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름을 앞두고
정월대보름을 앞둔 이월 하순이다. 며칠째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씨는 여전해 맑게 개지 않고 흐린 채였다. 어제 오후 반송 시장을 지나왔더니 설을 쇤 이후 한산하던 저잣거리가 대보름을 앞두고 활기를 띠는 듯했다. 묵나물을 비롯한 찬거리 채소들과 잡곡을 담은 봉지와 함께 부름으로 쓰일 호두나 땅콩을 펼쳐 놓았더랬다. 시장으로 나가보면 언제나 그 시대 현재를 읽을 수 있다.
새벽녘에 잠을 깨 산천에서 손수 구한 건재로 음용하는 약차를 달이면서 도서관에서 빌려둔 김형석의 ‘인생 문답’을 읽었다. 노철학자는 행복한 노년이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서, 60세 넘어서도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독서를 많이 하라고 했다. 두 번째는 봉사활동도 좋으니 절대 놀지 말라고 했다. 세 번째는 내 인생을 행복하게 살겠다는 사람은 취미활동을 시작하라고 일렀다.
아침 식후 하늘이 완전히 개지 않았지만 산책 차림으로 현관을 나섰다. 아파트단지 이웃 동으로 나가 꽃대감이 가꾸는 꽃밭을 둘러봤다. 연일 내리는 비에 수선화를 비롯해 여러해살이 구근류 상사화는 움이 솟아났다. 꺾꽂이로 포기를 늘린 영춘화는 가지를 드리워 노란 꽃을 피워 화사했다. 여항산 미산령에 자생하던 꽃을 내가 옮겨다 준 복수초도 꽃대를 밀어 올려 꽃망울을 맺었다.
꽃밭을 둘러본 뒤 아파트단지 출구로 나가 월영동으로 가는 101번 시내버스를 탔다. 충혼탑 사거리에서 창원대로를 달려 마산역 근처 내렸더니 노점이 열렸다. 마산역 노점은 토요일 아침이 성하고 이튿날 일요일도 저자가 형성되나 평일은 한산한 편이다. 금요일 아침 장터가 토요일에 버금갈 수 있었는데, 내일이 정월대보름이라 어제 봤던 반송시장 풍경을 한 번 더 보는 듯했다.
시금치나 유채 같은 푸성귀와 다양한 묵나물이 나왔다. 고사리는 기본이고 취나물이나 아주까리 잎사귀도 묵나물의 재료로 쓰였다. 끝물 못난이 가지는 고지로 만들었고 고구마 잎줄기도 말려서 나왔다. 정월대보름이면 묵나물 무침으로 오곡밥을 지어 상을 차려주신 어머님이 떠오른다. 땅콩이나 호두의 부름과 함께 귀밝이술을 한 모금 입술에 닿게 해서 한 해의 건강을 지켜주셨다.
마산역 광장으로 오르는 노변에서 정월대보름을 앞두고 펼쳐진 노점을 둘러보며 잠시 어린 시절을 회상해 봤다. 이제 정월대보름 세시 풍속은 아련한 추억이 되어 흑백 사진으로도 열람할 수 없고, 되돌아가 보려 해도 갈 수 없다. 대보름날이면 뒷산으로 올라 청솔가지와 대나무를 잘라 와 달집을 지어 겨우내 날린 연을 매달아, 보름달이 떠오를 때 달집을 불살라 액운을 날려 보냈다.
마산역 광장 노점을 둘러본 뒤 정해진 시각 출발하는 진전 상평으로 가는 75번 농어촌버스를 탔다. 어시장과 댓거리를 둘러 밤밭고개를 넘어간 버스는 진동 환승장에 잠시 들렀다가 진전면 소재지 오서에서 2호선 국도 옛길을 따라 양촌과 대정과 일암을 거쳐 금암 상촌으로 들어갔다가 되돌아 나왔다. 의산보건진료소에서 백암으로 들어 상평 종점이 멀지 않은 미천마을에서 내렸다.
미천에서 부재골로 올라 고개를 넘으면 Y자 갈림길에서 서북동과 의림사로 나뉘는데 궂은 날씨에 기온은 차가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하늘은 흐려도 공기는 맑고 상쾌한 청정지역이었다. 소주를 제조하는 산중의 커다란 공장 곁에는 잦은 비에 댐을 가득 채운 평암저수지가 드러났다. 물길이 흘러가는 언덕에 싱그럽게 자란 유채가 보여 배낭의 칼을 꺼내 잘라 봉지에 채워 담았다.
저수지를 비켜 비탈로 내려선 삼거리는 보건진료소가 나오고 둔덕골 방향으로 가니 원산마을이 나왔다. 한때 함안 여항면이었던 마을에 묵혀둔 초등학교 터는 경남교육청에서 학교급식연구소 ‘맛봄’을 신축해 개청을 앞둔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간 북면 일대 야산을 누비던 산나물 채집 경계가 여항산이나 서북산으로 넓혀져 다가올 봄날에도 두어 차례 더 찾지 않을까 싶었다. 24.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