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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해법문 절대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라니까요. 오로지 기복만이 맞다고 여기는 사람도 많다니까요. 아직까지도 그래서 수행하지 말라라고 하는 말 이거 이해 안 되는 말이죠. 근데 왜 이런 말을 했는지를 여전히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니까요. 그래서 좀 유보적인 자세가 필요해요. 보증적인 자세 그래야 공부가 좀 진도가 나갑니다. 그래서 이 본체를 떠나서 법을 설하면 본체 분리자성이 아닌 본체의 자성을 떠나가지고 법을 설해버리면 그건 상으로 모양으로 서라는 거라는 거죠. 상으로 서라는 것이고 그것은 언제나 자성을 미혹되게 한다. 이렇게 모양으로만 법을 서라면 그건 자성을 뉴욕되게 할 뿐이다. 일치만법은 언제나 자성으로부터 일어나 작용함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참된 계정의 법이다. 나의 개성을 들어라. 자성으로부터 일어나서 작용하는 이런 참된 자성을 떠나지 않은 개정에 그걸 내가 설해 줄 테니까 한번 들어봐라. 이 소리예요. 마음의 바탕에 그릿됨이 없으면 자성의 개요. 마음을 바탕에 어리석음이 없으면 자성의 해이며 마음의 바탕에 혼란스러움이 없으면 자성의 정이다. 마음의 바탕이 바로 자성을 얘기하거든요. 뭐가 개냐? 내 본 마음에 자성의 마음의 바탕이라는 본 자성 본래 마음에 그릇됨이 없다면 그게 개예요. 근데 내가 마음을 잡고 어떤 그릇 때문에 분별이라는 그릇 때문에 자꾸 쓰니까 개가 어긋나는 것일 뿐이지 아니 걔는 어디 있는 거예요. 자기 마음에서 있단 말이에요. 자성에서 나온단 말이에요. 자성의 마음에서 그릇됨이 있으면 그게 그 뜸이 없으면 그곳이 개고 마음 바탕에 어리석음이 없으면 그게 개고 마음 바탕에 혼란스럽지 않으면 그게 정이에요. 그런데 마음 바탕은 본래 그릇됨이 없고 혼란스러움이 없고 어리석음이 없어요. 본래는 큰 돈도 우리가 분별을 쫓아가니까 내가 혼란스러움과 같은 착각이 들고 그릇 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고 어리석은 것 같은 착각이 들 뿐인 거예요. 본래 마음 바탕은 본래 불법성이고 본래 계정이란 말이에요. 본래 개정애가 구축돼 있습니다. 완벽하게 느리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것이 자기의 금강이요. 금강 이건 법을 마음 바탕 자성을 금강이라고 불러요. 왜금강은 어떤 걸로도 깨지지 않잖아요. 다이아몬드 이건 옛날 사람들은 다이아몬드 금강을 어떤 걸로도 깨지지 않는 거라고 봤어요. 그러다 보니까 금강이라는 말이 금강받냐. 바람일도 이 지혜 이것은 이 법은 금강과도 같은 어떤 걸로 깨지지 않는다.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거거든요.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변화가 없는 그게 바로 금강과 같다. 그래서 이것이 자기의 금강이요 몸이 가고 오는 것이 본래의 산매이다. 몸이 여기에 앉아가지고 자선을 해서 앉아가지고 가만히 멈춰 있는 게 산맥은 아니란 말이에요. 가면 가는 게 산맥이고 오면 오는 게 산매예요. 생각하면 생각하는 게 산맥이고 딱 묶어 두는 게 산매가 아니란 말이에요? 길을 걷는데도 자상을 벗어나지 않는 게 진짜 참 분리자성이란 말이에요. 그게 진짜 산매지 어떻게 가면 앉아 있을 때만 산매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성의 개성을 듣고 데우치며 육조께 용서를 빌며 개성 하나를 지어 바쳤다. 오은은 환영과 같은 몸인데 환영이 어찌 궁극의 진실일 수가 있겠는가 돌이켜 진여로 나아가려 하면 법이 도리어 깨끗하지 않다. 이 온과 같은 몸 색 수상 행식 몸과 느낌 생각 의지 의식으로 이루어진 이 몸 이건 환영과 같은 몸인데 이게 어떻게 궁극인 진실일 수가 있겠느냐 말이에요? 이건 궁극의 진실일 수가 없어요. 몸도 진실이 아니에요. 몸 왔다 가잖아요. 분명히 명백하게 왔다 가잖아요. 사유해봐도 왔다 가잖아요. 먹고 싸고 계속 몸이 변화해 가잖아요. 몸 계속 왔다 가고 느낌 왔다 가고 생각 왔다 가고 감정 왔다 가고 의지 의식 다 왔다 가잖아요. 이게 어떻게 궁극인 진실일 수가 있겠어요? 돌이켜 내가 진으로 나아가려고 하면 법이 돈을 깨끗하지 않아요. 즉 진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진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마음 자체가 둘로 나누는 거잖아요. 나는 진영 아니라는 거잖아요. 내가 지녀가 아니어야만 지니어가 되기 위해서 나아갈 수 있잖아요. 그럼 나는 지니어. 불성을 찾을 거야. 지니어로 나아갈 거야 하는 마음이 자꾸 자꾸 지녀와 나를 멀어지게 하죠. 그 분별이 나를 진영에서 멀어지게 하잖아요. 그런 줄 모른단 말이에요. 이게 불인법의 개합했을 때 이런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육조께서는 이런 지성의 개성을 듣고 그럴 듯하게 여기고는 다시 지성에게 말씀하셨다. 그대에 스승이 말하는 개정에는 작은 근기의 지혜를 가진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고 내가 말하는 계정에는 큰 근기의 지혜를 가진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다. 만약 자성을 깨닫는다면 보리도 열반도 세우지 않고 해탈 지경도 세우지 않는다. 아까 얘기했죠? 보리 열반 자성 해탈 지경 그 어떤 것도 세우지 않아요. 그냥 묶인 것을 풀어줄 뿐이지 풀어줄 뿐이지 걷던 것도 법도 내세우지 않는단 말이에요. 그래서 유식 불교에서도 보면 승의 무자상이래요. 승의도 자성이 없다. 승의가 바로 깨달음 뭐 저희도 이제 뭐 이런 깨달음 뭐 열반 헤탈 이런 거거든요. 근데 그 또한 무자성이라고 얘기를 한단 말이에요. 얻을만한 한법도 없어야 비로소 능히 만법을 세울 수 있다. 한 법도 얻을 만한 게 없어야 만법을 세울 수 있어요. 만법을 세웠지만 세운 게 없단 말이에요. 만약 이 도리를 안다면 곧 불신이라 하고 보리 열반이라고도 하며 헤탈 지경이라고도 일컫는다. 이렇게 내세우지 않을 때 그때 방편으로 이제 불신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보리라고도 말할 수 있고 열반이니 해탈 지경이니 뭐라고 다 임시 방편으로 갖다 써도 좋다 이 소리예요. 이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을 때는 견성한 사람은 법을 세워도 좋고 세우지 않아도 좋다. 임시로 세우는 거니까 방편으로 세우는 거니까 세워도 좋고 세우지 않아도 좋죠. 