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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 하나님을 노래 함
삼하 22:1-7
1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2 이르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3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
4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받으리로다
5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6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7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삼하 22:1-7 / [다윗의 감사 시]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셔서 그를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도 건져 주시고 사울왕의 손에서도 그를 건져 주셨을 때에, 다윗은 이에 감사하여 여호와께 이런 노래를 지어 부르며 찬양하였다. 2) <찬양> `여호와여, 주님은 내가 숨을 바위와 요새이시며 나를 건져 주시고 해방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3) 나의 안전한 피난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내가 주께 피하여 숨겠습니다. 주께서 나의 방패가 되시고 주께서 무서운 군대로 나를 지켜 주시고 위태로운 곳에서도 나의 요새가 되시오니 내가 주께로 피할 때마다 주께서 언제나 나를 살인자들의 손에서 건져내주셨습니다. 4) 내가 살려 달라고 부르짖을 때마다 주께서 항상 나를 원수들 앞에서 건져내 주셨으니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5) <죽음의 위험> 죽음의 바다가 내 목에까지 차올랐으며 나를 삼키려는 파도가 끝없이 내게로 밀려왔습니다. 6) 포승줄이 나를 결박하여 저승길로 끌어 가고 죽음의 올가미도 내 목으로 드리워졌습니다. 7) <호소와 구원> 이렇게 죽게 될 적마다 나는 여호와께 부르짖고 나의 주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께서 내 목소리를 주님의 성전 안에서 알아들으셨고 부르짖는 나의 목소리가 주님 귀에 다다랐습니다.
다윗은 많은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기도했으며 자신의 기도를 들으사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1-4) 삼하 22장의 내용은 다윗이 지난 날을 기억하며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의 도움을 감사하며 찬양하는데 그것이 시편 18편입니다. 다윗의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삼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나의 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신앙으로 골리앗을 이겼고, 이 신앙으로 사울에게 잡히지 않을 수 있었으며 이 신앙으로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2절부터 보면 다윗은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길 때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반석, 요새, 자신을 건지는 자, 방패, 구원의 뿔, 높은 망대, 피난처, 구원을 주시는 분으로 경험하며 찬양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일하십니다. 신실하게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자에게 하나님은 이와 같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환난 중에 아뢰었나이다(5-7) 다윗은 수많은 환난을 당했습니다. 본문에서는 환난을 ‘사망의 물결’, ‘불의의 창수’, ‘스올의 줄’, ‘사망의 올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죽음 직전까지 갔었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윗은 사울에게 창으로 찔려 죽을 뻔했습니다. 동굴에서 자칫했으면 잡혀 죽을 뻔 했습니다. 블레셋의 가드로 갔을 때는 골리앗을 죽인 원수가 제 발로 찾아왔기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미친 척하지 않았으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을 겁니다. 이런 여러 가지 죽음의 고비 가운데서 다윗이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뿐,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 이외에 다윗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기도 해봐야 소용없을 만큼 절망적인 상황은 없다’는 데이비드 딕슨의 말처럼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들으셨고 다윗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세상을 살아갈 때 이처럼 죽음의 문턱에 다다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자녀들이 해야 할 일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도와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적 용 : 최근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점은 무엇입니까? 그것에 직면하기 위해 어떤 영적인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전장에서 싸워 본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방패라는 상징은 별로 가치나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쟁을 치러야 했던 다윗에게 방패는 생명 자체를 의미했습니다. 그는 가장 생생한 개인적인 경험들을 통하여 생애의 어떤 중대한 순간들에 방패가 지극히 중요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손에 들린 충실한 방패가 그를 넘어뜨리려는 원수들의 공격을 물리치게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쫓기며 숨어야 할 때 큰 반석을 발견하여 숨게 하시고 지켜 주셨습니다. 종종 산악의 바위를 찾아 피난처를 삼고 다시 힘을 얻었던 다윗은 그 사물 속에서 자신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호크마 주석
=====22:1
여호와께서 다윗을...구원하신 그 날에 - 혹자는 다윗 왕이 이 시(時)를 쓴 때를 다윗왕의 말기로 보고 있다(Keil). 즉, 모든 주변의 이방 국가들을 물리치고 또한 압살롬과 세방의 난(15:7-12;20:1,2)등 모든 반란을 진압한 후에 본 시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시의 내적 증거로 볼 때, 본 시는 다윗의 통치 초기 즉 다윗 왕이 주변의 대적들을 정복한 이후에 곧 바로 기록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다. (1) 먼저 본 시 44-46절의 내용을 들 수 있다. 이 구절은 다윗 왕이 아람의 동맹군을 물리쳤을 때, 하맛 왕 도이가 그 아들 요람을 보내어 조공을 바친 역사적인 사실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8:9, 10). (2) 또한 본시에는 다윗 왕의 말년을 어둡게 하였던 강간, 살인, 반란 등 수치와 슬픔의 어두운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특히 21-25절에는 다윗이 자신의 삶에 대한 넘치는 열정과 자신감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본 시가 수치와 슬픔으로 점철되었던 다윗 왕의 말기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 등극 후 대적들과의 싸움에서 승승장구하던 초기에 쓰여진 것임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 시가 다윗 왕의 통치 초기(B.C.1010-B.C.995?)에 쓰여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본 시는 '감사'를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윗이 성전 건축을 제의하고(7:1, 2) 하나님께서 다윗과 '다윗 언약'(7:4-16)을 체결할 당시 곧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전달한 직후(7:17)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Pulpit Commentary, Lange, The Interpreter's Bible). 아무튼 기쁨, 감사, 감격이 넘치는 본시의 흐름으로 보아 이 시는 다윗의 신앙이 가장 고조되었던 떼에 지어졌다고 보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편, 본 구절은 본시의 역사성과 그 배경 및 취지를 소개한 표제어(表題語)에 해당된다. 이 표제는 사울 왕의 핍박과 이방인들의 세력에서 자신을 건져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찬송과 감사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 표제어는 출 15:1, 민 21:17, 신 31:30마의 표제와 유사하다.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 여기서 '모든 대적'이란 말은 즉위 직후 다윗이 왕국의 안정과 번영을 기하기 위해 간단없이 전쟁을 치렀던 이스라엘 주변의 많은 이방 국가들을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블레셋을 비롯하여 아람, 모압, 암몬, 아말렉, 소바, 에돕등을 가리킨다(8:1-14). 그리고 '사울의 손'은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사울 왕 생전에 사울 왕으로부터 당했던 무서운 추격과 생명의 위협을 가리킨다(삼상 18:10, 11, 17, 25;19:2, 9-12;20:1, 3, 31;21:10;23:15, 19-26;24:2;26:2). 이처럼 다윗은 구체적 사건을 언급함으로써, 막연하고 피상적인 시어(詩語)가 아닌 현장감 넘치는 언어로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내고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도들이 노래하는 여호와의 구원 역시 결코 미래에 국한된 막연한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털어 체험하고 확신한, 즉 삶에서 구체화된 실존적인 구원의 노래여야 한다.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 본 구절은 이 시가 다윗 자신의 저작임을 확실히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이 시는 시편 18편에서도 소개되고 있는데, 시 18편과 내용면에서는 완전히 일치하며, 문체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마도 본 시는 다윗 왕의 원시(原詩)요, 시 18편은 그의 말년에 교정을 본 시이기 때문에 두 시(詩) 간에 문체의 차이가 생겨났을 것이다(Henstenberg, The Interpreter's Bible). 진정 이 노래는 여호와의 구원의 손길을 현장과 현장에서 생생히 체험한 다윗의 시(詩)요, 아울러 이 노래는 분명히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자만이 동감할 수 있는 신앙 송으로서, 노래를 되뇌일 때마다 살아 계셔서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대한 찬양은 분명 구원받은 자의 특권이라 할 수 있다.
=====22:2
나의 반석...요새...건지시는 자시요 - 본 시의 전체적인 내용을 총괄적으로 집약하고 있는 구절이다. 여기서 '반석', '요새', '건지시는 자' 등의 말들은 모두 하나님의 속성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들이다. 특히 '반석'과 '요새'는 팔레스틴의 지형적 여건에서 따온 용어들이다. 우선 '반석'(rock)은 가파르고 접근하기 매우 까다로운 바위를 의미한다. 위기에 처한 용사들은 곧잘 이곳에 피하여 몸을 숨기곤 하였다(삼상 13:6). 다윗도 사울의 추격을 받았을 당시에 이곳에 몸을 숨김으로써 위기를 넘기곤 하였다(삼상 22:5;24:23). 또한 '요새'(fortress)는 가파른 바위에 둘러싸인 산 꼭대기를 의미하며, 팔레스틴 지역에는 이러한 요새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삿 6:2;욥 39:27, 28;사 33:16). 이 또한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받았을 때 숨었던 피신처였다(삼상 23:14, 19). 이처럼 다윗은 역경과 환난의 때에 자기를 바위와 요새에 숨기어 위기를 넘기게 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을 반석과 요새에다 비유하여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나를 건지시는 자'(my deliverer)란 앞의 비유적인 두 단어(반석, 요새)를 실제적인 의미로 바꾸어 표현한 말이라고 볼 수 있다(Keil).
=====22:3
나의 하나님이시요 - '하나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엘로힘' )인데, 이는 능력의 근원이시며 생명의 주관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강조한 호칭이다(창 1:1;롬 11:36).
나의 피할 바위시요 - 여기서 '바위'는 2절의 '반석'(* , 셀라)가는 다른 용어로써,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추르'(* )는 하나님의 불변성과 견고성(堅固性)을 상징하는 말이다. 이 용어가 최초로 하나님께 비유된 유래는 모세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반석'이라고 뵤사한 데서 찾을 수 있다(신 32:4). 여기에서 '반석'의 의미는 쉽게 흩날리는 사막 지대의 모래 산과는 대조적으로, 항상 제자리에 우뚝 서 있는 산의 견고성과 불변성을 의미하며, 또한 광야의 여행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여 주는 은혜성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즉, 본 구절의 바위는 2절의 반석과는 달리 아주 거대한 바위 덩어리(산 자체)를 의미하며, 따라서 웅대하고 움직이지 않는 힘을 상징하는 것이다(신 32:15, 31;사 30:29). 다윗은 이러한 바위와 같으신 하나님께 피할 것이라고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그의 절대적인 신뢰를 표현하였다.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 '방패'(shield)는 수비용 무기이며, '뿔'(horn)은 공격용 무기이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성도를 보호하기 위해 때로는 적의 공격을 방어해 주기도 하시며(창 15:1;신 33:29;시 3:4;59:12), 때로는 적의 세력을 파(破)하는 공격도 감행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자삼상 2:1). 그러므로 '뿔'은 그러한 세찬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힘', '능력', '권세'를 상징하기도 하며(삼상 2:1, 10;시 89:17, 24;겔 29:21;신 33:17;미 4:13), 그러한 공격의 결과 얻어지는 '승리', '구원'을 상징하기도 한다(눅 1:69;신 33:17;합 3:4).
나의 높은 망대시요 - 여기서 '높은 망대'(high tower, KJV;stronghold, NIV)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스갑'(* )는 '높은', '안전한'이란 의미의 형요사 '사가브'(* )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이는 적의 공격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높은 산성, 다시 말해서 안전한 장소를 뜻하는 말이다(시 33:5;잠 18:11;시 9:9;18:2;46:7, 11;사 33:16).
나의 피란처시요 - '피란처'(refuge)는 사막 지대의 기후상 갑자기 몰아닥치는 모래 바람과 폭풍우 등을 만났을 때, 그러한 것들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하고도 큰 바위 밑이나 동굴 안을 가리킨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은 언제 어느 때나 인생의 폭풍우를 만났을 때 우리가 피할 수 있는 안전한 피난처되심을 고백한 것이다.
나의 구원자시라...구원하셨도다 - 본 시에서는 '구원'(salvation)이라는 용어가 처음부터 마지막에 걸쳐 여러번 언급되어 있다(1, 4, 20, 47, 51절). 이같은 사실로 볼 때, 본 시는 다윗이 자기에게 구체적으로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하는 시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22:4
여호와께 아뢰리니...구원을 얻으리로다 - 여기서 '아뢴다'는 말은 여호와의 도움을 위해 '간구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아뢰리니'와 '구원을 얻으리로다'는 미완료형(未完了形, imperfect tense)으로서 계속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지금까지 내가 여호와께 기도할 때마다 구원을 얻었고, 또한 앞으로 계속해서 기도할 때마다 나는 구원을 얻을 것이로다'란 의미를 지닌다(Lange, Keil).
=====22:5
사망의 물결...불의의 창수 - 이러한 표현들은 자신을 삼키고자 마치 성난 파도와 같이 밀려왔던 사울의 무서운 핍박과 다윗 초기에 있었던 숱한 전쟁의 위험을 상징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망의 물결'이란 표현은 시 18편에서는 '사망의 줄'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불의의 창수'에서 '불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벧리야알'(* )은 불의(不義)란 뜻 외에도 '무익한 것', '파괴', '파멸'이란 뜻을 가진다. 따라서 이 말은 파괴를 일삼는 사악하고 가치없는 자에 의한 재난의 위기와 죽음의 위협을 의미하는 말이다.
=====22:6
음부의 줄...사망의 올무 - 다윗은 5절에서 자신에게 닥치는 위험을 성난 파동의 해일(海溢)로 묘사했다. 이어 본절에서 다윗은 자신을 죽이고자 설치는 악인의 계교를 사냥꾼의 사냥(hunting)에 비유하고 있다. 즉 여기서 '줄'(* , 헤벧; trap, cord)이나 '올무'(* , 모케쉬; snares, trap, noose)는 사냥할때 사냥꾼이 사용하는 도구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들은 마치 사냥꾼이 밧줄과 덫으로서 짐승을 사냥하듯 적의 갑작스런 공격과 간교한 속임수를 나타내는 말들이다(Keil). 여기서 다윗은 아마도 사울 왕에게 쫓겨다닐 때의 긴박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Lange). 그리고 다윗은 실제로 사울 왕의 추격을 사냥 행위에 비유하기도 했었다(삼상 24:14;26:20). 한편, '음부'(* , 쉐올;sheol-창 37:35 주석 참조)는 죽은 자으이 세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음부의 줄'이란 곧 사망의 줄과 같은 의미의 말이다.
