을 주석하면서, 사실은 이 내용이 9장 전후에 일어난 일이라고 봅니다. 9장에서 다윗이 자기의 사랑하는 친구였던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마치 왕자들 중 하나처럼 거두고 상에서 먹게 해준 사건 이후에 일어난 일로 봅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 때문에 사무엘하의 뒷부분에 놓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시간적 배경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인 배경입니다. 즉, 기근이 일어났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은 정기적으로 기근을 겪은 나라입니다. 고대에는 비가 안 오면 죽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땅은 건기와 우기가 아주 뚜렷합니다. 늦가을부터 봄까지는 우기이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건기로 아주 날씨가 좋습니다. 날씨가 로스엔젤레스 쪽과 아주 비슷합니다.
적어도 다윗 때까지 이스라엘에는 강력한 중앙 정부가 없었습니다. 첫 번째 왕이 사울이고 그다음이 다윗인데, 사울 때는 사사시대에서 넘어와 약간 과도기였습니다. 그래서 사울 정권은 강력한 중앙 정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가뭄이나 전염병과 같은 재해를 대비한 국가적 체계가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해만 가뭄이 들어도 많은 사람이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던 겁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3년이나 연속으로 가뭄이 들었다면 죽음의 위기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자연재해를 넘어,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재앙입니다. 실제로 가뭄이나 지진이나 전염병은 고대 사회에서 한 나라를 무너뜨리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런 상황에서 왕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다윗은 회의를 소집하고 장관들 불러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국무회의를 한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이 말을 풀어서 보면 ‘주님의 얼굴을 구했다.’라는 겁니다.
이것은 3년 동안 기근이 계속되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구했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 제발 저희에게 비를 내려주십시오.’라고 간구했을 것입니다. 기근이 든 첫해부터 다윗은 ‘왜 기근이 들었습니까? 그 원인을 알려주십시오.’ 하고 하나님께 원인을 여쭤보며 간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기근이 다윗의 통치 중 어느 때에 발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윗은 항상 하나님께 여쭤보며 모든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때도 하나님께 여쭤보며 나아갑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라고 되어 있는데, 오늘 본문은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스라엘의 기근을 해결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내용이 아니라, 통치자이고 왕인 다윗의 한계를 설명해주는 내용입니다.
다윗은 이상적인 왕으로서 지금 이스라엘 국기 안에 그려진 별도 다윗의 별이고, 최고의 왕이었고, 메시야의 조상으로서 그의 후손 가운데 예수님이 오실 정도로 아주 훌륭하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그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정치적인 결정도 많았고, 그런 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해친 적도 많았고, 여러 가지 한계가 있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윗을 우상화하지 말라는 겁니다. 다윗을 영웅시하지 말라는 겁니다. 다윗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다윗 위에 계시며 그를 사용하신 하나님이 위대하신 것이지, 다윗을 우상이나 영웅으로 만들지 말라는 메시지가 여기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행동한 사람은 다윗이 아니라 리스바라는,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을 통해 오히려 다윗이 귀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도 오늘 우리처럼 자기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종종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할 때가 있었습니다. 다윗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너무나 많이 그랬습니다. 자기가 악을 행하는 것에 동조하는 사람을 향해 “하나님의 복을 받아라.”라고 했고, 일이 잘 풀리면 “하나님이 도우셨다.”라고 했습니다. 다윗도 자기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행동을 종종 하나님의 뜻이라는 식으로 한 적이 있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그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빌려서 다윗은 사울과 그 가문에 3년 기근의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사울 집안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났다고 하며, 그 책임을 그 집안에 돌리는 겁니다. 다윗에 따르면 기근의 원인은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과의 화친 맹세(수 9:15-27)를 어기고 그들을 죽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그들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물으니라” (2절)
여러 구약학자들이 말하기를,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핍박하거나 죽였다는 기록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성경을 읽어보면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기록은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미드라시 전통에 의하면 성경에 그것이 있다고 합니다. 어디에 있습니까?
