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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24년 3월 10일 주일 오전 예배 | 주일 오전 예배 찬송 경배찬송 – 시 68편 7,8,9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 49편 1,3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 116편 4,5 성경낭독 후 찬송 – 시 93편 4 (고정) 설교 후 찬송 – 시 7편 1,2,3,4 성찬식 찬송 – 시 67편 3 (고정) 폐회찬송 – 시 104편 9,10 (고정) |
요나 설교 | |
성경낭독 : 민 21:4-9; 요 3:14-21 본문 : 욘 1:3,5; 2:2,6 제목 : “야웨의 낯으로부터 도망치다” |
야웨의 낯으로부터 도망치다
몇 년 전에 넷플릭스에서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가 크게 유행했습니다. 2024년에 시즌 2가 개봉한다고 했으니 아마 조만간에 두 번째 시리즈도 나올 듯 싶습니다. 워낙 세계적인 인기를 탔던 드라마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거기 나오는 게임들이 유행을 하고, 또 비슷한 옷을 입고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들도 무척 많았습니다.
제가 전에 어떤 기사에서 보니까, 외국인들의 경우 초반 설정에서 일반 외국 드라마들과 전혀 달라서 외국 시청자들에게는 큰 충격과 놀라움을 선사했던 장면이 있었다고 합니다. 성도들께서는 오징어 게임을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아마 보셨던 분들은 그 장면이 기억이 나실 겁니다. 내용은 처음 사람들이 모였을 때, 게임을 계속할지 않을지를 두고 의견이 완전히 반반이 갈렸고, 마지막에 전체 순번에서 1번이었던 할아버지가 그 결정권을 갖게 되었는데 “반대”를 눌렀던 장면입니다. 할아버지가 찬성했으면 게임이 지속되었을 테고, 그래서 대부분의 외국 시청자들은 거기서 할아버지가 Yes를 당연히 누르리라 기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뜻밖에도 할아버지가 반대를 누르는 바람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다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에 대한 인터뷰들을 보았는데, 일반적인 외국 드라마들에서 이런 장면은 극적으로 이 사람이 게임을 계속하기로 결정하는 일이 거의 정해진 수순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할아버지가 No를 누르는 장면은 많은 외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고 합니다.
저는 나중에 감독의 의중에 대해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다 돌려보내고 나서 다시 모인 사람들이야말로 ‘정말로 자의로’ 모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극적 효과가 더 강렬하다......와 같은 이유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즉 이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에서 게임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심지어 한 번 집으로 돌아갔다가도 다시 돌아온, 그야말로 정말로 자의로 거기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드라마를 혹 안 보셨던 분들도 아마 그 결과, 결론은 다들 아실 거라 생각하는데, 이 오징어 게임은 우리가 어렸을 적 했던 놀이를 하기는 하지만, 실패하면 바로 목숨을 날려버리는, 탈락하면 총으로 쏴 버리거나 추락사로 죽거나 하는, 그런 무시무시한 게임입니다. 비록 무슨 결과가 닥칠지는 모르고 왔다 할지라도, 거기 온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우승만 하면 수백억의 재산을 거머쥘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자의로 선택을 한 사람들이었고, 결국은 그 경기에서 모두 죽습니다. 주인공 단 한 사람만 빼고 모두 죽습니다. 그러니 사실은 거기 참여했던 참여자들의 선택이란, 겉으로 보기에는 자기 자신이 선택한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그 결과는 모두 실패요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우리 인생에 대입해서 생각해보면, 좀 섬뜩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인생에서 어떤 문제를 선택할 때 많은 경우 강압에 못 이겨 선택한다기보다는 자의로 선택을 하거든요. 하지만 그 결과는 비참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쉬운 예로 10년째 놀고 있는 백수 청년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대학을 다닐 때나 취업을 해야만 했던 시기에는 이쪽 한편에는 열심히 구직 활동을 하고, 이력서를 넣고, 여기저기를 찾아다녀야만 하는 선택지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런 일들이 귀찮고 힘드니까 그냥 집에서 컴퓨터 게임이나 하고 있는 선택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항상 후자를 선택해왔습니다. 대학을 들어간 직후부터도 늘 이런 선택지를 골라왔기 때문에 학점은 엉망이고 스펙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대학을 겨우 졸업한 후에도 늘 이런 선택지를 골랐습니다. 취업 전선에 뛰어드는 대신 집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고, 채팅방에서 노닥거리고, 인터넷 커뮤니티에 하루에 글을 백 개씩 쓰면서 그렇게 산 겁니다. 마음에 가끔씩 불안이 생길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내일 하면 되지 뭘!”이라고 하면서 스스로 자위하고, 다시 컴퓨터 속으로 돌아갔습니다.
