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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되는 사울과 요나단의 시신
삼하 21:10-14
10 아야의 딸 리스바가 굵은 베를 가져다가 자기를 위하여 바위 위에 펴고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 시체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한지라
11 이에 아야의 딸 사울의 첩 리스바가 행한 일이 다윗에게 알려지매
12 다윗이 가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서 가져가니 이는 전에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을 길보아에서 죽여 블레셋 사람들이 벧산 거리에 매단 것을 그들이 가만히 가져온 것이라
13 다윗이 그 곳에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가지고 올라오매 사람들이 그 달려 죽은 자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14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
삼하 21:10-14 / [두 아들을 잃은 리스바] 리스바는 본래 이방 호리 족속의 여자로 사울의 첩이 되었다가 한때는 아브넬에게 더럽힘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은 이제 다윗까지 감동시키게 되었다. 리스바는 두 아들이 처형된 곳으로 가서 시체들 곁에 굵은 검정색 베옷을 펴놓고 그 위에 앉아 있었다. 추수가 시작될 무렵부터 그 시체들 위로 소나기가 퍼부을 때까지 리스바는 그곳에 앉아 낮에는 독수리들이 시체들 위에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들이 달려들지 못하게 하였다. 11) 다윗은 이방 호리 족속의 여인 리스바가 처형된 두 아들을 위하여 그토록 놀라운 일을 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12)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유해를 길르앗의 야베스에서 가져오게 하였다. 블레셋 군인들이 사울의 군대와 길보아산에서 싸울 때 그들은 이 싸움에서 진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쳐죽이고 그들의 시체를 벳산의 광장에 매달아 두었었다. 거기서 그들의 시체를 몰래 거두어다가 안장시켜 준 이들이 바로 길르앗야베스 주민들이었다. 사울이 전에 그들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 은혜를 갚은 것이다. 13) 다윗은 이제 십자가에 처형된 일곱 사람의 유해도 모아다가 14) 사울과 요나단의 유해와 함께 베냐민 지파의 땅 셀라에 있는 사울의 아버지 기스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이 모든 일이 다윗의 명령대로 다 이루어지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더 이상 흉년이 들지 않게 하셨다.
처형된 사울의 일가 7명을 위한 아야의 딸 리스바의 정성에 감당한 다윗이 그들을 장사 지내도록 허락하는 장면입니다.
리스바가 행한 일이 다윗에게 알려지매(10-11) 이스라엘 사람은 시체가 장사되지 못하고 들짐승에게 먹히는 것을 큰 수치로 생각했습니다. 시체가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건기인 4월부터 비가 올 때까지 아마도 10월경에 시작되는 우기로 예상되는 무려 6-7개월 동안이나 시신이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 기간에 리스바는 두 아들이 처형된 곳에 굵은 베를 바위 위에 펴고 계속 밤을 지새우며 시체를 지킨 것입니다. 리스바는 죽은 아들들을 향하여 어미로써의 마지막 사랑을 베풉니다. 리스바의 이런 정성스러운 행동이 다윗에게 알려집니다.
죽은 자의 뼈를 거두어다가(12-14) 다윗은 리스바의 정성에 대하여 듣고 감동을 합니다. 12절을 보시면 다윗이 직접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 찾아가서 사울과 요나단의 뼈를 가져옵니다. 신하를 시켜서 명령할 수 있는 일인데 직접 찾아옵니다. 여기에는 사울과 요나단을 향한 다윗의 애정도 있었겠지만, 사울 가문의 장사를 다윗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악의로 죽인 것이 아니었음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인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뼈를 취하자 사람들이 사울의 가문에 죽은 7명의 뼈를 취하여 베냐민 땅 셀라에서 가족묘로 합장을 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삼 년 기근으로 하나님께 기도했고 그 기도가 14절에서 응답 된 것입니다.
적 용 : 1절에서 드린 다윗의 기도가 14절에 응답이 됩니다. 또한 본문에는 리스바가 기도했다고 나오지 않지만 자녀의 마지막을 위해 보여준 리스바의 정성 또한 기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기도가 응답되기 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까? 응답이란 무엇일까요?
馬耳東風(마이동풍) 남의 말을 새겨듣지 않고 귓등으로 흘리는 행동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은 예의입니다. 상대의 말을 경청한다는 것은 예로써 대하는 자세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좋은 인상을 주고, 대인관계가 원만해집니다. 리스바의 행동이 다윗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으며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깊은 사랑을 느낀 다윗은 그들을 잘 장사지내도록 하여 모든 기근의 원인에 대한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사울의 자손 일곱을 기브온 사람들에게 내어주어 복수하게 하고 그들을 위로한 다윗은 이제 다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인생을 살며 죄를 짓게 되면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반드시 회개하여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온전한 회개를 하시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호크마 주석
=====21:10
굵은 베 - '굵은 베'는 슬픔과 비탄을 상징하는 애곡자의 옷이었다(3:31; 왕하 19:1, 2; 에 4:1-4; 욥 16:15; 시 30:11).
반석 위에 펴고 - 시체에는 사나운 짐승과 새들이 몰려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체가 매장되지 못하고 이러한 맹수나 맹조에 의하여 뜯기우는 것을 최대의 수치요 모욕이라고 생각했다(삼상 17:44). 따라서 리스바는 시체에 이러한 짐승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굵은 베옷을 반석에다 깐 후, 시체 곁에 계속 머물면서 밤낮으로 시체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 모세 율법에 따르면, 사람이 죽을 죄를 짓고 나무 위에 달려 죽더라도 그 시체를 당일에 내려 장사(葬事) 지내도록 규정하였다(신 21:22, 23). 그러나 이번에 나무 위에 달려 죽은 사울의 일곱 후손의 시체들은 사건의 성격상 예외에 해당되기 때문에 율법의 규정대로 당일에 장사되지 아니했던 것이다. 즉, 사울의 일곱 후손들은 3년 연속 기근을 내리신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리기 위한 속죄 제물의 의미로 처형당한 것이다. 때문에 이들의 시체는 하나님의 진노가 풀려 기근이 끝나는 순간, 곧 비가 내리기까지 나무 위에 그대로 방치되었던 것이다(Lange). 한편, 혹자는 시체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때는 우기(雨期)인 10월 경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며, 따라서 리스바는 4월부터 10월까지 곧 6개월 동안이나 시체를 보호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Smith, The Interpreter's Bible).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무리한 주장이다. 왜냐하면 본절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졌다고 하는 표현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풀어졌다고 하는 표시였기 때문이다. 즉, 본절의 비는 우기에 내린 자연스런 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악인의 형벌당함을 보시고 이제 당신의 진노를 풀었다는 표시(sign)로서 내리신 비인 것이다(Keil, Lange). 그러므로 우리는 이 비가 언제 시체 위에 쏟아졌는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이 이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스바가 얼마나 오랫동안 시체를 지켰는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알 길이 없다. 그렇지만 비가 즉시로 시체에 쏟아지지 않은 것 만큼은 문맥의 흐름상 확실한 것 같다(Josephus, Clericus, Ewald, Bottcher).
=====21:11
리스바의 행한 일이 다윗에게 들리매 - 당시 시체가 정식 장례 절차에 의해 무덤에 안치되지 않고 방치되어 짐승에게 손상당하는 것을 큰 수치로 여겼던 사실로 미뤄 보건대(삼상 17:44), 리스바의 행동은 칭찬받을 만하다. 그녀는 하나님의 진노가 풀려 비가 시체 위에 쏟아질 때까지 오랫동안 시체 주위에 몰려드는 짐승의 온갖 위협을 막아내는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따라서 그녀의 이러한 정성과 사랑에 감동한 다윗은 그들의 뼈를 사울가의 가족 묘지에 합장(合葬)하였다(14절). 이렇게 하여 실추되었던 사울가의 명예는 어느 정도 회복될 수 있었고 리스바의 슬픔 역시 약간은 가실 수 있었다. 이처럼 자기 희생은 허물을 덮어 주고 상처를 치료해 주며 모든 이들에게 기쁨과 평안을 제공해 준다(마 26:13; 벧전 4:8).
=====21:12
사울의 뼈와 그 아들 요나단의 뼈를...취하니 - 사울의 뼈와 요나단의 뼈는 지난번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 의해 야베스 땅의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되었다(삼상 31:11-13; 삼하 2:4, 5). 그런데 이번에 다윗 왕은 이들의 뼈를 가져다가 이들의 가족 묘에 묻어준 것이다. 이와 같은 다윗 왕의 배려는 (1) 사울의 첩 리스바의 지극한 모성애(母性愛)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요, (2) 또한 자신이 사울가에 악의가 없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Lange, The interpreter's Bible).
벱산 거리에 매어단것을 - 삼상 31:10에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시체를 '벧산'(Bethshan, 혹은 '벱산') 성벽에 못박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양자의 기록은 서로 모순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본절의 '거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홉'(* )은 '광장'(廣場)을 의미하는데, 이는 성의 중앙에 있는 광장 뿐 아니라 성문 앞 또는 옆에 있는 광장도 의미하기 때문이다(대하 32:6; 스 10:9; 느 8:1, 3, 16). 이렇게 볼 때, 블레셋 사람들은 수많은 백성들이 왕래하는 성문 앞 광장의 성벽에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못박았으며, 그리고 그 시체를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몰래 취하여 온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21:13
사람들이 그 달려 죽은 자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 여기서 '그 달려 죽은 자들의 뼈'는 사울의 일곱 후손들의 뼈이다. 혹자는 이들의 뼈가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함께 가족의 묘에 합장(合葬)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주장하나(Lange, Keil), 본절에서 보듯 사울과 요나단의 뼈가 이장(移葬)될 때에 사람들이 이들의 뼈를 거두었다는 기록은 합장(合葬)을 암시해 준다(Pulpit Commentary).
=====21:14
셀라 - 베냐민 지파의 땅이나(수 18:28), 그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 후에야 하나님이...들으시니라 - 사울가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진정되었음을 보여 주는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3년 기근이 종식되고, 비가 그 땅에 내렸음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로막고 있는 방해물을 적극 제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시 66:18; 사 59:2; 요일 3:21, 22).
< 설 교 >
그 후에야 기도를 들으시니라!
삼하 21:10-14 /장 빈목사(동광교회)
오늘 주신 말씀, 사무엘하서 21장 14절 말씀을 보니,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셨다고 전합니다. 그 후에야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겁니다. 지금 기도하는 사람은 다윗입니다. 그것도 이제 막 왕관을 받아 쓴 집권 초기의 다윗 왕인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이 기도하는데, 그런데 그 후에야 기도를 들어주시다니, 일견 믿겨지지 않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꼭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믿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방금 전 읽은 말씀에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기도를 들어주시긴 하는데 언제 들어주시는가? 바로 그 후에야 들어주신다는 겁니다. 이 말은 그 이전까지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기도에 응답받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간단합니다. 그 이후의 상황을 만들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 이전을 넘어 그 이후로 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 이후의 상황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 다시 말해 그 이전 상황 속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의 기도는 응답을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그 이후의 상황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 오늘 주신 말씀 속에서 우린 두 가지의 중요한 단어를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는 은혜요 다른 하나는 자비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전과 그 후의 경계선엔 은혜와 자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은혜를 갚은 후에야, 그리고 자비를 베푼 후에야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배은망덕 한 자, 무자비한 자의 기도는 응답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풀어가면서 우리가 기도에 응답받을 수 있는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주신 말씀 잘 기억하시고, 그대로 실천하시어, 부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은혜를 갚은 그 후에야 응답하십니다(10-12).
우리가 기억해야 할 첫 번째 사실은, 하나님은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자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는 점입니다. 은혜를 갚은 그 후에야 나의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십니다. 당연히 갚아야 할 은혜를 갚지 않고, 여전히 빚으로 남겨 둔 자의 기도는, 그 은혜를 갚기 전까지는 들어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에 응답받기 위해서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은혜를 갚는 일입니다. 은혜 갚는 일 곧 보은을 생활화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응답 속에 행복을 이어갈 수 있는 첫 번째 길입니다.
의아한 것은 이 사건과 기도의 응답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 그 때로부터 조금 더 과거로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때는 바야흐로 사사시대, 하루는 암몬 족속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습니다. 그 때 저들이 쳐들어 온 지역이 바로 12절에 등장한 길르앗 야베스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야베스 지역에 사는 거민들이 보니 저들이 너무 막강하여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습니다. 해서 싸워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백기를 들고 화친을 요구합니다.
그러자 암몬 사람들이 너무 심한 요구를 해옵니다. “남자나 여자나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전부 오른쪽 눈을 빼고, 앞으로 성실하게 조공을 바치겠다고 서약하면 너희들의 항복을 받아 주내겠다!” 해도 너무 했습니다.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해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항복하는 대신, 왕이 된 지 얼마 안 된 사울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다행히 사울 왕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저들 암몬 사람들을 물리쳐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 왕에게 잊지 못할 큰 은혜를 입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어느 날, 바로 그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쟁에 나갔다가 그만 길보아 산에서 아들 요나단이 함께 전사하고 맙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 왕 부자의 시신을 자기네 나라 수도인 벳산 거리에 높이 매달아 놓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싸워 이겼다는 사실을 만 천하에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사울 왕 부자는 죽어서까지 조롱과 모욕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 사실을 알고도 누구 하나 나서서 저들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명색이 한 나라의 초대 왕이요 그 아들인데, 그 시신을 거리에 그냥 매달아 두다니, 정말 치욕 중의 치욕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나섭니다. 저들은 젊은이들을 모아 결사대를 조직하고, 블레셋의 벳산 성벽에 올라가, 마침내 사울 왕 부자의 시신을 가져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윗이 저들에게 가서 사울과 요나단의 뼈를 받아다가 그 아비의 묘에 장사지냈다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기록된 하나의 스토리입니다. 문제는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점입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행동이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저들이 40년 전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랬습니다. 저들은 사울 왕에게 입은 은혜를 40년이나 간직하고 있다가, 결정적인 때, 그 은혜를 갚았던 것입니다. 특히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되는 점은 저들이 사울 왕이 죽은 뒤에 은혜를 갚았다는 점입니다. 우린 일단 사람이 죽고 나면, 은혜도 다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몸은 죽어도 은혜는 남는 법, 그 은혜를 갚지 않고서는, 기도에 응답 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0절 말씀을 보니, 저들이 그 뼈를 가져다가 사울에게 사랑을 받았던 여인에게 전해 주었군요. 그러자 그 여인이 반석 위에 베를 깔고 그 시체를 모신 후에 그 시신을 지키는 데, 낮엔 공중의 새가, 밤엔 들짐승이 와서 그 시신을 범하지 못하도록 지켰다고 하는군요. 망자에 대한 예를 갖추는 저들 모습이 정말 갸륵한데요,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일을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게 비가 올 때까지 했다고 하는군요. 비가 쏟아지기까지 시신을 지켰다는 말, 짧게는 건기에 해당하는 6개월 동안 지켰다는 말이요, 길게는 당시 삼년 기근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비가 올 때까지 3년 동안이나 지켰다는 말이 됩니다. 참으로 지극 정성을 다해 저들이 은혜를 갚은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렇게 은혜를 갚은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셨다는 겁니다.
기도에 응답 받기를 원하십니까? 은혜를 갚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은혜를 입고도 아직 갚지 않은 은혜가 있거든, 어서 갚으시기 바랍니다.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심은 내가 갚지 않은 은혜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배응망덕한 자의 기도는 응답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기는 은혜 갚는 일을 아예 습관화 하는 것입니다. 보은의 생활화, 그렇습니다. 은혜 갚는 일이 나의 습관이 되고 보은이 나의 생활이 될 때, 하나님은 항상 나의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은혜 갚을 줄 아는 성도의 새벽 기도는 더 큰 응답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은혜를 갚을 줄 알아, 늘 기도에 응답받는 복된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자비를 베푼 그 후에야 응답하십니다.
