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검은 건 (외 2편)
주민현
밤에는 자신을 구별하기가 힘들어지고 서로의 실루엣을 가볍게 통과하고
밤이 검은 건 우리가 서로를 마주 봐야 하는 이유야
어둠 속에서 이야기는 생겨나고 종이 한장의 무게란 거의 눈송이 하나만큼의 무게이겠으나
무수한 이야기를 싣고 달리는 선로만큼 납작하고 가슴을 가볍게 누르는 중력만큼이나 힘센 것
한 장의 종이는 이혼을 선언하는 종지부이거나 사망신고서 찢어버린 편지이기도 하지
내가 한 장의 종이를 들고 전봇대 위로 올라가 홀로 전기를 만지던 당신의 손을 붙잡는다면
백만 볼트의 전기가 흘러 당신의 입술과 함께 덜덜 떨리면 세상이 몹시 외롭고 이상한 별처럼 보이겠지
아주 깜깜한 밤은 검은색으로만 이루어진 외딴 우주 같아
하지만 밤을 뒤집어보면 무수히 많은 빛들의 땅으로 이루어져 있고
밤과 새벽 사이 무수한 빛의 스펙트럼을 밟고 오늘도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무겁다지만 이야기를 품은 인간의 무게만 할까,
어떤 종이에는 불법 점거의 위법 사항이나 파산에 대한 위협적인 말들이 적혀 있고
법률 서적을 성실히 교정보는 오후에
위법과 과실에 대해, 어떤 치사량에 대해 세상은 명료히 말할 수 있는 것을 사랑하지
그러나 낮과 밤 그 사이 시간에는 이름이 없고 떠난 사람의 발자취에는 무게가 없고
외주의 외주의 외주가 필요했던 치사량의 노동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홀로 이야기의 성을 맴돌며 잠들 수 없는 한 사람의 고독한 뒷모습을 떠올리며
오늘 밤에도 어떤 말들을 중얼거리고 있어.
꽃 없는 묘비 ―우크라이나에게
시간의 열차 맨 뒤칸에 서서 지나온 시절의 영사기를 돌리면
쏘아 올린 포탄에 아이들의 신발이 멀리 날아가고
산불에 집을 잃은 새들의 완전한 멸종을 슬퍼하는 이들이 저마다 작은 행진을 벌이고 있어요
이제는 작은 것을 말하고 싶어요
작은 거미가 만드는 집의 조형적인 아름다움
새가 물고 날아가는 나뭇가지의 가느다란 기쁨
번지는 저녁 빛 그림자 아래 고양이의 가르릉 이 사고뭉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없이 걸어요
도시의 호텔은 고독한 눈동자 부랑자는 끝내 들어갈 수 없는 두꺼운 질문
뒷골목에서 아동복을 파는 노점상이 옷들의 긴 첨탑을 쌓아 올리고
네 이웃을 위로하라, 맨 꼭대기의 교회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어요
개들은 아름다워요 존재의 불행을 깨무니까요
역사는 승리한 자들의 얼시든 꽃과 죽은 새와 이름 모를 당신과 걸으며 우리 가방에 달린 작은 방울이 흔들릴 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전부인 세계라 믿으면 이 지면은 평평해요
세계의 가장 사적인 얼굴을 수집하며 울퉁불퉁한 길을 함께 걸어요
나는 더 작은 집으로 이사를 준비하고 당신은 폭격을 피해 떠나고 있어요
그 나라엔 영문을 모르고 주인 곁에서 끙끙거리는 개가 있겠지요
거리엔 크고 작은 묘비들이 꽃 없이 생기고 있어요
다 먹은 옥수수와 말랑말랑한 마음 같은 것
이사 온 집에서 내려다보이는 어깨가 동그란 사람들 브뤼헐의 그림 같은 풍경 속으로
서른다섯 마흔일곱 예순의 여자들이 걸어간다 흙 대파를 사느냐 깐 대파를 사느냐
물질과 생활을 토론하면서
작고 작아져 점으로 찍힐 때까지 바라보는 여자들의 사랑과 미래
이 집엔 못 자국이 많고 있는 힘껏 매달렸던 것들의 흔적에
손가락을 대어보면
군화처럼 고독한 것 나는 천국의 모양을 걸고 싶었어
걷고 또 걸어서
걷은 것은 밤하늘의 흰 점들 걸어서 네게 주지
감각하는 만큼 세계는 출렁이고 그만큼의 세계를 알고
말하면서도 마치 다 아는 듯이
정말 다 그런 듯이 비유하고 사랑하고 이 세계를
미래에는 다 웃는 이야기들
페이지를 열고 닫고 펼치고 덮고 입술을 열었다 닫고 너의 입술이 움직이기를 기다린다
모자 속에 모자 속에 모자를 포개어놓듯이
우리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유일한 흔적의 빛 이곳의 밤은 꽤나 구불거리지
기원을 알 수 없고 우리들의 내장 속 같아
포장지 속에 포장지 속에 아주 작은 조명처럼
빛과 어둠은 이렇게나 가까이 있지만 또 이렇게나 멀리 있는 법이고
우리는 알지 마음이 얼마나 연약한가에 대해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매번 명쾌하게 물어보는 AI에게 너와 친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무릎을 꿇고 심장도 내어놓고 이윽고 우정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기까지
그런 것이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이
밥 먹고 화장실 가고 춤추고 잠자고 메타버스 안에서
석양을 보며 해류병을 던지자 매번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나의 기계 속 친구들과
꿈꾸고 말하고 웃고 듣고 꿈꾸듯이 말하고 웃고 듣고 깜깜한 어둠 속에서 동트는 아침의 빛 속에서
우리의 시력이 최대치를 발휘하고 있어 우리 몸이 꿈틀꿈틀 깨어나고 있어
우리의 기원이 마구 섞이고 사랑의 색깔과 모양을 선택할 수 있다는 듯이
미래에는
친구의 아기는 아주 작고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내고
자전거를 타는 유쾌한 마녀 이야기를 들려줄게
최초의 여성 철학자 히파티아의 이야기를 들려줄게
히파티아와 함께 세상을 바라보면
꿈꾸고 말하고 웃고 듣고꿈꾸듯이 말하고 웃고 듣고
최초의 여성 수학자 최후의 여성 철학자를 넘어서
우리가 함께 웃는다
혐오나 차별의 언덕을 간단히 넘어갈 수 있다는 듯이
미래는 아직 심어본 적 없는 문장 꿈꾸어본 적 없는 장면
그러나 늘 그려보았다는 듯이 너무 많이 상상해와서 꼭 맞는 옷처럼
우리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미래 다만 한걸음 더 걸어가보면서
―시집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 2023.07 ---------------------- 주민현 / 1989년 서울 출생. 2017년 한국경제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 『킬트, 그리고 퀼트』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 창작동인 ‘켬’으로 활동 중. |