자, 그렇게 해서 이 사람이 나이가 마흔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그런 삶을 강요하지 않았어요. 모두 다 자신이 선택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선택지는 무엇입니까? 이 사람의 삶은 무엇인가요? 아무도 그에게 이런 삶을 살라고 강압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선택한 길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사람은 자기의 선택지로 인해 스스로 자신이 지옥으로 뛰어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징어 게임에만 자의로 선택해서 죽음을 향해 내달리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오징어 게임의 참가자는 그랬겠죠. 제아무리 삶이 좋지 못하였어도, 적어도 거기 가는 선택지만 취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압박에 시달릴지언정 살아는 남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그 길을 선택했고 죽음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나마 오징어 게임에는 ‘삶을 이미 망쳐버린’ 사람들만 나옵니다. 하지만 시선을 우리 주위로 돌려서 사람들을 보면, 멀쩡히 가만히 살기만 했어도 괜찮은 삶을 살았을 사람들이 자기가 선택해서 지옥으로 걸어들어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언젠가 기사에 보니까 강원도에 있는 카지노 뒷이야기에 그런 게 나오더군요. 평생을 성실히 공무원으로 일하고 정년퇴임하여 퇴직금도 두둑히 받은 사람이 카지노를 알게 되어, 가진 돈 모두를 잃고 폐인이 되어 거기에서 공짜로 나눠주는 도시락을 먹으며 살다가, 딸이 30만원 용돈을 보내주니까 기뻐하면서 또 카지노를 가서 그 돈을 불과 몇십 분만에 다 날리고 또 지옥이 찾아오는 그런 모습 말입니다.
누가 선택했나요? 자기가 선택했습니다. 이 사람이 스스로 그 길로 걸어들어가지만 않았으면, 명절에 손주들 용돈 주면서, 편안한 집에서 낚시나 다니면서 노후를 보냈을 것입니다. 노숙을 하고, 밥을 얻어먹으며 사는 인생은 그가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런 문제가 ‘신앙에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두 번 들은 요나서 설교의 내용에 기초해 보면, 신앙은 결국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따라 살며, 그분과의 언약적 연합 속에서 살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향해 가지 않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임을 예배를 통해,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주변의 성도들의 삶과 조언들을 통해 뻔히 알면서도, 그 길로 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선택’은 누구의 것입니까? 누군가가 그를 그리로 몰아넣었나요? 아닙니다. 자기가 선택해서 갔습니다. 심지어 더 좋은 길일거라 생각해서 갔습니다. 하지만 그 결국은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그분을 회피하여 살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오늘 생각해보려고 하는 주제는 바로 이에 관한 것입니다.
1장 3절의 구조와 강조점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가장 주의 깊게 보아야 하는 점은 3절 말씀이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방식입니다. 이 설명의 방식은 우리에게 아주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문장을 세세히 한번 뜯어보도록 합시다.
1. 일어나
먼저 이 문장은 “요나가 일어났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여기 “일어났다”라는 말은 아주 공교로운데요......히브리어에서 ‘일어나다’는 ‘쿰’입니다. 아마 성도들께서도 “탈리다 쿰”, 곧 “소녀야 일어나라”라는 말로 잘 아실 텐데요. 우리말에서도 ‘일어나다’는 아주 일상적인 단어이고 많이 쓰이는 말이듯이, 히브리어에서도 그렇습니다. ‘일어나다’라는 ‘쿰’은 무얼 그렇게 크게 특별하고 독특한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자리에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고 할 때 늘 쓰는 그런 단어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문장 전체를 보고 난 후에는 그 뉘앙스가 느껴지실텐데, 3절 전체의 내용, 그리고 이후에 관련된 다른 말씀들과 함께 보고 난 후에 “일어났다”라는 말을 다시 되새김질해보면, 아마 그 맛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그저 간단히 몇 가지만 짚어보자면, 이 “일어나다”라는 말은 일상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할 때에도 쓰는 말이지만, 성경에는 이런 예가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1) 예를 들면, “센 머리(노인들) 앞에서 일어서라”(레 19:32)라고 말하는 식의 ‘일어서라’는, 의미를 조금만 이해해 보면 하나님 앞에서 일어서는 것과 맥락이 같습니다. 출애굽기 33장 10절 같은 곳에 보면 “회막문에 구름 기둥이 섰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일어나’, 장막문에 ‘서서’ 경배”(출 33:10)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 예배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일어서는 것’은 디폴트 값입니다. 우리도 예배를 시작할 때,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실 때, 또 복을 주실 때, 모두 일어서지 않습니까? 그건 하나님 앞에서의 예의이죠. 우리보다 높은 이들을 맞을 때, 우리보다 높은 이로부터 말씀을 들을 때,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 예의입니다.
