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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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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설교 | |
성경낭독 : 창 17:1-7, 15-16; 막 8:31-38 본문 : 욘 1:1-3 제목 : “악과 하나님” |
악과 하나님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애니메이션 작품 중 하나는 『바람의 검심』이라는 작품입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원래 TV판으로 시작된 것이지만, TV판이 약간 명랑만화나 활극 느낌이 나는 것들이라면, 첫 극장판이었던 “추억편”은 비장미가 일품인 작품인데요. 작중 주인공은 어릴 때 전쟁터에서 죽을 뻔한 것을 스승에게 구출 당한 사람입니다. 스승은 세상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 했지만, 주인공이 자기를 죽이려 했던 일당들의 묘까지 모두 만든 것을 보고 감화를 받아 스승이 주인공을 제자로 받아들입니다.
주인공이 당대 최고의 검술이었던 비천어검류를 스승에게 전수받고, 세상에서 고통 당하고 있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산을 내려가려 할 때, 스승과 나누는 대화는 몹시 인상적입니다. 주인공은 산 아래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다고 부르짖습니다. 하지만 스승은 냉정하게 말합니다. 검은 흉기이고, 검술은 살인술이며, 산을 내려가서 어느 편에 서더라도 자신들의 저마다의 정의에 조종당하여 결국은 살인귀가 되고 말 뿐이라고 말입니다. 주인공은 결국 산을 내려가고, 당시 혼란의 절정이었던 막부 말기를 완전히 끝내고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키는데 일조를 하게 됩니다. 이후 TV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의 말처럼 결국 한편에 서서 살인귀가 되어버린 주인공이 더 이상 칼로 사람을 베는 대신, 칼등으로만 싸우면서 주변의 약한 사람들을 돕고 지키는 이야기입니다.
주로 일본 영화나 애니에서 부각되는 소재이기는 하지만 “정의란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주제는 우리가 한 번쯤은 생각해 봐야 할 주제입니다. 바람의 검심의 주인공 히무라 켄신의 스승 히코 세이쥬로가 한 말처럼, 대다수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정의”를 가지고, 그 정의를 지키기 위하여 상대를 ‘악’으로 여기고 싸웁니다. 켄신은 유신지사의 편에 서서 정부를 성립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사실 그 반대편에 있었던 막부 측, 곧 신선조와 같은 검객 일당들도, 사실은 ‘전적으로 악’ 같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정의를 따라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대로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입니다.
가끔은 오늘날 우리 정치조차도 진정한 악, 진정한 선 같은 것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악을 단순화시키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다들 “기생충” 영화를 보셨습니까? 거기 보면 재벌인 부자가 나오고, 그 재벌의 집 지하에 기생충처럼 몰래 살고 있는 가족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재벌을 죽이는 운전기사 송강호가 나옵니다. 누가 선이고 누가 악입니까? 재벌이면 악인가요? 그러면 그 재벌의 집 지하에 몰래 숨어 살고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악인가요? 재벌의 운전 기사를 하고 있다가 한 마디 말에 울컥해서 집 주인을 죽인 기사는 악인가요 선인가요?
우리는 악을 단순화시키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정말로 악이 그렇게 단순한가 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보통의 경우, ‘나는 선’이고, ‘내 반대편이 악’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내가 악일 수는 없습니까? 내가 악인이고, 사실은 내 반대편에 있는 이가 선인일 수는 없습니까? 우리는 모두 이기적 존재여서 ‘자기가 주인공’인 세상에 살고 있지만, 살아가다 보면 어떤 때에, 내가 열심히 옳다고 생각한 일을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내가 잘못된 쪽을 향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음을 깨달을 때도 있지 않습니까? 악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약간 다른 관점에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악을 어떻게 보실까요?
우리가 조금 전에 말했던, ‘악을 단순화한 방식’대로 하나님은 악을 보실까요?
그러면 하나님은 절대적 선이시니까, 이 악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섬멸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정말로 악을 이렇게 ‘섬멸의 대상’으로 보실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또 다른 대응 방식이 있는 것입니까?