스스로 세우지만 세우는데 걸리지 않으니까 오고 가면 자유롭고 막힘도 없고 걸림도 없어서 쓸 필요가 있을 때는 쓰고 말에 응해서는 답해주며 널리 화신을 나타내지만 자성을 벗어나지 않으니 곧 자제한 신통과 유의 산매를 얻은 것이어서 이를 일러 견성이라고 한다 뭘 하더라도 오더라도 가더라도 자유롭고 막힘이 없단 말이에요. 걸림이 없단 말이에요. 쓰든 안 쓰든 그러니까 쓰고 싶을 때는 쓸 필요가 있을 때는 2년 따라 쓰고 사람들이 말로 물어본 말로 답해 주기도 하고 말에 걸림없이 답해 주고 자격 쓰지만 쓴 거에 걸림없이 쓴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널리 화신을 나타낸다고요. 화신을 나타내서 이렇게 응하고 저렇게도 응하고 묻는 질문에 다 널리 답해 준단 말이죠? 그러나 자성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분리자석 자성을 벗어나지는 않는단 말이에요. 그게 바로 자제한 신통이고 유의 산매란 말이죠? 이게 바로 견성이고 이게 신통이에요. 뭐가 신통입니까? 내가 설할 때 설하고 침묵할 때 침묵하고 힘든 사람에게 말할 때 말하고 이방편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방평 쓰고 저 방편이 필요한 사람에겐 저 방편 쓰고 다 하면서도 거기 걸리지 않는 게 그게 신통이란 말이에요? 그게 신통이지 가만히 앉아 가지고 몸을 띄우는 게 신통이 아니란 말이에요. 사람 전생을 막 허니 보고 마음을 읽고 이런 게 신통이 아니란 말이에요. 하드에 함의 없이 하는 게 그게 진통이에요 하는데 자기는 그 하는 데 걸리지 않는단 말이에요. 그게 신통이에요. 그러니까 유희산매죠 유희 항상 산매를 즐긴단 말이에요. 삶을 즐겨요. 그 어떤 삶에도 집착하지 않으니까 뿌리 내리지 않으니까 이 전부 다 꿈인 줄 아니까? 꿈속에서 아이 박진감 넘치는 놀이터 아닙니까? 여기가 근데 영화도 박진감 넘치잖아요. 근데 영화는 가짜잖아요 근데 여기는 진짜잖아요. 진짜 같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3D 4D 무슨 뭐 10D 엄청난 실제 같이 느껴지는 영화란 말이에요. 이게 그건 내가 주인공도 하고 감독도 하고 뭐 다 내가 하는 이거 완벽한 진짜 영화 이게 진짜 완전히 그냥 진짜 생생한 진짜 같은 영화잖아요. 우리 사는 이 삶이 진짜 영화란 말 영화가 있단 말이에요 근데 이게 영화란 말이야. 이게 진짜가 아니라 이게 진짜 내가 아니고 이게 진짜 세상이 아니란 말이에요. 다 각본이지 이걸 안다면 유희시 삼매예요. 이 현실이 그대로 현실을 가지고 노는 거예요. 이게 다 꿈과 같으니까 한편에 내가 펼쳐내는 영화니까 마음이 펼쳐내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만법이잖아요. 바다에서 일어나는 파도잖아요. 근데 이 사실에 깨어 있다면 마치 꿈인 줄 알고 자각몽을 꾸는 사람이 꿈속에서 아무리 힘든 게 있어도 힘들지 않죠? 난 좀 있으면 깰 거니까 이건 꿈인 줄 뻔히 아니까 그것도 두렵지 않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꿈을 그냥 즐기게 되는 거예요. 어차피 꿈에 들어왔으니까 재밌게 꿈을 즐기다 깨자 한단 말이에요. 그게 유의사입니다. 지성의 다시 육조께 여쭈었다. 어떤 것이 세우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육조께서 말씀하셨다. 자성에는 그릇됨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으며 어지러움도 없다. 순간순간 반야로 비추어 보아 늘 자성의 모습에서 벗어나 늘 법의 모습에서 벗어나면 자유자재하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세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자성의 자성이 어떻게 그릇됨이 있겠어요. 어리석음 어지러움 이런 게 없습니다. 그러니 이 순간순간 반야로 비춰보아 반야지혜로서 비춰본다면 법이다. 법이 아니다라는 그 모습에서도 벗어나게 되어서 자유자재하게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이문자제 마음대로 인연에 응해서 쓸 수 있어요. 회사에서 열심히 해야 되면 열심히 하는 걸로 쓸 수 있고 이전에 응해 가지고 이 사람이 오면 이 사람과 인현에 응할 수 있고 저희도 오면 저희를 응할 수 있고 회사에서 나가게 되면 나가는 대로 나가는 대로 응했을 수 있고, 또 새로운 일을 하면 새로운 일에 응했을 수 있고 교회 가면 아멘하고 같이 기도도 할 수 있고 뭔 못해요. 이게 다 유희 산매인데 실제가 아닌데 한 법도 내세울 바가 없는데 무엇을 해도 되죠? 제가 승복이 있고 가사 장삼이 있고 교회 가가지고 목사님이 이끄는 예배에 참석해서 목사님이 하나님 아버님하고 다 저 아멘 한번 같이 아멘 했다. 아멘 이게 법 아니에요. 할렐루야 이게 법 아니에요. 할렐루야 어떻게 아멘과 다를 수 있어요? 나무 물 하는 것과 하나님 하는 것이 어떻게 달라요? 모양 따라가고 생각 따라가고 개념 따라가고 언어 따라가면 다르죠. 하나님 이게 뜻 앞에서 잡은 나무랑 똑같단 말이에요. 할렐루에가 따라비 잡나무랑 똑같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불자분이 타정교인들를 만나 가지고 너무너무 힘든 일을 당한 가지고 그분들이 막 억지로 난 하기 싫어 죽겠는데 억지로 막 기도시키고 암의 나라라고 시키니까 너무 수치스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 수치스러워서 죽을 것 같다는 자기 생각을 자기 분들을 내려놓으면 교회나 성당이나 뭐가 달라요. 내가 아직 불교다 기독교다 천주교다. 이건 옳고 저건 틀리다라는 분들이 있으니까 분별이 있으니까 그거를 불교는 옳고 타증은 틀렸어라는 그 생각이 너무 강하니까 그 다르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지 아니 부처님이 교회 가서 예배 못 하겠어요. 성당 가서 미사 못 드리겠어요. 뭐든지 다 할 수 있어요. 입문자제하게 걸림없이 한 법도 세우지 않으니까 이게 그래도 불교인데 그런 생각이 없단 말이에요 그런 게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그래도 불교가 어디 교회 어디 타종단의 타정교회 밀리는 거 아닐까? 밀리는 게 어디 있단 말이에요? 그게 다 법을 떠나지 않는 건데 하나님께서 목사님이 하쯤에 간절히 예배하는 게 법을 떠나지 않는단 말이에요. 신성을 떠나지 않는단 말이에요. 자성을 떠나지 않는단 말이에요. 전부 다 분리 자성이에요. 이 계정애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한복도 세우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 이렇게 되면 법이라는 모습에서도 벗어나면 저렇게 부처님이 있고 이런 곳은 불교 법당 이래가지고 이런 건 법이야. 