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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님, 저는 이경남 목사를 광주사태에 대한 그의 발언에 관한 한 감히 사기꾼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님은 그 사기꾼의 주장을 맹신하시는군요. 그런데 그의 주장은 사실의 증언일 수 없습니다. 님이 계속 이경남 목사의 허위주장을 맹신하시며 인용하시기에 그의 주장의 신빙성 여부를 우리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저는 지금까지의 역사학도님이 해온 일들을 보아 님이 그렇다고 봅니다만...
제가 이경남 목사님을 맹신하는게 아니라, 그 분이 도청 앞 장갑차에 압사한 공수대원의 죽음을 가장 생생히 목격한 분이시기에 가장 신뢰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또한, 그 장면을 직접 눈앞에서 목격했던 당시의 공수대원들의 양심은 알고 있겠지요.
님이 과연 이경남 목사님을 눈앞에 두고도 사기꾼 운운하며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님이 과연 이경남 목사님을 사기꾼으로 몰수 있는지 지켜보겠습니다.
5.18사기꾼 이경남 목사의 거짓말에 대해 토론하기에 앞서 님의 반론 03에 대한 저의 답변을 4항으로 간략하게 드립니다.
1. 이데아님은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 님이 지금까지 뭘 입증하셨습니까? 님은 장갑차는 무조건 무장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시위대의 장갑차는 전투교육사령부 작전일지에 의하면 21일 오전 9시 20분 경에 아세아 자동차 공장에서 피탈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공장에서 막 가지고 나온 것이기에 무장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시위대가 장갑차를 가진 것은 제가 부인한 적도 없고 이미 도청 앞에서 돌진까지 했다고 수없이 설명드리고 있습니다.>
자, 그럼 시민군이 5월 21일 오전 9시 20분에 군 장갑차를 탈취한 사실은 확인이 되었군요. 여기에 장갑차가 무기이냐 장남감이냐의 해석상의 논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과연 시민군이 군 장갑차들을 장난감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탈취하였을까요? 여기에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리고 어디에 쓰려고 광주시민들이 군 장갑차를 탈취하였느냐의 질문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데아님의 답변해 주셔야 할 질문입니다.
<- 무장이 안되어있다 하더라도 장갑차라는 것 자체가 군장비임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장갑차에는 살상용 장비는 장비되어 있지 않으므로 무장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어떤 용도로 사용하려 했는지는 당사자 만이 알겠지만, 제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당시로선 충분히 그럴만한 분노의 사유가 매우 많이 있다는 것을 역사적 증거에 의해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님이야 공수의 폭력과 살인은 완전히 배제한 채, 모든 원인을 시위대에 덮어 씌우는데에만 급급하시다보니, 지속적으로 해석의 오류만을 남발하고 계십니다만.
공수는 18일 새벽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각대학과 방송국 등을 기습함과 동시에, 시위여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무차별한 폭력을 휘둘렀고,(18일 오전 전남대 앞 충돌 이전인 새벽 2시부터) 행불자나 후유사망을 제외한 항쟁당시 밝혀진 사망자만도 165명에 이르며,
이는 5.18 유족회가 밝히는 공식자료에서 (17일 전북대 고 이세종님의 사망을 제외하고) 18일의 고 김경철님의 사망을 시작으로, 19일 3명, 20일 13명(전경 4명 별도), 21일 60명(군인 2명 별도), 22일 17명, 23일 20명, 24일 10명, 27일 23명(군인 2명 별도)의 참사를 냈습니다.
님이 시위대의 무장시점을 악착같이 날조하려하시니, 일단 21일을 제외하고 20일까지만을 누계해 보아도 무려 17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살해되었고, 중.경상자까지 통계하자면 이루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18일 새벽 시작부터가 공수의 무자비한 폭력과 살인이 자행된 뒤입니다.
그 희생자들 각각의 사연만 읽어보아도 눈물이 흐르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진데, 당사자들은 오죽했겠습니까?