2) 그리고 이 ‘쿰’은 “언약을 세우다”할 때도 자주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언약을 세우다”의 “세우다”는 항상 이 단어를 씁니다. 그러니까 ‘일어서다’는 일반적으로야 그냥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지만, 종종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된 말들에 사용되니까 그 의미를 전혀 간과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런 장면들을 염두에 두면서 “일어났다”라는 단어를 유심히 바라보면, 여기 상당한 ‘의지’가 개입되었음이 느껴지게 됩니다. 3절 말씀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보게 되면, 뒤에 딸려 나오는 모든 일들을 위하여, 요나는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무언가를 하려고 일어선 것이죠? 그러니까 여기 상당한 의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의지는 어떤 식으로 사용되는 걸까요? 그것은 이제 이어지는 말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2. 이 문장의 의도에서 “내려가다”와 “피하다”의 관련성
1)
이렇게 3절의 시작이 “요나가 일어났다”로 되어 있음을 보고 이제 나머지 문장을 보면 나머지 전체는 일관되게 한 동작을 지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을 원문 순서 그대로 차례대로 제가 한 번 번역해 보겠습니다.
일어났다, 요나가
도망치기 위하여, 다시스로, 야웨의 얼굴로부터
그리고 내려갔다, 욥바로
그리고 발견했다, 배를, 다시스로 가는
그리고 주었다 배삯을
그리고 내려갔다, 가기 위하여, 함께, 다시스로, 야웨의 얼굴로부터
3절을 원문을 따라서 쭉 읽어보면, 잡다한 일반적인 서술을 제외하고 나서 뼈대만을 남기면 두 가지 사실만 딱 남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요나가 내려갔다
라는 사실과,
야웨의 얼굴로부터 도망쳤다
라는 사실입니다.
3절을 민감하게 읽으면, 이 두 주제가 문구 자체에서 부각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바는 분명합니다. 요나가 간 것은 “내려간” 것이고, 그리고 이 일은 전적으로 “야웨의 얼굴로부터 도망친” 사건입니다.
2)
이 사실을 잘 생각합시다.
3절을 여러분이 잘 보시면 다른 모든 구절들은 반복되지 않지만 우리가 방금 말한 이 두 가지 사실만 ‘두 번 반복’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일단 그냥 보시면,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가 두 번 반복되어 있죠. 어쩌면 뒤에 나오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는 매끄러운 문장을 쓰려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불필요한 반복일 수 있습니다. 그가 지금 가는 행로를 문장의 처음에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라고 했으면, 그걸로 충분한데, 굳이 그것을 뒤에 다시 한 번 더 씁니다. 우리말은 문장을 좀 그럴 듯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약간 말끝을 바꾸었지만, 사실은 원문에서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세 단어가 똑같이 반복됩니다. “여호와의 얼굴로부터 다시스로!” 이 세 단어가 두 번 굳이! 반복됩니다. 왜 썼겠습니까? 강조지요! 그가 지금 가는 길이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는 길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서 문형이 이상해지는 것까지도 감수하고 일부러 두 번 쓴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두 번 반복되는 말은, 3절의 한국어 번역으로는 찾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어로는 같은 단어가 두 번 사용되었는데, 우리말로 번역을 다르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내려가다”입니다.
3절 앞부분에 “내려갔더니”가 나오죠. 우리 번역으로는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다”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번역에는 그 다음 “내려가다”가 번역이 안 되어 있습니다. 원어로는 똑같은 단어인데 번역을 다르게 했습니다. 그 단어가 3절 끝부분의 “배에 올랐더라”입니다. 우리말로는 ‘올랐다’고 번역을 했죠. 하지만 원문에서는 앞의 단어와 똑같습니다. ‘내려가다’입니다. 즉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이죠
욥바로 내려갔다
배로 내려갔다
이 말씀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요나는 지금 계속 내려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의 행로는 내려가는 것입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것을 “내려갔다”라고 쓸 수 없습니다. 지형에 있어서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입니까? 왜 내려갔다고 합니까? 배도 마찬가지죠. 우리 말로는 배를 타니까 “올랐다”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건 “내려간” 것입니다.