=====22:7
아뢰며...아뢰었더니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기본 동사 '카라'(* )는 '부르짖다'는 뜻이다(시 34:6;55:17;118:5;119:145, 146;120:1;렘 29:12;31:6). 이는 곧 간절한 기도로서 하나님께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아뢴 후 주의 도움심을 간구했다는 의미이다. 즉 여기서 다윗은 '기도'라는 통로를 통해, 자신이 경험했던 구원자와의 긴밀한 교제를 묘사하고 있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지엄하시고 권위적이시며 공의를 따라 철저히 다스리시는 분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간에는 결코 좁힐 수 없는 커다란 간격이 놓여 있다고 대체로 믿어졌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구체적 삶에 찾아 오셔서 그 형편과 처지에 따라 도움과 사랑을 베푸시는 분임을 체험을 통해 간증했다(시 50:15;59:10). 다윗이 이처럼 구약적인 한계를 떨쳐버리고 하나님과 갚은 교제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1)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2) 그분과의 개인적인 만남으로 인해 가능했다. 즉 기록된 율법서나 타인의 가르침에만 의존해서 하나님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기초하여 자신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다윗은 이처럼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 여기서 '전'(* , 헤칼)이란 천상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를 의미한다(Smith,k Keil). 고대인들은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하늘 보좌에 좌정하고 계시며, 따라서 인간의 참된 간구가 이 보좌에 상달될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 보좌로부터 지상으로 내려와 당신의 도움을 베푸는 것으로 이해하였다(시 11:4). 그러므로 여기 다윗의 노래도 이러한 개념하에서 수사학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 설 교 >
다윗의 노래
삼하 22:1-7
22장은 1절의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여호와의 구원을 체험한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자’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높은 망대’ ‘나의 피란처’ ‘나의 구원자’로 노래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노래하는 이 표현들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즐겨 사용하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 되어주기를 기대하면서 ‘나의 반석’이라고 외치고 나를 고통과 위험에서 건져 주기를 기대하면서 ‘나를 건지시는 자’라고 외칩니다. 다른 표현들도 모두 하나님이 나에게 그런 분이 되어주기를 기대하며 외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도와주시고, 위험에서 건져주시고, 힘이 되어주시기를 기대하면서 그러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자로서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3절의 마지막에 보면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라고 말하고, 1절에서도 하나님이 구원하신 그 날에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말하고 있음을 볼 때 다윗의 노래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경험한 자의 노래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노래는 다윗처럼 하나님을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의 하나님’ 등으로 표현한다고 해서 다윗과 같은 노래가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을 노래하는 찬양은 하나님께로부터 베풀어지는 구원을 경험한 자들만이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것인가를 아는 것이고, 여러분이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 아래 있음을 깊이 자각할 때 다윗과 같은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4절의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라는 내용을 보면 구원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구원하실 하나님으로 찬송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실 것을 기대하고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4절의 내용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다윗이 자신의 남은 모든 일생이 하나님의 구원 아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구원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날마다 계속되어지는 것임을 의미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노래가 우리의 노래가 되기 위해서는 다윗이 경험한 구원이 우리에게도 동일한 경험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구원’을 말할 때 ‘천국’을 연상하게 됩니다. 장차 천국에 가게 되는 것을 구원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계시는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구원인 것은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이미 그 나라의 백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것 역시 구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구원을 장차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만 생각하면서 마치 지금은 아직 구원 되지 못한 상태에서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도 다윗이 경험한 구원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때는 죽은 후에 천국을 경험하고 부르는 노래가 아닙니다. 1절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즉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은 다윗의 대적과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다윗을 죽이고자 했던 대적, 그리고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것이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의 모든 대적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것을 경험한다면 다윗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아마 조금은 이해하기 힘들어 질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자신을 생각할 때 나를 죽이고자 하는 대적도 사울과 같은 존재도 없다고 여겨진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전에도 누누이 말씀드린 것처럼 여러분께 대적이 없다고 여겨진다면, 또한 여러분을 대적하는 사울과 같은 존재가 누구인지 아리송하다면 여러분은 지금껏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마땅히 있어야 할 신앙의 전투가 없이 살아왔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의 전투가 없이 살아왔다면 그것은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오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대적이란 하나님 편에 서 있을 때 그 실체를 알 수 있게 되는데, 항상 내 편에 서서 날 위한 삶에 몰두 했기에 대적이 누구인지 조차 알지 못한 상태에서 단지 입술로만 하나님을 부르는 무늬만 신자인 삶에 머물렀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의 대적, 사울이 우리에게 밝혀주는 대적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먼저 다윗의 대적들을 보면 반역을 한 압살롬이나, 세바, 다윗을 저주한 시므이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표적으로 사울이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고자 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다윗을 백성들이 ‘다윗은 만만이요 사울은 천천이라’고 칭송하는 것에서 비롯되지 않았습니까?
백성들이 사울 자신보다 다윗을 더 칭송하는 것에서 사울은 위태로움을 느꼈던 것이고 다윗을 시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제거함으로써 왕의 자리를 보존하고 다윗에 의해 상대적으로 추락하는 것 같은 자신의 위상을 지키고자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울의 이러한 모습에서 누구를 볼 수 있습니까? 바로 여러분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사울의 입장이 되면 사울과 같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지 않습니까? 다윗을 향한 사울의 미움이 우리들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고, 사울의 시기 역시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것 역시 우리도 사울의 자리에 있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또한 다윗을 반역했던 압살롬은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압살롬 역시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세바나 시므이 이들 모두 역시 내 속에 있는 나의 실체가 나와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론은 우리에게 있어서 대적이란 외부에서 나를 괴롭히는 어떤 존재를 의미하기보다는 내 속에 존재하며 나를 붙들어 사울의 길로, 압살롬의 길로, 다윗을 대적했던 자들의 길을 가게 하는 세력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은 무엇이겠습니까? 나를 붙들고 있는 악한 세력에 의해 끌려가고 있는 나를 구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구원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다윗의 구원의 경험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나를 나의 대적의 손으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라면 이러한 구원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마 1:21).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죄를 짓지 않는 자로 만드신다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신자는 모두 죄를 짓지 않는 자로 변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분명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예수님의 구원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 경험이 있느냐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막연하게 천국 가는 것만 생각하고 살았기에 대적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신앙 아닌 신앙에 머물러 살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세상의 죄는 살인, 강도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이 죄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죄로 인해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사람의 악함을 아시기에 다시는 사람으로 인해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창 8:21).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악함은 정결함 제물의 희생의 피로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누구든 희생의 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자신의 악함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언약으로 세우신 희생 제물의 피도 멸시합니다. 이것이 세상이 심판 받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의 희생을 멸시하는 것이야 말로 심판의 이유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세상의 죄는 세상이 자신의 악함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내셔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악함을 깨닫게 하시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사울과 압살롬처럼 다윗의 대적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나의 악함을 보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악함을 보게 되면 내 스스로의 힘으로 대적을 상대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내 속에 있는 시기와 미움, 권력을 추구하고 날 위해 살아가는 나의 본질을 내가 상대하여 제거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자’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높은 망대’ ‘나의 피란처’ ‘나의 구원자’로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구원의 경험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내 속에 있는 대적을 발견할 때마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는 노래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한번이 아니라 날마다 계속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5-7)는 노래를 들어보십시오. 이 노래가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돈 벌어서 자식 키우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닙니다. 그러한 현실은 하나님의 책임 아래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하늘의 참새까지도 하나님이 살게 하신 것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이라는 것은 우리의 노력과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의지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서 진정한 현실은,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른 것입니다. 과연 이런 현실은 보고 사십니까? 아니면 돈이 필요한 현실,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 현실만 보이십니까?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진정한 현실은 대적이 나를 에워싸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내 힘과 내 열심과 나의 의지로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만약 내 의지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세력의 강함과 현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날마다 구원이 필요한 자일 수밖에 없고, 때문에 날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악함을 알고, 나의 악함을 스스로 어찌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알기에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도 나를 구원하신 구원자에게 오늘도 구원해주기를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열심을 강조하고 인간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현실이 어떠한지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소경이기에 바리새인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신앙을 지키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적의 실체에 대해 무지하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반석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신의 반석으로 존재하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기특한 나를 도와주는 분으로만 여길 뿐입니다.
여러분 안에 존재하는 대적의 실체를 발견하시고, 그 대적을 대적할 수 없는 여러분의 연약함을 깊이 절감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자’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높은 망대’ ‘나의 피란처’ ‘나의 구원자’라는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신자가 부르는 찬양입니다.
나리와 민족을 사랑하는 큰 사람이 되자
삼하 22장 1~7절 / 이근수목사
몇 년 전에『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볼 때 눈물이 났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 아버지 없이 말을 더듬는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똑똑한 동생을 위해 형은 공부를 포기하고 가죽 구두를 만들어 가계를 책임지며, 동생을 뒷바라지 하던 중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집안의 기둥처럼 소중한 동생이 학도병으로 징집되자 동생 대신 자신이 입대하겠다며 자원하였으나 급박한 당시의 상황은 형제의 우애보다는 조국의 안위 앞에 형제는 모두 징집이 되었습니다.
참혹한 전쟁 속에서 형제는 잠시 갈등을 겪었지만 전장에서 동생을 구해내고 형은 참혹하게 죽습니다. 전쟁의 상처로 남은 형에 대한 그리움과 아픈 기억을 평생 가슴에 묻고, 반백의 노인이 되어 버린 동생이 평생 형의 유해를 찾아 다니다, 어느 날 형의 것으로 추측되는 유골과 만년필이 발견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발굴지로 떠나며 가슴 한편에 묻어 둔 기억을 더듬는 가슴 저린 이야기 입니다.6.25 전쟁에 참전했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보냅니다. 오늘 우리나라가 있도록 희생하신 어른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아직도 우리는 전쟁의 아픔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북쪽에는 전쟁을 일으킨 자들이 살아 있고, 남쪽에는 전쟁으로 많은 것을 잃은 분들이 살고 있습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우리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전사 상을 입은 분들과 그 가족과 후손들에게 감사와 사랑과 위로를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들이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보살펴 드려야 합니다. 사실 보훈은 6월 한 달 만으로 부족하지요.
1년 내내 보훈해야 지요. 보훈(報勳) = 공훈을 갚다. 보답하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더욱 분발하여 발전된 조국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보훈입니다.
6월 -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큰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대한민국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알지도 못하는 낮선 저들을 하나님이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싸워주었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있는 것입니다.
전후 굶주린 우리는 미국과 유엔의 원조를 받아 우유, 밀가루, 옷가지를 보내주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굶주린 성도들의 부르짖는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복을 주셨고, 새마을 운동과 중공업을 육성하여 오늘은 세계 12위의 경제력을 가진 국가로 성장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 안에는 좌익 단체가 약 1700개가 있답니다. 진보단체라고도 합니다. 이들은 공산주의 이념과 김일성의 주체사상, 김정일의 선군정치를 추종하며 북한의 4대 군사노선인 ‘국가 보안법 철폐-미군 철수-연방제통일(적화통일방안)’을 목적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김일성이 1980년대 주장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이란 ‘적화통일방안’을 지지합니다. 이는‘베트남 적화 통일 방안’입니다.
최근 김정일이 ‘베트남을 배우겠다’고 발언한 것은 베트남식 적화통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베트남 방식의 통일이란 1964년부터 10년 이상 전쟁을 북쪽 공산 베트남이 “베트남의 운명은 민족끼리 평화적으로 해결하도록 미군 철수”를 주장한 것입니다. 미군철수 후 공산 베트남은 남베트남을 접수하여 36시간 동안 26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116만 명은 두려워 배를 타고 바다로 도망하다가 11만 명이 죽임을 당했고, 350만 명은 재교육시킨다는 명목으로 체포하여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신 차려야 합니다.
성도들이 믿음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지켜내야 합니다.
본문 : 다윗의 유명한 승전가 입니다.
승리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다윗이 찬양한 시입니다.
1. 하나님을 찬양하는 다윗
1) 다윗은 보호자 하나님,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세계경 제 전쟁 에서 승리하게 해 주십니다. 쇠고기 전쟁, 오일전쟁, FTA 전쟁, 핵 무기 전쟁에서 넉넉히 이기게 해 주십니다. 아멘
2. 다윗은 과거 체험으로 구원의 하나님을 무엇에 비유 하였습니까?[2,3]
1) 반석 - 어떤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마7:24-27]
2) 요새 - 어떤 공격에도 안전한 피난처시다[삼상22:4,5]
3) 건지시는 자 - 역경에서 구원하신다.[시7:1]
4) 승리의 능력 - 전쟁에서 이기게 하신다.
5) 방패 - 강한 원수의 화살을 막아주신다.
6) 구원의 뿔 - 사망 길에서 건져내시는 능력자이시다.
7) 망대 - 적의 동태를 멀리서 보고 대비한다.
8) 피난처 - 위급할 때 보호하신다.
9) 구원자 - 원수의 공격에서 구해주심.
하나님이 오늘도 성도들과 대한민국 국민들을 구해주시기를 바랍니다.
3. 행한대로 갚으시는 하나님
다윗은 자신이 믿음으로 의롭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승리를 주시고 상을 주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의롭게 사는 성도에게 승리를 주시고 상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불의를 선하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아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4. 다윗이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7-16]
1) 하나님이 악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2) 하나님이 천사의 날개를 타고 날며, 구름, 광채, 화살, 번개로 원수를 무찔러 주셨습니다.
5. 다윗은 왜 하나님이 자기를 모든 역경에서 구원하셨다고 했습니까?[17-20]
1) 하나님이 다윗을 기뻐하셨기 때문에 건져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윗을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셨고, 재앙에서 구해 주시고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6. 하나님은 다윗을 머리가 되게 하심 (삼상16:1-13).
하나님은 보잘 것 없는 목동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뽑으시고 열방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다윗의 가는 길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승리의 승리를 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다윗 같이 승리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7. 다윗이 하나님께 상 받은 이유는?[21-28]
1) 여호와의 도를 지켰기 때문에 [23]
2) 깨끗하게 살았기 때문에 [21,22,25,27]
3) 죄악을 피했기 때문에 [24]
4) 자비하고 완전하게 살았습니다. [27]
우리가 여기서 큰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깨끗하게 살고, 죄짓지 않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면 하나님이 상을 주십니다. 이런 복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8. 다윗이 승리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29-46]
1) 등불이신 하나님을 의지한 것 [33,40]
2) 어려울 때 하나님께
다윗의 승리노래
피종진목사 / 삼하 22:1-7
우리가 생활 속에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은 창조의 본질이요, 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가장 귀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이 수많은 대적 속에서, 또 시련과 환난 속에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그런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도 그는 항상 하나님 앞에 그를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승리의 노래를 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자’가 되시고, 또 ‘나의 하나님, 피할 바위, 방패, 구원의 뿔, 높은 망대, 피난처, 구원자’라고 노래한 다윗은
첫째,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주심을 인하여 노래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삼하 22:1) 여기서 ‘원수’라는 말은 히브리어에 보면 ‘방해하는 자, 박해하는 자, 고통과 괴로움을 주는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사업하는데 방해하는 사람, 출세하는데 진로를 가로막는 사람, 또 자기에게 괴로움을 주고 고통을 주는 사람’을 ‘원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원수는 ‘신앙의 박해자’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를 박해하는 자가 우리의 원수입니다.
다윗은 블레셋 사람 골리앗 앞에 선 전쟁터에서도, 사울에게서 위협을 받고 있을 때에도, 압살롬이나 세바의 반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에도 항상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를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원수의 손에서 건져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승리의 노래를 한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수많은 원수들이 있었습니다. “여호와여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건지소서. 내가 주께 피하여 숨었나이다”(시 143:9) “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비방하며 내게 대항하여 미칠 듯이 날뛰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시 102:8)
둘째,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심을 인하여 노래했습니다.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삼하 22:3) 여기서 ‘피난처’란 ‘도망하여 보호를 받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지중에 잘못을 범했을 때 그들로 하여금 피하여 보호를 받게 해주기 위해서 ‘도피성’을 만들어주셨습니다(민 35:15).
다윗은 그를 죽이려고 했던 사울의 단창과 창을 피해 광야와 산과 바위와 동굴 등에 자신의 몸을 숨기며 기나긴 도피 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그가 사울에게 발견되지 않고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눈에 보이는 은신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피난처가 되셨기 때문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시편 61편 3절에 보면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만이 자신의 피난처가 되시고, 원수를 피할 수 있는 망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피난처와 견고한 망대가 되셔서 성도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편 62편 8절에도 보면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라고 말씀했고, 시편 46편 1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셋째, 부르짖음을 들어주심을 인하여 노래했습니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삼하 22:7) 다윗은 그의 생애 가운데 무수한 환난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해주심을 인하여 노래했습니다. 시편 18편 6절에 보면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라고 말씀했고, 시편 28편 2절에는 “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라고 말씀했습니다. 시편 81편 10절에도 보면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처럼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주시고,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심을 인하여, 환난 중에 부르짖어 기도하고 그 기도를 들어주심을 인하여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의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
이영훈목사 / 삼하 22:1-7
모든 영광을 우리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여러분 우리 주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주님은 살아계십니다. 주님이 이 시간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옆에 계신 분하고 인사하겠습니다. “오늘은 참으로 좋은 날입니다.” “사랑의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좋은 일이 있습니다.”
우리 함께 찬양 드리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또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함 받기 위해서 또 이번 한 주간 중국 전역에 기독교 지도자들의 대표되신 분들이 한국을 방문해서 한중기독교교류협회 창립행사를 갖습니다. 세미나를 갖고요, 또 한국 대표되는 교회들을 방문해서 함께 예배도 드리고 하는 귀한 시간을 갖습니다. 하나님께서 중국에 큰 은혜를 내려주셔서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실제로 크리스천 수가 우리 대한민국보다 훨씬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중국을 복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기도할 때 한국과 중국에, 중국과 한국에 큰 부흥이 일어나게 해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한국과 중국이 선교협력을 통하여 세계 복음화에 앞장서게 하시고 이를 통해서 우리 북한의 문이 열리고 남북이 통일되는 은혜도 임하게 해달라고 우리가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복음성가 ‘약한 나로 강하게’)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 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 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 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 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내가 건너야 할 강 거기서 내 죄 씻겼네 이제 주의 사랑이 나를 향해 흐르네
깊은 강에서 주가 나를 일으키셨도다 구원의 노래 부르리 예수 자유 주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 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 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우리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니다. 주여, 주여, 주여.