이에 그 장갑차를 탈취한 사람을 두둔하지는 않겠으나, 그 분노 만큼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저더러 동영상을 날조편집했다고 하는데, 저는 한번도 날조 편집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방송 사이트 동영상을 올릴 때 잘라내기하여 몇분간의 클립으로 올리는 것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윈도우미디어 파일로 올렸을 때는 사이트에 따라 3메가, 5메가, 7메가 혹은 10 메가의 용량 제한이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대용량 파일을 업로드할 수 있는 때에도 10분 제한이 있습니다. 따라서 동영상이 올라가지 않을 때는 계속 잘라내기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날조편집인가요?
<- 결국 님은 원본 영상을 보고도 그따위로 편집하셨다는 말씀이로군요?
잘라내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보는 이가 완전히 사실인식을 잘못하도록 만들 수 있지요.
님의 편집질은 누가 보아도 군인들은 아무 잘못이 없는데, 시위대가 미쳐 날뛰어 무장한 것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명백한 날조 편집이지요. 님의 양심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날조편집은 KBS에서 했던 거예요. 이데아님 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황종건 기자의 계엄군 저격병 증언들, 김영택 기자의 계엄군 조준사격 증언들과 같은 도청 앞 집단발포 현장의 증언들이 마구 쏟아져 나옵니다." 바로 그것이 날조편집입니다. 어떻게 힌츠페터의 영상물에 황종간 기자의 억지 주장 등이 포함될 수 있습니까? 더구나 5월 20일에 광주에 도착한 힌츠페터가 5월 18일 장면 등을 촬영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이것은 시청자의 이목을 속이는 KBS의 날조편집이었습니다.
<- KBS가 무슨 날조편집을 합니까? 예?
하여간 방송원본에서는 전혀 해답을 찾지 않으시고, 제 서술에서만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보시려 애쓰시는 모습이 눈에 훤하군요.
최소한 님의 날조편집 동영상에서 21일 아침에 발견된 사망자들 장면만 나왔어도 날조가 아니라 인정해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님의 의도는 무조건 시위대의 잘못으로 덮어 씌워야만 하니 이마저도 가차없이 삭제해 버렸지요.
힌츠페터님이 미처 촬영하지 못하신 장면은 당연히 다른 것으로라도 대체하는 것이 맞지, 그러면 공백으로 비워두겠습니까?
님이야 무조건 부정하려들겠지만, 황종건 기자의 저격병 증언도, 김영택 기자의 조준사격 증언도, 그외 님이 삭제해버린 모든 장면들 전부가 도청 앞 집단발포 현장을 증거하는 것들이고, 힌츠페터님은 애석하게도 도청 앞 집단발포 현장은 보지도 촬영하지도 못하셨습니다. 다만 도청 앞 집단발포 소식을 듣고 나서 시위대가 무장하는 장면들을 촬영하신 것 뿐이지요.
님이 아무리 우겨봐야 힌츠페터님 본인도 아시듯, 시위대가 무장하는 장면은 도청 앞 집단발포 이후의 장면이며. 기어이 날조하시려거든 힌츠페터님 앞에서 한번 우겨보십시오.
방송원본에서도 시위대가 무장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찍으신 뒤, 더이상 지체할 수가 없어 필름을 숨겨 서울로 향했다는 힌츠페터님의 증언이 제대로 나옵니다.
그런데, 역사학도님은 전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조건 그것이 도청 앞 집단발포 이전의 장면이라고 우겨 대지요. 계속 그렇게 해보십시오. 빈축만 사실 것입니다.
3. "계엄군의 총기 사용은 20일 저녁무렵부터 21일 새벽내내 빈번했고." 이것 이데아님 주장인가요? 만약 그런 사실이 있다면 발포 명령자를 찾아야겠군요! 자, 공수부대 실탄 지급 시간을 최대로 앞당기는 김영택 기자조차도 21일 오전 10시 반 이상으로 앞당기지 않습니다. 사기꾼 이경남의 부대가 20일 저녁 실탄 지급을 받았었나요? 이데아님이 주장하셨으니 이데아님이 푸셔야 할 문제입니다.
<- 완전히 기초 상식 자체도 없으신 분이로군요. 제가 님입니까? 상상속의 주장을 하게?