3)
그런데 이 주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더 나아갑니다. 5절을 읽어봅시다.
5절 :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요나는 욥바로 “내려”갔고, 거기에서 다시 배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그 배에서 오히려 “더 내려”가서, 배 밑층에 가서 잠이 듭니다.
이 말씀들은 의도적입니다. 요나는 점점 더 내려가고 있습니다.
욥바로 내려가고
거기서 다시 더욱 배로 내려가고
그 배에서 다시 더욱 배 밑층으로 내려갑니다.
어디까지 더 내려갈까요?
2장 6절을 보십시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1장 끝에서 요나는 물에 던져집니다.
그리고 물고기에게 잡아먹힙니다.
바로 이때 요나는 그 물고기 뱃속에서 노래 부를 때, 자신이 어떻게 되었다고 했습니까?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다
이것은 그냥 그가 물고기 배에서 저기 물 아래로 곤두박질쳐 내려갔으니까 단순히 ‘물리적 위치’로서 내려갔다고 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2장 6절에는 문자적으로 “내려갔다”는 말이 나올 뿐, 사실은 그 앞에서 요나는 자신의 내려감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2장 2절을 보십시오.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이 2절 말씀은 방금 읽었던 6절 말씀과 아주 비슷합니다. 그런데 6절에서 “내려갔다”고 한 것을 2절에서는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6절에서는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다” 했지만 2절에서는 동일한 문투로 “내가 스올의 뱃속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내려간” 것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단지 ‘물리적으로’ 수면에서 바다 밑으로 내려갔다고 말하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물고기에 잡아 먹힘으로써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다는 말의 진짜 의미, 곧 “스올의 뱃속에 있었다”는 말의 진짜 의미는,
내가 지옥으로 떨어졌다
라는 뜻입니다.
이 스올은 3절에서는 “깊음”이라고도 표현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단지 ‘깊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곳’을 말합니다. 즉 바다의 바닥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3절의 “깊음”이란 2절의 “스올”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어디에 도달했습니까?
‘지옥’에 도달했습니다!
(아마 우리 성도들 중에 이 말씀을 듣고, 요나가 실제 지옥에 떨어졌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분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and, 문자적으로도 ‘스올’은 지옥이 아닙니다. 유의하십시오)
바로 이 지점에서 설교의 서론에서 들었던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요나는 강압에 못 이겨 다시스로 가려고 욥바로 내려갔습니까?
요나는 강압에 못 이겨 배로 내려갔습니까?
요나는 강압에 못 이겨 배 밑창으로 내려갔습니까?
그가 계속해서 내려가고 있는 일의 원인은 무엇인가요?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의 선택입니다!
아무도 그에게 “내려가라”고 한 일이 없지만, 자기의 선택을 따라 “내려”가는 길을 택합니다.
그렇게 해서 닿은 곳이 어디라는 말입니까?
스올의 뱃속, 곧 지옥입니다.
무엇을 볼 수 있나요?
인생에서,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지옥으로 가는 길을 선택합니다.
설교의 앞부분에서 들었던 마흔이 된 백수 청년 이야기와, 카지노에서 퇴직금을 모두 잃어버리고 노숙자가 된 사람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은 대부분의 경우, 자기 스스로 지옥으로 가는 길을 선택합니다.
누가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길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압박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지옥으로 가는 길을 선택합니다. 선택해 놓고, 그 길이 지옥이 되면 또 후회하고 탄식하는데, 또 다시 기회가 주어지면 다시 또 지옥으로 가는 길을 선택합니다. 이 일을 반복합니다. 그렇게 해서 인생이 모조리 망가지고, 완전히 파탄나고 나서야 말합니다.
아! 내가 잘못 살았구나!
그렇게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인생은 한번 뿐이고, 후회는 아무리 하더라도 돌이킬 수 없습니다.
“내려”가는 일, 곧 야웨의 얼굴로부터 도망치는 일
그러면 다시 앞에서 말했던 주제로 돌아갑시다. 3절이 그리고 있는 강조점, 3절이 말하려는 사실, 그것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우리는 조금 전에, 요나가 가고 있는 이 길을, 성경이 계속해서 “내려갔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물어봅시다.
왜 요나의 선택은 “내려가는 길”이었습니까?
그 대답이 3절에 있는 것이죠.