(통성기도)
호산나 호산나 죽임 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 찬송 존귀 영광을 홀로 받으시옵소서. 죄와 절망 가운데 있는 저희들을 구원하여 주셔서 하나님 자녀 삼아주신 놀라운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오늘도 주님의 전에 은혜를 사모하여 나왔사오니 사모하는 모든 심령들 위에 성령으로 충만케 충만케 하여 주옵소서. 이 시간 중국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중국의 모든 교회들이 크게 부흥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중국과 한국, 한국과 중국이 하나 되어 전 세계를 복음화 하는 데에 앞장서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중국 전역에 또 우리 대한민국 전역에 임하여서 장차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통일시대가 열려지는 귀한 축복이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 홀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오늘 사무엘하 22장 1절로 7절의 말씀을 가지고 “나의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함께 따라하시겠습니까? “나의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 “나의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변합니다. 환경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고 세상 권력도 변하고 다 변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또 어느 지역에 거한다고 할지라도 영원히 변치 않는 그 한 분이 바로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변함이 없으십니다. 온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홀로 받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홀로 받으실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생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다윗이 그의 인생의 굽이굽이 그 역정의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감사하여 주님께 드린 기도요 찬송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우리를 모든 절망에서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려야 할 것입니다. 찬양과 감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 있든지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 찬송 존귀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1. 찬양받으실 하나님
우리가 믿고 섬기는 첫째로 영원히 찬양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찬양 받으실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사무엘하 22장 2절로 3절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르되 야훼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
할렐루야. 다윗의 일생을 뒤돌아보면 굽이굽이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었고 문제가 있었고 어려움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건져 주셨습니다. 보호해 주셨습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원수를 멸하여 주시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다윗을 높여주신 것입니다. 사무엘하 22장 1절을 보니까,
야훼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야훼께 아뢰어
성경은 말씀합니다. 모든 원수에게서 건져주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으로부터 아람과 모압과 암몬, 아말렉, 에돔으로부터 그리고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사울 왕으로부터, 또 자기가 낳은 아들이지만 반역한 압살롬으로부터, 또 반역을 일으킨 세바로부터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감사하며 찬양을 했습니다.
사실 다윗은 민족의 영웅입니다. 블레셋과 늘 이스라엘이 전쟁을 했는데 블레셋에 골리앗이라고 하는 큰 장수가 나타나서 호령을 하며 나와 싸울 자가 있으면 나오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그 앞에서 그저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소년 다윗이 나와서 물맷돌로 그의 이마를 꿰뚫어 넘어뜨리고 그의 목을 베므로 위대한 승리를 가지고 왔습니다. 온 백성이 다윗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사울 왕이 다윗을 시기하고 미워했습니다. 자기의 위치에 위협을 느꼈습니다. 옛날부터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누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인기가 다윗에게 가니까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 한때는 삼천 명이나 되는 많은 군사를 풀어서 다윗을 죽이려고 그의 숨은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다윗은 큰 공을 세운 민족의 영웅이었지만 사람을 피하여 이곳저곳을 옮겨 다녀야만 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다윗이 좋은 사람이고 큰일을 한 것을 알았지만 권력 앞에 두려워 떨며 다윗이 숨은 곳을 고발하여서 또 추격하는 사람을 보내고 또 다윗이 피신을 하고 또 피신을 하고 하루 편하게 어디서 다리를 뻗고 잘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다윗은 하나님만이 유일한 피난처가 되시고 반석이 되신다는 사실을 믿고 이와 같은 고백을 드렸습니다. 시편 18편 1절, 2절에,
나의 힘이신 야훼여(나의 모든 것이 되신 주님)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야훼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할렐루야.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에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해결자가 되십니다. 우리가 영원히 믿고 의지하고 따라갈 분이 바로 하나님 한 분뿐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변합니다. 가깝게 지내던 사람도 자기에게 피해가 오면 가깝게 지내던 사람을 배신하고 등을 돌립니다. 신뢰를 깨뜨립니다. 남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인류 조상으로부터 출발한 거예요.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에 하나님이 찾으시니까 그 하와에게 선악과를 받아먹은 아담은 하나님이 만들어 준 저 하와가 먹으라 해서 먹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이 지은 그 뱀이 나를 꾀서 먹었습니다. 그때로부터 인류 역사는 “당신 탓입니다” “당신 탓입니다”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그러한 역사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을 믿고 의지하면 안 됩니다. 사람은 우리가 사랑하고 용서해야 될 대상이지 믿고 따를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따를 대상은 우리 하나님 한 분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우리가 만난 모든 사람이 예수의 사랑을 베풀 때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석이 되셔서 절대로 요동하지 않으시고 변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견고한 요새 같으셔서 어떠한 문제와 어려움이 엄습해온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모든 외부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이 요새가 되어주셨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께로부터 참된 평화를 얻었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힘이 되십니다. 능력이 되십니다. 모든 것이 되십니다. 반석이 되십니다. 요새가 되십니다. 나의 구원의 뿔이 되십니다. 나의 방패가 되십니다.” 할렐루야.
이 세상을 살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비난의 화살을 쏩니다. 미움의 화살을 쏩니다. 원망과 불평의 화살을 쏩니다. 화살에 꽂히면 상처를 입고 미워하게 되고 원망하게 되고 불평하게 되고 부정적으로 말하게 되고 비판적이 되고 그래서 마음이 상처로 인해 어두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세상의 화살로부터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주셔서 우리를 막아주심을 말미암아 우리를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홀로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대상이 되시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22장 50절에,
이러므로 야훼여 내가 모든 민족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할렐루야.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주님만이 홀로 영광 받으시옵소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여 하나님 자녀 삼아주셨으니 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만이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홀로 받으시옵소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하시고 나의 길을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시편 18편 46절에,
야훼는 살아 계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하나님이 살아계십니다. 지금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찬양사역자인 이연수씨가 지난 3월 달에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하는 책을 냈는데요. CCM가수인 이분은 2003년에 첫 찬양 앨범 을 내었고 이듬해 2집, 그리고 여러 앨범을 잇달아 내었고 2005년도에는 일본에서 앨범을 내어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찬양을 부르는 귀한 찬양사역자입니다.
어느 날 사역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잠을 자려고 하는데 우연히 겨드랑이 밑을 만지니까 뭐가 잡혀요. 병원에 가서 검사해 보니까 유방암인데 이 유방암이 수술하려고 보니까 임파선까지 퍼졌어요. 신앙이 없던 그의 어머니가 말합니다. “너처럼 착하게 사는 아이가 왜 이런 병에 걸려야 되냐고” 그런데 오히려 그 어머니를 위로합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나를 치료해 주실 거예요.” 그래서 딸의 그 믿음을 보고 어머니가 예수를 믿게 되었고요.
그 다음 수술을 받는데요. 수술 받고 난 다음 여덟 번 항암치료 받고 서른세 번 방사선 치료를 받는데 암수술이라는 것은 얼마나 피를 말리는 고통인지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다가오는 두려움. 그래서 병상에서 수술대로 수술 받으러 갈 때 그 마음속에 한없는 두려움이 다가와요. 또 항암치료 받을 때 그 약이 얼마나 독한지 먹으면 토하고 방사선 치료 받아서 머리가 다 빠지고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을 당하는데 이분은 믿음으로 이겨낸 것입니다. 이런 고백을 했어요.
“대부분의 사람이 암 진단을 받으면 세상을 다 산 것처럼 좌절하지요. 하지만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만약 저를 데려가시려고 했다면 작은 암 덩이라도 발견하지 못한 채로 내버려 두셨을 것 같아요. 그런데 만져지는 암, 발견할 수 있는 암을 주셨잖아요. 그것을 알기에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가족을 위해서라도 힘든 내색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육신적으로 가장 고통스런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건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느꼈던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할렐루야. 찬양곡 5집 앨범에 이런 가사가 실려 있습니다.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 주 나의 하나님이 지켜주시네 놀라지 마라 겁내지 마라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내 맘이 힘에 겨워 지칠지라도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세상에 험한 풍파 몰아칠 때도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주님은 나의 산성 주님은 나은 요새 주님은 나의 소망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야훼)”
호흡이 있는 동안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찬양해야 됩니다.
2. 응답하시는 하나님
둘째로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진 위대한 무기가 기도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절망적인 상황을 만날 때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어찌할 바를 몰라 좌절하고 낙심하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주 앞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주여 나를 긍휼이 여겨주시고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다윗의 고백을 보세요. 사무엘하 22장 5절로 7절에,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 중에서 야훼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죽음의 공포가 그를 둘러쌌을 때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긍휼이 여겨 주옵소서. 야훼의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이 여겨 주옵소서. 나를 긍휼이 여겨 주옵소서. 나를 이 절망 가운데서, 이 죽음의 공포에서 건져 주시옵소서. 너무나 괴롭고 힘들어 견딜 수 없나이다. 나를 건져 주시옵소서.” 그때 하나님께서 능력의 손을 펼치사 시작을 베풀어 주시고 그를 모든 절망과 고난과 슬픔의 자리에서 건져 주신 것입니다. 사무엘하 22장 14절로 15절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야훼께서 하늘에서 우렛소리를 내시며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심이여 화살을 날려 그들을 흩으시며 번개로 무찌르셨도다
할렐루야. 17절로 20절에 성경은 이어서 말씀합니다.
그가 위에서 손을 내미사 나를 붙드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그들은 나보다 강했기 때문이로다 그들이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야훼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구원하셨도다
“구원하셨도다. 구원하셨도다. 구원하셨도다.” 할렐루야.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위대한 승리자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세상을 이기신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여러분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여러분의 구세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부르짖어야 됩니다. 시편 50편 15절은 말씀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예레미야 33장 3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같이 고백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아멘. 부르짖고, 또 부르짖고, 부르짖으면 주님이 응답하십니다. 기적을 베풀어주십니다. 풍성한 은혜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40편 1절로 2절에,
내가 야훼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할렐루야.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 기도가 하나님 뜻에 맞을 때 응답의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절대로 우리의 기도가 헛되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가 왜 이렇게 짧은 기간에 크게 부흥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기도의 능력을 배웠기 때문인 것입니다. 한국의 모든 교회가 5만 4천 교회가 새벽 다섯 시면 새벽기도를 드립니다. 매일같이 새벽기도를 드린 이 기도의 능력이 얼마나 큰 힘인지 모릅니다. 저희 교회는 새벽기도도 드리고 또 매일철야기도도 있고 또 금요일은 대성전에서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하고.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주님을 섬기면서 워싱턴에 있을 때에도 또 동경에 있을 때에도 교회를 건축하는 축복을 선물로 받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선물로 받았느냐? 기도해서 선물로 받았습니다. 2000년도 제가 베데스다 대학교 총장으로 있을 때 학교 학력인가를 다 마치고 나니까 조 목사님이 저를 부르십니다. “이 목사 동경으로 가라”고 명령을 하셔서 제가 와서 목사님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목사님 저 내일 동경으로 갑니다.” 저를 가만히 쳐다보시더니 “가서 교회 지어라.”
동경에 가보니 교회를 지을 만하지가 못해요. 왜냐? 일본의 물가가 너무 비싸서 최소한도 1~200억이 있어야 교회를 건축하는데 도저히 그런 비용도 없고 또 동경교회가 쓰고 있는 빌딩 4층 전체를 빌려 쓰는데 보증금 10억에 월세가 9000만 원이예요. 9000만원. 한 달에 9000만원씩 내고 있으니 9만 불씩 내고 있었어요, 9만 불씩. 그러면 1년에 거의 백만 불, 10억 정도를 월세로 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교회를 또 짓습니까? 뭐로 교회를 지었다고요? 기도로. 그래서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매일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고 석 달에 한 번씩 열두 광주리 새벽기도를 합니다. 매일 기도할 땐 한 150명이 나오고 특별새벽기도 두 주간 할 때 500명씩 나와요. 열심히 새벽에 나와 기도하고 부르짖고 또 부르짖고 또 부르짖었어요.
아, 그랬더니 하나님이 한 건물을 보여주셨는데 우연히 차를 타고 지나가는데 웬 빌딩이 문이 철문으로 잠겨있어서 차를 세우라고 했습니다. 세우고 나서 보니까 아주 좋은 위치에 큰 빌딩이 있는데 아무도 쓰지 않고 문이 잠겨있어요. 그래서 이 건물 주인을 찾아서 우리가 산다고 연락을 해라. 그래서 우리가 현금을 줄 테니 이 빌딩을 삽시다. 그래서 건물을 계약을 하고 중도금까지 치렀어요. 한 150억이 드는데 계약금을 10퍼센트 내고 중도금을 40퍼센트를 내고 그 다음에 한 80억이 필요한 거예요. 80억이 필요한데, 교회에 있는 모든 헌금은 다 이제 계약금 중도금으로 해서 은행 통장에 돈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교인들이 헌금을 열심히 내고 하니까 은행에서 융자를 받으려고요. 우리 교회가 매주일 이렇게 헌금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융자신청을 했어요. 일본의 큰 은행에 가서 융자를 신청하니까 얼마나 친절한지. 일본 분들이 친절하거든요. 상담을 하고. 우리 교회 3년 동안의 재정을 다 보고하고 나니까 “잘 하겠습니다. 잘 하겠습니다.” 그래서 두 주일 있다가 연락이 왔는데 저희 이사회에서 부결되었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안 될 거면 안 된다고 그러지 “아, 걱정하지 마시고,” 큰 은행에 갔어요. 그 은행에 갔더니 서류 보더니 “서류가 완벽하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가시라고” 인사를 나와서 몇 번씩 하고. 갈 때까지 인사하고 또 보면 또 인사하고. 그러고 한두 주 있다가 또 안 되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한 달이 지나고 약속한 잔금을 치루는 날이 되었는데 돈이 준비가 안 되었어요. 그래서 연락을 했습니다. 저쪽 편에다가 한 달만 연기를 해주십시오. 곧 은행에서 돈이 나옵니다.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된다고 그래서. 한 달 연기를 해줬어요. 그래서 그 다음 달에도 은행이란 문은 다 들어가 봤는데 안돼요. 그래서 또 연락을 했습니다. 또 한 달만 더 연기를 해 달라. 그래서 마지막 한 달을 연기를 받았어요. 그래서 마지막 이달까지 돈을 안내면 우리 계약금 15억이 날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는 일본에 있는 한국계 은행을 찾아갔어요. 일본 동경에 우리은행도 있고 국민은행도 있고 다 있거든요. 은행을 찾아갔는데 지점장이 저를 부르더니 얘기를 하더라고요. “목사님, 목사님 제가 솔직하게 말씀드리는데 일본에서 교회하고 학교는 은행 융자를 안 해줍니다. 내부로 그렇게 결정을 해놨습니다. 이유는 돈을 밀려서 못 갚을 때 받을 대상이 없습니다. 둘째로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는데 그 사람들을 쫓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나 학교는 은행에서 융자를 안 해줍니다.” 이러는 거예요. 야, 몇 달 동안 뛰어다닌 것이 헛고생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은행을 나오는데 주님이 음성을 들려주세요. “너 지금 뭐하고 있냐?” 그래서 제가 “아니 지금 제가 융자 받으러 다니잖아요.” “뭐하고 있냐?” 무슨 말씀하시는지 제가 알았죠.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주님께 맡기고 기도하면 되는데 그거를 융자받겠다고 이리 뛰어다니고 저리 뛰어다니고 두 달 동안 고생만 죽도록 하고 얻어진 건 없고 마음에 실망만 가득했는데 주님이 가르쳐주신 거예요. 마지막 순간에 주님이 “야 기도하지 않고 너 왜 돌아다니냐?” 그래서 그 즉시 교회로 달려가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제가 아직도 덜 되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융자 얻으려고 하고 다니고, 주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얼마나 많이 회개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편해졌어요. 아 이게 날짜가 얼마 안 남았는데 마음이 편해졌어요. 그 다음 주일날 예배 끝나고 나왔는데 그 교회 나오는 일본 성도님 여 집사님이 한 분 오셔서 “목사님, 제가 좀 알아볼까요?” 그래요. 뭐 하도 그런 분이 많으니까 “알아보세요. 알아보세요.” 그러고 나서 며칠이 지났는데 전화가 왔어요. 그분이. “아, 은행 융자가 됐습니다.” 그래요. 깜짝 놀랐어요. 할렐루야! 알고 보니까 제가 그분 따님을 주례했는데 그때 결혼식에 온 분 중에 신용금고 이사장이 있어요. 근데 신용금고 이사장 어머니가 아주 독실한 크리스천인데 그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아들한테 “교회 건축하는 일에는 무조건 도와라.” 그랬대요. 그래서 그분이 생각나서 전화를 한 거예요. 사실 우리 교회가 교회 건축하고 지금 잔금을 못 치르고 있는데 융자를 해주겠냐고. 서류도 안보고 무조건 오케이. 도와주겠다고. 할렐루야!