공식기록으로 20일 사망자 13명 중 총기 사망자만 5명입니다. 힌츠페터님 영상에도 나오는 21일 아침 트럭에 실리던 총기 사망자의 시신이 뭐라고 생각하셨습니까? 힌츠페터님도 그 시신을 가리키며 총기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하시는 장면을 보셨잖습니까?
그리고, 무슨 발포 명령자를 찾습니까? 우리가 발포명령자를 찾는 것은 21일 오후 1시의 도청 앞 집단발포 명령자를 찾는 것이지, 그 이전에 일어난 간헐적인 발포 명령자를 찾는게 아니지요.
또한 김영택 기자님은 21일 오전 10시 30분에 공수부대에게 실탄 지급이 되는 것을 목격하신 것이지. 그전에도 실탄지급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목격하신 것이 아니지요.
물론 군에서는 그전까지 공포탄으로 위협사격만 했다고 부인하겠지만,(님은 이마저도 모르시는 듯 하나) 이를 증언하는 수많은 증인들이 있고, 실제 총기 사망자들이 있습니다.
님은 아마도 증언자들은 다 사기꾼이라고 우길테니, 님이 그나마 믿을 만한 것만 발췌해보자면...
19일 16시 50분 - 광주고와 계림파출소 사이 동원빌딩 앞에 고장난 장갑차 1대에 학생 150명이 접근하자 장갑차에서 발포. 초중고생 4명 중상. 일부는 계엄군이 싣고 감.(시청 상황일지)
20일 10시 - 부상자는 전남대 부속병원에 23명, 기독병원 4명, 조선대 부속병원 2명. 전남대 부속병원에 있는 김영찬(19. 조대부고 3년)은 19일 오후 4시 30분 계림파출소 앞에서 총격받고 왼쪽 배 관통상을 입었다고 함. 시민, 학생들에 의하면 중태인 사람은 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사망자 늘어날 듯하다고 함. (월간조선, 1985. 7)
20일 22시 30분 - 11대대 화염방사기 C3의 기습사격으로 돌파구를 열어 광주시청으로 이동, 13대대와 합류. (특전사 전투상보) (주 : 군기록에는 화염방사기 사용만 나와 있군요.)
20일 22시 55분 - 본사에 기사를 송고하고 있을 때 광주역 쪽에서 이날 처음으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수백 발의 총성이 계속 났다. 밖에 뛰쳐나가 보니 그것은 공포탄이 분명했다. 빨간 불덩이가 쉴 새 없이 서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불길한 징조였다.(월간조선, 1985. 7.) (주 : 물론 이때는 대부분이 공포탄이었으리라 생각하지만, 실제 실탄에 의한 사망자가 있기에 실탄 사격도 없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일 23시- 광주시청 앞에서 11시에 사격개시. 1백여 발, 유탄 50여 발은 공중으로 날아가고 나머지는 보이지 않음. (월간조선 1985. 7)
이런 일들이 있고 나서야...
20일 23시 20분 - 시위군중 지역에서 총성 청취(3, 4발) : 민간인 신고 시위군중은 총 10만여 명으로 추산.
- 군사령부 작전지시
1. 발포 금지, 실탄 통제.
2. 특전사 부대 대대 단위로 분산 집결(융통성있게).
3. 특전사 임무 20사에 인계(교대) 고려.
4. 선무활동을 위한 홍보활동 강화. (전교사 작전일지)
이처럼 위와 같은 발포들이 있고 나서야 군기록에 의하면 실탄 통제를 지시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래도 제 임의의 주장이라 우기시렵니까?
4. 이데아님이 "도청 앞 집단발포 이후 오후에 시위대가 무장한 장면을 가지고"라고 하시면 반론을 제기하셨습니다. 그러나 장갑차 탈취 시간은 오전 9시 20분임을 우리가 확인하지 않았던가요? 따라서 힌츠페터는 시민군이 오전에 장갑차 등의 차량을 탈취하여 거리로 몰고 나오며 도청을 향하여 달리는 장면을 촬영한 것입니다. 힌츠페터는 21일 아침부터 다시 광주를 촬영하기 시작하였으며, 오전의 시민군 동태가 그의 영상 카메라에 포착되었던 것입니다. 시민군 장갑차 탈취 시간이 오전일진대 그의 영상물에서 보이는 시민군 장갑차가 그 시간대가 오전이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는 것 아닌가요?