오래전 다윗이 젊은 날 너무 인기를 끄니까 사울이 질투해서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자기 사위인데도 죽이려 해서 다윗이 도망갔는데, 급하게 도망하느라 무기도 없이 갔다가 제사장 아히멜렉이 있는 놉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거기에 자기가 죽였던 블레셋 장수 골리앗의 칼이 보관되어 있었고 그것을 받아서 들고 떠났습니다.
그런 일 때문에 아히멜렉을 비롯하여 놉의 모든 제사장들을 처형합니다. 도엑이라는 에돔 사람의 손으로 죽일 때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멜렉이 유일하게 도망을 쳐 다윗에게 와서 나중에 제사장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것은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그날 그 자리에 기브온 사람들도 있었고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다윗 때는 대략 BC 1000년 정도이고, 모세와 여호수아 때는 BC 1500년경입니다.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가 정복 전쟁을 벌여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때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면서 화친을 맺으려 시도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멀리서 온 것처럼 속여서 낡은 옷을 입고 음식도 곰팡이가 난 것을 가지고 가서 보여주며 멀리서 왔으니 화친을 맺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여쭤보지도 않고 평화 조약을 덜컥 맺었습니다.
얼마 후 알고 보니 그들은 바로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언약을 맺었기 때문에 깰 수가 없었고 그들을 정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하나님의 제단을 위해 나무를 패며 물 긷는 자로 살도록 합니다.
그때 놉 성소에도 기브온 사람들이 제사장들을 섬기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울이 그들을 죽일 때 거기 있던 기브온 사람들도 같이 죽었다는 겁니다.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유대인의 전승에 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다윗에게 복수를 위해 사울의 후손 일곱 명을 내달라고 했는데, 거기서 죽은 기브온 사람들이 일곱 명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직접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사실 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제단 봉사자였기 때문에 사울의 제사장 학살 때 함께 죽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하지만,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 죽은 기브온인이 일곱 명이었기 때문에 다윗에게 일곱 명을 요구했다는 것도 약간 일리가 있는 것 같지만 정식으로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왕이 신의 이름으로 맺은 맹세를 깰 때 국가적 재앙이 일어난다는 것이 고대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브온과 맺은 맹세를 어긴 것이 사실이라면, 3년 기근이라는 국가적 재앙은 다윗에게 사울 집안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기근의 원인이 사울 집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맹세를 어기고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이라는 말은 당시 사람들에게 상당히 공감을 얻었을 것이고, 그래서 사울 집안의 나머지 사람들을 제거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어진 맹세에 대한 다윗의 열심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아니라 안타깝게도 정치적인 의도가 분명히 들어가 있었다는 것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다윗이 너무하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그도 여러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후손을 죽음에 넘겨줄 때 그것은 다른 하나님의 맹세를 어기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요나단과 맹세를 했는데, 그때 요나단은 다윗에게 “너의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삼상 20:15) 하고 부탁하며 언약을 맺었습니다.
다윗의 맹세는 직접적으로 요나단과 그 후손들에게만 해당하지만, 요나단의 의도는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자신을 포함한 집안사람들 모두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고대에는 왕위를 빼앗은 왕이 이전 왕조 사람들을 살려두는 것은 정치적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대부분 왕권을 잡으면 이전 왕조 사람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나단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윗에게 그러지 않도록 맹세하게 한 것입니다.
다윗이 그 맹세를 넓게 해석하여 사울의 다른 후손들도 살려 주었어야 했는데, 기브온 사람들이 ‘여호와의 선택된 자’라고 사울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다윗의 가장 큰 대적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다윗은 사울의 음악치료사이기도 했는데, 사울에게 악한 영이 내릴 때 다윗이 하프를 연주하면 악한 영이 물러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장군으로 나가서 싸우기도 했고, 사위로서 많은 전과를 세운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다윗을 시기해서 죽이려 하니까 다윗이 도망자 시절을 보내게 되었는데, 두 번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하나님이 기름 부은 왕이라는 이유로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왕위를 빼앗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름 부으심으로 왕이 된 것이라면, 쿠데타로 왕위를 빼앗아 왕이 되었으면 이전 왕과 사람들을 죽이지만 그게 아니기 때문에 지금 사울의 자녀들을 죽일 이유는 없습니다. 게다가 이미 사울의 집안은 거의 몰락했기 때문에 죽일 것도 없습니다.