13절에 보니,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뼈를 가지고 올라오자, 사람들이 달려 죽은 자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사울 부자와 함께, 베냐민 땅 그 아비 기스의 묘에 장사를 지내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후에야 하나님은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겁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사울 부자와 함께 장사지내준 저들은 누구일까? 저들은 누구인데 왜 누구에게 죽임을 당했던 것일까? 어찌하여 지금까지 저들의 장례식도 치르지 못했던 것일까? 저들을 장사지내는 일과 기도의 응답 사이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사연인 즉 이렇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이스라엘 전역에 굉장한 가뭄이 들었습니다. 21장 1절을 보니, 그것도 연거푸 삼년동안이나 기근이 들었다고 합니다. 해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응답이 오질 없습니다. 왜 응답하시지 않나? 답답해하는 다윗에게 하나님이 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봅니다. 문제는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여 피를 흘렸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사울의 죄 값으로 지금 너희들이 고생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이 왜 그리 큰 죄가 되는 것일까? 살인죄를 지은 것은 사울이니 사울만 벌하시면 될 것을, 왜 온 백성에게 벌을 내리시는 걸까?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선 다시 과거로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때는 바야흐로, 선지자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던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승장구한다는 소문을 들은 기브온 사람들이, 맞서 싸울 생각을 거두고, 다 헤진 옷을 입고,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곰팡이 난 떡을 가지고서 여호수아를 찾아와 거짓으로 화친을 청했었습니다. 그 때 여호수아는 꼼꼼하게 알아보지도 않고, 저들에게 속아 화친을 맺어 주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기브온 사람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조했던 것입니다.
물론 여호수아가 저들에게 속은 것이긴 하지만, 결론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했다는 점이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하면서 저들의 머리털 하나라도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조했으니, 그 약조를 지켜야 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사울이 왕이 된 다음 기브온 사람들을 보니 심기가 불편했습니다. 왜 저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야 하는가? 저들은 우리와 같은 피가 아닌데, 그것도 선지자 여호수아를 속이고 화친을 맺은 가증한 것들 아닌가? 내가 왕이 된 이 참에 아예 저들을 정리하리라! 결국 사울 왕은 기브온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고 맙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인종 청소라고나 할까요? 문제는 이 일로 사울이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마땅하거늘, 그 맹세를 저버리고, 이유도 없이 저들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정말 사울은 무자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자비를 모르는 사울 왕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그가 죽은 후까지 계속됩니다. 한 마디로 사울왕의 잘못으로 인해 다윗 왕과 온 백성이 지금 고초를 겪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자 다윗이 다시 하나님께 여쭙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자 하나님이 살아남은 기브온 사람들에게 물어 보라 하십니다. 해서 물었더니 저들이 사울왕의 아들 일곱 명만 달라고 합니다. 저들을 매달라 죽임으로 모든 죄와 원한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겠다는 겁니다.
결국 다윗은 사울왕의 첩이 남긴 아들 가운데 일곱을 골라 저들에게 넘겨주었고, 저들은 그 일곱 아들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사울의 일곱 아들에게 카메라를 비추어 봅니다. 저들 아들들의 입장에선 정말 억울한 일이었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죄 때문에 아무런 죄도 없는 아들들이 죽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저들에게 죄가 있다면 아버지 잘못 만난 죄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부모님들께 고합니다. 우리 부모 세대가 자식들에게 복의 근원이 될지언정, 화근이 되어서는 아니 될 줄로 믿습니다. 나 부모 때문에 내 자식들이 복을 받을지언정, 나 부모 때문에 화를 입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나 부모 때문에 자녀들이 행복할지언정, 나 부모 때문에 이 놈의 세상 살고 싶지 않다고 탄식하게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부모의 죄 때문에 자녀들이 벌을 받거나, 우리 부모의 죄로 인해 자녀들이 기근의 고통을 받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오직 자녀들에게 하늘의 복을 전해주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다윗 왕, 결국 사울 왕과 그 아들 요나단과 그리고 일곱 왕자의 유골을 수습하여, 마침내 국장으로 엄숙하게 장례식을 치러줍니다. 인간적으로는 다윗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사울에게 당한 끔찍한 일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의 시신을 예루살렘 성벽 위에 내다 걸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그 아비의 묘에 장사하되, 모든 백성들을 향해서도 국장에 참여할 것을 명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왕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이 왕의 명대로 좇아 행했더니,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고 비를 주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린 자비라는 덕목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믿는 성도들은 무자비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자비를 모르는 사람, 주님께 합당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원수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눈에는 눈으로 꼭 갚아야 한다는 율법적인 주장을 넘어 십자가의 사랑으로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을 향해서도, 죄 없는 손으로 저를 치라 하시며, 오히려 그 여인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자비한 율법주의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누구나 믿기만 하면 살려 주신다는 복음의 자비로 우린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다윗 왕의 자비를 배우고 싶습니다. 다윗 왕의 측은지심을 닮고 싶습니다. 사울 왕과 자기 친구 요나단 왕자를 향한 배려와 자비는 물론, 무고하게 죽어간 일곱 왕자들에 대한 넉넉한 자비를 배우고 싶습니다. 그랬습니다. 만약 다윗에게 넉넉한 마음이 없었다면, 만약 그도 사울처럼 무자비하게 굴었다면, 아마 다윗과 백성들은 영영 기도에 응답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다윗은 자비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조차 그는 자비를 베풀어 그를 죽이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은 무척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에 늘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이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아니, 자비를 베푼 그 후에야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다윗처럼 넉넉한 자비를 베풀어 기도마다 응답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말씀 마당을 닫으려고 합니다. 요즘 세태를 보면 어찌 그리 각박한지 모릅니다. 왜 사랑하는 당신에게 그리도 야박하게 구는지 모르겠습니다. 때론 사람이 사람을 향해 이토록 모질게 할 수 있나, 이렇게 잔인하고 무자비한 존재인가, 정말 인간성 자체에 대해 회의하게 만드는 사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정말 어딜 가도 은혜나 자비를 구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어찌나 무자비하고, 어찌나 팍팍한지, 사람 만나는 것이 가장 두려울 정도입니다.
특히 세상 사람들은 대개 원수 갚는 일을 잘 합니다. 때론 원수 잘 갚는 사람을 미화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원수를 갚는다는 명목 하에 무자비한 행동을 일삼는다는 데 있습니다. 사울처럼 말입니다. 아니오, 그러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은혜를 갚는 일과 자비를 베푸는 일입니다. 그저 내가 받은 은혜만 생각하시고, 그 은혜 갚는 일에 집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저 내가 받은 하늘의 자비만 생각하시고, 어떻게 하면 나도 당신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을지 고민하시고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은혜는 잘 갚으시고, 자비는 넉넉하게 베푸시어, 늘 기도마다 응답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니라!” 아멘!
그 후에야 들으신 기도
이성희목사 / 삼하 21:12-14, 요 2:19-22
비행기 안에서 어떤 젊은이가 노트북을 꺼내놓고 계속 웃고 있습니다. 헤드폰을 끼고 웃고 있는 것을 보니 재미있는 영화를 보는 모양입니다. 그 젊은이는 연방 혼자서 ‘큭큭’ 웃고 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보여주는 기내영화보다 자기 노트북 영화가 더 재미있는 듯합니다. 이 젊은이는 영화에 몰두한 나머지 비행기의 안내방송을 다 놓칩니다. 자신에게 도취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소리가 더 크면 더 중요한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자신의 소리가 지나치게 크면 결정적인 순간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자기의 소리에 도취되어 하늘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외치는 어떤 소리도 듣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소리만 듣고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세상의 소리만 듣고 하늘의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기도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기도이고, 내가 들을 때에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키엘케골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기도는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점점 더 조용하게 되어서 결국 기도는 듣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기도는 듣는 것인데 많은 사람은 듣지는 않고 말을 하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좋은 기도를 드리지 못합니다. 응답받는 기도가 되지 못합니다. 착한 기도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의 비유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기도는 자랑이나 보고가 아닙니다. 자기가 다 결정해놓고 하나님께 허락해 달라고 졸라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단순하게 하나님의 뜻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수학이 아니기 때문에 횟수가 기도의 힘이 아닙니다. 기도는 수사학이 아니므로 웅변이 기도의 힘이 아닙니다. 기도는 기하학이 아니므로 길고 짧은 것이 기도의 힘이 아닙니다. 기도는 음악이 아니므로 음성의 아름다움이 기도의 힘이 아닙니다. 기도는 논리학이 아니므로 논리 정연한 그 방법이 기도의 힘이 아닙니다. 심지어 신학까지도 기도의 힘은 되지 못합니다. 마음의 열심, 강청하는 열정이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의 요소입니다.
누가복음에는 ‘과부와 재판장 비유’가 있습니다. 과부는 재판장에게 와서 무슨 그리 큰 원한이 맺혔는지 “내 원한을 풀어주소서”라고 애원합니다. 재판장은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으면 계속 자기를 괴롭힐 것이라고 하여 “내가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나를 괴롭게 하리라”고 합니다. 재판장은 과부가 예뻐서가 아니라 강청하기 때문에 소원을 들어주고 원한을 풀어주었습니다. 하나님도 이런 강청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비유이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산상보훈에도 기도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는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이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주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떡 대신 돌을 구하고, 생선대신 뱀을 달라고 합니다. 이런 요구를 절대로 하나님은 들으시고 주실 리가 없습니다. 이런 요구는 성취 안 되는 것이 응답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시지 않는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4:2-3에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울과 다윗의 악연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전쟁에 승리한 때문입니다. 나라를 위하여 좋은 일이었지만 백성들이 다윗을 지지하자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이런 사울에 대하여 원수를 갚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을 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역대상 10장에는 사울이 죽은 것은 하나님이 직접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폐위시키시고 죽이신 것입니다. 그 후에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시신을 가족묘에 이장해 주었습니다. 다윗이 이 일을 한 후에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첫째, 인간의 진정한 화해 후에 기도를 들으십니다.
사무엘하 21:12에는 “다윗이 가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서 가져가니”라고 합니다. 14절에는 “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라고 합니다. 사울과 아들 요나단의 유해를 가족묘에 합장해 주었다는 것은 진정한 화해의 표시입니다. 요즘에 사과를 하든, 용서를 빌든 진정성 얘기를 많이 합니다. 아무리 사과해도 진정서이 없어 보이면 사과 자체가 시비가 됩니다. 다윗의 행동에는 진정성이 보입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뼈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 의해 야베스 땅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 지냈습니다. 다윗은 이런 이들의 뼈를 가족묘에 이장하여 장사지내 주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집안에 악의가 없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이런 이장을 결단하였던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감정이 있어 끊임없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에 대하여 감정이 없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고 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31:10에는 “그의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라고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과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거리에 못 박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고 사울의 가문에 수치를 주었습니다. 벧산 거리에 있던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몰래 가지고 온 것입니다. 야베스 사람들이 가지고 온 시체를 이제 다윗이 기스의 묘에 이장하였습니다.
가문의 악연이란 옛날 서부영화나 홍콩 무술영화의 단골 주제입니다. 악당들이 원수 가정에 들어와 불을 지르고 가족을 다 죽입니다. 그런데 그 집 하인이 그 집 아들을 몰래 숨겨 도망칩니다. 아들은 자기 아버지와 가족들이 무참히 살해당하는 것을 눈여겨봅니다. 그리고 산에 올라가 총 쏘는 것을 연마하고 무술을 닦습니다. 그리고는 장성하여 산에서 내려와 원수를 복수하러 갑니다. 대개 무술영화에는 악당의 무술이 훨씬 고수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일격으로 악당을 물리치고 등에 칼을 차고 멀리 사라집니다. 서부영화는 복수를 하고 말을 타고 황야로 사라집니다.
영화는 인간의 삶을 말합니다. 드라마는 언제나 우리 주변 이야기들입니다. 가문의 악연이란 언제나 세습되는 갈등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가문의 악연이란 인간사에 흔히 있는 일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 집안끼리 갈등을 빚는 일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섹스피어의 4대 비극을 아시지요? ‘햄릿’, ‘맥베스’, ‘오셀로’, ‘리어왕’이 4대 비극이라고 합니다. 비극이 무엇입니까? 얽히고 설킨 가문의 비극입니다. 대를 잇는 갈등과 복수가 인간 역사의 비극입니다. 4대 비극은 아니지만 ‘로미오와 줄리엣’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로나의 두 가문인 캐퓨렛 가문과 몬탸큐 가문은 서로 상극인데 로미오가 원수 집안의 딸 줄리엣을 사랑하게 되는 줄거리입니다. 그 소설에는 집안의 분쟁이 하인들에게까지 이어져 하인들도 원수로 삽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두 사람이 다 죽는 비극적 종말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가문의 불화는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사무엘하 3:1에는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고 합니다. 사울과 다윗의 가문 사이에 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초기 이스라엘의 명문인 두 가문이 어떤 사이인가를 잘 말해줍니다. 그런데 다윗은 상극인 사울의 가문과 극적으로 화해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큰 불화는 조상의 묘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조상의 묘, 특히 아버지의 묘를 파헤쳤다고 가정해 보세요. 아마 가장 분노하고 그 사람을 알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가장 큰 형벌은 ‘부관참시’(剖棺斬屍)일 것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죄인의 시체를 다시 파내어 형벌을 가하는 것입니다. 이 형벌은 자손들에게 가장 수치스런 벌입니다. 일본인들은 걸핏하면 말뚝을 박습디다. 묘지나 산이나 기념될 장소에 말뚝을 박아 우리를 화나게 합니다.
반면에 가문이나 후손에게 가장 큰 호의는 묘소를 잘 세워주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분이지만 유해를 잘 보존해 주는 것은 가장 고마운 일입니다. 얼마 전에는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미군 유해가 다시 조국으로 돌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1950년 12월에 북한에서 전사한 한국군의 유해 두 구도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미군과 함께 전사하여 미군인 줄 알고 미국까지 보내졌던 유해가 DNA 검사를 해보니 한국군이었고 신원이 밝혀진 것입니다. 이들의 유해가 62년 만에 지난 5월 한국으로 돌아와 국립묘지에 안장이 되었습니다. 그 때 가족들이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릅니다.
성경에는 사울의 집은 망하고 다윗의 집은 흥하였다고 합니다. 흥한 쪽에서 먼저 망한 쪽을 향하여 화해의 제스처를 해야 합니다. 강자가 약자에게 손을 내밀어야 화해가 됩니다. 망한 쪽이나 약자는 손을 쉽게 내밀지 못합니다. 사울가와 화목한 다윗은 바로 이런 관용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화목하게 하다’는 말의 헬라어의 뜻은 ‘상태를 되돌려 놓는다’는 뜻입니다. 뜯어진 것을 다시 꿰매다는 뜻입니다. 흩어진 것을 모으다는 뜻입니다. 화목하게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제 자리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화목이 얼마나 소중한 인간관계의 일입니까?