나중에 알고 보니까요, 그 신용금고에서 빌려줄 수 있는 Maximum, 최대 금액이 50억이래요. 근데 이사장님이 무조건 되고 오케이 했기 때문에 나중에 80억씩이라도 할 수 없이 빌려줘야 됐대요. 그래서 일주일 만에 융자가 돼서 계약 바로 직전 일주일 전에 융자를 받아서 잔금을 치르고 순복음동경교회 입당을 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모든 영광 돌립니다. 조용기 목사님 모시고 이제 헌당예배 드리는데요,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12년 전인데 지금도 젊지만 그때 한참 더 젊으네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그 건물을 선물로 주셨어요. 언제? 기도할 때.
여러분, 응답이 올 때까지 기도하세요. 절대 기도의 고삐를 놓지 마시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해서, 응답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인자를 베푸시는 하나님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자를 베풀어주십니다.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2장 51절에,
야훼께서 그의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하도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자를 베풀어주십니다. 변함없는 사랑, 영원한 사랑, 넘치는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모든 절망 가운데서 건져주시고, 악한 원수 마귀와 싸워서 승리하게 만들어주시고, 우리에게 넘치는 은혜와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시편 32편 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야훼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이것을 가리켜서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 변함없는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변해요. 환경은 변해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로 삽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예수님이 바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아멘! 1장 16절에는,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우리가 은혜 위에 은혜를 받고 사는 것입니다. 충만한 은혜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큰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는 우리가 우리 주위의 가난하고 병들고 문제 있고 어려움 당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베풀고 나누고,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주님께로 이끌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같이 누리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됩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에,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용서하며 사랑하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한 간증을 말씀드리고 오늘 설교를 마무리 합니다. 프랜시스 챈(Francis Chan) 목사님이 「크레이지 러브(미친 듯 하나님을 사랑하라)/CRAZY LOVE」라는 책을 내셨어요. 코너스톤 교회(Conerstone Community Church)의 담임 목사님이신데요, 헌금의 절반 이상을 선교와 구제에 쓰는 교회입니다. 1994년에 30명으로 출발한 교회가 6년 만에 2000명이 모이는 대형교회가 됐어요.
그런데 프랜시스 챈 목사님은 어릴 때 아주 많은 어려움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어머니가 그를 낳는 과정에서 돌아가셨어요. 새엄마는 아홉 살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친아버지는 열두 살 때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러니 온 가족이 죽는 그 삶 속에서 태어나서 자란 겁니다. 고등학교 때는 유일하게 친척이 삼촌하고 숙모가 있었는데 삼촌이 숙모를 총으로 쏴 죽이고 자기는 자살해 죽었어요. 충격입니다. ‘이제 나에게 또 뭐가 다가올 것인가?’
그가 예수를 믿고 있었는데도 늘 하나님이 벌주시고 야단치시는 하나님으로 알고 두려워 떨었어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야단을 맞지 않을까? ‘어릴 때부터 어머니 죽으시고 새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죽고 우리 삼촌 우리 숙모 다 죽었으니 내가 하나님께 야단만 맞지 않고 살아갔으면 되겠다.’하다가 딸을 낳았는데 얼마나 딸이 예쁜지 딸 바보가 돼서, 눈만 뜨면 “내 딸, 내 딸, 내 딸.” 밖에 나가도 “내 딸, 내 딸.” 딸을 아주 미치게 사랑했다 그랬어요. 미친 듯이 사랑한다는 것을 그때 ‘아,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고 계시는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보세요, 자기가 딸을 너무나 사랑해서 어디를 가든지 딸 사진 갖고 딸 사진 보여주면서 “내 딸 봐요 내 딸 봐요.” 그러다가 ‘하나님이 날 이렇게 미친 듯이 사랑하시겠구나.’ 그래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의 책 크레이지 러브에서, “자녀를 향한 부모의 애정과 관심이란 것이 어찌나 깊고 강열하던지 그러면서 나는 하나님의 마음에 새롭게 눈뜨게 되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은 도대체 얼마나 깊고 큰 것일까? ‘나’라는 존재는 세상에 물든 죄 많은 아버지에 불과하지만 온전한 사랑을 베푸실 줄 아시는 하나님은 완벽한 아버지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의 자식 사랑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어떤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며, 친히 돌보시고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며 방황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치료하시고 돌보시고 우리를 가장 좋은 곳으로 넘치게 채워주시고 또 그러한 길로 인도해주시는 우리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찬양과 존귀를 받을 분이고 그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며 우리에게 넘치는 사랑으로 채워주십니다.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립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되도록 은혜 내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다윗의 찬송과 예언
삼하22장 01절 ~ 절
곽창대목사 / 삼하 22:1-23:7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다윗이 하나님께 올린 찬송과 하나님께 받은 예언입니다. 둘 다 장르는 시(노래)입니다.
22장 다윗의 찬송 (승전가)
사무엘하 22장은 시편 18편과 거의 비슷합니다. 내용상으로 감사시, 찬송시, 제왕시(51절, “그의 왕”)로 불립니다.
1절: 표제 (시의 배경)
* 언제 다윗이 이 시를 썼는지 사무엘서의 저자는 밝힙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날에”
* 다윗은 사울이 죽은 후 유다지파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이스라엘의 남부지방을 다스리다가 7년 6개월 후에 사울의 남은 세력들까지 흡수하여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그리고 주변의 나라들을 제압합니다. 나라가 안팎으로 견고해진 것입니다. 그렇게 나라가 견고하게 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다윗은 알았습니다. 게다가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의 말씀까지 들었습니다. 다윗과 그의 후손을 통하여 나라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삼하 7장).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기 위하여 이 시편을 썼습니다.
* 다윗의 이 감사시편이 사무엘서 마지막에 수록된 것은 사무엘서 전체의 결론으로 여겨도 전혀 손색이 없기 때문입니다.
2-3절: 다윗은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높입니다.
* 다윗은 하나님을 9가지의 은유로 표현합니다. 특히 반석, 요새, 높은 망대, 피난처는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피하여 광야에서 유랑생활을 할 때에 접했던 바위와 절벽과 동굴들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 험난한 지형들이 다윗에게 뜨거운 햇볕을 피하는 그늘을 제공했으며, 은거할 수 있는 피난처가 되었으며, 전쟁 시에는 천혜의 요새와 산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자연지형들 속에 거하면서 자신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연상되어 그의 마음이 격앙되고 시상이 넘쳐흘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9가지의 은유로 표현함으로써 하나님께 최고의 찬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 하나님을 명제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구원자 하나님, 인도자 하나님, 보호자 하나님, 각양 좋은 선물을 베푸시는 하나님,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 등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명제로 표현하는 것보다 은유로 표현하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과 사역을 훨씬 더 다양하고 풍요롭게 그려줍니다. 이것을 은유신학(metaphorical theology)이라고 부릅니다. 다윗은 은유신학의 대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가르치실 때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기를 좋아하신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 다윗이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과 사역을 표현할 때 일인칭 소유격을 붙여 표현했습니다.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자,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높은 망대, 나의 피난처,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이는 다윗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실제로 경험하여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믿고 사랑하고 찬송하고 예배하는 하나님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다윗에게 친히 찾아오셔서 만나시고 대화하시고 위로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지혜와 능력을 공급하시고 위험과 폭력에서 구출해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 내가 생생하게 경험하여 알게 된 하나님, 내 몸에 각인 된 하나님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 편이며 하나님도 내 편이라고 자랑한 것입니다.
*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다윗이 노래한 것은 성경이 추천하는 참된 자랑입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자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4절: 다윗은 자신이 경험하여 알게 된 바로 그 하나님께서 현재와 미래에도 한결같이 자신을 지켜 보호해주셔서 원수들로부터 구원해주실 것을 확신한다고 선언합니다.
5-6절: 다윗은 과거의 어두웠던 날들, 시련의 날들을 회상합니다. 그때 다윗은 사망의 물결, 불의의 창수, 스올(음부)의 줄, 사망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원수들의 간계와 위협은 잔인하고 끈질겼습니다. 그로 인해 다윗은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를 절감한 것입니다.
7절: 그때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부르짖었습니다). 그랬더니(“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으신 곳이 성전이라고 했는데 여기 성전은 하늘 성전을 뜻합니다.
8-20절: 다윗은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단락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8-16절: 하늘 성전에 계신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땅에 내려오셔서 다윗의 원수들을 무찌르셨는데 다윗은 하나님의 개입과 심판과 승리를 대자연의 변화무쌍한 위력으로 비유하여 표현합니다. 천둥과 지진과 화산의 폭발과 번개와 산불과 폭풍과 구름과 폭우와 해일에 사람들이 속수무책이듯이 천지만물을 호령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그 누구도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다윗은 고백합니다.
2) 17-20절: 다윗은 천지만물을 호령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 가운데 있는 다윗을 찾아오셨습니다. 대적들로부터 다윗을 구원하셨습니다. 다윗의 대적들은 다윗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최고의 전사이신 하나님을 대항할 자 아무도 없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그의 가문을 영원히 지키시겠다고 약속하셨기에 다윗의 원수는 하나님의 원수이므로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싸우신 것입니다. 이 단락에서 다윗은 하나님 때문에 자신이 승리할 수 있었다고 노래합니다.
21-25절: 20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뻐하시므로 구원하셨다고 했는데 이 단락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뻐하신 이유,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밝힙니다.
* 다윗은 자신이 대적들의 공격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의롭고 정결하게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도를 지켰다,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 하나님의 모든 법도를 내 앞에 두었다, 하나님의 규례를 버리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과 행위를 낱낱이 아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상해주셨다고 고백합니다.
* 다윗의 이 고백은 자기가 얼마나 의로운 자인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여 의롭게 살아가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을 내리십니다. 이것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공의는 하나님과 우리가 맺은 언약의 핵심입니다.
* 하나님께서 언약관계에 있는 다윗에게 무조건적인 은혜를 베푸셨지만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더 큰 은혜를 베푸셨다고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두 가지의 특성이 공존합니다. 무조건적인 은혜와 조건적인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선행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으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오직 은혜로 얻는 구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립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의 선물들을 주셨습니다. 그 선물들이 말씀과 기도와 교회생활과 은사와 성령님의 임재와 성령의 충만 등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자신의 의를 자랑한 것처럼 말하는 이 단락도 실은 공의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높이는 단락으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입니다.
26-30절: 다윗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통치원리를 밝히며 하나님을 높입니다.
* 26-27절: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대로 자비를 베푸는 자, 의롭게 사는 자, 정결하게 사는 자를 보상하십니다.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를 심판하십니다.
* 28-30절: 원문을 보면 각 절마다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자에게 보상하시며 어떤 자에게 벌을 내리시는지 그 이유를 밝힙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곤고한 백성 겸손한 백성을 구원하시지만 교만한 자는 낮추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공의로우신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캄캄한 밤에도 등불이 되셔서 생명의 길,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도 함께하셔서 승리하도록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그 같은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31-35절: 다윗은 전쟁에서 자신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훈련하셔서 하나님의 전사가 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다윗을 보호하신 하나님(31-33절 전반절)
* 다윗을 인도하신 하나님(33절 하반절-34절)
* 다윗을 전사로 훈련하신 하나님(35절)
* 다윗을 전사가 되게 하신 하나님(30절)
36-43절: 다윗은 자신을 뭇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36-37, 40-42절: 전쟁의 날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능하게 하셨지만 대적들은 무력하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했다는 뜻입니다. 41절의 “내 원수들”이란 외국의 군대만 아니라 “내부의 원수들”도 포함합니다(42절). 그 원수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지만 그 기도가 가증하기에 하나님께서 결코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다윗은 확신합니다.
* 38-39, 43절: 다윗은 대적들을 섬멸하는데 전력투구했다고 고백합니다.
44-51절: 이 시의 결론적 송영으로 다윗은 이스라엘만 아니라 열방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찬양하게 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노래합니다.
* 44-46절: 하나님께서 다윗을 뭇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셔서 모든 민족의 으뜸으로, 만방의 통치자로 삼으셨으니 이방의 민족들이 자신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 47-50절: 다윗은 자신을 크게 높여주신 하나님, 대적들을 제압하신 하나님, 대적들에게서 구원하여주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다윗의 찬송을 들어야 할 자들은 모든 민족들입니다(50절). 세계만방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다윗과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 51절: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맺으신 언약의 성취를 확신하며 노래를 마감합니다. 여기 “그의 왕”은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 왕입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는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을 뜻합니다. “그의 후손”은 원어로는 그의 후손들(복수)입니다. 즉 다윗의 직계 후손들로서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다윗의 직계 후손들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큰 구원과 인자를 영원토록 베푸시기를 다윗은 기원합니다.
* 다윗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다윗언약”)의 견고함과 영원함을 노래함으로써 이 시편을 마무리한 것입니다. 그렇게 한 것은 두 가지의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자신이 믿고 섬겼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베푸셨는지 회고하면서 감사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아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에게 영원토록 자비를 베푸시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다윗언약)을 굳게 붙잡고 그 약속의 성취를 소망한 것입니다. 여기에 구속사적인 의미를 덧붙인다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다윗의 후손이신 메시아(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 전망하며 노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시편을 묵상하면서 우리에게 적용해보았습니다.
1) 환난의 날이 닥칠 때 오히려 하나님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2) 환난의 날에는 더더욱 기도가 필요하다.
3) 겸손한 기도, 간절한 기도, 믿음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
4) 기도응답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고 우리의 삶을 건실하게 한다.
5) 기도응답을 체험한 성도는 영적전투에서 승리를 쟁취한다.
6) 영적전투에서 승리를 체험한 성도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밝은 미래를 전망한다.
7) 그 밝은 미래는 하나님께서 다윗언약을 통해 예고하신 대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지금 성취되고 있으며 앞으로 완전하게 성취될 것을 성경은 반복하여 말씀한다. 그 밝은 미래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8)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성도는 다윗처럼 노래하는 시인이 된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시인, 하나님을 찬송하는 시인, 하나님의 백성답게 의롭게 살려고 결단하는 시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밝은 미래를 전망하는 시인, 말과 삶으로 하나님을 자랑하는 시인이 된다.
23:1-7 다윗의 예언
서론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 단락의 장르도 22장처럼 시입니다. 두 편의 시가 나란히 배열되어 있지만 저작 시기는 큰 간격이 있습니다. 22장의 시는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은 반면에 23장의 시는 다윗이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지었습니다. 23:1의 “다윗의 마지막 말”은 다윗의 유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1절에서 다윗은 자신이 누구인지 소개합니다.
- 이새의 아들: 자신의 혈통을 밝힙니다. 평범한 집안, 별 볼일 없는 집안의 아들이었다는 뜻입니다.
- 높이 세워진 자: 전혀 기대하지 않은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필부의 아들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뜻입니다.
-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에는 나중이 되고 싶지 않은 자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수많은 노래를 창작하고 그 노래를 악기로 연주하고 입으로 불렀습니다. 다윗이 창작한 노래들의 핵심주제는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입니다.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 구원자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 인도자 보호자 공급자이신 하나님, 완전하신 목자이셨기 때문입니다.
* 2절에서 다윗은 자신이 어떻게 이 시를 쓰게 되었는지를 밝힙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썼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다윗이 썼지만 원저자는 성령 하나님입니다. 그러하기에 그때 다윗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가 된 것입니다.
* 3-5절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축복의 말씀입니다. 이 단락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3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밝힙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반석이신 하나님,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을 통하여 이스라엘에 복을 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즉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인 왕이 수행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공의로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2) 4절: 왕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공의로 백성을 다스릴 때 하나님께서 왕에게 주시는 복이 무엇인지 세 가지의 그림언어로 묘사합니다.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가 그친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의 통치로 인하여 나라에 죄와 불의가 사라지고 공의와 정의가 힘차게 구현되어 생명이 약동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3) 5절: 다윗은 그와 같은 복이 자기 당대에 펼쳐졌지만 후대에도 펼쳐질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다윗은 자신과 자신의 집을 위하여 구원과 번성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음으로 소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말씀이 사무엘하 7장에 기록되어 있는 “다윗언약”입니다.
