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타이 식당>에 방문했어요. 추석 때 들렸고 오늘은 내가 볼일이 있어서 AM11시를 맞춰 들린 것입니다. 에에공! 남의 집 방문 땐 빈손으로 가지 마시라! "사와디캅!" 스텝 5명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걸 보니 작은 회사 조회 시간 같습니다. 이런 분위기 좋아요. 오픈 1년 차인데 매대에 물건이 많아졌고, 냉장고에 술도 꽉꽉 찼습니다. 경마장과 나이트클럽이 있는 이곳은 과거엔 리어카 하나만 있어도 먹고사는데 노프러브럼이었다는 것을 이 친구들이 알까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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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보고 고 홈 하는데 며칠 전 오픈한 '솥뚜껑 삼겹살'이 런치 타임을 하는지 웨이팅이 꽤나 길게 늘어 서있었어요. 2년 정찰을 해본 결과 인창동 건원 대로 길이 요식업 오픈을 가장 많이 한 걸 확인했어요. 구리 병원 쪽으로 롯데캐슬 옆 상가에 대형 횟집이 오픈을 했고, 구리역 (내) '세븐', 우체국 쪽으로 '스시집', 우리 숍 50m 거리에 '꼬마 김밥'과 '공인인증소', 솥뚜껑 삼겹살까지 1년 동안 6개가 오픈했다는 것 아닙니까? "내가 제일 잘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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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를 옳게 인식하는 것이 철학의 목표이고, 동물과 초인 사이에 존재하는 나는, 끊임없이 나를 알고 너를 알아가면서 위버맨시가 되어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잠정 결정을 지었습니다. 오늘이 한글날(9)인데 언어란 존재나 존재자를 인식하기 위해 유용한 기표입니다. 그리고 언어는 몸과 많이 닮아 있는 것 같아요. 몸과 언어는 모두 존재자와 세계의 경계이면서 통로가 아닙니까? 몸이 도구의 발명과 사용으로 연장, 확장되듯이 언어도 시를 통해 연장, 확장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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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자는 몸과 언어로서 자신의 존재를 세계에로 드러냅니다. "나랏말씀미 中國에 달아 (중국의 말과 달라), 文字와로 서르 사뭇디 아니할새 (한자와 잘 통하지 아니하여) 이런 젼출로 어린 百姓이 니르고져 홇배 이셔도 마침내 제 쁘들 시러 펴디 몯할 노미 하니라(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결국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이가 많다)." 인간은 몸과 언어를 통해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확장하는가? 언어가 존재를 드러내는 통로라면, 초인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말하고 창조하는 능력을 갖추는 일이 아닐까?
2.
존재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철학의 중요한 과제라면, 인생은 끊임없이 나를 알고 타자를 알아가는 과정일 것입니다. 니체는 인간을 동물과 초인 사이에 놓인 존재로 보았습니다.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초인(위버멘쉬)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남보다 뛰어난 인간이 아니라 기존의 가치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인간입니다. 나는 오늘도 낯선 식당과 변화하는 거리를 걸으며 어제의 나를 조금씩 넘어가고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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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글날입니다. 언어는 존재자와 세계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언어는 몸과 참 많이 닮았습니다. 몸과 언어는 모두 나와 세계를 구분하는 경계이면서 동시에 세계와 만나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몸이 도구를 발명하고 사용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확장하듯, 언어는 은유와 시를 통해 표현과 사유의 지평을 확장합니다. 몸이 세계를 향해 움직인다면 언어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가능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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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하이데거의 명제가 떠오릅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인간은 언어를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로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언어를 통해 세계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존재 자체와 존재자를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언어로 명명하는 것은 대개 개별 존재자이며, 존재는 그러한 존재자들이 드러나는 방식과 의미의 지평에 관한 물음입니다. 언어가 존재를 완전히 소유할 수는 없지만, 존재를 이해하는 길을 열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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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 메를로퐁티에게 몸은 단순한 물질이나 정신의 도구가 아닙니다. 몸은 세계를 경험하는 주체이며, 언어 역시 몸을 가진 인간의 표현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몸과 언어는 서로 분리된 두 개의 도구가 아니라 세계와 관계 맺는 인간 존재의 서로 얽힌 방식입니다. 내가 건원대로를 걸으며 상권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은 몸의 경험이고, 그 변화를 역사와 철학으로 해석하는 것은 언어의 작업입니다. 몸이 경험한 세계는 언어를 만나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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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자신의 뜻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는 현실을 바꾸려 했던 것입니다. 한글의 창제는 단순히 새로운 문자 체계를 발명한 사건이 아닙니다. 기존 문자 체계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고 전달할 가능성을 넓혀 준 역사적 사건입니다. 물론 문자의 발명만으로 모든 사람이 평등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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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확대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니체의 초인과 세종의 한글 창제를 연결해 보면 흥미로운 철학적 질문이 생깁니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는 것은 반드시 기존의 세계를 파괴하는 일일까요? 오히려 지금까지 말할 수 없었던 사람에게 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 아닐까요? 인간은 몸으로 세계를 경험하고 언어로 그 경험을 해석하며, 다시 그 해석을 통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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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철학은 존재를 인식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실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건원대로에서 만난 식당과 사람들, 새롭게 문을 연 가게와 길게 늘어선 대기 줄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변화하는 세계가 내게 건네는 질문입니다. 나는 오늘 무엇을 새롭게 보았는가? 무엇을 새롭게 말할 수 있게 되었는가? 그리고 어제의 나와 무엇이 달라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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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초인을 향한 여정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고 어제와 다른 언어로 오늘을 사유하는 데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글의 가장 생산적인 통찰은 몸과 언어를 세계의 경계이자 통로로 이해한 것입니다. 특히 니체, 하이데거, 메를로퐁티를 연결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언어가 세계를 확장한다는 주장은 설득력 있지만, 언어는 동시에 세계를 제한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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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름 붙인 것만 보고, 익숙한 개념으로 타자를 규정하며,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경험을 배제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늘 무엇을 새롭게 보았는가? 무엇을 새롭게 말할 수 있게 되었는가? 그리고 어제의 나와 무엇이 달라졌는가? 어쩌면 초인을 향한 여정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고 어제와 다른 언어로 오늘을 사유하는 데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026.10.10.sat. 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