그리고 여기다 십자가 거론하면 법이 아닙니까? 실제적으로는 왜 법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특약한 스님은 법당에다가 십자가하고 예수님 십자가 박힌 십자가 상하고 불쌍하고 같이 모시고서 예배한다 그러잖아요. 서양에는 기독교인들이 워낙 많으니까 뭐에 문제가 돼요. 그게 어떤 사람들은 그걸 보고서는 하스님이 교세 확장하려고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또 한번 끌어들여 보려고 그렇게 한 거 아니냐? 이렇게 또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죠. 그러면 자기 생각이니까 그렇게 생각해. 가지고 그런 생각이 얽매 있다면 그 사람은 어쩔 수 없어요. 그 사람 생각이 그렇게 보는 거지? 그럼 불교에는 교세 학장의 목적이 없어요. 아예 애초에 부처님은 자기 괴로움 와서 해결하고 그냥 가면 돼요. 절집안에서 쉽게 말해서 설집안에서 보시라는 건요. 내가 혜택 받아가지고 그 내가 마음이 나니까 그냥 주겠다. 이거예요. 그러려면 고시해라 이거예요. 그냥 요구하는 게 없다니까요. 불교에서는 선관위 부처님께서 고시하십시오 하고 요구하지 않는다니까요. 그게 부처님의 참뜻이에요. 그냥 제자 입장에서 본인이 혜택을 받았으니까 마음 공부해서 이렇게 자유로워졌으니 내가 이 법이 너무 좋으니 이 법을 전하는데 써 주십시오 하고 부시를 이렇게 하니까 how can 곳에 쓰면 좋은 일이니까 그렇게 바꾸도 좋다. 고맙습니다. 그냥 저 자세로 다음에 또 받지 않을까 해서 저 자세로 막 이렇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러지 않는단 말이에요. 저도 참 어찌 보면 한편으로 좀 죄송스러운 게 보실 아무리 많이 하신 분한테도 제가 확 감사하다는 말도 안 하고 저 챙겨지지도 않고 사실 그래요. 그러다 보니까 한편으로는 좀 죄송한 마음이 있어요. 그런데 또 감사한 게 아예 그런 걸 아니까 고시를 많이 한 사람이든 뭐 쫓겨난 사람이든 아예 바라는 게 없어요. 그냥 그러니까 그냥 자유롭게 하는 거예요. 또 저도 뭐가 누가 잘했는 뭐 많이는 지적했는지 관심도 없고 그런 얘기를 하면은 왜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하느냐 하고 오히려 우리 봉사자들한테 그런 얘기도 할 필요 없다고 얘기를 하고 하니까 그 상관이 없단 말이야. 상관이 그러니까 그게 그런 것을 쉽게 제 얘기를 하는 이유는 그런 이런 종교의 순수성을 오해하면 안 된단 말이죠? 물론 이걸 이제 국회 하는 일부 소수의 사람들이 종교인들이 있다 보니까 그럴 수는 있겠지만 그러니까 이게 종교는 순수한 거죠 순수한 거예요. 본인이 보시 할 때도 순수해야 돼요. 받을 때도 순수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다도 거기서 땡이란 말이야. 안 챙겨 준단 말이에요? 그거 그거 챙겨주길 바라면 딴 데가 보자 하면 돼요. 굳이 와서 하란 얘기도 안 했으니까 뭐 받고 싶으면 딱 혜택 받고 싶으면 딴 데 가서 하면 된단 말이죠? 그런 상황이 없지만 감사하지만 그래서 이처럼 어떤 법도 내세우지 않아요. 그러니까 어떤 법도 내세우지 않으니까 법의 모습에서 벗어나니까 자유자재에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세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하나도 세우지 않아요 세우지 않으니까 자유자재 한 거예요. 그니까 무엇이든 할 수 있단 말이에요. 저는 예를 들면 처음에 그랬다 그랬잖아요. 예를 들어 어디 저 서울에 포기당을 어떻게 하지? 포기당을 하려고 보니까 이게 저 이게 월세가 너무 비싸단 말이죠? 근데 보니까 목사님들이 새 싼 데를 잘 얻으셔가지고 교회를 하는 데가 있더라고요. 근데 그 뭐 팔진 않겠지만 아마도 교회 했던 걸 절로 한 달에 싫어하시겠지만 교회하다가 이렇게 내놓은 교회들을 그런 거 어떻게 월세를 들어가가지고 인테리어도 다 교회 인테리어 잘 돼 있잖아요? 90자가 딱 있는 데다가 앞에 부처님만 딱 모시면 기가 막히게 좋겠다. 돈도 안 들고 그래서 제가 한 동안 찾았다니까요. 교회를 내놓은 교회를 월세 들어갈라고 돈도 안 들고 인테리어도 안 해도 좋고 너무 세련돼 보일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왜 문제가 되냐면요? 그게 부처님 안 모셨다고 뭐 그 뭐 허물이 되겠어요? 또 뭐 같이 모신 대로 허물이 되겠습니까? 법도 세울 게 없단 말이에요? 하물며 뭐 부처님은 안 모시면 또 어때요? 아무 허무도 될 게 없단 말이에요. 자유자재 할 수 있단 말이죠? 자성이 스스로 깨달으면 문득 깨닫고 문득 닫으니 점차가 없고 일체의 그 어떤 법도 세우지 않는다. 모든 법이 정면인데 무슨 차례와 단계가 있겠는가 자성이 스스로 깨달으면 문득 깨닫고 문득 닫는다. 돈어란 말이에요. 돈어 그러니 이 도노에서는 점차가 없다. 점차가 없고 그 어떤 일체의 어떤 법도 세우지 않는다. 모든 법이 전멸한데 무슨 차례와 단계가 있겠는가 차례와 단계가 따로 없죠. 지성이 저를 올리고서 곁에서 모시는 시자가 되기를 자청하였으며 초석으로 게을리하지 않았다. 다만 지철 비구입니다. 지철 스님은 강서 사람이다. 성은 장시요. 이름은 행창이며 어릴 적에는 의협심이 강했다. 남종과 북종이 나뉘어 교화하면서 비록 두 종주이신 해능조사와 신수대사가 서로 말을 나누며 차별하지 않았지만 따르는 대중들은 서로 다투면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내었다. 그때 북종의 대중들이 스스로 신수 대사를 내세워 제 육조를 삼았으며 패능조사가 법의를 전수받은 사실이 천하에 알려지는 것을 꺼려 행창을 시켜 조사를 해칠 것을 부탁하였다. 이제 그 신수 대사는 그러지 않지만 그 신수 대사의 제자들 중에 이제 뭐 일부가 이런 사태 생각을 했나 보죠. 그래서 팽창을 시켜서 육조를 가서 죽여라 하고 이 부탁을 했단 말이에요. 이런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거죠. 이럴 법 페어 옛날 같으면 육조 대사는 타심통으로 그 사실을 미리 알고 금 열량을 자리 사이에 놓아두었다. 밤이 늦어 행창이 조실로 들어와서 해치려고 하자 대사께서는 목을 길게 들이밀었다. 팽창이 세 번 칼을 휘둘렀는데 전혀 다친 바가 없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다른 칼은 삿대지 않고 셋 된 칼은 바르지 않다. 그대에게 황금을 비치고 있을 뿐 목숨을 비치지는 않았다. 팽창에 놀라서 쓰러졌다가 한참 뒤에 깨어나서는 숲이 울며 잘못을 뉘우치고는 곧 출가하기를 원했다. 이건 이제 전형적인 어떤 이런 경전 같은 이런 후세 사람들이 경전을 쓸 때는 자신의 은사 스님에 대해서 이런 좀 뭐랄까? 