오늘은 요나서 말씀을 통해서 이 주제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나가 명령을 받은 정황과 도망친 이유
먼저 요나서의 제일 앞부분에 나오는 내용을 통해서 요나가 명령을 받은 정황과 도망친 이유를 잠깐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요나서는 아무런 정황 설명도 없이 곧바로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너는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다.”
우리는 요나서의 제일 첫머리에서 요나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이 임한 것과 그 내용을 듣습니다. 명령의 내용은 니느웨의 악 때문에, 그들에게 가서 “외치는 일”이었습니다. 이전의 개역 한글에서는 “쳐서 외친다”라고 번역했는데, 원문에는 그냥 “선포하다”이기 때문에 개역 개정에서는 “향하여 외치라”라고 번역을 바꾸었습니다. 본문을 임의로 의미를 넣어 번역하는 것은 좋지 않기 때문에 지금 개역 개정의 번역이 더 좋은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왜 도망쳤지?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왜 요나는 도망쳤을까요?
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니느웨는 당시 이스라엘의 적국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악독” 때문에 그들에게 가서 “선포”하는 일이면, 요나로서는 신나는 일일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2절 말씀은 요나가 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요나가 하나님께 받은 명령은 “회개하라”가 아닙니다. 요나가 하나님께 받은 명령은 “그들의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다”이고, 그래서 그들에게 “외쳐 선포”하는 일입니다. 실제로도 3장 4절 말씀에 보면 요나가 외친 내용이 그대로 나오는데, “회개하라”가 아니었습니다. 요나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3:4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그러니까 “회개 요청”이 아니라 “심판 선언”인데, 왜 요나는 도망쳤을까요?
니느웨가 망할 것을 선포하는 것이니까 신이 났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을까요?
2. 두 명의 천사들이 아니다
우리는 이때의 요나의 마음을, 성경의 다른 정황들을 통해서 충분히 잘 들여다볼 수가 있습니다.
1)
먼저 첫 번째 단계는 이것입니다.
요나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니느웨가 멸망할 것이다”라고 말씀하라고 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이 야웨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던 선지자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앗수르 제국을 멸망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계시다는 사실도 분명히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허언을 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엄포를 놓으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의 악독이 내게 도달하였으니, 너는 그것을 향하여 외치거라”라고 하셨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의도’, 곧 ‘하나님의 멸망, 심판을 향한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요나는 분명히 알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나로서는 이것은 환영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로 말미암아 고통당하고 있는 상태였고, 앗수르의 멸망은 곧 이스라엘의 평화였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어렵지 않게 “앗수르가 멸망한다면 이스라엘은 더 안전할 수 있다”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2)
하지만 여기 두 번째 단계를 동시에 생각해야 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왜 자기를 보내시는가?”라는 질문이, 당연히 요나에게 있었으리라는 사실입니다. “왜 요나 자신인가?”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왜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시는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악이 극에 달한 이들을 멸망시키실 때 어떻게 하셨는지를 성경의 예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고려한다면 아마 요나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 두 천사가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소돔을 멸망시키실 때, 두 천사를 보내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멸망이 예정된 도시에는, 멸망을 위한 천사면 충분했습니다. 만약 그 도시에, 혹은 그 나라에 의인 열 명이 없다면, 그 도시 혹은 나라는 멸망당할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그 도시 혹은 나라가 멸망당해 마땅하고, 또 하나님께서 심판을 집행하실 의도셨다면, 하나님은 ‘심판의 사자’를 보내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선지자는 누구입니까?
선지자는 “회개를 요청하는 직분자”입니다.
우리가 구약 성경에서 수없이 보지만,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교회에, 선지자는 언제나, 올바르지 못한 길을 걷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요청하기 위하여” 보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시는 이유는,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어떤 대상을 심판하시고 멸망시키기를 원하신다면, 그들에게 ‘멸망의 사자’를 보내실 터인데, 하나님은 지금 “선지자 요나에게”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요나는 즉시 알아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시는가?” 요나는 즉시 알아챘습니다.
아! 하나님은 앗수르를 구원하시려고 하시는구나!