요나단과의 맹세를 넓게 해석해서 그렇게 그들을 용서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의 면모가 아니겠습니까?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살려둡니다. 그런데 므비보셋이 어릴 때 떨어져서 두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 아니라 멀쩡한 사람이었다면, 그래도 다윗이 살려두었을까에 대해 많은 사람이 의심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잘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은 분명히 엄청난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 중 ‘내가 다윗보다 믿음이 더 좋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다른 이면에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라면 정적을 제거할 수 있는 면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100% 선하거나 100% 악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정도 다 선한 면과 악한 면이 있는데, 어느 쪽이 더 드러나느냐 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100% 순수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윗도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왕으로서 또 하나님 앞에서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라면 이렇게 더러운 짓도 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음의 사람으로서 주님을 잘 믿어보려고 합니다. 이 일요일 아침 황금 같은 시간에 왜 이렇게 나와 예배를 드립니까? ‘그래도 내가 하나님께 예배드려야지.’라고 하지만, 다른 이면에는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더러운 것도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섬기지만 동시에 그렇게 악한 면과 죄악 된 면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된다는 게 아니라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결해야 문제도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일부가 아니라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입니다. 여호수아 때 했던 맹세 때문에 이스라엘 영주권을 얻어서 나중에 시민권까지 얻어 그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은 다릅니다. 그런데 맹세를 어긴 것이 사울의 민족주의 정책이라는 것을 여기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자기 왕국을 순혈주의, 오직 단일민족 이스라엘 사람의 국가로 만들려는 열심을 가지고 그 가운데 사는 기브온 사람 같은 이방 민족들을 핍박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에 대한 사울의 정책을 그보다 훨씬 더 과장해서 부풀려 묘사합니다. 사울이 그들을 죽이고자 했다는 것, 즉 완전히 그들을 끊어 버리려 했다고 합니다.
2. 기근에 대한 해결책 (3~9절)
“다윗이 그들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하니” (3절)
이처럼 사울에 대한 반감을 다윗이 상기시킵니다. 기브온 사람들뿐 아니라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 앞에서 사울의 잘못이라는 것을 굉장히 부각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기근 때는 민심이 굉장히 흉흉하기 때문에 책임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이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무엇을 해줄까? 어떻게 속죄할 수 있을까?’라고 묻습니다. ‘속죄’는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그 말속에 피흘림 혹은 희생의 개념이 들어 있는데, 기브온 사람들이 사울의 후손들을 속죄물로 달라고 요청하도록 이끌어가는 겁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기브온 사람들은 다윗이 원하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기브온 사람이 그에게 대답하되 사울과 그의 집과 우리 사이의 문제는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며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는 문제도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하니라 왕이 이르되 너희가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 (4절)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은 피해자였지만, ‘우리에게 돈으로 보상해주십시오.’ 또는 ‘우리도 복수하겠습니다.’라는 대답을 하지 않는 겁니다. 그 문제는 은금에 있지 않다는 것은 자기들이 돈을 원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는 문제도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라는 말도 이민자처럼 이스라엘 가운데 사는 이방 민족으로서 이스라엘 사람을 죽이는 문제는 자기들이 할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뒤로 물러가며 자기들은 복수를 원하지 않는다는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이 그들에게 뭐라고 합니까? “너희들이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라고 합니다. ‘우리는 돈도 복수도 원하지 않습니다.’라는 식으로 말하니까 ‘아니야, 아니야. 뭐든지 이야기해봐. 내가 다 들어줄게.’라고 자꾸 뭔가를 하라고 부추기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까 기브온 사람들은 ‘다윗 왕이 원하는 게 따로 있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의중을 파악하고 새로운 것을 요구합니다.