좀 이런 심의적인 이런 것들을 좀 넣어요. 이게 다 그래요. 다 위인들도 다 그러잖아요. 위인 전기 같은 거 보면 좀 극적인 효과를 누리기 위해서 이런 어떤 소설 드라마틱한 요소들을 넣단 말이죠? 모르겠어요. 진짜 그랬는지 아닌지는 제가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고 어쨌든 육주 대사는 또 모르죠. 저도 저도 이런 신통 이런 것에 대해서 조사 스님들은 이런 신통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아니다라고 얘기를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이런 말을 한 거고 그러나 알 수 없죠. 그래서 이런 타심통으로 그 사실을 알고 금요일 열람을 놔둔 거죠. 칼로 휘둘렀는데도 막 잘라지지 않았다. 그래, 그렇게 쓴 거예요. 그러고 나서 이 팽창이 어쨌든 행창이 이렇게 스님을 죽이러 왔다가 스님의 어떤 어떤 모습에 하여간 놀라움을 가졌겠죠? 그러고서 야 내가 이런 분을 모시고 내가 출가를 해야 되겠구나 하고 이제 아주 크게 바심을 하게 된 어떤 그런 장면이 있죠. 그랬더니 육조 대사는 그 금을 주면서 말 말씀하신 거예요. 그때는 우선 가거라 왜냐하면 지금 나를 죽이러 온 사람이 발신을 추가한다. 이러면 육조 스님의 제자들에게 오히려 저 사람이 언제 또 죽일지 모르겠다 하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당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때는 우선 가거라. 대중들이 도리어 그대를 해칠까 두렵다 그대는 훗날 모습을 바꾸어 다시 오도록 해라. 그때는 그대를 받아들이겠다 죽이려고 하는 자객의 모습을 버리고 모습을 바꿔서 다시 오더라. 이렇게 한 거죠? 행정은 그 뜻을 받도록 밤을 이용해 달아났다. 훗날 행창은 어떤 스님에게 의지하여 출발을 했고 어느 날 육조의 말씀을 기억하고는 멀리서 찾아와 예를 갖춰 인사를 드렸다. 6조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오랫동안 너를 생각했는데 어찌 이리 늦게 왔느냐? 팽창이 대답했다. 지난날 스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신 은덕으로 지금 출가하여 고행을 하고 있지만 이것만 가지고서는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것에 있습니다. 저는 일찍이 열반경을 보았으나 아직 산과 무상을 무상의 뜻을 밝히지 못하였습니다. 스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제사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이렇게 행창이 나중에 어떤 삶의 의지에 출가했다 했다가 내가 육조 스님께 반드시 가서 추가를 하리라 하는 마음을 먹고 둘만 아는 거니까 나중에 이제 스님을 찾아와서 법을 묻는 장면인 것이죠. 그래서 열반경을 보다가 산과 무상 상은 항상 항상 한 상자죠. 무상은 항상 하지 않는 것을 설명하죠? 여기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시오 했어요. 그랬더니 육조 스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냐면 무상은 곧 불성이고 유상은 곧 일제 선악의 모든 법에 대해 분별하는 마음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열반경에 보면요 그 우리가 이제 열방경에서는 불성 열반의 열애장을 설어하잖아요. 일체 중생 시류 불성 이렇게 설하는게 열반경이거든요. 근데 이제 열반경이 인도에 있는 사람들한테 좀 그 욕을 먹는 게 뭐냐 하면 불교의 핵심은 뭐냐면 인도에서의 분위기는 뭐냐면요. 브라만교 또 보라만교의 아트만 사상 아트만 사상이 뭐냐면 내 안에 무너지지 않는 아트만이라는 게 존재하고 이 우주적인 범위라는 게 있어서 내 안에 있는 아트만이 계속해서 유뇌하다가 돌고 돌면 윤회하다가 아트만이 범과 하나가 되는 건 아니 범아 일회화 사상이거든요. 그래서 내가 죽더라도 죽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아트만은 계속 불멸한다. 이렇게 봐요. 이게 아트만 사상이란 말이에요. 유아라는 사상이에요. 근데 불교는 그게 아니다라고 얘기하면서 그런 아트만이라는 건 없다라는 게 불교거든요. 내 안에 영혼물멸하게 존재하는 건 없다라는 게 아트만 사상이에요. 그런데 열반경에서는 열반경에서는 대승불교가 나오면서 열반경에서는 뭐라고 방편을 쓰냐 하면 공화인데 초기 불교에서 석가모니 우처님께서도 자성청정심이라는 말을 하셨거든요. 자기의 본래 성품은 자성은 청정한 마음이다. 그래서 그것을 회복하는 것 그래서 내가 괴로움의 원인 침착과 집착과 12가지 12연기로 대표되는 괴롬의 원인들 분별 망상심 식해석을 시작해서 이런 분별 망상심이라는 분별을 내가 그 묶인 것에서 풀려나기만 하면 본래 자성 청정심을 회복해서 열반한다. 묶여 있는 삼독심이 훅 풀려난단 말이죠. 묶인 곳에서 풀려나는 게 해탈이에요. 그리고 삼북심의 불길에서 불길을 확 불어끄는 게 열반이라 그랬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열반 해탈 자선 청정심이라는 말은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열반 헤탈 자선 청경심은 연회장 아니잖아 아트만과는 다르다. 범아 이름 이런 것과는 다르다. 이렇게 얘기를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측면으로 봤을 때 자성 청정심 별반 헤탈이라는 거는 무너지지 않잖아요. 생겨나는 것도 아니잖아요. 숨겨나는게 아니고 무너지는 게 아니잖아요. 원래 그냥 본성이라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자성 청정심이라 그랬죠. 그런 어떤 측면이 있단 말이에요? 그러나 그런 측면을 교리로 정리해 가지고 이게 불성예하고 정리하면 그건 틀렸어요. 그게 중도란 말이에요? 정리해 놓으면 틀렸지만 그런 측면이 있다라는 걸 또 무시할 수는 없는 거죠 그러니까 그런 측면 열반 헤탈 자성 청정 신의 그런 측면을 가지고 열반경에서는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을 했단 말이에요. 한편으로 어떻게 활용했느냐 일체중생은 불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 불성은 어떤 특징이 있느냐. 상라 가정의 특징이 있다. 항상하고 항상 즐겁고 시계 여기서 즐겁다는 거는 막 좋고 나쁘고 하는 건 즐거움이 아니죠. 그냥 이거는 괴로움이 괴로움이 없다는 소리예요. 즐겁다는 소리는 그리고 아 아가 없다 그랬잖아요. 아트만에서는 근데 열반경에서는 아가 있다. 그랬단 말이에요. 그 아는 쉽게 말하면 참나를 말해요.