3. 요나가 도망친 이유는 분명하다
그래서 요나가 도망친 이유는 분명합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선지자인 자신을 보내시는 이유는,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려는 것임을’ 알아챘던 것입니다. 요나는 지금 하나님께서 ‘니느웨 멸망의 병기로’ 자신을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니느웨 회개의 도구로’ 자신을 보내시는 것임을 알아챘던 것입니다.
요나는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압니다.
그가 아는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입니다.
성경을 약간 뒤로 넘겨, 요나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인식하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4장 2절입니다.
욘 4: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는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 분이신지,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와 긍휼이 많은 분이신지......요나는 알았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요나는 자신은 하나님과 다르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앗수르의 회개는 자신의 나라의 패망을 의미합니다.
요나는 앗수르가 ‘회개하지 않고 멸망당하기를’ 원했습니다.
만약 앗수르가 회개한다면, 자신의 조국은 더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는 그 길을 걷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도망칩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는데, 그는 정반대 편으로, 다시스로 도망칩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지만, 선지자는 그 하나님의 증인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앗수르가 멸망당해야, 자신의 나라가 편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이런 점에서 요나서는 선지자를 통해 이방 사람을 회개시키는 이야기라기보다는
회개하는 이방인을 통해 완고한 선지자를 바꾸려는 이야기다.
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악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
그러면 이제 이 지점에서, “악”에 대하여, 또 이 악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요나서에는 반복적으로 나오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위대한”이라고 주로 번역되는 ‘가돌’이라는 단어는 요나서 안에 열 네 번이나 나옵니다. 요나서가 짧은 성경임을 감안하면, 굉장히 많이 나오는 단어입니다. 이런 자주 반복되는 단어는 ‘주목해야 할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 “악”이라는 단어, 히브리어로는 ‘라아’라고 하는데, 이 단어도 많이 나옵니다. 요나서 안에 ‘라아’는 아홉 번이나 나옵니다. 역시 요나서가 짧은 성경임을 감안할 때 굉장히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라아’가 제일 처음 나오는 것이 우리가 앞서 살핀 “악독”이라는 말에서입니다. 1장 2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욘 1: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보통은 그냥 ‘악’이라고 번역하는데, 왜 ‘악독’이라고 하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하니까 그 악이 좀 더 강력하게 보여서, 나름 번역의 맛은 사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자, 그런데, 요나서에서 이 단어는 “악독”으로만 번역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정황으로 나옵니다. 이것을 숙고하는 일이 오늘 말씀의 주제에서 아주 중요한 과제입니다. 아홉 번 나오는 ‘라아’가 어디에서 어떻게 번역되고 있는지를 요나서 안에서 한번 차례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방금 말씀드린 1장 2절의 “악독”이 그 처음입니다.
2) 그런데 그 다음 나오는 곳은 1장 7절과 8절 말씀인데, 읽어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욘 1:7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알아 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8절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여기에서 ‘라아’, 곧 ‘악’은 “재앙”이라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알게 됩니다. 요나서 안에서 ‘라아’는 “악”도 되지만 “재앙”도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3) 그 다음에 이 단어가 나오는 곳은 3장 8절과 10절인데, 8절을 먼저 보고 10절을 봅시다. 10절에는 두 의미가 동시에 나옵니다. 먼저 8절입니다.
욘 3:8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여기에서 우리는 앗수르 사람들이 회개하는 장면에서 자신들이 과거에 행했던 일, 곧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그 과거를 두고 “악한 길”에 있었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때 그들이 과거 살았던 모습을 설명하는 말로서의 “악한 길”이 바로 이 단어입니다.
그리고 다음 3장 10절을 보면, 여기에는 “악”과 “재앙” 둘 다가 나오는 흥미로운 곳입니다.
욘 3: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이 말씀이 아마 제일 중요한 말씀 같습니다. 이 한 절 안에 같은 ‘라아’가 “악한 길”로도 사용되고, 동시에 그 악한 길을 걸은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인 “재앙”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이를 살려서 말하자면
하나님은 ‘라아’의 길을 걸을 때
‘라아’를 내리심으로 심판하신다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요나서에서 ‘라아’는 “악한 길”이기도 하고, 동시에 “재앙”이기도 합니다.
4)
나머지 4장에서는 1절과 2절과 6절에 이 단어들이 나옵니다.