“5 그들이 왕께 아뢰되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영토 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의 6 자손 일곱 사람을 우리에게 내주소서 여호와께서 택하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겠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내가 내주리라 하니라” (5-6절)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의 단일민족 정책, 순혈주의 정책이 있기는 있었지만 다윗이 그것을 부풀려서 과장하여 말하니까 그 의중을 정확히 알고 ‘그럼 이제는 우리가 보복하겠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울의 자손 중 일곱 남자를 요구합니다.
기브온의 요구대로 사울의 후손을 넘겨주는데, 이것도 다윗의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기근의 원인이 분명히 맹세를 어긴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죄인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세운 언약을 깼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죄도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세운 언약을 깨면 왕이 반드시 그것을 깬 사람에 대한 심판을 집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다윗이 사울의 후손을 이방인 기브온 사람들에게 넘겨주어서 나무에 매달아 죽게 하는 것은 기브온 사람들을 ‘피의 복수자’로 간주하는 것이 됩니다. 형제들을 죽인 살인자에 대해 보복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기브온 사람들이 사울의 집안사람들을 사적으로 죽이도록 허락하는 게 됩니다. 원래 왕인 자기가 사형을 집행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 보복하도록 내어주겠다는 게 아닙니까?
하나님에 대한 범죄는 반드시 왕이 주도권을 가지고 사형을 집행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단순 살인죄라면 개인적으로 보복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지금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범죄라고 말은 해놓고서는, 처형에 있어서는 자기가 하는 게 아니라 일반 살인 사건이나 단순 살인죄처럼 기브온 사람들에게 사적으로 처형하도록 허락해줍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서 사울의 후손들을 매달겠다고 말은 했지만, 그것은 다윗의 귀에 좋게 들리도록 말한 것뿐입니다. 정말 주님을 위해서 한다면 기브온 사람들이 처형하면 안 되고 다윗이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기브온 사람들도 그렇고 다윗도 그렇고, 자기의 의도를 이루기 위해서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인간은 오래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후손들을 직접 죽이면 사람들 보기에 좋지 않기 때문에, 사울에게 원한이 있는 기브온 사람들의 손을 빌려서 그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을 한 다음에 우리아를 죽일 때도 이스라엘과 전쟁하는 암몬 사람들의 손을 빌려서 죽였습니다. 여기도 기브온 사람들의 손을 빌려 사울의 자손들을 죽입니다.
“7 그러나 다윗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 사이에 서로 여호와를 두고 맹세한 것이 있으므로 왕이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아끼고 8 왕이 이에 아야의 딸 리스바에게서 난 자 곧 사울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랍에게서 난 자 곧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붙잡아 9 그들을 기브온 사람의 손에 넘기니 기브온 사람이 그들을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 매어 달매 그들 일곱 사람이 동시에 죽으니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첫날 곧 보리를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 (7-9절)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살려줍니다. 그러나 그가 므비보셋을 살려준 진짜 이유는 요나단과의 언약 때문이 아니라 므비보셋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그랬던 것입니다. 므비보셋은 북동쪽인 길르앗 지방 마길이라는 사람의 집에 꽁꽁 숨어 있어서 찾는 데 오래 걸렸습니다. 나중에 그를 찾고 보니까 그가 다리를 못 쓰는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혀 위협이 안 되기 때문에 살려둔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를 볼 때, 다윗은 기근의 원인이 사울 집안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회로 사울의 후손들을 모두 숙청한 겁니다. 다윗의 주장대로 사울의 범죄가 정말 하나님에 대한 것이라면 재판권이 왕에게 있으니까 자기가 해야 하는데, 기브온 사람들에게 사울 집안의 처형을 맡겼다는 것은 다윗이 기근을 자신의 정적 제거의 도구로 삼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근 자체를 사람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것도 시도하고 저것도 시도했지만 안 되었다고 누가 왕을 비난하겠습니까? 사울의 후손을 죽였지만 기근이 해소되지 않았다고 왕을 비난할 사람은 없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기근이 왔다고 하셨는데, 오래전 죽였는데도 왜 하필 이때 기근이 왔는지부터가 이상합니다.