구약은 화목제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반목하여 인간이 죄를 짓습니다. 죄란 분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과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기 위하여 제물을 바쳐 화목하게 하시는 법을 정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화목제물입니다. 화목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한데 구약에서는 짐승들을 잡아 그 피로 화목제물을 삼았습니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셔서 생명을 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다시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둘이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것을 땜질하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16에는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피로 화목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십자가로 둘이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화목하게 합니다. 하늘과 땅이 화목하게 합니다. 이것이 세로 막대기입니다. 나와 너를 화목하게 합니다. 이것이 가로 막대기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참 의미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남북전쟁 후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맙시다. 모두를 향해 사랑의 마음을 품읍시다”. 승자가 내민 손입니다. 승자가 내민 것이 아니라 손을 내밀므로 완전한 승자가 된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 화해가 가능할 때 이때 비로소 하나님은 귀를 열고 기도를 들으십니다.
둘째, 화해를 온전히 실천한 후에 기도를 들으십니다.
사무엘하 21:14 하반절에는 “모두 왕의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고 합니다. 온전한 화해는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는 말씀에 나타납니다. 화해를 온전히 행동으로 실천했을 때에 하나님은 이 때 비로소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방해물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방해물을 제거하는 행함 즉 실천이 있어야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가문과 가문,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맺힌 것을 온전히 풀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므로 예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이루는 것입니다.
‘케빈 베이컨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서로 모르는 두 사람이 6.6명을 거치면 연이 닿는 것이 판명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 관계를 따지다 보면 평균 6단계 만에 베이컨과 연이 닿는다는 이론입니다. 다른 보고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더 가까워 4단계 만에 연이 닿는 사람을 만난다고 합니다. 알고 보면 다 알만 한 사람이며, 관계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원수질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나와 원수질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여기에 화해의 당위성이 있습니다.
마 5:23-24에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합니다. 25절에는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지는 서로 화해하고 인간관계의 매듭을 반드시 풀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입이 아니라 삶으로 해야 합니다. 용서는 입이 아니라 몸으로 해야 합니다. 화해는 입이 아니라 행함으로 해야 합니다. 회개는 입이 아니라 아니 온 삶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행함입니다. 실천을 통하여 진정성이 나타납니다. 실천을 통하여 비로소 마음이 표현됩니다.
예수님의 화해 법칙을 보세요. 제자 나다나엘을 처음 제자로 뽑으실 때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가장 낮추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나다나엘의 태도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가장 낮추는 자를 가장 높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을 보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용서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예수님은 입으로가 아니라 온 몸으로 화해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생명을 버림으로 화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으로 제물이 되신 주님이십니다. 죄를 지은 인간을 온 몸으로 사랑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렇게 찬송합니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헨리 포드는 “화해하는 것은 시작이고, 도와주는 것은 진보이고, 함께 일하는 것은 성공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화해는 더 큰 결과를 이끌어냅니다. 화해를 실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실천이 중요한 것을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의 결론에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실천을 권유하십니다. 바울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2:12에는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고 행함을 권합니다. 우리의 행함으로 믿음이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에 실천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시멜로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완벽하게 만들려면 단어 하나를 더 넣어야 합니다. “아는 것을 실천해야 힘이다”. 실천하지 않는 앎은 진정한 배움이 아닙니다. 실천이 없는 화해는 하나님이 절대로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사막의 수도사인 포에멘은 “혀가 말한 것을 따르도록 마음을 가르쳐라. 설교를 잘 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많아도 설교한 그대로 실천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꼬집었습니다. 실천이 없으면 허공을 치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합니다.
그 후에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나라의 필요를 충족하시고 이루어주셨습니다. 사울 가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진정되었음을 의미합니다. 3년 동안의 긴 기근이 종식되고, 비가 그 땅에 내렸습니다.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인 기도는 방해물을 적극적으로 제거하고 몸으로 화해를 이루면 응답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땅에 기근이 물러가고, 비가 내리고, 태풍이 비껴가고, 수확이 풍성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관계에서 화해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결론
종교개혁자 루터와 쯔빙글리는 종교개혁의 방향이 반대였습니다. 수시로 의견이 충돌되고, 때로은 대화 가운데 얼굴을 붉혔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스위스의 산에 오르고 있을 때 두 마리의 염소가 매우 좁은 다리 위에서 서로 노려보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다리 중간에서 두 마리가 비켜주지 않고 오도 가도 못하고 한 판 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마리가 다리 위에 납작 엎드려 주었습니다. 다른 염소는 그 염소의 등을 밟고 유유히 다리를 건넜습니다. 두 사람은 이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화해의 악수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염소에게서 겸손과 양보를 배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염소보다는 나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본성으로 살면 양보하고 배려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면 화해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화해를 실천한 후에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과 막힘이 없이 통하는 기도가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리스바가 행한 일이 다윗에게 알려지매
삼하 21:10-14 / 우인택 목사
오늘 본문은 처형당한 사울의 자손들을 위한 사울의 첩 리스바의 정성과 그를 통한 사울 가문의 회복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먼저 10절에, 희생된 두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짐승들이 시신을 훼손하지 못하게 밤낮으로 지키면서 비가 내리기를 기다리던 한 어머니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시신이 장사되지 못하고 짐승의 먹이가 되는 것을 큰 수치와 저주로 여겨졌습니다(잠 30:17, 왕하 9:10). 그래서 리스바는 비가 옴으로써 하나님의 용서가 선포되고 자기 자식들의 시신을 장사할 수 있을 때까지 시신이 짐승의 먹이가 되는 것을 막으려고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먼저는 그녀의 그러한 행동이 자기 아들들을 죽이도록 내어준 다윗에게 대항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었고, 또, 여자의 몸으로 밤낮으로 새와 들짐승을 상대로 시신을 지키는 일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의 용서가 선포되고 저주가 속함을 받아 비가 내리기까지 시신을 지켰습니다. 그것도 13절에, 시신이 썩어서 뼈만 남기까지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리스바에게서 자기의 죽은 자식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헌신하고 희생하는 어머니의 모성애를 보게 됩니다. 모성애란 더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이 세상에서 큰 사랑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모성애가 크다 해도 본문의 리스바처럼 행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는 아들 다섯을 잃은 메랍이 리스바와 같이 하지 않은 데에서 보게 됩니다. 그러한 점에서 리스바의 행위는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그리고 다윗도 이러한 리스바의 행위에 감동하여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함께 이번에 죽은 사울 자손들의 뼈를 사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지내 주는 자비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리스바가 자식들을 향해 가졌던 사랑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세태를 볼 때,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자기 쾌락과 안일을 선택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자식들은 늙은 부모가 쓸모없고 짐만 된다고 하여 양로원에 맡기기도 하고 심지어는 내다 버리거나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모습은 세상 사람들의 일만이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는 신앙을 위한다며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고 버리고, 오히려 그러한 일을 참 신앙에서 비롯된 것인 양 착각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신앙은 좋은데 부모를 섬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모든 것보다 우선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마가복음 7장에서 신앙을 핑계로 부모에 대한 부양의 의무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고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5:8에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족을 힘써 사랑해야 합니다. 상황이나 형편을 넘어서서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한 가족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인 동시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리고 가족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만이 이웃도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눈앞에 있는 내 가족도 이해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한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기도하실 때, 나는 이 사랑을 잘 지키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사랑을 성도와 이웃에게까지 전할 수 있을지 깊이 생각하고 결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11절 이하에서, 자식들의 시신이 짐승들의 밥이 되지 않도록 밤낮으로 지킨 리스바의 행위에 감동한 다윗과 백성이 사울과 요나단, 그리고 리스바의 아들들을 포함한 일곱 사람의 뼈를 거두어 함께 장례를 치른 후에야 하나님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다윗이 기근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울의 자손 일곱을 기브온 사람들에게 내어주어 죽게 한 것만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사해 주신 것이 아니었음을 뜻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재앙을 내리신 목적이 더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자손들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도 그 일을 부끄럽게 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사울의 죄악에 반대하지 않고 동참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함께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울 자손 일곱 사람을 처형한 것으로 만족하고 장례도 치러주지 않은 채 비가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이 사건에 대하여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의 자손들을 처형한 후에도 즉시 재앙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리스바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마음을 녹였습니다. 그로 인해 그 자식들은 물론 사울과 요나단까지 조상의 묘에 묻힘으로 사울 가문의 명예가 회복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죄인으로 취급받던 사울과 그 가족의 죽은 자들이 자기 조상의 묘에 안장될 수 있었다는 것은 모든 잘못이 사울과 그 집안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있었음을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자복하는 자의 허물을 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사 죄를 사해 주셨던 것입니다(요일 1:8-10).
여러분,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감명을 주는 리스바의 행위가 없었다면 기근은 장기화될 수 있었으며, 기브온 사람들에게 사울의 자손들을 내어준 다윗의 행위도 자칫하면 사울 가문을 멸하기 위한 정치적인 보복으로 비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리스바의 헌신적인 사랑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그로 인해 자기들의 허물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하심을 얻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썩어져 가는 사회를 바로잡을 힘이 어떤 권세 있는 자에게 달려 있다기보다는 참사랑을 실천할 줄 아는 사람에게 달려 있음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잠언 10:12에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전서 4:8에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부어주신 순수한 사랑, 첫사랑을 기억하며 이 땅의 회복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는지 돌아보고 그 일을 결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마지막으로 14절에,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기도한 사람은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었습니다. 1절에, 기근으로 인해 다윗이 하나님 앞에 간구했는데, 그 기도가 이제야 응답된 것입니다. 물론, 기근으로 인하여 기도한 사람이 다윗 한 사람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다윗이 기도했음을 밝히고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음을 말씀하는 것에서 우리는 최고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의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을 향해 베드로전서 2:9에서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권위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위하여 세우신 중재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구약 시대에 제사장들의 주요 임무는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자신이 어떤 잘못을 범하면 속죄 제물을 가지고 제사장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러면 제사장들은 그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속죄 제사를 드림으로 제물을 가지고 온 사람의 죄를 사함받게 했습니다. 말하자면 제사장은 일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로서 백성들의 죄를 하나님께서 사하여 주시도록 간구하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이러한 사명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사장들로서 이 세상을 위해 하나님께 날마다 간구해야 합니다. 특히, 이 사회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는 본문의 다윗처럼 이 사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그 원인을 진단하여 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는 곧, 이 사회가 잘되고 못되고는 우리의 행동 여하에 달려 있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가 세상의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면 이 사회도 잘될 것이나 만일 우리가 이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한다면 이 사회도 소망이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살아가는 것은 단순히 사회의 구성원으로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에게는 이 사회를 복되게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또 이 사회를 밝고 아름답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이 사명을 위하여 세움을 받은 이 시대의 왕같은 제사장인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일을 시작할 때 너무 거대한 꿈을 꾸기 보다는, 우리 가정부터, 우리 교회로부터, 우리 이웃으로부터 시작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이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결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상황이나 형편을 넘어서서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한 가족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인 동시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마땅한 도리임을 알아 리스바가 가졌던 사랑을 저희도 갖기를 원합니다. 또한, 성도가 살아가는 것은 단순히 사회의 구성원으로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를 복되게 할 책임과 의무가 있음을 알아 이 시대의 중재자로서 복의 근원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그 후에야 들으시니라
삼하 21:10~14
하나님이 우리에게 험한 세상을 이기며 살라고 주신 영적 무기들이 있습니다. 말씀, 기도, 찬양 등입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기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성도들이 그 중요성을 잘 알면서도 정작 기도 생활에 게을리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건 전적인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역사하십니다. 기도하면 반드시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다만 많은 성도가 기도의 응답이 없다고 느끼는 건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기도하는 대로 척척 이뤄지기는 바라는 심리가 있는 겁니다. 이런 생각은 기도의 기본을 망각한 처사입니다. 기도는 일방적 청구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쌍방적 대화입니다. 이런 기본을 무시하다 보니까 기도를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 혹은 ‘도깨비방망이’쯤으로 치부하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다못해 우리가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도 상대방이 내가 말하는 대로 항상 Yes(그래) 합니까? 로봇도 안 그럴 겁니다. 요즘 인공지능(AI) 챗봇(chatbot, 대화하는 로봇)도 다양하게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다양하게 응답하시는 건 당연합니다. ‘Yes’(그래) 외에 ‘No’(아니)로도 하십니다. 거절의 응답입니다. ‘Yes, but wait!’(그래, 좀 기다려)로도 하십니다. 그대로 해 줄 텐데 좀 기다리라는 겁니다. 가장 좋은 시기에 타이밍을 맞춰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No, but the other!’(아니, 대신 다른 것으로 줄게)로도 하십니다. 더 좋은 하나님의 대안으로 응답하시는 겁니다. 다양한 응답 중에 ‘Yes’(그래)는 당연히 좋고, ‘Yes, but wait!’(그래, 좀 기다려)는 시간 문제니까 괜찮습니다. 기다리면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십니다. ‘No, but the other!’(아니, 대신 다른 것으로 줄게)도 괜찮습니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거니까. 한 가지 문제는 기도할 때 하나님이 ‘No’ 하시는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 생활을 이렇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Yes’로 응답하시도록 내 기도를 바꾸자! 이를 위해 하나님이 어떤 경우에 ‘No’로 응답하시는지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그런 경우들만 피하면 얼마든지 ‘Yes’로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만 되면 기도하는 게 얼마나 재미있겠습니까! 이 말씀 그대로 되는 겁니다. 요일5:14~15 “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그대로 받는다고 했지만 잘 보면 조건이 붙어 있죠. ‘그의 뜻대로’입니다. 기도 응답은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님이라 부르잖아요. 나는 종이고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고백입니다. 당연히 주인의 뜻대로 되는 게 맞죠. 그리고 그게 좋은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게 기도하는 경우를 알아보면 됩니다. 그런 경우 ‘No’로 응답하시거든요. 이런 경우를 피하면 우리가 기도하는 대로 하나님이 그대로 응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1]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이 거절(No) 하시는 경우 → 죄악, 욕심, 원한이 있을 때
성경을 연구해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대해 ‘No’라고 응답하시는 경우가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혹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세 가지 장애물이 있는 경우입니다.
① 죄악 :
첫째는,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악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숨은 죄가 있으면 하나님이 ‘No’ 하십니다. 시편 66:18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사59:1~2은 또 이렇게 증거합니다. “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나 자신을 돌아보고 혹시라도 거리끼는 게 있으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여호수아 7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아이 성 전투에서 실패한 이야기 나옵니다. 6장의 기록대로 그들은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을 거뜬히 정복했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이 성을 정복하지 못하고 실패하자 당황합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무슨 연고인지 여쭈어봅니다. 그때 하나님은 숨은 죄가 있어서 그렇다고 지적합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제비뽑기를 통해 아간을 찾아냅니다. 아간이 탐욕에 이끌려 시날 산 외투 한 벌과 금과 은 덩어리를 훔쳐 장막 밑에 숨겨두었던 것입니다. 아간과 그 일족을 아골 골짜기에서 처단한 후에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이 성 정복에 성공하게 합니다.
② 욕심 :
두 번째 장애물은 욕심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지나친 욕심으로 구하면 하나님이 거절하십니다. 약4:2~3 “2 ...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cf. 약1:15)
비근한 예로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계속 초콜릿을 달라고 조르는 경우 어떻게 합니까? 달라는 대로 다 주면 큰일납니다. 머지않아 치아가 엉망이 되겠죠. 그러니까 어느 선까지 허락하고 그다음은 단호히 거절합니다. 어린아이는 자기 욕심대로 요구하지만, 판단력이 있는 부모로서는 무조건 들어줄 수 없는 겁니다.
③ 원한 :
세 번째 장애물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원한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에 갈등이나 불화, 증오나 미음 등이 있으면 하나님이 거절하십니다. 이런 것들을 통틀어 ‘원한’(억울하고 원통해서 응어리진 마음)이라 칭합니다.