* 6-7절은 사악한 자(벨리알,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의한 통치자 혹은 사탄을 뜻함)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다윗의 유언과도 같은 이 시도 “다윗언약”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전에 살펴보았던 대로 “다윗언약”의 핵심은 다윗의 주님이신 메시아가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영원히 견고하게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죽음을 앞두고 쓴 이 시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 장차 완성될 메시아 왕국을 대망하며 노래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장차 의로운 왕이신 메시아가 오셔서 어둠의 모든 세력들을 멸하시고 생명력이 넘치는 새로운 세계(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실 것을 확신하며 노래한 것입니다. 그 메시아가 오실 때까지 이스라엘의 왕들은 메시아의 대리통치자로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구현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함을 다윗이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어 권면한 것입니다.
다윗의 이 예언을 묵상하면서 몇 가지 성경의 중요한 주제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1)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의 핵심주제는 하나님나라의 완성이다.
2) 그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오신 분이 다윗의 주님이신 예수님이시다.
3) 그 예수님이 다윗과 구약의 성도들이 대망했던 바로 그 메시아이시다.
4)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시작하셨다. 지금도 성령님과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던 사악한 자들이 멸망할 것이다. 대신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한 자들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
5) 선지자가 된 다윗의 예언을 따라 성도와 교회는 공의로우신 하나님 편에 서야 한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보다 더 긴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노래하는 자요 작곡가요 작사가요 악기를 연주하는 자였습니다. 시편 150편 가운데 무려 73편이 다윗의 시로 분류되었는데 그 시편들 가운데 찬양과 감사의 시편이 많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을 즐거워했던 구약의 참된 성도였습니다.
또한 다윗은 선지자였습니다.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오순절 날에 베드로 사도가 오순절 축제에 모인 군중들에게 설교했는데 그 설교의 주요내용은 다윗이 예언한 그리스도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다윗이 쓴 시편에서 몇 구절들을 인용합니다. 시편 16:8-11과 시 110:1입니다.
시 16:8-11을 인용하면서 베드로는 다윗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예언했다고 해석하면서 다윗의 예언대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증언합니다.
(행 2:29-32) 『[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이어서 베드로 사도는 다윗이 시편 110:1에서 예언한 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는데 그 그리스도가 예수님이라고 증언합니다.
(행 2:34-36) 『[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성부 하나님)께서 내 주(그리스도)에게 말씀하시기를 [35] 내(성부 하나님)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그리스도)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다윗은 자신의 시편들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실 그리스도가 자신의 자손일 뿐 아니라 자신의 주님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완전하지 않음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온전하게 하실 그리스도의 오심을 대망하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다윗은 베드로 사도가 말한 대로 선지자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노래했습니다. 오실 그리스도를 대망하고 전했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을 노래하는 시인이 됩시다. 종말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가 됩시다. 말과 삶으로 우리의 유일한 구주시요 주님이신 예수님을 전하고 높이는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이 됩시다. (끝) 찬송 14장, 208장
요약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주변 나라들을 제압하고 나라를 안팎으로 견고하게 만듭니다. 그는 이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습니다. 게다가 다윗과 그의 후손을 통하여 나라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까지 들었습니다(삼하 7장).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하여 이 시편을 씁니다(삼하 22장).
먼저 하나님을 아홉 가지의 은유로 표현하며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높입니다(2~3절). 반석, 요새, 높은 망대와 같은 자연지형들 속에 거하면서 자신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면서 내가 생생하게 경험하여 알게 된 하나님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현재와 미래에도 원수들로부터 구원해주실 것을 확신한다고 선언합니다(4절). 이어 자신이 시련을 겪을 때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천지만물을 호령하시는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셔서 자신이 승리할 수 있었다고 노래합니다(5~20절). 다윗은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 이유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의롭고 정결하게 살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21~25절). 이는 자기가 얼마나 의로운 자인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언약관계에 있는 다윗에게 무조건적인 은혜를 베푸셨지만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더 큰 은혜를 베푸셨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선행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하나님의 은혜를 누립니다(26~30절). 이어 다윗은 전쟁에서 자신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훈련하셔서 하나님의 전사가 되게 하시며 뭇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31~43절). 마지막으로 이스라엘만 아니라 열방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찬양하게 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노래합니다(44~51절). 다윗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의 영원함을 노래함으로써 이 노래를 마무리합니다. 이렇게 마무리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자신이 믿고 섬겼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베푸셨는지 회고하면서 감사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아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에게 영원토록 자비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이 성취되길 바란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다윗의 후손이신 메시아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 전망하며 노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다윗과 같이 환난이 닥칠 때 오히려 하나님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기도하며 영적전투에서의 승리를 쟁취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성도는 다윗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찬송하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의롭게 살려고 결단하며 말과 삶으로 하나님을 자랑하는 시인이 됩니다.
앞서 살펴본 22장의 시는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은 반면에 23장의 시는 다윗이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지었습니다. 그래서 23장은 다윗의 유언과 같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소개하며 자신이 성령의 감동으로 이 시를 쓰게 되었다고 소개합니다(1~2절). 이어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선언합니다(3절).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인 왕이 수행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공의로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라에 죄와 불의가 사라지고 공의와 정의가 힘차게 구현되어 생명이 약동하는 나라가 됩니다(4절). 다윗은 그와 같은 복이 당대와 같이 후대에도 펼쳐질 것이라고 노래합니다(5절). 이어서 사악한 자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을 확신합니다(6~7절).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맺은 언약을 지키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메시아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지금도 성령님과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던 사악한 자들이 멸망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한 자들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게 됩니다. 선지자가 된 다윗의 예언을 따라 성도와 교회는 공의로우신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노래하는 자였습니다. 시편 150편 가운데 무려 73편이 다윗의 시로 분류되었는데 그 시편들 가운데 찬양과 감사의 시편이 많습니다. 또한 다윗은 선지자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온전하게 하실 그리스도의 오심을 대망하고 선포했습니다(시 16:8~11, 110:1; 행 2:29~32, 34~36).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을 노래하며 오실 그리스도를 대망하고 전했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을 노래하는 시인이 됩시다. 종말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가 됩시다. 말과 삶으로 우리의 유일한 구주시요 주님이신 예수님을 전하고 높이는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이 됩시다.
피난처이신 여호와
김준범목사 / 삼하 22:1-7
사무엘하 21-24장은 사무엘하의 결론부로, 다윗의 통치시기에 있었던 다양한 일들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사무엘하 22장은 다윗의 시편으로, 다윗이 자신의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모든 은혜에 대해 찬송하는 내용입니다.
다윗을 괴롭게 한 대적들의 손과 사울의 손(1절)
이 시편은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지은 시편이었습니다(1절).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무엘하의 저자가 다윗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다윗의 삶을 마무리하는 이 결론부에 이 시편을 다시 배치시킨 것은 이 시편이 다윗의 삶 전체를 대표하고 요약하는 시편으로 적절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다윗은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을 인해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위험을 겪어야 했습니다(1절). 우리는 자주 이런 생각을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아니었나? 그런데 왜 다윗에게는 그토록 많은 대적들과 고난들이 있었는가? 왜 우리의 삶에는 이토록 많은 역경과 어려움이 있는가? 세상에는 왜 이렇게 불공평한 일들이 많이 있는가?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왜 불의한 자들이 득세하도록 허용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에게 왜 이렇게 힘든 시간들을 허락하시는가?”
하지만 만일 하나님께서 이 세상 역사 가운데에서 모든 악인들을 일일이 심판하셨다고 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역사 속의 수많은 사람들이 멸절되었을 것이고, 이 세상의 역사는 유지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세상 끝날까지 남아서 구원을 받아야 할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이렇게 복음을 듣고 구원 받을 수 있는 순서가 우리에게 돌아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악을 허용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가운데 하나님의 지혜로운 섭리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삶에 역경이나 대적자들이 전혀 없이 천국 같은 환경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이는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혹 이 땅에 참된 신자들만 남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안에 여전히 죄가 남아있고 이 세상은 여전히 비참 아래 있기 때문에 세상은 절대로 천국 같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이 땅에서의 삶이 천국 같다면 우리의 믿음은 연단을 받지 못하고 자라지도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늘 천국 같기만 하면 우리가 징계를 받아야 할 때에도 징계다운 징계를 받지 못하여 방종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천국 같이 변하기를 바라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이고 비성경적인 기대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을 피할 수 없습니다(1절).
피난처이신 여호와께로 피한 다윗(2-7절)
하지만 다윗에게는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붙드시는 여호와의 손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마치 큰 파도가 이는 바다를 항해하는 돛단배처럼 위태로운 상태에 있었습니다(5-6절). 다윗은 그러한 환난 중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4,7절). 곤고한 날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한 가지 위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이 모든 시간들을 지난 후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생하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2-3절).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언제나 피난처가 되어 주셨습니다. 다윗의 삶은 계속 피난처로 피난하는 삶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땅에서 피난처를 늘 필요로 합니다. 여호와를 자기 피난처로 삼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환난날에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 자들인지를 절감하게 되고 그제서야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가 되심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다윗의 피난처와 의지가 되어 주신 하나님(8-46절)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피하는 자들에게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신음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과 그의 언약을 인하여 그리고 이 세상의 악에 대하여 분노하시며 일어나시되, 그의 전능의 능력과 위엄을 가지고 일어나셔서 그의 자녀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의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하시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원수들의 공격을 막아주시고 화살을 날려 악인들을 흩으시며 하늘에서 뇌성을 발하시며 그들을 꾸짖으십니다(8-16절).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가르고 오셔서 손을 내밀어 우리를 붙드시고 많은 물에서 우리를 건져내시며 재앙의 날에 우리의 의지가 되십니다(17-20절). 하나님의 도움은 실제적인 것이며 강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의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구원하시고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강하고 위대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강한 분이 없고 하나님과 같이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피하는 그의 모든 백성들에게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다윗은 환난 속에서 믿음으로 행했고, 그런 다윗을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실하심과 자비하심으로 상대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믿음으로 행했을 때 이를 기뻐하시고 그의 행보에 복을 주십니다(21-28절).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바위뇨!”(29-33절).
하나님은 또한 다윗을 강하게 해주셨습니다(34-40절). 하나님은 다윗을 강하게 하셔서 다윗의 대적자들로 도망가게 하셨습니다(41절). 다윗의 대적자들에게는 구원자가 없었고(42절), 다윗은 그들을 땅의 티끌같이 부스러뜨렸습니다(43절). 여호와께서는 다윗을 그 모든 다툼에서 건지시고 보존하셔서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고, 전에 다윗을 대적하던 이방인들은 쇠미하여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항복하여 나왔습니다(44-46절).
여호와는 살아계시니 나의 바위를 찬송하리라(47-51절)
다윗은 이 시편을 마무리하면서 그리고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나의 바위를 찬송하며 나의 하나님을 높일 것이라”(47절)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환난날에 우리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자들인지를 절감하게 하시고, 우리의 참된 피난처가 누구시며 우리의 바위가 누구신지를 생생하게 깨닫게 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생생하게 경험한 후에, 하나님을 “나의(my)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자,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높은 망대, 나의 피난처, 나의 구원자”라고 했습니다(2-3절). 하나님 외에 이런 피난처가 누구입니까?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입니까? 하나님 외에 여러분의 보장이 되시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능히 보호하실 수 있는 강하신 분입니다. 우리를 그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께 피난합시다. 그리스도께 피합시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피난처가 없습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고 이 하나님을 자랑하고 우리의 바위이신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 시편이 우리의 평생의 삶을 요약하고 대표하는 시편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노래가 있는 삶
>성경본문|
삼하22장 01절 ~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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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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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양인국목사
>비 고|
>첨부파일|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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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22장.
제목: 노래가 있는 삶
1. 다윗은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고백한 후(22:1-4), 자신이 당한 시련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시련으로부터 자신을 어떻게 구원해 주셨는지 말하고 있다(22:5-20). 그는 계속하여 하나님께서 이처럼 모든 환란에서 구원해 주신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분의 뜻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22:21-28). 후반부는 크신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심으로 모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하며(22:29-46), 하나님께서 행하신 영예로운 일들을 찬양함으로 이 장을 마쳤다(22:47-51). 하나님께서 본문의 내용을 통하여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말씀은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삶 자체가 노래가 된다”는 것이다.
2, 본문은 다윗의 신앙의 고백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받으리로다(삼하22:1-4)” 다윗의 이와 같은 신앙 고백은 오랜 세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온 삶으로부터 온 것이다. 여기 “그 날”이란 본문이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윗의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고 그에게 평강을 주신 날을 의미하지만, 보다 더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다윗이 삶의 여정에서 체험한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평강을 누릴 수 있었을 때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다윗은 어린 시절 들에서 홀로 양을 칠 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모든 위험으로부터 구원을 체험하였고, 이와 같은 체험들을 통하여 갖게 된 신앙의 고백은 골리앗과 싸워 승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다윗은 이로 인하여 더 큰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사울의 시기로 인하여 직면하게 된 위험들이다. 다윗은 사울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아 십여년을 도망다니는 삶을 살았지만 이때에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았다. 이로 인하여 다윗은 하나님을 보다 더 깊이 체험하여 믿음을 더욱 굳게 해 주었다. 이 믿음은 결국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그가 왕이 된 후에도 시련은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평화을 지키기 위하여 수많은 침략자들과 전쟁을 해야했는데. 이 때에도 다윗은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놀라운 사실들은 다윗이 생애 동안 직면했던 많으 시련들이 그를 넘어뜨리지 못했고, 오히려 그로 하여금 구원의 하나님을 보다 더 깊이 체험할 수 있는 기회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삶의 여정에서 수많은 시련에 직면했지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구원의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었고 이와 같은 체험으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들을 갖게 된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은 다윗의 생애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신앙의 고백은 삶의 여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여려 환경에 대하여 믿음으로 응답할 때 얻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고, 또한 이 고백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삶의 안전과 보장이 되는 능력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고백은 약할 때 강함이 되게 하고, 매임이 있을 때 그것으로부터 자유하게 해 주며, 두려울 때에는 담대함을 갖게 하는 능력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의 전 삶은 노래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있을 때 지난 날들의 모든 일은 감사의 노래가 된다. 다윗이 살아온 삶은 위기의 연속이었다. 5-20절을 보면 다윗은 삶의 여정에서 만난 어려움들을 “불의의 창수, 스올의 줄, 사망의 올무, 빽빽한 구름, 땅이 진동하고 떨며, 어두캄캄함” 등으로 표현했다. 이처럼 다윗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물론 다윗뿐만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아도 순탄한 삶이기 보다는 역경이 더 많은 삶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욥의 삶이 그러했고, 수많은 선지자들의 삶 역시 고난의 영속이었다. 우리는 바울의 삶에서도 동일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계시의 말씀을 통하여 믿음의 사람들의 순탄치 않은 삶을 말씀해 주신 것은 그들의 고통스러웠던 삶 자체를 말씀해 주시기 위함이 아니고, 믿음의 사람들이 어떤 환경에 처해 있든지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의 안정과 보장이 되어 주셨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자 하심이었다.