어쨌든 기근의 원인은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브온 사람들의 원한을 해결하게 해준 다음에도 비는 내리지 않습니다. 기근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진짜 이유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었는지도 사실 의심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뭔가를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이 진짜로 원하셨던 것은 사울의 후손들을 처단하는 게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오히려 그들을 향한 다윗의 용서와 화해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근이 임한 것은 사울의 죄나 사울 집안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은 사울 집안에 대해 여전히 다윗이 품은 채 아직 해결하지 못한 마음의 응어리였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마음속으로 사울 집안과 아직 완전히 화해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다윗의 마음속에 사울에 대한 증오가 있고, 그 집안에 대한 경계심이 남아 있습니다. 혹시라도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항상 불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사울은 오래전에 죽었지만 화해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앞으로 위협이 될 수도 있는 그의 집안을 완전히 해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다윗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결국 다윗의 후손들이 다른 지파들과 화해하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나라가 갈라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온전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결국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됩니다.
결국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기근을 주신 이유는, 사울의 잘못도 어느 정도 있었겠지만, 진짜 이유는 다윗의 마음의 치유였던 것입니다. 다윗이 정말로 화해하기를, 원수 집안이라도 사울의 집안을 품어주고 용서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3. 사울 집안과의 진정한 화해 (10~14절)
“아야의 딸 리스바가 굵은 베를 가져다가 자기를 위하여 바위 위에 펴고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 시체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한지라” (10절)
이 이야기의 결론이 약간 의외인데, 의외의 주인공이 바로 사울의 첩이었던 리스바라는 여인입니다. 리스바는 자신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모셋이 사울의 첫째 딸인 메랍의 다섯 아들과 함께 기브온 사람들에 의해 처형당하자, 아들들의 시체를 거두어 약 6개월 동안이나 산속에서 베옷으로 만든 간이 천막 아래에서 시체들을 지켰습니다. 매장하지 않은 것은 어머니라도 왕의 명령이 없이는 죄수의 시체를 거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리스바는 보리 수확이 시작되는 4월부터 우기가 시작되는 10월까지 약 6개월 동안 산에서 아들들의 시체와 함께 생활한 것입니다. 아무리 아들을 사랑해도 누가 아들 시체를 6개월 동안이나 붙들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시체들이 새나 들짐승에게 훼손당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억울하게 죽은 아들들의 죽음을 항의하고 왕에게 시체를 거둘 수 있도록 호소하기 위함입니다.
“11 이에 아야의 딸 사울의 첩 리스바가 행한 일이 다윗에게 알려지매 12 다윗이 가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서 가져가니 이는 전에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을 길보아에서 죽여 블레셋 사람들이 벧산 거리에 매단 것을 그들이 가만히 가져온 것이라” (11-12절)
리스바가 한 일이 다윗에게 보고되니까 다윗은 그 일곱 명의 유골뿐 아니라 길르앗 야베스에 묻힌 사울과 요나단의 유골을 거두어서 사울의 조상 무덤에 정식으로 매장하도록 명령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을 때 그들을 위해 애가를 짓고 그들의 장례를 국장으로 성대히 치러 주었지만, 정작 그들의 유골은 기브아의 조상 무덤에 매장해 주지 않고 그냥 저쪽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애가를 지은 것과 옷을 찢고 운 것에도 역시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에 대한 장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신과 뼈를 수습해서 조상의 무덤에 안치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을 당시에는 다윗이 아직 그럴만한 정치적 힘이 없었다고 해도, 왕이 된 다음에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 사울과 요나단의 유골을 요단 동편 길르앗 땅에 방치해 두었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왕이 된 후에도 여전히 사울의 집안과 마음속에서 화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바로 그것을 하나님은 해결하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3년 기근을 빌미로 사울의 일곱 후손을 죽인 것도 바로 이런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왕이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었지만, 여전히 우리와 똑같이 부족함이 많은 사람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위대한 그도 그랬다면, 우리는 얼마나 만이 부족합니까?