인간끼리 화목하지 못한 상태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상대해 주시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기도문 가운데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고 상대해 주시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원리가 바로 이겁니다. 십자가는 수직선과 수평선의 교차입니다. 십자가 속죄로 하나님과 화목하고 동시에 이웃과 화목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또 예수님이 산상수훈 가운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5:23~24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다른 사람과 불화한 가운데 예배드리거나 기도하면 하나님이 받아주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2] 다윗 시대에 기도의 문이 닫힌 원인 : 기브온 족속의 원한, 리스바의 원한
오늘 본문이 바로 이런 원리를 우리에게 정확하게 가르쳐 줍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우리 가운데 원한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라면 하나님이 거절하십니다. 말하자면 기도가 막히는 겁니다.
그때는 다윗 왕의 시대였습니다. 나라를 정비하고 안정되어 가나 했는데 뜻밖에도 3년 연속 기근이 이어집니다. 백성들이 굶주리고 난리가 났습니다. 당연히 다윗도 백성들도 하나님께 비를 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기도의 문이 닫혀버린 겁니다. 다윗은 너무 답답해서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지 하나님께 여쭈어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해결되지 못한 원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그것은 기브온 족속의 원한 문제였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또 리스바라는 여인의 원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미처 깨닫지 못한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울과 그 집안이 저지른 죄악의 문제였습니다. 여호수아 당시 기브온 족속과 맺은 언약을 무시하고 그들을 학살할 사건입니다.
여호수아 9장을 보면, 가나안 땅 정복 당시 여호수아가 기브온 족속과 언약을 맺은 사건이 나옵니다(수9:3~27). 기브온 족속은 가나안 원주민이므로 하나님의 명령대로 진멸 대상입니다. 그 이유는 가나안 원주민이 우상 숭배와 죄악에 절어 있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그 영향을 받지 않도록 미리 차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기브온 족속은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파죽지세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리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살길을 궁리하다가 속임수를 씁니다. 먼 데서 온 것처럼 위장합니다. 곰팡이가 난 떡, 그리고 닳아 빠진 의복과 신발을 준비합니다. 그것들을 보여주면서 화친하자고 요청합니다. 여호수아와 백성은 검증도 하지 않고 좋다며 화친 언약을 맺었습니다, 얼마 후 사실을 알게 됐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언약이라 그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대신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들어오되 제단을 위해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일을 담당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이방인 선교의 열매가 된 겁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그 언약을 무시하고 편협하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에 미쳐 기브온 족속을 대거 학살한 겁니다. 그러니 기브온 족속 가운데 원한이 사무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은 그 사실을 알고 기브온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삼하21:3 “다윗이 그들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하니”
그들의 원한으로 기도가 막혔으니 풀어달라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 어떻게 해 주면 좋겠냐고 물은 겁니다.
그때 그들이 뭐라고 대답하죠? 자신들의 원한 문제는 은금으로 해결할 게 아니고, 학살당한 기브온 사람들의 핏값을 치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사울의 집안에서 7명을 내어달라고 요구합니다. 7명을 요구한 것은, 7이 완전을 의미하는 상징수이므로 최소한의 숫자로 제시한 듯합니다. 이에 다윗은 수락했고, 사울의 첩 리스바의 아들 2명과 사울의 외손자 5명을 내어줍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그 7명을 하나님 앞에서 교수형에 처합니다. 그런데 그 시체가 방치된 가운데 리스바는 시체 옆 바위 위에 베옷을 펼쳐놓고 앉아 밤낮으로 시체에 새와 짐승이 달려들지 못하도록 지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은 자신으로서는 당연한 심판을 집행한 것이지만 그로 인해 또 다른 원한이 생긴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사울 집안을 달래줍니다. 멀리 길르앗 야베스에 방치되어 있었던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뼈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7명의 뼈를 수습한 후, 모두 다 그 조상 기스의 묘에 합장합니다. 아마 그 일로 인해 리스바의 원한은 물론이고 사울 집안 사람들의 원한도 풀리지 않았을까 짐작됩니다.
[3] 원한을 푼 이후 : 기도의 문이 열리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의 원한이 풀리게 되자 어떤 일이 생깁니까? 삼하21:14(하) “ ...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 사람들 사이에 원한과 응어리가 풀리니까 하나님과 막혔던 관계가 회복됩니다. 그리고 기도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그제야 하나님이 다윗과 백성의 기도에 ‘Yes’로 응답하셨습니다. 비가 내리고 추수를 잘하게 되어 기근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욥기에 나옵니다. 동방의 의인이었던 욥에게 극한 고난이 닥칩니다. 하루아침에 10 남매를 잃고 전 재산을 잃었습니다. 몸에는 몹쓸 병이 생깁니다. 아내는 극한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욥을 보고 욕설을 퍼부은 후 도망갑니다. 그런데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으로 친구들이 몰려와서 욥을 정죄합니다. 무언가 죄가 있으니까 그런 고난을 당하는 거라고 강변합니다. 욥의 마음에 응어리가 생겼을 겁니다. 그래도 욥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실존을 체험한 후 오히려 회개합니다(욥42:5~6). 하나님을 잘 모르고 함부로 말한 것을 회개하고 신앙 고백을 새롭게 합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관문이 남아 있었습니다. 친구들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해 마음에 응어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친구들에게 욥에게 사과할 것을 명령합니다. 욥에게 가서 번제를 드리라고 하셨고 다행히 그들은 순종합니다. 욥은 그들을 용서하고 기도합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욥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친구들도 용서해 주시고 축복하십니다. 무엇보다 욥에게 놀라운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욥42:10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1장에 기록된 재산목록과 비교해 보면 정확히 두 배입니다. 자식은 10명을 주셨는데, 사실은 두 배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가 있는 자식이 10명이 더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원리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과 나의 1대 1 관계가 신앙의 기본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죄악이나 욕심이 끼어 있으면 기도의 문이 막힙니다. 하나님이 ‘Yes’로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 놓치기 쉬운 게 바로 이겁니다. 나와 이웃 사이에 불편한 원한 즉 마음의 응어리가 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기도의 문이 막혀버립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용서하고,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사랑하면 더 좋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도 더욱 좋아지고 기도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됩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아무쪼록 이런 체험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기도의 재미가 생깁니다.
스위스의 의사, 정신의학자, 그리고 상담가였던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 1898~1986)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저서 「폴 투르니에의 치유」에 보면 가가 직접 체험한 임상 사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악성 빈혈이 있는 여성 환자가 있었습니다. 6개월간 치료를 받았지만 병세가 오히려 나빠졌습니다. 그는 집중 치료를 위해 입원을 권유했습니다. 일주일 후에 왔는데 그 환자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어서 놀랐습니다. 검사를 해보니까 깨끗이 치유되어 있었습니다. 놀라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미워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며칠 전에 그를 찾아가서 용서하고 화해했습니다. 그랬더니 마음이 시원해지고 몸도 가뿐해졌습니다.” 마음에 원한이 없어지니까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됐고 기도의 문이 활짝 열린 겁니다.
「두란노아버지학교」 전 이사장(2년 전 건강 문제로 퇴임했지만 회복되어 여전히 배후에서 활동 중) 김성묵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학교는 1995년 출범 이후 30여 년 동안 74개국 298개 도시에서 약 41만 명이 수료한 프로그램으로 성장했습니다. 참가자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가지각색입니다. 부부 관계, 부모 자식 관계 등이 회복되어 천국 같은 삶으로 변화된 간증들입니다. 온누리교회 고 하용조 목사님의 권유로 아버지학교를 맡게 됐는데 처음에는 고민이 많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본인의 가정부터 문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부부는 캠퍼스 커플로 만나 가난하게 시작했지만 열심히 살았고 집도 마련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살 만해지니까 한눈을 팔게 됐습니다. 부부 사이에 갈등과 불화의 문제가 생겼고, 급기야 이혼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다행히 영성수련회 다녀오면서 예수님이 제대로 만났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아내에게 용서를 구할 용기가 생깁니다. 그런데 용서를 구하는 그에게 아내는 이렇게 대꾸합니다. “다른 사람은 다 용서해도 당신만은 절대로 용서 못 해.” 계속 냉담하며 지내는데 어느날 부부성경공부에 함께 참석하게 됩니다. 끝날 무렵 목사님이 이렇게 멘트합니다. “세상에서 절대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남편이고, 아내입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께 용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기도하려고 하다가 아내의 반응이 궁금해서 슬쩍 눈을 떠서 보니까 고개를 숙이고 괴로워하더니 잠시 후 어깨가 들썩거렸고 나중에는 대성통곡합니다. 아내는 남편만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자기도 잘못했음을 깨닫고 회개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부부가 서로 용서를 구하고 극적으로 화해합니다. 그리고 자녀들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 구했습니다. 그러자 온 가족이 화목해졌고 부부가 제일 좋은 친구가 됐습니다. 한 마디로 천국 가정이 된 겁니다. 그 일 계기로 아버지학교를 잘전에 발전을 거듭했고, 부인 권사님이 수년 후부터 어머니학교 이끌게 됐습니다. 이렇게 해서 얼마나 많은 가정을 변화시켰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기도는 정말 중요한 영적 무기입니다. 기도를 선용하면 험한 세상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다 보면 막힐 때가 많습니다.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는 것 같아 흥미를 잃게 됩니다. 그런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장애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숨은 죄악, 지나친 욕심, 그리고 서로 주고받은 상처로 인한 원한이 바로 그 장애물입니다. 특히 놓치기 쉬운 게 바로 원한의 문제입니다. 마음의 응어리를 풀지 않으면 백날 기도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기록된 대로 다윗 시대에 사람들 사이의 원한을 풀어줌으로 기도의 문이 활짝 열려 기근이 해결된 사건을 꼭 기억하십시오. 아무쪼록 하나님 앞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이 기도의 문이 활짝 열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리스바
삼하 21:10-14
• 아비소스의 문이 열리고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부활절이 지난 후 첫번째 주일입니다. 부활절 이후에 벌어진 일들을 보도한 복음서 이야기를 요약할 수 있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당혹감, 두려움, 놀람, 감격일 겁니다. 처음에는 제자들조차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믿지 못했습니다. 절망의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그들의 내면이 차츰 정돈되고 하늘의 빛이 서서히 비쳐들자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사람들을 당당하게 일으켜 세웁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한다(고전15:53)면서, 호세아서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여 말합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고전15:55, 참조 호13:14) 우리도 이런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죽음의 세력처럼 보입니다.
얼마 전 우리는 케냐의 한 대학에서 알샤밥의 테러로 148명의 학생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희생 당한 이들 대부분은 기독교인들입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새로운 이슬람 국가를 세운다는 파시즘적 망상으로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함부로 다루는 종교인들은 그들이 속한 종교가 무엇이든 간에 자기 탐욕에 복무하는 이들일 뿐입니다. 분쟁을 만들어냄으로 자기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그것이 무엇이든 악마적입니다. 시리아, 이라크, 리비아에서 '이슬람 국가'(Islam State)에 의해 희생된 이들이 많습니다. 지난 2월 22일에는 리비아에 머물고 있던 이집트 콥틱 기독교인들 22명이 참수를 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자기들의 견해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을 제거함으로 순수한 이슬람 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저들이 내세우는 명분입니다. 그들은 인류 문화 유산들을 파괴하는 만행도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속절없이 퇴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접할 때마다 요한계시록에 언급되고 있는 아비소스 곧 무저갱(밑바닥이 없는 깊은 곳)의 문이 열린 것 같아 아뜩해지곤 합니다. 그곳에 갇혀 있던 악마가 풀려나 세상을 혼돈으로 몰아가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 문을 연 것은 인간의 과도한 욕망입니다. 그 문을 다시 닫으려면 생명 중심적 사고로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생명보다 더 큰 가치는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문화, 종교, 이데올로기도 생명의 가치를 앞지를 수는 없습니다. 성서의 전통은 한 사람을 파멸시킨 사람은 온 세상을 파멸시킨 것과 같고 한 사람을 살려낸 사람은 온 세상을 살려낸 것과 같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을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희생당해서는 안 된다. 만일 적들이 모여 있는 여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모두 욕보지 않으려면 너희 가운데 하나를 우리에게 보내라'고 한다면 그들이 와서 모두를 욕보이게 할지언정 어느 한 여자를 뽑아서 욕보게 해서는 안 된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누가 사람이냐>, 종로서적, p. 137)
이런 판단의 근거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을 온 세상 만큼 값진 존재로 여겨야 합니다. 더 나아가 다른 이들을 그렇게 여겨야 합니다.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수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 정치적 보복
오늘의 본문은 다윗의 통치 시기에 벌어진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1장에 배치되어 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그의 통치 초기에 벌어진 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정확히 그 때를 알 수는 없기 때문에 성경의 순서를 따라 이야기를 재구성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이 본문에 별로 주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음울한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된 까닭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블레셋과 겨뤘던 길보아 산 전투에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은 후, 다윗은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권력 이양기의 혼돈도 시간이 가면서 잦아들었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김으로써 다윗은 확고한 토대 위에 자기 권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미스러운 일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그의 남편 우리아를 격전이 벌어지는 곳에 보내 죽게 한 것은 다윗의 일생의 큰 오점으로 남았습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란도 제압되었고, 세바의 반란도 진압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땅을 피폐하게 만드는 법입니다. 춘추전국시대의 참상을 보았던 노자는 "군대를 일으켰던 곳에는 가시덤불이 자라고 큰 군대가 지나간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든다"(師之所處, 荊棘生焉, 大軍之後, 必有凶年, 도덕경 30장)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시덤불이 꼭 너도밤나무과의 상록 활엽 교목을 이르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 없습니다. 흉흉한 인심, 척박해진 대지, 참혹한 기억 등이 모두 가시덤불입니다. 세상의 모든 전쟁은 반생명적입니다.
많은 전란을 겪은 이스라엘에도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흉년이 세 해 동안이나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흉년은 인간이 어쩔 수 없이 겪어내야 할 자연재해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인간이 빚어낸 참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곡절을 여쭸습니다. 그러자 "사울과 그의 집안이 기브온 사람을 죽여 살인죄를 지은 탓"(삼하21:1)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본래 기브온 사람들은 아모리 족 가운데서 살아남은 이들이었는데, 사울의 일족이 그들을 다 죽이려고 하였고 그들의 한이 하늘에 사무쳐 흉년이 닥쳐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기브온 사람을 불러다가 어떻게 해야 그들의 원한이 풀려 이스라엘을 위해 복을 빌어주겠는가 묻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 집안과의 갈등은 금이나 은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면서 사울의 일족 가운데 남자 일곱 명을 넘겨주면 그들을 나무에 매달아 죽임으로 억울함을 풀겠다고 대답합니다. 다윗은 사울과 리스바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과 사울의 딸 메랍과 아드리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다섯을 기브온 사람들에게 넘겨줍니다. 결국 그들은 하루 아침에 죽임을 당했고 나무에 매달린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게 매우 불편하고 불쾌하게 다가옵니다. 우선 억울한 일을 풀기 위해 또 다른 폭력에 의지하는 것이 합당한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내 마음이 더 혼란스러운 것은 이 일이 고도의 정치적 행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 가문이 권토중래를 노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차에 삼 년 흉년이 들었고, 다윗은 그 흉년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사울의 죄 때문이라는 하늘의 응답을 받았다고 선전했습니다. 심정적으로 사울 가문을 그리워하던 이들도 국가에 닥쳐온 재난 앞에서 그들을 함부로 두둔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이 단락을 읽을 때마다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의 손을 빌어 사울 가문을 제거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곤 합니다.