이것은 다르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떤 길을 갈 때 “내려갔다”라고 말하는가?
대답을 3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할 때 성경은 우리에게 “내려갔다”라고 합니까?
야웨의 낯을 피할 때
야웨의 낯을 피하여 도망칠 때
바로 그때 성경은 우리 인생이 “내려간다”라고 말합니다.
1. 야웨의 낯으로부터 도망침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원문에서 이 말은 “야웨의 얼굴로부터”라고 되어 있고, “가다”라는 식으로 말씀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방식으로 쓰인 내용에서 가장 중요한 성경은 어떤 것일까요?
가장 중요하고, 가장 처음 나오는 이 표현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창 3:8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소름이 쫙! 끼치지 않습니까?
야웨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것은 ‘죄인의 본성’입니다.
죄를 저질렀을 때 아담과 하와가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이냐? 야웨의 낯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창세기 4장 16절에도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창 4: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우리말 번역에는 “여호와 앞을 떠나서”라고 되어 있으니, 이것이 같은 표현인 줄 알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원문으로는 똑같습니다. 가인은 “여호와의 얼굴로부터 떠났”습니다. 그의 행로가 무엇입니까? 에덴을 떠나, 놋 땅으로 가는 길이죠.
바로 이 행로를 성경은 “야웨의 낯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왜 요나는 스올, 곧 지옥으로 떨어졌습니까?
그의 선택에 무슨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계속해서 “내려”가게 되었고, 그래서 결국 “산의 뿌리”, 곧 “스올의 뱃속”, 곧 지옥에까지 떨어지게 되었나요?
그가 야웨의 낯을 피하여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선택’을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는 때로는 ‘삶의 욕망’을 좇는 것이 가득 들어 있을 때도 있고, 또 어떤 때에는 무언가에 그릇되게 부풀어서, 온통 ‘개인의 기대’에만 들떠서 하는 선택을 하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의 총합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 길을 제아무리 열렬히 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어느 순간!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지고 걸어가고 있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그 순간 거기에서 멈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식물이 해가 없으면 살 수 없듯이, 우리는 야웨 하나님의 낯빛이 없으면 죽게 되어 있는데, 내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이, 비록 세상적으로는 성공일 수도 있고, 또 나의 정욕을 온통 만족시켜 줄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길이 야웨 하나님의 낯빛을 피하여 도망치는 길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 삶을 비춰주고 계신 것을 어떻게든 피해, 그늘로, 그늘로 도망치는 그런 길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거기에서 빨리 탈출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내가 선택하더라도
지옥일 수 있습니다.
만약 그 나의 선택이, 야웨 하나님의 낯빛을 ‘향한’ 선택이 아니라면, 우리 인생은 얼마든지 지옥이 됩니다.
2. 야웨의 낯빛을 소망하는 삶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라도, 매일 야웨 하나님의 즐거운 낯빛 속에서 행복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계십니까?
감사합시다!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비록 삶이 고단하고 곤고할지라도, 묵상하고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바라보고 계시고, 은총을 베푸시고 계시고, 어렵고 힘든 중에서도 나를 붙들고 계시다는 것이 분명한 확신으로 내 마음속에 있다면,
감사하십시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지요.
갈등과 정욕 속에, 하지 말아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 속에, 수없이 갈등하고 고민하면서 어떤 길로 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그분들은 기억합시다.
이사야 8장 17절 말씀입니다.
사 8:17 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내 삶이, 비록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어긋난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심지어 “야곱의 집에 대해 얼굴을 가리시는 야웨”시더라도, 그 얼굴 빛을 받아야 나는 살 수 있다고 고백하면서, 그분을 “기다리며”, “바라보리라”라고 고백하는 삶!
바로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제는 간단합니다.
우리는 주를 떠나 살 수 없습니다. 햇빛이 비추지 않으면 식물은 죽듯이, 야웨의 낯빛을 떠나면 나는 죽습니다. 스스로의 선택으로 지옥에 떨어집니다.
하지만 혹 잘못된 선택을 하셨더라도 이사야 8장 17절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이스라엘도 실패했습니다. 포로로 끌려갔더랬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고개를 들어 야웨의 낯빛을 소망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는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인생은 한 번 뿐입니다. 그러나 한 번 실수하거나 망쳤다고 해서, 그것으로 영원한 끝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야웨의 낯빛을 소망하기만 한다면, 우리에게는 언제나 기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악인을 벌주는 것이 목적인 신이 아니라, 악인을 돌이켜 회개케 하는 것이 목적인 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