다윗은 그가 표현한 것처럼 삶의 여정에서 수많은 난관에 처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안전했다. 그러므로 그는 과거를 돌아볼 때마다 구원의 하나님을 기억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감사의 노래를 할 수 있었다. 다윗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지나 온 삶을 돌아본다면 여기까지 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로 인하여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우리는 다윗의 삶을 통하여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현재에 대하여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을 교훈 받는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온 삶”은 현재에 대하여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하는 능력이 된다. 언급한 것처럼 믿음의 사람들이 살아온 삶이 순경보다는 역경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했던 것은 위기에 처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어떤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안전을 지켜 주실 것을 알기 때문에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 믿음을 가지고 있던 하박국의 노래야말로 현재에 대하여 승리를 노래한 노래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3:17-19)”
우리는 다윗의 삶을 통하여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장래에 대하여 소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을 교훈 받는다. 다윗은 여호와를 자신의 “등불”이라고 고백한다. 등불은 흑암을 밝힐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여정 가운데 참으로 흑암과 같은 시기가 있었음을 돌아보며 하나님으로 인하여 그와 같은 어둠에서도 굳게 설 수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다윗이 언급한 “흑암”은 절망과 좌절의 시기를 말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등불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절망과 좌절에서 능히 일어설 수 있었었을 뿐만 아니라 인도의 말씀으로 인하여 어떻게 행할지 알게 되었다는 의미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등불이 되어 주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장래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를지라도 소망을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22:47-51절의 말씀이다.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복하시고 민족들이 내게 복종하게 하시며 나를 원수들에게서 이끌어 내시며 나를 대적하는 자 위에 나를 높이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는도다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모든 민족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하도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였더라”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지난 날들에 대해서는 감사의 노래를 하고, 현재에 대해서는 승리를 노래하고, 그리고 장래에 대해서는 소망을 노래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노래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이 있을 때만 부를 수 있는 노래들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은 우리로 하여금 고난의 장에서도 노래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변화시켜주는 능력의 원천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전 삶을 노래하는 삶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신앙의 고백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게 해 주옵소서. 아멘
인생 승리의 비결
전승문목사 / 하 22:1~4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천지 곧 자연은 인자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연은 인자하지 않습니다. 사실 자연은 감정 자체가 없습니다. 태풍이 불 때는 착한 사람이라고 살살 불고 악한 사람이라고 더 세게 부는 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홍수가 밀려오는 데 착한 사람이라고 비켜가고 악한 사람이라고 더 세게 밀려오는 법은 없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자연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착한 사람도 아무리 좋은 사람도 태풍이 부는 날 나가 서 있으면 그 바람을 그대로 다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중요한 건 재난이 일어났을 때는 위험이 다가왔을 때는 안전하게 피할 곳을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위험한 상황을 만나지 않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을 고비를 만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다 위험을 만납니다. 태풍과도 같은 위험, 홍수와도 같은 위험이,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런 상황을 잘 이겨내고 후일을 도모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주저앉기도 합니다. 어떤 가정은 큰 어려움이 와도 꿋꿋하게 잘 견뎌내는가 하면 어떤 가정은 작은 어려움조차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지기도 합니다. 이건 기업도 마찬가지고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이겨내는 기업, 잘 이겨내는 나라도 있지만, 끝내 무너지는 기업이나 나라도 있습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왜 누구는 어려움을 이겨내는데 누구는 넘어지는 걸까요? 피할 곳을 아는 사람은 이겨내지만 피할 곳을 모르는 사람은 무너지는 겁니다. 아무리 큰 태풍이 찾아와도 피할 곳을 알면 그 태풍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아무리 큰 홍수가 나도 피할 곳을 알면 그 홍수를 견뎌낼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반드시 피할 곳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환난의 날에는 피할 곳을 알고 있어야만 견뎌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걸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피난처를 아는 사람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모든 환난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피난처는 어디였을까요?
다윗은 그 누구보다도 많은 위험을 겪은 사람입니다. 다윗의 인생에는 죽을 고비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성경에 기록된 인물 중에서 가장 많은 위험을 겪은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다윗입니다. 말 그대로 다윗은 수시로 사선을 넘나드는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다윗은 어린 시절부터 그런 위험을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에 벌써 사자와도 싸우고 곰과도 싸우며 목숨을 건 싸움을 한 사람인 겁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만 20세도 되기 전에 전쟁에 참여한 사람입니다. 그것도 모두가 두려워하는 거인 골리앗과 홀로 맞서 싸운 사람입니다. 골리앗이 그의 첫 번째 전쟁 상대였던 겁니다. 골리앗은 그 키가 거의 3M에 달하는 거인이었습니다. 그는 50Kg이 넘는 거대한 창을 들고 온 몸을 두꺼운 갑옷으로 둘러싼 무시무시한 용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담대하게 나아가 그 거대한 골리앗을 보기 좋게 때려 눕혔습니다. 그리고는 골리앗이 자랑하던 그의 칼을 뽑아 그 목을 잘라버렸습니다.
그날 그 무시무시한 골리앗을 향해 다윗이 외친 말입니다 :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삼상 17:45~47)”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 너무나도 중요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믿음을 고백한 후로 다윗은 놀라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놀라운 인생을, 기적의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주변의 모든 나라들과 다 전쟁을 벌였습니다. 블레셋은 물론이고 아람 모압 암몬 아말렉 소바 에돔 등과 차례차례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너무 놀라운 것은 그 많은 전쟁에서 다윗은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단 한 번도 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싸움을 다 이겼습니다. 그야말로 백전백승이었습니다. 이건 정말 놀라운 기록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골리앗을 향해 외쳤던 이 말이 그대로 다윗의 좌우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싸웠습니다. 단 한 번도 자신의 힘을 의지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인생 승리의 비결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백전백승!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았지만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던 다윗의 승리의 비결은 바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싸운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22장은 다윗이 그 많은 전쟁을 치른 뒤에 쓴 감사의 노래입니다. 모든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그 승리의 비결을 고백하는 위대한 찬양인 겁니다. 그래서 사무엘하 22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전쟁을 한 것은 분명 다윗이지만 다윗은 자신이 잘 싸워서 이겼다고 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셨다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날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겁니다. 그래서 승리한 겁니다. 여기에 승리의 삶을 사는 비결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승리하는 겁니다.
이 말씀은 시편 18편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18편의 서두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같은 말 같지만 시편에는 ‘여호와 종 다윗’이라는 말이 붙어있습니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이 붙인 말이 아닙니다. 다윗 자신이 스스로 고백하는 말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임금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그저 자신을 여호와의 종이라고 고백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일생을 오직 여호와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의 인생이 승리의 인생이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비결이었습니다. 다윗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높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높였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셨음을 고백한 겁니다. 하나님이 위기의 순간마다 자신을 구원하셨음을 고백한 겁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을 10가지 호칭으로 고백합니다 : “이르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 (2절~3절)” 나의 반석(셀라)!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자! 내가 피할 나의 반석(추르)! 나의 하나님(엘로힘)!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높은 망대! 나의 피난처! 나의 구원자시라! 이분이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이분이 다윗이 의지했던 다윗의 하나님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반석이라고 두 번이나 외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주변이 광야와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는 메마른 나라입니다. 특히나 사막은 그 지형이 수시로 변하는 곳입니다. 바람 한 번만 세게 불어도 이쪽에 산이 생겼다가 다시 저쪽으로 산이 옮겨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긴다고 하신 겁니다. 하지만 반석은 다른 것입니다. 반석은 거대한 바위산을 이르는 말인데 그 산은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어도 옮겨가는 법이 없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으시며 어떠한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분이 하나님이신 겁니다. 또한 하나님은 다윗의 요새이셨고 다윗을 건지시는 분이셨습니다. 요새는 적군을 방어할 수 있는 안전한 피난처입니다. 하나님이 안전한 피난처라는 겁니다. 또한 하나님은 나를 건지시는 분입니다. 적군에게 둘러싸여있을 때, 아무도 도울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나를 건져주시는 분인 겁니다. 또한 하나님은 다윗의 방패요 구원의 뿔이셨습니다. 방패는 수비하는 무기고 뿔은 공격하는 무기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을 보호하시는 분도 하나님이고 다윗을 대적하는 적들을 물리치시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이분이 하나님입니다. 이분이 다윗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이신 겁니다.
그렇지만 그런 다윗에게도 위기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아니 사실은 다윗만큼 위험한 순간을 많이 만난 분은 없었습니다. 정말이지 수없이 많은 고비 죽을 고비를 만났던 분이 다윗입니다. 그 중 한번은 전쟁 중에 다윗이 너무 지쳐서 꼼짝도 할 수 없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다윗 앞에 거인이 나타났다 : “블레셋 사람이 다시 이스라엘을 치거늘 다윗이 그의 부하들과 함께 내려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더니 다윗이 피곤하매 거인족의 아들 중에 무게가 삼백 세겔 되는 놋 창을 들고 새 칼을 찬 이스비브놉이 다윗을 죽이려 하므로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블레셋 사람들을 쳐죽이니 그 때에 다윗의 추종자들이 그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하니라 (21장 15절~17절)” 전쟁을 하다 다윗이 거의 죽을 뻔했다는 말입니다. 요압의 동생 아비새가 도와주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꼼짝없이 죽을 뻔했다는 뜻입니다. 사실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어도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노래하는 겁니다 :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5절~6절)” 사망의 물결! 불의의 창수! 스올의 줄! 사망의 올무! 사망의 물결과 불의의 창수는 뜻하지 않게 만나게 되는 환난과 사고입니다.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 위험한 순간들인 겁니다. 스올의 줄과 사망의 올무는 대적들이 파놓은 무서운 함정입니다. 다윗을 겨냥하고 다윗을 향해 쳐놓은 무서운 함정인 겁니다. 다윗의 인생에는 이런 위험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이런 위험들이 셀 수 없이 많았던 겁니다. 한 번만 실수해도 꼼짝없이 죽게 될 무시무시한 함정들이 너무너무 많았던 겁니다. 다윗은 그 모든 위험들을 다 극복하고 다 이겨낸 분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구원하고 나아가 나라를 구원한 분 그분이 바로 다윗인 겁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 많은 위험들을 이겨내고 그 강한 대적들을 다 무찌른 것일까요? :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7절)” 기도했다는 겁니다. 위험이 찾아올 때마다 환난이 찾아올 때마다 기도했다는 겁니다. 그것도 보통 기도가 아니라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에, 하늘 높은 그 보좌에 들리도록, 간절히 소리 높여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그 모든 위험을 이겨낸 인생 승리의 비결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 “그가 위에서 손을 내미사 나를 붙드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그들은 나보다 강했기 때문이로다! 그들이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17절~19절)” 하나님께서 때마다 일마다 어려운 순간마다 어려운 고비마다 건져주신 겁니다. 아무리 큰 어려움이 와도, 꼭 죽을 것만 같은 순간이 와도, 하나님이 건져주신 겁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어째서 하나님은 다윗을 그 모든 어려움에서 건져주신 것일까요?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니까,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으니까, 그를 구원하신 겁니다.
그러나 다윗이 가만히 앉아 기도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 “내가 또 그의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그의 눈앞에서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24절~25절)” 다윗은 스스로 자신을 지켜 죄악을 피하였다고 했습니다. 최선을 다해 죄악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철저하게 관리하였다는 말입니다. 악한 마귀가 아무리 유혹을 해도 마음을 지켜낸 겁니다. 원수 마귀가 아무리 위협을 해도 절대로 굴복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 (26절~28절)” 인생은 행한 대로 받는 겁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겁니다. 기도하고 실천하는 삶!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 그것이 다윗의 삶이었습니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의지하고 그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이렇게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진실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 (31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한 것입니다. 완전하다는 말은 아무 것도 고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하나님의 도는 영원한 진리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지키고 실천해야 하는 겁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변함이 없는 진리의 말씀인 겁니다. 그래서 그 말씀은 틀림이 없습니다. 완전하고 진실한 말씀이라 그 말씀대로 하면 틀림없이 승리하는 겁니다. 그게 다윗입니다. 그것이 다윗의 믿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이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인 겁니다.
알고 보면 인생은 치열한 전쟁터입니다. 육적인 전쟁! 영적인 전쟁! 자기와의 전쟁! 다른 사람과의 전쟁! 물질과의 전쟁! 욕심과 욕망과의 전쟁! 근심과의 전쟁! 시험과의 전쟁! 뿐만 아니라 예기치 못한 위험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악한 세력의 흉계가 또 얼마나 많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여튼 우리 모두는 셀 수 없이 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다윗처럼 우리도 그 많은 인생의 전쟁에서 실패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을까요? 다윗처럼 하면 됩니다. 다윗처럼 하나님만 의지하면 됩니다. 나의 모든 것을 다 겸손하게 내려놓고, 나의 능력이나 지식도 다 내려놓고, 오직 여호와의 종으로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겁니다. 또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피난처로 삼고 살아가는 겁니다.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언제나 하나님께 피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종으로 살았던 다윗의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전쟁에서 승리한 다윗의 인생 승리의 비결인 겁니다.
그러기 위해 제일 중요한 건 기도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기도하기를 쉬지 않는 겁니다. 날마다 부르짖어 기도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모름지기 성도는 단 하루도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단 하루도 전쟁이 그치지 않는 것이 우리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 하루도 기도를 쉴 수 없는 겁니다. 그것도 보통 기도가 아니라 하늘 보좌에 상달되는 간절한 기도 부르짖는 기도 외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의 기도이며 다윗의 인생 승리의 비결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이 승리의 삶을, 그 놀라운 삶을 살 수 있었던 인생 승리의 비결이었던 겁니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던 이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모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인 겁니다. 기도하면서 그 말씀대로 산 겁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삽시다. 그래서 다윗처럼 우리도 승리합시다. 그래서 다윗처럼 우리도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됩시다.
사무엘하 강해 설교
삼하 22:1-7 / 푸른교회
본문은 유명한 다윗의 승전가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감사의 고백이자 기도요 찬송입니다. 시편 18편과도 많이 닮았습니다. 시편 18편 1-6절입니다. “[1]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3]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4]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5]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6]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그런데 사무엘하 22장은 내용이 좀 더 길고 더 많은 주제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이 고백이자 기도는 ‘여호와는 나의 00이라’고 고백적으로 규정하고 정의합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들은 모두 방어기제들입니다. 그 어떤 것도 공격적이지 않습니다. 3절입니다.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
반석은 기초요 기반입니다. 얼마나 든든합니까! 반석 위에 서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호와가 완벽한 기초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주 반석이신 여호와 위에 자신뿐 아니라 가정도 나라도 세워야 한다고 고백합니다.
요새는 견고한 방어시설입니다. 옛날엔 성마다 성벽을 쌓아 그 성 자체를 요새화했습니다. 그렇게 적들의 침략을 막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자기 삶과 인생과 나라의 요새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언제나 여호와를 자신의 요새라고 찬양했습니다. 여호와를 나의 요새로 삼으면 흙이나 돌로 세운 요새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천연 요새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적의 화력이나 도발도 뚫을 수 없는 완벽한 요새가 여호와이십니다.
방패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방패가 되시면 그 어떤 무기도 뚫지 못합니다. 주님이 방패가 되셔서 적들의 도발을 막아주시면 우리 신변이 안전합니다. 다윗은 여호와가 자신의 방패라고 자주 고백합니다. 다윗처럼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원의 뿔입니다. 성경에서 뿔은 언제나 힘과 권위를 상징합니다. 여호와가 모든 권세를 압도하는 위력과 권위로 나를 지킨다는 것입니다. 코뿔소의 뿔은 맹수들도 두려워합니다. 여호와가 나의 뿔이 되시면, 여호와를 내 구원의 뿔로 삼으면, 그 누구도 그 뿔이 무서워 내게 범접하지 못합니다. 여호와가 나의 구원을 보장하고 지키시는 뿔입니다. 여호와가 나의 뿔이라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아무도 나를 해치거나, 그 어떤 적도 내 구원을 손상시킬 수 없습니다.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그의 목을 베고, 수많은 전쟁에서 백전백승한 다윗도 여호와가 나의 구원의 뿔이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의 높은 망대입니다. 망대는 높은 곳에서 적의 동태나 전방의 상황을 관측하는 초소입니다. 파숫꾼이 망대에서 적의 상황을 예의 주시하는 것은 나라의 안보에 중요합니다. 그래서 망대는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호와가 우리의 높은 망대시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나로 하여금 사전에 적의 동향이나 위기를 깨닫고 그에 대처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적의 공격을 무방비로 당하면 그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런데 여호와가 망대가 되셔서 적의 공격을 감시하고 대비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나의 피난처입니다. 핵이나 생화학전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대피처가 있다고 합니다만, 이 세상에 완전하고도 완벽한 대피처가 있을 수 있을까요? 여호와가 피난처이시기에 그 날개 아래 숨으면 누구도 거기까지 추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완벽한 도피처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자신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다양한 방어기제로 규정했습니다. 우리가 남을 해쳐서 승리하는 게 아니라 적들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지킴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은혜와 복을 여호와가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보장하신다는 뜻에서 다윗은 여러 가지 방어기제를 동원해 여호와를 규정하고 고백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호와야 말로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이십니다(3절 하반절). 여호와가 무엇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보호하시며 구원하신다는 것입니까? 3절 하반절을 보면 나를 세상의 폭력으로부터 지키고 보호하십니다. 5절을 보면 사망의 물결과 불의의 창수로부터 나를 지키고 보호하십니다. 6절을 보면 스올의 줄, 사망의 올무로부터 보호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7절입니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4절도 보십시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받으리로다” 여호와가 나의 원수와 세상의 폭력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구원하시는 것은 거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여호와께 구원을 호소할 때 이뤄집니다. 여호와는 분명 나의 구원자이시지만, 내가 그분께 내 사정을 아뢸 때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들으십니까? 성전입니다. 주의 전에서 부르짖음으로 주의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복 있는 성도가 됩시다.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삼하 22장 1-25절 / 코너스톤장로교회
오늘 본문은 시편 18편과 그 내용이 동일합니다. 다윗은 그를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니 다윗이 하나님을 “나의 반석”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The LORD is my rock” 다윗은 그를 죽이고자 추적해 오는 사울 왕과 군대를 피하기 위해 유대 지역의 동굴과 험준한 바위산에 숨어야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바위 즉 안전을 제공하시는 분으로 비유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폭풍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반석이 되사 주님의 성도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여 주십니다. 인생의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습니까? 사람들의 비방이 여러분을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영원한 반석 되시는 하나님께 피해 숨으십시오. 우리 영혼은 주님 안에서 안전합니다.