• 어머니의 한
그런 후에 등장하는 것이 리스바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던 그는 졸지에 생때같은 아들 둘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빙자한 폭력이었습니다. 전형적인 희생양 만들기였습니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을 뭐라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리스바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 막강한 권력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늘에 호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리스바는 죽임을 당한 자기 두 아들과 메랍의 다섯 아들들의 시신을 거두어다가 너럭바위 위에 올려놓고는 굵은 베로 만든 천을 쳐 놓았습니다. 보리를 거두기 시작할 때로부터 그 주검 위로 가을 비가 쏟아질 때까지, 리스바는 그 시신들 곁에 머물렀습니다. 생각만 해도 스산한 광경입니다. 보리를 거둘 때가 대략 4월 경이고 가을 비가 내릴 때가 9-10월 경이라고 본다면 거의 반 년에 해당합니다. 리스바는 낮에는 공중의 새가 그 주검 위에 내려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들이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어마어마한 집념입니다. 세월이 가면 아픔이 스러질 법도 하건만 리스바의 한은 스러지지 않았습니다.
리스바를 나는 '뒤집힌 안티고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안티고네는 그리스 비극작가인 소포클레스의 작품 제목인 동시에 주인공의 이름입니다. 테바이의 왕이었던 오이디푸스가 자기가 저지른 운명적인 죄를 자책하며 스스로 눈을 찔러 실명한 채 세상을 떠돌자, 아들 둘은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다투었고 그 싸움 끝에 둘 다 죽고 맙니다. 그러자 삼촌인 크레온이 왕이 되었고, 그는 테베에 반역했던 왕자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들판에 버려두고 매장하지 말라는 포고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자기 오라비의 시신을 차마 들짐승들의 밥으로 내줄 수가 없어서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해줍니다. 그 사실이 발각되어 안티고네는 왕 앞에 끌려옵니다. 크레온은 왕의 포고령을 어겼다며 안티고네를 혹독하게 몰아붙이지만 안티고네는 신의 법에 따랐을 뿐이라고 말하면 자기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안티고네는 지하 감옥에 갇힌 채 죽습니다. 안티고네가 오라비의 시신을 매장했다가 어려움을 겪었다면 리스바는 시신 매장을 거부했기에 체제를 흔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리스바의 존재는 다윗은 물론이고 이 일에 연루된 모든 사람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의 한을 외면하고는 그 땅에 진정한 평화가 깃들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일까요? 만시지탄은 있지만 다윗은 필요한 조치를 취합니다. 그는 길르앗의 야베스로 가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그 주민에게서 찾아오라고 부하들에게 지시합니다. 그리고 리스바가 지키고 있던 그 무고한 자들의 뼈까지도 수습해서 사울의 아버지 기스의 무덤에 합장하도록 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마무리는 의미심장합니다.
"사람들이, 다윗이 지시한 모든 명령을 따라서 그대로 한 뒤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돌보아 주시기를 비는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셨다."(21:14)
무슨 이야기입니까? 무고하게 죽어간 이들의 한이 풀렸다는 말이 아닐까요? 그들의 죽음이 무고한 죽음임이 드러났다는 말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땅에서 맨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푼 것은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이 있는데, 그것을 모른 척 외면하거나 덮어둔다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잘못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억울한 이들의 한은 신원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땅도 회복됩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말은 이런 사실을 장엄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날에 내가 응답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에 응답하고, 이 먹거리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할 것이다."(호2:21-22)
• 긍휼히 여기소서
엘리어트는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추억과 욕정을 뒤섞고/잠든 뿌리로 봄비를 깨운다'. 우리는 이제 4월에 이 시를 낭송하기 어렵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벌써 일년이 되어 가지만, 진실은 드러나지 않았고,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유가족들은 여전히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거짓말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거짓말 하고, 도둑질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도둑질 하고, 살인을 하는 이들은 여전히 살인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불의의 공모자들은 여전히 뻔뻔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합니다. 봄이 되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냉랭합니다. 우리 마음의 봄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심성은 점점 메말라가고 급기야 황폐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고통 가운데 울고 있는 이들을 조롱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아무리 아프더라도 진실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을 존귀히 여기는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이 땅의 리스바들의 한이 신원되지 않는 한 나라의 미래는 없습니다. 외면하고 싶고, 빨리 덮어버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습니다. 사울 일족의 억울한 죽음의 실상이 드러나고, 그들의 주검이 정중하게 매장되었을 때 그 땅의 흉년이 그쳤습니다. 하나님이 땅의 소리에 응답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오늘 눈물 짓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그리고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리스바
삼하 21:10-14 / 김기석목사
• 아비소스의 문이 열리고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부활절이 지난 후 첫번째 주일입니다. 부활절 이후에 벌어진 일들을 보도한 복음서 이야기를 요약할 수 있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당혹감, 두려움, 놀람, 감격일 겁니다. 처음에는 제자들조차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믿지 못했습니다. 절망의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그들의 내면이 차츰 정돈되고 하늘의 빛이 서서히 비쳐들자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사람들을 당당하게 일으켜 세웁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한다(고전15:53)면서, 호세아서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여 말합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고전15:55, 참조 호13:14) 우리도 이런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죽음의 세력처럼 보입니다.
얼마 전 우리는 케냐의 한 대학에서 알샤밥의 테러로 148명의 학생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희생 당한 이들 대부분은 기독교인들입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새로운 이슬람 국가를 세운다는 파시즘적 망상으로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함부로 다루는 종교인들은 그들이 속한 종교가 무엇이든 간에 자기 탐욕에 복무하는 이들일 뿐입니다. 분쟁을 만들어냄으로 자기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그것이 무엇이든 악마적입니다. 시리아, 이라크, 리비아에서 '이슬람 국가'(Islam State)에 의해 희생된 이들이 많습니다. 지난 2월 22일에는 리비아에 머물고 있던 이집트 콥틱 기독교인들 22명이 참수를 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자기들의 견해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을 제거함으로 순수한 이슬람 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저들이 내세우는 명분입니다. 그들은 인류 문화 유산들을 파괴하는 만행도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속절없이 퇴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접할 때마다 요한계시록에 언급되고 있는 아비소스 곧 무저갱(밑바닥이 없는 깊은 곳)의 문이 열린 것 같아 아뜩해지곤 합니다. 그곳에 갇혀 있던 악마가 풀려나 세상을 혼돈으로 몰아가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 문을 연 것은 인간의 과도한 욕망입니다. 그 문을 다시 닫으려면 생명 중심적 사고로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생명보다 더 큰 가치는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문화, 종교, 이데올로기도 생명의 가치를 앞지를 수는 없습니다. 성서의 전통은 한 사람을 파멸시킨 사람은 온 세상을 파멸시킨 것과 같고 한 사람을 살려낸 사람은 온 세상을 살려낸 것과 같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을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희생당해서는 안 된다. 만일 적들이 모여 있는 여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모두 욕보지 않으려면 너희 가운데 하나를 우리에게 보내라'고 한다면 그들이 와서 모두를 욕보이게 할지언정 어느 한 여자를 뽑아서 욕보게 해서는 안 된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누가 사람이냐>, 종로서적, p. 137)
이런 판단의 근거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을 온 세상 만큼 값진 존재로 여겨야 합니다. 더 나아가 다른 이들을 그렇게 여겨야 합니다.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수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 정치적 보복
오늘의 본문은 다윗의 통치 시기에 벌어진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1장에 배치되어 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그의 통치 초기에 벌어진 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정확히 그 때를 알 수는 없기 때문에 성경의 순서를 따라 이야기를 재구성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이 본문에 별로 주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음울한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된 까닭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블레셋과 겨뤘던 길보아 산 전투에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은 후, 다윗은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권력 이양기의 혼돈도 시간이 가면서 잦아들었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김으로써 다윗은 확고한 토대 위에 자기 권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미스러운 일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그의 남편 우리아를 격전이 벌어지는 곳에 보내 죽게 한 것은 다윗의 일생의 큰 오점으로 남았습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란도 제압되었고, 세바의 반란도 진압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땅을 피폐하게 만드는 법입니다. 춘추전국시대의 참상을 보았던 노자는 "군대를 일으켰던 곳에는 가시덤불이 자라고 큰 군대가 지나간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든다"(師之所處, 荊棘生焉, 大軍之後, 必有凶年, 도덕경 30장)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시덤불이 꼭 너도밤나무과의 상록 활엽 교목을 이르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 없습니다. 흉흉한 인심, 척박해진 대지, 참혹한 기억 등이 모두 가시덤불입니다. 세상의 모든 전쟁은 반생명적입니다.
많은 전란을 겪은 이스라엘에도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흉년이 세 해 동안이나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흉년은 인간이 어쩔 수 없이 겪어내야 할 자연재해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인간이 빚어낸 참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곡절을 여쭸습니다. 그러자 "사울과 그의 집안이 기브온 사람을 죽여 살인죄를 지은 탓"(삼하21:1)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본래 기브온 사람들은 아모리 족 가운데서 살아남은 이들이었는데, 사울의 일족이 그들을 다 죽이려고 하였고 그들의 한이 하늘에 사무쳐 흉년이 닥쳐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기브온 사람을 불러다가 어떻게 해야 그들의 원한이 풀려 이스라엘을 위해 복을 빌어주겠는가 묻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 집안과의 갈등은 금이나 은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면서 사울의 일족 가운데 남자 일곱 명을 넘겨주면 그들을 나무에 매달아 죽임으로 억울함을 풀겠다고 대답합니다. 다윗은 사울과 리스바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과 사울의 딸 메랍과 아드리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다섯을 기브온 사람들에게 넘겨줍니다. 결국 그들은 하루 아침에 죽임을 당했고 나무에 매달린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게 매우 불편하고 불쾌하게 다가옵니다. 우선 억울한 일을 풀기 위해 또 다른 폭력에 의지하는 것이 합당한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내 마음이 더 혼란스러운 것은 이 일이 고도의 정치적 행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 가문이 권토중래를 노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차에 삼 년 흉년이 들었고, 다윗은 그 흉년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사울의 죄 때문이라는 하늘의 응답을 받았다고 선전했습니다. 심정적으로 사울 가문을 그리워하던 이들도 국가에 닥쳐온 재난 앞에서 그들을 함부로 두둔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이 단락을 읽을 때마다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의 손을 빌어 사울 가문을 제거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곤 합니다.
• 어머니의 한
그런 후에 등장하는 것이 리스바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던 그는 졸지에 생때같은 아들 둘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빙자한 폭력이었습니다. 전형적인 희생양 만들기였습니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을 뭐라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리스바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 막강한 권력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늘에 호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리스바는 죽임을 당한 자기 두 아들과 메랍의 다섯 아들들의 시신을 거두어다가 너럭바위 위에 올려놓고는 굵은 베로 만든 천을 쳐 놓았습니다. 보리를 거두기 시작할 때로부터 그 주검 위로 가을 비가 쏟아질 때까지, 리스바는 그 시신들 곁에 머물렀습니다. 생각만 해도 스산한 광경입니다. 보리를 거둘 때가 대략 4월 경이고 가을 비가 내릴 때가 9-10월 경이라고 본다면 거의 반 년에 해당합니다. 리스바는 낮에는 공중의 새가 그 주검 위에 내려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들이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어마어마한 집념입니다. 세월이 가면 아픔이 스러질 법도 하건만 리스바의 한은 스러지지 않았습니다.
리스바를 나는 '뒤집힌 안티고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안티고네는 그리스 비극작가인 소포클레스의 작품 제목인 동시에 주인공의 이름입니다. 테바이의 왕이었던 오이디푸스가 자기가 저지른 운명적인 죄를 자책하며 스스로 눈을 찔러 실명한 채 세상을 떠돌자, 아들 둘은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다투었고 그 싸움 끝에 둘 다 죽고 맙니다. 그러자 삼촌인 크레온이 왕이 되었고, 그는 테베에 반역했던 왕자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들판에 버려두고 매장하지 말라는 포고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자기 오라비의 시신을 차마 들짐승들의 밥으로 내줄 수가 없어서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해줍니다. 그 사실이 발각되어 안티고네는 왕 앞에 끌려옵니다. 크레온은 왕의 포고령을 어겼다며 안티고네를 혹독하게 몰아붙이지만 안티고네는 신의 법에 따랐을 뿐이라고 말하면 자기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안티고네는 지하 감옥에 갇힌 채 죽습니다. 안티고네가 오라비의 시신을 매장했다가 어려움을 겪었다면 리스바는 시신 매장을 거부했기에 체제를 흔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리스바의 존재는 다윗은 물론이고 이 일에 연루된 모든 사람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의 한을 외면하고는 그 땅에 진정한 평화가 깃들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일까요? 만시지탄은 있지만 다윗은 필요한 조치를 취합니다. 그는 길르앗의 야베스로 가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그 주민에게서 찾아오라고 부하들에게 지시합니다. 그리고 리스바가 지키고 있던 그 무고한 자들의 뼈까지도 수습해서 사울의 아버지 기스의 무덤에 합장하도록 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마무리는 의미심장합니다.
"사람들이, 다윗이 지시한 모든 명령을 따라서 그대로 한 뒤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돌보아 주시기를 비는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셨다."(21:14)
무슨 이야기입니까? 무고하게 죽어간 이들의 한이 풀렸다는 말이 아닐까요? 그들의 죽음이 무고한 죽음임이 드러났다는 말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땅에서 맨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푼 것은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이 있는데, 그것을 모른 척 외면하거나 덮어둔다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잘못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억울한 이들의 한은 신원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땅도 회복됩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말은 이런 사실을 장엄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날에 내가 응답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에 응답하고, 이 먹거리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할 것이다."(호2:21-22)
• 긍휼히 여기소서
엘리어트는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추억과 욕정을 뒤섞고/잠든 뿌리로 봄비를 깨운다'. 우리는 이제 4월에 이 시를 낭송하기 어렵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벌써 일년이 되어 가지만, 진실은 드러나지 않았고,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유가족들은 여전히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거짓말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거짓말 하고, 도둑질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도둑질 하고, 살인을 하는 이들은 여전히 살인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불의의 공모자들은 여전히 뻔뻔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합니다. 봄이 되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냉랭합니다. 우리 마음의 봄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심성은 점점 메말라가고 급기야 황폐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고통 가운데 울고 있는 이들을 조롱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아무리 아프더라도 진실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을 존귀히 여기는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이 땅의 리스바들의 한이 신원되지 않는 한 나라의 미래는 없습니다. 외면하고 싶고, 빨리 덮어버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습니다. 사울 일족의 억울한 죽음의 실상이 드러나고, 그들의 주검이 정중하게 매장되었을 때 그 땅의 흉년이 그쳤습니다. 하나님이 땅의 소리에 응답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오늘 눈물 짓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그리고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그 후에야 기도를 들으시니라
삼하 21:10-14 / 김원효 목사(캘거리순복음중앙교회)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된 후 얼마 안되어 아주 심한 가뭄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했지만 3년째 기도 응답도 없고 가뭄이 더 심해졌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3년 만에 기도응답을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너무 괘씸해서 기근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 괘씸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옛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그 지역을 하나하나 점령할 때였습니다.