2절에서는 “재앙”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앞의 용례와 같은 것이지만, 1절과 6절에는 ‘라아’의 또 다른 용법이 나옵니다.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욘 4: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기 “싫어하고”에 ‘라아’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6절,
욘 4: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여기서 ‘라아’는 “괴로움”으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즉 요나서 4장에서 ‘라아’는 요나가 “싫어했다”할 때와, 그가 박넝쿨이 없으면 뙤약볕으로 인해 받게 될 “괴로움”에 대해 사용되었습니다.
정리
그러면 우리는 이 짧은 책인 요나서 안에 아홉 번이나 사용된 ‘라아’, 곧 통상적으로는 우리가 ‘악’이라고 번역하는 이 단어가, 무려 세 가지 방식으로나 사용된 것을 알게 됩니다.
1) 우선은 오늘 본문인 1장 2절에서의 “악독”에서나 혹은 앗수르의 왕이 회개하면서 말한 “악한 길”에서와 같이 전형적인 용어인 ‘악’으로 사용된 경우입니다. ‘라아’는 통상적으로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처해 있는 형편을 ‘악’이라고 묘사합니다.
2) 그런데 배에서 선원들이 만나게 된 “재앙”이나, 혹은 요나가 박넝쿨 때문에 당하게 된 “괴로움”도 동시에 ‘라아’입니다. 이 뉘앙스를 좀 느껴 보시려면 선원들이 바다에서 폭풍을 만났을 때 “우리가 재앙을 만났다”라고 하지 말고 “우리가 악을 만났다”라고 읽어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뙤약볕으로 인해 요나 선지자가 “괴로워하였다”라고 읽지 말고 “악 가운데 있었다” 이렇게 읽어도 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한 가지 알게 됩니다.
1)
먼저 우리는 (제가 자주 말씀드렸듯이) 어떤 언어의 단어를 다른 나라 말로 번역했을 때, 똑같이 의미가 다 담기지는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예전에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설교에서 예를 들어 드렸듯이, 우리 말에서는 “위로”라는 말에 ‘안락함’이나 ‘확신’ 같은 의미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만, 영어나 독어 단어에는 이 의미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말에서 “한”이라고 하면, 이 말은 영어로 angry 라고 해도 의미가 다 담기지 않고 fury 라고 해도 이상합니다. have deep resentment 라고 하면 “깊은 분노” 정도는 되지만 이건 우리가 아는 ‘한’이 아닙니다. 아마 비슷한 바식으로 “정”이나 “멋” 같은 말도 그럴 것입니다. “정”은 영어로 affection이라고 해도 시원하지 않고, “멋”을 beauty라고 해도 이상합니다.
즉 우리는 히브리어 단어가 품고 있는 의미를 우리 말로 옮겨서 이해한다는 것을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어쨌거나 성경이 쓰여진 말은 히브리어이기 때문에, 이 히브리어 단어가 어떤 의미를 말했을 때, 우리말로 속시원하게 옮겨지지 않는다는 생각은 해야 합니다.
2)
이렇게 생각하고 볼 때, 히브리어 ‘라아’ 안에는 “악”이라는 의미와 “고통” 혹은 “재앙” 혹은 “괴로움”이라는 의미가 동시에 들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3)
이 사실은 우리에게 굉장히 큰 어떤 감흥을 줍니다!
말하자면 “악이 고통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주제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악이 고통이다!”
우리는 흔히 신창원이나 유영철 같은 연쇄 살인범이나 악한 자들을 생각하면서 “악을 저지르는 것은 그 악한 사람에게는 기쁨일 것”이라고 추측하곤 합니다. 하지만 악을 저지르는 것이 악을 저지르는 사람에게도 고통이나 재앙이라고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요나서가 ‘악’을 사용하는 방식을 보면서 ‘악의 실체’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악이 나쁘다, 악하다, 불의하다......일 뿐 아니라, 악의 근본적 실체는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악은 단순히 ‘악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재앙”이요 “괴로움”입니다. 그렇다면 이 악 가운데 있는 사람, 곧 우리가 쉽게 ‘악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 사람은 어떨까요? ‘악인’은 악 가운데 있으니 행복합니까? 아닙니다. 악에는 다른 면이 있습니다. 악은 악을 저지르는 악인에게조차 “재앙”이요, “괴로움”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 ‘악’과 ‘악인’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입장이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이 악을 대하시는 방식이 어떨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 앞부분에서 살펴본 것처럼, 요나는 앗수르의 악을 싫어했습니다.