이어서 2절에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원수와 대적들이 우리를 거의 사로잡을 것 같은 지경에 이르면, 하나님은 주님의 권능의 손, 구원의 손으로 대적들을 막아 주시고, 주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지금 이 순간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어떻게 건져 주셨는지 돌아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감사를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3절 보십시오. 여기 다윗은 다시 한번 여호와를 가리켜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반석이시며 곧 내가 피난처 삼을 반석 되신다는 것입니다. 산 좋아하시는 분은 커다란 바위를 본 적 있으실 겁니다. 아무리 힘 센 사람이 전력을 다해 밀어도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바위 위에 올라서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밀어내려고 해도 바위가 움직이지 않는 한 우리도 거뜬히 버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동하지 않으시는 만세 반석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든든한 반석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원수들의 공격과 폭풍우 같은 인생의 어려움이 닥쳐올 때 반석 되시는 주님을 피난처 삼아 피해야 합니다. 영원한 반석 되시는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쓰러지지 않습니다.
3절을 또 이어서 봅시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방패”라고 고백합니다. 방패는 무엇에 쓰이는 물건입니까? 원수들이 나를 향해 쏘는 화살과 찌르는 칼을 막아 주며, 전쟁의 때에 나를 보호해 주는 물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영혼을 원수들의 칼과 같은 혀와 독이 묻은 화살 같은 비방과 모욕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아무리 원수들이 우리를 욕하고 조롱해도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니 우리 영혼은 안전합니다. 3절 중간에 보시면 다윗이 하나님을 가리켜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라고 고백합니다. 뿔은 승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원수들을 땅에 굴복시키고, 승리케 하신다는 뜻입니다. 3절 후반절에 보면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모든 원수들의 폭력으로부터 하나님은 다윗을 보호해 주셨고, 원수들을 굴복시키시고, 다윗에게 승리케 하셨습니다.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삼하 22:4, 개정)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받으리로다” 다윗은 이전부터 지금까지 원수들의 손에서 그를 구원해 주시고 건지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모든 환난과 다툼에서 그를 구원해 주실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믿음으로 여호와께 즐거운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여호와의 도우심을 믿는 자는 다윗처럼 하나님께 노래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슬퍼하고 의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믿음이 굳건했습니다. 그는 전투 중에도 노래하며 승리하였습니다. 지난 날 과거에도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했던 다윗은 날마다 새로운 주님의 구원을 체험하고 있었고, 또 앞으로도 닥칠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신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복된 삶입니까?
5절을 봅시다.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다윗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태평양 한 가운데도 폭풍우가 몰아쳐서 우리가 타고 있던 배가 깨어지고, 큰 파도에 밀려 암초에 걸렸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 얼마나 두려운 상황입니까? 이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서 죽음이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다윗을 삼키려 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분명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으나, 이처럼 그에게도 슬프고 어려운 곤경이 찾아왔습니다. 5절 이어서 봅시다.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의롭지 못한 자들이 마치 파도처럼 몰려와서 다윗을 덮었습니다. 그들이 경건한 다윗을 비웃고 멸시했습니다. 다윗의 소망이 끊어지는 듯했습니다. 거인 골리앗을 죽였던 영웅 다윗도 그들을 두려워했습니다.
6절 봅시다.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지옥에서 다윗을 잡으려 사방에서 포위망을 좁혀 오는 듯, 다윗은 두려워했습니다. 도망갈 길은 다 막혀 버렸습니다. 6절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교활한 자들이 친 그물과 같은 올가미가 다윗을 덮었습니다. 그는 꼼짝 없이 포로로 잡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은 죽음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자 바로 이 때가 중요합니다. 다윗이 이 위기의 때에 어떻게 행동합니까? 7절 읽겠습니다. “(삼하 22:7, 개정)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다윗이 환난 중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오늘날로 말하면 무엇 한 것입니까? 기도한 거죠.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살려 달라고,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요청한 것입니다. 사방에 적군이 둘러싸고 포위망을 좁혀와도 하늘은 여전히 열려 있었습니다.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7절 말씀 보십시오.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다윗은 들렸다는 표현을 2번이나 반복해서 사용함으로써 그 때 자신이 느꼈던 그 희열과 감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언제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어떤 괴로움이 우리를 덮쳐와도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죽음의 물결이 폭우처럼 몰아치고, 지옥의 개들이 우리를 향해 짖어 대도, 우리 성도들의 기도가 약하여 신음처럼 희미해도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십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우리의 부르짖는 소리는 하나님 앞에 바로 다다릅니다. 7절 마지막 후반절 다시 보십시오.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누군가가 하나님께 대신 전달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끈기 있게 주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자, 이제 8-15절까지는 어떤 내용입니까? 하나님께서 강림하사 친히 다윗의 원수들을 멸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오시니 땅이 진동하고 떱니다. 하늘이 요동하고 흔들립니다. 14-15절 봅시다. “(삼하 22:14, 개정)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우렛소리를 내시며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심이여 (삼하 22:15, 개정) 화살을 날려 그들을 흩으시며 번개로 무찌르셨도다” 다윗을 죽이려고 달려들던 그의 원수들을 누가 친히 무찌르셨습니까? 여호와께서, 직접 화살을 날려 그들을 흩으시고, 번개로 무찌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쏘시는 화살은 백발백중입니다. 그의 화살은 번개처럼 날라가 죄인들과 악인들을 영원한 심판으로 끌어 가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반석 되심을 믿음으로 고백하십니까? 원수들이 우리를 짓밟으려고 달려와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악인들의 칼과 같은 혀와 활과 같은 입술을 염려하지 마십시오. 폭풍우와 같은 어려움에도 우리의 피할 영원한 반석 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반석
삼하 22:1-7 / 이국진목사
사무엘하 22장의 말씀은 시편 18편의 말씀과 똑같은 내용의 말씀입니다. 시편 18편에 다윗이 쓴 시로서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 오늘 사무엘하 22장의 말씀 가운데 그대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사무엘하의 말씀을 살펴볼 때, 사무엘하의 그 내용 전체가 다윗이 어떻게 지내왔는지, 다윗에게 어떠한 사건들이 있었는지, 다윗의 삶에 대해서, 다윗의 경험과 여러 가지 모습들에 대해서 서술해 준 것이 지금까지 사무엘하의 내용이었다고 한다면, 오늘 22장에서는 직접 그 다윗이 노래했던 그 노래가, 다윗의 노래가 여기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여러 시편을 만들었는데요. 여러 시를 많이 썼는데, 시(詩)라고 하는 것은 참 그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드러내는 아주 좋은 도구가 됩니다. 우리가 멋진 경치를 바라보았을 때, 혹은 어떤 즐거운 일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즐거움이 어떻게 완성될 수 있는가? 그냥 보고 좋다. 어떤 음식을 맛보고, “맛있었다.” 그리고 어떤 기쁜 일을 맛보고, 경험하고 “기뻤다.” 하는 것으로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시로 표현하고, 노래로 표현하고, 또는 여러 가지 사람들에게 말을 함으로써, 그 기쁨이 배가 되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저 천상에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되었을 때, 천국에서 있을 일들을 성경에서는 묘사하기를 어떻게 묘사하냐면, 천성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영원히 계속될 거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찬송가를 지겹게 계속 끊임없이 무한 반복해서 부른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라, 천국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좋고, 너무나도 흥분이 되고 너무나도 기뻐서, 매일매일 경험하는 것을 찬양하고, 노래하고, 또 노래해도 영원히 그 기쁨이 완전히 다 표현될 수 없는, 그래서 날마다 기쁨을 표현해야만, 하는 그 상태가 최고로 완벽한 상태가 영원히 계속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저 천성에서는 찬양이 끊이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삶을 살아오는 가운데, 그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어요.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터널도 지나고, 정말 고통스러운 상황도 만났고 그랬지만, 그런 과정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그 다윗의 마음속에 있는 기쁨의 내용들이 그냥 가만히 잠잠히 있을 수가 없고, 그 마음 가운데 기쁨이 솟구쳐 올라서, 그래서 찬양으로, 노래로 시로 표현이 되는 것이고, 이 시편 가운데 다윗의 시가 많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그 다윗이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 그 기쁨과 감격들이 참 많았다고 하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가운데, 그 기쁨을, 그리고 그 감격들을 시로 게 쓰게 되었는데요. 오늘 기록된 이 말씀은 다윗이 언제 정확하게 썼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1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원해 주셨을 때, 모든 원수의 손에서부터, 그리고 사울의 손에서부터 이제 다윗을 구해내신 바로 그날에, 다윗이 기쁨 가운데서 이 시를 썼다고 기록하고 있으니까, 아마도 이 시편은 비교적 다윗의 말년 즈음에 기록한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다윗의 삶을 살펴본다고 한다면, 다윗의 삶 가운데는 수많은 위기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저 편하고 아름다운 꽃길만 걸어간 사람이 아니죠.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삶과 똑같아요. 우리가 당하던 그 고통, 그리고 우리가 아픈 그 아픔, 그리고 우리가 겪어야만 했던 그 배신의 아픔들, 여러 가지 고통들을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때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돌을 던지는 가운데 무서워 떨기도 했었고, 또는 많은 사람들이 배신하는 가운데 외로움을 느낄 수도 있었고, 그런 수많은 고통과 아픔들이 다윗에게 전혀 없고 그냥 꽃길만 걸어간 것이 아니라, 다윗도 우리처럼 힘들고 어려운 삶을 걸어갔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압니다.
그런 위기의 순간들을 걸어갈 때, 그때에는 참 감사의 표현이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반석”이라고 하는 그런 고백들이 나오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특별히 아무런 이유 없이 고난을 당해야만 하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그리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잘 되는 그 모습들을 옆에서 지켜봐야만 하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는 찬송이 흘러나오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다윗의 인생의 마지막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원수들을 하나씩 둘씩 다 정리해 주었을 때, 그래서 이제는 자신을 죽이려던 그 사울도 사라지게 됐고, 그리고 블레셋의 위험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건져주셨고, 그리고 압살롬의 칼에서부터 다윗을 건져주시고, 세바의 반란으로부터 다윗을 건져준, 그 인생의 마지막 즈음에, 자신의 그 옛날 과거를 한번 돌아보게 될 때 자기가 정말 위험한 그 길을 인생의 길을 걸어왔는데, 그 인생의 힘들고 어려운 길, 사망의 음침한 길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힘들었던 길들을 걸어왔지만, 그것이 외롭고 쓸쓸하게 그냥 나 혼자 분투한 삶이 아니라, 사실은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고, 그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보호해 주셨고,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해 주셔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 다윗의 고백 가운데 오늘 이 고백이 등장하게 된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의 고백을 살펴볼 수가 있는데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 오늘 본문에 기록돼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라. 여호와는 나의 요새시라. 나를 건지시는 자이시고, 내가 피할 반석이시고, 나의 방패가 되시며, 구원의 뿔이 되시고, 높은 망대가 되시고, 또한 피난처가 되시고, 나의 구원자가 되신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모든 비유들, 메타포(metaphor)들은 다윗이 어려운 그런 상황 가운데 처해 있을 때, 다윗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그런 메타포들을, 그 비유들을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반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반석, 커다란 돌, 그 커다란 돌이라고 하는 것은 적군으로부터 화살이 날아올 때에 그 반석 밑으로 그 뒤로 숨어버리면, 아무리 센 화살이 날아온다고 할지라도, 그 화살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반석일 텐데, 하나님이 내게 어떤 하나님이었는가? 나를 보호해 주시는 반석과 같고, 하나님은 나를 지켜주시는 방패와 같은 하나님, 그 힘든 고난의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지켜 보호해 주셔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이 오늘 성경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동안 다윗에게는 수많은 적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다윗은 적을 만들기를 원했던 사람이 아니라, 가능하면 적을 만들기를 원치 아니하였고, 자신을 적으로 삼는 사람들도 용서하면서, 그리고 그 적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함께 일하기를 원하고, 함께 동료가 되기를 원했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지만, 아무리 다윗이 그렇게 마음을 먹는다고 할지라도, 다윗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그 사람들을 어찌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원수들 앞에서 다윗의 목숨은 이제 풍전등화와 같이, 이제 까딱하면 이제 그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는 그런 아주 위험한 가운데 있었는데, 지금까지 수많은 인생을 살아오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매 순간순간마다 지켜주시고, 사울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지만, 블레셋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던 그 공격을 멈추고, 할 수 없이 블레셋과 싸우러 가야만 하는 그런 상황을 통해서 구해주셨던 그 하나님,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쫓아왔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 사울을 동굴로 집어넣으셔서, 오히려 전세를 역전시켜주신 그 하나님, 저 블레셋 사람들을, 그냥 그 다윗의 군사들과 더불어서 물리칠 수 있도록 해 주셨던 그 하나님, 그 하나하나 생각해 본다고 한다면 지금까지 내가 이렇게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이 내가 능력이 있고, 내가 힘이 있고,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셨고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자이셨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감사하면서 이런 노래를 부르게 된 줄로 믿습니다.