말로 하자면 불교는 참나란 말을 되게 싫어하지만 그런 진정한 나아라고 할 만한 자성 청정 신화하고 할 만한 어떤 것이 있고 없음을 넘어서서 있다 이 소리예요 중도적으로 있다. 그리고 정 항상 청정한 청정한 이런 측면이 있다는 얘기를 적극적으로 한 경전이 야 강경이란 말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이게 이 친구도 행창도 열방 경험을 보다가 오니까 초기 불교나 이런 데서는.
내가 있다 내가 없다라고만 항상 했는데 열방경은 신기하게도 열반경은 항상 한다.
이렇게 자성을 항상 한다. 이렇게 얘기했단 말이에요 불
성을 그렇게 얘기하니까 이거 내가 참 밝히지 못했습니다. 이게 왜 이렇게 했을까요?
이제 이런 어떤 궁금해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대사께서 뭐라고 얘기?
하셨냐 하면 이 행창은 열광경을 보
고서 어떤 마음을 가졌느냐? 아 자성은 불성은 불성은 항상 하는구나.
열방계약 그렇게 나와 있으니까 불성은 항상 하는구나 여기에 딱 취해 있단 말이에요. 열방경도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불성은 항상 하다 이렇게 생각했단 말이에요. 자아가 있다 이렇게 생각했단 말이에요.
그 집착을 깨주기 위해서 육조 스님은 그 집착을 깨주기.
위해서 반대로 말을 합니다. 어떻게 무상한 곳 불성이다 불성이.
항상하다고 열방경력 나와 있는데 육조스님은 불성은 무상하다. 이랬단 말이에요?
그리고 유상 상이 있는 것 항상 함이 있는 것 항상.
감이 있는 것 그건 일제 선악의 모든 법들 모든 것 모든 존재 선악의 모든 것들.
그런 것들은 항상 있다 그랬어요. 그건 생겼다 사라지는 거잖아요. 사실은 착한 일 했다가 사라지고 좋은 일 나쁜.
일이다. 사라지고 선하게 모든 분별하는 법들은 생겼다 사라지는 거잖아요.
그런데 오히려 항상함이 있다. 그랬단 말이에요. 육조 스님이.
이 말을 듣고 행창이 충격받게 뛰기 뭔 소리지? 왜 경전과 다른 말을 할까?
법은 이렇게 쓰는 거란 말이에요 상에 묶여 있는 사람에게는.
무상이라고 하고 무상에 묶여 있는 사람에게는 상이라고 해주는 걸 통해서 그럴 수 있는 측면을 통해서 거기에.
사로잡히는 걸 깨는 거예요. 그게 중도예요. 중도의 안목이에요. 그럼 여러분.
불성은 항상 합니까 부상합니까?
황상하다고 해도 틀렸고 무상하다고 해도 틀렸어요.
황상하다고 할 수도 있고 무상하다고 할 수도 있고 항상 하지 않다고 할 수도 있고 무상하지 않다고 할 수도 있죠.
그러나 그중에 어느 하나를 딱 취해서 이게 법이야라고 정한다면 그건 자기.
생각이 하는 거잖아요. 생각이 취하는 거잖아요. 그걸 교리로 법으로 취하는 거잖아요. 어떻게?
항상하다라는 것을 법으로 취할 수가 있습니까? 법을 한 법도 내세울 수 없는데 이게 진짜 법이란.
말이야. 헌법도 내세울 수 없는 게 진짜 법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 싹 빼앗을 뿐이지 따로 줄 법은
없다라는 말을 그래서 하는 거예요? 그랬더니 행창이 스님의 말씀은 경문.
과는 크게 어긋납니다. 제사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부처님의 시민을 전하거늘 어찌 불경과 어긋난다는.
말이냐 행창이 말했다. 경전에서는 불성이고 상이라 하였는데 스님께서는 도리어 무상.
이라 하시고 경전에서는 선악의 모든 법과 보리심까지 모두 무상하다 하였는데 스님.
께서는 도리어 상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곧 경문과 다른 것이니 저의 의혹은 더할 뿐입니다. 대사.
께서 말씀하셨다. 열방경은 내가 옛날 무진장 스님이 한편 독송하는 것을 듣고.
그에게 강설한 적이 있다. 그때 나의 말은 한 글자 한 뜻도 경문과 어긋난 것이 없었다.
지금 그대에게도 결코 다르게 말하지 않았다. 팽창이 말했다. 저는 식견이 얕고.
어두우니 스님께서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아니, 마이크 너무 좋네요. 목이 아
플 때 이렇게 가까이 대고 얘기해도 뻑뻑 소리가 안 나네. 보통 이렇게 가까이 대고 얘기하면.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그때는 알지 못하느냐 불성이 만약 상이라면.
다시 불성이 항상한다면 다시 무슨 선하고 악한 모든 현
상들을 말했겠느냐? 즉 불성이 한상하다면 불성이 항상 하고 있다면.
부정밖에 없는 게 아니냐. 근데 선이 어떻게 있고 악이 어떻게 있겠느냐?
항상 불쌍만 있어야지 나아가 불성이 항상하다면 겁이 나을지라도 보릿.
음을 바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불성이라는 게 항상 항상 하는 거
면 내가 버리심을 바랄 필요가 있어요. 내가 지금 불쌍한데 항상 하는.
거니까 부르심을 따로 바랄 필요가 없죠. 항상 하니까 이제 이런 측면이 있잖아요. 사실은 그러니까 이제 이렇게 얘기를 한
것이죠 어찌 보면 이게 이 말 뭐랄까? 말을 가지고 말장난하는 거예요?
발은 전부 다 허물이 있잖아요. 이렇게 얘기할 수도 없고 저렇게 얘기할 수도 없고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측면도 있고 저렇게 얘기할 수도 있는 측면도 있단 말이에요.
여기 묶여있는 사람에게는 이런 측면을 얘기함으로써 그 틀을 깨주기 위한 목적이 있는 거지.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이 말을 말 그대로 또
100% 이익을 쥐라는 얘기가 아닌 거예요. 굉장히 이런 측면을 얘기하는 걸 통해서 그 틀을 깨주는 거죠? 그런 까닭에 나는.
불성을 무상이라고 했으니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참되고 항상한 도이다. 또 일제 제법이 무
상하다면 항상하지 않다면 하나하나의 사물은 제각기 스스로의 자성이 있어서 생겨나고 사라지게 될 것이니
참 되고 항상한 본성이 두루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일체 제법이 상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참된 무상의 뜻이다. 즉 일체 제법이 일체 모든 것들이 상상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물은 제각기 스스로의 자기라는 어떤 성품 성품이 있어 가지고 생겨나고 성품이 있어서.