그때 기브온 거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무서워하여 꾀를 내었습니다. 그들과 싸우자니 힘이 미약하고 그들과 화친을 하려고 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가나안 사람들과 화친을 안하려고 합니다. 그들과 화친하면 나중에 우상숭배에 빠지고 올무가 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기브온 사람들은 지금 전쟁을 치루고 있는 이스라엘 진영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기에 군사 작전상 화친이 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브온 거민들이 사신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다 헤어진 옷을 입고,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곰팡이 난 떡을 가지고 여호수아를 찾아 화친을 청했습니다. 형편을 보니 멀리서 온 사람들 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브온 사람들을 헤치지 않기를 맹세를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이 바로 건너 동네 사람들인 겁니다. 감쪽같이 속은 겁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했기 때문에 기브온 사람들의 머리털 하나라도 건드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난 다음에 사울이 왕이 된 다음에 기브온 거민들을 보니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사울 왕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다는 잘못된 민족주의 사로잡혀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이 거하고 있는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예를 들면 나치 히틀러가 민족주의를 내세워 유대인들을 학살한 것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보시고 괘씸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아니, 내 이름으로 맹세를 했으면 지켜야하는데 네 마음대로 불순한 동기로 기브온 거민들을 학살을 해?” 그렇게 생각하신 겁니다. 그러는 중에 사울 왕이 죽고 다윗이 왕이 된지 얼마 안되어 3년 동안 가뭄이 든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께 어떻게 할지를 물어 보니 살아남은 기브온 거민들에게 물어 보라는 거예요. 그랬더니 기브온 거민들이 자신의 민족을 무참히 학살한 주범들인 사울 왕의 자손 일곱 명을 자신들에게 넘겨달라는 겁니다. 다윗이 학살의 주범인 사울 왕의 자손 일곱 명을 넘겼더니 기브온 거민들이 그 학살범들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렇게 하고 났더니 비가 내리고 3년 기근이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리스바라는 사울의 첩이 자기 아들들이 기브온 사람들에 의해 목메어달려 죽게 되고 그 시체를 먹으려고 새와 짐승들이 덤비니까 그곳을 떠나지 않고 시체를 지키는 모성애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다윗 왕이 그들 7명의 시체와 옛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은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취하여 와서 조상의 묘실에 장사를 지내어 줍니다. 그리고 본문 14절에 보니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니라.”
이 사건을 보면서 느낀 것이 있을 것입니다. “아하, 하나님은 원한 맺힌 것을 풀어주기를 원하시는구나!” 생각해보세요. 기브온 거민들은 하루아침에 사울 왕의 사람들에게 학살을 당했습니다. 특별히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단순히 민족주의에 사로잡힌 사울 왕에 의해 부모가 죽었고 자녀가 죽었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공포에 떨어야했습니다.
그들은 원한에 사무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이 원한을 갚아주세요. 저희들은 합법적으로 이곳에서 살고 있었는데 사울 왕이 단순히 우리들을 쫓아낸 것이 아니라 무자비하게 죽였습니다. 더구나 옛날에 여호수아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리와 화친하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했지 않았습니까?”
즉 이스라엘 사울 왕이 저지른 죄는 하나님을 무시한 행위요, 상당히 질이 안좋은 죄였습니다. 그로 인해 기브온 거민들이 원한에 사무쳤고 하나님도 괘씸하게 여겼습니다. 이로 인하여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았고 3년 동안 기근이 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왜 3년 동안 기근이 든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기도하니 하나님이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사건 때문에 하늘에 원한이 맺혀서 그렇다. 그러니 먼저 그 원한 맺힌 것을 풀어라.”
이 이야기를 하다보니 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옛날에 처녀 귀신들이 나타나 새로 부임하는 사또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합니다. “사또님, 제 원한을 풀어주세요.” 그리고 사또가 그 원한을 풀어주자 그 고을의 저주가 없어진 것입니다. 즉 우리가 혹시 남에게 원한을 맺히도록 죄를 지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먼저 풀어야 기도가 응답이 되고 저주가 풀린다는 교훈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즉 원한을 풀지 않고 하나님께 제물만 드리면 열납이 안된다는 교훈입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회개라는 것도 어찌 보면 하나님과 인간에게 원한 맺힌 죄를 잘못했다고 고백하고 그 원한을 푸는 것입니다. 그렇게 먼저 원한을 풀면 천국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 즉 땅에서 해야 될 일을 바르게 하면 하나님도 그 바른 행위에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원한 맺힌 것을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축복을 풀어놓겠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혹시 원한 맺힌 것이 없습니까? 이런 질문이 나오면 먼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남이 자기에게 원한 맺히게 한 것은 두고두고 잊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기가 남에게 원한 맺히게 한 것은 쉽게 잊어버리고 생각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 속담에 “원한은 돌에 새기고 감사는 물에 새긴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먼저 남에게 원한 맺히게 한 것을 푸는 것이 순서라는 입니다. 그래야 기도의 응답이 있고 저주가 물러간다는 것입니다.
저의 집안 이야기 입니다. 건축업을 하시는 아버님이 풀이 죽어서 집안에 돌아오셨습니다. 그 이유는 갑자기 세금이 일억 사천만 원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지금까지 거액의 세금을 포탈했으니 일주일 안에 세금을 내지 않으면 가지고 있는 빌딩을 경매를 붙이겠다는 것입니다. 살펴보니 우리가 낼 세금이 아니라 모 회사 사장이 낼 세금인데 우리에게 잘못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세무서에 사정 설명을 해도 들어주지를 않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하루아침에 거지가 될 처지입니다. 그때 저와 저의 어머님이 한강을 바라다 보이는 마을 야산에 밤에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큰일 났습니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우리가 거지가 되면 하나님 망신, 우리 망신, 모두 망신인데 어떻게 좀 해주세요? 주여- 주여-” 다급하니 기도가 아주 간절히 나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저의 어머님에게 깨달음을 주신 것입니다. 다름 아닌 몇 년 전의 사건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때 저의 부모님이 평택에서 건축업을 하실 때 너무 바빠서 주일날 서울에 올라오지 못하고 그곳 평택 순복음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마침 건축헌금을 작정하는 날이었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그 당시 돈으로 120만원을 드리겠다고 하나님께 약속을 해놓고 먼저 있는 돈 18만원만 내고 나머지는 나중에 드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건축업을 하면서 몇 번이나 그 약속한 금액을 드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는데에도 차일피일 미룬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여러모로 축복을 해주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너무 무심한 것이었습니다. 이 일이 깨달아지자 저의 어머님이 당장 이모님에게 100만원을 빌려 평택 순복음 교회로 찾아가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목사님, 저희가 이전에 작정한 건축헌금을 내지 못해 문제가 터진 것 같습니다. 저희를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께 기도 좀 해주세요.”
그리고 이틀 후 저희 아버님이 기분이 좋아서 집에 들어오셨습니다. “야, 세금이 천만 원으로 다운이 되었다.” 할렐루야! 그런데 이것으로 저의 어머님의 기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에 또 다시 동네 앞산에 올라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세금을 감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천만 원 세금도 우리가 낼 것이 아닙니다. 아시지요. 하나님, 천만 원 세금도 감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한 후 저희 어머님이 또다시 100만원을 더 꾸어서 교회에 감사헌금으로 드렸습니다. 그러자 얼마 후 또 다시 저희 아버님이 기분이 아주 좋아서 들어오셨습니다. “야, 세금이 100만원으로 줄었다.” 할렐루야! 그 동안 하나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한 것을 풀고 나니 문제가 해결이 된 것입니다. 땅에서 먼저 푸니까 하늘에서도 풀어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겠지요. “아니, 하나님이 단 돈 몇 백만 원 때문에 쩨쩨하게 섭섭이가 들어가지고, 그것으로 인해 기도도 안들어 주고, 뭐 그런 속이 좁은 하나님이 다 있어? 그러다가 돈 가지고 오니까 기분이 좋아서 기도 들어 주고! 에이 참, 하나님, 잘났네요?”
여러분, 혹시 당신이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을 했다면 그것은 순전한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몇 백 만원 때문에 쩨쩨하게 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금도 은도 다 하나님의 것이요, 이 우주도 다 하나님의 것이요, 무엇이든지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신데 돈 몇 푼 때문에 쩨쩨해지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럼 무슨 이유로 기도도 듣지 않으시고 문제를 일으켜서 우리를 골탕을 먹이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충성을 못했습니까? 하나님을 배신했습니까?
어찌 보면 다윗왕 만큼 하나님께 충성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너는 나의 합한 자라” 하고 칭찬을 들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그가 왕 위에 있을 때 3년간이나 기근이 임한다는 말입니까? 혹시 하나님이 실수하지 않으셨나요? 물론 3년 기근 사건은 다윗 왕의 죄가 아닌 사울 왕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울 왕의 죄는 개인의 죄가 아닌 이스라엘 전체의 죄입니다. 옛날 기브온 거민과 약속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약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로 그 책임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게 있기에 이스라엘에 기근이 임한 것입니다.
좀더 근본적으로 3년 기근의 문제를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요 축복의 하나님이시지만 한편으로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해주어도 공의롭게 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둑놈을 축복해 주면 마귀가 옆에 와서 하나님께 참소를 합니다. “하나님, 저 사람은 도둑놈인데 그 사람을 축복해주면 공의롭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도둑질을 한 사람이 도둑질한 것을 회개하고, 도둑질 한 물건을 돌려주고, 정신적 피해를 입힌 것까지 보상을 해주어야 그 사람을 축복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로 구약 성경에 보면 보상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즉 남에게 상처주고 원한 맺히게 한 것을 먼저 풀어주라는 것입니다. 마음씨를 바르게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 후에야 기도를 들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물론 죄를 밥 먹듯이, 물 먹듯이, 간식 먹듯이 하는 저희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다 만족시키지는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기도는 막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를 100% 만족시키신 분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많은 죄로 하나님과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원한을 맺히게 할 때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원한을 대신 풀어주셨습니다.
고로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을 들으면 마음이 풀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들으면 하나님은 공의를 나타내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오늘 우리는 기도가 응답되기 원합니다. 문제가 풀어지기 원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원한 맺히게 한 것을 회개로서 푸시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되고 문제는 해결이 될 줄을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바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하는 예언이 외국 땅에 사는 우리에게도 성취되는 줄 믿습니다.
삼하 21:1, 13~14
sangseon7942 / 삼하 21:1, 13-14
이스라엘에 3년 동안 기근이 생겼습니다.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다윗이 하나님께 묻자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죄 때문이라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과 합의하여 사울의 후손 일곱을 내어주어 처형시켰습니다. 그 때 사울의 첩 리스바는 그들의 시체를 지키며 슬퍼했습니다. 다윗은 리스바의 고통을 듣고 사울과 요나단의 뼈를 거두어 그들과 함께 장사지냈고,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기도에 응답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세 가지를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1. 관계의 방해물을 제거해야 한다.
다윗이 이스라엘에 내린 기근의 원인을 알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1절). 이것은 다윗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습니다. 과거에 사울 왕이 기브온 사람들과의 맹세를 어기고 그들을 죽인 것이 현재의 기근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 무엇이 필요한지 물었고, 사울의 후손들 중 일곱을 내어주었습니다. 이 때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보호했습니다. 요나단과 맺은 언약도 중요했기 때문입니다(7절). 이렇게 다윗은 관계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요나단과의 약속을 모두 존중하고 있습니다. 그는 복잡한 상황에서도 관계적 방해물을 제거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관계는 삶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입니다. 교회 역시 영적 관계 공동체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고 말씀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3-14).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화목을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모든 직분이 화목을 위한 직분이라고 말했습니다(고후5:18-19). 관계의 중요성은 과학적으로도 검증되었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의 행복과 건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돈이나 성공이 아니라 '관계의 질'이라고 합니다. 로버트 월딩거 교수가 이끈 '하버드 성인발달연구'는 724명의 남성을 75년 동안 추적 관찰했는데, 그 결과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좋은 인간관계였습니다. 방해물 없는 관계가 우리의 정신적, 신체적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보여준 것 처럼 관계의 방해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선한 방법으로 방해물을 제거해야 한다.
리스바는 사울의 첩입니다. 그런데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로 자신의 두 아들이 죽임을 당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가 굵은 베를 가져다가 자기를 위하여 바위 위에 펴고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 시체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한지라"(삼하 21:10). 리스바는 아들들의 시체를 홀로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새와 들짐승이 아들의 시체를 상하게 할까봐 아들의 곁을 떠나지 않은 것입니다. 다윗이 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때 다윗은 자기의 죄로 인해 죽은 아들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는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윗은 리스바의 고통을 인정하고 사울과 요나단의 유해를 수습하여 그들의 조상 묘에 함께 장사지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의 정당한 요구와 더불어 리스바의 고통까지 해결해 준 것입니다. 어떤 영적인 방해물을 제거할 때 우리는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상으로 해야 합니다. 결과와 과정이 모두 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점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에게 정의를 베풀었고, 리스바에게는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룰 때 하나님의 응답이 임했습니다.
3. 선한 기도, 선한 행동, 선한 응답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14절). 다윗이 관계의 방해물을 제거하고, 선한 방법으로 해결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응답이 임했습니다. 기근은 끝났고 땅이 회복되었습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줍니다. 우리는 말과 혀로만 아니라 행동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진정한 영적 생활은 우리의 기도와 행동이 일치할 때 나타납니다. 기도와 행동의 일치가 응답의 은혜로 임합니다.
오늘 다윗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과정과 결과 모두에 관심을 두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의 억울함을 해결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리스바의 고통까지 고려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이 모든 관계의 방해물을 제거했을 때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필립 얀시는 그의 책 <기도: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기도는 하나님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바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기도는 하나님께 땅을 고쳐달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라, 다윗 자신이 관계의 방해물을 제거하면서 올바른 행동을 선하게 실천했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가장 큰 방해물인 죄를 제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롬5:10). 그리스도를 본 받아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방해물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용서를 구하는 것일 수도 있고, 용서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불의를 바로잡는 것일 수도 있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위로를 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선한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응답이 우리의 삶에, 우리의 가정에, 우리의 교회에, 그리고 우리의 사회에 임할 것입니다. 오늘도 이 믿음으로 선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내며 고통받는 이들과 아파하는 세상을 회복시키는 복된 삶이 되길 기도합니다.
슬픈 가족의 역사를 끝내기 위해 우리 주님이 행하신 일(삼하21:10~14)_2022-06-19(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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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렙66
2022. 6. 20.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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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데도 이렇게 가난에 허덕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많고, 병에 걸려 고통받는 자들도 많으며, 자녀들의 앞 길이 열리지 않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가? 물론 우리가 게으른 탓도 있을 것이며, 우리의 잘못된 선택도 한 몫 하옜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있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어떤 부지런과 노력도 사실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 한 예로, 내가 아무리 좋은 병원에 가서 좋은 치료를 받고 운동을 열심히 한다고 할지라도 병이 또다시 재발하고 낫지않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 놀라운 비밀을 푸는 열쇠는 슬픈 가족의 역사에 담겨있다.
슬픈 가족의 역사를 끝내기 위해 주님이 행하신 일
삼하 21:10~14 / 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1. 들어가며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는 구약도 있고 신약도 있다. 구약 말씀에 대해서는 보통 '율법'이라고 부르며, 신약 말씀에 대해서는 '복음'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것을 예수님과 관련지어 말한다면, 구약은 메시야에 관한 '예언'의 말씀이요, 신약은 메시야에 관한 '성취'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의 말씀이 어떻게 신약에 성취되었는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지만 때로는 구약의 말씀을 그대로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적용하기 어려운 것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원리는 똑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어떤 원리를 찾아내야 한다. 대입하면 결과가 동일하게 나오게 하는 어떤 영적인 원리를 찾아내어 그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듣게 될 말씀도 일종의 영적인 원리가 들어 있는 귀중한 말씀이다. 만약 우리가 이 말씀의 원리대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이 매우 변화될 것이다. 특별히 우리가 모두 가난과 질병과 저주가 없는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다윗 시대에 일어난 3년 기근을 다윗은 과연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가를 살펴 볼 것이다. 여기에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계속되고 있는 악한 영들의 대물림이 왜 생기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끊을 수 있는지도 나온다. 그리고 우리들의 회개가 이 악한 영의 역사를 종식시키는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도 실감하게 될 것이다.