심지어 그 악이 자신의 나라, 조국 이스라엘, 혹은 교회 이스라엘을 힘들게 하고 괴롭게 만드는 것이었으니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지자로” 앗수르에 보내시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요나는 앗수르가 ‘섬멸당하기를’ 원했을 뿐, 앗수르가 회개하고 다시 돌이키는 것을, 앗수르가 다시 구원의 은총을 입는 것을......원치 않았습니다. 적어도 요나에게 앗수르는 ‘단순히 악’입니다. ‘단지 악’입니다. 그에게 악인은 구원받아서는 안 되는 대상입니다. 그저 섬멸당해야만 하는 대상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향해 가지신 태도는 무엇입니까?
두 천사 대신에! 선지자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로 놀랍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는 궁극적으로 앗수르가 구원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들은 것처럼, 하나님의 절대적인 관심은 앗수르보다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교회에 있습니다. 요나서도 오바댜서도, 모두 교회의 구원을 위해 주어진 책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회개케 하시려던 일! 하나님께서 앗수르에게 구원을 베푸시려던 일! 이런 것들이 모두 거짓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실 때, 그분의 의중은 항상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을 원하”십니다!
겔 33: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하나님은 앗수르가 악하기 때문에 ‘단지 섬멸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게서 악과 죄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땠습니까? 하나님의 입장에서, 사람의 저 너머, 인생의 저 윗편에서 바라보는, 이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 심지어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단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악 속에서’, ‘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생들을 하나님이 바라보실 때, 그 하나님의 악에 대한 태도는 어떠셨습니까? 하나님은 이 악과 죄를 단지 섬멸해야만 할 대상으로 여기셨습니까?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이 ‘악독’일 뿐 아니라, ‘재앙’이요, ‘괴로움’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악과 죄를 가지고 있는 인생을 보실 때, 단지 ‘섬멸해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보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악’에 대한 태도, 하나님의 ‘악인’에 대한 태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비록 그가 악 가운데 머물고 있더라도, 그가 비록 악 속에 파묻혀 있더라도, 하나님은 그를 먼저 ‘긍휼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앗수르에도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요나서를 통해, 이 “악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태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주 실수를 범합니다. 우리는 자주 죄악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그런 흠결에 대하여 엄격한 잣대로 심판자의 입장에서만 서 계시다고 한다면, 우리 중 누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설 수 있겠습니까? 우리 중 단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 은총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로마서의 복음을 통해 여러 번 들었듯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그 죄와 죄에 대한 대가를 ‘해결할’ 방책을 마련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엊그제에도 금요스터디를 통해 배우지 않았습니까?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대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율법은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고상하고 고매한 법일지라도, 그 고매한 법은 죄를 지어버린 인간, 정상 상태로부터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인간에게는 ‘정죄’ 외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섬멸의 대상’으로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가 불쌍한 우리 인생들에게 “재앙”이요, “괴로움”이라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하나님을 아는 주의 백성들은 그러면 어때야 합니까?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보기 전에, 내 눈의 들보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기를 원하셨으므로,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가 이기적이 되면, 가장 먼저 없어지는 것 중 하나가 ‘타인을 용서하는 일’인데, 그렇기 때문에 이기적 기독교, 예를 들어 기복주의적 기독교처럼 자기가 잘 되는 것에만 관심이 많은 사람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일에 둔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품, 복음의 성품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죄와 악에 대하여 정죄하고, 때리고, 처벌하고, 비난하기 이전에, 어떻게 하면 그를 살릴 수 있을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나서를 배우면서 이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장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앗수르조차 회개하기를 바라시고 또 선지자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마음, 그것을 우리도 모두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물론 그들이 마지막까지 회개에 도달하여 구원을 얻게 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그들이지, 용서하신 하나님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