사라지게 될 것이 아니겠느냐. 그런데 참되고 항상 한 분성이 두루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그냥 말을 말로 하려니까 이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이 말을 막 진짜로 이게 맞고 틀리고 이런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일제 제법이 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니다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쉽게 말해. 내가 일제 제법이 상이거나 무상이다라는 그것도 하나의 상이고 또 불성이라는 것이 항상하다라는 것 혹은 불성은 무상하다라는 것 그것도 실체가 아니다라는 얘기를 깨뜨려주기 위해서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이지. 이 얘기를 듣고 여러분들이 이제 헷갈려가지고 도대체 이게 뭔 소리냐 그러면은 일체 제법이 상이란 얘기냐 우상이란 얘기냐. 불성이 항상 하단 얘기냐 항상 하지 않다는 얘기냐 정리를 해줘라 결론을 내달라 이 얘기가 도대체 이 소리입니까? 저 소리입니까 하고 결론을 내지 말라는 얘기예요. 이거를 이해해 가지고 아 무상이란 얘기구나. 이렇게 주지도 말고 이해해 가지고 아 상이란 얘기구나. 이렇게 쥐지 말란 얘기예요. 불성도 현실도 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니라는 얘기에요. 어느 한복도 쥘 수 있는 게 없다는 얘기를 하고 계시는 거란 말이죠. 그래서 본부와 외도는 삿땐 항상함에 집착하고 범부 외도들은 삿된 항상함에 집착하고 잘못된 항상함에 집착하고 모든 이승들은 수행하는 사람들은 항상함을 무상하다고 헤아리는 등의 8 가지 전도된 생각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요의교인 열반경을 통해서 그들의 치우친 견해를 타파하고자 참된 상락 아정을 밝혀 말씀하신 것이다. 즉 범부나 외도나 이승 수행하는 사람들이 항상하다거나 혹은 무상하다거나 하고 헤아리는 그 생각 전두된 생각 그 생각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열강경을 설하셔가지고 즉 이거는 일 뭐 뭐랄까 이렇게 공부하는 사람들 혹은 하여간 삿된 생각에 집착하는 사람들 그걸 깨뜨려주기 위해서 상락 아정이라는 방편을 써서 말씀하신 것뿐이다. 그러니까 거기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하는 얘기죠? 이게 되게 어찌 보면 중요한 얘기예요? 왜냐하면 열광경을 가지고 지금도 지금도 열광경을 가지고 열광경은 상을 설했기 때문에 혈관이라는 거 불성이라는 게 상하 가정이라고 서 있기 때문에 열반경은 경도 아니다. 그거는 막 쓰레기 같은 거다. 이런 식으로 열반경을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초기 불교를 공부하는데 일부 사람들 중에는 심지어는 나아가서 대승불교 전부 다 쓸데없는 잡설이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사람도 일부 있단 말이죠? 이거는 대승불교 경전에 임시방편이라는 본뜻을 몰라서 그런 거예요.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나 삼불교에서는 결국에는 팔만대장경도 전부 다 임시 방편이라 그러잖아요 걸릴 거라 얘기하잖아요. 한복 이렇게 많은 법을 사렸지만 한 법도 30 바가 없다고 대성경전에서 이렇게 얘기를 하잖아요. 그런 얘기를 왜 했겠어요? 선하지만 사람마다 없으니까 그렇게 얘기를 한 것이다. 그대는 지금 말에만 의지하고 참뜻을 모른 채 단면에 빠진 무상함을 가지고 항상함을 죽임으로써 부처님의 분만하고 묘한 최후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말에만 의지해서 참뜻을 모르고 있다. 그래서 단멸에 빠진 무상함 무상하다. 그러니까 항상 하지 않다라니까 죽음 다 끝나는 거구나. 이런 거에 빠져가지고 항상하다라는 항상하다라고 열반경에서 말씀하셨던 그 참다운 의미를 모르고 그 열반경에서 말씀하신 그 항상하다라는 것에 상당 아정이라는 것에 참뜻을 죽이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 비록 천만 번을 읽더라도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그렇게 경전을 읽어 가지고는 안 된다. 팽창이 문득 크게 깨닫고는 개성으로 말했다. 무상한 마음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항상 하는 자성을 선하셨다. 방편을 알지 못하면 연못에서 조약도를 줍는 것과 같다. 내가 지금 애써 공을 들이도 않았는데, 불성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이는 조사께서 주신 것이 아니요. 나 또한 얻은 바가 없구나,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제 철저하게 되었으니 이름을 지철이라고 해라 지철이 감사의 저를 올리고 물러갔다. 이렇게 에스 공들이지도 않았는데 불쑥이 눈앞에 나타나는 거예요. 근건 조사가 준 것도 아니고 나도 얻은 바가 없단 말이에요. 주고받은 게 없는 거예요. 본래 그러한 거지? 내가 묶여 있는 한 생각에 묶여 있는 생각에서만 딱 노현할 수 있으면 그냥 본래 있는 늘 드러나 있는 법에 눈 뜨는 거죠? 다음 주가 마지막이죠 그죠? 네 5분 남았으니까 좀만 더 할게 한 동자가 있었는데 이름은 신회이고 양양고시의 아들이다 하택 시내를 얘기해요. 13세에 옥천사로부터 육조를 찾아와 인사를 드리니 육조께서 말씀하셨다. 먼 곳에서 고생스럽게 찾아왔는데 근본은 가지고 왔습니다. 만약 근본을 가지고 왔다면 마땅히 주인공을 알 것이니 한번 말해 보거라 참 이때는 대단했던 시대예요. 13살짜리한테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 이게 진짜라면 이런 질문을 진짜 했다면 어 이 젊은 날에 한수직 한 사람들도 있었나 봐요 아니면 그냥 버버에 대해서 한번 물어보느라고 했을 수도 있고요. 그 시내가 말했다. 이 시내가 그전에 어쨌든 공부를 좀 하긴 했든가 봐요, 어린 동자였지만 시내가 말했어요. 13살짜리가 이렇게 말해요 무주를 근본으로 삼으니 보는 것 그것이 곧 주인공입니다. 머무는 법 없는 무주를 근본으로 삼으니 보는 것 그게 곧 주인공이다 이렇게 얘기하시는 측면이 분명히 있긴 있어요. 이게 바르게 자기가 상품을 바르게 확인하고 이런 얘기를 했다면 허물이 없을 수 있어요. 아니 방편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겠지 하고 넘어갈 수 있어요. 근데 본인이 이걸 확실하게 깨치지 못하고 그냥 어디서 주어들은 공부해서 들은 머리로 아름아리로 안 그걸 가지고 이렇게 얘기했다면 그건 또 아니란 말이죠 그러다 보니까 이제 대사께서 떠보는 거 제대로 알고 있는가, 그래서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이 3위가 어찌 함부로 경솔한 말을 하느냐 하고 이제 한번 했어요. 그리고 대사께서 주장자와 세 번을 때리자 주변 양자로 때리면서 세 번 이렇게 얘기했어요. 그때 시내가 다시 여쭈었어요. 시내가 젊은 혈기도 아닌데 이거는 어린 어린 혈기로 스님께서는 아주 이스님한테 와서 이런 얘기를 일반 스님들은 잘 못하는데 어디 내니까 이렇게 얘기했겠죠. 