<- 역사학도님! 도대체가 님의 무한한 상상력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군요.
장갑차 탈취시간이 오전 9시 20분인 것과, 힌츠페터님 영상속에 장갑차가 나오는 시간이 무슨 관계지요? 예? 힌츠페터님이 장갑차 탈취하는 사람을 쫒아다니면서 탈취과정까지 찍으셨다고 하던가요? 예?
힌츠페터님이 21일 오전에 찍으신 장면은 살해된 시신들이 트럭에 실리는 장면이고, 시위대가 무장하는 장면은 21일 오후의 장면이라고 벌써 몇번을 설명해드렸습니까?
그리고 제발 그 날조편집 영상 좀 갖다 버리시라고 몇번을 당부드렸습니까?
아! 님은 어차피 알면서도 날조하시려는 것이었지요? 계속 그렇게 해보십시오. 자업자득이 있으실 겁니다.
자, 이제 이경남 목사의 허위증언에 대해 토론해 봅시다. 이데아님은 이경남 목사의 증언이라며 이렇게 인용하셨습니다. <이 날 21일 오전, 우리는 걸어서 광주도청에 도착하였다. 거기에는 우리 여단의 모든 병력이 집결해 있었는데, 밤새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 시위대들이 격노하여 차량으로 무장하고 군인들과 무력으로 대치하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군수 공장에서 탈취한 도시형 장갑차를 몰고 돌진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1. "우리는 걸어서 광주도청에 도착하였다" 이 말부터 거짓말 아닌가요? 전남도청과 광주시청을 혼동한 명칭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가요? 광주에 도착한 시간이 몇시였는가요? 그 어느 군인도 그 시간대에는 시민군 포위망을 뚫고 도청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 환장하겄네. 그때 무슨 시민군이 있고, 무슨 포위망이 있습니까?
님 혹시 광주 지리는 아십니까? 혹시 또 막연한 상상으로 도청 앞이 막다른 길인줄로 상상하고 계십니까?
시위대에 비록 장갑차 1대가 있었지만 시민들은 무장을 하지 않았고, 버스.택시.트럭과 같은 일반 차량들과 시민들이 계엄군 철수를 요구하기위해 금남로를 통해 도청을 향해 행진했으며, 도청 앞 광장은 분수대를 중심으로 한 큰 오거리입니다.
전방에 금남로가 가장 큰 대로이나, 이 길을 제외하고도 학동쪽 길, 충장로1가쪽 길, 노동청쪽 길, 상무관쪽 길 등 무려 4갈래 길이 더 남아 있습니다.
이 길들을 시민들이 죄다 포위를 해요? 제발 상상소설 좀 쓰지 마십시오.
이경남 목사님이 어느 길을 통해 이동하셨는지, 그것이 몇시였는지는 제가 알 수 없으니, 님이 직접 이경남 목사님에게 여쭤보십시오.
그리고, 아무 근거도 없이 이동이 불가능 했다는 둥, 포위를 했다는 둥, 멋대로 상상소설 쓰지 마시고요.
2. "밤새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 시위대들이 격노하여." 밤새 시위대가 버스로 깔아 죽인 순경 4명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 아이고~... 위에 이미 공식 사망자기록 명시해 드렸으니 다시 써드릴 필요는 없겠지요?
위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셔서 20일에 몇분이 죽었는지 다시 확인해 보십시오.
필요하다면 사망자들의 피눈물나는 사연들도 제시해드리겠습니다.
세상에 밤새 전경4분만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으시다니, 기가막혀서 말이 안나옵니다.
