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에게 쓰는 편지(제250信)
용이 네 고모가 LG생활연수원에 잠자리를 마련해놓고 용돈까지 챙겨주면서 온천여행을 다녀오라 권유하여 떠났다가
연수원의 LG 창업주 구인회 회장님 상 앞에서 '금성 라디오'의 에피소드를 떠올렸단다.
금성사는 한국 최초의 전자공업회사로 1958년10월1일에 설립되었다.
먼저 국산 라디오 개발에 착수했는데, 산업기반이 전무한 나라에서 라디오를 생산하기란 오늘날 인공위성을
쏘아올리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겨우 겨우 시제품을 만들었는데 부품의 대부분이 수입품이라 생산원가가 비쌌다.
그리하여 라디오 설계와 동시에 부품을 개발하면서 1959년11월에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 A-501을 생산하여 전자산업의
신기원을 이룬다.
그런데 기쁨도 잠깐, 라디오를 구입하는 부자들은 미제만 선호하였고, 밀수품이 판을쳐 판매부진으로 수년째 내리 적자로
문 닫기 직전의 상황이 도래하였다.
창업주와 직원들이 실의에 허우적될 때 하늘이 도왔음인지 1961년9월에 부산 시찰에 나섰던 검정색 안경의 군인이
금성사 공장을 찾아갔는데 그분이 바로 5.16군사혁명을 일으킨 박정희 의장이었다.
당시 생산과장으로부터 라디오 조립공정 등 관련시설을 안내 받고는 "일일 생산량이 몇 대냐?" 등 몇 가지 질문을 하고
그 자리를 막 떠나려다가 "무엇을 도와줄까?" 물었을 때 "밀수품 때문에 죽을 지경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한다.
당대 최고 실력자의 불시 방문 덕분에 금성사는 뉴스의 중심부에 자리잡게 되었고, 곧이어 발표된 '밀수품 근절 포고령'에
힘입어 금성라디오는 없어서 못 팔 상황으로 호전되었다.
또한 공보부 주관으로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운동이 펼쳐지면서 1년에 1만 대에도 미달하던 판매량이 1962년에는 14만 대로
폭풍증가를 보이며 승승장구하였다.
그럼 금성 라디오와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이만 줄인다.
2019년12월17일 목화와 물레를 사랑하고 해평의 베틀산을 그리워하는 할아버지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