아마 다윗은 그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는 이렇게 고백하기가 정말 어려웠을 겁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쓴 시편을 보면 늘 감사와 찬송의 시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하나님 앞에 항의하는 시도 있었습니다. 그 항의하는 시가 뭡니까? “하나님, 도대체 언제까지입니까?”라고 하는 시가 있어요. “하나님, 언제까지 그냥 내버려 두십니까? 왜 저 악인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엉망진창으로 돌아가게 만드시고, 그것을 해결하지 않고 계십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울부짖는 시들도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그 고난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는, 정말 하나님이 나의 보호자이시라고,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자라고 고백하기가 정말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결국은 다 그 모든 과정을 다 지난 다음에 되돌아보면, “하나님께서 다 보호해 주셨구나.” “정말 위기 가운데서도” 위기가 없었으면 좋았을 뻔했지만, 위기가 있었어도, 그 위기가 나를 완전히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셨다”라고 하는 사실을 고백할 수가 있었는데, 이 모습을 보면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고난의 터널을 지날 때 절망할 것이 아니라, 이 고난의 터널을 지나고 나면, “우리도 다윗처럼 고백할 수 있겠구나.”라고 하는 그 사실을 미리 바라볼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 어려움을 겪을 때, 지금 당장 힘든 일을 만나게 될 때는, 이런 고백이 나오기가 힘들지만, 그러나 결국은 이 고백이 나오게 돼 있어요. 결국은 마지막이 우리가 망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우리의 생사와 복을 주관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결국은 모든 것들을 하나씩 둘씩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을 통해서, 그래서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마지막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고난의 길을 간다고 할지라도, 그 순간에 그 하나님을 향해서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라. 여호와는 나의 요새시라. 구원자이시라. 피난처시라.”라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결단들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28절부터 31절의 말씀 가운데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이 말씀은 복음을 전하러 가는 제자들을 향해서 주신 말씀인데,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러 가는 그 길이 평탄하고 정말 순조롭게 모든 일들이 진행되지 않을 거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주신 말씀입니다. 복음을 전하러 가는 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우리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마치 우리가 양이 이리들 사이에 들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위험한 일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주님께서 설명하신 후에 하신 말씀,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런데 그런데 너희들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저 무리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지켜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만 떨어지는 것이고, 그 어떤 일이 발생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손 놓고 계셔서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섭리하시는 가운데 결국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그 과정 가운데 우리에게 해 주시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몸은 죽일 수 있어도 목숨을 죽일 수 없는 그런 이 세상의 것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로지 몸과 영혼을 한꺼번에 면하실 수 있는 그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서는 것이 우리들이 가져야 될 마땅한 자세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말씀이 있다고 한다면 로마서 8장 35절의 말씀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란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부터 끊을 수가 없다.”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서 8장 38절 39절의 말씀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무슨 일을 만나든지 늘 감사하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오. 반석이시고, 또한 나의 피난처”시라고 하는 사실을 날마다 고백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은 사무엘하 22장 7절 말씀 가운데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환란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며,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다윗은 과거를 회상하면서 노래하기를 뭐라고 회고하고 있습니까? 내가 옛날에 어려운 일을 당했었는데, 환란을 당했었는데, 그 환란 가운데 내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내 소리를 들으셨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환란을 만난다고 한다면 가만히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며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하는데요. 부르짖는 것이 곧 하나님을 찾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겁니다. 이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기회가 되는 것인데, 그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아가 또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는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특별히 예레미야서 33장 2절 3절 말씀에,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되,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크고 놀라운 일을 베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왜 부르짖어야 합니까? 부르짖지 않으면 그냥 우연이 된 줄 알아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야 되는데요. 사실 문제가 해결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나아가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생생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들은 지금 제일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냐면,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하나님 이 문제만 좀 해결해 주세요. 이것 좀 어떻게 좀 해주세요라고 그 문제 해결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문제 해결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걸 통하여서 하나님과의 생생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에게 나가서 하나님의 자녀 됨을 보여주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엄청난 큰 축복의 기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고통의 기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더욱더 잘 만날 수 있는 기간이고, 그리고 그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부르짖으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다윗이 부르짖었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다윗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7절 말씀. 이 표현이 아주 좀 특이한데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 그냥 들으셨다고 표현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들으셨다고요? 성전에서 듣으셨다고 하는 겁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들으셨다고 하는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성전에서 들으시니까, 우리가 성전에 가서 기도해야, 우리가 다른 곳에서 기도하는 것보다, 성전에 나와서 기도해야 더 잘 하나님께서 들으신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예배당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은 아주 현명한 선택입니다. 우리가 다른 곳에서는 참 하나님 앞에 집중해서 온전히 기도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일상의 삶 가운데서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그래도 장소를 옮겨서 퇴근하는 길에 혹은 출근하는 길에, 혹은 따로 시간을 내서 교회에 들러서 기도하는 시간을 조용히 갖는다고 한다면, 다른 것에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런 유익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분들이 몇 분 계시고, 또 여러분들 가운데 앞으로 또 그렇게 하실 분이 계시다고 한다면 충분히 안내해 드려서 그렇게 하는 것을 도와드리려고 합니다. 기도를 함에 있어서 예배당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은 어쩌면 현명한 선택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는 것은 꼭 예배당에 와야만 하나님께서 기도를 받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이 기도할 때 성전에서 하나님께서 들으셨다고 하는 그런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영이신 하나님이시잖아요? 영이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디에서 기도하든지,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시고, 우리가 정말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면 항상 들으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기도해야 할 겁니다.
요한복음 4장 23절 24절의 말씀에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은 육신을 가지고 있어서, 한 곳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디든지 계시므로, 영으로 어디서든지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만나주시겠다고 하는 그런 말씀이거든요.
그런데 왜 오늘 다윗은 하나님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들으셨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는 장소가 성전이라고들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기가 기도를 했는데 어디서 기도했어요? 성전에서 기도했겠습니까?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기도했겠습니까? 다윗이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윗이 기도한 거예요. 그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할 수 있는, 기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다윗은 지금 도망자 신세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어디서 기도해야 되느냐? 저 전쟁터에서 기도해야 되는 거예요. 다윗은 어디서 기도해야 되는가? 저 블레셋 사람들 사이에서 기도를 해야 되는 거예요. 다윗이 성전에서 기도하지 못하고 어디서 기도해야 됩니까? 아둘람 굴 속에서 기도해야 되는 그런 상황을 맞이하게 되고, 성전에 갈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성전에서 만나주시겠다고 구약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나는 성전에 갈 수 없지만, 성전에서부터 멀리 떨어져서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성전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내 기도를 들으셨다. 성전에만 계신 줄 알았는데, 성전에 계신 하나님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성전 멀리 떨어져 있는 내 기도를 들으셨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성전에만 계신 줄 알았던 그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다고 고백하는 표현이 하나님께서 내게 성전에서 들으셨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영이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면 부르는 그 순간에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거죠. 아주 긴박한 그 순간에 결국은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며, 내가 교회에 와야만 성전에 와야만 그래야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거예요.
119 응급대원들이 이렇게 반응을 하는데요. 이렇게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고 심장마비로 쓰러진 사람들이 있으면 심폐소생술을 해야 된다고 하잖아요? 심폐소생술을 해야 되는데, 소방서에서 근무한 우리 윤석진 선생님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무슨 얘기를 하냐면 이렇게 심장마비로 쓰러지게 되면 대부분의 경우는 그냥 사망으로 연결이 된다는 거예요. 정말 예외적인 케이스 몇몇 케이스만 살아나는데, 그 경우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아나는가? 바로 쓰러졌을 때 그 옆에서 심폐소생술을 하기 시작해가지고, 심폐소생술을 제대로 하면 그나마 생명을 건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거예요. 심폐소생술을 하면 5cm씩 이상 들어가게 심폐소생술을 해야 되는데, 119 구급대원들이 아무리 빨리 도착해도, 5분 넘어가고 6분 넘어가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심장이 멈춰져 있으면 구급대원들이 와서 데리고 가도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저 성전에만 계셔서 우리가 힘드는데, 여기서 “하나님, 좀 도와주세요.” 했을 때 하나님께서 5분 10분 걸려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계시든지 응답해 주실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놀라운 은혜라는 것이에요. 영적인 소생술을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해 주시기 때문인 것이죠.
이 세상의 종교는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이 세상의 종교는 어떤 어떤 특정 장소에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대구의 팔공산에 갓바위에 올라가서 거기서 빌어야 대학 합격을 한다고 하니까, 그 학부모들이 집에서부터 버스를 타고 산에 올라가서 저 산 꼭대기에서 추운 날씨에 빌고 있는 그걸 통해서 그렇게 빌어야 된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거기까지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 자리에서 기도하면 내가 들으시겠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이 은혜의 하나님인 줄로 믿습니다.
많은 분들이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왜 내 기도는 하나님께서 안 들으십니까? 사실 그 질문은 우리만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다윗도 던졌던 질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왜 기도를 안 들으십니까? 어느 때까지 그냥 내버려 두십니까? 악인이 판치고 있는 것을 어느 때까지입니까? 그렇게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이 없는 것 같아서, 그렇게 울부짖었던 다윗인데, 그런데 나중에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보니까, 하나님께서 안 계셨던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듣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신실한 반석 이시오. 피난처이시고 망대시고 구원자이셨다고 하는 사실을 고백하는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그 끝이 안 보인다고 해서 불안해할 것이 아니라, 항상 귀 기울이며 들어주시는 그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실 우리가 던져야 될 질문은 그런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왜 나 같은 사람의 기도도 들어주실까?”를 질문해야 돼요. 아무도 그 질문은 잘 안 던져요. 하나님이 왜 우리의 기도를 들어줘야 되는 거죠? 우리에게 뭐가 아쉬워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줘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 우리가 맡겨놓은 게 있나요? 늘 하나님을 배반하고 살았던 우리들의 모습, 늘 죄악의 길로 가던 우리들의 모습,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내치고 지옥불로 떨어뜨려도 아무런 항거할 수 없이 쓰러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이유는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셔서,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절규를 외면하신 것이죠. 우리의 요청을 듣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울부짖음을 외면하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신 그 주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직 하나님(Only God)
삼하 22:1-7 / 오재현 목사
1. 다윗은 성경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성공인물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다윗이 인생의 말년에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 나를 도와주신 하나님, 나를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 시입니다. 시편 18편과 거의 같습니다만, 조금 다른 부분은 오늘 본문이 원본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다윗은 어린시절에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적장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했습니다. 그 때부터, 다윗의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성공의 길에 들어선 듯 싶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인기 때문에 사울왕으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아 왕의 칼날을 피해다니는 신세로 전락해버렸습니다. 1,2년이 아닌 10여년을 메마른 사막에서 이리 저리 방랑하며 수배생활을 한 것입니다. 20대의 젊음을 고스란히 방랑생활에 바친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다윗은 인격과 실력을 겸비한 사람, 성공하는 사람으로 다듬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도우셔서 축복의 길이 열리나 싶었는데, 그것 때문에 도리어 가시밭길을 걷게 된 셈입니다. 그런데, 이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도와주셨습니다. 모든 시련의 과정을 다 통과하고 나서 드디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성공한 셈입니다. 광야는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공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다윗은 성공하여 편안하게 생활하다가 넘어집니다. 실패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을 갖고 나아가 철저하게 회개합니다. 용서받습니다. 그는 실패를 딛고 일어섭니다.
자신의 실패 때문에 고생 많이 합니다. 아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다윗은 왕궁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아버지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아들 압살롬, 그는 결국 전쟁터에서 다윗의 부하에 의해 죽습니다. 불효막심한 자식을 보고 통곡하는 다윗, 여기에서 부모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압살롬같은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다시 왕궁으로 돌아와서 말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다윗은 이제 그가 걸어온 인생 전체를 돌아보며, 시련 가운데서 그와 함께 하신 하나님, 생의 위기에서 그를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시를 지었습니다.
2.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다윗의 성공 이면에는 다윗을 성공하게 만든 절대적인 힘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3절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
다윗으로 하여금 승리하게 만드신 절대적인 힘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다윗의 인생 이면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여기 볼펜과 얇은 종이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얇은 종이와 같습니다. 쉬 찢어지고 깨어집니다. 그러나, 이 얇은 종이 뒤에 튼튼한 나무판이 있으면, 아무리 찔러도 찢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확실한 후원자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든든한 빽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시련을 당하여도 넘어지거나 찢어지지 않습니다. 망하지 않습니다.
고후4:8,9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왜요?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 되시고,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가정은 다윗의 실수로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다윗의 아들 암논이 이복 여동생 다말을 강간하고, 여동생이 당한 모욕을 복수하기 위하여 다말의 친오빠 압살롬이 이복형 암논을 쳐죽이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뿐 아니라,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하였고, 아버지의 심장에 칼을 겨누었던 것입니다.
그 뿐아니라, 다윗은 사울왕의 칼을 피하여 10여년간 도피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5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그러나, 다윗은 결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망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일어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극복해냅니다.
이런 일이 우리의 가정에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형제들끼리 칼부림이 일어나고,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려 하고, 부부간에 원수같이 지내는 일들 말입니다. 이 때, 우리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앞이 캄캄합니다. 그만 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죽을 맛입니다.
그러나,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것 때문에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일어서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으로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3. 이럴 때, 다윗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7절입니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다윗은 죽게 될 지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구원하여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분, 나의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피난처,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는 성도의 무기입니다. 난관을 뚫고 나가는 무기입니다.
기도는 사탄을 무찌르는 무기입니다.
기도는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는 길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였습니다.
모세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어놓았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지만, 그가 기도하였을 때,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에서 비를 내렸습니다.
여호사밧의 기도는 적군을 물리쳤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생명을 15년 연장받는 복을 받았습니다.
베드로의 기도는 죽은 다비다를 살렸습니다.
바울의 기도는 각색 병자들을 낫게하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기도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지난 주 금요일 오후에 고 이성희 성도 입관예식을 집례하고 교회로 돌아왔는데, 이상하게 무기력하고 노곤한 것입니다. 금요기도회 설교 준비를 해야 하는데, 도무지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힘들게 설교 원고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금요기도회에 나가서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제게 힘을 주시옵소서. 이상하게 무기력합니다. 지쳐있습니다. 새 힘을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고 설교단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설교를 하는데 힘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생겨나는지, 언제 무기력했는지도 모르게 무력감이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서 말씀을 잘 전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힘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기도는 나의 힘이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 고 바울 사도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늘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사십시오.
4. 환난을 당할 때, 기도한 다윗은 도우시는 하나님,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이 곧 나의 하나님임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2-3절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자,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높은 망대, 나의 피난처, 나의 구원자,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
"나의, 나를" 이 11번 나옵니다. 하나님은 막연한 분이 아니요, 삶에서 직접 체험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내 삶에 직접 간섭하셔서 나를 위하여 일하시는 분, 나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체험할 때, 우리의 신앙은 더욱 든든해집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직장에서 내 고민을 들어주시는 하나님, 내 건강을 지켜주시는 하나님, 내 마음에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 내 외로움을 달래주시는 하나님.
5.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면에서 여러분은 이미 인생에 성공하신 분들입니다.
무슨 말을 하십니까? 나는 아직 가난한데, 아직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공부도 제대로 못했는데, 좋은 직장에 다니지도 못한데, 회사에서 말단 사원인데, 무슨 성공입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딸입니다.
우리는 왕의 자녀들입니다. 왕자요, 공주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땅을 다스릴 왕자요 공주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습니다.
어느 임금님이 다리 밑을 지나가다가 다리 밑에서 생활하는 거지가 불쌍했습니다. 거지를 왕궁으로 데려와서 왕자가 될 것을 제의했습니다. 거지는 그 제의를 받아들여 공적으로 왕자가 되는 법적 절차를 밟았습니다. 임금님은 그를 목욕시키고, 왕자의 옷을 입히고, 왕자의관을 씌우고 그날부터 자기와 함께 살게 했습니다.
거지가 왕자가 된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제의를 받아들여 법적으로 서명하고 공적으로 선언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너는 내 백성이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아들 딸이요, 나는 너의 아버지이다."
이사야 43:4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정도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 아닙니까? 성공한 사람들 아닙니까?
우리 인생의 성공, 행복, 승리는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노아처럼,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반드시 성공하기 마련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성공적인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엘리야처럼, 모세처럼, 다윗처럼, 바울처럼 기도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있는 그리스도인, 성공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후일에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며, 우리를 성공하게 하신 하나님,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돌리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삼하 22:1-7 / 은혜교회 이승재 목사
후회 없는 삶을 위한 30일간의 영적여정이 매일 새벽시간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새벽시간은 당신의 영혼에 불을 지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사무엘하 22장에 기록된 다윗의 노래는 시편 18편과 그 내용이 같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신앙고백(2-3절)과 기도(4-7절)입니다. 우리는 신앙고백과 기도의 중요성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기도에는 반드시 대상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기도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1. 다윗의 신앙고백입니다.
2~3절에 나타난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피난처 신앙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가리켜 나의 반석, 나의 요새, 피할 바위, 나의 방패, 피난처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이 그를 죽이기 위해 추격해 올 때 이곳저곳으로 피난 생활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때 그는 반석 뒤에 숨어보기도 하였고, 요새에 은신하기도 하였고, 바위굴 속에 숨어보았기에 그런 경험들이 지금 생각납니다. 지금 하나님은 그에게 그 어떤 경험보다 너무나 크신 피난처로 고백합니다.
둘째로 구원자 신앙입니다. 다윗은 2~4절 사이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 나의 구원의 뿔, 나의 구원자”라고 불렀습니다. 여기 중요한 것은 “나의 구원자”라는 고백입니다. 고백은 대상도 명확해야 하고, 내용도 선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자기 고백일 때 힘이 있습니다.
2. 다윗의 기도
이미 말씀드린 대로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다윗은 계속하여 기도의 때와, 기도의 장소, 그리고 기도의 방법을 본문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① 기도의 때
언제 기도했는가 하는 것이 5~7절에서 밝혀져 있습니다. 그 때는 “사망의 물결이 에워쌀 때, 불의의 창수가 두렵게 밀려올 때, 음부의 줄과 사망의 올무가 다가올 때, 그리고 환난이 다가올 때”라고 다윗은 고백합니다. 한마디로 다윗의 밝힌 기도의 때는 문제가 있고, 고통이 있고, 시련이 있고, 환난이 다가올 때 입니다.
② 기도의 장소
7절 하반절을 보면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라고 했습니다. “그 전에서”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 전”은 성전을 의미합니다. 성전은 기도의 중심지였고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우리 주님도 마가복음 11:17에서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③ 기도의 방법
본문 4절에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라고 하였고, 7절 상반절에서는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라고 하였고, 7절 하반절에서는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기도의 방법은 다시 두 가지로 정리됩니다. 그것은 아뢴다는 것과 부르짖는다는 것입니다. 아룀은 자상하게 구체적으로 말씀드린다는 것이고, 부르짖는다는 것은 최선을 다하여 온 몸과 마음으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