3. "그러던 중 군수 공장에서 탈취한 도시형 장갑차를 몰고 돌진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주장이나 설명은 될 수 있을지언정 증언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시 사건 현장의 군인들이 시민군 장갑차를 보고서 군수 공장에서 탈취한 것인 줄 알 수 있었을까요? 시민군 이수남의 글은 증언입니다. 당시 자기가 목격한 사실만을 기록하니까요. 그런데 이경남 목사는 "군수 공장에서 탈취한 도시형 장갑차"라는 군더더기를 붙입니다. 그 장갑차들이 당시 군수품 납품업체였던 아세아자동차공장에서 탈취한 것이라는 것은 나중에 밝혀진 정보이지, 이경남 목사가 목격한 사실이 아닙니다. 이 정보는 틀린 정보는 아니지만, 이경남 목사가 이 정보를 위한 현장 증인이 아닙니다. 그의 글에는 그가 현장에서 목격하고 쓴 글이 아니라, 각종 5.18자료들에 의존하여 쓴 군더더기들이 더덕더덕 붙어 있습니다.
<- 이경남 목사님의 수기는 1999년에 작성된 것입니다. 장갑차가 돌진한 것은 아시나 그것이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는 당연히 들어서 아시겠지요. 그것이 문제가 됩니까?
김영택 기자님이나 이수범님도 장갑차가 돌진하는 것은 목격했으나, 공수대원이 죽었다는 것은 들어서 아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이경남 목사님의 군더더기라면 고작 시위대의 장갑차가 아세아자동차에서 탈취된 것이라는 것을 들어서 알 뿐이지만, 김영택 기자님과 이수범님은 가장 중요한 공수대원이 어떤 장갑차에 어떻게 깔려죽었는지를 들어서 알 뿐입니다.
이경남 목사님은 자신이 직접 동료대원이 어떻게 깔려 죽는지를 목격하고 증언하셨지만, 김영택 기자님이나 이수범님은 장갑차가 돌진하는 것은 직접 목격한 것이지만, 공수대원이 어떻게 깔려죽는지는 아애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들어서 알 뿐이지요.
그나마 이수범님이 목격했다는 돌진장면은 1시경이 아니라 1시 30분경에 또 돌진하는 것을 본 것이고, 이것은 다름아닌 님이 제시한 기록에서 증거된 것이며, 각종 상황일지들에도 나옵니다. (제가 앞전에 태극기 흔드는 장갑차의 돌진시각에 대해서 기록에 의해 혼돈한 바는 있으나, 분명한 것은 장갑차가 1번만 돌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제가 이경남 목사의 글 중 한 단락만 인용했지만 이데아님의 반론이 있으시면 토론을 이어갈 가치가 충분히 있는 주제입니다. 이데아님뿐 아니라, 5.18논객들이 5.18사기꾼 이경남 목사의 글을 즐겨 인용해 왔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그의 글에 최소한의 신빙성이 있는지를 검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 참 이제와서 말이지만, 님과의 토론이 더이상 의미가 있는가도 의심스럽습니다. 이처럼 온통 자의적인 상상으로만 일관하고 계시니...
역사학도님! 컴퓨터 앞에서 온통 상상만 하지 마시고, 광주에 직접 오셔서 구 도청앞이 어떻게 생겼는지, 길은 몇갈래 길인지, 금남로는 어떻게 생겼는지, 아세아 자동차(현 기아 광주공장)은 어디에 있는지, 전남대는 어디에 있는지, 조선대는 어디에 있는지, 주남마을은 어디에 있는지, 광주교도소는 어디에 있는지, 상무대(현 상무지구)는 어디에 있는지, 중정부(구 안기부 터)나 보안부대는 어디에 있는지, 송정리 공군부대는 어디에 있는지 등등 지리 파악부터 하시고요.
역사는 전체 팩트를 가지고 해석해야 온전한 것이지, 님처럼 입맛에 맞는 단편적인 일부 팩트만을 가지고 논하게 되면(그마저도 날조하시는) 명백한 역사왜곡인 것이니, 님과 같은 분들이 제시하는 일부 님에게 유리하다 싶은 팩트만 찾지 마시고 전체의 팩트를 다 보시고요.............. 님의 목적이 어차피 역사날조라면 이런 당부도 다 부질 없겠네요.
참... 계속 이런식의 논쟁을 해야 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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