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wkGQivw-2eY?si=BnE_JVEi6meUYtua
야나체크는 25세의 나이때 11년 년하의 제자 제덴카 슐추오바 (Zdenka Schulzova)와 사랑에 빠져 2년후 그녀가 16세 때에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귀족 출신의 여자와 서민 출신의 남자 사이에 결혼은 평탄치 못하였으며, 야나체크는 1903 년에 온천 휴양지에서 처음 보았던 37 세 년하의 카밀리아에게 사랑에 빠진다. 이 사랑은 야나체크에게 많은 작품을 쓰게 만드는데 이 곡도 그 중의 하나이다. "비밀편지" (Intimate Letters)라는 부제가 붙었듯이,야나체크가 그녀에게 쓴 700여 통의 연애편지 들에게서 영감을 얻어 이 곡을 썼다고 한다. 이곡은 1928 년 2월에 완성되었는데 이후 반년후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최후의 실내악곡 현악 4중주 "비밀편지"
야나첵은 40대에 두 아이를 잃은 후 가정은 불화가 계속되었고 독일계 귀족 출신의 그의 아내는 농촌 출신의 야나첵과 잘 맞지 않았다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남 보헤미아 피세크의 글동품상의 아내인 카밀라 스테슬로바라는 38세 연하의 여인과의 늙으막의 연애가 있었다. 그녀에 대한 사랑은 그로 하여금 창작의 정열을 불태우게 해서 그녀와의 연애가 없었더라면 그가 죽기전 10년동안 이룩해놓은 모더니즘의 걸작들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야나첵의 두 번째 현악 4중주는 바로 카밀라와 오갔던 약 700통의 연애편지에서 영감을 얻은 곡이다. 야나첵이 그녀에게 쓴 연애편지의 내용은 '그대에 대한 나의 사랑은 낮동안에 광야를 비췄던 태양이 밤에도 떠 있는 것만 같이 한결같다'라는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지극히 낭만적인 것이었다.
카밀라 역시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악 4중주 1번의 소재가 됐던 '불행한 여인의 초상'을 야나첵은 그의 이 마지막 실내악곡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카밀라는 이 곡외에도 야나첵의 오페라 '야누파"와 "카차 카바노바"의 비극적인 여인상에도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현악 4중주 2번은 1928년 2월에 작곡되었으며 곡을 완성시킨 반 년 후에 그는 갑자기 사망하게 된다. 그 사인은 카밀라의 아이를 데리고 피크닉을 갔다가 아이를 잃어버리고 빗속을 찾아 헤맨 결과 생긴 폐렴 때문이었다고 한다. 초연은 작곡자 사후인 같은 해 9월에 모라비아 쿼텟에 의해 행해졌다.
사이키한 심리극을 연상시키는 현악 4중주 1번보다 이 2번은 보다 긴밀하게 구성된 걸작으로 평가된다. 작곡자가 카밀라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되는 1악장은 제 1번 현악 4중주에서와 같이 맨 처음 안단테로 등장하는 악상이 전곡을 통일하는 주제의 원형이 되고 있다. 곧이은 특이한 음색의 비올라가 제 2의 동기를 제시한다. 곡의 진행이 알레그로로 빨라지면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셋잇단음표를 포함하는 빠른 주제를 제시하면서 발전해나간다. 후반부의 첼로의 독립된 리듬감있는 움직임이 단조로운 곡의 흐름을 깨고 있어서 재미있다.
2악장은 야나첵이 카밀라에 보낸 편지에 의하면 '당신과 함께 있었던 그 곳에서의 우리가 서로를 원했던 그 천국같았던 순간'을 표현했노라고 하는데 야나첵 내외와 스테슬로바 내외가 1917년 온천지 루하초비체에서 보낸 여름 휴가에서 있었던 두 사람간의 관계를 묘사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런 느낌은 아다지오로 느릿하면서도 낙천적인 선율을 노래하는 바이올린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후반부에서 다시 프레스토로 빨라지는 바이올린의 조급한 선율은 그런 그들의 비밀연애에 파고드는 불안감을 묘사했다고 해야할까?
3악장은 야나첵이 느끼는 카밀라의 이미지 자체를 창조해보려는 시도로 이해된다. 그에 걸맞게 중간부에 비올라와 첼로의 규칙적인 리듬위로 흐르는 바이올린의 선율은 전곡을 통해 가장 뚜렷한 선율미를 보여준다. 이 부분은 야나첵 스스로도 그가 작곡한 가장 아름다운 선율로 여겼다한다.
4악장은 야나첵이 연인에 대한 '불안'을 표현함과 동시에 연인에 대한 '그리움' 그러나 '결국에 채워지는 것으로 끝맺어지는 그리움'을 표현한다. 첼로의 자신있는 리듬감있는 반주로 시작한 바이올린의 노래는 곧 이어지는 혼란스런 부분으로 방해받는데 이는 곧 야나첵의 그런 '불안'을 표현했다면 이어지는 춤추며 행진하는 듯한 명랑한 악상이 악기들을 바꿔가면서 불려지는데 이는 바로 '채워진 그리움'을 표현하는 사랑의 찬가에 해당한다. 이 사랑의 찬가는 전체 곡의 긴장을 풀어주는 카타르시스적인 작용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매력 포인트라하겠다. 4악장을 마무리 짓는 코다에서도 이 찬가는 되풀이 되면서 악기들의 음색을 마음껏 뽑내게 한후 화려하게 끝맺는다. (글출처:고클래식)
야나체크(LEOS JANCEK 1854- 1928)
체코 작곡가. 오스트리아령 모라비아지방 후크발디 출생. 11세 때에 집을 떠나 모라비아의 중심도시 브르노의 수도원 성가대에 들어갔으며, 1872년 그곳의 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뒤 프라하의 오르간학교와 라이프치히음악원·빈음악원에서 배웠다. 81년 브르노에 오르간학교를 창설하고 교장이 되었으며, 81∼88년 필하모니협회의 지휘자를 지냈고 1919년 신설된 프라하음악원 브르노분교에서 작곡을 가르치는 등 모라비아지방의 음악문화 발전에 공헌하였다. 일찍부터 창작활동을 하였는데 작곡가로서 명성이 높아진 것은 1904년의 오페라 《예누파》 초연 이후이며, 16년의 프라하 초연과 2년 뒤의 빈 초연에서 비로소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로부터의 10년간이 창작의 절정기이며 오페라 《카탸카바노바(1919∼21)》 《교활한 새끼여우(1921∼23)》 등 대작을 잇달아 발표하였다.
작풍은 젊은 시절에 강한 관심을 가졌던 모라비아민요의 연구성과에 바탕을 두고 민족적 요소를 단순한 이국취미적 장식으로서가 아니라, 서유럽 근대음악의 어법과 융합하여 발전시킨 점에서 대단한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작품을 만들었으며 민요 편곡도 많다. 중요한 것은 9개의 오페라로서 말의 억양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독자적인 양식을 만들었으며, 위의 3작품 외에도 마지막 작품 《죽음의 집에서(1927∼28)》가 뛰어나다. 종교작품 가운데에는 고대 슬라브어의 텍스트에 의한 《글라골 미사(1926)》가 유명하고, 기악곡에서는 B. 스메타나와 A.L. 드보르자크의 영향과 함께 말년에 인상주의적 경향을 볼 수 있는데, 특히 관현악곡 《타라스불리바(1915∼18)》와 《심포니에타(1926)》가 전작품 가운데 가장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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