2. 다윗이 말년에 겪은 3년의 기근, 다윗은 과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 냈을까?
다윗이 왕이 된지 약 30년이 흐르던 어느 날, 그러니까 그의 나이가 약 60세쯤 되었을 때에, 그 나라에 기근이 찾아왔다. 일 년은 그런대로 넘겼다. 하지만 이태를 계속해서 가뭄이 들었다. 좀 이상하다 싶었다. 그런데 가뭄은 3년을 채우고 있었다. 다윗은 이것은 분명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사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전쟁(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나라를 칠 경우에는 온 나라가 우상숭배를 했다든지 아니면 지도자가 큰 잘못을 범했을 때에 나타나는 징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아마도 자신을 뒤돌아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잘못인지를 그는 찾지를 못했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께로 이 문제를 가지고 간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것은 다윗이나 그의 백성들이 범죄한 어떤 잘못이 아니라 자신의 선왕이었던 사울왕과 그 집안의 잘못이라는 것이었다(삼하21:1). 그것은 사울왕이 계획적으로 이스라엘 땅에 살고 있는 기브온 거민을 살해하였고 또한 그들이 살고 있는 땅을 빼앗아 자기의 가문의 땅으로 병합을 시켰다는 것이다(삼하21:1,5). 그런데 참고로 기브온 거민은 사실 본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시기에 미리 항복하여 목숨을 부지받은 후에 성막에서 나무패며 물 깃는 자로 약 400년간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을 집단으로 살해한 것이다. 그리고 그 땅까지 빼앗은 것이다.
그러자 다윗은 즉시 살아남은 기브온 거민을 부른다. 그때 다윗도 당사자가 아니며, 불려 온 사람들도 실은 당사자가 아니다. 한 세대 이전에 일어났던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윗은 억울하게 죽어간 기브온 거민들의 원한을 풀어 주고자 그들에게 "내가 어떻게 속죄해야 여호와의 기업을 위해 너희가 기도하겠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과 사울왕과의 관계는 은금으로 해결하는 보상의 문제가 아니라, 목숨을 목숨으로 바꾸는 문제라고 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은 다윗왕의 허락 없이는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다윗은 그들의 요구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의 부모들을 살해하고 땅을 빼앗으려고 계획하고 행했던 사울왕의 후손들 일곱 명의 목숨을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죽이고 그들을 사울의 고향 기브아의 산 위에서 나무 위에 매달아 놓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독자였던 '므비보셋'은 내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도망칠 때 자신을 지켜 주었던 요나단과 맺은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아본 결과 사울왕에게는 한 명의 첩이 있었고 그의 첩 리스바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자 다윗은 그 두 명의 아들들 곧 알모니와 므비보셋을 취하였다. 그리고 사울의 본처가 낳은 첫째 딸 메랍에게서 태어난 5명의 아들들도 취하였다. 사울왕으로 본다면 첩의 아들들 2명과 외손자 5명을 취한 것이다. 그러자 기브온 거민들은 7명의 남자들을 죽여 나무 위에 매달아 놓는다. 그리고 얼마 후 이들에 대한 장례가 끝났을 때 하나님께서도 그 땅에 대한 기도에 응답해 주시어 3년간의 기근이 끝나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때 취했던 리스바의 행동이었다.
3. 자신의 아들 두 명을 잃은 리스바는 어떤 행동을 취했는가?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두 명의 아들을 내주어 나무에 매달려 죽게 했던 리스바의 행동이었다. 보통 여인이라고 한다면, 다윗에게 쳐죽일 놈으로 욕을 했든지, 아니면 죄는 자신의 남편인 사울왕이 지었는데, 왜 자신의 아들들이 그 죄값을 치러야 하느냐면서 울고불고 난리를 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여인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여인이 취한 행동은 2가지였다. 하나는 굵은 베옷을 가져다가 시신이 매달려 있는 바위 위에 펴놓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시체에 낮에는 새들이,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도록 계속 막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왜 그녀는 죄없는 자신의 아들들이 죽은 것에 대해 원망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던 것인가? 그것은 그녀가 취했던 행동 속에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첫째로, 그는 자신의 남편의 잘못에 대해 하나님께 대신 회개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당시에 '굵은 베옷'은 슬픔의 표시이자 회개의 표시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합의 경우를 보자. 그도 사울왕처럼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자신의 아내 이세벨을 통해 나봇을 죽게 하였으며,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아 자신의 나물밭으로 삼았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와 왕비를, 그들이 나봇을 죽인 것처럼 죽여서 개들이 아합의 피를 핧게 할 것이며, 개들이 이세벨의 살을 먹게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아합은 하나님께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의미로 굵은 베옷을 입고 그곳에 누우며 풀이 죽어 지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내리려고 한 징계를 당대에 내리지 아니하시고 후대에 내리신 일이 있었다(왕상21:27~28). 그렇다. 그녀는 조용한 회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자식이 죽어 슬픔 가운데 있었지만 그녀는 속으로 울면서 자신의 남편이 지은 죄를 용서받기를 기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시체에 동물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왜 그랬는가? 그것은 그 시체 위에 소나기처럼 빗물이 쏟아질 때까지 그렇게 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들과 외손자들의 죽음을 보시고 기브온 거민들의 억울함을 푸셨다는 것을 알려 달라고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속했을까? 다윗도 어느 날 그녀의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취한 행동에 감동했다. 자기 자식이 죽었는데도 왕이나 하나님에게 원망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인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비가 오기까지 회개의 기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다윗은 그녀의 행동을 하나님께서 받아 주셨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먼 곳에 파묻혀 있는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까지 가져온 후에 나무 위에 달려 죽은 7명의 뼈를 함께 모아서 사울왕의 선영에 장사 지내 주었다. 그러자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4. 하나님께서는 왜 사울왕에게 내릴 징계를 귀신에게 맡기지 않고 다윗과 남은 기브온 거민에게 맡겼는가?
우리는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신지 벌써 2천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간 것이다. 그러므로 악한 영들의 역사의 패턴이 확실히 달라진 상태에 있다. 구약 시대는 악한 영들의 집단 탈영이 없던 시절이었다. 사탄 마귀가 범죄했지만 여전히 하늘에서 하나님의 어전회의에 참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욥1:6~7, 왕상22:19~23, 슥3:1~5). 아직 하늘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2장을 읽어 보면 사탄과 그를 따르는 천사들이 하늘에서 쫓겨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는 아마도 예수님의 탄생 직전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에는 귀신들이 바글바글하지 않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다만 하늘에서 떨어진 몇몇의 악한 영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울왕이 범죄했고 또한 그 죄로 그의 후손을 징계할 때에 하나님은 귀신들을 쓰지 않았다. 다윗과 남은 기브온 거민으로 하여금 사울왕의 가문에게 심판을 행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에만 해도 한 번의 징계로 범죄가 용서되는 시기였다. 한 번 누군가 징계를 받으면 더 이상 그의 후손들에게 징계가 내려가지 않는 시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는 달라졌다. 사탄과 귀신들이 쫓겨 내려와 사탄의 왕국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죄지은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온갖 가난과 질병과 재앙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만약 우리의 조상 중에 누가 살인죄를 저지르고 착취한 죄를 저질렀다면 그는 그 죄값으로 인하여 악한 영들을 자기 몸속에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그가 죽으면 그의 후손에게 계속해서 내려간다. 악한 영들의 대물림이 계속되는 것이다. 언제까지 그렇게 대물림 되는가? 그것은 누군가가 조상들이 지은 죄를 회개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그것이 지속된다.
5. 리스바의 행동을 통해 주님께서 굳게 마음에 결정하신 것은 대체 무엇이었나?
그때 주님께서는 그녀의 행동을 보고 계셨다. 그런데 사실 기브온 거민을 죽인 것은 사울왕이었다. 그러므로 벌을 받을 일이 있다면 그가 받았어야 옳다. 하지만 그는 그 벌을 받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는 사울왕이 살아 있을 때에 죄값을 묻지 않았는가? 그것은 아마도 그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회개하지 않고 죽었다. 그렇지만 그렇더라도 그 죄값이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가 죽었다고 그 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우상숭배의 죄는 그 죄값을 묻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3~4대까지 묻겠다고 하셨다(출20:5). 그러므로 죄값을 조상이 받지 아니했다면 그의 3~4대의 후손이 받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울은 우상숭배의 죄를 지었는가? 그건 아니었다. 그는 살인죄와 남의 물건을 빼앗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십계명의 제6계명과 10계명을 어긴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러한 죄도 역시 그 죄값을 그의 후손들에게 물리겠다고 말씀하셨다(출34:6~7). 고로 사울왕의 범죄에 대한 벌은 누군가는 반드시 받아야 하는 그러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조상들의 죄값을 그의 후손들 3~4대에게 물리는 것인가? 그것은 첫째, 조상들이 죄를 범하고 있을 때에 후손들도 역시 씨로서 그 조상의 허리에서 같이 범죄한 것이기에 그러한 것이다. 둘째, 그때는 대가족제였기에 한 집에 3~4대가 함께 살았다. 그러므로 3~4대는 자기의 가족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를 분명히 아는 시대였기 때문에 죄값을 물릴 때에는 3~4대까지 함께 물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셋째, 비록 후손들이 어떤 죄에 동참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때 지은 죄로 인한 결과들에 대해서는 후손들도 좀 개입하고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울이 빼앗은 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울왕의 아들들과 손자들 역시 사울왕이 빼앗은 땅에서 나고 자랐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곡식을 먹고 자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직접적인 죄의 당사자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조상들이 지은 죄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지는 않는다.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아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율법 말씀에 의거하여(원래의 취지는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누군가는 사울이 지은 죄값을 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그의 핏줄이 그 죄값을 치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 주님은 그 죄값을 리스바나 그의 두 아들들이나 외손자 다섯 명이 받는 것을 보시고는 마음에 결정을 하신다. 그녀의 눈물 어린 회개를 보시고 또한 담담히 죄값을 받고 있는 그 여인의 고귀한 마음을 귀하게 보신 것이다. 그러자 주님은 언젠가는 당신이 내려가셔서 십자가에 매달림으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죽을 것이지만, 그 여인처럼 자신이 비록 잘못한 것은 아니더라도 가족이기에 대신이라도 회개한다면 그 죄값을 더 이상 묻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리고 악한 영들도 더 이상 후손에게 대물림되지 않게 하시겠다고 결정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조상들의 지은 죄값을 대신 담당하시겠다고 결정하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날 나무에 달리실 때에, 우리 대신 조롱과 멸시 천대를 받으시고 옷벗김을 당하셨다. 그리고 대신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의 질병의 죄값도 받으셨다. 또한 우리가 우상숭배할 때 머리 숙여 절한 죄를 대신하여 머리에 가시 면류관으로 찔리셨다. 그리고 우리의 가슴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어기고 신내림을 받은 죄를 대신하여 자신의 심장과 옆구리에 창을 맞으셨다. 또한 우리가 자기 조상들에게 제사하기 위해 음식을 만든 손이 받을 저주를 대신하여 자신의 손에 못이 박히셨으며, 무당 점쟁이를 찾아가 물어보았던 우리의 발 대신에 당신의 그 발이 직접 대못에 박히는 것을 담당하셨던 것이다.
6. 나오며
왜 하나님께서는 사울왕의 범죄를 다윗왕으로 하여금 처리하도록 일부러 기근을 통해 알게 하신 것인가? 그것은 다윗이 장차 오실 메시야의 조상으로서,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죄는 결코 그냥 용서하지 않으시며 반드시 벌을 받게 하시되, 장차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그렇게 하실 것을 알게 하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왜 기브온 거민으로 하여금 사울왕에 대한 속죄를 나무에 매달아 죽이는 것으로 요구하게 하셨는가? 그것은 장차 메시야가 오셔서 조상들이 지은 범죄의 댓가를 당신이 친히 나무에 달려 지불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날, 사울왕의 후손들을 죽여 나무에 매달면서, 장차 메시야가 오셔서 십자가에 매달려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대신 죽게 될 것을 미리 본 것이다. 그리고 리스바의 행동을 통해서는 가족이라면 가족이 지은 죄를 대신하여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신 것이요, 비록 본인이 죄지은 것을 회개하지 못해 악한 영들이 그의 후손에게 계속해서 내려가지 않도록, 가족이 대신 회개하더라도 그 회개를 받아 주시겠다고 알려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자는 시댁과 남편의 죄를 대신 회개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사울왕이 범죄한 죄값을 그의 아들들과 외손자들이 대신 받는 것을 통해 오늘날도 우리 조상들이 지은 십계명의 죄들은 그의 후손이 받게 된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친가 뿐만 아니라 외가의 후손들이 그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은 어찌하든지 우리 조상들이 지은 죄를 대신하여 회개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조상들이 지은 죄로 인한 악한 영들의 대물림을 끝마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회개는 조상들이 지은 죄에 대한 벌도 안 받게 할 뿐만 아니라 악한 영의 대물림도 막는 놀라운 영적 무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회개를 시작해 보자. 회개할 때 죄용서가 일어나기 때문이요, 그러면 후손들이 벌을 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귀신들을 떠나보낼 수가 있어서, 더 이상 귀신들의 대물림이 자신의 가문에서 계속되는 것을 막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땅을 위한 기도
삼하 21:14 / 이재용 목사<새노래장로교회>
공의가 만족되어야만 응답되어지는 기도가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기도가 하나님께 올려지고 있습니다. 그 많은 기도 중에 응답받는 기도는 얼마나 될까요? 14절에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들으시니라’는 하나님께서 단순히 ‘기도소리를 들으셨다’는 말이 아니라 ‘응답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그 땅을 위한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요? 기근 재앙을 거두시고 비를 내려달라는 다윗의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에 응답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윗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기 때문입니다. 14절에 “그 후에야”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킨 후에야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자 그 땅을 위한 다윗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어야만 응답되어지는 기도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기도에만 매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무엘하 21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 시대에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을 내리셨습니다. 기근은 칼과 전염병과 더불어 하나님의 3대 징계 수단입니다(레위기14:12). 3년 연속 기근이 임하자 다윗이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며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했습니다.
다윗의 간구에 하나님이 주신 응답은 기근을 그치고 비를 내려 주시는 응답이 아니라 왜 하나님께서 거듭하여 3년간 기근을 내리셨는지 원인을 알려 주시는 응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3년간 기근을 내리신 이유는 사울이 기브온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사무엘하 21:1하)
기브온 사람들은 여호수아 당시에 가나안 족속으로 진멸당한 처지였으나 진멸당할 것이 두려워 먼데 사는 사람처럼 사신들을 분장시켜 여호수아와 화친조약을 맺어 진멸을 면했습니다. 3일 후에 거짓임이 밝혀져 대를 이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노예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열심으로 순수한 단일 민족을 구축하고자 이방 족속 축출 정책을 시행하면서 많은 기브온 주민을 죽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삼하 21:2하)
하나님은 죄에 대해 반드시 물으시는 분이십니다
사울 왕이 기브온 주민들을 학살했는데 하나님은 왜 다윗 왕 시대에 3년 기근으로 징계를 내리셨을까요? 이스라엘을 하나의 신앙 공동체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한 일에 대해 회개하기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도 회개를 하지 않자 다윗 시대에 3년 기근으로 징계하신 것입니다.