시내가 다시 어쨌었어요. 스님께서는 좌선을 할 때 보십니까 보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자산할 때 보니까 보지 않습니까 자산하고 있을 땐 보나요 보지 않나요 혹은 눈을 감고 있을 땐 보나에 보지 않나요. 대사께서 말씀하셨어요, 주장사로 세 번을 때렸잖아요. 때리고 나서 대사께서 말씀하셨어요? 내가 너를 때린 것이 아프냐 아프지 않으냐 이거 물어봤어요. 그때 신내가 대답했어요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합니다 그랬더니 대사께서 말씀하셨어요 나 역시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한다 시내가 불었습니다. 어떤 것이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는 것입니까? 그때 대사께서 내가 보는 것은 항상 자기 마음에 허물을 보는 것이고 보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 좋고 싫음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한다. 내가 말한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하다는 것은 어떤 것이냐? 내가 만약 아프지 않다면 목석과 같은 것이고 아프다면 범부와 같은 것이니 마땅히 화가 나고 온통한 생각을 일으킬 것이다. 내가 말한 앞서 내가 앞서 말한 보는 것과 보지 않는 것은 양변이고 아프고 아프지 않은 것은 곧 생멸이다. 넌 아직 자성을 보* 못했으면서도 어찌 감히 실현을 하느냐, 이렇게 이렇게 얘기를 왔다 갔다 해 보면서 어 이 스승이 제자들과 이렇게 법거량을 이렇게 몇 번 왔다. 갔다 해 보면서 제자가 나름 나름의 답을 가지고, 뭐 나름의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막 얘기를 한다 하더라도 법과 이렇게 안 먹 교환을 한 번 이렇게 해보다 보면 말에서 드러나기도 하고, 혹은 말뜻에서 드러나기도 하고, 혹은 말뜻은 그걸 알싸하게 어법하게 하는 것 같지만, 뭐 그 사람의 뭐 예를 들어 몸짓이든 눈동자든 뭔가에서 이렇게 드러날 수도 있는 것이겠죠? 그래서 어찌 감히 너가 이렇게 실언을 하느냐 하고 이렇게 얘기를 했단 말이에요 그랬더니 아무래도 뭔가 좀 이상해서 이렇게 얘기를 몰아갔겠죠? 그랬더니 너가 어찌 감히 희로를 하느냐 했더니, 이제 그제서야 신애가 저를 올리고 깊이 뉘우치면서 용서를 빌었다. 대사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만약 마음이 어리석어 자성을 보* 못하였다면 선지식에게 물어서 길을 찾아야만 한다, 또 내가 만약에 마음을 깨달았다면, 곧 스스로 자성을 보았으므로 여보 파괴 수행하게 될 것이다. 너는 스스로 어리석어서 자기 마음을 보* 못하였으면서도 도리어 나에게 보는지 보지 않는지를 묻는 것이냐? 내가 보는 것은 내 스스로 알 뿐이니 어찌 너의 어리석음을 대신할 수 있겠느냐 또한 내가 만약 스스로의 자성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역시 나의 어리석음을 내가 대신할 수는 없다. 어찌 스스로 알지 못하고도 스스로 보*도 못하면서 나에게 보는지 보지 않는지를 묻느냐 이러면서 한 번 더 이렇게 따끔하게 혼을 낸 거예요. 그때 신내가 거듭 절하면서 100여 번을 절을 한 다음에 거듭 허물 허물을 사제하였으며 정성을 다해 조사를 시봉하면서 모시고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 이제 법을 법을 물을 때는 이 보는 이 보는 또 이 듣는 이 법이거든요. 근데 이 법이거든요. 그런데 이 법이다 이렇게 생각하거나 이게 법이다, 그렇게 취하거나 이렇게 법이다라고 알아가지고 이거 이걸 법이다라고 아는 거 하고 이거 하고 뭔 뭔 차이가 있어요? 뜰 앞에 잣나무가 법이다 하고 아는 거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면 그러면 남들이. 찔러보겠죠. 그러나 늘 여법한 답을 하게 되고 안목이 밝았었다면 그냥 그 자리를 인정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얘기를 한단 말이죠? 그랬더니 신혜가 이제 계속 이렇게 모시면서 시범하면서 공부를 했겠죠? 그러면서도 시내는 이렇게 어릴 때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이렇게 머리로 막 알고 머리로 이해하고 이런 측면이 좀 많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이후에도 머리로 이렇게 공부하는 스타일이 한동안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이제 나중에 6주 생계 욕을 먹기도 하고 지혜 정도라고 해서 아린아리 정도다. 이래가지고 타박을 받기도 하는데 나중에 가서는 오히려 바르게 여법하게 공부가 되어가지고 오히려 어떤 측면에서는 육교 스님을 육조로서 이렇게 선양한 인물이익 신뢰예요. 그리고 또 나중에 이제 붙이는 육조 스님 열반 하실 때도 다른 사람은 다 울고불고 했는데 난이는 어리지만 시네만이 불생불멸에 대해 확천하게 깨달았기 때문에 육출심을 떠나갔지만 거기에 전혀 휘둘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이런 모습도 뒤에 나와요. 어느 날 조사께서 대중에 이르셨다.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이름도 없고 글자도 없으며 앞도 없고 뒤도 없다. 그 애들은 알겠는가 알겠습니까? 이 한 물건은 머리꼬리 이런 게 없어요. 이름도 없고 글자도 없고 앞뒤 선후 좌우 크기 모양 그런 것도 아무것도 없단 말이에요. 그랬더니 신회가 앞으로 나와서 말했어요. 아직까지도 조금 그 이제 이 버릇이 안 없어진 거죠? 시내가 앞으로 나와가지고 딱 말했죠. 이게 젊으니까 젊은 혈기에 또 이럴 수 있는 요즘 MZ 시대 세대인가 봐요. MZ3대인가 봐요. 이는 모든 부처님의 본원이고 이 저 신의의 본성입니다. 저 신의 불성입니다. 이렇게 딱 얘기했어요. 그때 대사께서 말씀하셨어요. 그대에게 이름도 없고 글자도 없다고 말했거늘 그대는 본원이요. 불성이라고 말하는구나. 내가 앞으로 개당해서 산문을 열어 가지고 스승이 되어 가지고 한 곳을 관장하는 종사가 되더라도 한낱 지혜 정도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지혜 정도는 아르마리도 이해하기만 한 정도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라고 혼나는 거예요. 이게 지금 너 이렇게 공부하지 마라 하고 혼내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보고 어떤 사람들은 근데 나중에 심해 쪽에 이 제자들이 있었고요. 나중에 홍주 종이에서 마주 계열에 그쪽이 정통이었거든요. 나중에 이제 마주 계열이 정통이다 보니까 정통 쪽에서는 방계를 이제 타박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런 측면으로 아 시네는 지혜 정도밖에 내지 못해 하고 이제 욕을 했다 보니까 시네는 지혜 정도로 아르마리밖에 모르는 세상처럼 이렇게 욕을 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나 이건 이제 공부하는 과정에서 누구나 이럴 수 있죠? 