“13 다윗이 그 곳에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가지고 올라오매 사람들이 그 달려 죽은 자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14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 (13-14절)
여기 보십시오.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 사울 집안 사람들을 처형했을 때 아직 비가 안 내렸습니다. 그런데 모든 유골을 가지고 모든 것을 돌려놓았을 때, 다 거두어 화해했을 때, 바로 그때 비가 내립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오늘 리스바라는 한 여인의 헌신과 눈물의 간구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움직였는지, 특히 어떻게 다윗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를 보게 됩니다. 의외의 인물 리스바가 끝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있던 다윗의 마음을 열게 만들고, 결국 사울의 집안과 완전한 화해를 이루게 했습니다. 그 결과 비가 내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시대에도 리스바 같은 중보자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죄악을 회개하며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이런 중보기도자가 많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다윗이 변화되어 진정한 화해를 이루었고, 그 화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다윗처럼, 아니 다윗보다 훨씬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이웃과 원수까지도 마음에 품고, 해결하지 않은 채 계속 덮어두고 사는 게 아니라 결국 그것을 해결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게 임하는 통로로 쓰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 앞에서 맹세한 일을 생각하여
삼하 21:1-14 / 더온누리교회
음… 너무도 오래된 언약을 깨뜨린 사울의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이시다. 사울은 아모리 족속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남아 있던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한 일이 있었다. 가나안 정복 당시 기브온 사람들은 책략을 써서 이스라엘과 화친하였고 이스라엘은 기브온 사람들과 더불어 공적인 신의로서 평화 조약을 맺었었다(수 9장). 그 조약을 통해 기브온 사람들은 생명은 안전하게 보호되었지만 재산과 자유는 박탈되어 이스라엘의 노예가 되고 그들의 토지는 이스라엘의 소작지가 될 것이라는 것에 동의 하였었다.(수 9:23) 사울은 왕이 된 후 이스라엘의 명예를 위한다는 구실로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업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근절시킬 계획을 세우고 상당수를 학살하였다. 사울의 학살은 명백한 죄였다. 무죄한 그들을 살해함으로서 그들을 보호하겠다고 이스라엘이 신의로 약속한 거룩한 맹세를 깨뜨렸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이 죄로 인해 이스라엘이 극심한 기근을 형벌로 받는다. 다윗의 영광스러운 치세 기간에도 기근이 임한 것이다. 무엇보다 3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다윗이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셨다는 듯이 대답해 주셨다. “사울과 그의 집안이 기브온 사람을 죽여 살인죄를 지은 탓이다.”(새번역_1절 하) 달리 생각하면 다윗이 기근이 일어나자 마자 하나님께 물었다면 3년 동안 지속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응답할 준비를 하고 계셨지만, 다윗이 묻기를 지체한 것이다. 또 사울이 지은 죄가 다윗의 치세에 나타나는 것은 세월이 흐른다고 해서 그 범죄 행위가 없어지지 않는 다는 사실을 분명히 나타내 준다. 심판이 연기되었다고 처벌이 면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에게 그들이 이전에 당한 일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하면 되는지 먼저 묻는다(3절). 그들은 사울의 후손 일곱 사람을 처형하기를 원했고(4-6절) 다윗은 이를 들어준다. 다윗은 이 일을 행하면서 무엇보다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들 사이에 계시는 주님 앞에서 맹세한 일을 생각하여(새번역_7절)” 처리한다.