사울 왕이 기브온 주민을 학살한 것은 큰 죄입니다. 침묵하며 동조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함께 죄를 지은 것입니다. 침묵하다 보니 회개할 기회를 놓치게 되었고, 회개하지 않다 보니 죄는 잊혀져 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죄를 기억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자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3년 기근으로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징계의 벌을 내리셨는데도 무슨 일 때문에 징계를 받는지 조차 모를 때가 있습니다. 다윗도 기근 3년 만에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기근 1년 차에 다윗이 왜 엎드리지 않았을까요? 우연인가 했을 것입니다. 기근 2년 차에 다윗이 왜 엎드리지 않았을까요? 버틸만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근 3년 째가 되자 하나님의 징계임을 확신하고 그제서야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반드시 물으시는 분이심을 봅니다.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기브온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21장 5절입니다.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영토 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의 자손 일곱 사람을 우리에게 내어 주소서” 계속되는 6절에 “여호와께서 택하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목 매어 달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기브온 사람들의 고백에서 무엇이 보이시나요? 이들은 수백 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 살면서 그 땅에 계속 머물러 살기를 원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6절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두 번 언급되는 것을 볼 때, 기브온 사람들은 이방인이었으나 이스라엘과 화친한 이후 이스라엘 족속과 함께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이들이 이방민족이라는 이유로 학살한 것입니다.
나와 출신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고 맞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들어왔다면 그들을 같은 형제와 자매로 여기고 인정하고 받아 주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기브온 사람들이 변절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신앙공동체 안에 있는 다른 형제를 제거하려는 시도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죄된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땅에 무죄한 피를 흘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피 흘린 대가를 반드시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한 사람의 눈물의 회개가 공동체의 회개를 이끌어냅니다
다윗은 기브온 주민의 청을 받아들여 사울의 첩 리스바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랍에게서 난 아들 다섯 아들을 내어줍니다. 그러자 기브온 사람들이 여호와 앞에서 일곱 사람을 동시에 목 매달아 죽입니다. 9절에서 ‘여호와 앞에 목 매어 달매’라고 표현한 것은 기브온 주민들이 개인적 원한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시행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사울의 첩 리스바가 굵은 베를 가져다가 바위 위에 펴고 하늘에서 비가 두 아들의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도록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도록 지킵니다(10절) 리스바가 밤낮 두 아들의 시체를 지키면서 무엇을 했을까요? 리스바는 내가 죽어야 하는데 아들이 죽었다고 눈물 흘리며 회개했을 것입니다. ‘굵은 베를 가져다가 바위 위에 폈다’는 말이 이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리스바의 이 모습이 다윗을 감동시켰습니다. 리스바의 모습에서 다윗은 자신이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하는데 자신이 직접 관여한 것은 아니나 이스라엘 공동체적 책임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리스바는 처형당한 두 아들이 뼈가 되도록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로 가서 사울과 요나단의 유해를 가지고 와서 처형당한 일곱 명의 시체의 뼈를 거두어 합장합니다. 이 일에 이스라엘 사람들도 동참합니다. 이들이 사울과 요나단, 그리고 처형당한 일곱 명의 유해를 합장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침묵하며 동조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았을까요?
리스바가 흘린 눈물은 다윗의 눈물이 되었고, 다윗의 눈물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물이 되었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의 눈물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고 결국 하나님께서 기근을 그치고 비를 내리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땅을 위한 기도’를 하나님께 많이 드리고 있습니다. 그 땅을 위한 우리의 기도는 어떤 기도인가요? 응답을 구하기 전에 우리가 구하는 그 땅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땅인가요? 그 땅에 청산해야 할 우리의 죄는 없나요? 공의가 바르게 시행되는 땅인가요? 우리가 흘려야 할 회개의 눈물은 충분히 채워진 땅인가요?
다윗은 사울의 자손 일곱을 처형하도록 기브온 사람들에게 내어주고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비는 그 때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온 이스라엘이 회개의 눈물을 흘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을 이끌어 낸 것이 리스바의 눈물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리스바의 모습은 다윗을 감동시켰고, 온 이스라엘을 회개로 이끌었습니다.
오늘날 리스바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공의와 회개와 눈물을 통해 주어집니다. 하나님께 응답을 바라기 전에 공동체를 회개로 이끄는 눈물을 먼저 흘리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사람을 움직이게 합니다
삼하 21:10-14 / 아름다운 사역자
어제 북구 어울아트센트 소공연장에서 ‘초능력패밀리’ 라는 연극을 저희 사모하고 막내딸 데리고 보고 왔습니다. 그냥 연극이 아니라 코메디 연극입니다. 저는 소공연장에서 배우들과 그렇게 가까이 연극을 보기는 처음 인 것 같습니다. 개그 콘서트처럼 관객들과 호응을 하면서 공연을 하더라구요. 어제께 저녁 타임에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서 4:30분에 보러 갔는데 관객이 저희 포함에서 10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배우들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웃기는 지 참 재미가 있었습니다. 이 코메디극은요. 고아원 출신에 두 형제가 초능력을 가졌는데 1년동안 한 여자 집에서 몰래 살아다가 결국 들통이 나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연극을 하면서 초능력을 보여줍니다. 식탁에 음식이 없었는데 음식이 생겨나구요. 커피를 입을 대지 않고 앉아서 먹는 것을 보여줍니다. 밧줄을 묶었는데 손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을 보여주구요. 침대에 분명히 여자였는데 남자 바뀌는 것 까지 보여줍니다. 실제로 이것은 초능력이 아니라 마술을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바로 눈앞에서 그 일이 벌어지는 데 너무 너무 신기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초능력이 생긴다면 어떤 것을 해보고 싶으십니까? 로또를 조작해서 1등에 당첨되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을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찾아가서 혼쭐을 내주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T.V에 출현해서 사람들에게 그 능력을 보여주고 싶으십니까? 그런데 그 연극을 보니까요. 아무리 초능력이 있어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더라구요. 열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만큼 사람의 속을 알고 그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없느냐?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이스라엘땅가운데 3년동안 기근이 들었을 때 다윗은 그 원인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원인이 사울이 이스라엘백성들과 언약을 맺은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다른 것은 필요없이 사울자손 가운데 7명을 내어주면 그 사람들은 사울의 고향이 기브아에 가서 목매어 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억울한 마음이 풀릴 것 같다고 말을 합니다.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에 요구대로 사울의 첩인 리스바에게 난 아들 둘과 사울의 딸인 메랍에게 난 다섯명의 아들을 기브온 사람들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이 일곱명의 사울의 자손을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의 고향 기브아에서 가서 동시에 목매 달아 죽이게 됩니다.
부모는 먼저 떠나간 자식을 땅에 묻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묻는 다고 합니다. 특히 자식이 어떤 병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였다면 그 부모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그 충격에 헤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사울의 첩이며 아야의 딸인 리스바는 어느날 자신들의 아들들을 잡으러온 군사들을 보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를 몰라 왜 우리아들들을 잡아가느냐고 묻자 기브온 사람들에게 넘겨 목달아 죽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리스바는 두 아들들을 잃고 말았습니다. 어제께만 해도 행복하게 함께 살던 아들들의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리스바의 가슴은 갈기 갈기 찢어졌습니다. 아들의 죽음앞에 어미로써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리스바는 죽은 아들들의 시체라도 지키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혹이라고 새나 들짐승이 아들들의 시체를 상하게 할 까봐 밤낮으로 시체를 지켰습니다. 여인홀로 산중에서 죽은 시체옆에서 잠을 청하며 시체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남자도 하기 힘든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리스바는 자식을 향한 사랑으로 그 무서움을 이기며 시체를 지키는 것입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한 청년이 아름다운 한 아가씨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가씨는 얼굴과는 다르게 아주 독한 마음을 가진 아가씨였습니다. 아가씨는 청년이 정말로 자기를 사랑하는 지 확인해야 하겠다면서, 청년에게 자기를 사랑한다면 어머니의 심장을 꺼내어 자기 앞에 가져오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에 눈이 먼 청년은 그녀의 말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어머니의 심장을 꺼내어 두손을 들고 아가씨의 사랑을 얻게 된 기쁨에 들떠 아가씨가 있는 곳으로 있는 힘껏 달음박질쳐 갔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의 심장은 땅바닥에 툭 굴러 떨어졌습니다. 청년은 놀란 얼굴로 땅바닥에 떨어진 어머니의 심장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어머니의 심장에서 이런 소리가 들었습니다. “얘야, 어디 다치지 않았니? 조심하거라” 물론 누군가 만들어낸 이야기겠지만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자신을 죽인 자식에게도 변함이 없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렇게 자식들의 시체를 지킨 리스바가 행한 일이 다윗에게 알려졌습니다. 다윗은 자식을 향한 리스바의 사랑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감동을 받은 다윗은 즉각적으로 어떤행동을 취합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가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단의 뼈를 가지고 와서 기브온 사람들에 의해 달려 죽은 사울의 자손들과 함께 사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하도록 명령을 내립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리스바의 자식을 향한 그 사랑의 소식이 다윗에게 들려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 까요? 아마 다윗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기브온 사람들에게 넘겼기 때문에 별 상관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시체를 그대로 방치에 두었을 것입니다. 시체를 그대로 방치에 두었다면 그 시체들은 분명히 새나 들짐승들에게 훼손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은 자식의 시체라도 끝까지 지키려고 하는 부모의 그 사랑이 다윗의 마음을 움직여 결국 사울과 요나단의 뼈까지 함께 해서 그들을 기스의 묘에 장사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방법은 강제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방법과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사람을 강제로 움직이게 하려면 폭력을 행사한다든지 겁을 주면 됩니다. 보통 부모님들이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 주로 많이 쓰시는 방법이시지요. 아이들은 맞기 싫어서 부모님이 하라는데로 억지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론 돈을 주면 사람을 강제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도 매스컴을 통해서 돈에 매수 되어 사람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너무나 많이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강제로 움직이는 것보다 사람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입니다. 사람을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만일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했을 때 그 일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잘 해주면 자발적으로 그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힘은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감동하면 스스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최근에 의학이 발견한 호르몬중에 "다이돌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엔돌핀이 암을 치료하고 통증을 해소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이야기지만 이 다이돌핀의 효과는 엔돌핀의 4,000배라는 사실이 발표 되었습니다. 그럼 이 다이돌핀은 언제 우리 몸에서 생성될까요? 바로 "감동 받을 때"입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감동을 받을 때 엘돌핀의 4,000배나 되는 ‘다이돌핀’이 생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구요. 사소한 일에도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을 가장 감동시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느껴질 때 사람들은 감동을 받게 되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남편의 사랑이 느껴질 때 아내가 감동을 받고 그 마음이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아내의 사랑이 느껴질 때 남편은 감동을 받고 그 마음이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사랑이 느껴질 때 감동을 받고 그 마음이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지갑에 담긴 사랑이라는 글이 있어서 제가 한 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아내와 나는 20년 동안 가게를 하면서 참 많은 손님을 만났다. 그 가운데 특히 아름다운 기억으로 자리 잡은 손님이 한 분 있다. 얼마 전 저녁 무렵에 사십대로 보이는 남자손님이 가게로 들어왔다. 아내는 얼른 "어서 오세요" 하고 반갑게 맞았다. 그런데 손님은 남성용 지갑 대신 여자 지갑이 진열된 곳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따로 보아 둔 지갑이 있는지 아내에게 지갑의 모양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다행히 손님이 원하던 것과 비슷한 물건이 있어 손님은 그것을 사기로 결정했다. 지갑 값을 치른 다음 손님은 만원지폐를 한참 세더니 방금 구입한 지갑 안에 그 돈을 넣었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부인에게 전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여보, 내가 지갑을 하나 샀으니 지금 시장 입구로 나와요." 내 아내는 손님에게, "지갑만 사줘도 좋아 할 텐데. 돈까지 그렇게 많이 넣어 주세요? 부인 생일이신가 봐요?" 하면서 부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손님은 "아니에요. 우리 집사람이 지갑을 잃어버리고 집에 와서 너무 우울해 하기에 위로해 주려고요. 잃어버린 것과 같은 지갑에 잃어버린 만큼의 돈을 넣었으니 그 일 깨끗이 잊고 힘내라고요" 하면서 빙긋 웃었다. 잠시 뒤 손님은 곱게 포장된 지갑을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는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가게 문을 나섰다. 아내는 그 손님이 나간 문 쪽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나 또한 손님의 뒷모습을 보며 작은 감동이 밀려와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라면 어땠을까? 사 주기는커녕 지갑 하나 제대로 간수 못해 빠뜨리고 다닌다며 가뜩이나 심란한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겠지……. 그 뒤 나는 누군가 실수를 하면 그때 그 손님을 떠올린다. 상대를 먼저 헤아리는 마음, 그것이 사랑의 시작이니까.
저도 이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조금 뜨끔했습니다. 나도 과연 아내가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 비슷한 지갑을 사서 그 지갑에다가 잃어버린 돈 만큼 돈을 채워서 아내에게 선물할 수 있을 까? 이 글을 읽으면서 그렇게 해야 겠다는 마음을 저도 먹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아내가 남편으로부터 이 돈이 든 지갑을 선물로 받았을 때 얼마나 감동을 하겠습니까? 자신을 향한 남편의 사랑이 느껴지니 남편을 더 사랑하고 더 잘 섬기지 않겠습니까?
아이들은 장난감 중에 원격조정장치로 움직이는 장난감이 있습니다. 원격조장장치는 비록 장난감과 그것을 조정하는 사람이 떨어져 있어서도 사람이 조작하는대로 장난감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손에 든 원격조정장치로 오른쪽으로 가도록 조정을 하면 오른쪽으로 가고 왼쪽으로 가도록 하면 왼쪽으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원격조정장치처럼 움직이려고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곧 내가 원하는대로 상대을 움직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기계가 아닙니다. 기계는 원격조정장치로 움직이면 그냥 움직이지만 사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인격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계를 대하듯이 사람을 대해서는 안됩니다. 나와 같은 동일한 인격체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사랑이 그 사람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4절 후반부에 보면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후라는 말은 다윗이 사울의 뼈와 요나단의 뼈와 사울의 자손들을 기스의 묘에 장사지내고 난 후를 의미합니다. 결국 이 일이 하나님의 마음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출발이 어디에서부터 출발되었는가? 리스바가 자신의 아들들의 시체를 지키는 데서부터 출발되었습니다. 리스바의 자식을 향한 그 사랑이 다윗을 움직이게 했고 결국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입니다. 결국 사랑은 사람을 움직이게 할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점점 삭막해지고 황폐해져 간다고 사람들을 말을 합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완악해지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가 세상을 이렇게 만든 것입니다. 이 세상을 다시 회복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따뜻해 지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나보다는 남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사람들이 너희가 네 제자인줄 알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세상을 움직이고 사람을 움직이는 것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나라를 탓하기 이전에 교회를 탓하기 이전에 내가 나라를, 교회를 얼마나 사랑했는 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누구를 탓하기 이전에 나는 얼마나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문제의 해답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장 먼저해야 하고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은 사랑하는 일입니다. 가까이 있는 내 가족부터 동료를부터 이웃부터 사랑해야 합니다. 같이 신앙생활하는 믿음의 형제부터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사랑이 결국 사람을 움직이고 가정을 움직이고 교회를 움직이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사람을 움직이고 아름다운 가정, 아름다운 교회,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