나중에 봤을 때 어떤 신의 안목은 나름 훌륭해요. 그런데 그런데 안목이 훌륭한 이후에 어떤 신에 작성한 신의 어록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보면 안목은 훌륭한데 이제 장점과 동시에 단점이 있어요. 이게 어떤 거냐면 이 시내 같은 사람은 아르마리가 많이 있는 사람 공부를 많이 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자기가 확실히 깨닫고 나더라도 이거는 쉽게 말해. 법을 깨닫고 나더라도 사람의 업이 다르고 없음이 다르면 법을 선하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어요. 시늘 같은 경우는 깨닫고 나서도 원만하게 익어가 가지고 육조 3명이 나중에는 칭찬을 하거든요. 그때가 되더라도 이제 법을 설할 때 자상하고 친절하게 법을 하나하나 말로 설해요. 나름 여법파괴 그러나 굳이 따지면 막 허물이 말로 아무리 여법하게 해도 허물이 있을 수 있거든요. 근데 말로 여법하게 이렇게 선하는 걸 잘해요. 그런데 이런 계열이 있어야지 쉽게 말해 6조 선생님도 쉽게 말해 그런 계열인 거예요. 6조 선생님들이 다 말이잖아요. 말로 설명을 잘하는 거예요. 근데 이제 이게 나중에 가면 마조나. 그 이후에 임제나 온문이나 이런 뒤로 가면 말은 이거 너무 허물이구나. 말 가지고는 허물이구나. 그래야지만, 곧장 한 대 때리거나 소리를 버럭 지르거나 이렇게 하는 활활 발발한 곧바로 직진심하는 이런 게 이제 그 이 홍주종 쪽에서는 그 어느 혹은 임재종 이쪽 계열에서는 그게 이제 정통성인 것처럼 이제 그것만이 법이고 말로 자세히 설명하는 건 아주 삿댄 것처럼 이렇게 얘기를 하기도 하죠. 그러다 보니까 선은 말로 하면 안 된다. 이런 얘기를 하기도 하는데 그러나 뭐 저저 황 벽 스님도 그 계열의 황 박스님도 어록을 전신보비 왕릉옥 같은 기가 막힌 책을 남겼고 마저 어록 얼마나 여법합니까? 또 임제록도 마찬가지고 또 나중에 온문 어록도 그렇고 또 그 같은 계열인 어떤 가나선을 만든 대해 스님도 그렇고 그랬단 말이죠? 이 신해의 뭐랄까 계열이랄까요. 이 신회가 나중에 칠조가 되면서 육조를 저 북쪽에서 아주 육조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를 이제 추존하게 되는 어떤 그런 인물이 신에예요. 그래서 신해 때문에 육조가 비로소 육조의 어떤 그 그 자리를 딱 갖게 되는 되게 이 신의 어떤 이런 모습 이런 어떤 친밀하고 이런 어떤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면 육조가 육조가 될 수가 없었어요. 나중에 이제 그 저 아주 뭐죠? 그 수도에 가서 육조의 법이 얼마나 훌륭한 법이었는지를 이렇게 증명해 내고 그런 역할을 했던 아주 이런 스님이 없었으면 육조는 육조가 되지 못했을 만한 그 남쪽에서의 어떤 그냥 저 변방에 있는 하나의 법밖에 되지 못했을 거예요. 근데 이 신해 때문에 이렇게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시내와 비슷한 계열의 육조 스님처럼 이렇게 법을 설명하잖아요. 이런 스타일의 사람도 있어야 우리가 공부를 할 수 있어요. 그냥 곧바로 때리기만 하는 사람에게 가서 깨달은 사람도 있지만 시내 같은 스타일이 나중에 보면 사실은 시내와 직접 계열은 아닌데 제가 봤을 때 의심스러운 게 마조 밑에 제자 도노이프 음문론으로서는 대주해해 대주해가 쓴 도노이포 유문론도 제가 다음 주 일요일부터 법에 대해 강의를 할 예정인데 도노이토 유문론도 읽어보다 보니까 이게 이 양반이 분명히 신에게 영향을 받았겠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신의하고 비슷해요. 택시네 또 6조의 영향도 받았겠죠. 육조나 하택 시내 계열과 좀 비슷해요. 이 사람이 마조의 계열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주 소상하게 이 법을 너무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자세하고 친절하고 소상하게 이렇게 적어놨어요. 그러나 다만 그 법에서 벗어나지 않으니까 분리자성이라고 하듯이 자성에서 벗어나지 않고 말을 설하고 있다 보니까 그거를 크게 우리가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또 우리가 공부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큰 도움을 받을 수 있긴 해요. 그래서 이 그 이후에 이제 대주 해에도 비슷하고 또 나중에 보면 그 천태종의 규봉 정밀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게 참 선의 스승이기도 하고 천태 스승이기도 한데 규봉 정밀도 또 이 비슷한 어떤 신해의 어떤 정신적인 어떤 가르침을 이은 이런 제자구역 그러면서 교봉 종미의 어떤 가르침도 이런 스타일이고요? 그 맥을 이어받은 게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지만 한국에 그럴 때 그 진울 순입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공부했던 진울 스님의 그 수신결 같은 이런 책들이에요. 그래서 진울 스님도 번호 점수에 대한 또 이 법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렇게 그 설명하고 하는 그런 쉽게 우리에게 이렇게 대중화 이런 것들을 할 수 있는 어떤 기여를 했던 그런 어떤 계열이기도 하죠. 저도 이런 쪽이 좀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보니까 이 신회 또는 규봉종밀 또 진율 스님 이쪽이 참 여법하면서 여법한 것을 말로 설하고 또 지금의 시대 이게 딱 맞는 것 같아요.
그냥 무조건 한 대 때리고 이게 법이다라고 하는 것보다
지금의 시대 사람들에게는 이런 방편이 꼭 필요하다
라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해요.
이제 거의 다 끝났으니까 요건 맞아요. 읽어 볼게요. 그래서 신회는 훗날 낙양으로 돌아가
크게 조계의 돈교를 널리 펴고
낙양으로 들어가 가지고
돈교를 편 사람이 신회고요.
현종기라는 책을 써서 후세에 남겼고요.
육조 대사는 여러 종파의 문도들이 나쁜 마음을 가지고 조사의 밑으로 모여들어 따져 물으며 비난하는 것을 보시고 이를 불쌍히 여겨 말씀하셨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일체에 좋고 나쁜 모든 생각을 마땅히 모두 없애야 한다.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것이 없는 것을 일러 자성이라 하고
불이 없는 성품을 일러 첨된 본성이라고 한다.
이 진실한 본성 위에 모든 가르침의 문을 세우니
나를 문득 스스로 보아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모두 절을 하면서 조사를 스승으로 모시고자 청하였다.
여기까지 해서 신회까지 하고
다음번에는 이제 당나라 조정에 초청하고 이제 마지막 결론 부분을 이제 공부해 보면서
6조 긴 긴
6조 단계의 여정을
다음 시간에 마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오랜 시간 들으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성불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