*사울은 이스라엘과 아모리 족속과의 언약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무시하며 자기 기준과 만족으로 기브온 민족을 학살했지만, 다윗은 사울 왕가의 남자 후손 7명을 선정하면서 “요나단과 사이에 계신 주님 앞에서 맹세한 일”을 생각하여 처리한다. 사울과 다윗의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사울의 이런 행태는 그가 죽어서도 후손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반면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한 맹세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은, 아껴서 빼놓았다. 그 대신에 왕은 아야의 딸 리스바가 사울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인 알모니와 므비보셋을 붙잡고, 또 사울의 딸 메랍이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인 아드리엘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다섯을 붙잡아다가, 기브온 사람의 손에 넘겨 주었다.”(새번역_7절하-9절상) 기브온 사람들은 그들을 “주님 앞에서”산에 있는 나무에 매달았다!(9절). 이들은 이스라엘에 닥친 흉년의 재앙을 물러가게 한 “희생제물”이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 땅에서 물러가도록 하려는 것이다. 7인의 희생 제물된 그들은 기브온 사람들에 의해 산에 있는 나무에 매달렸다. 그리고 함께 죽는다. 그런데, 7명에 포함된 알모니와 브비보셋의 어머니인 리스바가 7명의 시체를 지킨다(10절). 얼마나 큰 고통이겠는가… 두 아들은 노년의 어미에게 큰 의지가 되었을 터이다. 그런데 그 두 아들이 처참하게 죽어있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7명의 시체를 새와 들짐승으로부터 보호하였다. 다윗이 내린 비가 내릴때까지 시체를 그대로 매달아 놓으라는 명령을 어기지 않는다. 또는 훔치거나 강제로 가져 가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아들들의 시체를 지켰다. 왜 그랬을까?
*리스바는 이렇게 함으로서 자기 자식들이 죽은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 아닌 것을 분명히 알리고 싶었다. 온 이스라엘이 당한 흉년의 재앙이 사울의 아모리 족속 학살 때문이며, 그들은 단지 사울의 후손이어서 재앙을 물러가게 하기 위한 희생제물이 되었음을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의지하고 기대었던 두 아들이 순식간에 나무에 매달린 시체가 되었어도 아들들의 명예를 지켜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통해하고 동정했을 것이다. 다윗은 이 모든 소식을 들었다. 감동 했을 것이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다윗은 사울의 집의 명예롭게 해주었다. 매달려 죽은 자들의 시체를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함께 가족 묘지에 장사 지내 준 것이다. 이렇게 행함으로 다윗이 사울의 자손을 넘긴 것은 그 가족에 대한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흉년에 힘겨워 하는 백성들을 위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음을 증거하게 되었다. 그런데 다윗이 이렇게 행한 뒤에야 마침내 가뭄을 물러가게 하는 비가 내렸다. “다윗이 이렇게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거기에서 가지고 올라오니, 사람들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다른 사람들의 뼈도 모아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지파의 땅인 셀라에 있는 사울의 아버지 기스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사람들이, 다윗이 지시한 모든 명령을 따라서 그대로 한 뒤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돌보아 주시기를 비는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셨다.”(새번역_13-14절) 놀랍다. 가뭄이 물러간 것은 기브온 주민들이 원하는 대로 사울 후손 7명을 죽이자 마자 물러간 것이 아니었다. 다윗이 사울 집안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길르앗 사람들이 벳산의 광장에 매달려 있던 사울과 요나단의 시신을 몰래 빼돌려 장사 지낸 뼈와 7인의 후손들의 시신을 함께 합장하여 명예롭게 장사를 지낸 후에 “그 땅을 돌보아 주시기를 비는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셨다.”(새번역_14절 하) 가뭄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해결책은 기브온 주민들에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다윗이나 사울의 집안에게도 “진정한 용서와 화해”였던 것이다. 오래 전의 학살에 대해 아무런 사죄나 해결을 위한 노력 없이 단 몇마디, 몇푼의 물질을 쥐어 주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다윗은 흉년의 원인을 하나님께 들은 후 가장 직접적인 피해자의 직접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런데 그 요구에는 다윗도 하나님 앞에서 약속한 것을 지키는가에 대한 시험이 포함 되어 있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제를 더 만드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기브온 사람들은 보잘것 없는 존재들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들의 설움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대부분의 민족이 학살 당했어도 오히려 그것이 잘 된 것이라고 사울왕 처럼 생각한 사람들이 대부분 이었을 것이다.
*아무도 신경써 주지 않는 기브온 사람들의 원통함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관심을 심판하시기 위해 흉년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들의 아픔을 왕이 알도록 왕이 묻기 전까지 철저하게 고통 당하도록 다윗에게 어떤 선지자도 먼저 보내지 않으셨다. 왕이 직접 묻기까지 먼저 움직이지 않으셨다.
*기브온 학살 사건은 모두가 알아야 하는 사건이었고, 모두가 책임 져야 하는 죄였기 때문이다. 사울의 학살로 이스라엘은 가장 영광스러운 전성기때 최악의 흉년의 고통을 3년이나 겪어야 했고, 사울 집안은 애꿎은 남자 후손들이 7명이나 희생 되어야 했다. 왜 7명이어야 했을까? 그것은 7이 가지는 의미인 “완전함”에 힌트가 있다. 완전한 해결을 위한 완전하 제물이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하루 아침에 사울의 집안에서는 통곡이 일어났다. 그런데 어찌할까? 그들의 세대와 전혀 상고나 없다 할 수 있는 일이었을지 모르지만, 왕가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져야 했다. 아…. 죄가 이리도 무섭다.
*학살은 또 다른 학살을 낳을 뿐이었다. 기브온이 흘린 통곡은 리스바의 피눈물로 이어졌다. 아… 죄의 고통은 이리도 치밀하게 전가되었다.
*다윗이 진심으로 사울 왕가에 대한 선대를 베풀자 비가 내린다. 사울과 요나단의 시신을 방치되어 있던 길르앗에서 가져오고 기브온 사람들에 의해 매달린채 방치되어 있던 7명의 사울 후손들의 시신을 내려 사울 왕가 기스의 묘에 합장하도록 선대를 베풀자 하늘문이 열렸다. 비가 내렸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 기브온 사람들이 7명이 처형한 직후 흉년은 끝났을 것이다. 다만, 그 증거가 보이질 않았을 뿐이다. 다윗은 이를 믿지 못한 것이다. 가뭄이 해갈되는 비가 내릴 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 수 있다. 사울과 요난단, 7명의 시신을 정당히 장례를 치루어줄 마음이 있었다면 처형 직후 그리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그러지 못했다. 이 부분도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점검하신 것일 수도 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사울과 그 아들들에게 인자함을 베품으로 그제야 기근을 물러가게 하는 비가 내린 것이다.
*형식을 지키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진실한 마음으로, 진정성 있게 행하는 것이다. 다윗이 리스바의 눈물을 전해듣고 그제서야 공감하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인자”를 베푼 후에야 비가 내린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닮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주님 앞에서 맹세한 일을 생각하여 올곧게 행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지…. 미래를 밝히 여는 은혜인지….
+ 기도제목
* 주님, 이스라엘과 기브온의 약속은 하나님과의 약속이기도 했습니다. 사울이 이를 간고하고 무참히 어기며 학살한 후 더 심각한 것은 어느 누구도 기브온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심각한 기근이 3년이나 지속된 후에야 비로소(마지못해) 기브온을 찾아가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다윗의 모습이 이기적으로 비춰지는 것이 무리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 앞에서 이를 잘 순종하려는 다윗의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요나단과의 약속도 “주님 앞에서” 한 것이기에 최선을 다해 지키려는 모습도 도전이 됩니다. 심란한 이야기에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지금 우리가 이런 모습을 반복하지 않도록 늘 도와 주십시오.
* 주님, 다윗이 사울 왕가에 인자함을 베풀었을 때 하늘의 문을 여시고 비를 주셨습니다. 은혜의 비는 은혜의 행동이 몰고 옴을 느낍니다. 은혜를 베풀며 사는 삶이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